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구와 체 게바라

이덕구와 체 게바라

Ⅰ.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우린 아직 죽지 않았노라/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내 육신 비록 비바람에 흩어지고/깃발 더 이상 펄럭이지 않지만/울울창창 헐벗은 숲 사이/휘돌아 감기는 바람소리 사이/까마귀 소리 사이로/나무들아 돌들아 풀꽃들아 말해다오/말해다오 메아리가 되어/돌 틈새 나무뿌리 사이로/복수초 그 끓는 피가/눈 속을 뚫고 일어서리라/우리는 싸움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노라’ – 김경훈의 시 「이덕구 산전」 전문.

4・3은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시비의 문제이다. 해방이 되자 미군정은 지배의 장막을 치기 시작했다. 미군정시기에 발생한 4․3, 제주민중의 항거와 투쟁은 누구에 대한 항거였으며, 무엇을 위한 투쟁이었는가? 그 항거와 투쟁의 전선에 이덕구(李德九, 1920년~1949)가 있었다.
1945년 9월8일 맥아더 포고령이 발표된다. 군인 경찰은 물론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미군이 차지한다. 참다못한 제주도민들은 1947년 3월1일 독립만세를 재연했다. 경찰은 총질을 시작했다. 1948년 5월 10일 단독선거를 실시했고 도민은 선거를 거부하고 산에 오른다.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red island)’라 부른 미군정은 ’초토화작정을 펼쳐 중산간마을 95%를 불태우고, 3만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다. 미군정이 자행한 제노사이드(genocide)이다.
이덕구는 조천읍 신촌리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리쓰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學) 경제학부 재학 중 학병으로 관동군에 입대했다. 1945년 귀향한 뒤 조천중학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남로당 제주도지부 군사부장이며 김달삼(金達三)이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러 황해도 해주로 떠난 뒤 인민유격대장을 이어받았다. 결국 토벌대의 진압에 덜미가 잡힌다. 1949년 6월 7일 새벽 3시, 섬을 탈출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李鉉相)과 합류할 계획으로 하산하다가 경찰에게 포위됐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 6월 8일 관덕정 광장에는 십자형 틀에 묶인 시신이 전시되었다.
처연한 비운의 혁명가 이덕구. 일가족이 전멸되었다. 작은가오리오름 부근에서 최후를 맞는다. 교전과정에서 자결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에서 질문 하나가 있다. 남로당이 민중의 에너지가 된 점은 평가되지만 미군과 이승만 집단이 제주민중을 직접 살해한 구실을 그들이 일부 제공하지 않았느냐는 의문 말이다.

‘친애하는 장병, 경찰관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펴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총은 우리들이 피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총부리를 당신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 앞에 쏘지 말라. 귀한 총자 총탄 알 허비 말라.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준다. 그 총은 총 임자에게 돌려주자. 제주도 인민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로 쫓겨내기 위해 매국노 이승만 일당을 반대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부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은 인민의 편으로 넘어가라.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 지켜주는 빨치산들과 함께 싸우라. 친애하는 당신들은 내내 조선인민의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라’ -1948년 10월 24일 이덕구의 포고문.

이덕구의 포고문 내용 중에 < 침략자 미제>와 < 매국노 이승만>이라는 문구가 눈에 밟힌다. 4․3당시 남한 정부는 수립되지 않았으며, 미군정이 한반도 이남을 관할하고 있었다. 민중을 진압한 장본인은 미군정이었다. 무력으로 진압한 장본인도 미군정이었다.
“상공엔 미군정찰기가 날고, 제1선에는 전투를 지휘하는 미군 지프가 질주하고 있으며, 해양에는 근해를 경계하는 미군합의 검은 연기가 끊일 사이 없이 작전을 벌였다.”는 당시 조선중앙일보(1948년 6월 6일자) 보도는 무엇을 말함인가?
“I don’t care about the cause, my mission is to suppress only(원인에는 관심이 없다. 내 임무는 진압뿐이다)”라는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은 2주면 사태를 평정할 것이라고 했다. 미 군사고문단이 1948년 가을 이후의 초토화 작전에 직·간접으로 개입하였다. 정부는 그해 11월 17일 제주도 전역에 걸쳐 계엄령(戒嚴令, Martial law)을 선포하고 강경진압을 전개했다. 이덕구는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Ⅱ.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

‘(전략)…어른이 되었을 때 가장 혁명적인 사람이 되도록 준비하여라. 이 말은 네 나이에는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정의를 지지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라. 나는 네 나이에 그러지를 못했단다. 그 시대에는 인간의 적이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네게는 다른 시대를 살 권리가 있다. 그러니 시대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후략)’-1966년 2월 체 게바라가 딸 일디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혁명은 오직 무장봉기로만 가능하다’는 휴머니스트이며 리얼리스트인 체 게바라(Che Guevara,1928~1967). 아르헨티나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저술가,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 부유한 집안의 의사로서의 삶을 버리고 혁명가로서 삶. 과테말라․쿠바․콩고․볼리비아로 이어진 붉은 궤적. ‘전사(戰士) 그리스도’로 추앙받는 사람. 남미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 앞에 가장 엄격했던 그 사람 체 게바라.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그를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극찬했다. 미국에서조차 가장 뜨겁게 인기 있는 인물로 소비되고 있다. 혹자는 ‘혁명도 사회주의도 사라진 지금 오로지 체 게바라만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그의 사진은 붉은 티셔츠에 인쇄되어 젊은이의 가슴팍을 장식한다. 그의 이름이 들어간 시계, 심지어 맥주까지 나오면서 ‘체 게바라’라는 이름은 하나의 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다.
체 게바라는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이 처한 현실과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는다. 과테말라에 머물면서 하코보 아르벤즈 정권이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생각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때 아르벤즈 정권은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츠(United Fruit Company)가 소유한 토지를 국유화하려 했다. 미CIC는 군부를 움직여 그 정권을 엎어버렸다. 그는 “민중은 물질적으로 굶주렸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에 더욱 굶주려 있다”는 하코보 아르벤즈의 사상에 대한 경외심을 간직하게 된다.
체 게바라는 1954년 과테말라를 거쳐 멕시코로 망명하였으며, 그곳에서 쿠바출신의 사회주의혁명가들을 만난다. 쿠바는 미국과 소수부호들이 다스리는 나라였으며, 인민들은 굶주리고 탄압받고 있었다. 쿠바혁명이 성공한 뒤에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볼리비아까지 가서 목숨 걸고 또 혁명을 일으키려다 죽은 이상주의자이다. 쿠바혁명 승리 후 토지개혁의 준비에 착수하였다. 쿠바국립은행 총재, 쿠바 산업부장관, 1962년에 쿠바통일혁명조직 비서국에서 일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에서 군부쿠데타를 통해 집권하는 독재자들은 거의 미국의 군사학교 출신이었다.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경우 헌법을 수호해야할 책임이 있는 군대, 경찰, 의회가 등을 돌리거나 방관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Ⅲ. 죽음 앞에 선 혁명가
‘관덕정 광장에 읍민이 운집한 가운데 전시된 그의 주검은 카키색 허름한 일군복 차림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집행인의 실수였는지 장난이었는지 그 시신이 예수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에 높이 올려져있었다. 그 때문에 더욱 그랬던지 구경하는 어른들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심란해 보였다. 두 팔을 벌린 채 옆으로 기울어진 얼굴, 한쪽 입귀에서 흘러내리다 만 핏물 줄기가 엉겨 있었지만 표정은 잠자는 듯 평온했다. 그리고 집행인이 앞가슴 주머니에 일부러 꽂아놓은 숟가락 하나, 그 숟가락이 시신을 조롱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었다.’-현기영의 소설 『‘지상의 숟가락 하나』 중에서(68-69쪽).

이덕구의 시신은 효수(梟首)되어 전봇대에 걸렸다. 시신 옆에는 ‘이덕구의 말로를 보라’를 글귀가 붙어있었다. 시신은 대중에게 전시되었다가 남수각에서 화장됐으나, 다음 날 큰비가 내리는 바람에 유골이 빗물에 떠내려갔다. 광장에 내걸린 건 유격대장의 시신뿐만이 아니다. ‘폭도’이거나 ‘폭도로 몰린 사람들’까지 관덕정 앞에 끌려나와 효수됐다.
‘공비적멸가(共匪寂滅歌)’가 드높이 울려 퍼졌다. 그 광장에 목 잘린 머리통들이 등장했다. 잘린 목 그루터기에 살점이 너덜너덜한 머리통들을 창끝에 호박통 꿰듯 꿰어 들고 혹은 머리칼을 움켜서 허리춤에 대롱대롱 매달고서 토벌대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읍내 한길을 동서남북으로 행진했다.

