산 증인 큰넓궤

(시)로 읽는 4․3(47)
산 증인 큰넓궤
김순선

언제 난리가 끝날지 알 수 없지만
며칠만 꼭꼭 숨어 있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오순도순 버티던 동광리 사람들

눈 녹인 물을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보지만
한숨 소리 점점 깊어지고
쉬이 새벽은 오지 않고
인심은 점점 야박하여지고

끝내, 토벌대에 추적당한
큰넓궤 사람들
토벌대 무차별 총탄 앞에
허망하게 쓰러졌다

햇빛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허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캄캄한 동굴 속에서
무참히 매장되었다
영원한 무덤 되었다
————————————————————————————
광복 직후 몇몇 지주와 관리들이 곡식을 매점매석하면서 쌀값이 폭등하자, 미군정은 공출제도를 부활시켰다. 1947년 8월 보리 공출을 독려하기 위해 관청 직원들이 동광리를 방문했다가 청년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했다. 미군정의 ‘미곡수집령’에 반대한 이 사건으로 청년 3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1948년 11월 15일 새벽, 토벌대는 주민들을 무등이왓에 집결시켰다. 마을 유지들을 추려내 밭에서 총살했다. 토벌대는 그해 12월 11일 청·장년 20여 명을 또 다시 학살했다. 큰넓궤 입구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지만 이곳을 지나면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다. 주민들은 큰넓궤로 숨어들었다. ‘궤’는 암반과 암반 사이의 공간, 천연동굴을 뜻한다. 주민 120여 명은 이곳에 은신하며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토벌대의 집요한 추적 끝에 굴 안으로 진입하자, 주민들은 이불에서 솜을 뜯어내 고춧가루를 뿌린 후 불을 붙여 매운 연기가 동굴 밖으로 나가도록 부채질을 했다. 토벌대는 굴 입구에 돌을 쌓아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은 후 철수했다. 다음날 청년들은 굴 입구에 쌓여 있는 돌을 치우고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한라산을 바라보며 무작정 산으로 들어갔다. 한라산 영실 인근 볼레오름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눈 위에 난 발자국을 보며 쫓아온 토벌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주민들은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에 있는 단추공장에 수용됐다. 주민들은 정방폭포로 끌려가 집단 총살을 당했다. 동광리 희생자는 큰넓궤에 숨어 있다가 정방폭포에서 총살당한 40여 명을 포함해 모두 153명에 이르고 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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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詩(시)로 읽는 4․3(46)

여자
문순자

지구에 오래 살면 저렇듯 둥굴어질까
온종일 해바라기 23.5도 그 만큼
어머니,
이끈 유모차
그도 슬몃 기운다

첫 남잔 징용으로 일본 간지 칠십년
두 번 짼 4․3 홧술로 세상 뜬 지 사십 년
체념도 용서도 아닌
하늘이라도 또 섬긴다

당신은 엄쟁이다
소금밭 일구던 여자
절에 가지 않아도 온몸으로 절을 한다
서너 평 돌염전에도
눈부시다 천일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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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남자는 징용으로 일본 가고, 두 번 째는 4․3홧술로 세상 뜨고, 어머니는 온몸으로 절을 하며 유모차를 끈다. 소금밭을 일구던 ‘엄쟁이’. 구엄을 비롯한 중엄과 신엄을 통틀어 속칭 ‘엄쟁이’라 한다. 소금 곧 ‘鹽’을 제조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 그만큼 마을 사람들에겐 소금을 만드는 일이 생업의 한 수단이었지만 1950년을 전후하여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구엄 포구 ‘철무지개’ 서쪽 ‘쇠머리코지’에서부터 중엄 마을과의 경계인 ‘옷여’까지가 소금밭이었다. 그 길이는 약 400m이고, 폭은 가장 넓은 곳이 50m이다. 소금밭은 공유수면상에 위치하여 지적도가 있을 수도 없지만 일정량 개인 소유가 인정되었으며, 매매도 이루어졌고 뭍의 밭에 비하여 값도 상당히 비쌌던 듯하다. 전통적인 밭나눔과 같이 4표(四標)로 구획하였다. 한 가정에 보통 20∼30평 정도의 소금밭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의 구엄리의 전체 염전 규모는 3000㎡에 가깝다. 연간 생산량은 17톤을 조금 넘겼다. 면적당 생산량은 19.4㎏으로 종달리의 3.7㎏보다 앞섰다. 일본은 많은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5월 5일부터 이를 실시하였다. 또한 1939년 국민징용령을 제정했다. 일본에 조선인 징용노무자가 파견 된 기간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3월까지 7개월간.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은 사할린 섬 등 일본의 탄광에서 노역을 당하거나 군속으로 차출되어 동남아와 남양 군도(미크로네시아) 지역의 군사 기지 건설이나 철도 공사에 동원되었다. 이중 상당수가 임금 없이 과중한 강제 노역에 시달렸으며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전쟁 중 또는 전후 전범으로 희생되었다. 해방이후는 4․3으로 영면한 사람들이 많다. 여자는 남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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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의 정치화’ 시대

‘교실의 정치화’ 시대
김관후/작가·칼럼니스트
선거 연령이 ‘만 18살’로 낮아졌다. ‘새내기 유권자’를 겨냥한 각 정당의 전략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만 18살’ 선거권은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키는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한국에서도 ‘교실의 정치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교실의 정치화는 우려할 일이 아니라 환영할 일이다. 교실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쳐야 성숙한 민주사회가 가능하다. 독일 사회가 세계에서 가장 수준 높은 정치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초등학교에서부터 정치교육, 즉 민주시민교육을 체계적으로 시행했기 때문이다.
선거권과 정당에 가입할 권리를 갖게 된 ‘만 18살’ 청소년들이 맨 처음 정의당의 정식 당원이 되었다는 소식이다. 그간 만 18세 이하 청소년들은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고, 정당 가입과 선거운동도 제한되는 등, 정치적 금치산자 취급을 받아왔다. 18세 선거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더 폭넓은 청소년 참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시발점이다.
한국 정치가 매우 낡았기 때문에 ‘만 18살’ 선거권 부여는 최소한의 조처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만 16살’까지 선거권을 부여하고, 피선거권도 20살 이하로 낮추는 노력을 21대 국회에서 기울여야 할 것이 아닌가? 이것은 너무 급진적인 생각인가? 어른들은 청소년을 미래라 부르지만, 청소년은 현재이기도 하다. 아동·청소년은 ‘보호와 배려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천부 인권의 주체로서 ‘현재의 시민(being citizen)’이다. ‘성장하는 시민(becoming citizen)’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시민’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시민이므로 당연히 시민으로 대우해야 한다. 아동·청소년 스스로 그들의 권리와 책임을 능동적,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통해, 이들이 공동체의 실질적 시민으로 성장하고 발달할 수 있는 인권 주체라는 인식도 보편화돼야 한다. 
‘정치적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은 ‘적극적 시민’이다. 이상적인 시민이 되려면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국민이 지도자를 뽑는 것은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다. 정치인을 길들이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
민주 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투표는 민주 사회의 주인이 되는 교육과 훈련이다. 우리나라에서 18세가 되면 주민등록증이 나온다. 운전면허증도 시험을 보면 발급받을 수 있다. 취직도 할 수 있다. 취직하면 세금도 내야하고. 또 18살부터 군대도 갈 수 있다. 병역의 의무, 납세의 의무, 노동의 의무, 이런 것들은 다 주면서 대표자를 뽑을 수 있는 권리인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과거 OECD나라 중에서 18세에 선거권이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했다. OECD 34개 회원국은 오스트리아(16세)를 포함해 모두 18세 아동·청소년에게 선거권을 부여하고 있다. 2016년까지 일본이 우리와 함께 19세 기준을 고집했으나, 2016년 6월 공직선거법을 개정해 18세로 낮췄다. 영국 노동당은 15세 이상이면 당원 자격을 부여한다. 정당 정치가 발달한 선진국의 예에 비추어 19세 미만의 국민을 일일이 통제하려는 ‘유모 국가(nanny state)’의 관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은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이다.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언제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를 다투고 있다. 단 한 번도 존엄한 인간으로 대우받은 적이 없다. 매년 5만~8만 명의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는 나라이다. 대한민국 100년의 과거를 돌아봐도 청소년은 행복한 적이 별로 없다.
왜 학교는 바뀌지 않았을까? 그것은 학생들에게 투표, 그 ‘종이 한 장’이 없어서이다. 정치인들은 표를 먹고 산다. 표가 없는 청소년들에 대해서는 등한시했다. 지역의 여러 가지 복지 문제가 있는데 그 중에 노인 문제나 여성 문제, 장애인 문제는 아주 빠르게 좋아지고 있다. 그런데 청소년들이 뭘 요구하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공부나 하지’ 라고 했었다. 역사적으로 일제강점기의 광주학생운동은 물론, 당시 18세 학생이었던 3·1운동의 유관순 열사를 생각해 보라. (제주일보 승인 2020.02.10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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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븐숭이 세 남매

詩(시)로 읽는 4․3(45)
너븐숭이 세 남매
오광석

세 남매와 희미해진 흔적을 따라 학교로 걷습니다 큰 아이 둘은 스마트폰 게임 얘기에 빠져있습니다 막둥이는 안아달라고 칭얼거립니다 검은 구름이 북촌 하늘을 덮을 때 세 남매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서로의 손을 잡습니다

비를 맞으며 너븐숭이로 걸었어 어린 세 남매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놓쳐 살 자리로 가지 못했지 천둥소리가 총포처럼 들렸어 우는 동생을 안고 번쩍이는 불빛에 누나는 눈을 감았지 무섭고 추운 겨울 홀로 울던 막둥이는 소나무 밑에 부들부들 떨다 누워 잠들었어

