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하는 시인’

‘요리하는 시인’
김관후/작가·칼럼니스트

< 제주칼럼>제주도에 ‘요리하는 시인’이 있어 화제다. ‘요리하는 시인’이 첫 시집 《낙타와 낙엽》을 도서출판 < 시와실천>에서 상재(上梓)하여 또 한 번 관심을 끌고 있다. ‘요리하는 시인’이며 작가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이지민 시인.
“낮달은/ 싱거운 것들을 담으라 하고 /잠에서 깬 추억들은 비장하게 담으라 하네 //후드득 비 내리고/ 마음갈피 잡지 못하는 내게 /잠잠 하라 차분하라 다독이는데 /자꾸만 마음이 끌려……”
2019년 깊어가는 가을에 시인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출판기념회도 가졌다. 2016년 문학세계 신인상으로 한국문단에 고개를 내밀더니, 직접 운영하는 시인의 집(본초불닭함덕집)에서 문단 동료들과 조촐한 모임도 화제가 되고 있다.
그의 첫 시집의 표제(表題)시 < 낙타와 낙엽>은 이렇게 시작된다. “햇살은 눅눅한 기억을 말리려는데/긴 그림자는 알싸한 공기를 몰고 /낙엽에 드러누워 시집을 읽고 //시집을 읽으려면 옷깃을 여며야 하나 /기억이 바람을 타고 /눅눅한 기억은 말려서 /산들거리는 사막의 저녁” 그리고 < 낙타와 낙엽>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빠른 세월을 탄식하다 /달아난 기억 속 /달 여문 가슴 울컥 맞대면 /담장 하나 넘지 못하고 /드러누운 낙타의 눈물 /서로를 향했어도 철저히 혼자인 /삶을 보채는데.”
시집 해설에서 이어산 시인의 지적처럼 그가 시에서 자각을 한다는 것은 치유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며 바로 미래를 개척해갈 의지는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 속의 시인을 가장 행복다고 했을까? 그래서 시인은 오늘도 붉을 밝히고 자신을 끼적대고 있을까?
시인은 달 여문 가슴을 울컥 맞대면 담장 하나 넘지 못한다. 그것은 드러누운 낙타의 눈물 때문이다. 철저히 혼자인 낙타는 왜 눈물을 흘릴까? 철저히 혼자인 시인은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시인은 오늘밤 마을사람들과 서우봉에 올랐을까?
그리고 ‘요리하는 시인’은 감히 어느 시인도 근접하지 못하는 역사 속에서 시어를 찾기 시작했다. 시 속에서 역사의식을 꿈꾸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참으로 험난한 과정이다. 어느 시인도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시인 이지민의「4월의 너븐숭이」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좌익, 우익 갈 곳 없는 어둠 /길 잃어 헤매다 한 눈 파는 사이 /시커멓게 게워낸 절망의 숱한 언어들 /성난 숨결의 메마른 외침/ 4월을 도둑질하고 /허기진 배 감아쥔 채 미리 운 가슴 /뭇매를 맞듯 밤새 내리친 그 총에 /만신창이가 되었구나……송두리째 뽑힌 자존심마저 잔인한 4월에 쫓겨 /엉덩이 살랑이며 5월로 간다 /4․3의 혼들을 끌어안고”
시인 이지민은 역사의 처참한 비극을 가슴 깊은 속에 끌어안기 시작했다. 제주의 역사가 시인에게 시가 되기 시작했다. 역사가 시가 됨은 이 땅의 시인들의 바라는 오랜 꿈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지민 시인은 여류라는 말을 던져버렸는지 모른다.
나는 2017년 함덕문학 창간호를 발간하면서 이지민 시인을 처음 대면했다. 그 때가 시인이《문학세계》를 통하여 한국문단에 고개를 내민 그 다음해라 여겨진다. 나는 요즈음 가끔 ‘요리하는 시인’의 블로그에서 그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더듬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요리하는 시인’은 오늘 밤도 요리를 하고 밤을 새우면서 아름다운 시어들을 줍고 있다. 꼭꼭 숨어서 형틀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마음을 조아리면서 내면의 아픔을 시어로 찍어 내며 긴 새벽을 기다리고 있다.
‘요리하는 시인’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 ‘요리하는 시인’이 개인의 아픔을 뛰어넘어 역사를 걸머쥔 시인이 되겠다는 다짐이 동료로서 너무나 가슴이 벅차고, 우리 문학이 풍요롭게만 느껴진다. (제주일보 11월 1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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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흘곶에서 우는 새

시-선흘곶에서 우는 새
김관후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기 시작하네
그 울음 숲을 버리고 어디로 향할까
마을주민들 하나둘 대섭이굴로 모여들고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 치마폭으로 감싸안네
검은개 노랑개의 그림자 어른거리고
꼭꼭 숨어라 내일 아침 볼 수 있을까
총소리 코밑까지 밀려와 심장을 흔들 때
도툴굴 목시물굴 벤뱅듸굴로 몸을 숨겼네
꿔 꿩 꿩, 꿩 우는 소리 묻혀버렸네
쌕쌕거려 구르는 방울새 소리
끼끼끼끼끼 청딱따구리 소리도 숨어버렸네
휫휫 휫 휘잇 삐삐삐삐 휘욧 휘욧 휘이 찌잇
되지빠귀 소쩍새 산솔새 종종종 모두 사라졌네
마파람으로 다복솔 잔가지까지 바르르 떨고
까악까악 까마귀가 저승에서 다시 손짓하는데
탕탕탕 탕탕탕 피눈물소리 가까이 들리는데
아아, 선흘곶이 후후 흔들리며 어디로 숨을까
저승으로 날아가 영영 생이별할까
가슴 한가운데 멍 자국이 아픈 세월 말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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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점

詩(시)로 읽는 4․3(33)
통점
이종형

햇살이 쟁쟁한 8월 한낮
조천읍 선흘리 산 26번지 목시물굴에 들었다가
한 사나흘 족히 앓았습니다

들짐승조차도 제 몸을 뒤집어야 할 만큼
좁디좁은 입구
키를 낮추고 목을 비틀며
낮은 포복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탓에 생긴
온몸이 욱신거리는 통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가 빠진 그릇 몇 점
녹슨 뚜껑들과
철모르는 아이의 발에서 벗겨진 하얀 고무신이
그해 겨울
좁은 굴속의 한기(寒氣)보다 더 차가운 공포에
시퍼렇게 질리다
끝내 윤기 잃고 시들어간, 거기

그 서늘한 증거 앞에서라면
당신도 아마
오랫동안
숨이 막혔을 것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처럼
사나흘 족히 앓아누웠을 것입니다
—————————————————————–4․3소개(疏開) 이전부터 학살이 자행되자 선흘(善屹) 주민들은 선흘곶 등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단의 산악지역 수색작전에 발각되어 결국에는 총살이다. 토벌대원들이 들이닥치자 주민들은 곶자왈 내 자연동굴로 숨어들었다. 도톨굴(반못굴), 목시물굴, 밴뱅듸굴, 대섭이굴 등이 은신처가 되었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벌어진 강경진압 작전 때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불에 타 사라지고, 남녀노소 가리지 낳고 주민들을 총살하였다. 1948년 11월 21일 선흘 마을은 불길에 휩싸였다. 제9연대 군인들이 텅 빈 마을에 불을 지르고 돌아간 뒤 숨어있던 주민들에게 소개령이 전해졌다. 그러나 숨어있던 주민들은 굴이 하나둘 발각되기 시작하면서 대대적인 희생을 치르게 된다. 도톨굴, 목시물굴, 밴뱅듸굴, 대섭이굴 등지에 숨어있던 주민들은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어 현장에서 수십 명이 희생되었고 나머지는 함덕대대본부로 끌려갔고, 그들 중 다수 주민들은 서우봉이나 억물 등지에서 총살당한다. 또한 함덕․ 조천 등지로 피난 간 주민들도 도피자 가족이란 이유로 함덕리 모래밭 등지에서 희생을 치른다. 도틀굴(11월 25일), 목시물굴(11월 26일), 밴뱅디굴(11월 27일)이 잇따라 발각되어 주민들은 대부분 강경진압작전 초기에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어갔다. 그 후 군인들은 총살을 면한 주민들을 GMC차량에 태우고 함덕 대대본부로 돌아갔다. 이들 중 일부는 고문에 못 이겨 마을주민들이 피신해 있는 벤뱅디굴 등을 안내한 후 총살당했고, 억물에서도 15여명이 집단으로 죽임을 당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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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 한 장

詩(시)로 읽는 4․3(32)
엽서 한 장
김영란

붉은 소인 마포형무소 아버지 엽서 한 장
낭설처럼
생트집처럼
인생에 끼어들어
와르르 허물고 가는
천추의 저 낙인

반백 년 흘렀어도 풀지 못한 한이 있어
뿔뿔이 흩어진 가족 그 안부를 다시 물으며
명 긴 게 벌이라 시던 어머니 생각합니다

인생은 낙장불입
못 바꾸는 패하나
빈속에 깡소주

독거노인 냉방에서
아버지 서러운 생애를
그리움으로 마십니다
—————————————————————–
마포형무소(麻浦刑務所)는 정부수립 초까지 사용되었던 형무소이다. 1908년에 경성감옥이 서울서대문구에 지어졌다. 8.15 광복이후 마포형무소로, 1961에는 마포교도소로 각각 개칭했다. 1995년에 마포구 공덕동 105번지 마포형무소 자리에 “1912년 일제(日帝)가 경성형무소를 설치하여 항일(抗日)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옥고(獄苦)를 치렀던 유적지”라고 적힌 표석이 설치되었다. 4․3사건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군법회의는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두 차례 실시되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벌금형․ 구류․ 집행유예 등을 언도 받았지만, 금고․ 징역 등의 실형을 언도 받은 사람들은 제주도에 형무소가 없었기 때문에 전국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일반재판 수형인들은 목포․ 광주형무소에, 군법회의 대상자들은 서대문․ 마포․ 대전 ․대․구 목포․ 인천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군법회의』명령에 복형장소가 마포형무소로 기재된 사람은 223명으로 모두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여기에다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어 마포형무소로 이송된 사람이 96명이므로, 마포형무소 재소자는 총319명이다. 상당수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총살당하였다. 6월 25일 당일 오후 2시 25분 치안국장의 명의로 각 경찰국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형무소 경비의 건’을 전화통신문으로 긴급 하달하였다. 제주에서 이송된 재소자는 일반재판 수형인 200여 명과, 두 차례 군법회의 대상자 중에 만기 출소한 사람을 제외한 2,350여 명이 한국전쟁 직후에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제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되었다. 서대문․ 마포형무소와 인천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은 북한 인민군이 형무소를 장악함에 따라 출소하여 각지로 흩어졌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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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首餘音을 읽다

詩(시)로 읽는 4․3(31)

白首餘音을 읽다
김학선

어찌하다 버릇없이 앙탈을 부렸는지
치도곤을 안기는
할아버지 명아주 지팡이의 나무람이
가을 볕살에 흩어집니다.