‘굳건한 이념은 고도의 기술도 무너뜨릴 수 있다/전쟁에 충실한 미군들의 최대 약점은/그들의 맹목적인 전쟁관에 있다, 그들은/자기들과의 전쟁에서 죽은 자들만 존경할 뿐이다/그런 자들과의 싸움에서 우리는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단지 무모한 희생만은 피해야 한다//그러나 오로지 투쟁만이 미국을 물리칠 수 있다/이 투쟁은/단지 최루탄에 대항하여 돌을 던지는 시가전이나/평화적인 총파업이어서는 안 된다/또한 괴뢰정부가 흥분한 민중에 의해/불과 며칠 사이에 붕괴되게끔 하는 것/그런 싸움이 되어서도 안 된다/그 투쟁은 장기적이어야 하며,/또 적들로 하여금 충분히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이 투쟁의 전선은 게릴라들이 잠복하는 곳,/바로 그곳이다/도시의 중심,/투사들의 고향,/농민들이 학살당하는 곳/적들의 포화에 파괴된 마을과 도시들이/바로 전선인 것이다//적들이 우리로 하여금 싸우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다/우리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우리는 오직 싸움 준비를 하고/그 싸움을 시작할 결단만을 내릴 뿐이다’-체 게바라의 시 「싸움의 이유」 전문.

체 게바라는 말했다. “민중의 힘은 정부군을 이겨낼 수 있다. 우리는 혁명을 이루기에 가장 적당한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민중봉기는 그런 조건들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그는 미군의 지원을 받는 볼리비아 독재정권의 정부군에 부상을 입은 몸으로 체포되었다. 그의 남미에서의 인기와 남미 국가들을 장악하는 데 골머리를 앓던 미국은 그의 총살에 동의했다.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 9일 마리오 테란이라는 볼리비아의 하사관의 손에 의해 사살되었다. 죽기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알아두어라 너는 지금 사람을 죽이고 있다” 체 게바라를 향해 방아쇠를 당신 마리오 테란은 6개월 후 자신의 집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체 게바라가 죽은 후 그의 시신을 확인한 영국의 < 가디언> 기자는 이렇게 썼다. “나는 1963에 쿠바에서 체 게바라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미국에 대항한 전투에서 전 세계의 급진적인 군대를 지휘하려고 시도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제 그는 죽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그와 함께 사라질 수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체 게바라는 사후 그 영향력이 더 커져갔다. 그의 사체는 30년 후 볼리비아에서 발굴 되어 쿠바로 옮겨졌다. 그는 쿠바혁명의 성공 물꼬를 튼 산타클라라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 추억했다. “에르네스토는 진실에 열광적이었습니다. 진실은 그의 환영이었지요. 전투할 때는 냉정했고 혁명과 관련된 모든 일에 굽힐 줄 몰랐던 만큼 그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유머가 넘치는 아이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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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암은 왜 우는가-4․3 추념일 68주년 아침에

詩(시)로 읽는 4․3(26)

현무암은 왜 우는가-4․3 추념일 68주년 아침에
서해성

제주에 널린 현무암에 어째서 구멍이 많은 줄 아는가.
한날한시에 모여서 운 여인들 눈물 자국에 파인 까닭이다.
제주에 널린 유채꽃밭이 어째서 한날한시에 노랗게 피어나는 줄 아는가.
잊어도 아주 잊지는 말아다오
돌 틈 사이에서 부르는 까닭이다.
제주 중산간 새별오름 지나 이달봉이 어째서 촛대봉을 품고 사는지 아는가.
한날한시에 촛불 한 자루 올려 달라
바위손 모아 비손하는 까닭이다.
송악산 밑 알뜨르비행장 백조일손지묘가 어째서 백조일손지묘인지 아는가.
한날한시에 죽은 아방 어멍 한날한시에 돌아오고도 싶은 까닭이다.
제주에 널린 현무암이 어째서 구멍 숭숭 우는 줄 아는가.
한날한시에 쓰러진 바람이 죽은 자들 이름을 여적지 숨어 부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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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암(玄武巖, Basalt)은 화산 활동으로 생성된 암석의 일종으로 거무스름한 색이 특징적이다. 화산활동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제주현무암은 대자연이 만들어낸 작품으로 제주에서만 볼 수 있다. 송송 뚫린 구멍을 기공(氣孔)이라고 한다. 용암이 식을 때 가스가 빠져나온 흔적이다. 그 기공이 바로 시인의 눈에는 여인들의 눈물 자국으로 파인 것으로 보았다. 당신은 한날한시에 모여 우는 여인들과 한날한시에 촛불 한 자루 올리는 사연과 한날한시에 쓰러진 바람이 죽은 자들을 부르는 까닭을 아는가?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는 조상은 백 명 자손은 하나인 무덤이다. 모슬포경찰서 관할 양곡 창고에는 예비검속으로 1950년 7월 초부터 붙잡혀온 347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1950년 8월 20일(음 7월 7일) 밤중에 이들 중 250명가량을 창고에서 끌어내어 섯알오름 기슭에서 새벽 2시와 5시경에 61명, 149명으로 나누어 총살하였다. 백조일손희생자란 이 때 희생된 210명~250명 중 1956년에 발굴되어 현 묘역에 안장된 132명을 말한다. 시신의 신원을 구별할 수 없어 132개의 칠성판에 큰 뼈를 대충 수습하여 현재의 묘지에 이장했다. 1959년 5월 8일 묘역에 위령비를 건립하였으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4․3사건은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하고 부수어버렸다. 전두환 정권 때 교과서는 4․3사건을 폭동사건으로 지칭하며 공산 무장폭도가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린 남한교란 작전 중 하나라고 서술했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과 같은 연좌제로 인해 감시받고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았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시민사회에서 4․3진상규명을 요구해오며 4․3특별법이 제정되고 세상에 제대로 빛을 보게 되었다. 1993년 8월 24일 새로운 위령비가 묘역에 건립되었으며 2007년 12월 31일에는 섯알오름학살터가 정비되어 2008년부터는 음력 7월 7일에 학살터인 섯알오름에서 백조일손유족회와 만뱅디유족회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합동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만뱅디유족회는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한림수협창고와 무릉지서 수용자 60명이 먼저 학살당하였는데 이들과 관련된 유족들의 모임이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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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의미

詩(시)로 읽는 4․3(25)

4월의 의미
고승완

4월을 간직한 비문들
4․3평화공원 콘크리트 벽에 갇혀버린 한 맺힌 이름들
한라산 기슭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영혼들
이제는 그대들에게 영예로움을 선사할 때다

그들의 외침은, 통일!
처절한 절규였습니다
그들의 붉은 피는, 배달겨레!
값진 죽음이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그들
돌아오지 못하는 그들
뜨거운 피를 뿌려도
금수강산의 냉전은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들판으로
가슴에서 마음으로
숨이 끊기면서도 부르짖던 4월,
통일이 되면 다 말할 수 있으리라

언제면 냉랭한 가슴이 열려
목청껏 소리 질러 보려나
“부끄러운 자는 가거라!”
“대한독립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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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들은 통일된 나라를 원했다. 통일정부와 친일청산을 원하는 도민들의 첫 항쟁이 1947년 3․1발포사건에 이은 3․10 총파업이다. 질문을 던져보자. 4․3이 한반도를 적색으로 만들려고 한 무장봉기인가. 일본이 남긴 소총 몇 점으로 미국에 대항해서 싸우겠는가. 바로 앉아서 죽느니 서서 싸우자는 것이다. 4․3 이후에는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벌였다. 4․3은 항쟁이다. 여기서 항쟁은 민족주의적 항쟁이다. 분단을 거부하고 통일정부 세우자,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주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한국사회의 모든 모순과 불합리가 분단에서 왔다. 중요한 건 해방공간 3년의 역사다. 친일파와 이승만 정권으로 무얼 하겠는가? 해방공간 3년, 우리나라 기초 역사를 바로 세워야 언젠가 다가올 통일의 순간에서 남쪽이 발언권이 가능하다. 그 숙제는 바로 통일 조국, 친일파 척결이란 대한민국의 첫 번째 민주주의 운동이 4․3이었다는 정명을 백비에 새기는 것이 숙명이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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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우수(憂愁)’, 르 클레지오의 새벽바위

