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제주문학

제1절 제주인과 일제강점기 문학

일제강점기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식민통치를 당한 35년간(1910∼1945)을 말한다. 한국민족은 그들의 식민지정책으로부터 자기민족을 보위하고 일제를 몰아내어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쟁취하려고 영웅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한국민족의 독립운동과 연합국의 승전으로 마침내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에서 쫓겨났다.
일제강점이 한국역사에 끼친 해독은 참으로 심대한 것이었다. 일본제국주의는 한말까지 꾸준히 전개되던 한국의 자주 근대화를 저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점기간 동안에 한국사회를 정체시키고 온갖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결국은 일제강점의 소산으로 남북 분단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민족이 타의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되어 고통을 받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강점으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여 민족과 민족문화를 보존, 발전시키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전신)가 조직되어 기관지 『한글』을 간행하고,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시작함과 함께 민족어와 한글을 발전시키려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문학부문에서도『創造』(1919)·『廢墟』(1920)·『白鳥』(1922)·『朝鮮文壇』(1924)·『朝鮮文藝』(1929)·『朝鮮詩壇』(1929)·『文藝公論』(1929)·『藝術運動』(1929) 등의 문학지가 창간되고, 한글로 된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창작되었다. 1920년대에는 프로문학도 형성되어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의 참상을 고발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제주문학은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활동들만이 포착된다. 작가들은 고향 의식과 관련되며, 때로는 당대의 현실을 비판한 경우도 있는데, 대체로 관념적 성향을 보여주었다. 제주문단이라면, 그것은 제주문인들의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가. 일제강점기 제주시단

한국시인이 쓴 시를 ‘한국시’라 하듯이, ‘濟州詩(제주시)’란 ‘제주시인’들에 의해 창작된 시라고 할 수 있다. 제주시인은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있거나. 제주에서 유소년 시절 이상을 제주에서 보내고 외지에 나아가 살고 있거나, 외지에서 태어났지만 제주에 정착해서 꾀 오랜 기일이 지나도록 살면서 활동하는 시인들을 말한다.
제주문단에 첫 씨앗을 뿌린 김문준(金文準) ․ 김명식(金明植) ․ 김지원(金志遠) 세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조천(朝天) 출신들이다.  1915년에 김문준(金文準)이 가사 형식으로 농민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農夫歌」가 제주인이 쓴 첫 번째 작품이다. 1920년대에는 김명식과 김지원)의 작품들이 주목된다.
김명식은 『東亞日報』 창간호에 발표한 봄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표현한 「새 봄」과 창간의 감격을 노래한 「비는 노래」를 발표했다. 1930년대에는 제주 해녀들의 애환을 다룬 「해녀의 노래」가 강관순(康寬順)에 의해 씌어졌고, 1940년대에는 김이옥(金二玉) 이 『흐르는 정서』라는 미간행 시집을 남겼다. 일본어로 씌어진 김이옥의 시는 당대 제주인들의 정서가 잘 반영되어 있다.

1. 김문준의 「농부가」

▲김문준

김문준(金文準, 1894년)∼1936)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호는 목우(木牛)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조천에서 태어났다. 1910년(융희 4) 3월 의신학교(義信學校) 보통과를 거쳐, 1912년 제주공립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1915년 3월 경기도 수원의 조선총독부농림학교(朝鮮總督府農林學校,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에 입사를 하였다. 졸업 동기생으로 백남운(白南雲)·이훈구(李勳求) 등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다. 같은 해 경기도 수원의 권업모범장에 취업하였다.
1915년에 『農林學校會』에 시「農夫歌(농부가)」를 발표한다. 개화가사의 형식을 띄는 「農夫歌」를 통해 저항ㆍ자주ㆍ개화의식을 강조하면서, 농부들의 생활을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살피고, 국가에서 농부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므로 2세기의 활동무대에 부각되는 농부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自然으로 터를 삼고 成實으로 武器삼아/ 本分盡守 는農夫 多情기 限量업고/ 駸駸日進 우리事業 東天朝日 氣勢로써/ 發達는 過渡時代 前途永遠 반갑도다/ 十代港口 五大鐵道 交通機關 發達니/ 十三道의 富源所産 輸出輸入 極便이라/ 이가온 힘을쓰 農夫心事 快시고/ 斯業發達 죠흔機會 千秋間에 처음일세// (後斂) 一年三百六十日에 날날마다 滋味집고/ 時刻마다 興趣만킨 農夫生活 뿐이로다/ 家給人足 國泰民安 農夫責任 아니런가/ 어화우리 農夫들아 日高三丈 둥둥 떴네// 守國에도 待濃夫요 富國에도 待濃夫며/ 여러 가지 工商業者 依賴農夫 泰山고/ 法治敎育 져事業과 學者藝者 져人物들/ 農夫信仰 神聖고 希望기 獨火로다/ 더군다나 東半島는 輸入輸出 通商에/ 農夫로써 對象삼고 農夫로써 主人삼네/ 그와흔 壯形勢 農夫福音 이 아닌가/ 二十世紀 活舞臺에 世界的의 農夫되셰(大正三年十一月二十日稿) -김문준의 시 「農夫歌」(1915년에 『農林學校會』).

그후 1918년 4월 제주도 정의공립보통학교(旌義公立普通學校)와 구좌중앙보통학교(舊左中央普通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구좌중앙보통학교에서 1925년 3월부터 1927년까지 교장을 지냈다. 일본의 심한 간섭으로 1927년 7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목격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한 그는 1927년 10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 오사카조선노동조합(大阪朝鮮勞動組合) 집행위원 및 동 노동조합의 북부지부 상임집행위원에 취임하였다. 이어 12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新幹會) 오사카지회를 창립하였다.
1928년 5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 1929년 4월 제주도 출신 송성철(宋性澈) 등이 제주출신 소년들을 규합하여 오사카조선소년연맹을 결성하게 하고, 가을에는 오사카시 히카시나리구(東成區)의 중소 고무공장에서 1,000여 명의 노동자를 끌어들여 오사카고무공조합을 결성했다. 1929년 12월 관서지방협의회(關西地方協議會) 집행위원장 등에 취임하여 일본에서 조선인 노동자의 권익향상에 힘썼다.
1930년 1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해소하고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약칭 全協)에 합류하는 데 반대하여 전협 산하의 한국인위원회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일본 선박업자들의 횡포에 맞서 ‘우리는 우리의 배로’라는 구호 아래 제주 출신들이 오사카와 제주를 왕래하기 위해 제주통항조합준비위원회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1930년 4월에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해 복목환(伏木丸)이 취항하였다.
1930년 4월 오사카노동조합 북부지부를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오사카화학노동조합에 통합하고 그해 5월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일본화학산업 노동조합 대판지부로 개칭한 후 책임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해 5월부터 8월까지 노동대중에게 혁명의식과 항일투쟁을 고무하는 내용의 「뉴스」및 격문을 비롯하여「第2無産者新聞」등을 제작 배포하여 사회주의 의식함양과 반제투쟁을 고무 격려하였다.
1930년 8월 오사카의 고무공장노동자 파업을 준비하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사카이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4월 12일 오사카공소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투옥 중에는 조몽구(趙夢九)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화학노조 오사카지부 책임자가 되어 투쟁을 계속하였다.
일제 경찰은 “1930년 8월 17일 오사카에서 천호모공장 쟁의 비밀지도부 회의 중 거괴(巨魁) 김문준(당시 일본화학산업노조 오사카지부 상임) 등 조선인 5명과 일본인 3명을 검거하였다.”고 밝힐 정도로 김문준을 높이 평가하였다.
출감 후인 1935년 6월 15일 오사카에서 한글신문이었던 『民衆時報(민중시보)』를 창간해 조선인들의 생존권 투쟁과 권익옹호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후 1936년 5월 25일 수감 생활 중 폐결핵이 악화되어 오사카 도네야마치료소에서 치료 중 숨을 거두었다.
일본의 패전 후 일제와 투쟁한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오사카성공원에 ‘현창대판사회운동지전사(顯彰大阪社會運動之戰士)’라는 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에 김문준·조몽구도 일본인과 함께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활동이 일본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제주시 조천읍 조천공동묘지에는 당시 일본에서 보내온 비석이 서 있다. 비문은 고순흠(高順欽, 1893~1977)이 썼으며, 김문준의 문하생이었던 김광추(金光秋)가 대표로 운구위원이 되어 유해를 옮겨 도민장(島民葬)을 거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으로 조천리민장으로 결정하고 안세훈(安世勳)․ 김유환․ 김시용 등이 당시 일본에 있던 고순흠과 연락을 취하면서 1937년 3월 25일에 조천공동묘지에 김문준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2000년 8월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김명식의 「비는 노래」와 「새 봄」

▲김명식

송산(松山) 김명식(金明植, 1891~1943)의 본관은 김해. 자는 경덕(景德), 호는 송산(松山) 또는 솔뫼. 아버지는 정의현감이었던 김문주(金汶株)이다.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고향 의흥학교(義興學校)에서 초등과정을 마쳤다. 1908년(순종 2) 한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를 거쳐, 1911년 4월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1910년 한성고등보통학교 졸업을 앞둬 겨울방학에 고향으로 내려와 연북정으로 찾아갔다. 어릴 때의 벗 홍두표(洪斗杓:1891~1977)와 고순흠(高順欽:1893~1977)을 불러냈다. 더구나 이 연북정은 김명식이나 홍두표, 고순흠 등이 배웠던 의흥학교의 옛 건물이 아닌가! 
세 동지는 자연 얘기의 화두가 ‘나라는 망했으니 우리들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말로 이어졌다. 먼저 태어난 순서로 산(山), 동산(園), 바위(巖) 등 그 크기 순서로 정하여 그 산이나 동산, 또 바위와 같이 변하지 말자고 다졌다. 이어 산이나 동산이나 바위의 틈에 끼어 자라나는 송매죽(松梅竹)과 같이 변절하지 않은 기개로 끝까지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워 국권을 회복하자고 맹세하였다. 
이러한 뜻에서 각자의 아호(雅號)는 김명식은 송산(松山), 홍두표는 매원(梅園), 고순흠은 죽암(竹巖)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다음 이를 지킬 징표(徵表)로 ‘천지위서(天地爲誓) 일월위증(日月爲證)'(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저 해와 달은 이를 증명할 것이다.)이란 여덟 글자를 혈서(血書)로 썼다. 이를 세한삼우(歲寒三友) 송매죽의 혈맹결의(血盟結義)라 한다. 이때의 김명식이나 홍두표는 22세요, 고순흠은 20세 되던 해의 일이다. 
그 후 제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 김명식은 와세다대학 재학 당시 신입생들에게 “고국을 떠나 적지 일본으로 들어왔으니 이제 실력을 쌓아 조국을 생각하는 인재가 되자”고 역설하였다. 유학생의 단결과 배일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신익희(申翼熙)·안재홍(安在鴻)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조선인유학생학우회 간사부장을 지냈다.
1916년 4월 15일에 조선인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한 대학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적국에서 배우려는 의미를 논함’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하였고, 이후 조선인유학생학우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14년 4월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였던 『學之光(학지광)』을 편집하였고, 1919년에는 2·8독립선언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시조 주몽(朱蒙) 연 땅에/ 천수제(天授帝·고려 태조 왕건)가 지은 이름/ 산고수려(山高水麗) 장할시구/ 단목(檀木·박달나무)에 움이 나고/ 근화(槿花·무궁화)가 새로 필 때/ 동아일보 탄강(誕降)하다/영락제(永樂帝·명나라 3대 왕)의 포부이며/ 을지공(乙支公)의 정신이며/ 원효(元曉)의 자비이며/ 왕인(王仁)의 문화이며/ 서희(徐熙)의 용맹이며/ 개소문(蓋蘇文)의 기개이며/ 신숭겸(申崇謙)의 혼백이며/ 성삼문(成三問)의 구설이라/ 소리소리 정의(正義)이며/ 말말이 인도(人道)로다/ 남해는 깊고 깊고/ 백두는 높고 높다/ 동반도(東半島)/ 만년지(萬年紙)에/ 한양 평원 벼루 삼고/ 한강은 연수(硯水·먹을 갈기 위해 벼루에 붓는 물) 삼고/ 남산은 먹을 삼고/ 송백엽(松柏葉·소나무와 잣나무 잎) 붓을 매고/ 단목(檀木) 같이 굳은 뼈와/ 근화(槿花) 같이 고운 고기/ 설총(薛聰)의 지은 말로/ 세종(世宗)의 만든 글로/ 김생(金生)의 체를 받아/ 무궁무진 써내어/ 남해같이 깊은 내용/ 백두같이 높이 들어/ 질풍악우(疾風惡雨) 겁내지 않고/ 여천동수(與天同壽) 하오리라’- 김명식의 시「비는 노래」(『東亞日報』창간호, 1920년 4월 1일).

‘대리(大理)가 동(動)하다/ 고료(孤廖·외로움)가 파하다/ 상설(霜雪)이 갔다/ 견빙(堅氷)이 풀렸다/ 막힌 샘이 흐르고/ 붉은 산이 푸르다/ 아! 봄이로구나/ 봄이 왔다 봄이 왔다/ 어디에 어디에/ 어둠의 근역(槿域)에/ 마귀도 가고 사탄도 가고/ 파리 떼도 가다/ 일기가 따습고/ 바람이 가볍다/ 새가 울고 꽃이 피고/ 나비가 난다/ 저 무궁화 고운 꽃에/ 나비가 앉는다/ 꽃송이 속에 입부리를/ 깊이깊이 찔렀다/ 두 날개를 너울너울/ 꽃 종자를 날린다/ 황금도 명예도/ 권력도 없다/ 저 꽃에 저 나비에/ 다만 뜨거운 사랑의 결정(結晶) 뿐이다/ 아 황금의 무용(無用) 권력의 패배/ 정(情)의 세계 사랑의 승리/ 아! 사랑 아! 사랑/ 새 봄의 새 사랑’-김명식의 시 「새 봄」(『東亞日報』창간호, 1920년 4월 1일).

1920년 4월 1일 『東亞日報』 창간에 참가하여「大勢와 改造」라는 장문의 논설까지 썼으며, 「니콜라이 레닌은 누구인가」를 연재해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주의 사상을 소개하였다.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1920년 4월 11일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적 노동단체였던 조선노동공제회에 제주출신 고순흠(高順欽)과 함께 평의원으로 참가하였으며, 박중화(朴重華) ·박이규(朴珥圭) 등과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를 조직하고, 간부로서 근로대중을 위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기관지 『共濟』를 발행하여 근로대중의 계몽을 꾀하기도 하였다.