서천에 기운 한 생애 속
구레나룻 쓸어내리는 한 서린 음송이
하늘에 매어둔 장자(長子) 불러들이고
보이지 않는 별 떠 있기를 기구하던
모진 세월들.

다시 돌아본들 짧은 영일은 아득하여
지친 눈빛에
천리 먼 저승 길 헤아리다
꼭꼭 눌러 쓴 여한의 흔적을
새로운 듯
가슴에 품어 갑니다.
——————————————————————————————————-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이다. 석우(石友) 김경종(金景鍾, 1888~1962)의 『白首餘音』을 북제주문화원에서 백규상(白圭尙)의 번역으로 펴낸 것은 2006년이다. 석우는 노형동에서 태어나 구한말 이후 격동하는 세상의 간난을 한 몸으로 겪으며 사문의 쇠퇴를 한탄한 유림이다. 할아버지의 문재(文才)를 이어받은 시인이 『紗羅峯 詩篇』을 펴낸 것도 2006년이다. 그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손자의 깊은 내면의 답변일까?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시인은 시 「민오름 편지」에서 석우의 부인인 여산 송씨(礪山宋氏)) 할머니를 이렇게 회상한다. ‘할머니는 불쏘시개를 얻기 위하여/ 솔바람 등에 업고/ 사랑의 솔잎 애써 모으실 때/ 어린 손주는/ 깍지 낀 채/ 먼 산만 바라다보았습니다.// 한 세상 숨이 찬 나날이/ 강물 되어 흘러간 사이/ 할머니는 아무런 기척이 없으시고/ 머리 희끗한 손주는/ 봉분의 잡풀 베어내고 있습니다.’ 시인은 할아버지의 명아주 지팡이의 나무람을 가슴에 품고 있다고 고백한다. 석우는 슬하에 창진 효진 한진과 영옥 정랑 5남매를 두었다. 그 중 창진(昌珍)이 4․3여파로 김천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白首餘音』에는 이승만에게 4․3의 진상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보낸 장문의 편지글 「與李承晩書 己丑」과 성토문 「李承晩聲討文 庚寅」과 아들을 잃은 아픔을 토로하는 시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시인이 꾹꾹 눌러 쓴 여한의 흔적이 역사의 아픔인 4․3을 어루만지고 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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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시대의 4.3문학

분단시대의 4․3문학
김관후(작가, 칼럼니스트)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가신 모든 혁명 전사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시인 이산하의 장편 서사시 『한라산』 서문 중에서.

시인 이산하는 1988년 6월 11일 안양교도소에서 항소이유서를 써내려갔다. 1978년 김봉현(金奉鉉)․ 김민주(金民柱)의 < 濟州島 血の歷史-4·3武裝鬪爭の記錄> 을 비밀리에 접하면서『한라산』을 탄생시켰다. 이산하는 1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김봉현․ 김민주의 ‘투쟁의 기록’은 ‘팩트’만을 놓고 볼 때는 매우 사실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장대를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간 혁명 전사들이라고 했다. 또 항소이유서에서 “새벽은 어둠 속에 앉아 기다리는 자에게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신새벽은 그 어둠에 맞서 밤새도록 싸운 자에게만 백만 원군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찾아올 것입니다.”라고 항변하였다.
< 鬪爭の記錄>의 공동저자인 김봉현은 오현중학교 교사로서 제주민주주의민족전선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다가 4․3발발 직전에 일본으로 떠났으며, 김민주는 조천중학원 학생으로 이덕구(李德九)의 제자이며 1948년 7월에 입산, 1949년 4월 붙잡혀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한국전쟁 때 옥문이 열리자 일본으로 피신했다.
나는 1980년대 일본어판 < 鬪爭の記錄>을 어렵게 구하고, 어두운 골방에서 일본어사전을 들추며 숨죽이며 읽었던 시절이 생생하다. 그 후 시인 김명식(金明植)이 아라리연구원 편으로『제주민중항쟁』을 펴내고, 거기에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생사」로 번역되어 나왔다. 김명식의 『제주민중항쟁』은 곧 판금 당하고, 그 역시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제주민중항쟁』에서, 김명식의 지적처럼 < 鬪爭の記錄>은 4․3항쟁을 미제와 우익진영에 대한 남조선 해방운동으로 파악하고 있다. 소련․ 북한․ 남로당과 제주도의 현실을 연결시켜 파악하는 데는 많은 한계를 지녔지만, 미 제국주의, 이승만 정권․ 군경․ 민간단체와, 좌익 및 인민과의 투쟁, 탄압, 학살 등 당시의 역동적인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너 있는 곳/ 거기에/ 한 가닥 평화의 불빛이 있는가/ 억새풀 꽃 같은/ 출렁임 넘치고 있는가/ 상처 입은 가슴 드러내어/ 한의 노래/ 원한의 이야기/ 털어놓을 수 있는/ 한 치 땅 해방공간이 있는가/ 거기에/ 억새풀 꽃 같은 향기 넘치고 있는가/ 남과 북 하나로 엉킨/ 억새풀 꽃 같은/ 만남이 있는가/ 높은 곳 바라지 않은/ 이름 한 점 탐내지 않은/ 거기에 자유의 휘날림이 있는가/ 너 있는 곳/ 거기에/ 아름다운 만남이 남아 있는가/ 남과 북 하나 될/ 통일된 땅이 있는가’-시인 김명식의 서사시『처형도』 중에서.

4·3은 제노사이드(Genocide) 현장이다. 대한민국에서 통일이란 ‘금기(禁忌)’사항이다. 그것은 통일을 가로막는 거대한 괴물 때문이다. 그 괴물은 ‘국가보안법’이다. 통일을 입에 담을 수 없도록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놓고도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옥죄였다.
제주의 비극은 한반도의 허리가 잘려나가는 과정에서 흘린 피였다. 그 어둠 속에서 4․3문학은 탄생하였다. 4․3문학은 저 대지 밑으로 숨어들어간 시대의 전설을 발굴하는 문학이었다.

‘5병대 7병단 1군단/ 김생 김달삼 이호재 박치우 서득은/ 여러 슬기로운 지휘관들의 피/ 아직도 눈 위에 임리하고/ 청옥산 태기산 일월산/ 국방봉 백암산 준령들의 산정 위/ 피바람 불어 끊이지 않은 저/ 험준한 태백산 전구의 이름과’-시인 임화(林和)의 「기지로 돌아가거든」중에서.

시인 임화가 1952년 7월에 쓴 시 「기지로 돌아가거든」이다. 임화는 조선플로레타리아예술가동맹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인민항쟁가」,「해방의 노래」,「제주도빨치산의 노래」등의 시를 남겼다. 시에 등장하는 김달삼(金達三)은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에서 4․3사건에 대한 열설을 하기도 했다.
시「기지로 돌아가거든」에는 5병대 7병단 1군단 소속 지휘관들이 등장한다. 1948년 8월 21일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 이후 남로당 세력은 강동정치학원생들로 구성된 유격대를 남파했다. 제3군단 김달삼 부대는 남하하여 저항했지만 태백산 인근에서 산화했다. 김달삼은 자신의 최후를 긴 지명에 남겼다. ‘김달사모가지잘린골(정선군 여량면 봉정리).
4․3역사의 분기점은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집회’다. 제주민중이 내뿜던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의 기운은 그날의 발포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민족의 완전·절대·통일 독립이라는 염원, 그 열망을 외세가 짓누름에 대한 저항, 급기야 민중의 자주·자결을 다시 꿈꾸며 해방과 독립의 항쟁은 시작되었다. 4․3문학도 ‘남과 북 하나로 엉킨/ 억새풀 꽃 같은/ 만남’을 위하여 탄생하였다. 우리의 분단현실을 자각하고 그걸 개선하고, 또한 분단으로부터 생기는 모든 비극이나 억압과 차별들을 극복해내는 문학. 문학적으로 극복해내는 것, 문학적으로 드러내는 것, 이런 것들은 결국 세계성이다. 분단은 거대한 폭력의 산물이며, 4․3은 분단 폭력의 예이다.
4․3의 제주도를 흔히 ‘가스실 없는 한국판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라고 표현한다. 작가는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서 안 쓴다면 역사의 방관자다. 민중의 역사 안에는 도저히 눈으로 볼 수 없고 입으로 담을 수 없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참혹한 죽음과 쓰라린 상처들이 하나하나 역린처럼 꽂혀 있다.
‘제주도’는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도륙당하고 난자당한 참혹한 4․3현장으로 각인됐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의 8할을 붉은색으로 칠하여, ‘RED ISLAND’라고 명명했다. 당시에 그 붉은색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들이 저지른 제노사이드의 범죄는 금기의 영역이다.
4․3항쟁은 오랫동안 냉동되었다. 도전하는 도민들은 용공분자로 낙인찍힌 채,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투옥되었다. 그 당시 불었던 저항의 바람, 그리고 자행된 살육, 그에 거침없이 저항했던 민중의 역사. 항쟁의 역사적 의미는 유보되어 왔으며, 그것은 심지어 왜곡되기도 하였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숨 막히게 작용했다. 그 산물 냉전이데올로기가 굴욕과 억압의 삶을 강요했다. 일곱 살 난 아이가 이른바 토벌작전이란 이름아래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살해당해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30만 도민이 없어지더라도 대한민국 존립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몰살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어 3만여 주민이 학살되어도 역사적 판단중지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4․3문학이 냉동된 역사를 하나씩 풀기 시작하였다. 그 피의 역사, 오욕의 역사를 기술하는 일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눈물 없이 잠들 수 없는 역사, 아직도 냉동된 역사는 빙하처럼 작가 앞에 서 있다. 분단시대이기에 그 피의 역사, 오욕의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4․3의 트라우마는 그들의 자식, 손자에게도 미쳐 있어서 그들 역시 그 기억을 되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수많은 젊은 인재를 그 사태에 잃어버린 도민 대다수에겐 자신을 보호해 줄 언어도, 학벌도, 재력도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4.3문학이 탄생했다.
발표자는 발표문에서 < 오성찬과 현길언의 소설들, 일부 번역된 김석범의 소설도 주목받았다>고 짧게 쓰고 있다. 현길언이 ‘4․3=남로당의 반란’이라 규정한 것과 관련해 4․3단체들이 ‘양식을 버린 노(老) 작가의 추락‘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발표자는 발제문에서 현길언(玄吉彦)의 소설들은 주목받았다고 짧게 표현하고 있지만, 과거 「맺힘에서 풀림까지, 그 멀고 어두운 거리-현길언의 ‘우리들의 조부님’ 론」에서는 ‘4․3탐구의 신호탄 격의 소설’, ‘4․3이 제주인들에게 커다란 한으로 맺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현길언을 옹호하고 있다. 그리고 소년소설 「다들 어디로 갔을까」를 아름다운 시절과 참혹한 역사가 적절히 만남으로써 그 의미가 극대화 대었고, 그 울림이 만만찮다고 하고 있다.
과거 현길언은 2012년 7월 9일 국민일보의〔여의도포럼-현길언〕을 집필하면서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을 칭송하였다. 두 대통령이 역사적인 비전을 갖고 직무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자’는 꿈을 제시했고, 박정희는 ‘잘살아 보자’는 꿈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또 2013년 「본질과 현상」(여름호)에 ‘과거사 청산과 역사 만들기-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중심으로’ 제하의 글에서 “제주4.3은 남로당이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일으킨 반란”이라며 제주4․3진상보고서가 이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현길언이 ‘4․3=남로당의 반란’으로 규정한 것과 관련해 2013년 6월 27일, 제주4․3유족회가 성명을 내고 ‘4․3을 폄훼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다음날 6월 28일 (사)제주4.3연구소와 (사)제주민예총, 제주4.3도민연대 등은 공동으로 논평을 내고 “양식을 버린 노(老)작가의 추락”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에 대해서 주제발표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4.3단체들은 “현길언씨의 글은 4.3의 역사적 사실이나 과정의 팩트에 근거하지 않은 졸문이며, 의도적 곡필이자 악필”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현길언은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역사적 실상을 왜곡한 부실한 보고서이며 정치권력에 의한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한 『정치권력과 역사왜곡』이란 책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김대중정부 시절 제정된 특별법의 문제점과 그 법에 의해 작성된 진상 보고서의 편향성을 주장하고 제주4·3의 비극을 극복하는 방법과 보고서를 보완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현길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하여 시비를 걸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편파적인 역사학자나 언론인이 전념시킨 악령에 이끌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추인했고, 제주4․3은 태어나지 말아야 할 정부에 저항해 일어난 ‘사태’라 하며, ‘반란’을 옹호하였다. 제주4․3평화공원에 세워진 백비(白碑)의 의미까지 먹칠하고 나섰다. 그동안 극우세력들은 작가나 학자의 입을 통해 제주4․3흔들기에 앞장서 왔다. 현길언도 마찬가지로 제주4․3을 왜곡하고 있다.
– 2016년 9월 28일 낮 12시50분부터 4.3평화공원에서 예정됐던 현길언의 특강 < 제주의 가슴아픈 현대사 4.3>이 강연 시작을 코앞에 둔 오전에 취소됐다. 이번 특강은 방송작가, 방송PD, 로케이션 매니저 등을 초청해 제주에서 진행하는 문광부 주최 초청 강연이었다. ‘4.3을 왜곡하는 인물이 4.3을 소개하는 강사로 나서는게 말이 되느냐’고 4.3유족회가 강하게 항의하면서 일정이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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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우수

