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오름의 진실은

詩(시)로 읽는 4․3(53)

칠오름의 진실은
박효찬

우리 동창은 칠오름에 집이 없는데 산다
눈이 쌓인 겨울엔 간장 하나에 밥을 먹어야하고
4월이 되면 붉게 물든 고냉이술 언덕에서 함께 운다
고깔모자를 쓴 칠오름에서
신들의 축제에 지식인을 부르고 역적을 부른다
밤이 되면 먹을 것을 찾아 봉아름으로
목이 마르면 죽창으로 붉은 동백꽃을 꺾었다
무자년 4월
혈흔도 없이 사라져버린 무수한 사람들
칠오름 자연동굴 속 이야기는 흔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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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역시 4·3 당시 피난처였다. 토벌대가 마을로 들이닥치면 주민들은 오름으로 숨어들어갔다. 일제강점기 시절, 봉개동 일대는 일본군 96사단 예하의 293연대본부가 주둔해 있었다. 명도암 뿐만 아니라 주변 오름은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대규모 갱도진지 등 군사시설을 구축하였다. 이곳 역시 4·3 피난처가 되었다. 명도암에 연대본부가 있었기 때문에 명도암오름과 칠오름, 열안지오름, 노리오름 등에도 갱도동굴들을 볼 수 있다. 고냉이술은 칠오름의 북동쪽에 동·서쪽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곶자왈 지역이다. 고냉이술에도 진지동굴이 남아있다. 고냉이술 갱도의 길이는 70여m 정도이며 내부에 크고 작은 방 3곳과 통로 2곳이 만들어져 있다. 오름과 오름 사이, 마그마가 흐르던 용암지대였던 곶자왈은 구멍이 쑹쑹 뚫린 바위로 가득한 황무지에 다름 아니었다. 제주도를 피의 공포 속으로 내몰았던 4․3 당시 곶자왈 역시 토벌대를 피해 숨어든 주민들의 피난처가 되어주기도 했다. 거칠고 사나우며 척박했다. 오랜 세월 버려진 땅이었다. 먹을 것 귀하던 시절, 도토리며 양하(襄荷) 같은 구황식물을 아낌없이 선물했다. 고냉이술굴은 용암종유와 용암유석 등 동굴 생성물이 일부 남아 있는 용암동굴이며, 일제 강점기때 일본군이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내부를 정비하면서 일부 훼손 되었다. 역시 피난처였다. 칠오름을 칡오름이라고도 한다. 칡이 많은데서 칡오름 또는 칠오름으로 불려온다. 한자로는 칡 갈(葛) 자를 써서 갈악(葛岳)으로 표기돼 있다. 제주어로 칡은 보통 ‘칙’ 또는 ’끅‘이라고 하는데 일부지역에서는 ‘ 칠’이라고도 한다. 다른 하나는, 명도암 남쪽에서 내려오는 오름 가운데 일곱 번째 오름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자 표기도 칠봉(七峰) 또는 칠악(七岳)으로 돼 있다. 맨끝의 칠오름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열돼 있다는 풍수설이다. 조선시대 유학자 김진용(金晉鎔)의 은거지로 유서가 깊은 명도암은 봉개동에서도 2㎞쯤 올라간 중산간에 형제봉· 열안지오름·칡오름으로 둘러싸인 한갓진 마을이다. 1965년 10월 탄신 6회갑 기념으로 이숭녕(李崇寧)의 명문으로 된 ‘명도암김진용선생유허비(明道菴金晉鎔先生遺墟碑)’가 명도암오름에 건립되었다. 아늑한 분지를 이루며 병풍 구실을 하는 이들 오름들 가운데 칠오름은 마을의 북동쪽, 번영로에서 올라오는 간이 포장도로 동쪽에 길게 솔수평이 능선을 흘리고 누워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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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오등봉

詩(시)로 읽는 4․3(52)

어머님의 오등봉 양전형
누가 여기를 바람 길로 열어두었나
산과 산 사이 어둠 속
가벼워진 몸 휘휘 날았겠지
무자년 들녘 같은 어느 문전
창백한 얼굴 살며시 들었는데
어디라 고개 드느냐 너는 지금 바람이다
얼김에 한 목소리 얼얼하게 맞았겠지
날마다 오등봉 사잇길 눈감은 바람
무른 생선 같은 세월 풀어 던지며
사연은 살갑노라 둘둘 말아들고
어머니는 정처 없이 가도 가도 끝이 없네
달이 헐쭉한 밤 별 앞에 서면
아수라에 여윈 그 목숨 비추일까
늙어가는 누이의 창가에 기척이 들고
기다리던 그림자인 듯 아른거릴까
오등봉 침침한 굴 속
아직도 무자년인가봐
휑한 들녘에 시린 바람, 은결든 듯 이는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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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아라동의 오등마을은 옛 이름이 오드싱(오드승)이다. 이 마을에 있는 오름 이름도 오드싱오름이다. 오드싱오름은 오등마을과 정실마을의 중간, 농진청 시험장 북동쪽가까이에 가로누운 풀밭이름이다. 보통 한자명 오등봉(梧登峰)으로 불리며 옛지도에서는 오등악(吾等岳)․ 오등생악(吾等生岳), 또는 오봉악(梧鳳岳)이란 표기도 볼 수 있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두 줄기 계곡의 합수머리에 반원형으로 뚫린 거대한 암석이 커다란 아치를 이루고 있어 방선문(訪仙門)이라 일컬어진다. 조금 상류에 자리한 우선대(遇仙臺))라 불리는 큰 바위는 방선문과 함께 들렁귀의 명소로 이름나 있다. 영구춘화(瀛邱春花)는 영구십경 중의 한 명칭으로 조선시대 문인들이 십경(十景)에 각각 제(題)를 붙여지었던 것이다. 영주십경에 처음 제시를 한 것은 헌종때 제주목사(재임기간 1841~1843)로 있던 이원조(李源祚)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십경의 차례와 명칭을 엄격한 원칙에 따라 매기고 제시하여 정립한 것은 제주사람 매계(梅溪) 이한우(李漢雨)이다. 1948년 4월 3일 오드싱오름에 봉화가 올랐고 5․10선거 때는 거의 전주민이 열안지오름까지 올라 선거를 보이콧했다. 5월 8일,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하여 선거관리위원장과 대동청년단장의 가족 등을 학살한 사건은 주민들에게 충격을 몰고 왔다. 특히 6월 초순경 11연대 소속 9연대 1대대가 죽성 설새미에 주둔하게 되었다. 1948년 11월 7일 군인들은 오등리 전체 가옥에 대하여 불을 지르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피신했다. 1951년 오드싱을 중심으로 성을 쌓고 재건하면서 집단회생을 시작한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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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인-박춘옥

詩(시)로 읽는 4․3(51)

수형인-박춘옥
이창선

70여년의 한의 세월 눈물로 증언하는
한 거인 던진 한마디 4․3이 머우꽈?
죄 어신 똑똑한 사람 잡아당 다 죽였수게

두 살 난 아들대령 곳찌간 전주형무소
아픔과 고통 어떵 말로다 를 것꽈
그 설움 당해보지 않고 말로허영 몰라마씀

아방도 죽어불곡 고생허멍 살단 보난
그 아들 일흔셋 이 살암수다
4․3이 무언지도 모른 아흔 셋의 수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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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면 가시리 출신인 수형인 박춘옥(호적이름 박내은)은 두 살 이들과 함께 ‘1948년 군법회의’에 의해 수감되었다. 수형인명부에 의하면 그는 가시리가 본적이고 1948년 12월 28일 징역 1년을 언도 받고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되어있다. 그는 1948년 11월 11일(음력) 산에서 붙잡혔다. 의귀국민하교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귀포경찰서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전기고문과 ‘비행기’ 태우기 고문을 받았다. 제주경찰서로 옮겨질 때 친정어머니와 동생들은 풀려났고 어린 아들과 은 한 달이나 구금생활을 하고 전주형무소로 옮겨졌다. 4․3사건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군법회의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두 차례 실시되었다. 「군법회의 명령」에는 2530명(1948년 군법회의분 871명, 1949년 군법회의분 1,659명) 피고인 명부가 별첨되어 있다. 군법회의 대상자들은 서울․ 인천․ 대전․ 대구 전주․ 목포 등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어 재소자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1950년 6․25전쟁이 발생하자 각 형무소별 불순분자 처리방침에 따라 상당수가 총살 처리되었다. 일부는 옥문이 열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행방불명됨으로써 지금까지 생사를 모르고 있다. 「군법회의 명령」에 적혀진 1948년 군법회의분 871명의 군법회의 대상자들은 제주도에서 사형에 처해진 38명을 제외하고 각각 목포․ 마포․ 서대문․ 대구․ 인천․ 전주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여성들은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징역 15년 3명, 징역 5년 7명, 징역 1년 38명이다. 1949년 군법회의분 1,659명은 제주도에서 사살된 249명을 제외하고 각각 마포․ 대구․ 대전․ 목포․ 인천전주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여성들은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무기징역 3명, 징역 7년 21명, 징역 5년 13명, 징역 3년 25명, 징역 1년 22명 등 총 84명이다. 그들은 「구형법」 제77조(내란죄) 위반죄 또는 「국방경비법」 제32조(적에 대한 구원통신 연락죄), 제33조(간첩죄) 위반죄로 1년부터 20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군법회의는 그 근거법인 국방경비법 소정의 절차를 전혀 준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 제22조 “모든 국민은 법률의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에서 도출되는 문명국가의 재판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절차조차 갖추지 못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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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공간 혁신’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학교는 적절한 공간인가?

우리는 인생의 상당 부분을 학교에서 보낸다. 교육의 주인이 학생이라면 학교 공간의 주인도 학생이어야 한다.

아이들의 관점에서 아이들의 눈높이로 아이들의 생각을 반영해 아이들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학교 공간을 바꿔 나가는 것은 그 자체로 창의적이고 새로운 교육을 실천하는 일이다.

교육부가 학교 건축 공간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학교 공간 혁신’으로 재구성하는 사업에 손을 댔다. ‘학교시설 환경 개선 5개년 계획’을 세우고 교실 공간부터 혁신하기 시작했다. 책걸상이 놓인 전통적인 모습의 교실에서 벗어나 놀이 공간처럼 만들어진 미래형 학교 공간을 만드는 데 예산도 지원된다.

지금 학생들은 자유의지를 박탈당한 채 틀에 박힌 일과와 학사일정에 따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고 통제당하고 있다.

학교의 공간 구조는 비슷한 형태를 가진 교도소나 병영 등과 근본적으로 같은 공간 구성 방식이다. 직선으로 마주하는 복도, 신발장 등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학교의 모습이다. 네모난 교실, 고정된 책상으로 아이들을 가두고 있다.