하늘에서도 같이 살라고 너븐숭이 아래에 세 남매는 나란히 누워있습니다 어미가 맨손으로 쌓은 돌무더기 위에는 말라버린 눈물자국만 패여 있습니다 가장 작은 무덤 앞에 장난감 하나 올립니다 큰 아이 둘의 표정엔 엄숙함이 담겨있습니다 가슴에 안겨 잠든 막둥이 얼굴에 웃음이 가득합니다
————————————————————————————————— 1948년 6월 우도에서 출발, 제주항으로 가던 배가 풍랑으로 북촌포구로 뱃머리를 돌렸다. 이 배에는 우도지서장과 경찰 가족 13명이 타고 있었다. 배가 포구에 접근하자 무장대가 경찰 2명을 죽였다. 1948년 12월 냉이가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낸시빌레’에선 북촌리 청년 24명이 총선거 불참을 이유로 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949년 1월 17일 아침. 구좌 세화리 주둔 2연대 3대대(대대장 정준철 소령) 중대 병력 일부가 대대본부가 있는 함덕으로 가던 중 북촌마을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2명이 숨졌다. 마을에서 군인이 사망하자 당황한 원로들은 시신을 들것에 실어 함덕 주둔부대로 찾아갔다. 군인들은 스스로 찾아간 10명의 연로한 주민 가운데 경찰가족 1명을 제외해 모두 총살해 버렸다. 이날 오전 11시쯤. 2개 소대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쳤다. 군인들은 주민들이 숨어있을 곳을 샅샅이 뒤지면서 590여 채의 가옥에 불을 질렀다. 모든 주민은 북촌초등학교로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학교운동장을 에워싼 군인들은 기관총을 세 방향에서 겨냥해 주민들의 도주를 차단했다. 한 장교가 제안을 했다. “입대한 후에도 적을 사살하지 못한 사병들이 있다. 경험도 쌓을 겸 몇 명씩 끌고나가 총살을 시키자.” 주민들은 30명씩 나눠 동쪽의 당팟밭과 오목하게 쏙 들어간 옴팡밭, 서쪽의 들녘인 너븐숭이로 끌려갔다. 학살극은 오후 4시쯤 대대장의 중지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됐다. 대대장의 명령대로 함덕 피난소로 간 100여 명 중 25명은 빨갱이 가족이라며 서우봉 인근 모래밭으로 끌려가 처형됐다. 한날한시에 남녀노소 4백여 명 이상이 한꺼번에 희생되었다. 마을 단위로도 최대 피해 마을로 기록됐다. 그날 이후 북촌리는 무남촌(無男村)이 됐다. 음력 섣달 열 여드렛날이 돌아오면 마을에선 숨죽인 곡성이 터져 나왔다. 4·3 북촌리 학살 때 숨진 어린아이들의 주검은 임시 매장한 상태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20여기의 애기무덤 중 적어도 8기 이상이 북촌리 학살 때 숨진 어린이들의 무덤이라고 한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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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바다

詩(시)로 읽는 4․3(44)

제주 바다
도종환

당신은 이곳에 오시어 꽃 피는 시절만 보고 가십니다
복숭앗빛 노을 속에 뜬 새 한 마리 기억만을 담아가십니다.
발끝 잔물을 적시며 나누던 아름다운 이야기들의
추억만으로 오늘로 또 이곳에 오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비명과 총소리 이 갯가에 가득하던 때의
저녁 비린내를 알지 못하십니다.
먹구름에 쫓겨 황급히 달아난 사람들 생각에
산 그늘진 마을 한 쪽을 모르십니다
당신은 언 발을 구르며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던
우리들 피 묻은 추억을 생각지 못하십니다

불덩이로 솟았다 지금은 가슴 곳곳 구멍이 뚫린 채 식어 있는 돌멩이들처럼
아직 우리의 가슴은 메워지지 않는 채 이 바닷가에 쓰러져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무엇이 섞어서 이곳에 꽃 한 송이를 키우는가 생각합니다
무엇이 살아 저렇게 이파리들 몸서리치게 흔들고 있는지 생각합니다
오늘도 밤새가 울어머니 내 나잇적 똑같은 소리로 우는지 생각합니다
—————————————————————————————————–
제주도 여행은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을 만나는 일이다. 다크투어리즘이란 전쟁이나 학살 등 잔혹한 사건이 일어났던 역사적 장소나 재난과 재해 현장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는 것이다. 대표적인 다크투어리즘 장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약 400만 명이 학살당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다. 사람들은 왜 가슴 아픈 역사를 기억하려 할까? 그것은 과거의 비극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하는 것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서대문 형무소도 대표적인 다크투어리즘 장소 중 하나다. 제주도는 한라산과 360여 개 오름, 신비한 용암동굴, 곡선이 이름다운 돌담, 그리고 멋진 풍격이 있는 올레 길로 인해 대개 ‘천혜의 관광지’라는 데 시선이 멈춰 있다. 하지만 제주도는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곳이 아니다. 우리 현대사의 아픈 흔적들이 있다. 아름다운 제주도, 그런 제주도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속내는 너무 처절하다. 제주섬을 찾은 관광객들은 처음 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곳이 4․3 당시 참혹한 학살터였음을 모른다. 제주도의 이름다운 풍광이 깃든 곳곳은 4․3 당시 학살터였음을 아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다. 4․3평화공원, 섯알오름학살터, 북촌너븐숭이, 표선해수욕장, 정방폭포, 제주국제공항, 그리고 터진목학살터 등. 노벨문학살 수상작가 르 클레지오(Gustave Le Clezio)는 터진목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피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저마다 사연이 있다.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자연과 문화를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내 여행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특히, 스토리텔링 기법을 이용하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화재나 자연이 비록 적다하더라도 여행자의 상상력을 불러내 실재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큰 감동과 느낌을 준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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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그늘, 둥글게 말아-자리왓에서

詩(시)로 읽는 4․3(43)

낭그늘, 둥글게 말아-자리왓에서
김병심

오래전 먼저 떠난 어미처럼
4․3난리통, 땅바닥 떨어진 마을 포대기에 들쳐 업고
아직 안 끝나신가 마을 밖 기울 거리던 팽나무

강씨, 문씨 집성촌이
나뭇가지 잘라 지팡이 선물한 오랜 친구 왕 할아버지 서당까지도
양배추 밭으로 청보리 밭으로 갈아엎어졌어

어디선가 몹쓸 바람이 분 거여
난리가 다시 처진 모양이여

인기척 끊긴 마을
산담 너머 더욱 숨죽이는 목소리
누가 들을까 나지막이 엎드린 봉분들

자식새끼마저 깃들지 않는 올레가 무슨 소용이냐
자리왓 마지막 생존자
어머니 따라 서둘러 떠난 길
붉디붉은 땡볕 황토길
배웅 나온 팽나무
두 손 둥글게 말아 아버지 머리에 월계관 씌워 주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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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왓은 애월읍 어도2구의 자연마을이다. 남평문씨 일가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한 이래 30여 가호(家戶)에 150여 주민들이 살던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었다. 마을 가운데 신명서당이 있어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어도2구는 열루왓, 자리왓, 고도리왓, 몰팟, 상수모를, 화전동의 7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마을 촌장들이 자리왓 팽나무 아래 모여서 대소사(大小事)를 의논하며 살던 마을이었다. 1948년 11월 23일~25일 3일간 소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은 폐허로 변했다. 주민들은 마을이 재건된 후에도 어도1구에 대다수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 자리왓은 현재 <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있다. 당시 지리왓 중심지였던 왕돌 거리에는 큰 팽나무가 남아있고, 곳곳에 좁고 구불구불한 올레터와 집터 흔적임을 말해주는 대밭들이 남았다. 주민들은 봉성리 입구 신명동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한 후 자리왓 등으로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애월농협 봉성지점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들어서면 갈림길이 나오고, 남서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팽나무가 있는 왕동거리가 나타난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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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뻐꾸기

한라산 뻐꾸기
고정국

한라산 잡목 숲에 텃새 한 마리 숨어서 산다
외가댁 대물림에 늙어서도 목청이 고운
사삼 때 청상이 됐던 올해 칠순 이모가 산다

산이 산을 막고 무심이 무심을 불러
해마다 뻐꾸기 소리 제삼자처럼 듣고 있지만
이모님 원통한 숲엔 오뉴월 서리도 내렸으리

반백년 나앉은 산은 등신처럼 말이 없고
“꺼꾹 꺼꾹 꺼꾹 꺼꾹” 숨어 우는 우리 이모
간곡히 제주사투리로 되레 나를 타이르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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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광풍이 불어 닥친 섬. 주민들은 대나무 마디가 타는 소리에도 놀라 숨어들고, 남편시신을 수습하던 아낙은 하늘만 쳐다본다. 또 남편과 아들을 잃은 아낙은 ‘홋설허민 추물락추물락’하고 아낙은 산부대의 습격을 막으려 순번제로 ‘입초 사멍’ 살았다.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입성한 시인은 그의 시조 인생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과연 무엇일까? 결국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한마디는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치열함이다. 아아, 시인이 전하는 “꺼꾹 꺼꾹 꺼꾹” 숨어 우는 ‘우리 이모’가 되레 제주사투리로 시인을 타이르신다고 했다. 4․3때 청상(靑孀)이 된 여인이 어찌 이모뿐이겠는가? ‘청상과부’를 줄여 청상이라 한다. 청상과부는 젊어서 과부가 된 여인이다. 살아남은 여인들은 ‘연좌제’와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등 온갖 치욕과 분노, 좌절과 체념을 겪어야 했다. 4·3학살극은 허무주의와 패배주의를 심어주었고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을 크게 변화·왜곡시켰다. 예로부터 제주의 어른들은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 보면 살게 된다)”고 위로했다. 그 사태에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로 살아온 많은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겪어 온 기막힌 세월을 털어놓은 후엔 대개 “살암시난 살아지더라(살다 보니까 살게 되었다)”는 말로 자신을 위로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좌절하지 않고 남편을 떠나보낸 사실에 절망하지 않으면서 군·경 토벌대의 방화로 깡그리 불에 타버린 마을을 여린 손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고 제주공동체를 복원시켰다. 시인은 젊은 시절 제주가 아닌 전라남도 소안도, 당사도를 자주 들렀다. 한 달에 한 번씩 다른 지역에 머무는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고향 제주가 아닌 바다 건너 낯선 섬까지 간 이유에 대해 “수평선은 나에게 절망이며 감옥이었던 것. 그 한계선을 넘기 위해, 제주를 떠나 전라도의 끝 섬 당사도 민박집에 노트북을 켰다. 그런데 이곳 수평선은 더 슬픈 시선으로 다가와 어느새 나의 친구가 되려 한다”고 이야기 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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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흘곶 답답한 굴속

詩(시)로 읽는 4․3(41)
선흘곶 답답한 굴속
김석교

선흘곶 목시물굴 캄캄한 죽음의 냄새
눈을 감아도 보인다, 귀를 막아도 들린다
안개 속처럼 흐릿한 세월 시간도 이곳은 비껴간다

굴 밖으로 끌려나온 사람들 무릎 꿇린 채 총살당하고
굴속에 몸 숨겼던 사람들 수류탄 터져 목숨 끊기고
여자들과 아이들 북촌리 억수동까지 끌려가
따르르륵 기관총 맞아 몰살당하고
노인들 또 잡혀가 고문당하고

봄꽃들 앞 다투며 피는 이 4월에
죽음의 그림자 서성거리는 선흘곶에 오면
새들의 지저귐도 피 토하는 울부짖음이지
가지마다 움트는 생명의 붓순도 총알로 보이지