詩(시)로 읽는 4․3(30)

섬의 우수
강중훈

여기 가을 햇살이
예순 두해 전 일들을 기억하는 그 햇살이
그때 핏덩이던 할아비의 주름진 앞이마와
죽은 자의 등에 업혀 목숨 건진
수수깡 같은 노파 잔등 위로 무진장 쏟아지네
거북이 등짝 같은 눈을 가진 우리들이 바라보네
성산포 ‘앞바를 터진목’
바다 물살 파랗게 질려
아직도 파들파들 떨고 있는데
숨비기나무 줄기 끝에
철 지난 꽃잎 몇 조각
핏빛 태양 속으로 목숨 걸 듯 숨어드는데
섬의 우수 들불처럼 번지는데
성산포 4·3위령제령재단 위로
뉘 집 혼백인양 바다갈매기 하얗게 사라지네
—————————————————————————————————–
‘섬의 우수(憂愁)’는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르 클레지오(J.M.G. Le Clézio)가 제주섬에 머물면서 집필한 < 제주기행문>에 나오는 말이다. 그는 유럽 최대잡지 『지오(GEO)』 창간30주년 기념호(2009.3)에 ‘제주매력에 빠진 르 클레지오’란 제목의 글에서 “오늘날 제주에는 달콤함과 떫음,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있다. 포록과 검정. 섬의 우수를 우리는 동쪽 끝 성산 일출봉 즉 ‘새벽바위’라 불리는 이곳에서 느낄 수 있다.”고 쓰고 있다. 4․3광풍이 온 섬을 휩쓸던 시절, 어디 하나 상처를 입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 성선포도 그랬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해안에서 벌어진 처참한 슬픔과 분노의 역사는 시간과 더불어 뇌 속에서 과연 사라질 것인가? 당시 민병대에 끌려온 주민들이 죽어가면서 봤던 바로 그 터진목에는 ‘제주4․3성산읍희생자위령비’가 일출봉을 등지고 서있고, 그 곁 바다 쪽으로 ‘제주매력에 빠진 르 클레지오’에서 발췌한 글귀가 음각되어 있다. 2007년 11월 8일, 시인 강중훈이 운영하는 민박 ‘해 뜨는 집’에 프랑스 제5채널 TV제작진이 르 클레지오와 함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위해 찾아왔다. 다음해 1월 18일부터 1월 22일까지 그는 ‘해 뜨는 집’을 다시 찾았다. 강중훈과 르 클레지오의 우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르 클레지오의 < 제주기행문>에 끝부분에 강중훈에 관한 사연도 있다. “1948년 4월 3일에 제주에서 군대와 경찰이 양민학살을 자행한 진부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 잔인한 전쟁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다. 아이들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자신들 부모의 피를 마신 모래에서 논다. 매일 아침 휴가를 맞은 여행객들은 가족들과 함께 바위 너머로 솟는 일출을 보러 이 바위를 오른다. 숙청 때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을 읽은 시인 강중훈 조차 시간의 흐름에 굴복했다. 그가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그의 시 한편 한편이 그 9월25일의 끔찍한 흔적을 지니고 있다. – 그걸 뛰어넘을 필요성도 알고 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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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공동체의 분열

제주공동체가 흔들리고 있다. 제주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관광 제주’는 도민을 위한 정체성이지, 관광객이나 정부의 정책 대상이 아니다.
최대 현안은 제2공항 갈등이다. 국토교통부는 서귀포시 성산읍 5개 마을을 제2공항 건설 예정지로 발표하면서 갈등은 갈피를 잡지 못 하고 있다. 제주 훼손은 세계문화유산을 잃는 것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올 줄 알았지만 바로 미군정의 통치에 들어갔다. 1947년 3월부터 1954년 9월까지 무려 7년 이상 지속된 제주4·3은 ‘전쟁 이후의 전쟁’의 전형이다. 4·3은 미군과 이승만 정권뿐만 아니라 야당 지도자까지 가해자였던 사건이다.
제2공항 건설에 이어 공군이 제주에 남부탐색구조부대까지 창설한다니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입방아가 극에 달할 조짐이다.
남부탐색구조부대는 제2공항과 연계한 사실상 공군기지다. 강정에 해군기지에 이어 공군기지까지 들어선다면 제주도 전체가 군사기지 천국이 된다고 벌써 시민운동이 달아오르고 있다.
1946년 10월 미국의 AP통신 발로 언론이 ‘제주도의 지브롤터화(化)’설을 기사화했다. 폭격기지화 추진 소문이다.
제주도에 대한 미국의 특별한 관심은 예전부터 있었다. 그 관심은 지정학적 관점에서 제주도가 갖는 군사 전략적 이점 때문이었다. 해방공간에서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접한 도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브롤터(Gibraltar)는 에스파냐의 이베리아반도 남단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향해 남북으로 뻗어 있는 영국령의 반도다.
해협을 마주 보며 지브롤터 바위가 서 있다. 바위산의 절벽 위에는 해군기지가 있다. 바위의 서쪽은 군항 및 자유 무역항으로 이용된다. 아프리카와의 좁은 해협(13㎞)이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다.
1964년부터는 에스파냐의 영토 반환 요구가 계속되고 있다. 태평양전쟁 종전 후 한반도로 진주한 미 24군단의 기록에서는 제주도가 ‘지극히 전략적인 위치의 요충지’로 지목됐다.
1948년 3월 이승만은 미 육군 차관을 만난 자리에서 제주도를 미국의 해군기지로 양도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환심을 사려던 것인지는 모르나 미국의 흉중을 간파한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 ‘제주도’는 어떤가? 제2공항 건설로 관광객이 더 쏟아져 들어올 때, 그 쓰레기를 섬이 감당할 수나 있을까?
어디 쓰레기 문제뿐인가? 육지보다 비싼 생산물과 교통체증, 생활용수 문제 등으로 고통까지 겪고 있다.
이에 따른 환경파괴, 쓰레기, 오수, 지하수 고갈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범죄도 늘어나고 있다.
그래도 제2공항인가?
오버투어리즘(과잉관광 현상)으로 몸살을 앓을 게 분명하다. 큰 공항 2개를 운영한다는 발상의 내면에는 군사기지화라는 복병(伏兵)이 깔려있다.
중국 하이난도 오키나와도 공항이 1개다. 프랑스 정부는 2008년 낭트공항 건설 계획을 승인했다. 하지만 지역주민과 환경단체들의 거센 반대로 지난해 초 새 공항 건설을 전면 백지화했다. 나리타공항은 50년 넘게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필리핀의 보라카이처럼 입도(入島) 금지 정책이 필요하다.
국토부와 제주도는 그동안 제2공항이 순수 민간공항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거짓말로 도민들을 호도해 왔다.
국토부와 지역주민 간의 공식적인 토론회와 설명회에서도 국토부는 일관되게 공군기지는 안 들어온다고 거짓말을 했다.
정부가 거짓말을 시작했으니 제주도는 그에 따라갈 뿐이다. 최근 열린 제2공항 기본계획 중간보고회에서도 국토부 관계자는 “절대 제2공항에는 군 시설이 들어올 계획은 없다고 했고 지역주민들이 반대하면 국토부는 할 계획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제 국토부는 국방부가 제2공항을 공군기지로 사용할 계획이 공식 확인됐으므로 도민에게 약속한 대로 제2공항 건설계획을 전면 철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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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랑의 노래 5