학교의 설계도와 교도소의 설계도를 놓고 비교하니 어느 것이 학교이고 어느 것이 교도소인지 분간이 어렵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게 됐을까?

1960년대 이후 학생 수가 급증하면서 학교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효율적인 학교 설계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 결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학교의 전형적인 모습이 등장한 것이다. 또한 당시의 주입식 교육방식도 표준화된 학교 모습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학교마다 커다랗게 딸린 운동장은 군대 연병장에 대응된다. 학생들의 체육 활동 그 자체보다는 아침 조회 같은 이런저런 행사 때마다 전교생을 죄다 불러 모아 사열시키기 위한 공간이다. 그 때문에 학생들의 체육 활동에 있어서는 비효율적이다.

과거 우리는 군대의 연병장 같은 운동장에서 교장의 훈화를 들어야 했다. 과거 일제는 유사시 학생들을 군인으로 이용하려고 했고 군대의 공간 구조를 그대로 이식했다. 일제에 의한 국권 피탈로 한국의 교육은 일본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도구였다. 그 영향 때문일까? 일본은 우민정책(愚民政策)을 그들의 식민지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우리 사회는 제도로서의 학교가 왜 변해야 하는지를 잊은 채 어두운 망각 속에서 지난 한 세기를 보냈다. 일자형 건물,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교실 등으로 획일화된 공간은 학교를 지배하는 교육 이데올로기의 결과다. 학교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의 틀 안에서 아이들의 생각과 활동을 길들이기 위한 공간이었고 그 공간의 중심에 아이들이 없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모든 학교는 거의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네모난 건물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책상, 네모난 의자, 네모난 운동장, 네모난 놀이터 등. 네모난 곳에서 하루 대부분을 생활하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지는 곳이 학교라는 공간이다.

우리는 과거 한 쪽에 복도를 끼고 줄줄이 늘어선 교실에서 공부했다. 교단을 향해 빼곡히 들어찬 책걸상에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앉았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선 학생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선생님들. 권위적이고 획일화된 학교의 모습과 그 안에서 학생들이 겪는 억압과 통제는 서로 맞물려 있다.

교육의 민주화가 실현되면서 학교 교육의 변화, 그리고 학교 공간의 혁신을 이야기하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리고 학교 공간의 변화를 꾀하는 시도들이 이슈가 되고 있다. 또 건축 분야에서는 변화하는 교육 과정과 사용자에 맞춘 학교 공간 디자인의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위해 연구 중이고 교육 분야에서는 교육 철학의 기조를 세우고 이에 맞춰 학교 공간을 변화하려고 연구하고 있다.

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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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참회-고사리 반근

詩(시)로 읽는 4․3(50)

사월 참회-고사리 반근
김영숙

사월 들판에서 고사리를 꺾는 것은
미안한 사람 불러 사과하는 것이다
수백 번 허리를 꺾어 절을 하는 것이다

손끝에서 똑똑똑 온종일 꺾인 것은
푸른 나의 오만이다 종주먹 꼭 쥐고선
비벼도 흔적이 남는 고사리밥 같은 것

참선에 든 할미꽃 그 옆에서
사월의 내 참회는 손부리가 까맣다
봄 하루 노동의 댓가 자존심이 반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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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懺悔)는 자신이 범한 죄나 과오를 깨닫고 뉘우치는 일이다. ‘참(懺)’은 산스크리트의 ‘크샤마(kama)’가 원뜻으로 ‘인(忍)’을 의미한다. 실수를 뉘우치는 ‘회(悔)’와는 의미가 약간 다르지만, 점차로 ‘참’과 ‘회’가 동일시되어서 ‘참회’라는 말이 쓰였다. 불교에서는 포살(布薩) 및 자자(自恣)라고 불리는 참회법이 행해졌다. 포살은 보름에 한번 계본(戒本)을 외워 죄과의 수를 세고, 자기가 범한 죄가 있으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참회하고, 연장의 승려로부터 용서를 받는다. 자자는 안거(安居) 동안의 마지막 날에 승려들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며, 각자 참회·고백하는 방법이다. 가톨릭에서는 참회를 감정의 과장을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공식적인 용어로는 쓰지 않고 대신 ‘고해(告解)’ 또는 ‘고백(告白)’이라고 하여 성사(聖事)의 하나로 본다. 고백은 세례를 받은 자가 청죄(聽罪)의 자격을 가진 사제(司祭)에게 죄를 고백하여 용서를 받는 의식절차이다. 참회록은 자서전의 일종으로 자신이 지난날에 저지른 과오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대표적인 참회록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장 지퍼 루소, 레프 톨스토이의 것이 있다. 이 3개를 묶어 3대 참회록(또는 고백록)이라고 알려져 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하기 닷새 전에 「참회록」란 시를 썼다.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의 부끄러움, 반성과 성찰 등이 주제로 시를 읽다보면 저절로 마음이 슬퍼진다. 윤동주는 1월 29일에 창씨개명 계를 신고했다. 그런데 이 ‘1942년 1월 29일’이란 날짜는 반드시 그의 시 ‘참회록’이 쓰인 ‘1942년 1월 24일’이란 날짜와 연결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가 창씨개명 계를 신고한 날은 ‘참회록’을 쓴지 닷새만이다. 그 시기와 작품의 제목과 내용, 그리고 상황을 볼 때, 그가 ‘참회록을 씀으로써 자신의 감정과 각오를 일단 정리한 뒤에 연전에다 창씨개명 계를 신고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일본 유학을 결정하고 그걸 위해선 자신의 손으로 창씨개명 계를 신고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각오했을 때, 그 뼈아픈 욕됨으로 인해 쓰인 것이 ’참회록이다. 시인의 사월 참회는 고사리 반근이다. 고사리 반근이 그리 하찮은가? 수백 번 허리를 꺾어 수확하는 고사리 반근이야말로 바로 시인에게는 사월에 머리 숙이는 최상의 예절이다.(김관호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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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별곡

詩(시)로 읽는 4․3(49)

4․3 별곡
윤봉택

죽어 있음이 편안하였던 시절
이제 다시 살아 있음이
죄가 되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침묵 후에 말하려 하는 것은
그날의 고자질, 아픔, 총칼, 죽창이 아닙니다
묘비명 없이 시방도 저승길 가고 계실
나 설운님들에게 이승의 우리 이름으로
떠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일만 사천육백 일 동안 비겁하였던 거짓을
참회하려 함입니다
오 그리하여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되게 하려 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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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지난 시절 말하지 못한 금기(禁忌)의 시간을 참회한다. 그 말하지 못한 침묵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시인에게는 더 이상의 ‘고자질’이나 ‘아픔’으로 상징되는 ‘반목’이 아니다. 70여 년 간 4․3은 침묵, 금기, 왜곡에 포위돼있었다. 지금도 4․3은 ‘빨갱이 폭동’이라는 딱지가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 언론은 한국전쟁 이후 현대사에서 인명피해가 가장 컸던 4.3을 제대로 기사화하지 못하고 있다. 4․3은 제주만의 역사로 갇혀있다. ‘총칼’ ‘죽창’으로 상징되는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에게 4․3의 역사가 있은 후 < 일만 사천육백 일 동안> 참아 왔던 아픔의 역사를 말하지 못했던 거짓을 참회하는 행동이 된다. 시인은 참회라는 형식의 내적 성찰을 통해 더 이상 “나와 너”가 아닌 “우리”라는 삶의 공동체 틀에서 살아가고 싶음을 이야기한다. 역사적 아픔을 딛고 사랑으로 기인한 더불어 사는 삶의 모습이 제주인의 정신이며 제주문학에 나타나는 작가정신이다. 원래 금기는 종교적 관습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접촉이나 언급이 금지되는 일이다. 금지되는 것에는 행동과 말 양쪽이 포함된다. 터부(taboo,tabu)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구기(拘忌)’라고도 하며, 우리나라의 민속 현장에서는 ‘가리는 일’, ‘금하는 일’ 등으로 불리고 있으며, 더러는 ‘지키는 일’, ‘삼가는 일’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실제로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여서는 안 되고, 무엇인가에 근접하거나 손을 대어서는 안 되고, 무엇인가를 입에 올려서는 안 되고, 또 어느 대상을 보거나 들어서도 안 되는 것이 금기이다. 그렇다고 금기가 언제나 기피나 회피 쪽에 일방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정한 짓을 해서는 안 될 경우 부정에 빠지지 않게 목욕재계하는 것은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무엇인가를 하지 말라는 금령이 있을 경우, 하지 않음으로써 보장될 어느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행동하는 일이 우리의 민속 현장에서 쓰이고 있는 ‘지킴’이나 ‘가림’에는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속신앙에서 문제되는 ‘깨끗함’과 ‘더러움’, ‘청정(淸淨)’과 ‘부정’의 이원론적 대립을 두고 볼 때, 금기는 더러움이나 오염 또는 부정에 걸리지 않고, 청정·맑음·깨끗함을 보장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종교적 오염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금기이다. 부정을 타는 것은 오염이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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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詩(시)로 읽는 4․3(48)
달력
정일근

북제주군 찬 바람벽에 예수처럼 못 박힌 달력, 제주 이모 달력에는 4월이 없다

3월이 가면 4월이 오는데 4월이 가면 5월이 오는데 이모, 제주 이모의 달력에는 4월이 없다 3월과 5월 사이 4월이 없는 달력뿐이다

만화방창 4월에 닿아 꽃구경 한 번 못하고 뼛속까지 잔뜩 움츠렸다 3월에서 5월로 길게 훌쩍 건너가서는 뒤돌아보지도 않는 이모

예순 해 동안 4월이 없는 제주 이모의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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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주 이모의 달력에는 4월이 없을까? 왜 제주 이모의 가슴 속에서 4월을 지워 버렸을까? ‘인민항쟁 관계자를 즉시 석방하라!’ ‘최고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정권은 즉시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 파쇼분자의 능멸!’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기념 제주대회’가 열린 제주북초등학교 주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군중 수는 대략 2만 5천~3만 명. 1948년 4월 3일 새벽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올랐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제주4․3을 경험한 사람들은 말한다. 이념과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마구잡이로 죽여 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 총살은 기본으로, 비협조적인 사람이나 경찰과 군인의 가족들은 본보기로 참수형에 처했다. 연좌제를 적용한다며 친인척이나 면식이 있는 사람들을 공개처형했다. 손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육지 출신 군경이 직접 죽이지 않고 제주 사람으로 구성된 민보단을 이용해 사람들을 한라산에 몰아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살기 위해 한라산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사냥’하였고, 이들이 추위에 못 버텨 귀순하자 격리 수용하다가 한국전쟁의 발발로 이들을 학살하는 일도 있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을 모아두고 돌팔매질을 하게 린치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비학동산에서는 임산부를 나체로 팽나무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들의 잔인함에 대한 증언 중에는, 당시 폐허가 된 마을에서는 땅을 조금만 파도 시체가 마치 젓갈(멸치젓. 제주말로 ‘멜젯’) 담근 것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는 증언. ‘민간인’을 과녁으로 쓰는 서청이나 군대의 ‘사격장’이었던 제주섬. 심지어 일본군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영아 살해‘마저 있었다. 이를 수습하고 진압하려 한 14연대는, 자신들이 개입하기 전까지 살아남은 제주도의 거주자 대부분이 직간접적인 가해자라는 상황 속에 수습할 타이밍을 놓쳐, 보복성의 성격을 가진 여수사건으로 이어진다. 모든 학살은 1940년대, 1950년대의 섬에서 벌어졌다.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배가 몇 척 없을 정도로, 제주도는 거의 단절된 섬이었다. 그 시대에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몇 사람만 거치면 4촌 아래 혈족일 수준으로 외부 사람의 유입이 적을 텐데, 그곳에서 연좌제를 적용하여 잔인한 학살을 하였다. 그 학살의 시발점인 4․3사건. 그래서 제주 이모의 달력에는 4월을 영원히 지워야 했다.(작가․ 칼럼니스트 김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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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증인 큰넓궤