죽은 자들 말이 없고, 죽인 자들 미쳐 날뛰는
이 4월, 선흘곶에만 오면 목시물굴에만 오면
그 날의 생지옥이 나를 휘감아 나는 그만 미쳐 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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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20일 선흘리가 불타버리자 주민들은 선흘곶의 자연동굴에 숨어들거나 들판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도톨굴, 목시물굴, 벤벵듸굴, 대섭이굴 등지에 숨어있던 주민들은 토벌대에 의해 발견되고 수십 명이 희생되었다. 해변마을로 내려간 주민이나 야산에 은신했다가 붙들려 온 주민들 중에도 도피자가족 등의 갖은 이유로 희생을 당한다. 일부 주민은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갔고, 그들 중 다수 주민들은 서우봉이나 북촌리 억물 등지에서 총살당한다. 또한 소개령에 따라 함덕, 조천 등지로 피난 간 주민들도 도피자 가족이란 이유로 함덕리 모래밭 등지에서 많은 희생을 치룬다. 1949년 봄이 되자 주민들은 낙선동에 성을 쌓고 집단 거주했다. 이러한 돌성은 산간마을은 물론 해변마을까지 무장대의 습격을 방비(防備)한다는 명분으로 대부분 마을에 축성을 했다. 주민들과 유격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촌의 한 유형이었다. 축성작업은 주민들을 동원해 이루어졌다. 성을 쌓는 작업은 주둔소를 쌓는 작업보다 오히려 더욱 힘든 일이었다. 해안 마을로 피난 갔거나 감금됐던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한 축성 작업은 1949년 봄 한 달 동안 계속됐다. 낮에는 경찰의 감시 하에 성을 쌓았다. 그리고 어두워지면 함덕으로 내려가자고, 다시 아침이면 낙선동에 성을 쌓으러 오는 생활을 한 달 정도 했다. 1949년 4월 성이 완공되자 선흘리 주민들은 겨우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짓고 집단적으로 살았다. 일종의 수용소나 마찬가지였다. 성 밖 출입도 통행증을 받아야 가능했고 밤에는 통행금지였다. 이 당시 마을 주민 중 젊은 남자들은 무장대 동조세력이나 도피자가족으로 몰려 이미 많은 희생을 치른 상태였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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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보수’는 어디에 있는가

김관후/작가·칼럼니스트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가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 진보주의자는 보수주의가 편견과 미신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이들이 계몽되기만 하면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보수주의자가 더 관용적이다.” 하버드 대학의 보수주의 정치철학자인 하비 맨스필드(Harvey Mansfield)의 말이다.
우리 주위에는 여러 형태의 보수가 존재한다. 어느 작가의 지적처럼 글 보수, 입 보수, 생활 보수, 교회 보수, 게릴라 보수, 생계형 보수 등 널려있다. 보수언론에 이름을 날리는 ‘글 보수’를 볼 때 낯 뜨거움을 느끼며, TV에 출연해 보수정당의 편을 드는 ‘입 보수’를 볼 때 낯간지러움을 느낀다.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보수 세력은 갈피를 못 잡는다. 보수주의라는 정치이념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보수는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무능, 부패, 내분, 지도력 상실 등 모든 패인이 한꺼번에 노출되면서 자멸한 보수의 민낯은 처량하기만 하다.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듭된 보수의 오판과 실수는 사람들의 마음에 정치 혐오를 불러일으켰고, 정권을 되찾고자 하는 그들의 염원도 끝내 실패를 거듭하고 말았다. 우리는 보수 정치의 미숙한 실체를 발견하고는 분노를 넘어 참담함을 느껴야 했다.
‘진짜 보수’는 보이지 않고 온통 ‘가짜 보수’가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현실은 참혹할 따름이다. 진짜 보수는 어디에 있는가? 대한민국에 더는 보수라는 가치가 자리할 수 없도록 만드는 ‘가짜 보수’에게 진짜 보수주의자들은 분노하고 있다. 
‘아스팔트 우파’ 또는 ‘태극기 부대’라고 불리던 소수의 수구세력이 박근혜 정부 시절을 거치며 ‘관제 데모’ 지원에 힘입어 세력을 키웠다. 이들 단체들은 성소수자와 난민,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혐오 발언을 일삼고 평화로운 대중 집회를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초등학교, 맹학교 학생들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보수의 품격은 존재하지 않고 ‘가짜 보수’의 난동만 넘쳐 나는 현실 속에서 ‘진짜 보수의 품격’은 대체 어디에 존재할까? 법과 원칙, 그리고 국가의 안위를 누구보다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는 보수가 이 모든 것을 부정하면 ‘진짜 보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도 거리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까지 흔들며 서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가짜 보수주의 횡포에 수십 년을 시달렸다. 보수가 진보 좌파와 다른 것은 아량과 포용, 관용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허점투성이 생물체여서 실수나 일탈(逸脫)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서로 너그럽게 감싸 안고 가야 한다고 믿는 게 보수 철학의 핵심이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보수의 색깔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반공·친미(親美)만 보수가 아니다. 이승만·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을 보수의 적으로 돌리는 것도 단편적이다. 이제 보수가 진짜 제 얼굴을 찾지 못하면 갈수록 무너질 수밖에 없다.
보통 부유한 계층일수록, 그리고 부강한 국가일수록 현상 유지를 바라는 성향이 강해 보수적일 수 있다. 이는 좌·우파 분류법과는 또 다르다. 좌파든 우파든 일단 기득권에 올라서 있다면 당연히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자연히 보수화하기 쉽다. 한국에도 본래적 의미의 보수가 존재할까. ‘가짜 보수’ 말고 ‘진짜 보수’ 말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자칭 보수주의자는 득실거린다. 하지만 보수 활동가는 별로 없다.
우리는 격동의 정치 시대 보내고 있다. 근래 정치는 광장에서 시작해서 다시 광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들 현재 보수에 대해 고민을 하고 새로운 보수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보수당이 창당하는 가운데 보수는 무엇일까 고민하게 만든다.
“보수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미지의 것보다는 익숙한 것을, 시도된 적이 없는 것보다는 시도해본 것을, 신비로운 것보다는 사실을, 무한한 것보다는 제한된 것을, 멀리 있는 것보다는 가까이 있는 것을, 유토피아적 축복보다는 현재의 웃음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영국 보수주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오크숏(Oakeshott)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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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천 할머니 – 월령리 진아영

詩(시)로 읽는 4․3(40)

무명천 할머니 – 월령리 진아영
허영선

한 여자가 울담 아래 쪼그려 있네
손바닥 선인장처럼 앉아 있네
희디 흰 무명천 턱을 싸맨 채

울음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울음이 되는
그녀, 끅끅 막힌 목젖의 음운 나는 알 수 없네
가슴뼈로 후둑이는 그녀의 울음 난 알 수 없네
무자년 그날, 살려고 후다닥 내달린 밭담 안에서
누가 날렸는지 모를
날카로운 한발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턱
당해보지 않은 나는 알 수가 없네
그 고통 속에 허구한 밤 뒤채이는
어둠을 본 적 없는 나는 알 수 없네
링거를 맞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
그녀 몸의 소리를

모든 말은 부호처럼 날아가 비명횡사하고
모든 꿈은 먼 바다로 가 꽂히고
어둠이 깊을수록 통증은 깊어지네
홀로 헛것들과 싸우며 새벽을 기다리던
그래 본 적 없는 나는
그 깊은 고통을 진정 알 길 없네
그녀 딛는 곳마다 헛딛는 말들을 할 수 있다고
바다 새가 꾸륵대고 있네
지금 대명천지 훌훌 자물쇠 벗기는
베롱한 세상
한 세상 왔다지만
꽁꽁 자물쇠 채운 문전에서
한 여자가 슬픈 눈 비린 저녁놀에 얼굴 묻네
오늘도 희디흰 무명천 받치고
울담 아래 앉아 있네
한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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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진아영(秦雅英) 할머니(1914~2004)는 4·3사건의 생존 희생자였다. 1914년 태어나 한경면 판포리에서 평범한 삶을 살다가, 1949년1월 12일 신원 불상의 토벌대가 발사한 총에 맞았다. 이 때 그녀의 나이 36세. 그 후 얼굴에 무명천을 두르고 다닌다 해서 ‘무명천 할머니’라 불렸다.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한림 주둔 2연대와 한림지서 경찰들에 의한 토벌이 이뤄졌다. 1949년 1월 12일 판포리에 군경토벌대가 들이닥쳤다. 할머니는 총격으로 턱을 맞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아래턱을 완전히 잃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언니와 사촌들이 살던 월령리로 이주했다. 할머니는 바닷가에서 톳을 캐다 팔고 이웃들의 농사를 도우며 약값을 벌고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제대로 씹을 수 없었다. 위장병과 영양실조로 평생 고통 받았다. 결혼도 못 하고, 자식도 갖지 못한 할머니는 성이시돌 요양원에서 2004년 9월 8일,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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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근 해불근

詩(시)로 읽는 4․3(39)
산불근 해불근
강덕환

곱으라, 곱으라 소리칠 새도 없이
살려줍서, 살려줍서 바짓가랑이 잡는 애원도
허공중에 흩어지던 기축년 정월 열엿새
굴 밖으로 끌어낸 스무 남은 사람들
다르르륵 파앙팡팡
새가 되어 날아갔네, 억새가 되어 박혔네
한 톨의 씨도 남겨선 안 된다
담돌에 매다 쳐버린 그 물애기는
날아갔을까, 박혔을까

산불근 해불근의 중산간
잊은 것 같지만, 사라진 것 같지만
상처의 그루터기를 견딘 억새의 촉수
날을 세우고 날을 세우고 빌레를 뚫어 움튼다,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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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면 어음리는 한라산 서북쪽 ‘어림비’ 평원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이다. 4·3 당시에는 어음리라는 하나의 행정단위였고, 그 안에 비매니(夫面洞), 닭우영(鷄園洞), 너산밧, 큰동네, 섯동네, 고지우영, 송아물, 사낭굴 등 자연마을들이 모여 있었다. 주민들은 무장대 요구에 따라 ‘왓샤시위’를 했고 식량을 거둬 올려 보냈다. 청년들 중에는 무장대원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낮에는 토벌대 세상, 밤에는 무장대 세상’이었다. 1948년 11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일안에 소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봉성리 구몰동이 무장대에 습격당한 뒷날인 1949년 1월 16일, 토벌대와 민보단이 합동으로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여 빌레못굴을 발견했다. 빌레못굴 총살극은 가족 중 청년이 입산한 소위 ‘도피자가족’이거나, 토벌대의 주목을 받게 된 사람들이 숨어 지내다 굴이 발각되는 바람에 집단 총살된 사건이다. ‘난리 때는 산불을 해불근(山不近 海不近) 하라’든가, ‘30여 명이 능히 숨어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말이 마을에 퍼져 있었다. 산불근 해불근, 산(무장대)에도 가까이 하기 어렵고 바다(토벌대)에도 가까이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빌레못굴은 총 길이 11,749m로 용암굴로는 세계 최장이라 하여 천연기념물 342호로 지정돼 있다. 겨우 한사람이 들어갈 만큼의 좁은 입구를 바위가 막고 있었다. 굴의 온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김이 연기처럼 피어오르지만, 주민들은 인근에 산재해 있는 작은 ‘궤’ 정도로 알았지 그처럼 큰 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아무튼 1949년 1월 16일 굴이 발각됐고 진압군은 그 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총살했다. 특히 이 때 경찰이 서너 살 난 어린이들의 다리를 잡아 머리를 바위에 메쳐 죽였다는 이야기는 진압작전에 동원됐던 민보단원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처절함의 상징으로 인근에 회자(膾炙)되고 있었다. 입구가 좁아 잘 눈에 띄지 않는 굴이 어떻게 발각됐으며, 굴 안으로 깊이 도망쳤다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모두가 잡혀 죽었을까. 굴속에는 어음리 주민 뿐 아니라 납읍리, 장전리, 상귀리 등 인근 주민들도 다수 끼어 있었다. 대부분 난리를 피해 숨었던 주민들이었지만, 진압군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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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어디를 다녀왔는가