광치기해변은 르 클레지오(J.M.G. Le Clézio)가 ‘새벽바위(Rocher de laube)’라 일컫는 성산일출봉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다. 천연하도록 아름다운 해변이다. 파도가 미친 듯 몰아칠 때는 범접하기 어려운 곳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바람이 잦아들며 바닷물이 물러남 그 자리에 드러난 초록빛 너럭바위 해변은 고혹적인 아름다움과 광대한 평화로움 그 자체다.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르 클레지오는 제주섬에 머물면서 직접 취재, 집필한 < 제주기행문>을 유럽 최대잡지 『지오(GEO)』 창간30주년 기념특별호(2009.3)에 ‘제주매력에 빠진 르 클레지오’란 제목으로 게재함으로써, 제주에 대한 ‘이유 있는 사랑’을 드러냈다.
그는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 ‘유목민 작가’답게 성산일출봉에서 인도양의 모른 봉을, 당신(堂神) 조각상에서 마르키즈 제도 폴 고갱 무덤 앞의 오비리 조각상을, 돌탑 꼭대기의 수리 형상에서 멕시코 중부 푸레페차 원주민 마을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를 비롯한 수많은 나라에 머물렀던 그는 2007년 처음으로 제주에 발을 디뎠다. 지금도 전 세계를 여행하며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그가 유독 제주와 해녀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작품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시작은 작가가 여덟 살 때 지오그래피 매거진에서 본 해녀에 관한 기사였다. 맨몸으로 특별한 장비도 없이 바다에 들어가 전복이며 문어 등을 채취하는 여성의 모습은 소년에게 환상적으로 다가왔다. 수십 년이 지나 제주섬에 온 그는 비로소 해녀를 실제로 보게 되었다.
‘프랑스 문단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프랑스 태생 르 클레지오. 그의 선조들이 대를 이어 둥지를 틀었던 인도양의 섬나라 모리셔스 공화국(Republic of Mauritius)은 정신적 모태이자 문학적 고향. 프랑스의 저명 작가가 한국을 소재로 글을 쓴 것은 1901년 6월 서울을 방문한 피에르 로티(Pierre Loti)의 < 서울에서>란 글 이후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르 클레지오는 ‘제주’에서 ‘모리셔스’를 발견했고, 그것은 화산섬이라는 자연환경의 동질성뿐 아니라 4․3의 아픔이 아직 살아있는 제주와, 과거 열강의 식민지로서의 슬픔을 간직한 모리셔스의 역사적 동질성에 공감한 것이다. 그가 제주섬과 모리셔스를 ‘자매섬’으로 표현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오늘날 제주에는 달콤함과 떫음,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있다. 포록과 검정. 섬의 우수(憂愁)를 우리는 동쪽 끝 성산 일출봉 즉 ‘새벽바위’라 불리는 이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남한을 뒤흔들고 한라산을 생성한 마지막 화산 폭발로 바다에서 솟아오른 화구다. 바위는 떠오르는 태양과 마주한 검은 절벽이다. 한국 전역에서 순례자들이 첫 해돋이의 마술적인 광경에 참석하러 오는 곳이 바로 여기다. 설날 햇빛은 그들이 일 년 내내 간직한 상서로운 일들을 가져올 것이다. 이 바위는 다른 터, 모리스 섬의 모른(Morne) 바위를 내게 상기시킨다. 풍경은 같은 비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48년 9월 25일 아침에 군인들이 성산포 사람들을 총살하기 위하여 트럭에서 해변으로 내리게 했을 때 마을사람들 눈앞에 보였던 게 이 바위다. 나는 그들이 이 순간에 느꼈을 것, 새벽의 노르스름한 빛이 하늘을 비추는 동안에 해안선에 우뚝 서 있는 바위의 친숙한 모습으로 향한 그들의 눈길을 상상할 수 있다. 모리스 섬의 모른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이 인도양으로 불쑥 나온 바위 꼭대기까지 올라갔고, 군인들이 도착하는 걸 보았을 때 – 사람들은 군인들이 노예들의 해방을 알리러 가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총을 들고 사람들을 해방하러 가겠는가? – 그들은 허공에 몸을 던졌다.”-르 클레지오의 < 제주기행문> 중에서(『지오(GEO)』2009년 3월호).

4․3당시 성산포 사람들을 끌고 와 트럭에서 해변으로 내리게 했을 때 그들의 눈앞에 보였던 그 바위 성산일출봉과 광치기해변. 민병대는 잡아온 주민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가 대부분 총살했는데, 그 장소가 성산포 ‘터진목’과 ‘우뭇개동산’이다.
르 클레지오는 1948년 학살사건이 일어난 성산일출봉에 올라 노예들의 봉기가 일어난 모리셔스의 모른 바위를 떠올렸다. “이제 잔인했던 과거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 피를 마신 모래 위에서 뛰놀고 있다”고 말한 그는 “감동적이면서도 끔찍한 4·3이야기는 슬프면서도 동시에 섬에 스며든 생존의 열망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고백했다. 르 클레지오는 제주를 정의하는 키워드로 ‘insularity’란 단어를 선택했다. ’섬나라 근성‘이 아닌 ’고립‘, ’근원적인 섬의 모습‘이란 의미에 가깝다. 그는 제주도와의 인연은 각별하다. 그는 제주도와 그의 고향인 인도양의 섬나라 모리셔스와 동질감을 여러모로 느낀다고 했다.
르 클레지오는 “나의 정신적인 고향은 모리셔스섬이며 여전히 나의 국적도 모리셔스다”고 할 만큼 ‘섬의 시람’이다. 그는 모리셔스섬을 사랑한 것만큼 그는 제주섬을 사랑한다. 모리셔스섬 사람들이 그 섬의 아닌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서 핍박당한 아픔이 있듯이 제주섬에도 그 같은 아픈 역사가 있었다.
모리셔스는 아프리카의 동부, 인도양 남서부에 있는 섬나라이다. 자연도 제주도와 비슷하다. 화산 폭발로 인해 생성된 섬으로 추정된다. 유럽인들이 이 섬을 발견했을 당시 이 섬은 무인도였다. 대한민국과는 1971년, 북한과는 1973년에 동시 수교하였다. 2017년 르 클레지오는 소설집 『폭풍우』(원제: Tempete: Deuxnovellas)를 출간하였다. 그 첫머리에 “제주 우도의 해녀들에게”라는 헌사가 붙었다.『폭풍우』는 제주가 아름다운 섬일 뿐만 아니라 4․3의 상처와 고통을 지닌 곳이라는 걸 에둘러서 이야기하는, 서정적인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르 클레지오는 2007년 처음으로 제주에 발을 디뎠다. 그가 유독 제주와 해녀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작품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녀뿐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과 가슴 아픈 역사 등 제주의 정체성을 이루는 많은 요소들이 그의 정신적 모태이자 문학적 고향인 모리셔스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그 에게 제주섬은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있는 땅”이며 “확신의 땅이라기보다는 감성의 땅”이다. “제주도는 세계에 얼마 남지 않은 자연을 갖고 있는 섬”이라고도 했다.

“성산일출봉을 보고 있노라면 마다가스카르 동쪽의 화산섬 마우리티우스의 모른 봉이 떠오른다. 똑같은 비극을 담고 있다. 성산일출봉은 제주4·3사건 때 민병대에 끌려온 성산 마을 주민들이 죽어가면서 봤던 바로 그곳이다. 마우리티우스의 모른 봉은 반란 노예들이 인도양으로 솟아오른 봉우리 끝까지 기어올라 허공에 몸을 던진 곳이다.”-르 클레지오의 < 제주기행문> 중에서(『지오(GEO)』2009년 3월호).

르 클레지오는 “제주기행문”에서 하멜의 표류에 대한 상상부터 성산일출봉, 돌하르방, 샤머니즘, 4․3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으면서 제주인의 아픔을 공유하는 모습을 보였다.
4․3광풍이 온 섬을 휩쓸던 시절, 어디 하나 상처를 입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 성선포도 그랬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해안에서 벌어진 처참한 슬픔과 분노의 역사는 시간과 더불어 뇌 속에서 과연 사라질 것인가? 4ㆍ3 당시 민병대에 끌려온 주민들이 죽어가면서 봤던 바로 그곳이다. 마우리티우스의 모른봉은 반란 노예들이 인도양으로 솟아오른 봉우리 끝까지 기어올라 허공에 몸을 던진 곳이다.
4․3사건은 1947년을 기점으로 1954년까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어디 그 뿐인가? 성산포경찰서에 수감되었던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수장(水葬)은 1950년 7월 29일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성산읍에서는 약 445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 중에서 200명 이상이 터진목에서 학살되었다.
성산포 터진목에는 ‘제주4․3성산읍희생자위령비’가 일출봉을 등지고 서있다. 그 곁 바다 쪽으로 ‘제주매력에 빠진 르 클레지오’에서 발췌한 글귀가 음각되어 있다. 기념비는 가로 1.7m, 세로 0.8m, 높이 0.4m 크기로 표면이 곳선 형태다.

“이 모든 것은 1948년 4월 3일에 제주에서 군대와 경찰이 양민학살(인구의 10분의 1)을 자행한 진부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 잔인한 전쟁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다. 아이들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자신들 부모의 피를 마신 모래에서 논다. 매일 아침 휴가를 맞은 여행객들은 가족들과 함께 바위 너머로 솟는 일출을 보러 이 바위를 오른다. 숙청 때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을 읽은 시인 강종훈 조차 시간의 흐름에 굴복했다. 그가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그의 시 한편 한편이 그 9월25일의 끔찍한 흔적을 지니고 있다. – 그걸 뛰어넘을 필요성도 알고 있다.” -르 클레지오의 < 제주기행문> 중에서(『지오(GEO)』2009년 3월호).