(시)로 읽는 4․3(47)
산 증인 큰넓궤
김순선

언제 난리가 끝날지 알 수 없지만
며칠만 꼭꼭 숨어 있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오순도순 버티던 동광리 사람들

눈 녹인 물을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보지만
한숨 소리 점점 깊어지고
쉬이 새벽은 오지 않고
인심은 점점 야박하여지고

끝내, 토벌대에 추적당한
큰넓궤 사람들
토벌대 무차별 총탄 앞에
허망하게 쓰러졌다

햇빛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허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캄캄한 동굴 속에서
무참히 매장되었다
영원한 무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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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 몇몇 지주와 관리들이 곡식을 매점매석하면서 쌀값이 폭등하자, 미군정은 공출제도를 부활시켰다. 1947년 8월 보리 공출을 독려하기 위해 관청 직원들이 동광리를 방문했다가 청년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했다. 미군정의 ‘미곡수집령’에 반대한 이 사건으로 청년 3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1948년 11월 15일 새벽, 토벌대는 주민들을 무등이왓에 집결시켰다. 마을 유지들을 추려내 밭에서 총살했다. 토벌대는 그해 12월 11일 청·장년 20여 명을 또 다시 학살했다. 큰넓궤 입구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지만 이곳을 지나면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다. 주민들은 큰넓궤로 숨어들었다. ‘궤’는 암반과 암반 사이의 공간, 천연동굴을 뜻한다. 주민 120여 명은 이곳에 은신하며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토벌대의 집요한 추적 끝에 굴 안으로 진입하자, 주민들은 이불에서 솜을 뜯어내 고춧가루를 뿌린 후 불을 붙여 매운 연기가 동굴 밖으로 나가도록 부채질을 했다. 토벌대는 굴 입구에 돌을 쌓아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은 후 철수했다. 다음날 청년들은 굴 입구에 쌓여 있는 돌을 치우고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한라산을 바라보며 무작정 산으로 들어갔다. 한라산 영실 인근 볼레오름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눈 위에 난 발자국을 보며 쫓아온 토벌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주민들은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에 있는 단추공장에 수용됐다. 주민들은 정방폭포로 끌려가 집단 총살을 당했다. 동광리 희생자는 큰넓궤에 숨어 있다가 정방폭포에서 총살당한 40여 명을 포함해 모두 153명에 이르고 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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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詩(시)로 읽는 4․3(46)

여자
문순자

지구에 오래 살면 저렇듯 둥굴어질까
온종일 해바라기 23.5도 그 만큼
어머니,
이끈 유모차
그도 슬몃 기운다

첫 남잔 징용으로 일본 간지 칠십년
두 번 짼 4․3 홧술로 세상 뜬 지 사십 년
체념도 용서도 아닌
하늘이라도 또 섬긴다

당신은 엄쟁이다
소금밭 일구던 여자
절에 가지 않아도 온몸으로 절을 한다
서너 평 돌염전에도
눈부시다 천일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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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남자는 징용으로 일본 가고, 두 번 째는 4․3홧술로 세상 뜨고, 어머니는 온몸으로 절을 하며 유모차를 끈다. 소금밭을 일구던 ‘엄쟁이’. 구엄을 비롯한 중엄과 신엄을 통틀어 속칭 ‘엄쟁이’라 한다. 소금 곧 ‘鹽’을 제조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 그만큼 마을 사람들에겐 소금을 만드는 일이 생업의 한 수단이었지만 1950년을 전후하여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구엄 포구 ‘철무지개’ 서쪽 ‘쇠머리코지’에서부터 중엄 마을과의 경계인 ‘옷여’까지가 소금밭이었다. 그 길이는 약 400m이고, 폭은 가장 넓은 곳이 50m이다. 소금밭은 공유수면상에 위치하여 지적도가 있을 수도 없지만 일정량 개인 소유가 인정되었으며, 매매도 이루어졌고 뭍의 밭에 비하여 값도 상당히 비쌌던 듯하다. 전통적인 밭나눔과 같이 4표(四標)로 구획하였다. 한 가정에 보통 20∼30평 정도의 소금밭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의 구엄리의 전체 염전 규모는 3000㎡에 가깝다. 연간 생산량은 17톤을 조금 넘겼다. 면적당 생산량은 19.4㎏으로 종달리의 3.7㎏보다 앞섰다. 일본은 많은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5월 5일부터 이를 실시하였다. 또한 1939년 국민징용령을 제정했다. 일본에 조선인 징용노무자가 파견 된 기간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3월까지 7개월간.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은 사할린 섬 등 일본의 탄광에서 노역을 당하거나 군속으로 차출되어 동남아와 남양 군도(미크로네시아) 지역의 군사 기지 건설이나 철도 공사에 동원되었다. 이중 상당수가 임금 없이 과중한 강제 노역에 시달렸으며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전쟁 중 또는 전후 전범으로 희생되었다. 해방이후는 4․3으로 영면한 사람들이 많다. 여자는 남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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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의 정치화’ 시대

‘교실의 정치화’ 시대
김관후/작가·칼럼니스트
선거 연령이 ‘만 18살’로 낮아졌다. ‘새내기 유권자’를 겨냥한 각 정당의 전략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만 18살’ 선거권은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키는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한국에서도 ‘교실의 정치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교실의 정치화는 우려할 일이 아니라 환영할 일이다. 교실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쳐야 성숙한 민주사회가 가능하다. 독일 사회가 세계에서 가장 수준 높은 정치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초등학교에서부터 정치교육, 즉 민주시민교육을 체계적으로 시행했기 때문이다.
선거권과 정당에 가입할 권리를 갖게 된 ‘만 18살’ 청소년들이 맨 처음 정의당의 정식 당원이 되었다는 소식이다. 그간 만 18세 이하 청소년들은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고, 정당 가입과 선거운동도 제한되는 등, 정치적 금치산자 취급을 받아왔다. 18세 선거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더 폭넓은 청소년 참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시발점이다.
한국 정치가 매우 낡았기 때문에 ‘만 18살’ 선거권 부여는 최소한의 조처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만 16살’까지 선거권을 부여하고, 피선거권도 20살 이하로 낮추는 노력을 21대 국회에서 기울여야 할 것이 아닌가? 이것은 너무 급진적인 생각인가? 어른들은 청소년을 미래라 부르지만, 청소년은 현재이기도 하다. 아동·청소년은 ‘보호와 배려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천부 인권의 주체로서 ‘현재의 시민(being citizen)’이다. ‘성장하는 시민(becoming citizen)’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시민’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시민이므로 당연히 시민으로 대우해야 한다. 아동·청소년 스스로 그들의 권리와 책임을 능동적,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통해, 이들이 공동체의 실질적 시민으로 성장하고 발달할 수 있는 인권 주체라는 인식도 보편화돼야 한다. 
‘정치적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은 ‘적극적 시민’이다. 이상적인 시민이 되려면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국민이 지도자를 뽑는 것은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다. 정치인을 길들이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
민주 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투표는 민주 사회의 주인이 되는 교육과 훈련이다. 우리나라에서 18세가 되면 주민등록증이 나온다. 운전면허증도 시험을 보면 발급받을 수 있다. 취직도 할 수 있다. 취직하면 세금도 내야하고. 또 18살부터 군대도 갈 수 있다. 병역의 의무, 납세의 의무, 노동의 의무, 이런 것들은 다 주면서 대표자를 뽑을 수 있는 권리인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과거 OECD나라 중에서 18세에 선거권이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했다. OECD 34개 회원국은 오스트리아(16세)를 포함해 모두 18세 아동·청소년에게 선거권을 부여하고 있다. 2016년까지 일본이 우리와 함께 19세 기준을 고집했으나, 2016년 6월 공직선거법을 개정해 18세로 낮췄다. 영국 노동당은 15세 이상이면 당원 자격을 부여한다. 정당 정치가 발달한 선진국의 예에 비추어 19세 미만의 국민을 일일이 통제하려는 ‘유모 국가(nanny state)’의 관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은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이다.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언제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를 다투고 있다. 단 한 번도 존엄한 인간으로 대우받은 적이 없다. 매년 5만~8만 명의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는 나라이다. 대한민국 100년의 과거를 돌아봐도 청소년은 행복한 적이 별로 없다.
왜 학교는 바뀌지 않았을까? 그것은 학생들에게 투표, 그 ‘종이 한 장’이 없어서이다. 정치인들은 표를 먹고 산다. 표가 없는 청소년들에 대해서는 등한시했다. 지역의 여러 가지 복지 문제가 있는데 그 중에 노인 문제나 여성 문제, 장애인 문제는 아주 빠르게 좋아지고 있다. 그런데 청소년들이 뭘 요구하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공부나 하지’ 라고 했었다. 역사적으로 일제강점기의 광주학생운동은 물론, 당시 18세 학생이었던 3·1운동의 유관순 열사를 생각해 보라. (제주일보 승인 2020.02.10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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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븐숭이 세 남매

詩(시)로 읽는 4․3(45)
너븐숭이 세 남매
오광석

세 남매와 희미해진 흔적을 따라 학교로 걷습니다 큰 아이 둘은 스마트폰 게임 얘기에 빠져있습니다 막둥이는 안아달라고 칭얼거립니다 검은 구름이 북촌 하늘을 덮을 때 세 남매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서로의 손을 잡습니다

비를 맞으며 너븐숭이로 걸었어 어린 세 남매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놓쳐 살 자리로 가지 못했지 천둥소리가 총포처럼 들렸어 우는 동생을 안고 번쩍이는 불빛에 누나는 눈을 감았지 무섭고 추운 겨울 홀로 울던 막둥이는 소나무 밑에 부들부들 떨다 누워 잠들었어