만세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너무 서늘했다. 섬뜩했다. 급히 신발을 꿰고 밖으로 살금살금 나왔다. 골목길에 사람들이 주섬주섬 모여 있었고, 만세소리는 드높았다. 그 소리가 귀청을 흔들며, 가슴 속에 멍울처럼 박혔다.
물론 해방되는 날에도 동무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만세를 불렀다. 그 때는 얼마나 신이 났던가. 나라를 찾았다는데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는 광경은 그것이 아니었다. ‘인민공화국 만세!’, ‘만세!’, ‘만세’ 하고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대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노랫소리도 들렸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 죽음을 슬퍼 말아라. 조국의 자유를 팔려는 원수. 무찔러 나가자 인민유격대.
무서운 생각이 들어 집안으로 급히 뛰어 들었다.
“아버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어요. 저도 나가 볼까요?”
“나가지 말고 가만히 집에 있어라. 옛날 난리 때에도 집에 있는 사람은 살았다. 밖에 나가면 모조리 잡아다가 싸움터로 보낸다.”
멀리서 들리는 노랫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날아가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울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평생 석 자 살아있다.
세상이 어수선하게 변하고 있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만세소리와 노랫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식구들은 옴짝도 않고 방구석을 지키며 밖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문틈으로 동네 공기를 살피며 마음을 조아리다가, 식구들 몰래 살금살금 골목길로 다시 빠져나왔다.
내 나이 지금 열여덟. 몸이 근질근질하여 집 안에 처박힐 때가 아니다. 작은 보폭으로 동네를 거의 한 바퀴 돌았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긴 칼을 차고 구구식 총을 멘 사나이가 내 앞으로 다가섰다.
그 총은 왜놈들이 사용하던 총이다.
“야! 젊은 동무! 너 거기에 서!”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소리를 지르며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뒤로 다른 사나이들도 여럿이 서 있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그 자리를 피하려고 뒷걸음질을 쳤다.
“너 도망가려고 하지?”
한 사나이가 다가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나이들은 나를 마을 공회당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낯익은 동무들도 여럿이 있었다.
“동무들! 앞으로 우리들 명령에 따라야 한다. 우리들은 산에서 내려왔다. 만일 경찰이 보이면 우리에게 즉시 연락해야 한다”.
동무들은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 날은 잠깐 조사만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선거일이 가까워오자 사람들이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선거를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에 사람들이 동조하고 나섰다. 우리 식구들도 마을사람들을 뒤따랐다. 마을이 가까운 숨비기오름 동굴과 그 주위 곶자왈로 숨어들었다. 어린아이까지 동굴 안으로 들어갔으니 울음소리가 문제였다. 토벌대에게 발견되는 것이 두려워 불도 켜지 못하고, 연기 때문에 어른들은 담배도 피울 수 없었다.
며칠을 동굴에서 지내고 선거가 끝나는 날짜에 맞추어 사람들은 마을로 내려왔다.
저녁이 되자 동구 밖에서 또 총소리도 들렸다. 아랫마을에서 토벌대 수 명이 총을 쏘면서 마을에 들이닥쳤다. 사람들은 짐을 싸들고 다시 산으로 도망가고, 몇 사람은 총에 맞아 쓰러지기도 하였다. 멀리서 미군장교가 색안경에 파이프를 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물꾸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폭도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
토벌대원이 소리를 질렀다.
“집에 있어서 모릅니다.”
누군가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짓말을 하면 천벌을 받는다.”
토벌대원들은 의심된다며 몇 사람을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밤이 깊어지자, 이번에는 산사람들이 마을지서를 습격하고 지서에 불을 질렀다.
낮에 토벌대원들이 난리를 피우면 밤이면 산사람들이 나타났다.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오돌오돌 떨고만 있었다. 세 사람 이상만 모이면 무허가집회를 가졌다고 지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밭에 농사를 지으러 나가지도 못하고, 산사람도 무섭고 경찰관도 군인도 무섭고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빨간 깃발을 흔들면 경찰이 올라온다고, 하얀 깃발을 흔들면 경찰이 내려간다고 신호체계도 산사람들이 알려주었다.
나는 밖의 동태를 살피며 살아야 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다시 마을로 들이닥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군 지휘관이 미군 지프에 몸을 실어 졸병들을 이끌고 도착한 날도, 분명 날선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그 사나운 울림은 마을이 군인 습격을 받았다는 신호이기도 하였다. 너희들은 꼼짝 말고 동구 밖으로 손들고 나오라는, 거센 명령이 떨어졌다.
초토화 작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토벌대는 산사람을 차단하기 위하여 중산간마을부터 들쑤셨다. 중산간 마을은 불바다가 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아우성을 질렀다. 그 난리를 피하여 마을사람들은 피난을 가기 위하여 집집마다 등에 먹을거리를 짊어지고 다시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어린 동생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뒤따랐다. 어머니는 주먹밥을 등에 짊어지고 아버지는 동생을 등에 업었다. 마을과 가까운 송아지동산에 가보니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웠다.
며칠을 산에서 지내면서 사람들은 마을 동태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벌써 토벌대가 청년 몇 사람을 잡아갔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 때부터 사람들 사이에는 좌익 그리고 우익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우익은 경찰이고 좌익은 우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다시 사람들이 마을로 내려왔지만 집들을 잿더미로 변하여 몸을 의지할 데가 없었다. 산에서 총을 메고 죽창을 든 산사람들이 내려왔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기들 편이 되어야 한다며 윽박질렀다. 마을 벽보에는 삐라가 붙여져 있었다. 여러분에게 어려움과 불행을 가져다 준 미제와 그 앞잡이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는 궐기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우리들을 원호하고 우리들과 함께 조국과 인민이 이끄는 길로 결연히 떨쳐 일어서 행진합시다.
사람들은 어느 쪽에 서야할지 분간을 할 수 없어 우왕자왕하였다.
토벌대원들이 마을을 박살내기 시작하자 산으로 오르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다시 밤이 깊었다. 총소리도 그쳤다. 아우성도 멀어졌다. 군인들이 물러난 낌새를 알아차리고, 마을사람들은 불길이 휩쓸고 간 동네로 다시 살금살금 내려왔다. 집들은 타버리고 재만 남았다. 불타 버린 집 마당으로 황소바람이 거세게 불어대고 있었다. 자오록하게 피어오르던 연기가 흐릿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우리 식구들도 부엌이 있던 자리를 찾아 먹을 것을 찾으려고 뒤적거렸다.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무쇠 솥까지 나뒹굴었다. 다시 숨어들어 갈 준비도 해야 했다. 토벌대는 분명 다시 마을을 덮칠 것이다. 갈 곳이라고는 가까운 굴뿐이다.
다음 날 새벽 사이렌이 또 울렸다. 사람들이 숨어 들어간 터진궤를 향하여 총소리가 요란하였다.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고, 와들와들 떨기만 하였다. 들키는 날에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서 샛별이 오들오들 떨고 있던 시간이다. 따르르르, 총소리가 요란하게 이어졌다. 굴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 때 굴에서 죽은 사람이 아마 아흔 사람이 넘었을 것이다. 총소리가 그치고 토벌대가 떠난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도 터진궤에서 죽었다. 사람들은 남은 식구들은 구덩이를 파서 시신들을 임시로 묻고, 나무에다 이름들을 적어두었다.