“새가 날아가다가 아름다운 곳을 찾았습니다. 이 아름다운 곳에 매일 오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제주를 찾았습니다.” 르 클레지오는 자신의 제주 방문을 새의 비행에 비유했다. 아름다운 곳을 방문하게 되면 또다시 마음이 끌려 찾게 되듯이 제주는 그러한 땅이라고 말했다. 그가 제주도의 매력에 빠진 것은 시인 강중훈을 알면서다. 강중훈 시인을 통해 제주의 비극적 역사인 4·3을 체험할 수 있었고, 제주최고의 절경 가운데 하나인 성산일출봉을 만났다.
2007년 11월 8일, 시인 강중훈이 운영하는 민박 ‘해 뜨는 집’에 프랑스 제5채널 TV제작진이 르 클레지오와 함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리고 다음해 1월 18일부터 1월 22일까지 그는 ‘해 뜨는 집’을 다시 찾았다. 이처럼 시인 강중훈과 르 클레지오의 우정은 시작되었다. 그 후 시인 강중훈은 국제PEN한국본부 제주지역위원회 회원들과 함께, 2013년 6월 3일 모리셔스 공화국을 찾았다. 제주섬과 모리셔스섬은 ‘형제’처럼 닮았음을 확인하기 위한 걸음이다. 흑인 노예들이 섬 문화를 일궜던 모리셔스 공화국은 제주섬 못지않게 천혜의 자연과 역사문화를 갖고 있다는 점 말고도 제주가 이어도라는 이상향을 꿈꾸듯, 그곳 역시 유토피아를 꿈꾸던 정서가 맞아떨어진다고 느끼고 싶었으리라. 모리셔스의 주민들도 오랜 시간 핍박 받으며 살아온 아픈 역사가 제주사람들과 너무 닮았음을 확인하고 싶었으리라. 그래서 시인 강중훈이 시 「섬의 우수」를 써내려갔는지 모르겠다.
“여기 가을 햇살이/ 예순 두해 전 일들을 기억하는 그 햇살이/ 그때 핏덩이던 할아비의 주름진 앞이마와/ 죽은 자의 등에 업혀 목숨 건진/ 수수깡 같은 노파 잔등 위로 무진장 쏟아지네/ 거북이 등짝 같은 눈을 가진 우리들이 바라보네/ 성산포 ‘앞바를 터진목’/ 바다 물살 파랗게 질려/ 아직도 파들파들 떨고 있는데/ 숨비기나무 줄기 끝에/ 철 지난 꽃잎 몇 조각/ 핏빛 태양 속으로 목숨 걸 듯 숨어드는데/ 섬의 우수 들불처럼 번지는데/ 성산포 4·3위령제령재단 위로/ 뉘 집 혼백인양 바다갈매기 하얗게 사라지네”-강중훈의 시 「섬의 우수」전문.

섬사람들은 어디에 있던 바다로 향해 있다. 침략의 위험이 오는 것도 바로 바다이다. ‘섬의 우수’는 바로 4․3의 언어이다. 오늘날 잔인한 전쟁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지만,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그 해변에서 자신들 부모의 피를 마시며 그 섬을 탈출하려는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
르 클레지오의 모리셔스섬과 강중훈의 제주섬은 ‘섬의 우수’라는 동질성으로, 과거 강대국의 침략으로 빚어진 역사적 체험을 문학의 언어로 바꾸기 위한 고통스러운 작업이 계속 전개될 수 있으리라. 고난의 땅 섬에서 언어 찾기는 바로 이 시대 작가의 몫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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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을동

詩(시)로 읽는 4․3(24)

곤을동
현택훈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안드렁물 용천수는 말없이 흐르는데
사람들은 모두 별도천 따라 흘러가 버렸네
별도봉 아래 산과 바다가 만나 모여 살던 사람들
원담에 붉은 핏물 그득한 그날 이후
이제 슬픈 옛날이 되었네
말방이집 있던 자리에는 말발자국 보일 것도 같은데
억새밭 흔드는 바람소리만 세월 속을 흘러 들려오네
귀 기울이면 들릴 것만 같은 소리
원담 너머 테우에서 멜 후리는 소리
어허어야 뒤야로다
풀숲을 헤치면서 아이들 뛰어나올 것만 같은데
산 속에 숨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지
허물어진 돌담을 다시 쌓으면 돌아올까
송악은 여전히 푸르게 당집이 있던 곳으로 손을 뻗는데
목마른 계절은 바뀔 줄 모르고
이제 그 물마저 마르려고 하네
저녁밥 안칠 한 바가지 물은 어디에
까마귀만 후렴 없는 선소리를 메기고 날아가네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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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을동(坤乙洞)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 화북천 지류를 중심으로 밧곤을, 가운데곤을, 안곤을로 나눠진다. 고려 충렬왕 26년(서기 1300년)에 별도현(別刀縣)에 속한 기록이 있듯이 설촌된 지 7백년이 넘는 마을이다. 주민들은 농사를 주로 했으며, 어업도 겸하면서 43호가 소박하고 평화롭게 살았다. 어느 날 갑자기 평화로운 이 마을에 비극이 찾아왔다. 1949년 1월 4일 오후 3~4시께 국방경비대 제2연대 1개 소대가 마을을 포위했다. 군인들은 안곤을과 가운데곤을의 집집마다 불을 붙이며 주민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젊은 사람 10여명을 안곤을 바로 앞 바닷가로 끌고 가 총살했다. 또 살아남은 젊은 남자 10여명을 5일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연대 밑 ‘모살불’(현재 화북등대) 해안에서 총살했다. 이후 군인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밧곤을 28가구도 불에 태워 없애버렸다. 이로써 오랜 세월 삶을 영위해오던 67호의 적지 않던 마을이 하루 사이에 한꺼번에 사라졌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곤을 마을 사람들은 인근 ‘새곤을’(현재 화북1동 4047번지 일대)로 이주해 움막 등을 지어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가난하게 살았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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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비문

詩(시)로 읽는 4․3(23)

잔인한 비문
박남준

산 자의 지문으로 죽은 자의 침묵을 써왔노라
죽은 자의 노래로 산 자의 슬픔이 위로받으려니

봉인된 돌이 있다
쓰이지 못한
새기지 않은 이름이 갇혀 있는,
살아서는 낙인 붉은 사람들의
뼈와 살로 화석을 이룬
이를 악물고 그을린 울음 같은 비가 있다
저기 떠난 자의 다홍빛 명정에
흰 글씨를 써넣어야 하는가
지박령의 검은 이름표 불랙리스트로
탕탕 저격해야 하는가

백비, 부를 수 없어 말문을 닫은 묵비
때가 되었다 누워있는 돌이 일어나
사람의 말로 외칠 것이다
증언되리니 아비와 그 어미와
아이들의 한라산이 매장당한 근대사
참으로 지독하고 잔인했던 평화의 피가
…………………………………………………………………………………………………………………………….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세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4․3백비(白碑), 이름 짓지 못한 역사.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왔다. ‘탄압이면 항쟁’이라는 제주도민들이 보여줬던 저항 정신이야 말로 역사를 발전시키는 정신이다. 70년 전 친일 부역세력은 이 나라의 독립 세력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학살하고 지금까지 지배 세력으로 군림한다. 국가는 도민들을 상대로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4․3의 모든 일은 미군정을 통해 이뤄졌다. 미군정은 해방 직후 한반도 38선 이남에 존재한 실질적 통치기구였다. 미군정은 제주도를 ‘사상이 불순한 빨갱이 섬’으로 매도해 제주 사람들을 탄압했다. 4․3 직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또 “10%정도는 총으로 무장하였고, 나머지는 일본도와 재래식 창으로 무장하였다”고 밝혔다. 미군보고서에도 1948년 11월부터 제주섬에 대한 국방경비대 9연대의 초토화 작전을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했다. 미군정은 초토화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정찰기를 동원 했을 뿐만 아니라 토벌대의 무기와 장비도 적극 지원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제주 민중을 대량 학살한 책임은 이승만 정부와 미국에게 있다. 미국 정부는 4.3 학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해야 한다. 4.3 당시 미군정과 미국 군사고문단의 역할에 대한 진상조사에 적극 나서야 한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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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평권

詩(시)로 읽는 4․3(22)

권평권
고은

1945년 9월 8일
왠지 인천 앞바다 여틈하게 보이던 날
미군의 인천상륙 환영하러 나갔던
인천노조 지도자 권평권 위원장
아직 무장해제가 안 된 일본군에게 총 맞아 죽었다
이 밖에도 여럿이 쓰러졌다
상륙한 미국은 일본군 편들었다
왜냐
해방군이 아니었으므로
점령군이었으므로
맥아더 일반명령 제1호의 점령군이었으므로
그 후리후리한 키 뻣뻣이 굳어버렸다
그 뒤로 내내
이 땅에서는 순정이란 순정은 다 굳어버렸다

그러나 이 땅 어디에도 어느 골창에도
개죽음이란 없다
그 죽음 쌓여 오늘의 모순에 이르렀다

성조기가 가장 잘 보이는 이 땅에서
일장기가 가장 잘 보이는 이 땅에서
——————————————————————-
미국 육군대장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태평양미육군사령관이었다. 미군정(美軍政, 1945.8.15~1948.8.15) 3년 동안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본통치 방침은 ‘맥아더 포고(布告)’에 집약되어 있다. ‘맥아더 포고’는 헌법이 없던 그 시절, 미군정 점령정책의 기본이 되는 법규로 활용되었다. 제1호는 “본관 휘하의 전첩군(戰捷軍)은 본일(本日)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함”이라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4․3에 대한 연루자들을 처벌할 때 적용한 법규는 맥아더 ‘포고 2’였다. 미국이 점령한 사이에 터진 4․3의 항거와 투쟁이 누구에 대한 항거였으며, 무엇을 위한 투쟁이었는가. < 권평권>인천노조위원장은 미군을 환영하러 나갔다가 일본군에게 총을 맞아 죽었다. 미군은 점령군으로 이 땅을 밟았으며, 미군은 철저하게 일본군 편이었다. 미군은 한국인에 의해 조성된 좌파성향의 조선 인민공화국과 우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정부는 행정․ 입법․ 사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된 미59군정중대 본부에도 성조기(星條旗)가 휘날렸다.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선글라스에 옥수수파이프, 팽팽한 모자에 잘 다린 바지로 상징되는 튀는 옷차림에 대해 70대의 5성 장군이 19살 소위같이 다닌다는 비판도 있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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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와 문지기