詩(시)로 읽는 4․3(29)

미친 사랑의 노래 5
김순이

내 아버지 누이
미쳐서 죽었다
4․3사태 피해서 일본 간 지아비
찾아서 밀항선 타고 들락거리다가
사랑의 그리움에 침몰해 버렸다
어떤 의사도 건져내지 못하였다
격정의 소용돌이 속의 그녀
사랑하는 사람 위해서 지은 옷 한 벌
보따리에 싸안고 부둣가 서성이며
날마다 날마다 마른 가지로 여위어
새까맣게 타죽었다 그리움의 불길에
풀조차 돋지 않는 그 무덤에서
들려온다
죽어서도 부르는 미친 사랑의 노랫소리
——————————————————————
사랑은 가장 따뜻한, 가장 바람직한 인간관계이다. 또한 그러한 관계를 맺고 지켜가고자 하는 마음이자 마음의 움직임이다. 가슴을 가진 사람, 그리고 영성(靈性)을 갖춘 사람이 서로 유대 또는 사귐을 갖는 것이고, 그것들을 이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곧 사랑이다. 그렇다면 미친 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랑일까? “내 아버지 누이 미쳐서 죽었다” 어찌 미쳐서 죽었을까? 사랑이 왜 미칠 수밖에 없었을까? 사랑의 담론에서는 철학, 심리학, 종교론, 윤리학, 예술론, 심지어 정치론까지 망라되어야 한다. 사랑은 한국 문화와 사회와 인간관계에 두루 걸쳐서 이야기되어 마땅하다. 사랑은 진과 선과 미를 두루 감싸고 있는 인간 심성이면서 현실적 효용성을 충족시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아버지 누이’는 바로 열정의 덩어리를 가슴에 안고 미쳐버렸다. 내 아버지 누이가 부르는 ‘미친 사랑의 노랫소리’는 위대한 미침을 향한 역사적 부름이다. 저 참혹한 역사가 역사를 부르라 말한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사회가 전쟁을 기록할 때 생존자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된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vetlana Alexievich)가 펴낸 유명 저서의 제목이다. 제주도처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을 자행한 토벌군들은 그 과정에서 여성들에게 수많은 폭력과 성폭력 등을 저질렀다. 성폭행, 여성고문, 대살(代殺, 남편이 도피한 상황에서 아내를 대신 죽이는 행위), 강제결혼 등은 4․3 당시 여성들에게 행해진 특수한 폭력들이다. 서북청년단원들이 여성들을 흔히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윤간한 뒤 질 안에 수류탄을 집어넣어 폭발시켰다. 토벌군은 가족, 약혼자, 배우자 남성들의 목숨을 빌미로 여성들과 강제결혼을 하기도 했다. 4·3사건은 30여 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2만5천~3만 명의 학살 피해자를 냈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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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한라산

詩(시)로 읽는 4․3(28)

두 개의 한라산
김희정

제주에 가면
두 개의 한라산이 있다
하나는 70년 전에 죽은 영혼을 품었고
다른 하나는
그들을 기억하는 마음을 안고 산다
산을 오르면 내려와야 하는데
끝내 내려오지 못한 사람들
해마다 이맘때면
산자들이
산 이곳저곳에 한라산을 뿌린다
그런 날이면 한라산은
한라산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70년 한(恨)을 풀어 놓는다
한라산은 그렇게 한라산을 만나
기일(忌日)을 보내고 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한라산 무장대가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1948년 10월 17일에 해안으로부터 5㎞ 이상 벗어난 지역으로 통행하는 것을 전면 금지했다. 이러한 통행금지는 한라산을 전면 통제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미군정은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대규모의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 등 반공단체를 증파하였다. 여기에 맞서는 주민들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대항하였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 반공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반감과 저항, 남한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무장 항쟁의 기치로 내세웠다. 국군 무지개부대와 협조하여 한라산 무장대 토벌을 마무리하기 위해 제주도경찰국 국장 이경진의 재임 중인 1952년 11월 제100전투경찰사령부(산하 6개 대대)가 설치되었다가 다음해 1월 초에는 한라산 잔여 무장대 토벌 부대인 신선부대(神選部隊, 부대장 경감 허창순)가 설치되었다. 관음사에 본부를 둔 신선부대는 산하 6개 중대 병력을 6개 지구에 투입하여 한라산 잔여 무장대 토벌에 나섰다. 그 후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7년 7개월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로 비화되었다. 본격적인 토벌로 무장대가 소멸되자 소개민들이 자기 마을로 돌아가 안착하게 되었다. 이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입산 금지가 전면적으로 해제됐다. 한라산 개방 1년 후인 1955년 9월 21일에 신선부대는 백록담 북측에 ‘한라산개방평화기념비’를 세웠는데, 기념비에는 “영원히 빛나리라. 제주도경찰국장 신상묵 씨는 4․3사건으로 8년간 봉쇄되었던 한라 보고를 갑오년 9월9일 개방하였으니 오즉 영웅적 처사가 아니리요. 다만 본도는 기여한 자유와 복음에 감사할지어다”란 격문이 새겨져 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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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마농 고장-노형 1948년 11월 19일(금)

詩(시)로 읽는 4․3(27)

꿩마농 고장-노형 1948년 11월 19일(금)
김성수

지슴이,
살아 숨어서 꽃피우는 데는 최적이라는 걸 봐왔습니다, 그네들
또한 모를 리가 아니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불, 불부터 놓았습니다
-숨어 앉은 꿩은 절대 쏘지 않는다
꿩 한 마리 날아올랐습니다, 탕
그이 또한 사람 속에 사람이 숨는 것이 최적이라고 여겼을 겁니다 그러나 저 꿩 한 마리처럼 목숨은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총구멍으로부터 나온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탕
내게 작은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
4월은 처연(凄然)하다. 봄이 오면 유채꽃과 진달래가 피어나고 4·3은 찾아온다. 달래도 지천이다. 달래를 제주에서는 ‘꿩마농’이라 부른다. 올레를 걷다 보면 사방에 눈에 띄는 것이 꿩마농이다. 고유의 독특한 향을 품고 올레꾼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들고 간 배낭을 얼추 채우면 저녁거리는 거뜬히 해결된다. 노형(老衡)의 유래는 “뇌형(瀨形)”에서 온 것으로 전해진다. 지형이 “배와 같고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노를 젓는 형태” 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한라산을 배후하여 남쪽으로는 어승생과 한라산을 등지고 있으며 배의 노(櫓)를 젓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숨어있는 꿩은 절대로 쏘지 않는다. 꿩이 날아오르자 총구멍이 불을 뿜는다. 시인의 작은 아버지도 총탄에 쓰러졌다. 어디 시인의 작은 아버지 뿐인가? 4․3으로 인해 희생자만도 노형에서만 5백 50명이 넘는다. 가장 피해가 많은 마을이다.1948년 11월 19일, 주민들은 정실마을이 불타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날 오후 토벌대원들은 마을로 들이닥쳐 마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노형은 원노형․월랑․ 정존․광평․월산 등 5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민들은 5․10선거를 맞으면서 투표를 거부하기 위해 주변 산으로 피신했다. 월랑주민들은 ‘조리물’로, 정존주민들은 ‘고냉이동산’으로 가서 며칠씩 숨어 지냈다. 그날 제9연대 병력이 월랑마을 첫 동네로 들이닥쳐 마을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보이는 대로 쏴 죽였다. 다음 군인들은 정존․ 광평마을로 가서 방화와 학살을 계속하였다. 다음 날에는 노형 모든 마을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다. 마을이 소각된 후 주민들은 이호․ 도두 등 해안마을로 소개되어 삶을 이어갔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죽음이었다. 제2연대의 이호․ 도두에서의 학살을 두 눈으로 본 주민들은 깊숙한 산간지역으로 숨어들어간다. 주민들은 1949년 봄, 정존에 성을 쌓고 복귀한다. 성에는 마을별로 네 구역으로 나눠 살았다. 성 가운데는 경찰출장소도 설치돼 돌담을 쌓고 경찰이 주둔했다. 주민들은 마을 성에서 약 5년간을 함바집을 짓고 살다 각 마을로 복귀한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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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별들과 꽃들은’

“척박한 이 땅의 역사는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진실을 감추려는 자들 사이에서 언제나 끊임없이 피를 흘려왔습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얼마나 더 이 땅을 붉은 피로 물들여야 새로운 세상이 올 수 있을지 아직은 아무도 모릅니다.” 시인 이산하는 1988년 6월 11일 안양교도소에서 항소이유서를 써내려간다. 그는 그 해 10월 3일 개천절 특사로 가석방된다. 그 전해 3월에 4․3사건을 다룬 ‘한라산’이라는 장편서사시를 발표했다가 필화를 겪었다. 시인은 4․3피해자 증언을 채록한 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 피의 투쟁사’를 비밀리에 접하면서 ‘한라산’을 써내려갔다.하지만 상당히 전위적이고 강력한 표현 때문에 그는 결국 1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박근혜 정권에서 총리를 했던 공안검사 황교안은 시인이 쓴 항소이유서를 보고 평생 콩밥을 먹이겠다고 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시인의 정치 의식과 작품은 별개라고 말한다. 정치 ‘의식’이 문학을 훼손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비평가들은 시인의 내면에 무지하거나 아니면 시와 정치의 관계를 떼어 놓고 싶은 보수적인 무의식을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가신 모든 혁명전사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장편서사시 ‘한라산’ 서문이다. 우리는 4․3의 제주도를 흔히 ‘가스실 없는 한국판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라고 표현한다. 시인은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서 안 쓴다면 역사의 방관자가 된다고 했다. 시인은 양심으로 역사를 꿰뚫어봐야 진정한 시인이라고 했다. 시인은 자신의 젊음을 피로 얼룩졌던 1948년 4월 3일에 고스란히 바쳤다. 두려움보다는 역사의 진실과 민중들의 장엄함이 그의 용기이자 힘이었다. 민중의 역사 안에는 도저히 눈으로 볼 수 없고 입으로 담을 수 없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참혹한 죽음과 쓰라린 상처들이 하나하나 역린처럼 꽂혀 있다. “한국 현대사 앞에서는 우리는 모두 상주이다./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 곳에 뜬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고/ 그 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별들과 꽃들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이산하 시집 ‘한라산’ 서시 중에서. ‘한라산’에는 4․3항쟁 기간 일어난 일뿐 아니라 4․3항쟁이 일어나게 된 세계사적 배경과 역사적 사실들이 시대적 흐름으로 서술됐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제국주의가 약소국을 침탈하고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유린했는지, 특히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그들의 권력을 등에 업은 서북청년단 등 반공단체의 잔인한 만행들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장편서사시 ‘한라산’을 읽는 것은 우리가 저지른 침묵의 죄를 용서 받는 일이다. 환상의 섬 ‘제주도’는 이승만과 미군정에 의해 도륙당하고 난자당한 참혹한 4․3 현장으로 각인됐다. 세계가 제국주의의 땅따먹기 각축장이 돼버린 현실이었다. 그 당시 불었던 저항의 바람, 그리고 제주도에서 자행된 살육, 해방 후 평화의 시대가 아닌 다시 폭력의 시대를 맞이해야 했고 그에 거침없이 저항했던 민중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인의 항소이유서에는 이런 글도 눈에 띈다. “새벽은 어둠 속에 앉아 기다리는 자에게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신새벽은 그 어둠에 맞서 밤새도록 싸운 자에게만 백만 원군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똑같은 이슬을 먹고도 벌은 꿀을 만들지만 뱀은 독을 만듭니다. 그 독을 먹고 자라는 파쇼하의 법정이란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나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판결이 내려지기를 바랍니다.”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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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구와 체 게바라