섬 전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중산간마을에는 소개령이 내려졌다. 해변 마을에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피난을 갔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산에 있는 토굴이나 동굴 등지에 다시 숨어 들어갔다. 우리 식구들은 한림 마을에 사는 고모 댁에 임시 거처를 정했다. 살기가 힘든 세상이었다.
나는 입에 풀칠이나 하려고 그래도 안전하다는 제주시 숙부 댁으로 향했다. 고향 마을을 떠나 중엄 가까운 곳에 도착하니, 고향 마을 쪽 하늘이 연기로 뒤 덮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중엄마을 쪽에 이르니 누가 등 뒤에서 큰소리를 쳤다.
“어디 가는 놈이냐? 너 산에 연락을 갔다 오는 길이지?”
“아닙니다. 저는 집이 중산간인데 제주시에 있는 숙부댁에 갑니다.”
순경은 눈을 부라렸다.
“바른 말 하지 않으면 쏘아버리겠다.”
순경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수십 명이 총살을 당해 스러져 있었다.
“이 자식아! 빨리 가!”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 순경은 한참 발길질을 하고 그냥 풀어 주었다.
제주시에 도착하여 숙부댁에 거처를 정하고, 어디 정미소에라도 취직을 하려고 동문로 쪽으로 가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너 어디로 가느냐? 너 산에서 내려온 놈이지?”
청년 여러 명이 내 뒤에서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다.
“우리들은 대한청년단원들이다. 조사할 사항이 있느니 우리들을 따르라.”
그들은 나를 청년단 지하실로 데리고 가더니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고, 저녁쯤에 경찰서로 넘겼다. 경찰서에는 방마다 조사를 받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비명소리도 들렸다.
“너 이 새끼,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공중에 매달아 콧구멍으로 물을 붓겠다.”
나는 무서워서 그들이 질문하는 데로 예, 예, 대답만 하였다. 그들은 나의 손에 전깃줄로 묶고 수화기 손잡이로 돌리면서 질문을 계속했다.
“산에서 보초를 섰느냐?”
“예!”
“금품을 제공했느냐?”
“예!”
“쌀을 제공했느냐?”
“예!”
잡혀온 피의자들은 형식적인 재판을 받았다. 군인 장교들로 판사, 검사, 변호사의 구색도 맞추고 있었다. 미군 장교가 직접 재판을 할 때도 있었다. 한 번에 몇 명씩 이름을 불러 재판을 하는데, 변론권이 주어지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악착같이 숨겼던 사람은 형기를 덜 받았다. 죄명은 주로 그 당시 미군정경비법 위반 혐의였다. 재판은 형식적인 절차로 계속 진행되었다.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당신 5년, 당신 10년하고 재판관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만 재판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새벽에 산지항 가까운 동척회사로 끌려갔다. 목숨 하나만이라도 구한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나는 트럭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짐짝처럼 실려졌고, 앞선 지프는 계속 사이렌을 울려대면서 달려 나갔다. 트럭은 동척회사 마당에 세워졌고, 곧장 창고에 감금되었다. 창고마다 끌려온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다. 곳곳에서 오금을 조이게 하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 누명을 쓰고 개죽음을 당하게 됐다고, 서로가 확실치 않은 정보를 나누고 있었다.
고문하는 자와 피고문자에 따라 그 정도는 차이가 있었다. 사람들을 한 사람씩 부르거나 여럿이 불려나가면 다른 막사에서 몽둥이나 총 개머리판, 혹은 가죽 띠로 마구 패거나 천장에 매어 달았다. 한 쪽 눈이나 두 눈 다 병신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다리를 절룩거리는 사람도 생겨났다.
빨갱이라 자백하라는 심문이 너무 치욕적이었다. 고통에 못 이겨 하지 않은 일을 그대로 인정해야 했다. 나는 빨갱이입니다, 라고 거짓 자백이라도 해야 목숨이라도 건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육지형무소로 끌려간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산지항으로 끌려가는 사람들 손에는 포승줄이 묶여있었다. 배는 목포로 가는 화물선이다. 소를 실어 나르던 선박이다. 사람들은 배 밑창에 승선했는데 여유 공간이 하나도 없었다. 쇠똥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밤새 항해하고 다음 날 아침, 목포항에 도착하였다. 곧바로 열차를 타고 밤이 되어서 겨우 인천소년형무소에 도착하였다.
형무소 정문 앞에 수형자 전원이 무릎을 꿇었다. 차례대로 이름을 부른다. 수형자를 제주에서부터 인솔하고 온 군인이 한사람씩 부르며 징역형을 알려주었다. 군인이 나를 불러 세우더니 ‘징역 5년 형!’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한사람씩 형량을 알려준 다음, 간수에게 우리들은 인계하고 그는 총총히 사라졌다.
인천 추위는 수은주 영하 30도에 가까운 강추위로 전신을 얼어붙게 하였다. 죄수들은 머리를 빡빡 깎고 얼음물에 대충 몸을 감고 형무소 죄수복으로 갈아입었다. 바로 무릎 위까지 된 반바지에 상의는 반팔로 여름에나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모두 바뀌었다.
형무소 건물은 이층으로 지어져서 이천여 명 정도 수용할 수 곳이다. 일제 강점기 쓰던 감옥을 일부 손질하여 형무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방 하나가 두 평 정도의 크기. 한 방에 열다섯에서 스무 명 정도가 수용되었다. 사람들도 여섯 명에서 일곱 명씩 나뉘어서 감방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날부터 철저하게 사상범으로 분류되어, 특별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내게 배정된 곳은 2층 25번 방이다. 이불 하나에 담요 하나로 다섯 명이 같이 덮고 자야 한다. 죄수끼리 통성명을 하니 모두 제주에서 끌려온 소년수들이다. 인천형무소는 19세 이하의 소년들의 복형장소였다. 나는 무엇보다도 추위 때문에 잠시도 견디기 힘들었다.
식사시간에는 깡통에다 밥을 배식하였다. 일 등급, 이 등급, 삼 등급으로 급수가 매겨졌다. 밥을 휴지에 받고 국은 양재기 그릇에 받았다. 밥은 3등밥 모양으로 뜬 것이고 콩과 보리 반반씩 쌀 몇 알이 들어있는데 숟가락은 없고 젓가락으로 한번 뜨면 비시시 흐트러졌다.
나는 농사짓는 것밖에 모르고 살아왔다. 그래서 목공이라든지, 옷 수선, 벽돌쌓기 기술이 있는 죄수들과 같은 특별대우에도 제외되었다. 기술이 있어야, 밖에서 일하면서 밥도 나름대로 충분히 먹을 수 있었는데, 그 축에도 끼지 못했다.
형무소 안에서 제일 겁이 나는 것은 이질과 학질이었다. 입원하는 환자가 늘어났고 치료 중에 사망하는 환자도 속출하였다. 그 당시 약이라고는 머큐로크롬과 아스피린 그리고 금개락 정도였다.
물론 형무소에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부지기수로 죽어나갔다. 무더위 속에 옴이나 이름도 모를 병에 걸려 아침 기상시간에 일어나지 않으면 시체로 변해 있었다. 시신들이 매일 들것에 실려 밖으로 치워졌다. 사람들을 총살시킨 사례도 여러 번 있었다.

어느 날 새벽 청소당번이 열쇠로 형무소 감방문을 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사흘 뒤였다. 인민군 계급장을 단 군인들이 감방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인민해방군이다. 여러분들은 모두 해방이다. 이제 우리들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한사람씩 일일이 악수를 했다. 연병장에 수용인들을 모아놓고 인민군 장교가 단상에 올랐다.
“지금부터 인민군 의용대에 입대할 사람을 착출하겠다. 특히 제주4·3 사상범들은 모두 나와 나를 따르라. 그대들은 위대한 수령님이 지목하신 영웅들이다.”
우리들은 개성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인민군 훈련학교에 입소한다는 것이다. 인민군가를 부르며 행군을 계속하여 한강다리에 도착하였다. 한강다리는 이미 폭격으로 부서져 작은 배로 사람들 운반하고 있었다. 서울 시내로 진입하였다. 시내 주요건물과 중앙청에는 김일성 사진이 좌측, 스탈린 사진이 우측에 붙여져 있었다. 국기게양대에는 조선인민공화국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행군을 하다 보니, 사방에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 파편이 박혀 신음하는 사람,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 울부짖는 사람, 피를 흘리며 절규하는 사람, 아비규환 그 자체이자 지옥이 따로 없었다. 차 밑에 시체가 깔려있고 나뭇가지에도 시체가 여기저기 빨래처럼 걸려있었다
삼일 동안을 걸어 개성에 있는 인민군 훈련학교에 가서 정식 인민군대 훈련병이 되었다. 인민군 지휘관이 단상에 올랐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소, 우리 다 같이 만세삼창을 부릅시다. 제가 선창할 터이니 따라하시오! 인민공화국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 스탈린 대원수 만세!”
지휘관의 연설은 이어졌다.
“지금부터 조선인민군 내무서원 훈련을 받고 남조선으로 내려가서 치안을 확보하고 자본주의를 타파하여 인민공화국 건설에 총성을 다하여 김일성 장군께 충성을 다 할 것을 맹세합니까?”
“예!”
부대편성이 끝나고 각자 분대를 배속 받았다. 일반병은 상등병과 전사의 두 계급으로 나뉘었는데 나는 최하위 계급인 전사였다.
“여러분들은 총알받이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남한으로 내려가서 치안 확보에 노력할 것이다. 남조선에서 괴뢰도당과 싸워서 돌아오기 바란다.”
그리고 군가도 배웠다.
‘백두산 저기 받은 우리의 민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절세의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아~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아~아 그 이름도 그리운 스탈린 대원수.’

배가 고팠다. 고향이 그리웠다. 개성을 출발한 시간은 저녁 아홉시쯤 무덥고 컴컴한 밤이다. 인민군이 신고 있는 발싸개와 비누를 지급받고 발싸개에 비누를 칠하여 농구화를 신었다. 개성에서 출발하여 한 사흘이 되어서야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시 남쪽으로 행군을 계속하였다. 발바닥이 부풀고 다리가 아파서 너무 힘이 들었다. 야간에도 행군은 계속되었다. 조치원까지 계속 걸었다. 주변을 보니 인민군 전차와 야포가 폭격을 맞아 부서져 나뒹굴고 있었다. 논두렁을 따라 일렬종대로 걷고 있는데,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총알이 빨간 불빛을 가르면서 사정없이 떨어졌다
조치원 가까운 어느 마을에 도착하니 소대원 서른 명 중 남은 인원은 열 명 뿐이었다. 교전을 벌이던 중 죽거나 도망을 간 소대원들이 있었다. 겨우 어느 의용군 사무실을 찾아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걷는 것도 낮에는 비행기 폭격 때문에 민가가 엄폐와 은폐가 가능한 나무 그늘에서 쉬다 어두워져야 길을 걸었다.
광주와 가까운 어느 시골 노인 부부가 살고 있는 초가에 도착하였다. 노인은 빨리 식사하고 여기를 떠나라, 지난밤에도 앞산에서 총소리가 났으니 여기도 위험하다며 밥을 차려주었다. 주섬주섬 밥을 먹고 일행은 다시 행군을 시작하였다.
다시 행군을 계속하다 어느 마을에 도착하니, 그 마을은 인민군이 통치하는 마을이었다. 내무서원을 찾아가니 우리들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동무들은 어디로 가는 길이요?”
“우리들은 광주 내무서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밥과 반찬이 나왔다. 허기진 배를 양껏 채우고, 헌 고무신을 한 켤레씩 지급 받았다. 한 달여 만에 개성을 출발하여 광주 내무서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신고식이 시작되었다.
“우리 일행 열 명은 수령님의 명령을 받아 이곳 광주까지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내무서장이 거수경례로 신고를 받았다.
“연락을 받았을 때는 스무 명이 온다고 들었는데 왜 열 명 뿐이오?”
“오는 중에 교전이 벌어져 영예롭게 전사하였습니다.”
“동무들은 식사를 하고 나면 여수, 순천, 고양 등지로 한사람 씩 배치할 것이니 착오 없이 목적지에 가야하오.”
“예, 알겠습니다.”
나는 고양에 배치를 받았다. 당시 우리 복장은 인민군복에 인민군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고양 내무서장도 우리들은 세워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내 앞으로 다가섰다.
“지금 제주도는 해방이 되어서 너의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다.”
“네, 부모님이 보고 싶습니다.”
내무서장은 지도를 벽에 붙이고 설명을 이어갔다. 지도에는 부산 대구 지역만 파란표시가 되어 있고, 그 외 지역과 제주도까지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제주도는 4·3사건으로 남로당이 승리하였다는 표시였다.
나는 다시 명령에 따라 동료들과 함께 광양군 진월면 어느 산골마을에 있는 내무서로 갔다. 내무서장이 명절음식을 차려주었다.
“내일은 인민공화국에서 빈부차이가 없이 농토를 꼭 같이 분배합니다.”
마을 이장도 자리를 함께 하였다.
“이장님께서 마을 주민을 동원해 주시고 거리를 잴 새끼를 꼬아서 오도록 해 주십시오.”
이장이 대답했다.
“예, 알았습니다.”
토지를 분배하는 날, 마을 사람들이 논밭에 모였다. 논 한 필지를 오백 평 정도씩 미리 새끼줄로 가로, 세로의 길이로 정하여 김 씨네 논, 박 씨네 논, 이 씨네 논 하며 선을 그어 나갔다. 사람들은 불평불만을 하지 못했다. 그 경우 반동분자라 하여 비판을 받거나 숙청을 당하게 된다. 논밭 한 평도 없었던 사람은 논밭을 공짜로 받게 되니 마음이 들뜰 수밖에 없었다. 인민공화국에 충성을 다짐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인지상정인지 모른다.
하루는 보초를 서는데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연합군이 인천 상륙을 하고 서울 탈환을 한 이틀 후였다. 우리는 내무서장의 인솔 하에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며칠 먹을 양식을 보따리에 싸서 등에 짊어지고 산에 올라가보니 마을사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모였다.
뒷산 소나무 밭에 모인 사람들에게 내무서장이 명령을 내렸다.
“우리들은 작전상 후퇴하게 되었으므로 내 뒤를 따르지 않으면 놈들에게 죽을 것이니 계속 산길을 따라 지리산을 넘어 목적지인 태백산까지 가야하니 한사람도 낙오하는 사람이 없도록 행동합시다.”
모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 편성을 끝마쳤다. 인민군은 앞에서 행군하고 노약자와 어린이는 뒤를 따랐다. 낮에는 산비탈이나 나무 밑에서 쉬고 일몰 후 야간에만 걸었다. 산기슭에는 피난 가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어진 줄이 몇 킬로나 되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의 숫자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마을이 보이면 거기서 가서 식량을 구해 먹었으며 먹다 남은 것은 등짐에 짊어지고 계속 걷고 걸었다.
다시 후퇴하라는 지령을 받고, 사람들과 한 부대가 되어서 태백산이 목적지란 말만 듣고 지리산 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일주일 정도 걸어서 지리산에 도착하고 보니 각 처에서 피난 온 남녀노소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행군을 하면서 먹을 것도 없고 신발도 다 떨어지고 걸을 수가 없어 고향 생각은 더욱 간절하였다. 맨발로 걷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배가 고프니 칡뿌리를 캐어 먹으면서 하염없이 앞 사람만 보면서 뒤따라 걸어갔다.