김관후/작가·칼럼니스트
풍찬노숙(風餐露宿)!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한데서 먹고 잔다. 독립 투쟁에 헌신한 백범(白帆) 김구(金九)의 삶은 그야말로 풍찬노숙의 나날이었다. 어디 백범뿐이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고심분투한 애국지사들 모두가 풍찬노숙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문지기! 문지기는 문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데 과거 애국지사 중에 굳이 풍찬노숙의 문지기를 자처하며 나선 분들이 있으니, 그 역시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일이다. ‘어든 대문을/ 들어갈꼬/ 서울 남대문/ 쇠 걸었네/ 그러나저러나/ 들어옴세/ 남대야/ 문어리/ 어든 대문을/ 들어갈꼬/ 서울 남대문/ 쇠 걸었네/ 그러나저러나/ 들어옴세/ 남대야/ 문어리’
백범 김구가 상하이에 도착한 1919년 4월 13일.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안창호(安昌鎬)를 찾아가 “임정의 문지기를 하겠소” 했더니 경무국장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그가 문지기를 자원한 것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어떤 일이든 하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로 부르는 “날으는 홍범도가”를 탄생시킨 홍범도(洪範圖).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홍범도. 불모의 땅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서 하루의 생계를 걱정하며 말년을 보낸 고려극장 문지기 홍범도.
그렇지만 홍범도를 70대 극장 문지기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40년부터 1943년 사망하기 전까지 극장 앞을 지켰다. 일제의 고문으로 옥사한 부인, 의병으로 나섰다가 먼저 세상을 등진 아들,
“북지십년 만주십년 경찰백지 일자무식 문 도깨비 문형순!/ 어느 경찰 출신은 문형순을 그렇게 음률을 맞추어 기억했다// 왜 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라는 거야?/ 안 돼!// 광복군 출신으로, 친일 군경과 맞짱 뜰 수 있는 배짱과 용기// 너희 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이게 뭐야?/ 부당함으로 불이행!// 말년엔 여느 독립 운동가들처럼 쓸쓸하게 죽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북지십년 만주십년 경찰백지 일자무식 문 도깨비 유방백세(流芳百世) 문형순!” 김경훈 시인 시 「부당함으로 불이행」
2018년 10월 25일 경찰의 날을 맞아 4·3의인 故 문형순(文亨淳)이 경찰 영웅으로 선정되었다. 제주4·3 당시 부당한 국가권력의 지시에 맞서 제주도민의 생명을 구한 ‘명예로운 경찰의 표상’으로 평가한 결과였다. 국가의 직접적이고, 부당한 폭력을 ‘불이행’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수많은 도민의 목숨을 구해낸 ‘국민의 경찰’, ‘민주주의의 경찰’상을 몸소 보여준 고 문형순 서장. 4·3으로 희생된 도민들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엄연히 존재하는 국가폭력의 희생자이지만 그는 고귀한 희생과 헌신은 빛났다.
그런데 문형순은 안타깝게도 퇴직한 다음에는 경찰에게 쌀을 나눠주는 배급소, 이런 곳에서 일을 하였고, 극장에서 매표원과 문지기 일을 하면서 어렵게 생활하다가 향년 70세에 후손도 없이 혼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다.
문형순은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세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바로 육군사관학교의 뿌리이다. 그 후 고려혁명군의 군사교관으로 복무하고, 만주 한인사회의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을 역임했으며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을 겸임했다. 그 후 북지 허베이 성에서 지하공작대에 복무했으며 광복군으로 활동하다 귀국하여 제주도에서 경찰이 되었다.
문형순은 4.3사건 때 계엄군의 총살 명령을 거부하고, 수백 명의 민간인을 살렸다. 문형순 서장 앞으로 군 당국이 공문을 보냈다. “부당함으로 불이행.” 서장은 명령이 부당하기 때문에 이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결국은 200명이 넘는 민간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문형순의 극장에서 매표원과 문지기 일이 더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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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쉬굴

詩(시)로 읽는 4․3(21)

다랑쉬굴
이동순

무주공산
하도 처참해서
바람도 숨죽이며
저 캄캄한 동굴 속에
지난날 토벌대에게 학살당한 주점들 있나니
제주도 구좌읍 중산간지대
다랑쉬굴에는
행여 연기라도 새어나갈세라
불빛이라도 보일세라
조심조심 밥 지어먹었을 가마솥 두 개
깨어진 항아리
요강단지
녹슨 비녀
늘 끼던 안경 혁대 신발들 옆에
서로 부둥켜안고 숨져간
하얀 해골들 누웠나니
비 오고 바람 부는 수십 년 세월
하도 억장이 막혀
혼령도 저승길 못 가고
지금껏 굴 주변을 울며 헤매이나니
—————————————————————–
오름 위로 쟁반같이 뜨는 달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지은 이름 ‘다랑쉬’. 높은 봉우리라는 뜻을 지닌 ‘달수리’, 한자식으로는 ‘월랑봉(月郞峰)’으로 불리기도 한다. 382.4m라는, 한라산에 비해서는 턱없이 낮은 높이지만, 제주 사람들에게는 ‘오름의 여왕’이라 불린다. 1948년 12월 18일 무장대는 세화리를 습격했다. 대대적인 수색에 나선 토벌대는 천연동굴을 발견했다. 토벌대는 수류탄을 굴속에 던지며 나올 것을 종용했다. 메밀짚과 잡풀로 불을 피워 동굴에 집어넣자 매캐한 연기가 번졌다. 모두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아홉 살 난 어린이 1명과 여자 3명이 포함돼 충격을 주었다. 44년이 흐른 1992년 4월 2일. 다랑쉬굴 속에서는 11구의 유해가 ‘솥과 사발, 녹 먹은 탄피 몇 개’ 등과 함께 발견되었다. 제주4·3연구소에 의해 비극의 현장이 드러났다. 입구 직경이 60~70~㎝로 기어 들어가야 할 만큼 좁지만, 그래서 더욱 몸을 숨길 수 있는 자연 동굴에서 먹고, 자는 피난생활을 한 것이다. 어떤 시신은 허리띠만 남아 있는 백골 상태로 변했다. 여자의 시신에는 비녀가 꽂혀 있었다. 주변에는 안경과 단추, 버클, 썩다 남은 옷가지, 가마솥, 숟가락, 곡괭이 등 102점이 유물이 발견됐다.  그런데 공안당국과 행정기관이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유족들과 협의를 거치지 않고 시신을 산천단 화장터에서 불살라버렸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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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평화 ㅡ4·3, 두 청년 이야기

詩(시)로 읽는 4․3(20)

3일 평화 ㅡ4·3, 두 청년 이야기
오승철

죽어도 장부의 말은 죽지 않는 법이지
한낱 봄 꿈 같은 약속도 약속이라서
연둣빛 4 · 28 만남, 그 약속도 약속이라서

깃발 따라 짚차 한 대 쏙 들어간 구억초등학교
뒷산 조무래기들 꼼짝꼼짝 고사리 꼼짝
첫날밤 신방 엿보듯 훔쳐보고 있었다

조국이란 이름으로 공쟁이 걸지 말자 
저 하늘을 담보한 김익렬 9연대장과 김달삼 인민유격대 사령관 
산촌의 운동회같이 박수갈채 터졌다지

불을 끈 지 사흘 만에 다시 번진 산불처럼
다시 번진 산불처럼 그렇게 꿩은 울어, 전투중지 무장해제 숨바꼭질 꿩꿩, 오라리 연미마을 보리밭에 꿩꿩, 너븐숭이 섯알오름 4‧3 평화공원 양지꽃 흔들며 꿩꿩, 그 소리 무명천 할머니 턱 밑에 와 꿔- 엉꿩
칠십 년 입술에 묻은 이름 털듯 꿩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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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3이 발생하고 25일 만인 4월 28일, 무장대 총책 김달삼(金達三)과 김익렬(金益烈) 국방경비대 9연대장은 구억초등학교에서 평화협상을 맺는다. 72시간 내 전투 중지, 점차적인 무장해제 등의 조항이었다. “김익렬 : 제9연대가 지금까지 전투를 개시하지 않았지만, 군대는 개인의 뜻과 관계없이 명령만 내리면 복종하고 전투를 개시한다. 김달삼 : 당신은 미군정하의 군대인데, 나와의 교섭결과에 대해 얼마나 약속이행의 권한이 있느냐? 김익렬 : 미 군정장관의 지시에 따라왔으며 내가 가진 권한은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의 권한을 대표하며, 오늘 나의 결정은 군정장관의 결정이다. 김달삼 : 나도 제주도의 도민 의거자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 김익렬과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에서 나눈 대화내용이다. 두 사람은 ‘4·28 협상’을 통해 사태 해결에 합의하지만, 사흘 후인 5월 1일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이 ‘오라리 방화사건’을 저지르고, 이를 경찰과 미CIC(방첩대), G-2(정보참모부)가 오히려 무장대의 방화로 뒤집어씌움으로써 평화협상은 결렬되고 만다. 우익청년단이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고, 5월 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상은 깨어진다. 결국 5월 5일 수뇌부 회의에서 김익렬은 조병옥 경무부장과 충돌하기에 이르고 제14연대장으로 전출되었다. 그는 중장으로 예편한 뒤, 1969년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제주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말미암아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마지막으로 들고일어난 민중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경찰감찰청장, 제주군정관, 조병옥 경무부장, 군정청 딘 소장 등 한 사람이라도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다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해결 될 수 있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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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詩(시)로 읽는 4․3(19)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김수영