▲김명식의 기고문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던 1920년 6월 28일 경향 각지에서 조직되고 있던 청년회의 연합통일체를 조직하기 위해, 장덕수(張德秀)·오상근(吳祥根)·장도빈(張道斌)·박일병(朴一秉)·안확(安廓) 등 50여 명과 함께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를 발족시켰다.
이어 그해 12월 서울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전국 각지의 116개 청년 단체의 대표자 124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고, 지방부 집행 위원에 선출되었다.
1921년 1월 장덕수·오상근 등과 함께 조선청년회연합회를 중앙에서 지도할 목적으로 서울청년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노동운동에도 참여하여, 1921년 3월 조선노동공제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 제2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2년 1월 박희도(朴熙道)에게 출판사를 설립할 것을 권유,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창립하게 하고, 사장 박희도, 전무이사 이병조(李秉祚)와 더불어 이사 겸 주필에 취임하여, 월간지 『新生活』을 발행하였다. 또한, 신일용(辛日鎔)·유진희(兪鎭熙) 등을 기자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김명식이 1921년 6월 3일부터 8월 31일까지 61회에 걸쳐 『東亞日報』에 쓴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는 조선에 공개적으로 소개된 최초의 볼라디미르 레닌(Lenin) 일대기였다.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해 있던 김명식은 레닌의 지원 자금이 국내로 들어와 1922년 3월 동아일보를 떠나 사회주의사상의 전파와 운동의 길로 나선다.
1922년 11월 ‘러시아혁명 5주년 기념호’로 발행된 『新生活』 11호에 게재된 김명식의 ‘러서아혁명 5주년기념’, 신일용의 ‘5년 전의 금일을 회고’ 등의 글이 ‘적화사상’을 선전했다고 해 재판에 회부되었다.
공판에서는 단연 방청객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이가 있었다. ‘공산주의에 찬성하는가?’라는 재판장의 질문에 ‘마르크스의 사상에 공명하며 연구하고 찬성하오’라고 당당히 답하며, 공판을 사회주의사상의 선전장으로 활용한 신생활사의 주필 송산 김명식이 바로 그였다.
  1923년 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김명식은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시달리다 이후 제주도에 내려왔다가 1927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협동전선체였던 신간회 제주지부가 결성되자 지회장을 맡았다. 이때 송종현(宋鍾炫)은 간사였고, 강창보(姜昌輔)와 김택수(金澤銖)는 회원이었다.
 
“합병 이후 근대적 의미와 색채를 가진 필화와 논전은 동아일보가 선진(先進)일 듯하다. 그리고 동아일보 창간시대의 조선 청년은 사상적 기근이 극도에 달하였었다. 재래사상으로부터는 이탈하였지만 그 빈자리에 채울 만한 신사상은 얻지 못하였다. 무슨 자유니 무슨 자결이니 하는 의미를 아는 자 적었고 또 알려주는 자 없었다. 일찍 문예부흥이니 종교혁명이니 하는 말과 미국에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이 있었고 불국(佛國)에 대혁명이 있었고 영국에 산업혁명이 있었단 말은 들었지마는 그들이 모두 무슨 사상과 주의의 실현인지 아는 자 적었고 또 알려주는 자 없었다. 더구나 로서아의 신(新)사실은 물을 곳이 없었다. 이러한 시대에 동아일보는 나왔다. 그리하여 국제연맹과 윌슨의 평화원칙을 알려 주었다. 또 루소와 몬테스큐를 전하고 아담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을 전하고 또 루터와 칼빈을 전하였다. 그럼으로 사상에 주리든 청년들의 동아일보로 향함은 분천(奔川·흐르는 물)을 급히 따라가는 갈마(渴馬·목마른 말)와 흡사하였고, 동아일보에는 청년 사상의 원천인 관(觀)이 있었다.”- 김명식의 「필화(筆禍)와 논전(論戰)」(『三千里』, 1934년 11월호).
1930년 오사카에서 조선인 노동운동을 지도하다가 검거돼 일본의 오사카형무소에 재수감된 뒤 『新生活』 필화 사건의 남은 형기 동안 복역하였다. 1938년쯤에 고향에 돌아왔고 일제의 고문으로 건강을 크게 해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국제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1940년 4월 1일부터 10일까지 7차례에 걸쳐 신문 기고로는 마지막으로 보이는 「제1차 대전 후의 세계사」를 『東亞日報』에 연재하였다.
이 연재물에서 “역사관의 허무사항은 금물이며, 인류문화는 쉬지 않고 향상한다. 어떤 시기에 어느 문명이 파멸되어도 다른 문명이 생겨 그를 대신한다.”며 인류문화의 연속성을 역설하였다.
창씨개명을 완강히 거부하는 한편, “사망신고는 조국광복과 민족해방이 되거든 하라, 내 눈 부릅떠 일본이 멸망하는 꼴을 똑똑히 보고 나서 눈감겠노라”는 유언을 남기며 세화리에 있는 차녀 김순실의 집에서 해방을 2년 앞둔 1943년 4월 11일 눈을 감았다.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명식이 쓴「로서아의 산 文學」(『新生活』1922.4) ․「戰爭과 文學」(『三千里文學』1938.4)은 대표적인 문학평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형 김형식(金瀅植)도 일찍이 『朝鮮文藝』(1917~1918)에 한시 2백여 편과 한문 30여 편을 발표한 바 있어, 이를 2004년 북제주문화원에서 『革菴散稿』번역본으로 출판하여 관심을 끈 바 있다.

3. 김지원의 「울안의 盟誓」
“날즘생도 제깃을 차자드는데/ 굼벵이도 제궁에 숨어 자는데/ 눈보라 휩뿌리는 이깁흔 겨울밤/ 내터를 등지고 어데로 가는고/ 흰옷입은 파리한 얼골들이여/(……….)/남전북답 집안세간 황소뺏긴 선물이니// 악착한 괴물에 피를빨리고/ 영폭한 아귀에 고기를 뜻겨/ 뼈만남은 앙상한꼴 내쫏기는 무리여(………….)-淸津驛에서(1926.12.10)” – 김지원의 시「내쫏기는 무리
들」 부분.

‘날짐승도 제 말을 쓰거든/ 들짐승도 제 말을 쓰거든/ 하물며 사람에게 제 말이 없을까 보냐// 집은 없어지고 세간을 잃었다 헤도/ 혀는 뽑히고 두 손은 묶였다 해도/ 차라리 칼을 물고 없어질망정/ 어찌 내 마음 내 말이야 뺏길까 보냐// 오로지 사람된 이여/ 내 마음을 한쪽 가진 신이여/ 제 마음 나타내는 제 말을’(1927.1.5)-김지원의 시 「제 말 제 마음」전문.

“참사랑 죽이면 죄인이 된다/ 세상도 참부숴 죄인이 된다/ 탈박쓴 인생은 죽여야겟다/ 거짓된 세상은 불살을진뎌/ 필연의 불법은 이러케 당했다// 거짓을 얼사안고 곤두박질을 친다/ 사람은 사람을 싸먹고 배를브린다/ 종족은 종족을 깨물고 버터져간다/ 이놈의 세상은 이러케 싸노앗다(1927.4.2)” -김지원의 시「必然의 律法」.

김지원(金志遠, 1903~1927)은 조천 출신으로 12세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갔고, 서울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1924년부터 1927년 사이에 일본 도쿄와 서울을 왕래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조선문단

『朝鮮文壇』과『朝鮮日報』 등을 통해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27년에 행방불명되었다. 『朝鮮文壇』은 1924년 10월 1일자로 창간된 문예잡지이다. 이광수(李光洙)가 주재(主宰)하고, 방인근(方仁根)이 자금을 전담, 편집 겸 발행인이 되어 조선문단사를 차려 발행했다.
김지원은 양주동(梁柱東)·이태준(李泰俊)·나도향(羅稻香) 등과 교류하였으며 시 25편과 산문 2편을 남겼다. 초기에는 퇴폐적이고 허무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는 작품을 쓰다가 점차 시대적인 문제를 포착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1920년대 지식인들의 내면세계를 정밀하게 드러내고 시대적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작품을 썼다는 점에서 근대 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차지한다.
김지원은 1924년 『朝鮮日報』에 시 「깨어진 칠보탑」과 『金星』에 「나의 기원」을 발표했으며, 1925년 『朝鮮文壇』에「哀願」과 「거지 할미」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다. 또 이듬해「에도(江戶)의 풍경」(『朝鮮日報』) ․「유곽」(금성) ․ 「마즈막 올리는 祈禱」(조선문단) ․「火山의 노래」(『朝鮮文壇』) ․ 「NHIL」(『朝鮮文壇』) ․ 「허무의 왕국」(『朝鮮文壇』) 등 여러 편, 1927년 「울안의 盟誓」(『東亞日報』) 등 여러 편, 1928년 「새해맞이」(『朝鮮日報』)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의 작품은 시대상황과 당시의 심경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어떤 작품에서는 사회와 문명 비평적 시각도 매우 번득인다. 초기에 허무적인 작품을 발표했지만, 후기에는 사회적 자아에 눈을 떠 민족의 현실을 노래하였다. 그의 호적에는 “단기 4260(1927)년 5월 1일 오후 2시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2,152번지에서 사망, 동거자 金錫推 단기 4294(1961)년 8월 28일 신고”라고 되어 있다.

“내 밤반〔夜半〕에 일어나 울안을 한 바퀴 돈다/ 별빗이 아롱진 고요한 밤의 꿈조차 조는듯한데/ 내홀노일어나 울안을 한바퀴돌다/ (……….)/ 내 밤반에 거듭일어나 무덤가 髑體를 어루만즈다/ 검푸른 불빗이 감박이는 무덤가 구진비 나리는데/ 내홀노 엄니를 떨며 무덤가 촉루를 어르만즈다/ (…………)/ 내빔빈에 세 번째 일어나 하날을 대처나를갈다/ 圓光이무르녹는 놉다란하날 北斗조차 나려다보는데/ 내홀노일어나 주먹을쥐고 하날을 대처 나를갈다/ 촉누가 거의된 이꼴일망정 그래도/ 숨결은 불타올으니 文明의 利器는 못가젓을망정/ 독기와 화살은 새로윗노니/ 나를갈며 나를갈며/ 내원수를처/ 거짓을 깨치노라/-1927 仲秋 마지막선언에서(1927.11.24 동아)-김지원의 시「울안의 盟誓」.

4. 강관순의 「해녀의 노래」

“우리는 가엾은 제주도의 해녀들/ 불쌍한 살림살이 세상도 안다/ 추운 날 무더운 날 비거 오는 날에도/ 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어린 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 종일 헤엄치나 번 것은 기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이른 봄 고향 산천 부모형제 이별하고/ 온 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어/ 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각처 조선․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가간 설치해 놓고/ 우리의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가엾은 우리해녀 어데로 갈까”-강관순의 시「해녀의 노래」전문.

강관순(康寬順 : 1909~1942)은 사회주의운동가로 1932년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저항하기 위해 일어난 제주도해녀투쟁(일명 ‘세화리 해녀항쟁’)을 주도하였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옥중에서 작사하여 항일운동가로 널리 불리던 「海女의 노래」가 전해진다.
필명(筆名)은 강철(康哲). 본관은 곡산(谷山), 강대길(康大吉)의 차남으로 구좌읍 연평리 929번지에서 태어났다. 우도(牛島)의 영명의숙(永明義塾)을 마치고 1926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 모교 영명의숙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계몽극을 만들어 공연도 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문맹 퇴치 운동도 하여 부녀자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제주청년동맹에서 활동하였던 청년들은 1930년 이후 새로운 형태의 비밀 조직에 나섰다. 이 시기 가장 주목되는 비밀 조직은 1930년 3월 구좌면 일대에서 결정된 혁우동맹(革友同盟)이었다. 혁우동맹은 제4차 공산당에 가입하였던 신재홍이 주도하였다.
신재홍(申才弘:우도)은 1930년 구좌면 세화리 문도배(文道培:세화)의 집에서 오문규(吳文奎:하도)․ 강관순․ 김성오(金聲五:우도)․ 김순종․ 김시곤(金時坤:세화)․ 부대현 등을 규합하여 혁우동맹을 조직하였고, 조직은 사회주의 이념 하에 민족 해방을 목표로 내걸었던 비밀 결사였다.
 강관순은 1931년 6월 상순 자택에서 신재홍의 권유로 제주도 야체이카 결사의 당외(黨外) 기관원으로 가입, 또 동지 김성오와 함께 우도의 고자화(高子華) 집에서 고봉준(高奉俊), 고원한(高元瀚)과 회합하여 ‘적(赤)’이라고 칭하는 당외 기관을 만들어 강관순은 연락부원, 김성오는 청년부원, 고원한은 여성부원, 고자화는 농민부원이 되어 적(赤)을 순차적으로 좌경화․ 급진화하는 방향으로 전환을 도모하였다.
  1932년 1월부터 해녀항일운동이 일어나면서 비사(秘社)의 내용의 탄로되어 일경에 체포되었다. 당시 김성오(金聲五)․ 강관순(康寬順) ․신재홍(申才弘)․ 우봉준(禹奉俊)․ 이두삼(李斗三)․ 고자화(高子華)․ 정찬식(鄭贊植)․ 공덕봉(孔德奉)․ 고기창(高基昌)․ 강희준(姜熙俊)․ 양봉윤(梁奉潤)․ 윤대홍(尹大弘)․ 고한조(高漢祚) 등 13명이 검속되고 그는 1933년 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자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강관순은 옥중에서 「海女의 노래」 4절을 지었는데 마침 동지 오문규를 면회 왔던 오문규의 부인 홍무향이 이 노래의 가사를 몰래 건네받아 청년 운동가에 전해진 것을 당시 「도쿄(東京) 행진곡」의 곡조에 부쳐 부른 것이다.
이 노래는 전도에 파급되고 출가 해녀에 의해 한반도 및 일본중국까지 전파되어 당시 제주의 노래로 불리어졌다. 형기를 마쳐 출옥하자 동지 김성오와 함께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원산(元山)으로 건너가 항해사 을종(乙種) 시험을 치러 합격, 김성오는 승선의 길을 택했으나 그는 옥고로 말미암아 몸이 허약하여 주저앉았다.
 1942년 봄 함북 청진(淸津)에서, 고문과 옥고에 시달린 결과로 폐병으로 병사, 부인 김유생(金有生)이 만삭의 몸으로 남편의 시신을 고향으로 반장(返葬)하였다. 부인은 이후 유복녀와 함께 우도에서 정열(貞烈)을 지키며 살았는데 그 미모를 탐내어 젊은이들이 늘 괴롭히자, 하루는 동네 향회에 나가 내 X은 내 서방 강관순이 죽으면서 같은 날, 같은 시에 같이 죽어버렸으니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외쳤다. 이에 우도 사람들은 참으로 강관순의 아내다운 모습이라고 칭찬하였다.
1996년 여름 우도의 선착장에 그의 「海女의 노래」 비(碑)를 세웠다. 또 해녀 항일 운동의 진원지 세화에도 「노래비」가 세워졌다.

5. 김이옥의 「슬픈 해녀여」

“해녀야/ 깨어 있느냐// 春三月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바다에/ 비바리 裸身을 내던져// 영차 영차 가는 곳은 어드메냐// 바다 속/ 전복 소라의 나라에/ 주인이사 기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검은 몸뚱이의 풍만함이 애처롭구나”-김이옥의 시 「海女 1」.