행군 열흘 쯤 되는 날이다. 처음 출발할 때 수백 명이던 사람이 하루가 다르게 그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자기들끼리 마을로 도망가거나 각자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인솔자와 내무서장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남아있는 사람은 대략 사오십 명 정도. 국방군이 바다 쪽으로 공격해서 산으로 올라온다는 소문도 들렸다. 국방군을 피하기 위해서는 태백산 속으로 계속 가야만 했다. 지서주임도 태백산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출발한 지 보름 쯤 되어 전라도 끝부분 경상도 경계에 이르렀다. 가는 곳마다 인민군과 국방군의 시체가 즐비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로막힌 강을 건널 때는 옷을 벗고 머리에 얹었다. 어디선가 기관총 소리도 들렸다. 퇴각하는 우리를 한국군으로 알고 주변에 숨어있는 인민군이 오인사격도 하였다. 계속 걷다보면 국방군과 인민군 시체가 뒤엉켜서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 되었다.
이제 나는 인민군도 아니고 일반주민도 아니다. 복장만 인민군복을 입었을 뿐 소속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된 셈이다. 강을 건너면서도 총을 맞아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고, 그럴 때는 물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런 행동을 수없이 몇 번을 되풀이하며 겨우 강가에 닿아보니 신발도 벗겨져 없었고, 옷은 다 물에 젖어 있었다. 죽은 군인의 시체에서 신발을 벗겨 신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리 일행은 경상북도 상주군 어느 산기슭 팔부 능선에서 일렬횡대로 앉아있었다. 잡담도 하고 고향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담배도 피웠다. 저 멀리 한라산이 다가오면서 내 품에 안기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다시 ‘공격 앞으로!’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행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각자 산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거나 어떤 사람은 숲 속으로 도망가기도 하였는데, 마침 돌 자위가 있어서 그 바위를 엄폐, 은폐 삼아 납작 엎드렸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총을 맞았다. ‘아이고’하며 단말마 비명 소리를 내더니 다음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이때 국방군이 총을 쏘면서 나타났다. 큰 소리도 들렸다.
“살아있는 놈은 일어나서 손을 들어라! 그러면 살려준다.”
총을 든 사람이 있어서 얼마간 교전이 벌어졌다. 국방군이 총을 들고 내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살아있는 놈은 나와라! 밖으로 나와 보니 미군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 인민군 총을 든 사람들이 한사람씩 트럭에 태워졌다. 한국군 부대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부산포로수용소로 인계되었다.

부산포로수용소 시설은 천막으로 일렬횡대로 늘어져 있었다. 우선 몸에 벼룩, 이 등이 생길까 봐 몸 구석구석에 디디티를 뿌렸다. 잡혀온 사람들은 소대로 편성되었다. 어린이, 노인, 농민, 노동자 등이 모인 소대도 있었고 또한 인민군과 그리고 의용군이 있는 비교적 군기가 엄한 소대도 있었다. 천막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고 쌀 담았던 마대를 덮고, 마대로 옷을 만들어 입는 사람도 있었다. 피복은 미제 옷이었다. 상의에 PW란 도장이 찍혀 있었다. Prisoner of war. 포로 또는 민간인 억류자. 거기서 조금 지내다가 다시 거제도포로수용소로 이동되었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난장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포로들끼리 사상논쟁이 벌어지면서 폭력사태도 비일비재하였다. 인민군으로 확인된 사람들은 다른 천막에 수용되었다. 천막 사이는 일백 미터에 불과했다. 한쪽 천막에서 다른 천막으로 돌멩이가 날아오기도 하였다.
“너희 놈들 우리 수용소 진영으로 넘어오라!”
“너희들이 넘어오라! 빨갱이 놈들아!”
고함소리도 들렸다. 밤에는 더욱 고함소리가 심해지면서 양쪽에서 서로 돌을 던지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부상당한 포로들도 생겨났다. 천막이 찢어져서 비가 오면 빗물이 세었다. 방망이를 가지고 상대방을 때리고 막사 내에 힘이 센 포로끼리 사상이 다른 막사를 침범하여 폭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수용소 영내를 돌아다니면서 밤마다 소란을 피우는 포로들도 생겨났다. 빨갱이 포로들은 밤낮 가리지 않고 인민군가를 불렀다. 상대방에게 지지 않기 위하여 우리 쪽도 노래를 불렀다. 드럼통을 두 개로 잘라서 북을 만들고 장구를 만들어서 소리를 내면서 대항하기도 하였다. 포로감시소에서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포로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포로를 분리하기로 하였다. 하루는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양쪽에 심사관이 앉았다. 포로 한 사람씩 심사관 앞에서 ‘이북’ 하고 외치면 대기하고 있는 화물차에 타고, ‘이남’하고 외치면 천막 밖 이중 철조망 사이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나는 ‘이남’하고 외치고는 천막 밖으로 나가 이중 철조망 사이에 들어갔는데, 이때 경비병들이 천막 옆에 있다가 이북으로 가는 포로병들을 몽둥이로 때리고 미군은 옆에 서 있다가 워커발로 차는 모습들도 보였다. 많은 포로들이 북한을 지원하여 미군 트럭에 탔는데 어디로 이동되었는지 지금까지 아무도 모른다.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힘차한 그 얼굴도 반갑습니다. 우리들의 기쁨을 찾아주시려 낯설은 이 땅에 멀리오신 평화의 사자 아아 국군언니. 괴롬도 두려움도 모두 잊어서, 우리들의 편안히 누웠을 때도 찬비바람 그 속에 지켜계신 평화의 사자 아아 국군 언니.
포로가 석방된다는 소식이 들리고 이미 소년단에 편성된 나는 소북을 치면서 동무들과 잔치를 벌였다. 우리들은 보따리를 둘러메고 집에까지 가면서 먹을 쌀과 숟가락 하나를 배급받았다. 우리들은 마지막으로 소년단가를 힘차게 불렀다. 송이송이 무궁화 우리 소년들. 피어라 이 강산에 겨레 위하여, 닦고 가라 무쇠같이 뭉쳐라 겨레여.

제주에 도착하여 급히 고향마을로 향했다. 고향마을은 이미 불이 타버려 주민들은 집단으로 성담을 쌓고 마을 특공대를 조직하여 산사람과 격리시킨다는 명분으로 경찰관의 감시를 받으면서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오년 여 만에 집에 돌아왔으나, 집에는 한국군에 입대하라는 입영통지서가 나와 있었다. 나는 이미 소년이 아니고 성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한국군으로 입대하기 위하여 논산훈련소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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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상실(1)

詩(시)로 읽는 4․3(38)

완벽한 상실(1)
김병택

조천면 교래리 한 초가집
잇단 총성이 뒤뜰의 대밭을 흔들었다
9연대의 계획에 따라 이 땅에서 사라진
사람들은 모두 그의 가족이었다

증조할머니는
총에 맞아 숨져가면서도
담요에 싼 손자를 급히 대밭으로 던졌다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던 그는
불구의 몸으로 평생을 살았다
오른팔을 구부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목발을 집고 걸어야 했다