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 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 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 놈의 미소하는 사진을
(……)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던 그 사진은
사실은 억압과 폭정의 방패였느니
썩은 놈의 사진이었느니
아아 살인자의 사진이었느니
(……)
-1960년 4월 26일 이른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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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은 4·3 당시 국무회의에서 강경진압작전을 지시했다. 초토화의 책임은 당시 정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게 있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통수권자이며, 미군은 한국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은 제주도에 불법계엄령을 선포했다. 특히 이승만은 입산자 대부분이 ‘공산당 선전에 속거나 집이 불에 타 갈 곳이 없어 도로 산에 올라간 자’임에도 이들을 ‘폭도’라 해 무차별 총살을 명령했다. 이승만이 내세운 최대 이슈는 ‘반공’이었다. 당시 국회를 통과한 국가보안법도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탄생했다. 서북청년회를 동원한 사실도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4·3 당시 군·경을 이승만과 미국이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의 승인 없이는 군사이동도 불가능했다. 이승만은 친일 경찰을 철저하게 활용했다. 4․3사건, 여순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장면 부통령 암살 사건 등의 배후에는 친일 경찰이 있었다. 이승만은 ‘반공’을 이용해 국민들에게 공포를 심었다. 당시에는 친일행위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쉬웠다. 이승만은 친일파청산 주장은 공산당의 연관성이 긴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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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구 산전

詩(시)로 읽는 4․3(18)

이덕구 산전
정군칠

스무엿새 4월의 햇, 살을 만지네
살이 튼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가죽나무 이파리 사시나무 잎 떠는 숲
가죽 얇은 내 사지 떨려오네

울담 쓰러진 서너 평 산밭이
스물아홉 피 맑은 그의 집이었다 하네
아랫동네를 떠나 산중턱까지 올라온
아랫동네 사기사발과 무쇠솥이 깨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네
그 숲에나 잡목으로 서,
살 부비고 싶었네
그대 한 시절에 무릎 꿇은 것, 아니라
한 시절이 그대에게 무릎 꿇은 것, 이라
손전화기 문자 꾹꾹 눌렀네

산벚나무 꽃잎 떨어지네
음복하는 술잔 속 그 꽃잎 반가웠네
그대 발자국 무수한 산 밭길의 살비듬
어깨 서서히 데워주었네
나 며칠 북받쳐 앓고 싶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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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구산전(山田)은 사려니숲길 입구에서 천미천을 지나 바로 오른편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한참 가다 내창을 건너 올라가면 나온다. 원래는 산으로 은신했던 봉개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주민들이 귀순한 1949년 봄 이후엔 이덕구(李德九) 부대가 주둔했다. 속칭 ‘시안모루’, ‘북받친밭’이라 불리는 곳이다. 움막을 지었던 흔적이 남아있고 음식을 해 먹었던 무쇠솥과 그릇들이 남아있다. 후세대들이 이름 붙인 이덕구산전. 봄 여름 가을 겨울……언제든 아름답고 아련하다. 이덕구는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미쓰메이칸(立命館) 대학 경제학부 재학 중 관동군에 입대하였다. 1945년 귀향한 뒤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을 가르쳤다. 얼굴은 살짝 곰보이며 미남형이었다. 늘 목소리가 컸으니 이는 미군정에 의해 구인되어 고문을 받을 때 고막이 파열되었기 때문이다. 입산하여 인민유격대 3․1지대장으로 제주읍․ 조천면․ 구좌면에서 활동했다. 김달삼(金達三)이 1948년 8월 21일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뒤 남로당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과 인민유격대사령관 직책을 이어받았다. 1949년 6월 7일 16시 화북지구 제623고지에서 사살되었다. 자살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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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17)

경인(庚寅)-1950
김경종

山河万變水東流(산천 만 번 변하여도 물 동으로 흐르나니)
白首呼兒泣古洲(옛 물가에 눈물 떨구며 아들 찾는 백발이여)
節義當年忠死地(절의는 이 해 맞아 충성스레 죽어가고)
兵戈此日㤼灰樓(전쟁이 겁나고나 이날 누대 재 되었네)
神明倘識焦心恨(신명이 행여 타는 한스러운 맘을 알까)
世亂空添觸目愁(세상의 어지러움에 괜스레 더해진 근심)
骨肉不知烏有在(아들이 어디 있는지 아아 알지 못 하겠네)
惟魂遙向故園遊(혼 되어 노닐었던 옛 동산을 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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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섬에 불어 닥친 비극을 맨 먼저 드러낸 것은 문학이다. 4·3문학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그들은 죽어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언어를 발견하는 일이다. 민중의 기억은 대학살에 대한 기억이다. “본도의 4·3사건에 아들 창령이 뜻밖의 환난을 당해 진주에 붙들려 갔는데 때마침 적병이 들이닥쳐 생사를 알지 못했다. 한 번 가서 탐문해 보았지만 이미 죽은 뒤였다. 다시 촉석루를 찾아보니 또한 재가 되어버렸다. 드디어 그 원운을 취하여 비참한 감회를 적어본다.”(本道四三之變家兒昌玲以橫厄拘在晉州適遭敵兵入城生死不知一往探問事已逝矣又見矗石樓亦灰矣遂取其原韻以叙悲懷)는「경인(庚寅)-1950」의 원래 제목이다. 과거 북제주문화원에서 발간한 석우(石友) 김경종(金景鍾, 1888~1962)의 『白首餘音』의 번역은 이미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는 백규상(白圭尙)이 수고하였다. 저자 석우는 일제강점기 시절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고 은일(隱逸)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뛰어난 시재(詩才)를 드러낸 우리고장의 정통유학자이다. 모두 2권으로, 시(詩)와 문(文)을 각 권에 따로 모아 연대별로 기록하였다. 저자는 노형동에서 태어나 영주음사(瀛洲吟社)의 사장을 지내며 사문(斯文)이 쇠퇴해진 가운데 유림을 규합하는 데 힘쓴 인물이다. 영주음사는 1924년 봄 도내 문인 123명이 모여 설리한 문인단체였다. 석우는 전라북도 계화도(界火島)에 건너가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로부터 여러 해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석우는 당대 제주의 유림인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 행은(杏隱) 김균배(金勻培) 등과 교유하며 칠성로에서 한약방을 운영해 생계를 해결하면서 시 짓기를 즐겼다. 1947년 3월 1일로부터 1948년 4월 3일을 거쳐 1954년까지 4‧3사건과 관련하여 사법부의 재판을 받고 형을 언도받은 사람들은 수천 명에 달하였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벌금형‧구류‧집행유예 등을 언도 받았지만, 금고‧징역 등의 실형을 언도 받은 사람들은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이들 형무소 재소자들은 형기를 채우고 출소하기도 하였지만, 열악한 형무소 수감 환경 때문에 옥사하기도 하였고, 상당수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불순분자를 처분하라는 상부 명령에 따라 총살당하였다. 석우의 아들 김창진(金昌珍)의 경우 김천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白首餘音』에는 1949년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당시 4·3의 진상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보낸 장문의 편지글 「與李承晩書 己丑(1949)」과 나중에 쓴 성토문 「李承晩聲討文 庚寅(1950)」은 육지형무소에 수감됐던 4·3 연루자들의 무고한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승만의 만행과 죄상을 폭로한 글이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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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16)