김이옥(金二玉, 1918~1945)은 제주시 이도동 출신으로 소년 시절부터 주로 일본에 살면서 고장노동을 했다. 광복 직전 화재가 발생하여 책과 원고들이 소실되었다. 김이옥은 ‘김영(金影)’․ ‘황야경작(荒野耕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1944년 귀향하여 일본어로 쓴 47편의 시를 적은 육필시집을 최길두(崔吉斗)에게 맡겨두었다.
최길두는 해방후 창간한 동인지『新生』에 보관하고 있던 육필시집을 『흐르는 情緖』라는 미간행 시집으로 소개하고, 일부 작품을 번역하여 실었다.
『新生』에는 “삼십을 종막으로 불행히도 요절해 버린” 그에 대한 시평과 추도의 글도 실려 있다. 김영(金影)의 시 「破船」은 김이옥의 작품이다.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의 ‘탐라문화총서(13) 『濟州文學(1915~1945)』(1995)’에 김이옥의 작품 중 「이여도」, 「해녀(海女)·1」,「해녀(海女)·2」,「슬픈 해녀여」,「나의 노스탈쟈여」,「먼 타향에서」,「방고애부(訪故哀賦)」, 「옛성에 과거를 묻지 말아라」, 「나는 시인(詩人)」,「사랑스런 나의 집」 등 37편의 번역시가 일본어 원문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조급히 흐르는 물살에 바위를 두드리면/ 어두운 램프에 떠올라 보인다/ 검은 안색에/ 눈시울 적시고 있는 슬픈 해녀여/ 생명 짧은 처녀이기에/ 멋부리는 심정에서 사온 치마를/ 벽에 그을린 채 바다에서 지새노라면/ 나오누나 가느다라이 휘파람 한숨”-김이옥의 시「슬픈 해녀여」.

6. 최길두의 「無題 5-監獄」

“내 故鄕은/ 섬의 나라라/ 파-란 물결 춤을 춰 좋아라// 情든 땅/ 꿈의 나라라/ 하-얀 燈臺 깜박여서 좋아라// 밤이면, 離別의 뱃고동에/ 섬 색시에 젖는 옷고름// 떠나는 눈물 수건에 그 안타까움/ 어찌 안 좋아// 오/ 내 고향/ 동백꽃 피는 나의 고향/ 상처도 가지가지매/ 어쩌라고 안 그려요 글쎄/ 내 故鄕은/ 섬의 나라라/ 물새들 날아 좋아라/ 情든 땅/ 꿈의 나라라/ 人魚떼 울어 좋아라// 날이 새면-갯변가에/ 靑春의 피리 불던/ 사랑의/ 曲調曲調에/ 그 옛이라 안 좋은가.// 아하/ 내 故鄕/ 구름 피는 나의 故鄕/ 옛 자취도/ 갖이, 갖이매/ 어쩌라고 안 그러 글쎄”-최길두 시 「故鄕의 노래」(1938) .

“水精보다도 맑은 純潔의 젖줄/ 사탄 뒤끓으는 地獄으로 하여금/ 人間像의 不幸한 사랑의 나그내.// 가시밭길 흙탕길 죽음길 걸었나니/ 그 이름도 아름다운/ 人類의 십자가여”-「十字架」(1939).

최길두(崔吉斗, 1917~2003)는 제주시에서 태어나 시·소설·시나리오·무용가극 등을 두루 써 온 작가로 활동하다 2002년 85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제주공립보통학교와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 구례군농회기수(農會技手)와 제주도농회기수를 지냈다.
그는 1937년 「絶望」을 비롯하여 「鄕土의 꿈이」·「無心」·「懷鄕」·「懺悔」 등을 1938년에 「思想)」·「故鄕의 노래」·「暮景)」등을, 1939년에 「平生」· 哀戀」·「四行詩」 등을 내놓고 있다. 1944년 11월 일본에 거주하던 시인 김이옥(金二玉)이 고향을 방문하였을 때, 그의 시 47편을 옮겨 적어 유실을 막기도 하였다.

“-너는/ 妖邪스런 魔女에 사랑받는 慘酷의 獸柵/ -醜惡을 좋아하는 구대기의 凱歌/ -冷血動物의 個性있는 世界/ -人爲的인 地獄을 자랑하는 文明의 허울 좋은 鐵面皮의 化粧師/ -世紀의 冒險的인 자랑/ -無錢家의 住家/ 故鄕 잃은 猛虎떼의 우리./ 그리고 無慙한 屠殺場// 오 너희들의 反省없는/ 人面獸心의 얼굴이여/ 또 만나리라/ 나의 巨强한 思想의 鐵馬는// 너희들의 腐敗한/ 鄕愁가 그립단다/ (제주도 淸津事件에서 獨房)”-최길두의 시 「無題 5-監獄」(1943).

대동아전쟁으로 어용(御用)은 가중되고, 젊은 학도들은 징병이란 이름으로 끌려갔다. 전쟁의 암운은 거칠기만 하였고, 전방은 농무(濃霧)로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콩나물이 시루 속에서 자라듯이 제주도에서 항일청년들의 모임인 비밀독서회가 결성이 되고, 바로 그 중심에 최길두가 있었다.
40년대 초부터 뜻있는 지식인청년들이 비밀독서회를 조직, 일어로 번역된 세계사상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조선이 나아갈 길에 대해 토론했다. 최길두는 회장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비밀독서회는 일주일에 두 번 모였다.
최길두의 집과 광인청년으로 통하는 이상희(李相熙)의 집이었다. 이상희는 머리는 깎지 않고 고슴도치 모양이며, 신발은 짚신에다 너덜한 한복차림이었다. 일경의 눈을 피해 광인으로 분장하고 징용을 피하였다. 이상희는 한국전쟁 당시 바다로 끌려가 아깝게도 운명하였다.
비밀독서회는 처음 7명이 결속된 모임이었다. 최길두를 비롯, 이상희․ 김운제(金雲濟)· 김귀석(金貴錫)· 정기준 ․조수인․ 윤한구(尹漢九)등. 한 달에 한 번은 산천단에서 회합을 열었다. 니이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도취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전황(戰況)은 어떤가? 정말 조선민족이 독립될 수 있을까? 피 끓는 청년으로써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그들의 공통된 과제가 되었다. 당시 일본군대본영(大本營)은 그들의 허위선전을 통하여, 그들의 패배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황군(皇軍)의 대승리를 조선민중에게 선전하고 있었다.
이들 독서회원들은 조선민족의 독립을 갈구하며 이를 위한 국제성세의 상황인식을 위해 비밀리에 단파수신라디오를 구해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李承晩)의 「2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했다.
독서회의 멤버가운데 김운제와 김귀석은 일경(日警)의 감시가 심해지자 모의소령(謀議蘇領)이 가까운 청진으로 가서 불라디보스토크로의 탈출을 시도하다가 함경북도 변경마을에서 일본군국경수비대에 체포된다. 당시 청진일보와 경기일보는「不逆朝鮮人一抹打盡」이라는 기사로 자세하게 보도한다. 이것이 바로 청진단파사건(淸津短波事件)이다.
두 사람은 12월 추운 겨울 청진감옥에 수감이 되었다. 모진 고문이 이어지고 이들은 제주도 친구들을 불기 시작했다. 청진경찰서 특별수사반은 급기야 명단을 가지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가장 주목했던 것은 누구의 지도와 사상적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가 바로 최길두였다.
최길두는 형사대의 습격을 받고 수감되었다. 최길두가 징용을 피하고자 제주보통공립학교 위촉강사로 몸담고 있을 때였다. 청진단파사건은 태풍이었다. 감방은 초만원이었다. 1945년 1월 3일 관련자 12명이 검거된다. 최길두를 비롯 이상희 고영수(高榮洙)․ 김용수(金瑢洙)․ 윤한구(尹漢求)․ 오기윤(吳基允)․고창위(高昌位)․ 추성환 ․이기형․ 이호택 ․고영일․ 박창재(朴昌宰) 등이다.
최길두는 사상범으로 취조가 시작되었다. “너는 조선문학을 한다면서…..” “너의 지도를 톡톡히 받았어!” “너의 사상적 지도와 존경하는 선배라 그랬어!” “소련으로 넘어가려는 계획과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등의 끔직한 취조였다. 물론 고문도 이어졌다.
감방의 하늘은 절망의 하늘이며, 얼굴을 비춰줄 별 하나가 없었다. 목이 타도 목을 추겨줄 물 한 방울이 없었다. 주위는 철책이며 감시하는 호랑이나 사자뿐이다.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가족들이다. 형사는 한쪽에 두 주전자를 들고 와서 책상 위로 두면서 “어서 먹어라”고 윽박질렀다. 감방의 식사는 콩을 넣은 꽁보리밥이며, 찬은 해초에 소금을 뿌린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문학! 그래도 사상? 떠벌이지 마! 졸장부 사나이…….” 최길두는 결국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연행된 윤한구는 청진감옥에서 옥사했으며, 김귀석은 행방은 아직까지 알 바가 없다.
최길두는 「故苑」이란 제목의 시에서 “불러 부질없는 무궁(無窮)의 국토(國土)는/ 悍惡한 倭族人의 鐵槍에 못박혀/ 어두움의 獄處로 못박혀 맡아/ 반만년(半萬年)의 겁이 깃들은 故苑은/ 그 따사로운 모습이 서노니!”라고 그 아픔을 노래했다. 「故苑」은 사적 123호인 창경궁(昌慶宮)을 의미한다. 민족을 사랑하고 항일정신에 눈을 뜬 시인의 독서와 시작업은 오직 민족해방을 염원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나. 일제강점기 제주소설

‘한국작가’가 쓴 소설을 ‘한국소설’이라 하듯이, ‘제주소설’이란 ‘제주작가’들에 의해 창작된 소설이다. 제주인들에 의해 현대소설이 발표된 것은 194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시형(李蓍珩)의 「이여도(イヨ島)」(1944)·「신임교사(新任敎師)」(1945), 이영복(李永福)의 「밭당님(畑堂任)」(1942), 오본독언(吳本篤彦)의 「귀착지(歸着地)」(1941)·「양지바른 집(日向の家)」·「한춘(寒春)」·「긍지(矜持)」(1943)·「기반(羈絆)」(1943)·「휴월(虧月)」(1944)·「애(崖)」(1944)·「바다 멀리(冲遠く)」(1944)·「해녀(海女)」(1944)·「맥적(麥笛)」(1944)·「쌍엽(雙葉)」(1944)·「금선(琴線)」(1945) 등이 발표되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일본어로 된 것들이다. 친일적인 요소가 나타나는 작품들도 있지만, 일제 말기 제주도의 상황과 제주 사람들의 의식·정서를 보여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1. 이시형의 「이여島」

이시형(李蓍珩, 1921~1950)은 애월보통학교를 졸업, 일본의 아이치현[愛知懸]에 있는 서미잠사학교(西尾蠶絲學校)를 거쳐 경성사범학교 강습과와 혜화전문학교 흥아과(興亞科)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전라남도 곡성의 삼기공립보통학교, 전라남도 함평의 함평공립소학교, 함경북도 경성공립농업학교, 제주공립농업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4년 ‘궁원삼치(宮原三治)’라는 이름으로 『國民文學』 8월호에 「이여島」가, 1945년 『國民文學』 2월호에 「新任敎師」가 추천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이여島」는 제주읍을 주요 배경으로 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의 갈등을 그려낸 작품으로, 교사 체험이 반영된 작품으로 보인다.
광복 후 제주농업중학교 교사로 재임하였다. 1947년에 3·1절 기념 시위 사건이 발발하자 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활동하면서 투쟁 방침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한국전쟁 때 예비 검속되어 수장(水葬)된 것으로 알려졌다.

2. 이영복의 「畑堂任」

이영복(李永福, 1921~2004)는 )은 애월읍 금성리에서 출생했다. 옛이름은 이영구(李永九). 아버지가 상해임시정부 독립기금 지원 혐의로 연루되어 그 여파로 보통학교밖에 수학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숭실중학교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해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1937년 평양으로 건너가 서점점원을 하며 문학 서적을 접하게 된다. 1938년 아버지에 의해 강제 귀향하여 한글잡지 『아이생활』․ 『농민생활』 지국을 운영했다.
1940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京都〕외국어전문학교 산하의 제1외국어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년 3개월 만에 중퇴하고 노동자가 되었으며, 주로 일본 문인들과 교류하며 문학 활동을 하였다.
일본청년문학자협회 회원이 되면서 『靑年作家』 1942년 7월호에 모리야마 이페이[森山一兵]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어 소설 「畑堂任(밭당님)」을 발표하였다. 「畑堂任」의 배경은 한경면 고산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성격이 괴팍한 한 노파의 삶을 그린 것이다. 학업중단협회 가입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다가 1943년 8월 오사카에서 체포되어 강제 귀국당하였다. ‘李永九’란 이름을 ‘李永福’으로 개명한 것은 4․3사건 당시 무장대 지도자 이덕구(李德九)와 비숫한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친척이 아니냐고 추궁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46년 『新生』에는 李永九란 이름으로 단편소설 「夜路」, 시 「追憶」, ‘YKR(Young-ku, Lee)’라는 이름으로 시 「悔淚」우울을 발표했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濟州民報』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제주4·3 후에 문학 활동을 중단하였다. 제주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작품을 썼으며, 제주 방언을 소설에 처음으로 구사한 소설가였다.

3. 오본독언의 「歸着地」

오본독언(吳本篤彦, 1921~?)은 창씨개명이며 본명은 미상이다. 제주시 이도동 소재 제주 삼성혈 부근에서 태어나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일제강점기 말기에 적잖은 소설을 일본어로 썼다. 1941년 소설 「歸着地」가 친일단체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익찬(文化翼贊) 현상 소설에 입선하였다. 『國民文學』 1943년 9월호에 「矜持」와 1943년 11월호에 「羈絆」이 추천되어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矜持」」는 1930년대 중반의 제주읍의 면모를 잘 드러낸 작품으로서 당시 제주인들의 의식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모두 일본어로 쓰여졌고 친일적인 성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歸着地」(1941)·「日向の家)」·「寒春」·「矜持」(1943)·「羈絆」(1943)·「虧月」(1944)·「崖」(1944)·「冲遠く」(1944)·「海女」(1944)·「麥笛」(1944)·「雙葉」(1944)·「琴線」(194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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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혁암 김형식의『革菴散稿(혁암산고)』

혁암(革菴) 김형식(金瀅植, 1886~1929)은 농은(農隱) 김문주(金汶株)의 차남으로 농은의 4남인 송산(松山) 김명식(金明植)과 형제지간으로 1914년 12월부터 2년여를 조천면장으로 재임했으며 당대 시문(詩文)에서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아우 金在植 ․金明植과 조카 金址煥․ 金甲煥, 모두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김형식은 일제강점기 직접 항일운동을 펼치지는 않았지만, 3․1운동 이후 호를 피애(避避礙)에서 혁암(革菴)으로 바꾸고, 민족의식을 드러낸 많은 시문을 남겼다.
『革菴散稿』는 김형식의 한시·한문을 번역한 책이다. 일제시대 시문(詩文)의 대가인 최영년(崔永年)이 1917년 4월부터 1918년 10월까지 발행했던 국․한문 혼용잡지인 『朝鮮文藝』에 실렸던 선생의 시문 230여 편(한시 200여 편, 한문 30여 편)이 포함되어 있다.