하늘에서도 같이 살라고 너븐숭이 아래에 세 남매는 나란히 누워있습니다 어미가 맨손으로 쌓은 돌무더기 위에는 말라버린 눈물자국만 패여 있습니다 가장 작은 무덤 앞에 장난감 하나 올립니다 큰 아이 둘의 표정엔 엄숙함이 담겨있습니다 가슴에 안겨 잠든 막둥이 얼굴에 웃음이 가득합니다
————————————————————————————————— 1948년 6월 우도에서 출발, 제주항으로 가던 배가 풍랑으로 북촌포구로 뱃머리를 돌렸다. 이 배에는 우도지서장과 경찰 가족 13명이 타고 있었다. 배가 포구에 접근하자 무장대가 경찰 2명을 죽였다. 1948년 12월 냉이가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낸시빌레’에선 북촌리 청년 24명이 총선거 불참을 이유로 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949년 1월 17일 아침. 구좌 세화리 주둔 2연대 3대대(대대장 정준철 소령) 중대 병력 일부가 대대본부가 있는 함덕으로 가던 중 북촌마을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2명이 숨졌다. 마을에서 군인이 사망하자 당황한 원로들은 시신을 들것에 실어 함덕 주둔부대로 찾아갔다. 군인들은 스스로 찾아간 10명의 연로한 주민 가운데 경찰가족 1명을 제외해 모두 총살해 버렸다. 이날 오전 11시쯤. 2개 소대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쳤다. 군인들은 주민들이 숨어있을 곳을 샅샅이 뒤지면서 590여 채의 가옥에 불을 질렀다. 모든 주민은 북촌초등학교로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학교운동장을 에워싼 군인들은 기관총을 세 방향에서 겨냥해 주민들의 도주를 차단했다. 한 장교가 제안을 했다. “입대한 후에도 적을 사살하지 못한 사병들이 있다. 경험도 쌓을 겸 몇 명씩 끌고나가 총살을 시키자.” 주민들은 30명씩 나눠 동쪽의 당팟밭과 오목하게 쏙 들어간 옴팡밭, 서쪽의 들녘인 너븐숭이로 끌려갔다. 학살극은 오후 4시쯤 대대장의 중지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됐다. 대대장의 명령대로 함덕 피난소로 간 100여 명 중 25명은 빨갱이 가족이라며 서우봉 인근 모래밭으로 끌려가 처형됐다. 한날한시에 남녀노소 4백여 명 이상이 한꺼번에 희생되었다. 마을 단위로도 최대 피해 마을로 기록됐다. 그날 이후 북촌리는 무남촌(無男村)이 됐다. 음력 섣달 열 여드렛날이 돌아오면 마을에선 숨죽인 곡성이 터져 나왔다. 4·3 북촌리 학살 때 숨진 어린아이들의 주검은 임시 매장한 상태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20여기의 애기무덤 중 적어도 8기 이상이 북촌리 학살 때 숨진 어린이들의 무덤이라고 한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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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바다

詩(시)로 읽는 4․3(44)

제주 바다
도종환

당신은 이곳에 오시어 꽃 피는 시절만 보고 가십니다
복숭앗빛 노을 속에 뜬 새 한 마리 기억만을 담아가십니다.
발끝 잔물을 적시며 나누던 아름다운 이야기들의
추억만으로 오늘로 또 이곳에 오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비명과 총소리 이 갯가에 가득하던 때의
저녁 비린내를 알지 못하십니다.
먹구름에 쫓겨 황급히 달아난 사람들 생각에
산 그늘진 마을 한 쪽을 모르십니다
당신은 언 발을 구르며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던
우리들 피 묻은 추억을 생각지 못하십니다

불덩이로 솟았다 지금은 가슴 곳곳 구멍이 뚫린 채 식어 있는 돌멩이들처럼
아직 우리의 가슴은 메워지지 않는 채 이 바닷가에 쓰러져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무엇이 섞어서 이곳에 꽃 한 송이를 키우는가 생각합니다
무엇이 살아 저렇게 이파리들 몸서리치게 흔들고 있는지 생각합니다
오늘도 밤새가 울어머니 내 나잇적 똑같은 소리로 우는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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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은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을 만나는 일이다. 다크투어리즘이란 전쟁이나 학살 등 잔혹한 사건이 일어났던 역사적 장소나 재난과 재해 현장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는 것이다. 대표적인 다크투어리즘 장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약 400만 명이 학살당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다. 사람들은 왜 가슴 아픈 역사를 기억하려 할까? 그것은 과거의 비극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하는 것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서대문 형무소도 대표적인 다크투어리즘 장소 중 하나다. 제주도는 한라산과 360여 개 오름, 신비한 용암동굴, 곡선이 이름다운 돌담, 그리고 멋진 풍격이 있는 올레 길로 인해 대개 ‘천혜의 관광지’라는 데 시선이 멈춰 있다. 하지만 제주도는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곳이 아니다. 우리 현대사의 아픈 흔적들이 있다. 아름다운 제주도, 그런 제주도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속내는 너무 처절하다. 제주섬을 찾은 관광객들은 처음 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곳이 4․3 당시 참혹한 학살터였음을 모른다. 제주도의 이름다운 풍광이 깃든 곳곳은 4․3 당시 학살터였음을 아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다. 4․3평화공원, 섯알오름학살터, 북촌너븐숭이, 표선해수욕장, 정방폭포, 제주국제공항, 그리고 터진목학살터 등. 노벨문학살 수상작가 르 클레지오(Gustave Le Clezio)는 터진목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피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저마다 사연이 있다.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자연과 문화를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내 여행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특히, 스토리텔링 기법을 이용하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화재나 자연이 비록 적다하더라도 여행자의 상상력을 불러내 실재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큰 감동과 느낌을 준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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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그늘, 둥글게 말아-자리왓에서

詩(시)로 읽는 4․3(43)

낭그늘, 둥글게 말아-자리왓에서
김병심

오래전 먼저 떠난 어미처럼
4․3난리통, 땅바닥 떨어진 마을 포대기에 들쳐 업고
아직 안 끝나신가 마을 밖 기울 거리던 팽나무

강씨, 문씨 집성촌이
나뭇가지 잘라 지팡이 선물한 오랜 친구 왕 할아버지 서당까지도
양배추 밭으로 청보리 밭으로 갈아엎어졌어

어디선가 몹쓸 바람이 분 거여
난리가 다시 처진 모양이여

인기척 끊긴 마을
산담 너머 더욱 숨죽이는 목소리
누가 들을까 나지막이 엎드린 봉분들

자식새끼마저 깃들지 않는 올레가 무슨 소용이냐
자리왓 마지막 생존자
어머니 따라 서둘러 떠난 길
붉디붉은 땡볕 황토길
배웅 나온 팽나무
두 손 둥글게 말아 아버지 머리에 월계관 씌워 주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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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왓은 애월읍 어도2구의 자연마을이다. 남평문씨 일가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한 이래 30여 가호(家戶)에 150여 주민들이 살던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었다. 마을 가운데 신명서당이 있어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어도2구는 열루왓, 자리왓, 고도리왓, 몰팟, 상수모를, 화전동의 7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마을 촌장들이 자리왓 팽나무 아래 모여서 대소사(大小事)를 의논하며 살던 마을이었다. 1948년 11월 23일~25일 3일간 소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은 폐허로 변했다. 주민들은 마을이 재건된 후에도 어도1구에 대다수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 자리왓은 현재 <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있다. 당시 지리왓 중심지였던 왕돌 거리에는 큰 팽나무가 남아있고, 곳곳에 좁고 구불구불한 올레터와 집터 흔적임을 말해주는 대밭들이 남았다. 주민들은 봉성리 입구 신명동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한 후 자리왓 등으로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애월농협 봉성지점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들어서면 갈림길이 나오고, 남서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팽나무가 있는 왕동거리가 나타난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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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뻐꾸기

한라산 뻐꾸기
고정국

한라산 잡목 숲에 텃새 한 마리 숨어서 산다
외가댁 대물림에 늙어서도 목청이 고운
사삼 때 청상이 됐던 올해 칠순 이모가 산다

산이 산을 막고 무심이 무심을 불러
해마다 뻐꾸기 소리 제삼자처럼 듣고 있지만
이모님 원통한 숲엔 오뉴월 서리도 내렸으리

반백년 나앉은 산은 등신처럼 말이 없고
“꺼꾹 꺼꾹 꺼꾹 꺼꾹” 숨어 우는 우리 이모
간곡히 제주사투리로 되레 나를 타이르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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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광풍이 불어 닥친 섬. 주민들은 대나무 마디가 타는 소리에도 놀라 숨어들고, 남편시신을 수습하던 아낙은 하늘만 쳐다본다. 또 남편과 아들을 잃은 아낙은 ‘홋설허민 추물락추물락’하고 아낙은 산부대의 습격을 막으려 순번제로 ‘입초 사멍’ 살았다.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입성한 시인은 그의 시조 인생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과연 무엇일까? 결국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한마디는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치열함이다. 아아, 시인이 전하는 “꺼꾹 꺼꾹 꺼꾹” 숨어 우는 ‘우리 이모’가 되레 제주사투리로 시인을 타이르신다고 했다. 4․3때 청상(靑孀)이 된 여인이 어찌 이모뿐이겠는가? ‘청상과부’를 줄여 청상이라 한다. 청상과부는 젊어서 과부가 된 여인이다. 살아남은 여인들은 ‘연좌제’와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등 온갖 치욕과 분노, 좌절과 체념을 겪어야 했다. 4·3학살극은 허무주의와 패배주의를 심어주었고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을 크게 변화·왜곡시켰다. 예로부터 제주의 어른들은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 보면 살게 된다)”고 위로했다. 그 사태에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로 살아온 많은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겪어 온 기막힌 세월을 털어놓은 후엔 대개 “살암시난 살아지더라(살다 보니까 살게 되었다)”는 말로 자신을 위로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좌절하지 않고 남편을 떠나보낸 사실에 절망하지 않으면서 군·경 토벌대의 방화로 깡그리 불에 타버린 마을을 여린 손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고 제주공동체를 복원시켰다. 시인은 젊은 시절 제주가 아닌 전라남도 소안도, 당사도를 자주 들렀다. 한 달에 한 번씩 다른 지역에 머무는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고향 제주가 아닌 바다 건너 낯선 섬까지 간 이유에 대해 “수평선은 나에게 절망이며 감옥이었던 것. 그 한계선을 넘기 위해, 제주를 떠나 전라도의 끝 섬 당사도 민박집에 노트북을 켰다. 그런데 이곳 수평선은 더 슬픈 시선으로 다가와 어느새 나의 친구가 되려 한다”고 이야기 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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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흘곶 답답한 굴속