이덕구와 체 게바라

Ⅰ.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우린 아직 죽지 않았노라/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내 육신 비록 비바람에 흩어지고/깃발 더 이상 펄럭이지 않지만/울울창창 헐벗은 숲 사이/휘돌아 감기는 바람소리 사이/까마귀 소리 사이로/나무들아 돌들아 풀꽃들아 말해다오/말해다오 메아리가 되어/돌 틈새 나무뿌리 사이로/복수초 그 끓는 피가/눈 속을 뚫고 일어서리라/우리는 싸움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노라’ – 김경훈의 시 「이덕구 산전」 전문.

4・3은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시비의 문제이다. 해방이 되자 미군정은 지배의 장막을 치기 시작했다. 미군정시기에 발생한 4․3, 제주민중의 항거와 투쟁은 누구에 대한 항거였으며, 무엇을 위한 투쟁이었는가? 그 항거와 투쟁의 전선에 이덕구(李德九, 1920년~1949)가 있었다.
1945년 9월8일 맥아더 포고령이 발표된다. 군인 경찰은 물론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미군이 차지한다. 참다못한 제주도민들은 1947년 3월1일 독립만세를 재연했다. 경찰은 총질을 시작했다. 1948년 5월 10일 단독선거를 실시했고 도민은 선거를 거부하고 산에 오른다.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red island)’라 부른 미군정은 ’초토화작정을 펼쳐 중산간마을 95%를 불태우고, 3만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다. 미군정이 자행한 제노사이드(genocide)이다.
이덕구는 조천읍 신촌리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리쓰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學) 경제학부 재학 중 학병으로 관동군에 입대했다. 1945년 귀향한 뒤 조천중학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남로당 제주도지부 군사부장이며 김달삼(金達三)이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러 황해도 해주로 떠난 뒤 인민유격대장을 이어받았다. 결국 토벌대의 진압에 덜미가 잡힌다. 1949년 6월 7일 새벽 3시, 섬을 탈출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李鉉相)과 합류할 계획으로 하산하다가 경찰에게 포위됐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 6월 8일 관덕정 광장에는 십자형 틀에 묶인 시신이 전시되었다.
처연한 비운의 혁명가 이덕구. 일가족이 전멸되었다. 작은가오리오름 부근에서 최후를 맞는다. 교전과정에서 자결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에서 질문 하나가 있다. 남로당이 민중의 에너지가 된 점은 평가되지만 미군과 이승만 집단이 제주민중을 직접 살해한 구실을 그들이 일부 제공하지 않았느냐는 의문 말이다.

‘친애하는 장병, 경찰관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펴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총은 우리들이 피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총부리를 당신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 앞에 쏘지 말라. 귀한 총자 총탄 알 허비 말라.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준다. 그 총은 총 임자에게 돌려주자. 제주도 인민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로 쫓겨내기 위해 매국노 이승만 일당을 반대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부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은 인민의 편으로 넘어가라.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 지켜주는 빨치산들과 함께 싸우라. 친애하는 당신들은 내내 조선인민의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라’ -1948년 10월 24일 이덕구의 포고문.

이덕구의 포고문 내용 중에 < 침략자 미제>와 < 매국노 이승만>이라는 문구가 눈에 밟힌다. 4․3당시 남한 정부는 수립되지 않았으며, 미군정이 한반도 이남을 관할하고 있었다. 민중을 진압한 장본인은 미군정이었다. 무력으로 진압한 장본인도 미군정이었다.
“상공엔 미군정찰기가 날고, 제1선에는 전투를 지휘하는 미군 지프가 질주하고 있으며, 해양에는 근해를 경계하는 미군합의 검은 연기가 끊일 사이 없이 작전을 벌였다.”는 당시 조선중앙일보(1948년 6월 6일자) 보도는 무엇을 말함인가?
“I don’t care about the cause, my mission is to suppress only(원인에는 관심이 없다. 내 임무는 진압뿐이다)”라는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은 2주면 사태를 평정할 것이라고 했다. 미 군사고문단이 1948년 가을 이후의 초토화 작전에 직·간접으로 개입하였다. 정부는 그해 11월 17일 제주도 전역에 걸쳐 계엄령(戒嚴令, Martial law)을 선포하고 강경진압을 전개했다. 이덕구는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Ⅱ.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

‘(전략)…어른이 되었을 때 가장 혁명적인 사람이 되도록 준비하여라. 이 말은 네 나이에는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정의를 지지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라. 나는 네 나이에 그러지를 못했단다. 그 시대에는 인간의 적이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네게는 다른 시대를 살 권리가 있다. 그러니 시대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후략)’-1966년 2월 체 게바라가 딸 일디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혁명은 오직 무장봉기로만 가능하다’는 휴머니스트이며 리얼리스트인 체 게바라(Che Guevara,1928~1967). 아르헨티나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저술가,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 부유한 집안의 의사로서의 삶을 버리고 혁명가로서 삶. 과테말라․쿠바․콩고․볼리비아로 이어진 붉은 궤적. ‘전사(戰士) 그리스도’로 추앙받는 사람. 남미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 앞에 가장 엄격했던 그 사람 체 게바라.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그를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극찬했다. 미국에서조차 가장 뜨겁게 인기 있는 인물로 소비되고 있다. 혹자는 ‘혁명도 사회주의도 사라진 지금 오로지 체 게바라만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그의 사진은 붉은 티셔츠에 인쇄되어 젊은이의 가슴팍을 장식한다. 그의 이름이 들어간 시계, 심지어 맥주까지 나오면서 ‘체 게바라’라는 이름은 하나의 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다.
체 게바라는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이 처한 현실과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는다. 과테말라에 머물면서 하코보 아르벤즈 정권이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생각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때 아르벤즈 정권은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츠(United Fruit Company)가 소유한 토지를 국유화하려 했다. 미CIC는 군부를 움직여 그 정권을 엎어버렸다. 그는 “민중은 물질적으로 굶주렸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에 더욱 굶주려 있다”는 하코보 아르벤즈의 사상에 대한 경외심을 간직하게 된다.
체 게바라는 1954년 과테말라를 거쳐 멕시코로 망명하였으며, 그곳에서 쿠바출신의 사회주의혁명가들을 만난다. 쿠바는 미국과 소수부호들이 다스리는 나라였으며, 인민들은 굶주리고 탄압받고 있었다. 쿠바혁명이 성공한 뒤에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볼리비아까지 가서 목숨 걸고 또 혁명을 일으키려다 죽은 이상주의자이다. 쿠바혁명 승리 후 토지개혁의 준비에 착수하였다. 쿠바국립은행 총재, 쿠바 산업부장관, 1962년에 쿠바통일혁명조직 비서국에서 일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에서 군부쿠데타를 통해 집권하는 독재자들은 거의 미국의 군사학교 출신이었다.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경우 헌법을 수호해야할 책임이 있는 군대, 경찰, 의회가 등을 돌리거나 방관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Ⅲ. 죽음 앞에 선 혁명가
‘관덕정 광장에 읍민이 운집한 가운데 전시된 그의 주검은 카키색 허름한 일군복 차림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집행인의 실수였는지 장난이었는지 그 시신이 예수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에 높이 올려져있었다. 그 때문에 더욱 그랬던지 구경하는 어른들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심란해 보였다. 두 팔을 벌린 채 옆으로 기울어진 얼굴, 한쪽 입귀에서 흘러내리다 만 핏물 줄기가 엉겨 있었지만 표정은 잠자는 듯 평온했다. 그리고 집행인이 앞가슴 주머니에 일부러 꽂아놓은 숟가락 하나, 그 숟가락이 시신을 조롱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었다.’-현기영의 소설 『‘지상의 숟가락 하나』 중에서(68-69쪽).

이덕구의 시신은 효수(梟首)되어 전봇대에 걸렸다. 시신 옆에는 ‘이덕구의 말로를 보라’를 글귀가 붙어있었다. 시신은 대중에게 전시되었다가 남수각에서 화장됐으나, 다음 날 큰비가 내리는 바람에 유골이 빗물에 떠내려갔다. 광장에 내걸린 건 유격대장의 시신뿐만이 아니다. ‘폭도’이거나 ‘폭도로 몰린 사람들’까지 관덕정 앞에 끌려나와 효수됐다.
‘공비적멸가(共匪寂滅歌)’가 드높이 울려 퍼졌다. 그 광장에 목 잘린 머리통들이 등장했다. 잘린 목 그루터기에 살점이 너덜너덜한 머리통들을 창끝에 호박통 꿰듯 꿰어 들고 혹은 머리칼을 움켜서 허리춤에 대롱대롱 매달고서 토벌대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읍내 한길을 동서남북으로 행진했다.