‘三百年前有此樓(삼백년전유차루) 삼백 년전 지어진 이 망루/ 依然古蹟至今留(의연고적지금류) 의연히 지금까지 남아있네/ 海流東注天窮處(해류동주천궁처) 바다 동쪽으로 흘러 하늘 닿는 곳/ 山勢北來地盡頭(산세북래지진두) 산세 북쪽으로 내려와 땅 끝 머리에/ 館下垂楊鴉陣暮(관하수양아진모) 관아래 수양버들엔 저녁 까마귀 때/ 城邊腐草鬼燐秋(성변부초귀린추 토성) 썩은 풀엔 가을 도채비불/ 危欄逈出烟波上(위란형출연파상) 위태한 난간 저녁 연기위로 아련히 솟아있고/ 回首風塵淚不收(회수풍진루불수) 이 풍진 세상 돌아보니 눈물 거둘 수 없네/’-金瀅植의 시 「登戀北亭」 전문.

연북정은 조천 포구에 높이 쌓은 석축대위에 지어진 정자로 북쪽은 시원한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으며, 남쪽으로 한라산이 바로 보이는 곳이다. 선조 23년(1590) 목사 이옥이 창건하여 처음엔 쌍벽정(雙碧亭)이라 명명하였는데, 선조 32년(1599) 목사 성윤문(成允文)이 중수(重修)하여 연북정(戀北亭)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혁암은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 수은(水隱) 김희돈(金熙敦)․ 해은(海隱) 김희정(金羲正)․ 만취(晩翠) 김시우(金時雨) 등과 교류하면서 만와(晩窩) 김지호(金址鎬)․ 소림(小林) 오태직(吳泰稷)․ 농은(農隱) 김희선(金熙璿)과 그의 백부의 유시(遺詩)를 정리하여 서문을 쓰기도 했을 만큼 당대 시와 문에서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革菴散稿」에서 혁암은 영주십경과 한시 몇 수를 제외하면 주로 주변 인물들과의 우정, 객지에서의 향수 등 일상의 감회를 서슴없이 읊고 있다.

라. 고경흠과 계급문예운동

1. 고경흠의 삶과 사상

“문학의 영역의 지도적 위치는 그의 온갖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입장에 있어 노동계급에 속한다. 농민작가는 우정대우를 받으며, 우리의 무조건적 지지를 받아야 된다. 우리의 과제는 그들의 성장하고 있는 일단을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궤도에 도입시키는데 있다.”- 조선공산당의 「문학테제」(1925년).
 
고경흠

고경흠(高景欽, 1910~?)은 서울 정동공립보통학교 졸업하고, 1925년 제주의 첫 사상 단체인 신인회(新人會)를 창립하였고, 1926년 2월 경성중학을 중퇴한 후, 그해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했다. 1927년 3월 일본 도쿄로 건너가 고학하였다.
1927년 5월 재도쿄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 홍효민(洪曉民)·이북만(李北滿) 등과 함께 제3전선사(第三戰線社)를 설립하고 기관지 『第三戰線』을 발간했다.
제3전선사의 하계 전국순회 강연이 끝난 후, 박영희(朴英熙) 등을 만나 9월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개편에 참여하였으며, 조선프로예맹 도쿄지부를 결성하여 사회주의 문예운동을 전개했다. 10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과 신흥과학연구회에 가입했다. 1928년 9월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중도 퇴학하였고, 10월 신간회 도쿄지회에 가입하였다가, 일본경찰의 지명수배를 피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1929년 3월 상해에서 ML파 공산주의 그룹의 지도자들과 만나 코민테른 ‘12월 테제’에 의거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방침을 협의했다.
그 후 일본으로 돌아가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재건에 참여하고, 출판부에 배속되어 기관지인 『勞動者農民新聞』․ 『現階段』의 발간 업무에 종사했다. 그리고 조선프로예맹 도쿄지부를 당재건운동에 활용하기 위해 합법적인 출판사 무산자사(無産者社)에 참여했다.
1930년 4월 도쿄에서 『戰旗』․ 『인터내쇼날』․ 『無産者』 등의 잡지 발간을 주관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 볼셰비키화의 임무」․ 「조선 문제를 위하여」․ 「조선에 있어서 혁명적 앙양과 공산당의 임무」․ 「민족개량주의의 반동적 도량을 분쇄하라」․ 「평양파업의 의의와 공산당의 활동 임무」․ 「조선공산당의 당면문제」․ 「조선에 있어서 반제국주의 협동전선의 제 문제」․ 「조선에 있어서의 농민문제」 등을 집필하여 당재건 운동과 조선혁명에 관한 방침을 천명했다.
그해 11월 상하이로 가서 한위건(韓偉健)을 만나 당재건 운동의 방침을 협의했으며, 1931년 2월 조공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과 선전부원이 되었다. 4월 조공재건설동맹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로 조직을 변경하고 출판위원으로 선정되었고, 도쿄에서 무산자사를 근거지로 삼아 『코뮤니스트』․ 『烽火』 등의 기관지 출판 사업에 종사했다. 8월 하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김남천‧한재덕 등과 함께 1933년 5월 경성지법에서 예심에 회부되었으며, 4년형을 받고 법정에서 사상전향을 선언했다.
그 뒤 출옥하여 여운형(呂運亨)이 사장으로 있던 『朝鮮中央日報』 편집부원이 되었으며, 1938년 7월 전향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線思想報國聯盟) 경성지부 간사가 되었다.
해방직전 1944년 여운형 등이 조직한 건국동맹을 바탕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고경흠을 비롯 여운형․ 안재홍․ 최근우 등 중도좌우파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조선총독부로 부터 치안유지권․ 방송국․ 언론기관 등을 이양 받고 전국 각지에 지부를 세워 당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내부에서 좌익의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안재홍 등 민족주의자들이 탈퇴하고 인민공화국으로 이름이 바뀐 후에는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해체되고 말았다.

2. 카프(KAPF)의 방향전환에 연관

“실천은 (이론적) 인식보다 우위에 있는 것인바, 왜냐하면 실천이란 보편적이라고 하는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현실성이라고 하는 가치도 지니기 때문이다.”- V. I. Lenin, [철학노트], 1915.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orea Artist Proletarian federation, 1925.8.23∼1935.5. 21)은 1925년 8월경 조직되어 35년 해산한 사회주의계열의 문예운동단체이다. 머리글자를 따서 ‘카프(KAPF)’라고 약칭한다. 기관지로 『文藝運動』(1926), 『藝術運動』(1927)을 발간하였다.
창립 당시 구성원은 박영희ㆍ김기진ㆍ이호ㆍ김영팔ㆍ이익상ㆍ박용대ㆍ이적효 ㆍ이상화(李相和)ㆍ조명희(趙明熙)ㆍ 이기영(李箕永)ㆍ 박팔양(朴八陽)ㆍ김양 등이다. 카프의 초기 활동은 흔히 신경향파(新傾向派) 문학, 혹은 자연발생적 프로문학으로 불린다.
카프의 본격적인 활동은 1926년 『文藝運動』을 발간하고, 다음해 9월 이른바 조직의 제1차 방향전환이라 불리는 조직개편과 함께 이루어진다. 제1차 방향전환은 지금까지를 자연발생적 단계로 규정하고 명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작품행동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투쟁을 실현하기 위한 무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논강에 적시하여 정치투쟁을 위한 투쟁예술의 무기로서 조직의 임무를 규정하였다.
제2차 방향전환은 당시 고경흠 등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카프는 1931년 8월부터 10월까지 한위건ㆍ양명 등에 의한 조선공산당협의회사건과 연루된 세칭 ‘카프 1차사건’을 겪게 된다. 도쿄에서 발행된 『無産者』의 국내 배포와 영화 『地下村』 사건으로 11명의 동맹원이 체포되어 카프의 조직 활동은 크게 위축된다. 이 기간 중에 예술대중화나 농민문학론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창작방법론으로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론과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론이 제출되었다.
이처럼 ‘카프 검거사건’이란 1931년과 1934년 두 차례에 걸쳐 있었던 카프회원들에 대한 일제의 검거사건이다. 일제는 30년대 이후 침략전쟁을 확대해나가면서 식민지 조선에는 병참기지화·민족말살정책을 강요, 그 일환으로 저항성 있는 문학 활동을 철저히 탄압하는 한편 친일문학운동을 적극 조장했는데, 카프 검거는 저항 문학 활동에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에서 일으킨 사건이다.
1931년 7월 1차 검거에서 박영희·김기진·고경흠·임화·안막·이기영·이평산 등이 검거되고, 그 후 카프는 비합법운동화를 주장하는 경향과 합법적 범위 내에서의 활동을 주장하는 경향으로 분열, 양자의 대립이 심화되어 마침내 1932년 합법운동론자들이 탈퇴·전향했다. 이로써 카프는 크게 위축되었으며, 1934년 7월 2차검거 후 해체되었다.
결국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이다.”라는 유명한 전향문을 쓴 박영희와 백철(白鐵) 등이 조직으로부터 이탈하면서 카프는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더구나 일제로부터 직접적으로 해산 압력까지 받아 카프 지도부는 동맹원들에 대한 서면질의 형태를 밟아 1935년 김남천 등이 카프 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카프는 공식적으로 해체하였다.
이 무렵 소련의 라프(RAPP)와 일본의 나프에 영향받아 임화ㆍ안함광(安含光) 등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둘러싼 논의를 전개하였고, 이기영의 「고향」, 강경애의(姜敬愛)의 「인간문제」 등이 이 시기에 산출된 대표작이다. 이후 프로문학 진영은 조직이 해체된 상태에서 전체적으로 침체기에 빠졌다가, 8ㆍ15광복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조선문학가동맹으로 다시 재건되었다.

“해방 후 유쾌할 것이라고는 그리 찾아볼 수 없는 우리네 살림살이와 국제적으로 몇 번이고 약속되었던 조선독립은 미소의 의견 불합으로 여지껏 공위가 열리지 않고 국내의 모든 공장은 모리배와 원료 부족 등으로 파손 내지 정지 상태에 있고 쌀값과 모든 물건 값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듯 선량한 인민과 월급쟁이들을 울리고 있으며 광목 고무신이 우리네 살림에 가장 긴요한 것인데도 거리에서 광목 한 자 볼 수 없고 고무신이라고는 노인네 뱃가죽 같은 한번 신으면 찢어져 없어지는 것이다. 해방이 됐다고 고국에 돌아온 전재 동포들은 움 속에 있게 되고 단간방이라도 제 집을 지닌 사람은 해방 후 창호지 하나를 똑똑이 못 바르고 그날그날 밥걱정과 원인 모르는 테러와 공포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고경흠의 글 『獨立新報』 1947년 3월 26일

마. 기타 제주출신 작가들

신동식(申東植)은 1925년 3월 『朝鮮文壇』에 당선 시로 「濟州島」를 발표했다. 이 시는 1920년대 제주도의 정경을 묘사했는데, 제주적인 정취가 넘치는 작품이다. 귤 향기, 한라산, 망아지, 잠녀, 농부의 속요(俗謠) 등 제주적인 것을 소재로 쓰인 작품이다. 이 시를 통해서 1920년대의 제주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1919년 조천만세운동에 앞장섰던 김장환(金章煥)은 박종화 등과 함께 ‘피는 꽃’ 동인으로 활동했는데 김지원 ․김명식과 같은 마을, 같은 집안이다.
오정민(吳禎民)은 생몰 연대, 출생지, 성장과정 및 학력 등은 미상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의 오무라〔大村益夫〕교수는 도쿄의 탐라연구회에서 발간하는 『濟州島』(1998)에 실린 「濟州文學을 생각한다」는 글에서 문학평론가 오정민〔山田榮助〕이 제주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오정민은 1943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國民文學의 新倫理」로 당선된 이후 친일평론을 다수 발표하였다.
양종호(梁鐘浩)는 애월읍 상가리 출신으로 양원정수(良原正樹)란 이름으로 일본 『關西文學』에 시를 발표하였다.

참고문헌

강철 편, 1983, 『재일조선인사연표』, 웅산각.
고시홍, 1984, 「제주문단사」,『제주문학』13, 제주문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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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 2017, 「이제 강탈의 무서운 손톱은 함부로 조국의 자취를 할퀴고-시인 최길두의 역사체험과 글쓰기」, 제주문학 70호.
김동윤, 2001,「20세기 제주문학사 서설」,『영주어문』3, 영주어문학회.
김병택, 2010, 『제주예술의 사회사』상․하권. 보고사
김병택, 2005,『제주현대문학사』, 제주대학교 출판부.
김성동, 2018, 「진보적 민족주의 언론인 고경흠」, 『주간경향』 1269호.
김희문 저, 오문복 역, 2003, 『수은시집(水隱詩集)』,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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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국주, 1981, 『조선사회운동사사전』, 사회평론.
濟州道, 2006, 『濟州道誌』 1~6卷, 濟州道誌編纂委員會.
韓國藝術文化團體總聯合會, 1988.『濟州文化藝術白書』
한국문인협회제주도지회, 2008. 『제주문협50년』.
제주의소리 자료 (http://www.jeju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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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문학이여!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의 시 ‘절정(絶頂)’이다. ‘절정’의 배경은 위기감이며 극한(極限) 의식이다. 동시에 그에 맞서고 있는 주체의 결연한 의지와 초극(超克)의 자세이다.
그것은 상황의 열악함에 결코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불퇴전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해 보려는 숭고한 의지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Jonath an Swift)는 1975년에 죽어 세인트트릭 성당에 묻혔다.
벽면에는 그가 직접 쓴 다음과 같은 라틴어 비문이 새겨졌다.
‘신학박사이자 이 성당의 참사회장인 조나단 스위프트의 시신이 이곳에 묻혀 있다. 이제는 맹렬한 분노가 더 이상 그의 마음을 괴롭힐 수 없으리라. 나그네여, 떠나시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전력을 다해 지고의 자유를 얻으려 한 이 사람을 본받으시오.’
흔히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의 작가로 알려진 조나단 스위프트는 영국 문학사뿐만 아니라 서구 문학사 전체를 통해서도 가장 탁월했던 풍자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그가 지녔던 극단적 분노에 대한 문학적 표출 방식으로서의 풍자라는 장르를 선택하게 되었다.
우리가 말하는 분노는 언제나 나쁜 것일까?
“정의는 그 안에 분노를 지닌다. 정의에서 나오는 분노는 진보의 한 요소가 된다.”
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의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에 나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지만 성전을 더럽힌 장사꾼과 환전상들에게는 의로운 분노로 정화시켰다.
문학은 시대적 아픔의 표현이다. 문학은 사회적 약자들의 분노를 승화시켰을 때 생명력을 획득한다. 분노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비굴하게 굴복하기만 했던 권력에 덤벼들 용기를 주기도 한다.
러시아혁명은 “차르 폐하, 국민들이 굶고 있나이다, 식량을 주소서, 충성으로 섬기겠나이다”라고 애원하던 국민들에게 총질을 해대자 분노한 백성들이 일으켰다.
시인 이산하의 장편서사시 ‘한라산’은 분노의 절정에 도달한다. 세계가 제국주의의 땅따먹기 각축장이 되어버린 현실을 직시한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의 실체와 탐욕의 정치, 전국에서 불었던 저항의 바람을 시에 기록한다.
제주도에서 자행된 살육, 해방 후 평화의 시대가 아닌 폭력의 시대를 다시 맞이해야 했고 그에 거침없이 저항했던 우리나라의 근대사와 민중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민중의 역사 안에는 도저히 눈으로 볼 수 없고 입으로 담을 수 없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참혹한 죽음과 쓰라린 상처들이 하나하나 꽂혀 있다. 피로 얼룩진 1948년 4월 3일에 자신의 젊음을 고스란히 세워두었다. 두려움보다는 역사의 진실과 민중들의 장엄함이 그의 용기이자 힘이었다.
제주4․3항쟁의 진실을 알렸던 장편서사시 ‘한라산’은 현기영 작가의 ‘순이삼촌’과 함께 제주4․3항쟁 70주년을 맞아 ‘촛불혁명’과 함께 다시 주목되었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가신 모든 혁명전사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
‘한라산’은 더 깊숙한 숲으로 안내하듯 ‘제1장 정복자’부터 ‘2장 폭풍전야’, ‘3장 포문을 열다’, ‘4장 불타는 섬‘에 걸쳐 뜨거운 항쟁의 역사가 서사적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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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과 여성 피해