詩(시)로 읽는 4․3(41)
선흘곶 답답한 굴속
김석교

선흘곶 목시물굴 캄캄한 죽음의 냄새
눈을 감아도 보인다, 귀를 막아도 들린다
안개 속처럼 흐릿한 세월 시간도 이곳은 비껴간다

굴 밖으로 끌려나온 사람들 무릎 꿇린 채 총살당하고
굴속에 몸 숨겼던 사람들 수류탄 터져 목숨 끊기고
여자들과 아이들 북촌리 억수동까지 끌려가
따르르륵 기관총 맞아 몰살당하고
노인들 또 잡혀가 고문당하고

봄꽃들 앞 다투며 피는 이 4월에
죽음의 그림자 서성거리는 선흘곶에 오면
새들의 지저귐도 피 토하는 울부짖음이지
가지마다 움트는 생명의 붓순도 총알로 보이지

죽은 자들 말이 없고, 죽인 자들 미쳐 날뛰는
이 4월, 선흘곶에만 오면 목시물굴에만 오면
그 날의 생지옥이 나를 휘감아 나는 그만 미쳐 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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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20일 선흘리가 불타버리자 주민들은 선흘곶의 자연동굴에 숨어들거나 들판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도톨굴, 목시물굴, 벤벵듸굴, 대섭이굴 등지에 숨어있던 주민들은 토벌대에 의해 발견되고 수십 명이 희생되었다. 해변마을로 내려간 주민이나 야산에 은신했다가 붙들려 온 주민들 중에도 도피자가족 등의 갖은 이유로 희생을 당한다. 일부 주민은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갔고, 그들 중 다수 주민들은 서우봉이나 북촌리 억물 등지에서 총살당한다. 또한 소개령에 따라 함덕, 조천 등지로 피난 간 주민들도 도피자 가족이란 이유로 함덕리 모래밭 등지에서 많은 희생을 치룬다. 1949년 봄이 되자 주민들은 낙선동에 성을 쌓고 집단 거주했다. 이러한 돌성은 산간마을은 물론 해변마을까지 무장대의 습격을 방비(防備)한다는 명분으로 대부분 마을에 축성을 했다. 주민들과 유격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촌의 한 유형이었다. 축성작업은 주민들을 동원해 이루어졌다. 성을 쌓는 작업은 주둔소를 쌓는 작업보다 오히려 더욱 힘든 일이었다. 해안 마을로 피난 갔거나 감금됐던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한 축성 작업은 1949년 봄 한 달 동안 계속됐다. 낮에는 경찰의 감시 하에 성을 쌓았다. 그리고 어두워지면 함덕으로 내려가자고, 다시 아침이면 낙선동에 성을 쌓으러 오는 생활을 한 달 정도 했다. 1949년 4월 성이 완공되자 선흘리 주민들은 겨우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짓고 집단적으로 살았다. 일종의 수용소나 마찬가지였다. 성 밖 출입도 통행증을 받아야 가능했고 밤에는 통행금지였다. 이 당시 마을 주민 중 젊은 남자들은 무장대 동조세력이나 도피자가족으로 몰려 이미 많은 희생을 치른 상태였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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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보수’는 어디에 있는가

김관후/작가·칼럼니스트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가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 진보주의자는 보수주의가 편견과 미신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이들이 계몽되기만 하면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보수주의자가 더 관용적이다.” 하버드 대학의 보수주의 정치철학자인 하비 맨스필드(Harvey Mansfield)의 말이다.
우리 주위에는 여러 형태의 보수가 존재한다. 어느 작가의 지적처럼 글 보수, 입 보수, 생활 보수, 교회 보수, 게릴라 보수, 생계형 보수 등 널려있다. 보수언론에 이름을 날리는 ‘글 보수’를 볼 때 낯 뜨거움을 느끼며, TV에 출연해 보수정당의 편을 드는 ‘입 보수’를 볼 때 낯간지러움을 느낀다.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보수 세력은 갈피를 못 잡는다. 보수주의라는 정치이념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보수는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무능, 부패, 내분, 지도력 상실 등 모든 패인이 한꺼번에 노출되면서 자멸한 보수의 민낯은 처량하기만 하다.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듭된 보수의 오판과 실수는 사람들의 마음에 정치 혐오를 불러일으켰고, 정권을 되찾고자 하는 그들의 염원도 끝내 실패를 거듭하고 말았다. 우리는 보수 정치의 미숙한 실체를 발견하고는 분노를 넘어 참담함을 느껴야 했다.
‘진짜 보수’는 보이지 않고 온통 ‘가짜 보수’가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현실은 참혹할 따름이다. 진짜 보수는 어디에 있는가? 대한민국에 더는 보수라는 가치가 자리할 수 없도록 만드는 ‘가짜 보수’에게 진짜 보수주의자들은 분노하고 있다. 
‘아스팔트 우파’ 또는 ‘태극기 부대’라고 불리던 소수의 수구세력이 박근혜 정부 시절을 거치며 ‘관제 데모’ 지원에 힘입어 세력을 키웠다. 이들 단체들은 성소수자와 난민,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혐오 발언을 일삼고 평화로운 대중 집회를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초등학교, 맹학교 학생들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보수의 품격은 존재하지 않고 ‘가짜 보수’의 난동만 넘쳐 나는 현실 속에서 ‘진짜 보수의 품격’은 대체 어디에 존재할까? 법과 원칙, 그리고 국가의 안위를 누구보다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는 보수가 이 모든 것을 부정하면 ‘진짜 보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도 거리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까지 흔들며 서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가짜 보수주의 횡포에 수십 년을 시달렸다. 보수가 진보 좌파와 다른 것은 아량과 포용, 관용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허점투성이 생물체여서 실수나 일탈(逸脫)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서로 너그럽게 감싸 안고 가야 한다고 믿는 게 보수 철학의 핵심이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보수의 색깔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반공·친미(親美)만 보수가 아니다. 이승만·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을 보수의 적으로 돌리는 것도 단편적이다. 이제 보수가 진짜 제 얼굴을 찾지 못하면 갈수록 무너질 수밖에 없다.
보통 부유한 계층일수록, 그리고 부강한 국가일수록 현상 유지를 바라는 성향이 강해 보수적일 수 있다. 이는 좌·우파 분류법과는 또 다르다. 좌파든 우파든 일단 기득권에 올라서 있다면 당연히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자연히 보수화하기 쉽다. 한국에도 본래적 의미의 보수가 존재할까. ‘가짜 보수’ 말고 ‘진짜 보수’ 말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자칭 보수주의자는 득실거린다. 하지만 보수 활동가는 별로 없다.
우리는 격동의 정치 시대 보내고 있다. 근래 정치는 광장에서 시작해서 다시 광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들 현재 보수에 대해 고민을 하고 새로운 보수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보수당이 창당하는 가운데 보수는 무엇일까 고민하게 만든다.
“보수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미지의 것보다는 익숙한 것을, 시도된 적이 없는 것보다는 시도해본 것을, 신비로운 것보다는 사실을, 무한한 것보다는 제한된 것을, 멀리 있는 것보다는 가까이 있는 것을, 유토피아적 축복보다는 현재의 웃음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영국 보수주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오크숏(Oakeshott)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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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천 할머니 – 월령리 진아영

詩(시)로 읽는 4․3(40)

무명천 할머니 – 월령리 진아영
허영선

한 여자가 울담 아래 쪼그려 있네
손바닥 선인장처럼 앉아 있네
희디 흰 무명천 턱을 싸맨 채

울음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울음이 되는
그녀, 끅끅 막힌 목젖의 음운 나는 알 수 없네
가슴뼈로 후둑이는 그녀의 울음 난 알 수 없네
무자년 그날, 살려고 후다닥 내달린 밭담 안에서
누가 날렸는지 모를
날카로운 한발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턱
당해보지 않은 나는 알 수가 없네
그 고통 속에 허구한 밤 뒤채이는
어둠을 본 적 없는 나는 알 수 없네
링거를 맞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
그녀 몸의 소리를

모든 말은 부호처럼 날아가 비명횡사하고
모든 꿈은 먼 바다로 가 꽂히고
어둠이 깊을수록 통증은 깊어지네
홀로 헛것들과 싸우며 새벽을 기다리던
그래 본 적 없는 나는
그 깊은 고통을 진정 알 길 없네
그녀 딛는 곳마다 헛딛는 말들을 할 수 있다고
바다 새가 꾸륵대고 있네
지금 대명천지 훌훌 자물쇠 벗기는
베롱한 세상
한 세상 왔다지만
꽁꽁 자물쇠 채운 문전에서
한 여자가 슬픈 눈 비린 저녁놀에 얼굴 묻네
오늘도 희디흰 무명천 받치고
울담 아래 앉아 있네
한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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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진아영(秦雅英) 할머니(1914~2004)는 4·3사건의 생존 희생자였다. 1914년 태어나 한경면 판포리에서 평범한 삶을 살다가, 1949년1월 12일 신원 불상의 토벌대가 발사한 총에 맞았다. 이 때 그녀의 나이 36세. 그 후 얼굴에 무명천을 두르고 다닌다 해서 ‘무명천 할머니’라 불렸다.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한림 주둔 2연대와 한림지서 경찰들에 의한 토벌이 이뤄졌다. 1949년 1월 12일 판포리에 군경토벌대가 들이닥쳤다. 할머니는 총격으로 턱을 맞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아래턱을 완전히 잃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언니와 사촌들이 살던 월령리로 이주했다. 할머니는 바닷가에서 톳을 캐다 팔고 이웃들의 농사를 도우며 약값을 벌고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제대로 씹을 수 없었다. 위장병과 영양실조로 평생 고통 받았다. 결혼도 못 하고, 자식도 갖지 못한 할머니는 성이시돌 요양원에서 2004년 9월 8일,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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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근 해불근

詩(시)로 읽는 4․3(39)
산불근 해불근
강덕환

곱으라, 곱으라 소리칠 새도 없이
살려줍서, 살려줍서 바짓가랑이 잡는 애원도
허공중에 흩어지던 기축년 정월 열엿새
굴 밖으로 끌어낸 스무 남은 사람들
다르르륵 파앙팡팡
새가 되어 날아갔네, 억새가 되어 박혔네
한 톨의 씨도 남겨선 안 된다
담돌에 매다 쳐버린 그 물애기는
날아갔을까, 박혔을까