게다가, 그는 거처하던 과수원 판잣집의 화재로
생을 마감했다
참으로 가혹한 삶이었다
———————————————————————————–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1949년 2월까지 약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하는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됐다. 진압군은 중산간마을 방화에 앞서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려 해변마을로 내려오도록 했다. 그러나 일부 마을에는 소개령이 전달되지 않았고, 혹은 채 전달되기 전에 진압군이 들이닥쳐 방화와 함께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남녀노소 구별없이 집단희생을 당했다. 미군 비밀보고서에는 “9연대가 마을주민들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거나 “2연대는 신분과 무기소지 여부에 관계없이 폭도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가혹한 작전을 벌였다”고 기록돼 있다. 교래리(橋來里)는 예로부터 다리(橋)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진다. 700여 년 전 화전민들에 의해 설촌된 마을이다. 고려시대부터 목마장이 설치되어 준마(駿馬)를 길러내는 지역으로, 왕에게 말을 진상했을 정도로 마장(馬場)이 발달했던 지역이다. 웃리, 알리로 이루어져 약 100여 호의 주민이 살았던 중산간 오지인 이곳에는 초토화작전의 초기부터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1948년 11월 13일(음력 10월 13일) 새벽 5시께, 군인들이 교래리를 포위한 가운데 집집마다 들이닥쳐 다짜고짜 불을 붙이며 총을 쏘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나 다급히 밖으로 뛰어나오던 주민들이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날이 밝아 총성이 멎었을 때 100여 호 모여 살던 교래리는 이미 잿더미로 변했다.  주민들은 인근 야산으로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그들은 느닷없이 들이닥쳐 무조건 불을 지르는 토벌대의 행태에 놀라기도 했지만 가을걷이한 곡식과 우마(牛馬)를 그냥 둘 수가 없어서 ‘며칠만 버티면 괜찮겠지’ 생각하며 간단한 생활집기를 걸머메고 야산의 동굴이나 궤 혹은 움막을 짓고 피신생황을 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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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김관후/작가·칼럼니스트
제시 잭슨(Jesse Jackson)이라는 미국 흑인이 있었다. 대통령 입후보 경선에서 사회의 제도적인 병폐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에게 ‘우’라는 사람들이 ‘좌’라고 비난하였다. 잭슨이 점잖게 반박한다.  “당신네들, 하늘을 나는 저 새를 보시오, 저 새가 오른쪽 날개로만 날고 있소? 왼쪽 날개가 있고, 그것이 오른쪽 날개만큼 크기 때문에 저렇게 멋있게 날 수 있는 것이오.”
그 새에는 두 개의 날개,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날개는 그 모양의 크기가 꼭 같았다. 금수(禽獸)의 하나인 새들조차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를 아울러 가지고 시원스럽게 하늘을 날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우주와 생물의 생존의 원리가 아닐까?
‘의식화의 은사’라 불렸던 리영희(李泳禧)의《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1994년에 쓴 그의 평론들을 모아 만든 정치 평론집이다. 지금에 그 평론집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국가공동체는 좌파와 우파가 균형을 이루어야지 건강하다. 극단적인 이념전쟁에 휩싸여 좌파를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몰아넣으며 탄압했던 한국사회의 실상을, 오른쪽 날개로만 날아가려는 새에 비유하였다.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몰락을 통해, 왼쪽 날개로만 날아가려는 새는 추락한다는 것, 즉 한쪽 날개로는 날 수 없다는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류가 창조한 지식과 축적한 경험은 정치나 이념적으로 말해도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하고 무쌍하다. ‘우’의 극단에서면 우주의 모든 것이 ‘좌’로 보이게 마련이다. 조금 거리가 멀면 모든 것이 ‘극좌’로 보일 수밖에 없다. ‘좌’도 그 극에 서서 보면 모든 것이 ‘우’로 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극’의 병리학이다
해방이란 환희 속에 일본에서 대학이나 전문학교를 다녔던 학병출신들은 어떤 꿈을 간직했을까? 해방공간에서 이들이 끼친 영향은 4·3으로 이어지는 부정적인 면과 한편으로는 당시 문맹사회를 일깨운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당시 산북 ‘제주-성내’에서 활동한 하나의 그룹이 바로 로고스(Logos) 모임이다.
일제강점기 도일한 제주출신 학생들이 해방 후에 귀국하여 새로운 조국에 헌신하려고 뭉친
이들은 정식으로 1946년 3월 로고스 모임을 창설했다. 로고스란 그리스 철학에서 언어를 매체로 이성 또는 그 이성의 작용을 말한다. 회원은 강순현(姜淳現), 김봉현(金奉鉉), 김성만(金聖萬), 김인호(金仁灝), 문국주(文國柱), 문태오(文泰午), 양명률(梁明律), 양세민(梁世民), 이경수(李慶守), 현평효(玄平孝) 등. 이들은 중등학교의 설립을 첫 목표로 삼았다. ‘학술강습회’로 출범하여 초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국어와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 당시 제주농업학교만이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이어서 강습회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래서 ‘제주제일중학원’으로 인가를 받아 운영하였다. 얼마 후 오현단의 제주농업학교의 구교사로 옮겨 ‘오현중(五賢中)학교’라 개칭, 당시 재력이 풍족한 황순하(黃舜河)를 설득시켜 자금을 마련해 운영해 나갔다. 이 무렵 반탁과 찬탁으로 로고스회원들은 이념논쟁으로 불붙었다. 당시 조몽구와 김봉현은 오현중 교사였다. 이어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民戰)이 조직되고 로고스 회원들은 의견이 양분되었다. 민전에 적극 동조하자는 정치지향적인 인사와 그렇지 않은 비정치적 인사들이다. 양명률을 따르는 우파와, 김봉현을 따르는 좌파는 양분되었다. 전도의 학교와 관공서까지 파업을 단행, 행정력이 마비되는 극한상황으로 치달았다. 회원들은 일부 미군정의 체포령에 맞서고 일부는 밀항으로 도일, 또 일부는 교육계로 나가거나 공직에 참여했다.
‘사상의 은사‘라는 말은 시인 고은이 리영희의 화갑기념문집에서 사용한 말이다. “사상의 은사/ 시대의 선구자/ 60년대 70년대 대표적 지성/ 아 이 한반도의 살아있는/ 불/ 얼음/ 우리들의 전위와 후방” 아마도 1980년 쯤이 아니었을까? < 전위의 후방>이란 말에서 어떤 시대적 분위기를 강하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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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밥 한 그롯

詩(시)로 읽는 4․3(37)
곤밥 한 그롯
김은숙

제주시 오라동 어우눌에, 용담동 돔박웃홈에
서귀포시 서귀동 소남머리에, 서호동 시오름 주둔소에
북제주군 조천읍 묵시물굴에 낙선동에도 와흘굴, 도툴굴이며 너븐숭이 애기무덤에도
북제주군 에월읍 빌레못굴에 자리왓에 머흘왓성에도
남제주군 안덕면 무등이왓에 표선면 한모살, 성산면 우뭇개동산에
남제주군 남원읍 송령이골이며 대정읍 사만질앞밭에

한 맺힌 제주 곳곳에
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 같은
여전히 잠들지 못하고 바람울음으로 떠도는
저 수많은 원혼들 앞에
따뜻한 곤밥 한 그릇
지어내고 싶다
——————————————————————————————————-
“밥 먹었어?” ‘좋은 아침’도 아니요, ‘오랜 만이네’도 아닌 지극히 원초적인 물음, “밥은?”. 한줄 문장에 담긴 너무나도 정감 어린 우리의 정서. 밥심으로 산다는 한국인들은 갓 지은 흰 쌀밥 한 숟가락 위에 묵은지 한 점 올려 한번 씹어 넘기는 맛으로 살아왔는지 모른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쌀밥을 꼭꼭 씹어 먹으면 구수한 향내가 콧잔등을 시큰거리게 한다. ‘곤밥 한 그롯’. 배가 고파 허우적거리던 어린 시절, 매일 보리밥만 먹던 소년은 ‘곤밥 한 그롯’을 먹기 위하여 친척집 제삿날만 기다린다. 자정이 가까워야 겨우 눈을 부비고 일어나 맛보는 제사 음식, 그리고 ‘곤밥 한 그릇’. 상상만 해도 꿀맛이다. 그 곤밥을 수많은 4·3혼들에게 올리지를 못했다. 너무 어려워서다. 제주4·3 71주기를 맞아 당시 무력진압에 앞장섰던 군 당국과 경찰이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당시 강경 진압 결정을 내리는 등 결정적 역할을 한 미국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4·3 관련 단체들은 지난해 4월 미국의 책임 인정과 사과를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미 대사관에 전달했으나 반응은 없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국방부와 경찰이 공식 사과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국방부와 경찰이 이제 4·3원혼들의 제사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함께 곤밥을 먹을 일만 남았다. 그렇지만 미국은 곤밥을 싫어하는 것일까? 국방부는 4·3특별법의 정신을 존중하며 진압 과정에서 도민들이 희생된 데 대해 깊은 유감과 애도를 표하며, 진상규명을 위한 정부의 노력에 적극 동참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도 경찰청장이 처음으로 4·3추념행사에 참석해 당시 경찰이 저지른 행위를 반성한다고 밝혔다. 국방부와 경찰은 도민과 함께 원혼들의 제사상 앞에서 함께 곤밥을 먹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의문이 생긴다. 국방부가 4·3사건에 투입됐다가 포상을 받은 군인들의 포상 취소는 검토나 하고 있는지, 사뭇 걱정이 되는 부문이다. 4·3 참극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미군정이 종료된 뒤에도 미국은 미 군사고문단을 남한에 잔류시켜 한국군과 경찰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진상 규명 작업은 여태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인은 곤밥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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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뜨르 비행장

詩(시)로 읽는 4․3(36)

정뜨르 비행장
오영호

굉음에 몸서리치며 들플들 손을 잡고
3천 배 오체투지 천만 번 하고 나서
칠십 년 나이테 돌아
막힌 혈을 뚫고 있다

당신은 누구냐
부릅뜬 하얀 눈물
도두봉 봉화대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갑자기 더운 피 쏟으며
혼절하는 슬픈 영혼

진실을 파묻어버린
먹물 빛 활주로에
동강 난 4월 바람 광란의 춤사위 끝에
허상의 가면을 벗고
소주잔을 붓고 있다.
——————————————————————–4.3은 생채기가 아니다. 생채기라면 긁힌 흔적일 텐데, 4.3은 긁힌 게 아니다. 뼈가 부러지고 가슴이 망가지고, 혈관이 터지고, 상상하지 못하는 상처투성이를 남겼다. 그 4.3의 멍에를 제주사람은 지니고 산다. 제주공항이 그런 곳이다. 정뜨르비행장은 1942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여 1944년 5월 준공된 육군서비행장이었다. 일본군의 결7호작전에 따라 모슬포의 알뜨르에 해군비행장, 신촌 진드르의 육군동비행장, 교래리에 비밀비행장이 건설되면서 확장되었다. 1945년 7월 말부터 8월 초에는 일본군 제96사단 병력이 경비를 맡았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이 공항을 인수하였고 최초의 민항기 운항은 1946년 미 군정청 소속 C-47이 서울-광주-제주 노선에 주 2회 취항하면서 시작되었다. 정뜨르비행장의 역사적 비극은 1948년 4월 3일 민중항쟁부터 시작된다. 미군정과 군경토벌대가 이곳 군비행장으로 끌고 와 민간인을 사살한 후 매장해버렸다. 1948년 12월 말부터 시작해 이듬해 3월까지 주민들을 끌어다가 총살, 암매장했다. 1949년 10월 육군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민간인 249구의 유해가 지상에서 4.5m 깊이, 반원형 구덩이에서 나왔다. 가장 많이 희생된 날은 10월 2일이었다. 일부 희생자들의 몸에는 M1, 칼빈 등 당시 군경이 사용했던 소총 총알이 박혀있었다. 유류품으로는 탄피와 탄두, 버클, 단추, 일본 동전, 고무신을 비롯해 ‘진섭’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알루미늄 숟가락 등 모두 1000여 점이 나왔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500여 명을 연행, 예비 검속했다가 이곳에서 집단학살했다. 총 8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처음에는 프로펠러 군용기가 잔디밭 활주로를 이․착류했다면 지금은 제트기가 아스팔트 활주로를 다니고 있다. 처음에는 군인들만 군사적인 목적으로 드나들었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관광을 목적으로 드나드는 국제공항이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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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샛바람이여-제주4.3항쟁 70주년에 부쳐