북촌리의 봄
박은영

한 여인의 젖을 아이가 빨고 있었다
말 못하는 어린 것의 울음이 서모(*서우봉)에서 부는 바람소리 같았다
핏덩이를 등에 업은 어미의 자장가가 들리는 듯한데
젖몸살을 앓던 아침, 붉은 비린내가 퉁퉁 불어 마을을 떠돌아다녔다 새들이 총소리를 물고 둥지로 날아갔다 소란스런 포란의 방향, 꽃을 내준 가지가 동쪽으로 기울었다
그것은 서쪽에서 해가 뜰 일
서모에서 부는 바람소리가 말 못하는 어린 것의 울음 같았다
뚝뚝, 지는 목숨들 사이
아이는 나오지 않는 젖을 한사코 빨아대고 있었다
어미를 살려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그 힘으로 동백꽃이 피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봄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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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북촌리의 봄」은 2014년 4․3평화문학상 시 부문 수상작품이다. 시인 박은영은 수상소감에서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얼마나 몸서리치게 우셨습니까. 아직도 캄캄한 동굴 깊이 숨어있을 분들, 그 분들의 손을 잡고 함께 밖으로 나오고 싶었습니다”고 쓰고 있다. 1947년 8월 31일 불법 삐라를 단속하던 경찰관과 북촌주민이 충돌, 쌍방이 부상자를 낸 사건이 벌어졌다. 오전 11시께 경찰은 마을에서 삐라를 붙이던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이 발포로 3명이 총상을 입었다. 1948년 5월 10일 오후 4시. 북촌투표소가 불에 탔다. 투표용지가 파손되었다. 1949년 1월 17일 마을 어귀에서 토벌대 2명이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숨졌다. 아침에 세화 주둔 제2연대 3대대의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은 것이다. 마을 원로들은 숙의 끝에 군인 시신을 들것에 담아 함덕 대대본부로 찾아갔다. 군인들은 본부에 찾아간 10명의 연로자 가운데 경찰 가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살해 버렸다. 그리고 장교의 인솔 아래 2개 소대 쯤 되는 병력이 마을을 덮쳤다. 그 때 시간은 오전 11시 전후. 군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들이닥쳐 총부리를 겨누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학교운동장으로 내몰고는 온 마을을 불태웠다. 4백여 채의 가옥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학교운동장에 모인 1,000명가량의 마을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에 집결시킨 뒤, 주민을 20명씩 묶어 학교 동쪽 당팟과 서쪽 너분숭이 인근 옴팡밭으로 끌고 가 집단 총살했다. 주민학살극은 오후 5시께 대대장의 중지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4․3에 대해 30여 년간 망각과 침묵을 강요당하던 시절, 작가 현기영은 북촌리 대학살을 다룬 작품 「순이삼촌」을 1978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하면서 4․3을 시대의 한복판으로 끌어올렸다. 이 작품은 국가폭력의 실상을 폭로하고, 진상규명의 필요성 그리고 치유와 추모의 당위성을 널리 확산시키는 디딤돌이 됐다. 현기영 작가는 4․3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1979년 군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고 소설 「순이삼촌」은 14년 간 금서가 됐다. 또 하나의 4․3 소재의 장편소설인 자전적 성장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1999)가 국방부의 불온도서로 선정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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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보는 늙은이

벨 보는 늙은이
황금녀

저녁 해굴메
어뜩 고쳐 사민
이 밤도 벨 송송
이녁 엇이
트는 에도 돌뢍 뎅기는 미죽은 벨 나
늙은이 다인 눈광 눈 다댁염져
아- 눈도 다이어사
벨 치 보석이 뒈염신고라
왁왁 시상에서 시름 젭단 늙은이
울럿이 벨 멍 시름 시끄단 늙은이
요 들국 걲엉
이녁 쿰더레
씩 앵겨 네시민
손  번 끈 심어 봐시민
“이녁 눈에도 저 벨이 베레 졈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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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롱 싀상』은 팔순을 넘긴 황금녀 시인이 4․3기억을 되살린 제주어 시집이다. 시인의 어린 시절 체험과 그로 인한 눈물과 회한의 세월, 그리고 평화와 상생을 염원하는 생생한 제주어로 독자와 손을 잡는다. 그 중「벨 보는 늙은이」에서 제주어를 표준어로 풀어보면 “해굴메: 해 그림자, 어뜩: 깜빡, 고쳐: 비켜, 이녁 엇이: 그대 없이, 미죽은: 풀이 죽은, 다인 눈: 닳아진 눈, 다댁이다: 마주치다, 왁왁: 캄캄한, 시름: 걱정, 젭단: 버거워, 울럿이: 우두커니, 시끄단: 덜어내며, 쿰더레: 품 속, 앵겨: 안겨, 네시민: 드렸으면, 끈: 힘껏, 심어: 붙잡아, 이녁: 그대, 베레다: 보이다”이다. 시집『베롱 싀상』을 통하여 4․3사건 회오리에 휩쓸려 남편이나 가까운 가속을 잃고도 치열한 삶을 살아온 제주 여인들의 한을 풀어 놓았다. 바로 민중의 입말로 건져 올린 4․3의 기억이다. 생생한 제주어의 질감은 때론 거칠고 때론 요령부득이다. 제주어라서 더욱 실감이 나고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4․3을 제주어로 표현하면 더 생생하고 더 아프다. 노년에 이르러 9살 함덕마을 아이가 4․3사건의 회오리에 휩쓸려 가속을 잃고도 치열한 삼을 살아온 제주 여인들의 한을 풀어놓았다.「벨 보는 늙은이」처럼 치열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팔순 할머니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제주어 동시집 『고른베기』도 일품이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꿈을 담은 동시를 문화사적으로 언어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제주어로 들려준다. 아이들이 음과 뜻을 이해하기 쉽게 오른쪽 페이지에 표준어로 된 동시를 함께 실었다. 황금녀 시인은 1939년 함덕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시에 관심을 갖게 돼 문학회 등에서 활동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 MBC 창사 기념 문예공모에서 수기가 당선된 후 2004년부터 펜을 들었다. 현재 창조문예와 제주어보존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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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친일과 그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예비검속에 의한 대대적인 학살사건을 자행하였다. 계엄군은 섯알오름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총살하였다. 전쟁이 끝난 1956년 5월 18일, 5년 9개월 만에 억울한 죽음이 세상에 드러났다. 1961년 5․16 이후 묘지에 세웠던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라는 비석은 땅 속에 파묻혀졌다. 쿠데타 주체들이 피학살자 유족에 대한 대대적인 청소였다. 박정희와 그 주역들은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왜 광분했을까?
“저는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입니다. 친일 군인으로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고, 해방 직후에는 광복군 중대장을 지냈습니다. 형제 때문에 남로당에 입당해 공산 활동을 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자수를 해서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오늘날까지 살아왔습니다.”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朴政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임시정부요인 백강(白岡) 조경한(趙擎韓) 선생을 찾아가 공화당 입당을 권유하면서 한 이야기의 내용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를《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면서, 그 근거로 1939년 만주국군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작성하였다는 신문 기사를 공개하였다.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자)에 실린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의 기사이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조국은 일본을 말한다. 그러니까 박정희는 극우 친일파였고, 빨갱이라는 좌익 사상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지원하면서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했다. 그는 만주군 중위가 되었고, 해방 직후 숙군 대상자로 재판받고 사형을 구형받은 남로당 군사부의 비밀 당원이었으며, 군사쿠데타의 주모자였다.
박정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군(軍)이라는 개념과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다. 청와대 집무실에서 일본군 장교 복장에 점퍼차림을 한 채 가죽장화를 신고 말채찍을 들고 접견인을 맞이했을 정도였다. 딸 박근혜는 어떤가? 세월호 침몰 때도 최태민의 딸 최순실과 함께 지내며 방관한 것은 아버지를 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과 전두환에 대한 우파진영이나 민주진영 모두 논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 박정희 정권의 존재가 없었다면 경제발전은 생각하기 어렵다는 말은 결코 신기(神奇)가 아닌 최대의 딜레마이다. 개발을 위해 박정희의 독재가 필연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경제정책은 독재의 구실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박정희 경제성장을 신화처럼 믿고 있다. 한 사람이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영웅 사관에 빠져 있다. 박정희 몰락 계기가 된 것은 부마항쟁이다. 그것은 바로 경제문제 때문이었다.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높은 착취율에 기반을 둔 것이다. 바로 ‘토건 국가’적인 정책이다. 성장 위주의 정책 속에서 “저임금-저곡가 체제”, “자연을 마구잡이로 이용하고 파괴하는 착취 체계”의 이중의 착취 위에 건설된 것이다.
또 언론탄압은 어떤가?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로 대표되는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일명 ‘프레스카드제’를 실시하여 파시즘체제에서의 전형적인 언론 통제를 시작하였다. 국가보안법과 긴급조치로 수시로 언론을 탄압하였기에 1973년에는 도쿄에서 납치돼 온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름을 기사화할 수 없어 ‘재야인사’로만 표기하였다.
2012년 외국 언론들은 박근혜가 대통령의 당선을 전하며 박정희를 독재자로 평했다. 미국주간지 타임을 비롯하여 LA타임스, 뉴욕타임스, 영국의 가디언 모두 공통적으로 박정희를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군림했던 독재자(South Korea’s longest-ruling dictator)로 평가하였다. 프랑스의 르몽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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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14)

4․3 사건
김용해

오오, 침묵이로구나
땅 속에는 울부짖는 침묵이로구나
땅 위에는 짖어대는 침묵이로구나
눈물도 침묵이로구나, 통곡도 침묵이로구나
원한도 침묵이로구나, 죽음도 침묵이로구나
총칼 앞에서 침묵이로구나
고문 앞에서 침묵이로구나

오오, 감옥이로구나
벽이 탄탄한 감옥이로구나
산 자와 주근 자의 감옥이로구나
길도 막히고 기억도 막힌 감옥이로구나
민주도 감옥이로구나
자유도 해방도 모두 감옥이로구나
4․3사건은 감옥 속에 처박힌 꿈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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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은 ‘한국판 아우슈비츠(Auschwitz) 홀로코스트’이다. 군경토벌대와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등이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했다. 제주섬은 침묵을 강요당하는 감옥이었다.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하는 행위를 총칭한다. 고유명사로 쓸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한다. 4․3사건, “오 침묵이로구나”. 총칼 앞에 침묵이었고, 고문 앞에 침묵이었다. 4․3사건, “오오 감옥이로구나”. 민주도 감옥이었고, 자유도 해방도 감옥이었다. 침묵과 감옥이 바로 4․3사건이다. 오, 사물이 되어야만 갇힐 수 있는 저 깊은 침묵의 감옥이 시인은 아련한 것이 아닐까? 4․3의 대비극은 곧이어 일어난 한반도 한국전쟁 다음가는 아픔이었다. 허나 어찌된 일이야, 그날 이후 말하면 절대 안 되는 것이었다. “침묵하라!” 아무고 그때 그 일을 말해서 안 되는 것이었다. 누구든 그 때의 일을 벙긋했다간 국가공권력의 이름 아래 온갖 고통을 당해야 했다. 슬픔을 슬픔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제주섬은 감옥이었다. 우리 시대에 벌어진 사건을 어떻게 외면하겠느냐. 현재의 역사는 바로 과거 역사의 상처 위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4․3은 탄탄한 바위였다. 감옥 같은 바위가 되어 우리 앞에 군림하고 있었으며 풀리지 않는 숙제를 안고 아무리 밀치고 열어보려고 안간힘을 써도 그것은 더욱 거세게 버티고 있을 뿐 움직여 주려하지 않았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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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개동(奉蓋洞)