산불근 해불근의 중산간
잊은 것 같지만, 사라진 것 같지만
상처의 그루터기를 견딘 억새의 촉수
날을 세우고 날을 세우고 빌레를 뚫어 움튼다,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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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면 어음리는 한라산 서북쪽 ‘어림비’ 평원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이다. 4·3 당시에는 어음리라는 하나의 행정단위였고, 그 안에 비매니(夫面洞), 닭우영(鷄園洞), 너산밧, 큰동네, 섯동네, 고지우영, 송아물, 사낭굴 등 자연마을들이 모여 있었다. 주민들은 무장대 요구에 따라 ‘왓샤시위’를 했고 식량을 거둬 올려 보냈다. 청년들 중에는 무장대원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낮에는 토벌대 세상, 밤에는 무장대 세상’이었다. 1948년 11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일안에 소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봉성리 구몰동이 무장대에 습격당한 뒷날인 1949년 1월 16일, 토벌대와 민보단이 합동으로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여 빌레못굴을 발견했다. 빌레못굴 총살극은 가족 중 청년이 입산한 소위 ‘도피자가족’이거나, 토벌대의 주목을 받게 된 사람들이 숨어 지내다 굴이 발각되는 바람에 집단 총살된 사건이다. ‘난리 때는 산불을 해불근(山不近 海不近) 하라’든가, ‘30여 명이 능히 숨어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말이 마을에 퍼져 있었다. 산불근 해불근, 산(무장대)에도 가까이 하기 어렵고 바다(토벌대)에도 가까이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빌레못굴은 총 길이 11,749m로 용암굴로는 세계 최장이라 하여 천연기념물 342호로 지정돼 있다. 겨우 한사람이 들어갈 만큼의 좁은 입구를 바위가 막고 있었다. 굴의 온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김이 연기처럼 피어오르지만, 주민들은 인근에 산재해 있는 작은 ‘궤’ 정도로 알았지 그처럼 큰 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아무튼 1949년 1월 16일 굴이 발각됐고 진압군은 그 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총살했다. 특히 이 때 경찰이 서너 살 난 어린이들의 다리를 잡아 머리를 바위에 메쳐 죽였다는 이야기는 진압작전에 동원됐던 민보단원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처절함의 상징으로 인근에 회자(膾炙)되고 있었다. 입구가 좁아 잘 눈에 띄지 않는 굴이 어떻게 발각됐으며, 굴 안으로 깊이 도망쳤다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모두가 잡혀 죽었을까. 굴속에는 어음리 주민 뿐 아니라 납읍리, 장전리, 상귀리 등 인근 주민들도 다수 끼어 있었다. 대부분 난리를 피해 숨었던 주민들이었지만, 진압군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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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어디를 다녀왔는가

만세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너무 서늘했다. 섬뜩했다. 급히 신발을 꿰고 밖으로 살금살금 나왔다. 골목길에 사람들이 주섬주섬 모여 있었고, 만세소리는 드높았다. 그 소리가 귀청을 흔들며, 가슴 속에 멍울처럼 박혔다.
물론 해방되는 날에도 동무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만세를 불렀다. 그 때는 얼마나 신이 났던가. 나라를 찾았다는데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는 광경은 그것이 아니었다. ‘인민공화국 만세!’, ‘만세!’, ‘만세’ 하고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대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노랫소리도 들렸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 죽음을 슬퍼 말아라. 조국의 자유를 팔려는 원수. 무찔러 나가자 인민유격대.
무서운 생각이 들어 집안으로 급히 뛰어 들었다.
“아버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어요. 저도 나가 볼까요?”
“나가지 말고 가만히 집에 있어라. 옛날 난리 때에도 집에 있는 사람은 살았다. 밖에 나가면 모조리 잡아다가 싸움터로 보낸다.”
멀리서 들리는 노랫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날아가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울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평생 석 자 살아있다.
세상이 어수선하게 변하고 있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만세소리와 노랫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식구들은 옴짝도 않고 방구석을 지키며 밖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문틈으로 동네 공기를 살피며 마음을 조아리다가, 식구들 몰래 살금살금 골목길로 다시 빠져나왔다.
내 나이 지금 열여덟. 몸이 근질근질하여 집 안에 처박힐 때가 아니다. 작은 보폭으로 동네를 거의 한 바퀴 돌았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긴 칼을 차고 구구식 총을 멘 사나이가 내 앞으로 다가섰다.
그 총은 왜놈들이 사용하던 총이다.
“야! 젊은 동무! 너 거기에 서!”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소리를 지르며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뒤로 다른 사나이들도 여럿이 서 있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그 자리를 피하려고 뒷걸음질을 쳤다.
“너 도망가려고 하지?”
한 사나이가 다가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나이들은 나를 마을 공회당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낯익은 동무들도 여럿이 있었다.
“동무들! 앞으로 우리들 명령에 따라야 한다. 우리들은 산에서 내려왔다. 만일 경찰이 보이면 우리에게 즉시 연락해야 한다”.
동무들은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 날은 잠깐 조사만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선거일이 가까워오자 사람들이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선거를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에 사람들이 동조하고 나섰다. 우리 식구들도 마을사람들을 뒤따랐다. 마을이 가까운 숨비기오름 동굴과 그 주위 곶자왈로 숨어들었다. 어린아이까지 동굴 안으로 들어갔으니 울음소리가 문제였다. 토벌대에게 발견되는 것이 두려워 불도 켜지 못하고, 연기 때문에 어른들은 담배도 피울 수 없었다.
며칠을 동굴에서 지내고 선거가 끝나는 날짜에 맞추어 사람들은 마을로 내려왔다.
저녁이 되자 동구 밖에서 또 총소리도 들렸다. 아랫마을에서 토벌대 수 명이 총을 쏘면서 마을에 들이닥쳤다. 사람들은 짐을 싸들고 다시 산으로 도망가고, 몇 사람은 총에 맞아 쓰러지기도 하였다. 멀리서 미군장교가 색안경에 파이프를 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물꾸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폭도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
토벌대원이 소리를 질렀다.
“집에 있어서 모릅니다.”
누군가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짓말을 하면 천벌을 받는다.”
토벌대원들은 의심된다며 몇 사람을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밤이 깊어지자, 이번에는 산사람들이 마을지서를 습격하고 지서에 불을 질렀다.
낮에 토벌대원들이 난리를 피우면 밤이면 산사람들이 나타났다.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오돌오돌 떨고만 있었다. 세 사람 이상만 모이면 무허가집회를 가졌다고 지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밭에 농사를 지으러 나가지도 못하고, 산사람도 무섭고 경찰관도 군인도 무섭고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빨간 깃발을 흔들면 경찰이 올라온다고, 하얀 깃발을 흔들면 경찰이 내려간다고 신호체계도 산사람들이 알려주었다.
나는 밖의 동태를 살피며 살아야 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다시 마을로 들이닥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군 지휘관이 미군 지프에 몸을 실어 졸병들을 이끌고 도착한 날도, 분명 날선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그 사나운 울림은 마을이 군인 습격을 받았다는 신호이기도 하였다. 너희들은 꼼짝 말고 동구 밖으로 손들고 나오라는, 거센 명령이 떨어졌다.
초토화 작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토벌대는 산사람을 차단하기 위하여 중산간마을부터 들쑤셨다. 중산간 마을은 불바다가 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아우성을 질렀다. 그 난리를 피하여 마을사람들은 피난을 가기 위하여 집집마다 등에 먹을거리를 짊어지고 다시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어린 동생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뒤따랐다. 어머니는 주먹밥을 등에 짊어지고 아버지는 동생을 등에 업었다. 마을과 가까운 송아지동산에 가보니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웠다.
며칠을 산에서 지내면서 사람들은 마을 동태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벌써 토벌대가 청년 몇 사람을 잡아갔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 때부터 사람들 사이에는 좌익 그리고 우익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우익은 경찰이고 좌익은 우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다시 사람들이 마을로 내려왔지만 집들을 잿더미로 변하여 몸을 의지할 데가 없었다. 산에서 총을 메고 죽창을 든 산사람들이 내려왔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기들 편이 되어야 한다며 윽박질렀다. 마을 벽보에는 삐라가 붙여져 있었다. 여러분에게 어려움과 불행을 가져다 준 미제와 그 앞잡이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는 궐기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우리들을 원호하고 우리들과 함께 조국과 인민이 이끄는 길로 결연히 떨쳐 일어서 행진합시다.
사람들은 어느 쪽에 서야할지 분간을 할 수 없어 우왕자왕하였다.
토벌대원들이 마을을 박살내기 시작하자 산으로 오르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다시 밤이 깊었다. 총소리도 그쳤다. 아우성도 멀어졌다. 군인들이 물러난 낌새를 알아차리고, 마을사람들은 불길이 휩쓸고 간 동네로 다시 살금살금 내려왔다. 집들은 타버리고 재만 남았다. 불타 버린 집 마당으로 황소바람이 거세게 불어대고 있었다. 자오록하게 피어오르던 연기가 흐릿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우리 식구들도 부엌이 있던 자리를 찾아 먹을 것을 찾으려고 뒤적거렸다.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무쇠 솥까지 나뒹굴었다. 다시 숨어들어 갈 준비도 해야 했다. 토벌대는 분명 다시 마을을 덮칠 것이다. 갈 곳이라고는 가까운 굴뿐이다.
다음 날 새벽 사이렌이 또 울렸다. 사람들이 숨어 들어간 터진궤를 향하여 총소리가 요란하였다.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고, 와들와들 떨기만 하였다. 들키는 날에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서 샛별이 오들오들 떨고 있던 시간이다. 따르르르, 총소리가 요란하게 이어졌다. 굴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 때 굴에서 죽은 사람이 아마 아흔 사람이 넘었을 것이다. 총소리가 그치고 토벌대가 떠난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도 터진궤에서 죽었다. 사람들은 남은 식구들은 구덩이를 파서 시신들을 임시로 묻고, 나무에다 이름들을 적어두었다.