“밤이면 인공기/ 낮에는 태극기/ 오라고 오고, 모이라면 모이고/ 가라면 가고, 그러다 죽으라면 죽음의 길로/ 가는 나그네// 아버지여, 삼촌이여, 누이여/ 아아, 스무 살의 나의 누이여/ 토벌대 최 상사의 폭행에 항거하다/ 총살당한 감산리 땅 우리 누이 강명옥!/ 1949년 2월 4일(음력)/ 스무 살 나이로 아깝게 죽은 나의 누이여!”
 시인 김용해의 ‘감산리 누이여’의 마지막 부분이다.
제주4․3으로 인한 여성들의 피해는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2중, 3중의 고통을 반영한다. 강명옥은 스무 살 감산리 처녀. 그의 집에 주둔했던 ‘최 상사’가 처녀를 겁탈하려다 반항하자 총을 쏘았다. 강명옥은 군인의 겁탈을 죽음으로 막았다.
4․3 당시 남성 못지않게 여성의 피해는 다반사(茶飯事)였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보면 제주4․3 민중봉기 전후에 서북청년단 등이 자행한 여성들에 대한 만행은 상상할 수가 없다.
여성 피해자들의 증언을 어렵게 만드는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가 여성들의 피해를 다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여성들이 피해자의 위치에서 만이 아니라 제주4․3의 주체로서 역할에 대한 이야기들은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페미사이드(Femicide)’는 여성(Fe male)과 살해(Homicide)를 합친 용어다. 범행 동기나 가해자와 상관없이 여자라는 이유로 혹은 여자라는 점을 노리고 살해하는 것이다. 인종 또는 민족에 대한 말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에 빗대어 만든 신조어이다.
페미사이드는 일반적으로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이 심한 불평등 사회일수록 많이 발생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완력과 사회·경제적 지위가 달리는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연애·동거·혼인 상대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을 가리켜 페미사이드라고 정의한다.
1976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여성 대상 범죄 국제재판에서 여성학자 다이애나 러셀(Diana E. H. Russell)은 페미사이드에 대해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이 용어를 공식적으로 정의한 바 있다.
제주4․3중앙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는 현재 1만4233명이다. 그 중 남자가 1만1251명이고 여자가 2982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4․3 사건 전체 희생자 수로 판단할 수는 없다. 아직도 신고하지 않았거나 미확인 희생자가 많다. 특히 10세 이하 어린이와 61세 이상 노인이 전체 희생자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여성의 희생자는 20%를 넘고 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김용해의 시 ‘누이에게’는 이렇게 전개된다.
 “단단한 돌멩이로/ 슬픔을 눌러놓고/ 단단한 돌멩이로/ 아픔도 눌러놓고/ 당당하게 바람 받고 섰는 누이여// 모든 풀들이 다 누워도/ 혼자서 벌판에 우뚝 선 누이여// 바위같이 뻔뻔한 총칼 앞에도/ 감옥처럼 차가운 권력 앞에도/ 돌보다 작은 가슴 열고/ 당당하게 선 누이여/ 4․3의 누이여”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왜 죽어가는 지도 모르면서 죽어갔다.
미국을 모르고, 미국의 세계 전략도 모르고, 섬 주민들에게 몰살을 몰고 온 4․3은 도무지 이해불능이었다.
그들은 제주도의 8할을 붉은 색으로 칠해 ‘붉은 섬’이 라고 명명했는데, 그 붉은 색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 대량학살을 그들은 ‘빨갱이 사냥’이라고 불렀다. 거기에 연약한 여성의 신음소리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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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002호 ‘지영록’

“진시쯤에 화북소에 들어와 정박하였다. 판관 이하 영목의 사람들과 이속들이 모두 후선머리에 왔고, 구사(舊使)는 포구에 내려온 지가 벌써 며칠이 되었다. 나는 포촌에 머물며 편히 쉬었다. 잠시 후 드디어 성에 들어갔는데 서로 거리가 10리 남짓하였다.”
야계 이익태(李益泰, 1633~1704)가 제주섬에 도착한 것은 1694년 6월 29일이다. ‘지영록(知瀛錄)’은 당시 제주의 실상을 일기체로 기록한 글로 수고본(手稿本)으로 작성됐다. 그의 후손들이 제주박물관에 기증했다.
‘영(瀛)’은 ‘영주(瀛州)’를 의미하는데 이는 제주의 옛 지명이다. 1997년 제주문화원이 번역·출간했다.
이익태는 1694년 7월부터 1696년 9월까지 제주목사를 역임했다. ‘지영록’은 그가 제주의 풍물들을 시문(詩文)을 곁들여 기록한 책이다. 제주도의 최초 인문지리지다.
특히 외국인의 표류 상황에 대한 기록을 통해 조선 시대 해양교류사, 표류민 송환 체제, 외국인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노력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그 가운데 1687년 8월 ‘김대황’이라는 제주도민이 출항한 이후 파도에 휩쓸려 베트남에 이르렀다가 귀국한 내용인 ‘김대황 표해일록(金大璜 漂海日錄)’은 조선 시대 베트남 관련 기록으로 희소성이 있다는 평가다. 2011년 제주문화원은 ‘지영록’을 재발간하기도 했다.
향토 사료에도 ‘스테디셀러’가 있다. 초판을 펴낸 이후 책을 구하고 싶다는 요청이 많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제주 정착민 증가와 맞물려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리라.
제주문화원의 ‘스테디셀러’가 어디 ‘지영록’뿐인가?
1994년 창립 이래 제주지방사 관련 향토 사료가 60여 권에 이른다.
1996년 김윤식(金允植, 1835~19 22)의 ‘속음청사(續陰靑史)’를 시작으로 1997년 ‘지영록’, 그리고 지난해 김석익(金錫翼, 1885~1956)의 ‘역주 탐라기년(譯註 耽羅紀年)’까지 묵직한 번역서들이 주류를 이룬다.
‘속음청사’는 운양 김윤식이 자신이 체험한 사건들을 기록한 한문 일기다. 제주로 유배온 1897년 12월부터 이재수의 난이 발생해 1901년 7월 전남 무안군 지도(智島)로 이배되기까지의 기록이 촘촘하다.
제주에서 겪었던 방성칠·이재수의 난에 대한 기록만이 아니라 당시의 국내·외 정세, 제주도 유배인의 생활, 부패한 관료의 행태 등이 담겼다.
또 석우 김경종(金景鍾, 1888~19 62)의 ‘백수여음(白首餘音)’은 4․3문학의 백미(白眉)로 꼽히고 있다.
무자년 제주4․3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당시 경찰 당국과 서북청년단의 만행을 지적한 ‘이승만에게(與李承晩書 己丑)’, 경인사변 직후 이승만 대통령을 성토한 ‘이승만 성토문(李承晩聲討文 庚寅)’등이 눈에 띈다. 사사로이 목숨을 보전치 않으려는 곧은 절개가 드러나 보인다.
그동안 문화재청은 유형문화재 가운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 유물을 ‘보물(寶物)’로 지정해왔다. 지금까지 2000여 건이 넘는다. 이번에 ‘지영록’을 대한민국의 보물 2002호로 지정·발표했다. 현재 제주에는 국가 지정 보물 7개가 있어 ‘지영록’이 확정돼 총 8개 보물을 보유하게 된다. 기존 보물 7개는 제주관덕정, 제주불탑사5층 석탑, 탐라순력도, 안중근 의사 유묵, 예산 김정희 종가유물 일괄, 최익현 초상, 제주향교 대성전 등이다.
“계유(癸酉·숙종 19년 1698) 7월 26일 왜인 3명이 대정현경 차귀소(大靜縣境 遮歸所) 연변에 표박했다가 두모촌 사람 집에 뛰어 들었다. 머리는 죄다 깎았는데 양쪽 머리 사이에만 약간의 머리털을 남겨서 머리통 뒤에 고리를 지어 묶었다.”
‘지영록’ 끝부분의 ‘표왜인기(漂倭人記)’에서 뽑아봤다.(제주일보| 승인 2018.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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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승천기’ 유감

일본은 제주해군기지에서 열린 ‘2018년 대한민국 해군 국제관함식’에 해상자위대 함정의 불참을 통보했다.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 때문이다.
일본군은 1945년 3월 20일 본토 수호를 위한 ‘결호(決號)작전 준비요강’에 따라 제주도를 무대로 ‘결7호 작전’을 수립했다.
제주에서도 전투기 비행장과 갱도 진지, 고사포 진지 등 각종 전투시설 건설이 시작됐고 수많은 도민이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국가기록원에는 제주도민 8715명이 이런 노역에 강제동원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루에 제주섬 곳곳에서 수백명씩 동원된 것을 고려하면 연인원은 5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붉은색 동그라미 주변으로 햇살이 강렬하게 퍼져 나가는 모습을 그린 깃발. 제국주의 시대 일장기와 함께 일본 국기로 대접받던 깃발. ‘떠오르는 태양의 기운’이란 뜻을 담고 있다는 깃발. 이것이 바로 욱일승천기다.
일본은 1998년, 2008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두 차례의 관함식에도 욱일승천기를 달고 참여했다.
욱일승천기가 문제 시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욱일승천기가 일본의 ‘제국주의’ 혹은 ‘군국주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우경화(右傾化)가 가속화되고 있는 일본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보며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욱일승천기의 등장에 우려를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욱일숭천기를 ‘전범기(戰犯旗, War Criminal Flag)’라고 부른다.
전범기는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들의 국기와 관련 단체의 상징기를 말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군기였던 욱일승천기, 독일 나치당의 당기였던 하켄크로이츠,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이 사용했던 파시즈 등이 있다.
욱일승천기는 온라인 사전 ‘위키피디아’엔 ‘전범기’로 등재돼 있다. 일본의 정식 국기인 일장기와는 다르지만 일본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국기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과거 이들 국가들의 식민통치나 침략, 학살로 큰 피해를 입었던 국가들의 경우 전범기 사용을 금기 시 하고 있다. 특히 독일 나치의 상징이었던 하켄크로이츠의 경우 법률로써 사용이 금지돼 있다. 그것이 평화의 섬 제주에서 펄럭일 뻔 했다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욱일승천기는 일본이 1870년 처음 육군기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1889년 일본 해군이 뒤이어 군기로 채택해 일본군의 상징이 됐다. 일본이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자 욱일승천기는 ‘대동아기’로 불리며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세계 대전이 종료되자 욱일승천기는 사용이 금지됐다. 일본군이 해산된 후 자위(自衛) 목적으로 창설된 해상 자위대가 1952년부터 16줄기의 햇살을 가진 군기로 제정하면서 다시 부활했다. 현재는 육상 자위대 또한 일본군이 사용하던 욱일기를 변형한 8줄기의 햇살을 가진 군기를 사용하고 있다.
2018 해군 국제관함식에 국내·외 함정 39척과 항공기 24대, 45개국 대표단이 참가해 대한민국 역사 상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그런 국제관함식에 욱일승천기가 깃발을 흔들며 들이닥쳤다면….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욱일승천기는 아시아를 피로 물들이며 2000만명을 살해한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이다. 나치 전범기 이상의 끔찍한 상징물을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에서 공공연히 흔들고, 그것도 모자라 대표팀 유니폼으로 입고 나온 것은 모독이다.
2000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 있는 박정희 흉상을 기습적으로 철거했다.
그들은 욱일승천기를 흉상에 씌우고 오랏줄을 흉상 목에 감아 끌어내렸다. 흉상이 떨어지면서 콧등이 뭉개졌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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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지브롤터’