詩(시)로 읽는 4․3(35)
아, 샛바람이여-제주4.3항쟁 70주년에 부쳐
백기완

아, 그때 그 벅찬 해방의 감격이 막
밝고 맑은 희망으로 나부끼던 싱그러운 섬마을마다
느닷없이 불을 싸지르고 타다당 집중사격으로
쓰러진 사람, 사람들
자지러지던 어린것은 시끄럽다고 쏴버리고
웬짓이냐 이놈들아, 왠짓이냐 이놈들아 울부짖던
어머니는 첩자라고 갈겨버리고 그 살육
그 끔찍한 범죄가 질서가 되고 역사가 되어온 치욕
통곡마저 반역이 되던 세월
죽고 나서도 죽지 못한 원한이
마치 깔갈한 모래밭에 떠밀린 미역쪼가리마냥
몸부림 쳐 일으킨 샛바람이여
이제는 몰아쳐 이제는 몰아쳐
저 반역의 역사를 발칵 뒤집어엎어라
오늘도 흰구름 이고 껍뻑이는 한라여
그때 그 찢겨진 참해방의 깃발
하늘 높이 하늘 높이 나부끼시라
그날 그 피눈물의 싸움은 패배한 게 아니다
저만치 앞서가는 인류의 영원한 걸라잡이라
아, 천년만년 한결같이 변혁의 샛바람이여
이어차 쳐라쳐라 이어차 철쳐라
이어~차 아어~차 이어~차~ 이어~차~
—————————————————————————————————–
백기완(白基玩)은 백범(白帆) 김구(金九) 선생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백범이 치하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탈옥했었는데, 백기완의 조부 백태주가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돌봐주었다. 백기완은 해방 후 서울로 가서 백범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백범을 따르게 된다. 백범 또한 그를 좋아해서 그가 즐겨 읊던 한시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를 휘호로 써주었다. 백기완은 1960년대 한일협정반대운동을 시작으로, 3선개헌 반대와 유신철폐 등 민주화운동에 투신했으며, 1974년 유신헌법철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여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1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75년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현재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있다.「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가사의 원작의 시 ‘묏비나리’를 짓기도 했다. “미군이 제주도를 거대한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바꾸어 놓는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언급한 사회학자 조지 카치아피카(George Katsiaficas)의 말은 정당하다. 4․3당시 미군의 개입에 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서울 프레스센터 비상시국회의에서 제주해군기지 공사 중단을 촉구하면서 백기완은 “정부는 행정권한을 남용해 강정마을 일대에 ‘제2의 4․3사건’ 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했다. 백기완은 “남북 지도자가 한반도의 허리를 자른 미국에 사과를 요구해야”한다고 강조한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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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34)

詩(시)로 읽는 4․3(34)
취우(翠雨)
정찬일

봄비 맞습니다. 누가 급히 흘리고 갔나요. 밑돌 무너져 내린 잣담에서 밀려나온 시리 조각. 족대 아래에서 불에 타 터진 시리 두 조각 호주머니 속에서 오래도록 만지작거립니다. 손이 시린 만큼 시리 조각에 온기가 돕니다. 온기 전해지는 길에서 비 젖는 댓잎 소리 혼자 듣는 삼밧구석입니다. 푸른 댓잎에 맺힌 빗방울 속이 푸릅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한 밤 한 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매 순간 모든 것이 흔들리고, 빛 속에 숨었던 얼굴들 다 드러나고, 누구도 내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진저리치는 생으로 불거진 물집 하나 서러운 적요로 붉게 물든 열매 하나조차도 투명하게 사그라지는

내게 와서 내가 되지 못한 눈빛들이, 돌을 뚫고 깨부수던 말들이, 견고한 나무의 길로 위장했던 내 비린 상처들이, 어둠을 혼자 견뎌내던 새들조차도 흔들리며 다 흩어지겠습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몸으로 번지는 비취색 나뭇잎 하나 배후로 삼아 한 밤 한 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단 한 번도 따뜻한 적 없는 시리 조각에 잠겨 한 밤 한 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주머니 속 시리 두 조각, 긴 세월 지나도 맞붙이 치는 소리 잇몸 시리게 쩡쩡거립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한 밤 한 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
잃어버린 마을 ‘삼밧구석’의 아픔을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치유의 고장임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주먹을 쥔 결기와 투쟁적 언어로는 역사를 어루만질 수 없다. 취우(翠雨)는 푸른 잎에 매달린 빗방울이다. 곧, 여름비, 녹우(綠雨)를 말한다. 시리는 ‘시루(떡이나 쌀 따위를 찌는 데 쓰는 둥근 질그릇)’의 방언(강원, 경상, 전남, 제주)이다. 안덕면 동광리는 무동이왓, 조수궤, 사장밧, 간장리, 삼밧구석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중산간 마을이었다. 삼밧구석은 삼을 재배하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3당시 46가호의 주민들이 거주하던 임씨 집성촌이었다. 1948년 11월 중순 이후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이 이루어지면서 마을은 모두 파괴되었으며 주민들은 12월경 큰넓궤로 숨어들어갔다. 굴은 토벌대에 발견되고 주민들은 영실 부근 볼레오름까지 갔다가 죽거나 잡혀갔다. 잡힌 사람들은 서귀포 단추공장에 수감되었다가 정방폭포에서 집단 총살됐다. 1947년 8월 ‘보리 성출반대사건’이후 미군정의 주목을 받았던 삼밧구석은 대량학살의 현장이 됐다. 마을로 돌아간 사람들 역시 잠복학살(생화장) 당한다. 마을 입구에는 4․3사건위령비가 세워져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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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시인’

‘요리하는 시인’
김관후/작가·칼럼니스트

< 제주칼럼>제주도에 ‘요리하는 시인’이 있어 화제다. ‘요리하는 시인’이 첫 시집 《낙타와 낙엽》을 도서출판 < 시와실천>에서 상재(上梓)하여 또 한 번 관심을 끌고 있다. ‘요리하는 시인’이며 작가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이지민 시인.
“낮달은/ 싱거운 것들을 담으라 하고 /잠에서 깬 추억들은 비장하게 담으라 하네 //후드득 비 내리고/ 마음갈피 잡지 못하는 내게 /잠잠 하라 차분하라 다독이는데 /자꾸만 마음이 끌려……”
2019년 깊어가는 가을에 시인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출판기념회도 가졌다. 2016년 문학세계 신인상으로 한국문단에 고개를 내밀더니, 직접 운영하는 시인의 집(본초불닭함덕집)에서 문단 동료들과 조촐한 모임도 화제가 되고 있다.
그의 첫 시집의 표제(表題)시 < 낙타와 낙엽>은 이렇게 시작된다. “햇살은 눅눅한 기억을 말리려는데/긴 그림자는 알싸한 공기를 몰고 /낙엽에 드러누워 시집을 읽고 //시집을 읽으려면 옷깃을 여며야 하나 /기억이 바람을 타고 /눅눅한 기억은 말려서 /산들거리는 사막의 저녁” 그리고 < 낙타와 낙엽>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빠른 세월을 탄식하다 /달아난 기억 속 /달 여문 가슴 울컥 맞대면 /담장 하나 넘지 못하고 /드러누운 낙타의 눈물 /서로를 향했어도 철저히 혼자인 /삶을 보채는데.”
시집 해설에서 이어산 시인의 지적처럼 그가 시에서 자각을 한다는 것은 치유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며 바로 미래를 개척해갈 의지는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 속의 시인을 가장 행복다고 했을까? 그래서 시인은 오늘도 붉을 밝히고 자신을 끼적대고 있을까?
시인은 달 여문 가슴을 울컥 맞대면 담장 하나 넘지 못한다. 그것은 드러누운 낙타의 눈물 때문이다. 철저히 혼자인 낙타는 왜 눈물을 흘릴까? 철저히 혼자인 시인은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시인은 오늘밤 마을사람들과 서우봉에 올랐을까?
그리고 ‘요리하는 시인’은 감히 어느 시인도 근접하지 못하는 역사 속에서 시어를 찾기 시작했다. 시 속에서 역사의식을 꿈꾸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참으로 험난한 과정이다. 어느 시인도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시인 이지민의「4월의 너븐숭이」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좌익, 우익 갈 곳 없는 어둠 /길 잃어 헤매다 한 눈 파는 사이 /시커멓게 게워낸 절망의 숱한 언어들 /성난 숨결의 메마른 외침/ 4월을 도둑질하고 /허기진 배 감아쥔 채 미리 운 가슴 /뭇매를 맞듯 밤새 내리친 그 총에 /만신창이가 되었구나……송두리째 뽑힌 자존심마저 잔인한 4월에 쫓겨 /엉덩이 살랑이며 5월로 간다 /4․3의 혼들을 끌어안고”
시인 이지민은 역사의 처참한 비극을 가슴 깊은 속에 끌어안기 시작했다. 제주의 역사가 시인에게 시가 되기 시작했다. 역사가 시가 됨은 이 땅의 시인들의 바라는 오랜 꿈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지민 시인은 여류라는 말을 던져버렸는지 모른다.
나는 2017년 함덕문학 창간호를 발간하면서 이지민 시인을 처음 대면했다. 그 때가 시인이《문학세계》를 통하여 한국문단에 고개를 내민 그 다음해라 여겨진다. 나는 요즈음 가끔 ‘요리하는 시인’의 블로그에서 그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더듬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요리하는 시인’은 오늘 밤도 요리를 하고 밤을 새우면서 아름다운 시어들을 줍고 있다. 꼭꼭 숨어서 형틀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마음을 조아리면서 내면의 아픔을 시어로 찍어 내며 긴 새벽을 기다리고 있다.
‘요리하는 시인’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 ‘요리하는 시인’이 개인의 아픔을 뛰어넘어 역사를 걸머쥔 시인이 되겠다는 다짐이 동료로서 너무나 가슴이 벅차고, 우리 문학이 풍요롭게만 느껴진다. (제주일보 11월 1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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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흘곶에서 우는 새

시-선흘곶에서 우는 새
김관후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기 시작하네
그 울음 숲을 버리고 어디로 향할까
마을주민들 하나둘 대섭이굴로 모여들고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 치마폭으로 감싸안네
검은개 노랑개의 그림자 어른거리고
꼭꼭 숨어라 내일 아침 볼 수 있을까
총소리 코밑까지 밀려와 심장을 흔들 때
도툴굴 목시물굴 벤뱅듸굴로 몸을 숨겼네
꿔 꿩 꿩, 꿩 우는 소리 묻혀버렸네
쌕쌕거려 구르는 방울새 소리
끼끼끼끼끼 청딱따구리 소리도 숨어버렸네
휫휫 휫 휘잇 삐삐삐삐 휘욧 휘욧 휘이 찌잇
되지빠귀 소쩍새 산솔새 종종종 모두 사라졌네
마파람으로 다복솔 잔가지까지 바르르 떨고
까악까악 까마귀가 저승에서 다시 손짓하는데
탕탕탕 탕탕탕 피눈물소리 가까이 들리는데
아아, 선흘곶이 후후 흔들리며 어디로 숨을까
저승으로 날아가 영영 생이별할까
가슴 한가운데 멍 자국이 아픈 세월 말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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