섬 전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중산간마을에는 소개령이 내려졌다. 해변 마을에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피난을 갔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산에 있는 토굴이나 동굴 등지에 다시 숨어 들어갔다. 우리 식구들은 한림 마을에 사는 고모 댁에 임시 거처를 정했다. 살기가 힘든 세상이었다.
나는 입에 풀칠이나 하려고 그래도 안전하다는 제주시 숙부 댁으로 향했다. 고향 마을을 떠나 중엄 가까운 곳에 도착하니, 고향 마을 쪽 하늘이 연기로 뒤 덮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중엄마을 쪽에 이르니 누가 등 뒤에서 큰소리를 쳤다.
“어디 가는 놈이냐? 너 산에 연락을 갔다 오는 길이지?”
“아닙니다. 저는 집이 중산간인데 제주시에 있는 숙부댁에 갑니다.”
순경은 눈을 부라렸다.
“바른 말 하지 않으면 쏘아버리겠다.”
순경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수십 명이 총살을 당해 스러져 있었다.
“이 자식아! 빨리 가!”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 순경은 한참 발길질을 하고 그냥 풀어 주었다.
제주시에 도착하여 숙부댁에 거처를 정하고, 어디 정미소에라도 취직을 하려고 동문로 쪽으로 가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너 어디로 가느냐? 너 산에서 내려온 놈이지?”
청년 여러 명이 내 뒤에서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다.
“우리들은 대한청년단원들이다. 조사할 사항이 있느니 우리들을 따르라.”
그들은 나를 청년단 지하실로 데리고 가더니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고, 저녁쯤에 경찰서로 넘겼다. 경찰서에는 방마다 조사를 받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비명소리도 들렸다.
“너 이 새끼,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공중에 매달아 콧구멍으로 물을 붓겠다.”
나는 무서워서 그들이 질문하는 데로 예, 예, 대답만 하였다. 그들은 나의 손에 전깃줄로 묶고 수화기 손잡이로 돌리면서 질문을 계속했다.
“산에서 보초를 섰느냐?”
“예!”
“금품을 제공했느냐?”
“예!”
“쌀을 제공했느냐?”
“예!”
잡혀온 피의자들은 형식적인 재판을 받았다. 군인 장교들로 판사, 검사, 변호사의 구색도 맞추고 있었다. 미군 장교가 직접 재판을 할 때도 있었다. 한 번에 몇 명씩 이름을 불러 재판을 하는데, 변론권이 주어지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악착같이 숨겼던 사람은 형기를 덜 받았다. 죄명은 주로 그 당시 미군정경비법 위반 혐의였다. 재판은 형식적인 절차로 계속 진행되었다.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당신 5년, 당신 10년하고 재판관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만 재판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새벽에 산지항 가까운 동척회사로 끌려갔다. 목숨 하나만이라도 구한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나는 트럭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짐짝처럼 실려졌고, 앞선 지프는 계속 사이렌을 울려대면서 달려 나갔다. 트럭은 동척회사 마당에 세워졌고, 곧장 창고에 감금되었다. 창고마다 끌려온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다. 곳곳에서 오금을 조이게 하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 누명을 쓰고 개죽음을 당하게 됐다고, 서로가 확실치 않은 정보를 나누고 있었다.
고문하는 자와 피고문자에 따라 그 정도는 차이가 있었다. 사람들을 한 사람씩 부르거나 여럿이 불려나가면 다른 막사에서 몽둥이나 총 개머리판, 혹은 가죽 띠로 마구 패거나 천장에 매어 달았다. 한 쪽 눈이나 두 눈 다 병신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다리를 절룩거리는 사람도 생겨났다.
빨갱이라 자백하라는 심문이 너무 치욕적이었다. 고통에 못 이겨 하지 않은 일을 그대로 인정해야 했다. 나는 빨갱이입니다, 라고 거짓 자백이라도 해야 목숨이라도 건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육지형무소로 끌려간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산지항으로 끌려가는 사람들 손에는 포승줄이 묶여있었다. 배는 목포로 가는 화물선이다. 소를 실어 나르던 선박이다. 사람들은 배 밑창에 승선했는데 여유 공간이 하나도 없었다. 쇠똥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밤새 항해하고 다음 날 아침, 목포항에 도착하였다. 곧바로 열차를 타고 밤이 되어서 겨우 인천소년형무소에 도착하였다.
형무소 정문 앞에 수형자 전원이 무릎을 꿇었다. 차례대로 이름을 부른다. 수형자를 제주에서부터 인솔하고 온 군인이 한사람씩 부르며 징역형을 알려주었다. 군인이 나를 불러 세우더니 ‘징역 5년 형!’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한사람씩 형량을 알려준 다음, 간수에게 우리들은 인계하고 그는 총총히 사라졌다.
인천 추위는 수은주 영하 30도에 가까운 강추위로 전신을 얼어붙게 하였다. 죄수들은 머리를 빡빡 깎고 얼음물에 대충 몸을 감고 형무소 죄수복으로 갈아입었다. 바로 무릎 위까지 된 반바지에 상의는 반팔로 여름에나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모두 바뀌었다.
형무소 건물은 이층으로 지어져서 이천여 명 정도 수용할 수 곳이다. 일제 강점기 쓰던 감옥을 일부 손질하여 형무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방 하나가 두 평 정도의 크기. 한 방에 열다섯에서 스무 명 정도가 수용되었다. 사람들도 여섯 명에서 일곱 명씩 나뉘어서 감방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날부터 철저하게 사상범으로 분류되어, 특별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내게 배정된 곳은 2층 25번 방이다. 이불 하나에 담요 하나로 다섯 명이 같이 덮고 자야 한다. 죄수끼리 통성명을 하니 모두 제주에서 끌려온 소년수들이다. 인천형무소는 19세 이하의 소년들의 복형장소였다. 나는 무엇보다도 추위 때문에 잠시도 견디기 힘들었다.
식사시간에는 깡통에다 밥을 배식하였다. 일 등급, 이 등급, 삼 등급으로 급수가 매겨졌다. 밥을 휴지에 받고 국은 양재기 그릇에 받았다. 밥은 3등밥 모양으로 뜬 것이고 콩과 보리 반반씩 쌀 몇 알이 들어있는데 숟가락은 없고 젓가락으로 한번 뜨면 비시시 흐트러졌다.
나는 농사짓는 것밖에 모르고 살아왔다. 그래서 목공이라든지, 옷 수선, 벽돌쌓기 기술이 있는 죄수들과 같은 특별대우에도 제외되었다. 기술이 있어야, 밖에서 일하면서 밥도 나름대로 충분히 먹을 수 있었는데, 그 축에도 끼지 못했다.
형무소 안에서 제일 겁이 나는 것은 이질과 학질이었다. 입원하는 환자가 늘어났고 치료 중에 사망하는 환자도 속출하였다. 그 당시 약이라고는 머큐로크롬과 아스피린 그리고 금개락 정도였다.
물론 형무소에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부지기수로 죽어나갔다. 무더위 속에 옴이나 이름도 모를 병에 걸려 아침 기상시간에 일어나지 않으면 시체로 변해 있었다. 시신들이 매일 들것에 실려 밖으로 치워졌다. 사람들을 총살시킨 사례도 여러 번 있었다.

어느 날 새벽 청소당번이 열쇠로 형무소 감방문을 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사흘 뒤였다. 인민군 계급장을 단 군인들이 감방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인민해방군이다. 여러분들은 모두 해방이다. 이제 우리들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한사람씩 일일이 악수를 했다. 연병장에 수용인들을 모아놓고 인민군 장교가 단상에 올랐다.
“지금부터 인민군 의용대에 입대할 사람을 착출하겠다. 특히 제주4·3 사상범들은 모두 나와 나를 따르라. 그대들은 위대한 수령님이 지목하신 영웅들이다.”
우리들은 개성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인민군 훈련학교에 입소한다는 것이다. 인민군가를 부르며 행군을 계속하여 한강다리에 도착하였다. 한강다리는 이미 폭격으로 부서져 작은 배로 사람들 운반하고 있었다. 서울 시내로 진입하였다. 시내 주요건물과 중앙청에는 김일성 사진이 좌측, 스탈린 사진이 우측에 붙여져 있었다. 국기게양대에는 조선인민공화국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행군을 하다 보니, 사방에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 파편이 박혀 신음하는 사람,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 울부짖는 사람, 피를 흘리며 절규하는 사람, 아비규환 그 자체이자 지옥이 따로 없었다. 차 밑에 시체가 깔려있고 나뭇가지에도 시체가 여기저기 빨래처럼 걸려있었다
삼일 동안을 걸어 개성에 있는 인민군 훈련학교에 가서 정식 인민군대 훈련병이 되었다. 인민군 지휘관이 단상에 올랐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소, 우리 다 같이 만세삼창을 부릅시다. 제가 선창할 터이니 따라하시오! 인민공화국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 스탈린 대원수 만세!”
지휘관의 연설은 이어졌다.
“지금부터 조선인민군 내무서원 훈련을 받고 남조선으로 내려가서 치안을 확보하고 자본주의를 타파하여 인민공화국 건설에 총성을 다하여 김일성 장군께 충성을 다 할 것을 맹세합니까?”
“예!”
부대편성이 끝나고 각자 분대를 배속 받았다. 일반병은 상등병과 전사의 두 계급으로 나뉘었는데 나는 최하위 계급인 전사였다.
“여러분들은 총알받이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남한으로 내려가서 치안 확보에 노력할 것이다. 남조선에서 괴뢰도당과 싸워서 돌아오기 바란다.”
그리고 군가도 배웠다.
‘백두산 저기 받은 우리의 민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절세의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아~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아~아 그 이름도 그리운 스탈린 대원수.’