‘굳건한 이념은 고도의 기술도 무너뜨릴 수 있다/전쟁에 충실한 미군들의 최대 약점은/그들의 맹목적인 전쟁관에 있다, 그들은/자기들과의 전쟁에서 죽은 자들만 존경할 뿐이다/그런 자들과의 싸움에서 우리는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단지 무모한 희생만은 피해야 한다//그러나 오로지 투쟁만이 미국을 물리칠 수 있다/이 투쟁은/단지 최루탄에 대항하여 돌을 던지는 시가전이나/평화적인 총파업이어서는 안 된다/또한 괴뢰정부가 흥분한 민중에 의해/불과 며칠 사이에 붕괴되게끔 하는 것/그런 싸움이 되어서도 안 된다/그 투쟁은 장기적이어야 하며,/또 적들로 하여금 충분히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이 투쟁의 전선은 게릴라들이 잠복하는 곳,/바로 그곳이다/도시의 중심,/투사들의 고향,/농민들이 학살당하는 곳/적들의 포화에 파괴된 마을과 도시들이/바로 전선인 것이다//적들이 우리로 하여금 싸우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다/우리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우리는 오직 싸움 준비를 하고/그 싸움을 시작할 결단만을 내릴 뿐이다’-체 게바라의 시 「싸움의 이유」 전문.

체 게바라는 말했다. “민중의 힘은 정부군을 이겨낼 수 있다. 우리는 혁명을 이루기에 가장 적당한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민중봉기는 그런 조건들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그는 미군의 지원을 받는 볼리비아 독재정권의 정부군에 부상을 입은 몸으로 체포되었다. 그의 남미에서의 인기와 남미 국가들을 장악하는 데 골머리를 앓던 미국은 그의 총살에 동의했다.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 9일 마리오 테란이라는 볼리비아의 하사관의 손에 의해 사살되었다. 죽기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알아두어라 너는 지금 사람을 죽이고 있다” 체 게바라를 향해 방아쇠를 당신 마리오 테란은 6개월 후 자신의 집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체 게바라가 죽은 후 그의 시신을 확인한 영국의 < 가디언> 기자는 이렇게 썼다. “나는 1963에 쿠바에서 체 게바라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미국에 대항한 전투에서 전 세계의 급진적인 군대를 지휘하려고 시도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제 그는 죽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그와 함께 사라질 수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체 게바라는 사후 그 영향력이 더 커져갔다. 그의 사체는 30년 후 볼리비아에서 발굴 되어 쿠바로 옮겨졌다. 그는 쿠바혁명의 성공 물꼬를 튼 산타클라라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 추억했다. “에르네스토는 진실에 열광적이었습니다. 진실은 그의 환영이었지요. 전투할 때는 냉정했고 혁명과 관련된 모든 일에 굽힐 줄 몰랐던 만큼 그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유머가 넘치는 아이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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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암은 왜 우는가-4․3 추념일 68주년 아침에

詩(시)로 읽는 4․3(26)

현무암은 왜 우는가-4․3 추념일 68주년 아침에
서해성

제주에 널린 현무암에 어째서 구멍이 많은 줄 아는가.
한날한시에 모여서 운 여인들 눈물 자국에 파인 까닭이다.
제주에 널린 유채꽃밭이 어째서 한날한시에 노랗게 피어나는 줄 아는가.
잊어도 아주 잊지는 말아다오
돌 틈 사이에서 부르는 까닭이다.
제주 중산간 새별오름 지나 이달봉이 어째서 촛대봉을 품고 사는지 아는가.
한날한시에 촛불 한 자루 올려 달라
바위손 모아 비손하는 까닭이다.
송악산 밑 알뜨르비행장 백조일손지묘가 어째서 백조일손지묘인지 아는가.
한날한시에 죽은 아방 어멍 한날한시에 돌아오고도 싶은 까닭이다.
제주에 널린 현무암이 어째서 구멍 숭숭 우는 줄 아는가.
한날한시에 쓰러진 바람이 죽은 자들 이름을 여적지 숨어 부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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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암(玄武巖, Basalt)은 화산 활동으로 생성된 암석의 일종으로 거무스름한 색이 특징적이다. 화산활동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제주현무암은 대자연이 만들어낸 작품으로 제주에서만 볼 수 있다. 송송 뚫린 구멍을 기공(氣孔)이라고 한다. 용암이 식을 때 가스가 빠져나온 흔적이다. 그 기공이 바로 시인의 눈에는 여인들의 눈물 자국으로 파인 것으로 보았다. 당신은 한날한시에 모여 우는 여인들과 한날한시에 촛불 한 자루 올리는 사연과 한날한시에 쓰러진 바람이 죽은 자들을 부르는 까닭을 아는가?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는 조상은 백 명 자손은 하나인 무덤이다. 모슬포경찰서 관할 양곡 창고에는 예비검속으로 1950년 7월 초부터 붙잡혀온 347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1950년 8월 20일(음 7월 7일) 밤중에 이들 중 250명가량을 창고에서 끌어내어 섯알오름 기슭에서 새벽 2시와 5시경에 61명, 149명으로 나누어 총살하였다. 백조일손희생자란 이 때 희생된 210명~250명 중 1956년에 발굴되어 현 묘역에 안장된 132명을 말한다. 시신의 신원을 구별할 수 없어 132개의 칠성판에 큰 뼈를 대충 수습하여 현재의 묘지에 이장했다. 1959년 5월 8일 묘역에 위령비를 건립하였으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4․3사건은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하고 부수어버렸다. 전두환 정권 때 교과서는 4․3사건을 폭동사건으로 지칭하며 공산 무장폭도가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린 남한교란 작전 중 하나라고 서술했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과 같은 연좌제로 인해 감시받고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았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시민사회에서 4․3진상규명을 요구해오며 4․3특별법이 제정되고 세상에 제대로 빛을 보게 되었다. 1993년 8월 24일 새로운 위령비가 묘역에 건립되었으며 2007년 12월 31일에는 섯알오름학살터가 정비되어 2008년부터는 음력 7월 7일에 학살터인 섯알오름에서 백조일손유족회와 만뱅디유족회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합동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만뱅디유족회는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한림수협창고와 무릉지서 수용자 60명이 먼저 학살당하였는데 이들과 관련된 유족들의 모임이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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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의미

詩(시)로 읽는 4․3(25)

4월의 의미
고승완

4월을 간직한 비문들
4․3평화공원 콘크리트 벽에 갇혀버린 한 맺힌 이름들
한라산 기슭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영혼들
이제는 그대들에게 영예로움을 선사할 때다

그들의 외침은, 통일!
처절한 절규였습니다
그들의 붉은 피는, 배달겨레!
값진 죽음이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그들
돌아오지 못하는 그들
뜨거운 피를 뿌려도
금수강산의 냉전은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들판으로
가슴에서 마음으로
숨이 끊기면서도 부르짖던 4월,
통일이 되면 다 말할 수 있으리라

언제면 냉랭한 가슴이 열려
목청껏 소리 질러 보려나
“부끄러운 자는 가거라!”
“대한독립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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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들은 통일된 나라를 원했다. 통일정부와 친일청산을 원하는 도민들의 첫 항쟁이 1947년 3․1발포사건에 이은 3․10 총파업이다. 질문을 던져보자. 4․3이 한반도를 적색으로 만들려고 한 무장봉기인가. 일본이 남긴 소총 몇 점으로 미국에 대항해서 싸우겠는가. 바로 앉아서 죽느니 서서 싸우자는 것이다. 4․3 이후에는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벌였다. 4․3은 항쟁이다. 여기서 항쟁은 민족주의적 항쟁이다. 분단을 거부하고 통일정부 세우자,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주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한국사회의 모든 모순과 불합리가 분단에서 왔다. 중요한 건 해방공간 3년의 역사다. 친일파와 이승만 정권으로 무얼 하겠는가? 해방공간 3년, 우리나라 기초 역사를 바로 세워야 언젠가 다가올 통일의 순간에서 남쪽이 발언권이 가능하다. 그 숙제는 바로 통일 조국, 친일파 척결이란 대한민국의 첫 번째 민주주의 운동이 4․3이었다는 정명을 백비에 새기는 것이 숙명이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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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우수(憂愁)’, 르 클레지오의 새벽바위

광치기해변은 르 클레지오(J.M.G. Le Clézio)가 ‘새벽바위(Rocher de laube)’라 일컫는 성산일출봉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다. 천연하도록 아름다운 해변이다. 파도가 미친 듯 몰아칠 때는 범접하기 어려운 곳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바람이 잦아들며 바닷물이 물러남 그 자리에 드러난 초록빛 너럭바위 해변은 고혹적인 아름다움과 광대한 평화로움 그 자체다.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르 클레지오는 제주섬에 머물면서 직접 취재, 집필한 < 제주기행문>을 유럽 최대잡지 『지오(GEO)』 창간30주년 기념특별호(2009.3)에 ‘제주매력에 빠진 르 클레지오’란 제목으로 게재함으로써, 제주에 대한 ‘이유 있는 사랑’을 드러냈다.
그는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 ‘유목민 작가’답게 성산일출봉에서 인도양의 모른 봉을, 당신(堂神) 조각상에서 마르키즈 제도 폴 고갱 무덤 앞의 오비리 조각상을, 돌탑 꼭대기의 수리 형상에서 멕시코 중부 푸레페차 원주민 마을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를 비롯한 수많은 나라에 머물렀던 그는 2007년 처음으로 제주에 발을 디뎠다. 지금도 전 세계를 여행하며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그가 유독 제주와 해녀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작품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시작은 작가가 여덟 살 때 지오그래피 매거진에서 본 해녀에 관한 기사였다. 맨몸으로 특별한 장비도 없이 바다에 들어가 전복이며 문어 등을 채취하는 여성의 모습은 소년에게 환상적으로 다가왔다. 수십 년이 지나 제주섬에 온 그는 비로소 해녀를 실제로 보게 되었다.
‘프랑스 문단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프랑스 태생 르 클레지오. 그의 선조들이 대를 이어 둥지를 틀었던 인도양의 섬나라 모리셔스 공화국(Republic of Mauritius)은 정신적 모태이자 문학적 고향. 프랑스의 저명 작가가 한국을 소재로 글을 쓴 것은 1901년 6월 서울을 방문한 피에르 로티(Pierre Loti)의 < 서울에서>란 글 이후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르 클레지오는 ‘제주’에서 ‘모리셔스’를 발견했고, 그것은 화산섬이라는 자연환경의 동질성뿐 아니라 4․3의 아픔이 아직 살아있는 제주와, 과거 열강의 식민지로서의 슬픔을 간직한 모리셔스의 역사적 동질성에 공감한 것이다. 그가 제주섬과 모리셔스를 ‘자매섬’으로 표현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오늘날 제주에는 달콤함과 떫음,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있다. 포록과 검정. 섬의 우수(憂愁)를 우리는 동쪽 끝 성산 일출봉 즉 ‘새벽바위’라 불리는 이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남한을 뒤흔들고 한라산을 생성한 마지막 화산 폭발로 바다에서 솟아오른 화구다. 바위는 떠오르는 태양과 마주한 검은 절벽이다. 한국 전역에서 순례자들이 첫 해돋이의 마술적인 광경에 참석하러 오는 곳이 바로 여기다. 설날 햇빛은 그들이 일 년 내내 간직한 상서로운 일들을 가져올 것이다. 이 바위는 다른 터, 모리스 섬의 모른(Morne) 바위를 내게 상기시킨다. 풍경은 같은 비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48년 9월 25일 아침에 군인들이 성산포 사람들을 총살하기 위하여 트럭에서 해변으로 내리게 했을 때 마을사람들 눈앞에 보였던 게 이 바위다. 나는 그들이 이 순간에 느꼈을 것, 새벽의 노르스름한 빛이 하늘을 비추는 동안에 해안선에 우뚝 서 있는 바위의 친숙한 모습으로 향한 그들의 눈길을 상상할 수 있다. 모리스 섬의 모른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이 인도양으로 불쑥 나온 바위 꼭대기까지 올라갔고, 군인들이 도착하는 걸 보았을 때 – 사람들은 군인들이 노예들의 해방을 알리러 가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총을 들고 사람들을 해방하러 가겠는가? – 그들은 허공에 몸을 던졌다.”-르 클레지오의 < 제주기행문> 중에서(『지오(GEO)』2009년 3월호).