詩(시)로 읽는 4․3(13)

봉개동(奉蓋洞)

김종원

타 버려싱게/ 아홉 살 적 풋대추 찾아 기어오르던/ 안마당의 대추나무도/ 타 버려싱게// 날만 새면/ 거르지 않던 동네 식개/ 영장집 가마솥도/ 인젠 찾아볼 수 어싱게// 가을이면/ 갈중이 풋감 물들이고/ 겨울 한낮엔/ 푹푹 내려쌓인 돌담 눈길로/ 키보다 큰 꼬리연 입김처럼 말리던/ 중산 부락/ 나의 봉아오름// 할아버지는 오척 단구/ 술 담배 입도 못 대신/ 대쪽 같은 선비/ 집 한 채 다 타고 잿더미만 남던/ 사삼사건에도/ 눈시울 한번 안 적시더니// 안방 다락/ 이불 베개 삼던 漢書籍 다 타고/ 불꽃 되어 날을 땐/ 손주처럼 발을 구르신/ 金海金氏 문중의 어른/ 아, 그 법 없이도 살 수 있던/ 내 할아버지는/ 지금 봉아오름을 떠나고 어싱게// 타버려싱게/ 글만 알고 곡식 모르던/ 툇마루의 버선발/ 꿈 심던 뒷마당의 죽순도/ 다 타버리고 어싱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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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종원(金鍾元)은 오현고 재학시절 유경환․ 정규남과 함께 3인시집 『생명의 章』으로이름을 날렸다. 서라벌예술대학과 동국대를 거쳐 『사상계』 신인 작품으로 등단하였다. 1975년 3월 자유언론수호 파동으로 조선일보에서 해직되었다. 「奉蓋洞」은 1962년 『제주도』지에 발표한 작품이다. 봉개는 일제강점기에 명도암과 대나오름 등에 일본군이 갱도진지를 파놓았던 마을이다. 그 갱도진지가 4․3 당시에는 주민들의 피신처로 이용되었다.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주민들은 인근 야산과 불타버린 집터에 움막을 짓고 피난살이를 했다. 1949년 1월 21일 군인, 경찰, 대한청년단 등 합동토벌대가 마을에 들이닥쳐 움막에서 숨어 지내던 주민들을 끌어내었다. 마을 주변에 숨어 지내던 주민 40여 명을 멀왓동산으로 끌고 가 집단학살하였다. 1949년 2월 4일 육해공 합동으로 펼쳐진 대규모 작전으로 집단희생을 당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의 ‘사살 360명 포로 130명 기타 의류 등 다량 압수’라는 보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토벌은 비행기와 로케트포, 박격포까지 동원하였으며, 압수품에 총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주민들은 성 안에 함바집을 지어 살았다. 함병선(咸炳善) 연대장이 주민들을 원거주지로 복귀시키는 사업의 일환이었다. 그는 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 일본 패망으로 일군 준위로 제대하고, 해방이후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으며 그 후 보병6사단 2연대장에 임명되고, 중령과 대령으로 진급하는 한편 제14연대가 일으킨 여순10․19사건의 진압작전에 참여하였다. 제주주둔군이 제2연대로 교체되면서 그는 4․3사건 진밥부대로 제주도에 왔다. 미군 비밀문서에는 “함병선 연대장은 신분이나 무기소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가혹한 작전을 폈다”고 기록되어 있다. 2연대 3대대는 바로 서북청년단 출신 장병들로 구성되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제2대 남로당제주도위원장을 지낸 김용관(金龍寬) 등 ‘봉개7인당파’로 인하여 많은 주민들이 희생을 치렀다. 함병선의 성(姓)과 작전과장 김명(金明) 대위의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함명리(咸明里)’로 개칭하였다. 마을 재건 당시 교회를 지었는데 교회 이름도 ‘함명교회’였다. 함병선은 1955년 2월 4일 봉개리를 방문하였다. 그는 주민들로부터 도열 영접을 받았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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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흘곶에서 우는 새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기 시작하네
그 울음 숲을 버리고 어디로 향할까
마을주민들 하나둘 대섭이굴로 모여들고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 치마폭으로 감싸안네
검은개 노랑개의 그림자 어른거리고
꼭꼭 숨어라 내일 아침 볼 수 있을까
총소리 코밑까지 밀려와 심장을 흔들 때
도툴굴 목시물굴 벤뱅듸굴로 몸을 숨겼네
꿔 꿩 꿩, 꿩 우는 소리 묻혀버렸네
쌕쌕거려 구르는 방울새 소리
끼끼끼끼끼 청딱따구리 소리도 숨어버렸네
휫휫 휫 휘잇 삐삐삐삐 휘욧 휘욧 휘이 찌잇
되지빠귀 소쩍새 산솔새 종종종 모두 사라졌네
마파람으로 다복솔 잔가지까지 바르르 떨고
까악까악 까마귀가 저승에서 다시 손짓하는데
탕탕탕 탕탕탕 피눈물소리 가까이 들리는데
아아, 선흘곶이 후후 흔들리며 어디로 숨을까
저승으로 날아가 영영 생이별할까
가슴 한가운데 멍 자국이 아픈 세월 말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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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말들-제주4․3, 제70주년에

떠오르는 말들-제주4․3, 제70주년에
이은봉

쌀, 쌀, 쌀, 만세, 만세, 만세소리, 소리들로 가득한 골목, 도로, 거리, 산간, 총소리, 총소리, 탕탕탕, 탕탕

아우성, 비명, 피, 피, 피……군함, 바다 위, 함포사격, 폭탄 터지는 소리, 살 찢어지는 소리, 후다닥 도망치는 소리

동굴,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사람들, 강아지들 컹컹, 도야지들 꿀꿀…….질그릇, 짚그롯, 감자, 감자 먹는 사람들

동굴, 동굴 입구, 치솟는 연기, 일렬로 늘어서 있는 사람들, 총 든 군인들, 총 든 경찰들, 총 든 서북청년들

나자빠지는 하얀 솜바지. 주저앉는 검정 솜저고리, 흘러내리는 피, 피, 피, 포승줄에 묶인 채 처박혀 있는 사람들

동굴 속, 낡아빠진 고무신, 녹슨 놋수저, 놋젖가락, 찌그러진 반합뚜껑, 삭아빠진 댕댕이그릇, 흩어져 있는 뼈다귀들, 뼈마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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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하면 떠오르는 말은 무엇일까? 4․3은 한동안 ‘폭동’ 취급을 받아왔다. 최근까지 그냥 ‘4·3사건’으로 부른다. 4·3은 아직 제 이름을 찾지 못했다. 왜 아직까지 정명(正名)을 찾지 못했을까? 4․3은 항쟁이다, 4․3은 민중항쟁이다, 4․3은 통일운동이다, 라고 부르자 한다. 4․3하면 떠오르는 이름은 김달삼(金達三)이다, 이덕구(李德九)이다. 아니 토벌대이다, 서북청년단이다. 아아, 4․3하면 떠오르는 말은 폭도였다. 제주사람은 8할이 폭도였다. 4․3하면 떠오르는 말은 미국이다, 미군이다, 미군비행기이다. 아아, 미군이 총을 겨누었는가? 4․3하면 떠오르는 말은 쌀이다. 만세소리다. 도망치는 소리들로 가득한 골목이다. 도로이다. 거리이다. 산간이다. 아아, 죽임의 총소리이다. 탕탕탕, 탕탕. 그에 따르는 아우성이며 비명이다. 피, 군함, 바다 위, 함포사격이다. 폭탄 터지는 소리이다. 후다닥 산으로 오르는 소리이다. 4․3하면 떠오르는 말은 동굴이다. 아아,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사람들이다. 동굴 입구로 치솟는 연기이며 총 든 토벌대들이며 일렬로 늘어서 있는 사람들이다.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눈물이 나는 건, 그 너머에 아픔이 숨겨져 있는 언어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제주의 땅 아래에는 70여 년 동안 켜켜이 쌓인 엉킨 아픔이 있고 아픈 언어가 숨어있다. 4·3의 기억은 그렇게 날이 선 채 70년이라는 시간을 베어왔다. 1948년 당시 제주 인구의 9분의 1 수준인 2만5000∼3만 명이 4·3으로 희생됐다. 희생자의 33%가 어린이·노인·여성이었으며, 희생자의 86%가 토벌대에 의해 발생했다. 토벌대 전사자는 320명으로 집계됐다. 그렇지만 아직도 모르겠다. 4․3은 도대체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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