제주도를 ‘동양의 지브롤터(Gibr altar)’라 부른다. 1946년 10월 21일에 AP통신 시사평론가 화이트가 “제주도는 전략기지로서 동양의 지브롤터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되면서 파문이 일었다. 그렇다면 지브롤터는 과연 어떤 곳일까?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브롤터는 영국령의 반도이다. 영국 해군과 공군을 지키는 견고한 기지이다. 그곳을 두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러 민족이 쟁탈전을 벌여왔다. 세계대전 때에는 미군 작전기지로 독일군의 폭격을 받기도 했다. 그곳의 법적 지위는 1830년 영국의 직할 식민지(Crown Colony)에서 1946년 영국령 해외영토(Overseas Territory)로 변경되었다. 우리는 동굴음악회하면 우도가 떠오른다. 스페인 남단 지브롤터의 성 미카엘 동굴(St. Michael’s Cave)에서도 음악회가 열린다. 로마시대부터 신비의 동굴로 유명하다. 동굴은 지브롤터 해협으로 연결되면서 그 바다 밑의 길이는 24㎞, 깊이는 62.5m이다. 2차 대전 때는 응급병원도 차려졌으며 ‘미스 지브롤터’ 선발대회도 열리고 그 중 음악 연주회가 압권이다.
제주도는 동아시아 지중해의 목젖과 같은 위치이다. 한반도 지도를 거꾸로 돌려놓고 보면 제주도가 제일 앞에 나와 있다. 바로 중심이다. 중국과 일본이 바로 지척에 있고, 조금만 더 나아가면 동남아시아가 앞에 자리잡고 있다. 문화적, 전략적, 상업적 요충지라는 의미다.
그래서 제주도는 예로부터 지정학적으로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제주도에서 저 엄청난 학살사건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제주도가 언제든지 동북아의 화약고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제주도를 ‘동양의 지브롤터’라고 하는 것일까?
이처럼 동북아시아의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 받아왔다. 몽골족이 세운 원(元)이 제주도를 점령해 100년 가까이 지배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모슬포 지역에 비행장을 만들고 오오무라(大村) 해군항공대를 설치해 중국 대륙을 향한 폭격기지로 삼았다. 지리적 중요성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의 상황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일본에게는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전쟁 상대인 미국에게는 일본으로 진격하기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할 섬’으로 부각되면서 전쟁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은 1945년 초 본토 사수를 위한 대미(對美)결전의 최후 보루로 삼기 위해 섬 전체를 요새화하였다.
이로 인해 주민들이 당한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일본군은 어뢰정 기지를 만들기 위해 해안 절벽에 굴을 파도록 했다. 미군 함정이 다가올 경우 어뢰정을 타고 미군 함정에 돌진해 배를 폭파시키겠다는 ‘바다의 가미카제’였다. 성산 일출봉, 대정읍 송악산, 함덕해수욕장 인근의 서우봉 등 아름다운 해안 절벽마다 줄지어 뚫려있는 굴이 어뢰정 기지이다.
1948년 3월 28일 이승만(李承晩)은 방한 중인 미 육군성 차관 드래퍼(Draper)와의 회담에서 “미국이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설치하고자 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말을 들었다”면서 “한국정부가 수립되면 한국인들은 매우 기꺼이 미국이 제주도에 영구적인 기지를 설치하도록 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또한 1949년 5월 제주를 방문한 유엔한국위원단은 보고서를 통해 “대한해협 남쪽 그리고 일본의 남부와 중국의 북부 해안에 위치한 제주도의 전략적 중요성은 명백하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지브롤터에 해군기지가 있는 것처럼 제주도에도 해군기지가 있다. 너무나 빼닮은 꼴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강정해군기지가 미국을 대신하여 중국과 맞설 ‘불침 항모’라고 강조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견제로 제주도에 해군기지와 공군기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부 군사전문가들은 “중국과 일본은 이어도와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자국의 이익을 키우려는데, 우리끼리 모여 평화, 평화 읊는다고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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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가 문제다

“4․3반란사건-오욕의 붉은 역사.” “5․18은 북한의 역사다.” “노회찬의 죽음은 인과응보고 자승자박.” “노회찬 사망 자살 아닌 정황 의심되는 13가지.” “가방모찌 하던 놈이 반란으로 대권 먹고.” “백성들 에이즈 걸려 죽어라고 동성애 지지해 주시고.”
내가 가끔 얼굴을 내미는 카카오톡의 가짜뉴스(Fake News)들이다. 지인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거기에서 빠져나오라는 충고다. 그렇지만 내 생각을 옹호하는 지지자들이 있으니 글쓰기를 계속할 요량(料量)이다.
가짜뉴스는 정치·경제적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언론보도의 형식을 하고 유포된 거짓 정보이다. 그것을 신뢰하기 시작하면 이에 대한 해결 방법이 없다. 특정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고, 정보 편향성으로 인해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만드는 특징을 지녔다.
왜 우리는 가짜뉴스에 더 끌릴까? 진실뉴스에는 없지만 가짜뉴스에는 있는 특성은 무엇일까? 바로 새로움과 놀라움이다. 새로움과 놀라움에서 행복을 느끼는 성향이다. 위험을 감수하거나 몰랐던 사태를 접하는 경험은 뇌에서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방출을 촉진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가짜뉴스가 어떻게 ‘국민의 적’이란 문구로 바뀌었는지 많은 대화를 했다”는 트윗을 날렸다. 설즈버거 NYT 발행인과의 만남 후였다. 설즈버거는 “가짜뉴스란 용어가 거짓이라고 지적했고, 대통령이 언론인을 ‘국민의 적’으로 낙인찍은 데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며 받아쳤다.
가짜뉴스는 독일 메르켈 총리를 테러리스트 옹호자로 둔갑시키고, 오바마를 국민의례를 금지한 친이슬람 또는 반기독교 인사로 낙인찍었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다’는 가짜뉴스가 미(美)대선 기간 중 페이스북에서 가장 많이 공유된 소식이다.
지난 대선 당시 제주에서도 시청, 주요 버스정류장 등에 문재인 후보를 비방하는 유인물을 붙이고 자신의 블로그에 같은 글을 올리는 등 허위사실을 공표한 사람을 긴급 체포했다. 그 사람은 법치자유애국당이라는 이름으로 ‘더불어민주당 종북 공산주의자 빨갱이 북한의 심부름꾼(스파이) 제주에 오시는 것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는 벽보를 붙이기도 했다.
인류의 역사는 곧 가짜뉴스에 대한 투쟁의 역사와 다름없다. 백제 무왕이 지은 ‘서동요(薯童謠)’는 선화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그가 거짓 정보를 노래로 만든 가짜뉴스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났을 때 일본 내무성이 조선인에 대해 악의적으로 허위 정보를 퍼뜨린 일은 가짜뉴스가 잔인한 학살로 이어진 사건이다.
21세기형 가짜뉴스의 특징은 그 논란의 중심에 글로벌 IT기업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디어 플랫폼에 ‘정식기사’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IT 기업들은 ‘디지털 뉴스 중개자’로 부상하는 동시에 가짜뉴스의 온상지가 됐다.
왜 가짜뉴스가 퍼지는 게 문제일까? 가짜뉴스가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당선이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불리한 가짜뉴스를 얼마나 잘 나르느냐로 결정되는 사회를 상상해보라.
이곳에서는 인류가 피를 흘리며 쟁취한 자유와 정의, 평등, 합리적 토론을 통한 의사 결정이라는 민주적 가치가 모래처럼 흩어진다.
시간은 한정돼 있고 뉴스는 범람한다. 이용자는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눈길을 끄는 뉴스가 곧 팔리는 뉴스가 된다. 기사는 현저성(顯著性)과 특이성(特異性)이 있어야 선택받을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여론을 심각하게 오염시킬 수 있는 가짜뉴스의 심각성을 이야기해야 한다.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우리가 언론에 대해 가져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진짜뉴스와 가짜뉴스를 가리는 것이 어려운 세상에서 현명한 미디어 수용자가 되는 방법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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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난민’을 품어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마태오복음 25장 41-42절예수님도 박해자들의 칼을 피해 피난길을 떠나셨다. 이집트에 머물며 난민으로 인생을 시작하셨다.일제강점기에 땅과 집을 뺏긴 수많은 우리 선조들이 연고도 없는 만주로, 연해주로 떠나야 했다. 일자리를 찾아서 또는 4·3의 재앙을 피해 일본으로 이주했다. 지금도 700만명에 이르는 우리 민족이 전 세계에 흩어져 타향살이하고 있다. 근대 한국 사람들의 상당수는 난민이었다. 만주를 향해 달리는 경의선 열차 안이나 상하이행 배 안에는 식민지배의 폭압을 피해 탈출하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만약 중국이 일본 개입 명분을 준다며 상해임시정부를 폐쇄시키고 조선인들을 내쫓았다면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독일작가 테오도어 폰타네(1818 ~1898)는 “낯선 사람들이 제일 먼저 우리에게 고향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고 하였다. 삶의 터전을 떠나온 사람들에 손을 내미는 것은 인류애라는 가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구상에 생존하는 인간으로서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 인간다운 일이다. 제주로 찾아온 549명의 예멘 난민들에 대해 무슬림이기에 ‘테러리스트’나 ‘잠재적인 성범죄자’와 곧장 연결시키며 거부감을 나타낼 수 있다. 난민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자국민 안전’을 얘기한다. 그렇지만 예멘 난민들의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외국인 범죄를 이유로 다문화를 반대하는 태도는 외국인 모두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다. 무슬림 중에 테러리스트가 있다는 이유로 모든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라 단정하는 것이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문을 두드린 난민들은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일자리도 얻고, 세금도 내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학교에 보내며 한국 국민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인류애가 숭고한 이유는 인종도, 지역도, 종교도, 사상도 초월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난민이 6000만명을 넘어섰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도 난민이었다”는 말을 한다. 전쟁과 분쟁이 있는 한 과거에 난민이었던 우리도 다시 난민이 될 수 있다. 우리 민족도 타국에서 난민의 고난과 설움을 짊어지며 살아왔다. 물론 문화적 차이나 종교적 차이로 인해 정착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스페인이 이탈리아·몰타가 거부한 난민선을 받아들였다. 스페인 사람들이 외친 구호는 “관광객은 집으로 가야 하며, 난민은 환영한다”였다. 관광객이 집세를 올리고 도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반면, 난민은 지역 사회를 건설하고 도시에 공헌한다는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난민문제는 자국의 보호를 받지 못하거나 보호 받기를 원하지 않고 외국으로 도피하는 사람들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이다. 난민협약Convention Relating to the Status of Refugees)은 국제사회에 널리 적용되고 있는 난민에 대한 다자 조약으로 1951년 7월 제네바에서 채택되었다. 한국은 1992년 11월 11일 국회의 비준을 받아 난민협약에 가입했다. 한국에도 접수된 난민 신청 건수가 1만건에 이르렀다. 앞으로 한국이 수용해야 할 난민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히브리서 13장 2절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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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무 것도 모른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알고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끌려왔는지도 알고 있다

학교 운동장에서 노랑개들이 컹컹거리고
검은개들이 방아쇠에 바람을 집어넣고
이름 석 자 지워진 사람들이
그 앞에서 쓰러져간 사실을
누구는 알고 있고 누구는 모른다

노랑개 검은개들은 육지 것들이라는
사실 하나만은 알고 있다

아무 것도 모른다
소총 외에도 기관총과 수류탄, 헬기기관총 실탄 등
대전차로켓탄인 육십 육 미리 로우 오십 발을 쐈고
티엔티 폭약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아무 것도 모른다
항공대에 이십 미리 벌컨 실탄도 지급했다는 사실을  
공중에 투입된 계엄군도 있었다는 사실을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과
누구는 알고 있다는 사실을
옴팡밭 구덩이에 파묻은 사실만은 알고 있다

제사상을 차치고 향을 피우며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사연을 엮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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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빈 무덤

빈 무덤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런데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아버지 시신이 사라졌다
시신은 원래 무덤에 없었다
시신을 감싸고 있던 수의만이
허공에 흩어져있었다
시신이 없었으니 울음도 묻혔다

빈 무덤이 가족들을 불러 모은다
아버지의 시신이 무덤에 없었지만
누군가가 시신을 훔쳐간 것도 아니지만
하늬바람이 곡을 읊조리기 시작하고
눈밭에 흩어진 아버지의 영혼을 불러모아
허공을 나는 까마귀에게 전할 뿐이다

옛 가족들이 몰래 봉분을 하였다기에
눈물의 흔적을 볼 수 없었다기에
빈 무덤에 벌초를 하며 남은 가족들은
아버지의 심장과 핏줄에 손을 넣어본다
오늘따라 까마귀가 쉰 목소리로 울어댄다

-우리의 예수님은 그저 무기력하게 죽어간 그런 사형수가 아니라 죽음을 물리치신 영광의 메시아이십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무덤을 스스로 열고 일어나셔서 우리와 함께 머무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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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인민복

도널드 트럼프를 만나러 싱가포르 카펠라 호텔로 들어선 김정은의 검은색 인민복(人民服)이 화제다.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習近平)을 만날 때도 인민복을 입었으며, 문재인 대통령과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할 때도 인민복을 입고 등장했다. ‘김정은의 인민복’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 일가에 대한 충성의 의미로 배지를 착용하도록 되어 있으나,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의 얼굴이 들어간 배지를 착용하지 않았다. 김정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남복정상회담 당시 회색 인민복과 갈색 점퍼를 입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 때는 짙은 베이지색 야전 점퍼를 입었다. 인민복은 사회주의국가 지도자의 ‘상징’이며, 원래 중국의 혁명성을 상징한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천안문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했을 당시 입었던 바로 그 옷이다. 그 이후 중국에선 ‘마오 슈트(Maosuit)’라고 불렸다. 원래 인민복은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 이후 쑨원(1866~1925, 孫文)이 입던 것과 같은 모양의 중국의 국민복(國民服)이다. 쑨원은 인민복을 즐겨 입었다. 쑨원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양안(兩岸)과 홍콩, 마카오 그리고 더 나아가 중국계 싱가포르인 등 해외의 화교들까지 존경하는 인물이다. 정치 사상면에서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주장하며 오권분립(五權分立)을 주장했다. 삼민은 민권(民權)․민주(民主)․민생(民生)을 말한다. 인민복의 웃옷에는 주머니가 넷이 있고 옷깃을 세웠다. 1929년에 중국국민당에서 국가의 공식 예복으로 지정될 정도로 그 상징성이 크다. 인민복의 4개 주머니는 각각 예(禮)·의(義)·염(廉)·치(恥)를 뜻한다. 또 윗옷에 달린 5개의 단추는 입법(立法)·사법(司法)·행정(行政)·감찰(監察)·고시(考試)의 오권분립을 의미한다. 김정은이 인민복을 선택한 건 ‘사회주의 국가’라는 북한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중국식 인민복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중국의 전통적인 인민복은 무늬가 없는 민자 형태다. 반면 김정은이 입고 나온 북한식 인민복은 옅은 세로줄이 새겨진 스트라이프 형태다. 이른바 북한식 개량 인민복이다. 한 대북 전문가는 “중국식이 아닌 북한식”이라며 “북한의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일종의 상징성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이 인민복을 입은 이유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이야기가 들린다. “정체성을 보여준다.” “사회주의 국가고 미국과는 다른 체제다.” 김정은이 사회주의 국가를 고수하겠다는 정체성이 제일 큰 것 같다. 북한 주민들이 보기에도 김정은이 우리를 대표해서 인민복을 입었구나 하는 선전적 효과도 있을 것이다. 김정은의 인민복은 빨간 넥타이에 흰색 와이셔츠, 다크한 네이비 컬러의 정장을 착용한 도널드 트럼프의 패션과 사뭇 대조됐다. 트럼프가 빨간 넥타이를 맨 것에 대한 분석도 가지작색이다. 빨간 넥타이는 상대를 압도하겠다는 전략이 숨어있는 패션으로, ‘파워 타이(Power tie)’로 불린다. 타고난 승부사적 기질은 평소 즐겨 매는 강렬한 색상의 붉은색 넥타이 차림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트럼프의 빨간 넥타이는 대통령 취임식, 미중 정상회담 등 중요한 자리마다 같은 차림으로 등장했다. 전통적으로 북한의 최고 지도자는 정치적 노림수에 강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강단과 배포를 보여 왔다. 김정은 위원장이 인민복을 그대로 입고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눈 것은 북한의 물러설 수 없는 의지를 반영하는 상징이 될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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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이 무섭다”