4․3당시 성산포 사람들을 끌고 와 트럭에서 해변으로 내리게 했을 때 그들의 눈앞에 보였던 그 바위 성산일출봉과 광치기해변. 민병대는 잡아온 주민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가 대부분 총살했는데, 그 장소가 성산포 ‘터진목’과 ‘우뭇개동산’이다.
르 클레지오는 1948년 학살사건이 일어난 성산일출봉에 올라 노예들의 봉기가 일어난 모리셔스의 모른 바위를 떠올렸다. “이제 잔인했던 과거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 피를 마신 모래 위에서 뛰놀고 있다”고 말한 그는 “감동적이면서도 끔찍한 4·3이야기는 슬프면서도 동시에 섬에 스며든 생존의 열망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고백했다. 르 클레지오는 제주를 정의하는 키워드로 ‘insularity’란 단어를 선택했다. ’섬나라 근성‘이 아닌 ’고립‘, ’근원적인 섬의 모습‘이란 의미에 가깝다. 그는 제주도와의 인연은 각별하다. 그는 제주도와 그의 고향인 인도양의 섬나라 모리셔스와 동질감을 여러모로 느낀다고 했다.
르 클레지오는 “나의 정신적인 고향은 모리셔스섬이며 여전히 나의 국적도 모리셔스다”고 할 만큼 ‘섬의 시람’이다. 그는 모리셔스섬을 사랑한 것만큼 그는 제주섬을 사랑한다. 모리셔스섬 사람들이 그 섬의 아닌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서 핍박당한 아픔이 있듯이 제주섬에도 그 같은 아픈 역사가 있었다.
모리셔스는 아프리카의 동부, 인도양 남서부에 있는 섬나라이다. 자연도 제주도와 비슷하다. 화산 폭발로 인해 생성된 섬으로 추정된다. 유럽인들이 이 섬을 발견했을 당시 이 섬은 무인도였다. 대한민국과는 1971년, 북한과는 1973년에 동시 수교하였다. 2017년 르 클레지오는 소설집 『폭풍우』(원제: Tempete: Deuxnovellas)를 출간하였다. 그 첫머리에 “제주 우도의 해녀들에게”라는 헌사가 붙었다.『폭풍우』는 제주가 아름다운 섬일 뿐만 아니라 4․3의 상처와 고통을 지닌 곳이라는 걸 에둘러서 이야기하는, 서정적인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르 클레지오는 2007년 처음으로 제주에 발을 디뎠다. 그가 유독 제주와 해녀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작품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녀뿐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과 가슴 아픈 역사 등 제주의 정체성을 이루는 많은 요소들이 그의 정신적 모태이자 문학적 고향인 모리셔스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그 에게 제주섬은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있는 땅”이며 “확신의 땅이라기보다는 감성의 땅”이다. “제주도는 세계에 얼마 남지 않은 자연을 갖고 있는 섬”이라고도 했다.

“성산일출봉을 보고 있노라면 마다가스카르 동쪽의 화산섬 마우리티우스의 모른 봉이 떠오른다. 똑같은 비극을 담고 있다. 성산일출봉은 제주4·3사건 때 민병대에 끌려온 성산 마을 주민들이 죽어가면서 봤던 바로 그곳이다. 마우리티우스의 모른 봉은 반란 노예들이 인도양으로 솟아오른 봉우리 끝까지 기어올라 허공에 몸을 던진 곳이다.”-르 클레지오의 < 제주기행문> 중에서(『지오(GEO)』2009년 3월호).

르 클레지오는 “제주기행문”에서 하멜의 표류에 대한 상상부터 성산일출봉, 돌하르방, 샤머니즘, 4․3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으면서 제주인의 아픔을 공유하는 모습을 보였다.
4․3광풍이 온 섬을 휩쓸던 시절, 어디 하나 상처를 입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 성선포도 그랬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해안에서 벌어진 처참한 슬픔과 분노의 역사는 시간과 더불어 뇌 속에서 과연 사라질 것인가? 4ㆍ3 당시 민병대에 끌려온 주민들이 죽어가면서 봤던 바로 그곳이다. 마우리티우스의 모른봉은 반란 노예들이 인도양으로 솟아오른 봉우리 끝까지 기어올라 허공에 몸을 던진 곳이다.
4․3사건은 1947년을 기점으로 1954년까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어디 그 뿐인가? 성산포경찰서에 수감되었던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수장(水葬)은 1950년 7월 29일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성산읍에서는 약 445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 중에서 200명 이상이 터진목에서 학살되었다.
성산포 터진목에는 ‘제주4․3성산읍희생자위령비’가 일출봉을 등지고 서있다. 그 곁 바다 쪽으로 ‘제주매력에 빠진 르 클레지오’에서 발췌한 글귀가 음각되어 있다. 기념비는 가로 1.7m, 세로 0.8m, 높이 0.4m 크기로 표면이 곳선 형태다.

“이 모든 것은 1948년 4월 3일에 제주에서 군대와 경찰이 양민학살(인구의 10분의 1)을 자행한 진부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 잔인한 전쟁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다. 아이들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자신들 부모의 피를 마신 모래에서 논다. 매일 아침 휴가를 맞은 여행객들은 가족들과 함께 바위 너머로 솟는 일출을 보러 이 바위를 오른다. 숙청 때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을 읽은 시인 강종훈 조차 시간의 흐름에 굴복했다. 그가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그의 시 한편 한편이 그 9월25일의 끔찍한 흔적을 지니고 있다. – 그걸 뛰어넘을 필요성도 알고 있다.” -르 클레지오의 < 제주기행문> 중에서(『지오(GEO)』2009년 3월호).

“새가 날아가다가 아름다운 곳을 찾았습니다. 이 아름다운 곳에 매일 오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제주를 찾았습니다.” 르 클레지오는 자신의 제주 방문을 새의 비행에 비유했다. 아름다운 곳을 방문하게 되면 또다시 마음이 끌려 찾게 되듯이 제주는 그러한 땅이라고 말했다. 그가 제주도의 매력에 빠진 것은 시인 강중훈을 알면서다. 강중훈 시인을 통해 제주의 비극적 역사인 4·3을 체험할 수 있었고, 제주최고의 절경 가운데 하나인 성산일출봉을 만났다.
2007년 11월 8일, 시인 강중훈이 운영하는 민박 ‘해 뜨는 집’에 프랑스 제5채널 TV제작진이 르 클레지오와 함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리고 다음해 1월 18일부터 1월 22일까지 그는 ‘해 뜨는 집’을 다시 찾았다. 이처럼 시인 강중훈과 르 클레지오의 우정은 시작되었다. 그 후 시인 강중훈은 국제PEN한국본부 제주지역위원회 회원들과 함께, 2013년 6월 3일 모리셔스 공화국을 찾았다. 제주섬과 모리셔스섬은 ‘형제’처럼 닮았음을 확인하기 위한 걸음이다. 흑인 노예들이 섬 문화를 일궜던 모리셔스 공화국은 제주섬 못지않게 천혜의 자연과 역사문화를 갖고 있다는 점 말고도 제주가 이어도라는 이상향을 꿈꾸듯, 그곳 역시 유토피아를 꿈꾸던 정서가 맞아떨어진다고 느끼고 싶었으리라. 모리셔스의 주민들도 오랜 시간 핍박 받으며 살아온 아픈 역사가 제주사람들과 너무 닮았음을 확인하고 싶었으리라. 그래서 시인 강중훈이 시 「섬의 우수」를 써내려갔는지 모르겠다.
“여기 가을 햇살이/ 예순 두해 전 일들을 기억하는 그 햇살이/ 그때 핏덩이던 할아비의 주름진 앞이마와/ 죽은 자의 등에 업혀 목숨 건진/ 수수깡 같은 노파 잔등 위로 무진장 쏟아지네/ 거북이 등짝 같은 눈을 가진 우리들이 바라보네/ 성산포 ‘앞바를 터진목’/ 바다 물살 파랗게 질려/ 아직도 파들파들 떨고 있는데/ 숨비기나무 줄기 끝에/ 철 지난 꽃잎 몇 조각/ 핏빛 태양 속으로 목숨 걸 듯 숨어드는데/ 섬의 우수 들불처럼 번지는데/ 성산포 4·3위령제령재단 위로/ 뉘 집 혼백인양 바다갈매기 하얗게 사라지네”-강중훈의 시 「섬의 우수」전문.