제주일보|승인2018.06.19

[제주일보] 제주가 무섭다. 관광객이 무섭다. 중국인이 무섭다. 제주가 관광도시로 발전하면서 양적 성장을 이뤘지만 도민과 관광객의 불만도 높아지고 있다. 많은 인파 때문에 경치를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구경하기 바쁘다는 불평이 쏟아지고 있다. 기상 악화로 공항이 폐쇄되면 관광객들은 꼼짝없이 갇히고 공항 대기실은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관광객 증가의 폐해는 도민들에게 돌아간다. 교통 정체 및 사고 증가, 생태계 파괴, 환경오염, 쓰레기, 상하수도 과부하 등 주민들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관광객들이 도시를 점령하고 삶을 침범해 주민들이 쫓겨나는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 현상까지 발생한다. 투어리스티피케이션은 투어(Tour)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합성어이다. 관광객들이 주거지역을 침범하여 발생하는 문제이다. 거주민들이 이주하는 현상까지 발생할 수 있다. 생활이 불편해지자 주민들이 관광 명소가 되는 것을 저지하는 외국의 사례도 있다.
영국 BBC방송은 최근 ‘너무 많은 관광객 때문에 씨름하고 있는 세계 관광지 5곳’ 중 하나로 제주를 꼽았다. 외국인 강력범죄가 기승을 부린다. 불법체류가 다반사이며 살인, 인질강도, 절도, 뺑소니, 집단 폭행 등이 부지기수다. 성매매 같은 음성적인 사건까지 확대된다.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던 신자가 중국인이 휘두른 흉기에 찔린 사례도 있었다. ‘묻지마 피습’이다.
무사증 제도로 전 세계 180개 국가를 대상으로 입도를 허락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제주가 다른 지역으로 빠져 나가는 거점이 되고 있다.
제주도의 관광·개발 정책을 돌아보고 앞으로 지향해야 할 새로운 관광·발전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점이다. 여기에는 제2공항 계획도 포함된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어느 후보 하나 관광객 과밀형상을 심도 있게 제기하지 않았으며, 유권자 역시 관심 밖 일이었다.
외국의 예를 들어보자. 외신에 따르면 필리핀 휴양지 보라카이섬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필리핀 정부가 잠정 폐쇄를 결정한 것. 필리핀 대통령은 보리카이섬을 ‘시궁창’이라고 표현했다. “정말로 썩은 냄새가 난다”는 그의 말이 모든 걸 대변해주는 듯하다.
인도네시아 발리도 ‘쓰레기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수백명의 자원봉사자들을 동원해 해변의 페트병 쓰레기 등을 수거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태국도 영화 ‘비치’로 유명한 피피레의 마야만을 폐쇄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폭발적으로 가세하면서 ‘관광 오염’을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른 것이 주요 요인으로 지목됐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주민들이 관광객들을 막아서는 시위에 나섰다는 뉴스도 나왔다. 배 위에 올라 입항하는 크루즈를 막고 ‘우리는 당신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피켓과 깃발을 흔들었다. 스페인 마요르카섬에서는 시민 3000여 명이 ‘관광객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피켓을 들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한 시민활동가가 관광버스를 공격했다.
유럽의 관광지들은 ‘숙박세’ 명목으로 여행객에게 돈을 받는다. “관광객 때문에 삶이 파괴되고 있다”는 주민들의 시위도 이어진다. 남의 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여러분, 제발 도와주세요! 관광객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제발 오지 말아주세요.(Please support us not coming to our village. We’re suffering from tourists)”
특히 제주지역 관광객 수용 한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다시 한 번 체크해 볼 필요가 있다. 지역주민이 숨을 쉴 수 있는 분위가가 먼저이다. 그 결과를 토대로 주권자로서 도민들이 제주의 백년대계 차원에서 도정시책을 수정할 것을 강력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관광객 유치는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해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적정선이 필요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엄격한 관광객 총량 제한 등 ‘섬’이라는 환경에 맞는 선제 대응이 필요하다. 관광객 수를 관리하기 위한 ‘관광객 카운팅 시스템’의 도입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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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과 제주도

요즘 ‘소확행(小確幸)’이 뜨고 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는 말이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트렌드 코리아 2018’이 제시해 한국에도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라이프 트렌드이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 트렌드와도 궤를 같이 한다. 경제성장이 정체하면서 남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행복을 추구하는 트렌드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소확행’은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에세이 ‘랑겔한스섬의 오후(1986)’에서 처음 쓰인 말이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과 같이 바쁜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즐거움이다.
평범한 행복, 소소한 가치에 집중하는 행복 키워드가 대중의 공감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귀여운 소품, 반려동물, 맛있는 음식, 오후의 커피 한잔. 이용자들이 공유하는 ‘소확행’은 대다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다. 화려한 휴가 사진으로 도배된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 게시물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소확행’과 더불어 제주도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여행객들이 제주도에 와서 힘들게 돌아다니기보다는 여유롭게 추억을 남기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제주도 여행에서는 바쁘게 움직이지 않아도 힐링하는 기분으로 상쾌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제주도는 계획 하나 세우지 않고도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일까? 제주도는 곳곳에 가득한 명소와 즐길 거리, 먹거리가 여행에는 최적의 장소일까? 최근에는 제주도 한 달 살기, 힐링여행 등 독특한 여행 테마로 즐기는 이들도 늘었다.
거창하지 않아도 소소한 쉼으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는 ‘소확행’ 트렌드 덕분이다.
제주지역에서는 이에 발맞추어 소확행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제주시건강가정지원센터는 6월 초부터 1인 가구 프로젝트 ‘소확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으로 진행되는 1인 가구 프로그램이며 반찬 만들기·정리수납 강의 등으로 구성돼 있다.
JTBC ‘효리네 민박’이나 tvN ‘숲 속의 작은 집’은 일상의 소중함을 조명한 대표적인 힐링 프로그램이다. 바로 ‘소확행’ 프로그램이다. 자연 속에서 미니멀 라이프를 즐기며 스스로 행복을 찾는다는 콘셉트이다. 그러나 ‘숲 속의 작은 집’은 시청률이 떨어진다는 소문이다.
이처럼 ‘소확행’으로 제주가 뜨고 있지만, 염려하는 주민들도 많다. 유입 인구까지 늘어나면서 도시와 시골의 구분이 없어졌고, 땅과 아파트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관광객은 꺼져라(Tourists, Go Away!)” “당신은 지금 이 곳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You Are Destroying This Area)” ‘사랑의 도시’ 베니스처럼 거칠고 낯선 시위의 풍경과 메시지들이 제주도에서 타전될 지 아무도 모른다.
제주시내 중심가로 나가면 밀리는 차량으로 피곤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관광객 숫자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증가 속도이다. 준비가 안 된 상태로 관광객이 갑자기 늘면서 쓰레기 문제 같은 오버투어리즘(과잉관광)의 전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베니스의 주민들은 관광객들이 남기고 가는 소음과 쓰레기와 혼잡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베니스의 골목골목 관광을 반대하는 행진이 이어졌다. 제주의 마을을, 도시를, 삶을 잃지 않기 위해 제주도민은 무엇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청정 제주도가 쓰레기 섬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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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문용의 ‘엄니’

[제주일보] ‘최후의 아픔 딛고/ 언제나 그랬냐는 듯 다시 쇠무릎을 폈습니다./ 기 쇠한 지 한참 되었어도/ 여요(餘饒)로운 당신 눈빛은/ 평상 일상이셨습니다// 관절이 두 번 끊어지는 아픔에도/ 홀로 서기 여섯 해/ 귀가 닫혀도/ 엄니 가슴은 별처럼 뜨겁습니다’

-시인 한문용의 ‘엄니’ 중에서.

제주시인 한문용(韓文鏞)의 사모곡은 절절하다. 왜 시인의 어머니는 하늘에 송송 떠있는 별을 세고만 있을까?

그의 시집 ‘서우봉 노래’를 다시 펴들고 어머니를 ‘엄니’로 부르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시인의 어머니 현명석(玄明錫) 여사는 남편 한재진(韓在珍) 선생과 사별하자 아들을 홀로 키웠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으로 정뜨르비행장에서 학살당하고 시신조차 찾지 못한 상태이다.

당시 수재들이 입학한다는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현명석 여사는 올해 아흔이며, 치매로 병원을 전전하다 요양원으로 옮긴 상태다.

‘예비검속’은 범죄 방지의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 구금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요시찰인에 대한 일제 검거가 이루어졌고, 제주읍과 서귀포‧모슬포 경찰서에 검속된 자들에 대한 군 당국의 총살 집행이 이루어졌다.

제주읍‧조천면‧애월면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 집행은 두 번에 걸쳐 실시되었다.

처음 집행은 1950년 8월 4일. 제주경찰서‧주정공장 등지에 수감되어 있던 수백명을 제주항으로 끌고 가서 배에 태우고 바다 한가운데로 가서 수장시켰다. 두 번째 집행은 1950년 8월 19일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실시되었다. 주로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던 예비검속자들을 트럭에 싣고 제주비행장으로 끌고 가서 총살시켜 암매장하였다.

시인 한문용의 할아버지 한백흥(韓佰興) 역시 4․3 당시 총살당하였다.

시인의 운명과 빼닮은 ‘만다라(曼茶羅)’의 작가 김성동(金聖東)의 삶. 작가의 아버지 김봉한은 박헌영의 비선(秘線)이었으며 1948년 예비검속됐고, 1950년 역시 총살당했다.

작가의 어머니 한희전은 여성동맹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모진 고문에 옥고까지 치렀다. 작가의 단편 ‘민들레꽃반지’는 치매에 걸려 여맹위원장 시절 노래를 부르며 남편이 선물한 민들레꽃 무늬 반지를 정성껏 닦던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김성동이 네 살 때인 1948년 12월 중순 무렵.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지 석 달 후였고, 제주4․3이 일어난 지 여덟 달 만이었다. 아버지 김봉한이 아들 김성동을 보기 위해 집(충남 보령)으로 숨어들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잠복하고 있던 경찰이 아버지를 덮쳤다. 서울시경 특별경찰대 소속이었다. 우익 서북청년단원들이다. 4․3항쟁 당시 양민들을 학살한 공로로 특경대에 뽑힌 서북청년단원들의 행태와 빼닮았다. 김봉한을 비롯한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한 장소는 대전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이다.

대전형무소 역시 제주 출신 ‘1949년 군법회의’ 대상자 300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한국전쟁 이후 제주에 살아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전쟁 발발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등과 관련된 정치사상범과 일반 죄수 등 4000명 정도가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은 예외 없이 골령골에서 집단 학살당했다.

시인 한문용의 ‘엄니’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를 하고 있다.

‘도무지 하해(河海)와 같은 그 마음 헤아릴 길 없습니다/ 영욕의 세월 살았어도/ 엄니께 허무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지금/ 엄니는 하늘에 송송 떠 있는 별을/ 하나 둘 세고 있을 겁니다’

-시인 한문용의 ‘엄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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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교육

[제주일보] ‘과거는 서사(序詞)이다(What is past is prologue).’

미국국립문서관의 현판의 글귀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는 그의 대표작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을 남겼다.

역사란 과거 사실을 바르게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으로 출발, 현재적 관점에서 이를 재구성하고 확립함으로써 미래를 내다보는 바른 안목을 기르는 것이라는 의미다. ‘과거가 곧 현재이자 미래’라는 이야기다.

지난달 오현중학교 정문에는 ‘우리는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하얀 광목에 검은 글씨의 현수막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오현중학교 기억주간(4월 2일~4월 20일)이란다. 현수막에는 ‘4․3 4․13 4․16 4․19’라는 옛 사건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사건 날자 밑에는 설명을 덧붙였다. 제주4․3의 아픔과 평화의 소중함-1948.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조국의 독립-1919. 세월호의 비극, 우리 모두의 아픔-2014. 4․19혁명으로 되찾은 민주주의의 가치-1960.

제주도교육청 정문 앞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4․3 70년 이후, 4․3은 교육으로 기억되고 전승될 것입니다. 4․3평화․인권교육을 씨앗으로, 항구적인 평화 생명의 가치를 피우겠습니다.’

제주도교육청은 4․3유족들을 일일명예교사로 임명하여 교단에 세우기도 하였다. 학생과 지역 사회를 잇는 얼마나 사려 깊은 교육방법인가.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잘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의 나무는 뿌리가 깊기에 그동안 수많은 굴욕과 비참한 역사가 있었어도 절대로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 뿌리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도 깊고 넓을 수 있는가와 어떻게 해서 줄기와 가지를 굵게 만들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무성한 이파리와 탐스러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를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줄기와 가지를 굵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학생들의 역할이다.

지금 자라나며 배우는 학생들은 줄기와 가지를 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꿈이 살아있어야 하며, 그래야 무성한 이파리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밑바닥에 바로 ‘역사의 기억’이 존재한다.

기억과 역사는 과거를 다루는 방법이다. 역사는 학문적으로 정립되어 인정되고 있는 데 비해, 기억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며, 직관적이라는 측면에서 주목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과 역사는 개별적인 영역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화하는 수단으로 동시에 활용된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은 ‘기억과 역사’이다.

제주4․3을 망각하지 않기 위한 것….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되풀이해서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

제주4․3의 아픔은 반드시 기억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된다. 70년 전 제주 땅의 비극이 오늘날에도 재현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제주4․3을 꼭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땅의 평화를 실현하는 길은 무엇일까.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집단학살이 있었다. 아우슈비츠수용소 정문에는 ‘아우슈비츠 학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기억의 터는 역사교육 현장이다. 4․3유적지는 바로 교육현장이다. 오현중학교는 기억을 되살리는 교육현장의 모델이다. 제주도교육청의 “4․3은 교육으로 기억되고 전승될 것입니다”라는 선언은 바른 교육 모델을 제시하는 모범 사례이다.