섬사람들은 어디에 있던 바다로 향해 있다. 침략의 위험이 오는 것도 바로 바다이다. ‘섬의 우수’는 바로 4․3의 언어이다. 오늘날 잔인한 전쟁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지만,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그 해변에서 자신들 부모의 피를 마시며 그 섬을 탈출하려는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
르 클레지오의 모리셔스섬과 강중훈의 제주섬은 ‘섬의 우수’라는 동질성으로, 과거 강대국의 침략으로 빚어진 역사적 체험을 문학의 언어로 바꾸기 위한 고통스러운 작업이 계속 전개될 수 있으리라. 고난의 땅 섬에서 언어 찾기는 바로 이 시대 작가의 몫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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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을동

詩(시)로 읽는 4․3(24)

곤을동
현택훈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안드렁물 용천수는 말없이 흐르는데
사람들은 모두 별도천 따라 흘러가 버렸네
별도봉 아래 산과 바다가 만나 모여 살던 사람들
원담에 붉은 핏물 그득한 그날 이후
이제 슬픈 옛날이 되었네
말방이집 있던 자리에는 말발자국 보일 것도 같은데
억새밭 흔드는 바람소리만 세월 속을 흘러 들려오네
귀 기울이면 들릴 것만 같은 소리
원담 너머 테우에서 멜 후리는 소리
어허어야 뒤야로다
풀숲을 헤치면서 아이들 뛰어나올 것만 같은데
산 속에 숨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지
허물어진 돌담을 다시 쌓으면 돌아올까
송악은 여전히 푸르게 당집이 있던 곳으로 손을 뻗는데
목마른 계절은 바뀔 줄 모르고
이제 그 물마저 마르려고 하네
저녁밥 안칠 한 바가지 물은 어디에
까마귀만 후렴 없는 선소리를 메기고 날아가네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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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을동(坤乙洞)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 화북천 지류를 중심으로 밧곤을, 가운데곤을, 안곤을로 나눠진다. 고려 충렬왕 26년(서기 1300년)에 별도현(別刀縣)에 속한 기록이 있듯이 설촌된 지 7백년이 넘는 마을이다. 주민들은 농사를 주로 했으며, 어업도 겸하면서 43호가 소박하고 평화롭게 살았다. 어느 날 갑자기 평화로운 이 마을에 비극이 찾아왔다. 1949년 1월 4일 오후 3~4시께 국방경비대 제2연대 1개 소대가 마을을 포위했다. 군인들은 안곤을과 가운데곤을의 집집마다 불을 붙이며 주민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젊은 사람 10여명을 안곤을 바로 앞 바닷가로 끌고 가 총살했다. 또 살아남은 젊은 남자 10여명을 5일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연대 밑 ‘모살불’(현재 화북등대) 해안에서 총살했다. 이후 군인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밧곤을 28가구도 불에 태워 없애버렸다. 이로써 오랜 세월 삶을 영위해오던 67호의 적지 않던 마을이 하루 사이에 한꺼번에 사라졌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곤을 마을 사람들은 인근 ‘새곤을’(현재 화북1동 4047번지 일대)로 이주해 움막 등을 지어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가난하게 살았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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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비문

詩(시)로 읽는 4․3(23)

잔인한 비문
박남준

산 자의 지문으로 죽은 자의 침묵을 써왔노라
죽은 자의 노래로 산 자의 슬픔이 위로받으려니

봉인된 돌이 있다
쓰이지 못한
새기지 않은 이름이 갇혀 있는,
살아서는 낙인 붉은 사람들의
뼈와 살로 화석을 이룬
이를 악물고 그을린 울음 같은 비가 있다
저기 떠난 자의 다홍빛 명정에
흰 글씨를 써넣어야 하는가
지박령의 검은 이름표 불랙리스트로
탕탕 저격해야 하는가

백비, 부를 수 없어 말문을 닫은 묵비
때가 되었다 누워있는 돌이 일어나
사람의 말로 외칠 것이다
증언되리니 아비와 그 어미와
아이들의 한라산이 매장당한 근대사
참으로 지독하고 잔인했던 평화의 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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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세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4․3백비(白碑), 이름 짓지 못한 역사.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왔다. ‘탄압이면 항쟁’이라는 제주도민들이 보여줬던 저항 정신이야 말로 역사를 발전시키는 정신이다. 70년 전 친일 부역세력은 이 나라의 독립 세력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학살하고 지금까지 지배 세력으로 군림한다. 국가는 도민들을 상대로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4․3의 모든 일은 미군정을 통해 이뤄졌다. 미군정은 해방 직후 한반도 38선 이남에 존재한 실질적 통치기구였다. 미군정은 제주도를 ‘사상이 불순한 빨갱이 섬’으로 매도해 제주 사람들을 탄압했다. 4․3 직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또 “10%정도는 총으로 무장하였고, 나머지는 일본도와 재래식 창으로 무장하였다”고 밝혔다. 미군보고서에도 1948년 11월부터 제주섬에 대한 국방경비대 9연대의 초토화 작전을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했다. 미군정은 초토화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정찰기를 동원 했을 뿐만 아니라 토벌대의 무기와 장비도 적극 지원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제주 민중을 대량 학살한 책임은 이승만 정부와 미국에게 있다. 미국 정부는 4.3 학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해야 한다. 4.3 당시 미군정과 미국 군사고문단의 역할에 대한 진상조사에 적극 나서야 한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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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평권

詩(시)로 읽는 4․3(22)

권평권
고은

1945년 9월 8일
왠지 인천 앞바다 여틈하게 보이던 날
미군의 인천상륙 환영하러 나갔던
인천노조 지도자 권평권 위원장
아직 무장해제가 안 된 일본군에게 총 맞아 죽었다
이 밖에도 여럿이 쓰러졌다
상륙한 미국은 일본군 편들었다
왜냐
해방군이 아니었으므로
점령군이었으므로
맥아더 일반명령 제1호의 점령군이었으므로
그 후리후리한 키 뻣뻣이 굳어버렸다
그 뒤로 내내
이 땅에서는 순정이란 순정은 다 굳어버렸다

그러나 이 땅 어디에도 어느 골창에도
개죽음이란 없다
그 죽음 쌓여 오늘의 모순에 이르렀다

성조기가 가장 잘 보이는 이 땅에서
일장기가 가장 잘 보이는 이 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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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육군대장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태평양미육군사령관이었다. 미군정(美軍政, 1945.8.15~1948.8.15) 3년 동안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본통치 방침은 ‘맥아더 포고(布告)’에 집약되어 있다. ‘맥아더 포고’는 헌법이 없던 그 시절, 미군정 점령정책의 기본이 되는 법규로 활용되었다. 제1호는 “본관 휘하의 전첩군(戰捷軍)은 본일(本日)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함”이라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4․3에 대한 연루자들을 처벌할 때 적용한 법규는 맥아더 ‘포고 2’였다. 미국이 점령한 사이에 터진 4․3의 항거와 투쟁이 누구에 대한 항거였으며, 무엇을 위한 투쟁이었는가. < 권평권>인천노조위원장은 미군을 환영하러 나갔다가 일본군에게 총을 맞아 죽었다. 미군은 점령군으로 이 땅을 밟았으며, 미군은 철저하게 일본군 편이었다. 미군은 한국인에 의해 조성된 좌파성향의 조선 인민공화국과 우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정부는 행정․ 입법․ 사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된 미59군정중대 본부에도 성조기(星條旗)가 휘날렸다.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선글라스에 옥수수파이프, 팽팽한 모자에 잘 다린 바지로 상징되는 튀는 옷차림에 대해 70대의 5성 장군이 19살 소위같이 다닌다는 비판도 있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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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와 문지기

김관후/작가·칼럼니스트
풍찬노숙(風餐露宿)!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한데서 먹고 잔다. 독립 투쟁에 헌신한 백범(白帆) 김구(金九)의 삶은 그야말로 풍찬노숙의 나날이었다. 어디 백범뿐이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고심분투한 애국지사들 모두가 풍찬노숙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문지기! 문지기는 문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데 과거 애국지사 중에 굳이 풍찬노숙의 문지기를 자처하며 나선 분들이 있으니, 그 역시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일이다. ‘어든 대문을/ 들어갈꼬/ 서울 남대문/ 쇠 걸었네/ 그러나저러나/ 들어옴세/ 남대야/ 문어리/ 어든 대문을/ 들어갈꼬/ 서울 남대문/ 쇠 걸었네/ 그러나저러나/ 들어옴세/ 남대야/ 문어리’
백범 김구가 상하이에 도착한 1919년 4월 13일.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안창호(安昌鎬)를 찾아가 “임정의 문지기를 하겠소” 했더니 경무국장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그가 문지기를 자원한 것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어떤 일이든 하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로 부르는 “날으는 홍범도가”를 탄생시킨 홍범도(洪範圖).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홍범도. 불모의 땅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서 하루의 생계를 걱정하며 말년을 보낸 고려극장 문지기 홍범도.
그렇지만 홍범도를 70대 극장 문지기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40년부터 1943년 사망하기 전까지 극장 앞을 지켰다. 일제의 고문으로 옥사한 부인, 의병으로 나섰다가 먼저 세상을 등진 아들,
“북지십년 만주십년 경찰백지 일자무식 문 도깨비 문형순!/ 어느 경찰 출신은 문형순을 그렇게 음률을 맞추어 기억했다// 왜 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라는 거야?/ 안 돼!// 광복군 출신으로, 친일 군경과 맞짱 뜰 수 있는 배짱과 용기// 너희 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이게 뭐야?/ 부당함으로 불이행!// 말년엔 여느 독립 운동가들처럼 쓸쓸하게 죽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북지십년 만주십년 경찰백지 일자무식 문 도깨비 유방백세(流芳百世) 문형순!” 김경훈 시인 시 「부당함으로 불이행」
2018년 10월 25일 경찰의 날을 맞아 4·3의인 故 문형순(文亨淳)이 경찰 영웅으로 선정되었다. 제주4·3 당시 부당한 국가권력의 지시에 맞서 제주도민의 생명을 구한 ‘명예로운 경찰의 표상’으로 평가한 결과였다. 국가의 직접적이고, 부당한 폭력을 ‘불이행’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수많은 도민의 목숨을 구해낸 ‘국민의 경찰’, ‘민주주의의 경찰’상을 몸소 보여준 고 문형순 서장. 4·3으로 희생된 도민들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엄연히 존재하는 국가폭력의 희생자이지만 그는 고귀한 희생과 헌신은 빛났다.
그런데 문형순은 안타깝게도 퇴직한 다음에는 경찰에게 쌀을 나눠주는 배급소, 이런 곳에서 일을 하였고, 극장에서 매표원과 문지기 일을 하면서 어렵게 생활하다가 향년 70세에 후손도 없이 혼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다.
문형순은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세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바로 육군사관학교의 뿌리이다. 그 후 고려혁명군의 군사교관으로 복무하고, 만주 한인사회의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을 역임했으며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을 겸임했다. 그 후 북지 허베이 성에서 지하공작대에 복무했으며 광복군으로 활동하다 귀국하여 제주도에서 경찰이 되었다.
문형순은 4.3사건 때 계엄군의 총살 명령을 거부하고, 수백 명의 민간인을 살렸다. 문형순 서장 앞으로 군 당국이 공문을 보냈다. “부당함으로 불이행.” 서장은 명령이 부당하기 때문에 이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결국은 200명이 넘는 민간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문형순의 극장에서 매표원과 문지기 일이 더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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