분단된 조국에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남북 화해의 모습이 서서히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역사와 교육의 바른 길 찾기, 이것이 새로운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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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독수리처럼 날았네

독수리처럼 날았네
-제주잠녀 김옥련

김 관 후

성산망에 불싸라 지미망에 불싸라
쇠비름 뿌리를 바위에 탁탁쳤다네
 한길 두길 들어가니 저승길이 오락가락
뭍의 밭과 바다 밭을 독수리처럼 날았다네
야간학교에서 조국독립의 새순을 읽었다네
해녀조합장 다구치 데이키 제주도사(濟州島司)
암 브로커들과 결탁, 구전입찰(口錢入札) 시키자
바깥물질에서 벌어들인 수익까지 뜯기자
세화리 장터에서 대표연설에 나선
애기상군 제주잠녀 김옥련
밀려오는 성난 파도 밀어제치며
일체의 지정판매를 절대 반대한다고     
계약보증금은 생산자가 보관하도록 하라고
구름떼처럼 몰려든 군중 앞에서
목 놓아 울며 소리질렀다네
하도리에서 세화리에서 소섬에서 종달리와 오조리에서
머리에는 물수건을 쓰고, 그 위에 물안경을 쓴
제주잠녀들 손에손에 정게호미와 빗창을 들고
다구치 데이키 제주도사에게 항거했다네
일경(日警)이 김옥련을 검거하고
고문대 위에 꽁꽁 동여매고
코 속으로 물을 쏟아 부어 졸도시켰다네
옥살이 중에도 몰래 기밀문서를 전달하고
한겨울에 찬물고문을 받기도 했다네
 제주잠녀 김옥련이 독수리처럼 날아
깊디깊은 푸른 물속을 드나들며  
성산망에 불싸라 지미망에 불싸라
지금도 쇠비름 뿌리를 바위에 탁탁 치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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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

[제주일보]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때/ 부두의 새악시 아롱져진 옷자락/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목포의 눈물’은 문일석(文一石) 작사, 손목인(孫牧人) 작곡, 이난영(李蘭影) 노래의 대중가요이다. 1935년 초 ‘조선일보’에서 향토노래 현상모집을 실시했고, 거기서 당선된 가사에 곡을 붙였다.
‘목포’하면 제주사람들은 ‘목포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목포는 제주4․3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1947년 3․1절 28주년 기념식 집회과정에서 벌어진 6명의 총격 사망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에 뒤이은 3․10 총파업에 가담한 자 가운데 주동자는 기소되어 처음으로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징역살이를 하였다.
어디 그 뿐인가? 1948년 무장대의 습격을 시작으로 제주4․3은 경찰과 무장대의 상호 무력 충돌로 격화되어 갔다. ‘군법회의 명령’에 나와 있는 1659명의 대상자들은 제주도에서 사살된 249명을 제외하고 각각 목포·마포·대구·인천·전주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1948~1949년도 목포교도소 출소좌익수명단’에는 제주 출신 군법회의 재판 관련 재소자가 다수 확인되었다. 목포형무소 집단탈옥사건은 1949년 9월 14일에 발생하여 일주일 뒤 진정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변혁세력들에 대한 무리한 탄압의 결과였다. 1949년 9월 14일 오후 5시 재소자 400여 명이 목포형무소 내 무기를 습격하고 탈옥하였다. 사고 당시 수용인원은 넘쳤으며, 그래서 탈옥 폭동에 참가한 죄수는 무기를 들었으며 그 후 군경 합동 공격으로 탈옥수는 즉시 진압되고 일부는 완전히 탈옥하기도 하였다.
당시 미국대사관이 본국 국무성에 보낸 자료에도 “대부분의 탈옥자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으로 복역 중에 있던 정치범들”이라고 하였다.
목포형무소에는 600명 가량의 제주 출신 재소자가 있었다. 사건 당일 출소한 제주 출신 재소자는 총 51명에 달한다는 기록도 있다. 왜 그들은 무기를 들고 탈옥해야만 했을까. 해방 직후 목포형무소의 수용인원은 300~400명 정도였는데, 탈옥사건이 날 당시에 1000여 명 이상이 수감되어 실질적으로 통제가 불가능하고 수용소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그곳에는 좌·우익의 갈등으로 여수순천사건이나 제주4․3항쟁 같은 사건으로 사상범으로 취급받은 사람들도 대거 수감되어 있었다. 수용인원이 정원보다 초과되어 공장 등을 감방으로 전용하였다. 악질 장기수용자를 원칙적으로 목포에는 수용 않기로 되어있는데 이들을 너무 많이 수용하였다. 군인으로서 당시 숙청을 당한 자들이 다수 수용되었다. 기동대원이 부족했다.
그 후 탈옥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목포경찰의 발표에 의하면 탈옥수 413명 중 체포 85명, 사살 298명, 자수자 10명, 미체포 23명, 총기 회수 10정이라는 사실이다.
체포되지 않은 사람도 20여 명이나 되었다. 목포형무소 집단탈옥사건은 우선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주4․3항쟁이나 여순사건의 경우처럼 광복 이후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사상적 갈등에서 민족적 비극이라 볼 수 있다.
‘목포의 눈물’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가/ 못 오는 임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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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1946’

제주일보|승인2018.03.18

[제주일보] 4․3 이전의 4․3. 해방 직후인 1946년 전남 화순탄광사건을 다룬 뮤지컬 ‘화순 1946’이 제주 무대에 섰다. 주민들이 해방1주년 기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광주로 향하던 중 너릿재 터널에서 군대와 경찰을 앞세운 미군정의 발포로 학살당한 사건을 소재로 한 ‘역사 팩션(fact+piction) 드라마’이다. 바로 4․3 이전의 4․3이다. 너릿재는 광주와 화순 사이에 있는 국도 제22호선과 국도 제29호선 상에 존재하는 고개이다. 지금은 너릿재 터널이 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때 처형된 농민군들이 널(관)을 끌고 왔다하여 널재에서 변화하여 너릿재가 되었다. 1980년대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에는 화순과 광주를 오가던 시민군들이 공수부대의 총격으로 사망한 역사적으로 가슴 아픈 사건을 겪은 곳이기도 하다. 너릿재 옛길은 1971년 너릿재 터널이 개통되면서 현재는 도로로 이용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왜 화순탄광사건인가?
절망의 끝에서도 일어서고자 했던, 내일은 오리라 믿었던 사람들. 인간의 고결함과 존엄에 대한 이야기. 바로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바로 4·3의 축소판이다. 역사적 배경도 서로 맞닿아 있다. 4·3이 미군정 하에서 발생했던, 제주만의 아픔이 아닌 대한민국 역사의 사건이자 아픔이라면 화순탄광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뮤지컬 ‘화순 1946’ 공연에서는 제주4·3의 아픔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애기동백꽃의 노래’도 흘러나와 역사적 사건의 기억을 공유하였다.
 ‘산에산에 하얗게 눈이 내리면/ 들판에 붉게붉게 꽃이 핀다네/ 님 마중 나갔던 계집아이가/ 타다타다 붉은 꽃 되었다더라// 님그리던 마음도 봄꽃이 되어/ 하얗게 님의 품에 안기었구나/ 우리누이 같은 꽃 애기동백꽃/ 봄이 오면 푸르게 태어나거라// 붉은 애기 동백꽃 붉은 진달래/ 다 같은 우리나라 곱디고운 꽃/ 남이나 북이나 동이나 서나/ 한 핏줄 한 겨레 싸우지 마라// 애기동백꽃 지면 겨울이 가고/ 봄이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울긋불긋 단풍에 가을도 가면/ 애기동백 꽃 피는 겨울이 온다’
 화순탄광은 일본인 소유의 탄광들이었다. 일본인들이 철수하며 탄광이 무주공산(無主空山)과 다름없게 되자 광부들이 자체적으로 탄광 시설을 관리했다. 광부 1700여 명이 일했다. 가족까지 포함하면 5000여 명이 의존해 생활했다. 미군정이 운영권을 인수한 1945년 11월 화순 탄광에서는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全國評議會)가 조직됐다.
1946년 광복1주년 기념식. 기념식에 참석하려던 광부들이 미군정과 충돌하였다. 10월 30일부터 파업을 시작했다. 파업사유는 식량 배급과 임금의 인상이었다. 미군 방첩대와 경찰은 노동조합을 급습했다. 지도부 5명이 체포됐으나 호송 과정에서 이를 제지하는 광부들과 유혈 충돌을 빚었다. 이후 대규모 검거가 있었다. 이러한 파업 진압으로 노동조합은 결집력을 잃었고 11월에 파업은 일단락됐다.
미군정은 우익과 합세해 1947년 7월 우익 성향을 가진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약칭 노총)의 산하 노조가 화순 탄광에 공식 출범했다. 화순 탄광에서 식량난과 저임금 등의 고질적인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 남아 노총 주도의 탄광에서도 1960년대까지 파업이 계속되었다
뮤지컬 ‘화순 1946’은 2015년 9월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서 초연(初演)되었다. 이어 2016년 9월에도 광화문 광장에서 폭발했다. 초연 이후 ‘한국의 레미제라블’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배우들이 내뿜는 눈빛과 노래는 그야말로 터질 듯한 집단적 에너지를 뿜어내며 무대를 가득 채웠다. 소름 돋는 합창과 함께 장대한 서사를 타고 흐르고 마침내 배우와 관객을 하나로 끓어오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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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변절자

[제주일보] 변절자(變節者)는 절개나 지조를 지키지 않고 그 마음을 바꾼 사람이다. 배반자(背反者)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turncoat’이다.
중세유럽의 군대에서는 특정 유니폼을 입었는데, 적에게 투항하기 위해서는 유니폼의 색을 바꿔야 했다. 또 다른 표현으로 ‘renegade’가 있다. 자신이 믿던 종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말한다.
콩나물은 콩을 이용하여 싹을 키우는 것이고, 숙주나물은 녹두에 싹이 나서 키운 것이다.
왜 녹두로 키운 것은 녹두나물이 아니라 숙주나물이라 부를까? 녹두나물은 쉽게 변질되고 상한다.
신숙주(申叔舟)는 조선 초기에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의 이름이 녹두나물을 대신한 것은 그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세조가 찬탈해 간 단종의 왕위를 복위시키려는 과정에서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옛 주인에게 등을 돌리고 뒤늦게 편입된 사람일수록 곧잘 강경론을 펴고 옛 주인에게 가혹하고 새 주인에게 더욱 충직해진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지사를 가장 가혹하게 고문했던 것도 일경(日警)의 앞장이 노릇을 했던 한국인 형사들이다.
일제하에서 관료를 지냈던 사람들이 자유당 치하에서는 이승만에게 거의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다.
‘친일인명사전(親日人名辭典)’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 4389명의 친일 행각과 광복 전후의 행적을 담은 사전이다.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신체적·물리적·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친일반민족행위와 부일협력행위를 한 인물을 수록한 사전이다.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된 제주 출신으로는 최원순(崔元淳)을 비롯, 강명옥(康明玉)·고권삼(高權三)·박종훈(朴鍾壎)·차윤홍(車潤弘)·홍양명(洪陽明)·고문규(高文奎)·양봉화(梁鳳華)·오건일(吳健一)·임관호(任琯鎬)·임두욱(任斗旭) 등이다.
면면을 살펴보면 제주현대사에 이름을 올린 인물들도 눈에 띄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시인 양성우는 박정희 군사독재를 비판한 ‘겨울공화국’을 낭독하여 교직에서 파면되었다. 1988년 평화민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기 위하여 한나라당에 입당하였고,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캠프에 참여하여 당선을 도왔다. 반유신 투사에서 한나라당 입당과 이명박 지지로 돌아선 것이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열사의 사망 이후의 대치정국에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로 그들의 죽음을 비난해 ‘변절 논란’에 휩싸인 시인 김지하. 그는 2009년 촛불 시위 반대와 노무현 대통령 추모객들을 비난하는 행보를 보였으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지지한 데 이어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리영희 교수를 매도했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반년 뒤인 2003년 9월호 ‘현대문학’에서 박근혜의 수필을 가리켜 “몽테뉴와 베이컨 수필의 전통을 잇는(…)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진주와도 같다”고 극찬한 문학평론가 이태동. 그는 박근혜의 에세이는 우리들의 삶에 등불이 되는 아포리즘들이 가득한,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진주와도 같다고 평가했다.
“박근혜 수필은 그가 경험했던 처절한 삶에 대한 느낌을 지극히 절제된 언어로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부조리한 삶의 현실과 죽음에 관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의 코드를 탐색해서 읽어내는 인문학적인 지적 작업에 깊이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성이 있는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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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는 누구의 것인가

[제주일보] 토지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국회와 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개헌 관련 여론조사에서 토지공개념을 도입해야 한다는 응답률이 61.8%를 기록했다.
공개념 도입은 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국회 연설에서 주장하였고, 노태우 정부 시절에도 진지하게 논의한 적이 있다. 토지가 노동의 성과물을 빼앗아가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토지공개념이다.
구약성서 시대 유대인들은 토지는 하느님의 것이고, 인간은 단지 토지를 이용하고 보전할 책임을 위임받았을 뿐이라고 보았다. 토지는 공동체의 것이며, 각자는 그것을 빌려 쓰는 것이라는 사고다. 성경은 토지를 하나님의 것으로 규정하고 매매를 금지하고 있다(레 25:23). 또 사람들이 임의로 분배 받은 토지의 경계표를 이동할 수 없도록(신 19:14), 소유에 대한 욕심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지주들은 일하지 않고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혹은 절약하지 않고도 잠자는 가운데도 더 부유해진다. 전 사회의 노력으로부터 발생하는 토지가치의 증가분은 사회에 귀속되어야 하며 소유권을 갖고 있는 개인에게 귀속되어서는 안 된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토지로 발생하는 소득불평등이 창의와 자유를 억압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토지는 인류 역사 그 자체다. 인간은 토지에서 지낼 곳과 먹을 것, 입을 것 등을 얻는다.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피를 흘리는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토지가 다른 물건과 같은 재화로 여겨졌고, 부를 축적하고 늘리는 용도로 쓰게 됐다.
조선시대 토지관은 왕토(王土)사상이다. 토지도 하늘 아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왕의 것이라는 뜻이다. 왕은 토지에서 세금을 걷을 권리를 신하에게 주어 정권을 유지했다. 모든 땅은 소유권을 위임받은 지주도 자신의 땅이라 생각했으며, 이 땅에서 소작하는 농민들도 자기 땅이라고 생각했다. 토지는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토지관이다.
대만은 ‘평균지권(平均地權)’을 헌법에 규정하여 토지공개념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평균지권은 토지는 전 국민 소유이므로 국민이 골고루 보유하고, 특정인이 과도하게 소유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스페인 헌법은 투기적인 토지사용에 규제가 필요하다고 규정했다. 공공기관에 의한 도시계획은 사회적으로 이익을 주는 행위로 이해하고 이에 따른 편익을 각 지역사회가 향유할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은 토지 등 부동산의 공평한 분배를 강조하고 있다.
한국의 토지가격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전체 토지가격은 국내총생산(GDP)의 4.2배에 이른다. 투기를 막기 위한 제도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분별하게 개발한 것이 더 큰 원인이다.
한국의 토지는 국민의 1%가 절반을 갖고 있다. 재산세 등 보유세는 외국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러고도 토지투기가 근절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세계 최고 수준의 땅값은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도 무관치 않다. 젊은이들이 왜 결혼을 하지 않는가? ‘소득이 낮아서’ ‘집이 마련되지 않아서’ 등은 결국 높은 부동산 가격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 높은 땅값은 생활비와 생산비용을 압박해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린다.
“토지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를 실현하기 위한 이론적, 실천적 작업을 계속할 필요가 있다.
토지공개념은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권을 적절히 제한해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것이다.
반대론자들은 토지공개념이 반시장적이라고도 주장한다. 부동산 투기는 사회의 전반적인 주거비·임대료 상승으로 이어진다. 한정된 토지를 소수의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면 절대 다수는 최소한의 공간도 점유하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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