배가 고팠다. 고향이 그리웠다. 개성을 출발한 시간은 저녁 아홉시쯤 무덥고 컴컴한 밤이다. 인민군이 신고 있는 발싸개와 비누를 지급받고 발싸개에 비누를 칠하여 농구화를 신었다. 개성에서 출발하여 한 사흘이 되어서야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시 남쪽으로 행군을 계속하였다. 발바닥이 부풀고 다리가 아파서 너무 힘이 들었다. 야간에도 행군은 계속되었다. 조치원까지 계속 걸었다. 주변을 보니 인민군 전차와 야포가 폭격을 맞아 부서져 나뒹굴고 있었다. 논두렁을 따라 일렬종대로 걷고 있는데,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총알이 빨간 불빛을 가르면서 사정없이 떨어졌다
조치원 가까운 어느 마을에 도착하니 소대원 서른 명 중 남은 인원은 열 명 뿐이었다. 교전을 벌이던 중 죽거나 도망을 간 소대원들이 있었다. 겨우 어느 의용군 사무실을 찾아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걷는 것도 낮에는 비행기 폭격 때문에 민가가 엄폐와 은폐가 가능한 나무 그늘에서 쉬다 어두워져야 길을 걸었다.
광주와 가까운 어느 시골 노인 부부가 살고 있는 초가에 도착하였다. 노인은 빨리 식사하고 여기를 떠나라, 지난밤에도 앞산에서 총소리가 났으니 여기도 위험하다며 밥을 차려주었다. 주섬주섬 밥을 먹고 일행은 다시 행군을 시작하였다.
다시 행군을 계속하다 어느 마을에 도착하니, 그 마을은 인민군이 통치하는 마을이었다. 내무서원을 찾아가니 우리들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동무들은 어디로 가는 길이요?”
“우리들은 광주 내무서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밥과 반찬이 나왔다. 허기진 배를 양껏 채우고, 헌 고무신을 한 켤레씩 지급 받았다. 한 달여 만에 개성을 출발하여 광주 내무서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신고식이 시작되었다.
“우리 일행 열 명은 수령님의 명령을 받아 이곳 광주까지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내무서장이 거수경례로 신고를 받았다.
“연락을 받았을 때는 스무 명이 온다고 들었는데 왜 열 명 뿐이오?”
“오는 중에 교전이 벌어져 영예롭게 전사하였습니다.”
“동무들은 식사를 하고 나면 여수, 순천, 고양 등지로 한사람 씩 배치할 것이니 착오 없이 목적지에 가야하오.”
“예, 알겠습니다.”
나는 고양에 배치를 받았다. 당시 우리 복장은 인민군복에 인민군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고양 내무서장도 우리들은 세워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내 앞으로 다가섰다.
“지금 제주도는 해방이 되어서 너의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다.”
“네, 부모님이 보고 싶습니다.”
내무서장은 지도를 벽에 붙이고 설명을 이어갔다. 지도에는 부산 대구 지역만 파란표시가 되어 있고, 그 외 지역과 제주도까지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제주도는 4·3사건으로 남로당이 승리하였다는 표시였다.
나는 다시 명령에 따라 동료들과 함께 광양군 진월면 어느 산골마을에 있는 내무서로 갔다. 내무서장이 명절음식을 차려주었다.
“내일은 인민공화국에서 빈부차이가 없이 농토를 꼭 같이 분배합니다.”
마을 이장도 자리를 함께 하였다.
“이장님께서 마을 주민을 동원해 주시고 거리를 잴 새끼를 꼬아서 오도록 해 주십시오.”
이장이 대답했다.
“예, 알았습니다.”
토지를 분배하는 날, 마을 사람들이 논밭에 모였다. 논 한 필지를 오백 평 정도씩 미리 새끼줄로 가로, 세로의 길이로 정하여 김 씨네 논, 박 씨네 논, 이 씨네 논 하며 선을 그어 나갔다. 사람들은 불평불만을 하지 못했다. 그 경우 반동분자라 하여 비판을 받거나 숙청을 당하게 된다. 논밭 한 평도 없었던 사람은 논밭을 공짜로 받게 되니 마음이 들뜰 수밖에 없었다. 인민공화국에 충성을 다짐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인지상정인지 모른다.
하루는 보초를 서는데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연합군이 인천 상륙을 하고 서울 탈환을 한 이틀 후였다. 우리는 내무서장의 인솔 하에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며칠 먹을 양식을 보따리에 싸서 등에 짊어지고 산에 올라가보니 마을사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모였다.
뒷산 소나무 밭에 모인 사람들에게 내무서장이 명령을 내렸다.
“우리들은 작전상 후퇴하게 되었으므로 내 뒤를 따르지 않으면 놈들에게 죽을 것이니 계속 산길을 따라 지리산을 넘어 목적지인 태백산까지 가야하니 한사람도 낙오하는 사람이 없도록 행동합시다.”
모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 편성을 끝마쳤다. 인민군은 앞에서 행군하고 노약자와 어린이는 뒤를 따랐다. 낮에는 산비탈이나 나무 밑에서 쉬고 일몰 후 야간에만 걸었다. 산기슭에는 피난 가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어진 줄이 몇 킬로나 되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의 숫자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마을이 보이면 거기서 가서 식량을 구해 먹었으며 먹다 남은 것은 등짐에 짊어지고 계속 걷고 걸었다.
다시 후퇴하라는 지령을 받고, 사람들과 한 부대가 되어서 태백산이 목적지란 말만 듣고 지리산 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일주일 정도 걸어서 지리산에 도착하고 보니 각 처에서 피난 온 남녀노소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행군을 하면서 먹을 것도 없고 신발도 다 떨어지고 걸을 수가 없어 고향 생각은 더욱 간절하였다. 맨발로 걷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배가 고프니 칡뿌리를 캐어 먹으면서 하염없이 앞 사람만 보면서 뒤따라 걸어갔다.

행군 열흘 쯤 되는 날이다. 처음 출발할 때 수백 명이던 사람이 하루가 다르게 그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자기들끼리 마을로 도망가거나 각자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인솔자와 내무서장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남아있는 사람은 대략 사오십 명 정도. 국방군이 바다 쪽으로 공격해서 산으로 올라온다는 소문도 들렸다. 국방군을 피하기 위해서는 태백산 속으로 계속 가야만 했다. 지서주임도 태백산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출발한 지 보름 쯤 되어 전라도 끝부분 경상도 경계에 이르렀다. 가는 곳마다 인민군과 국방군의 시체가 즐비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로막힌 강을 건널 때는 옷을 벗고 머리에 얹었다. 어디선가 기관총 소리도 들렸다. 퇴각하는 우리를 한국군으로 알고 주변에 숨어있는 인민군이 오인사격도 하였다. 계속 걷다보면 국방군과 인민군 시체가 뒤엉켜서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 되었다.
이제 나는 인민군도 아니고 일반주민도 아니다. 복장만 인민군복을 입었을 뿐 소속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된 셈이다. 강을 건너면서도 총을 맞아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고, 그럴 때는 물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런 행동을 수없이 몇 번을 되풀이하며 겨우 강가에 닿아보니 신발도 벗겨져 없었고, 옷은 다 물에 젖어 있었다. 죽은 군인의 시체에서 신발을 벗겨 신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리 일행은 경상북도 상주군 어느 산기슭 팔부 능선에서 일렬횡대로 앉아있었다. 잡담도 하고 고향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담배도 피웠다. 저 멀리 한라산이 다가오면서 내 품에 안기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다시 ‘공격 앞으로!’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행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각자 산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거나 어떤 사람은 숲 속으로 도망가기도 하였는데, 마침 돌 자위가 있어서 그 바위를 엄폐, 은폐 삼아 납작 엎드렸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총을 맞았다. ‘아이고’하며 단말마 비명 소리를 내더니 다음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이때 국방군이 총을 쏘면서 나타났다. 큰 소리도 들렸다.
“살아있는 놈은 일어나서 손을 들어라! 그러면 살려준다.”
총을 든 사람이 있어서 얼마간 교전이 벌어졌다. 국방군이 총을 들고 내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살아있는 놈은 나와라! 밖으로 나와 보니 미군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 인민군 총을 든 사람들이 한사람씩 트럭에 태워졌다. 한국군 부대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부산포로수용소로 인계되었다.

부산포로수용소 시설은 천막으로 일렬횡대로 늘어져 있었다. 우선 몸에 벼룩, 이 등이 생길까 봐 몸 구석구석에 디디티를 뿌렸다. 잡혀온 사람들은 소대로 편성되었다. 어린이, 노인, 농민, 노동자 등이 모인 소대도 있었고 또한 인민군과 그리고 의용군이 있는 비교적 군기가 엄한 소대도 있었다. 천막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고 쌀 담았던 마대를 덮고, 마대로 옷을 만들어 입는 사람도 있었다. 피복은 미제 옷이었다. 상의에 PW란 도장이 찍혀 있었다. Prisoner of war. 포로 또는 민간인 억류자. 거기서 조금 지내다가 다시 거제도포로수용소로 이동되었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난장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포로들끼리 사상논쟁이 벌어지면서 폭력사태도 비일비재하였다. 인민군으로 확인된 사람들은 다른 천막에 수용되었다. 천막 사이는 일백 미터에 불과했다. 한쪽 천막에서 다른 천막으로 돌멩이가 날아오기도 하였다.
“너희 놈들 우리 수용소 진영으로 넘어오라!”
“너희들이 넘어오라! 빨갱이 놈들아!”
고함소리도 들렸다. 밤에는 더욱 고함소리가 심해지면서 양쪽에서 서로 돌을 던지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부상당한 포로들도 생겨났다. 천막이 찢어져서 비가 오면 빗물이 세었다. 방망이를 가지고 상대방을 때리고 막사 내에 힘이 센 포로끼리 사상이 다른 막사를 침범하여 폭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수용소 영내를 돌아다니면서 밤마다 소란을 피우는 포로들도 생겨났다. 빨갱이 포로들은 밤낮 가리지 않고 인민군가를 불렀다. 상대방에게 지지 않기 위하여 우리 쪽도 노래를 불렀다. 드럼통을 두 개로 잘라서 북을 만들고 장구를 만들어서 소리를 내면서 대항하기도 하였다. 포로감시소에서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포로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포로를 분리하기로 하였다. 하루는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양쪽에 심사관이 앉았다. 포로 한 사람씩 심사관 앞에서 ‘이북’ 하고 외치면 대기하고 있는 화물차에 타고, ‘이남’하고 외치면 천막 밖 이중 철조망 사이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나는 ‘이남’하고 외치고는 천막 밖으로 나가 이중 철조망 사이에 들어갔는데, 이때 경비병들이 천막 옆에 있다가 이북으로 가는 포로병들을 몽둥이로 때리고 미군은 옆에 서 있다가 워커발로 차는 모습들도 보였다. 많은 포로들이 북한을 지원하여 미군 트럭에 탔는데 어디로 이동되었는지 지금까지 아무도 모른다.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힘차한 그 얼굴도 반갑습니다. 우리들의 기쁨을 찾아주시려 낯설은 이 땅에 멀리오신 평화의 사자 아아 국군언니. 괴롬도 두려움도 모두 잊어서, 우리들의 편안히 누웠을 때도 찬비바람 그 속에 지켜계신 평화의 사자 아아 국군 언니.
포로가 석방된다는 소식이 들리고 이미 소년단에 편성된 나는 소북을 치면서 동무들과 잔치를 벌였다. 우리들은 보따리를 둘러메고 집에까지 가면서 먹을 쌀과 숟가락 하나를 배급받았다. 우리들은 마지막으로 소년단가를 힘차게 불렀다. 송이송이 무궁화 우리 소년들. 피어라 이 강산에 겨레 위하여, 닦고 가라 무쇠같이 뭉쳐라 겨레여.

제주에 도착하여 급히 고향마을로 향했다. 고향마을은 이미 불이 타버려 주민들은 집단으로 성담을 쌓고 마을 특공대를 조직하여 산사람과 격리시킨다는 명분으로 경찰관의 감시를 받으면서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오년 여 만에 집에 돌아왔으나, 집에는 한국군에 입대하라는 입영통지서가 나와 있었다. 나는 이미 소년이 아니고 성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한국군으로 입대하기 위하여 논산훈련소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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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상실(1)

詩(시)로 읽는 4․3(38)

완벽한 상실(1)
김병택

조천면 교래리 한 초가집
잇단 총성이 뒤뜰의 대밭을 흔들었다
9연대의 계획에 따라 이 땅에서 사라진
사람들은 모두 그의 가족이었다

증조할머니는
총에 맞아 숨져가면서도
담요에 싼 손자를 급히 대밭으로 던졌다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던 그는
불구의 몸으로 평생을 살았다
오른팔을 구부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목발을 집고 걸어야 했다

게다가, 그는 거처하던 과수원 판잣집의 화재로
생을 마감했다
참으로 가혹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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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1949년 2월까지 약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하는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됐다. 진압군은 중산간마을 방화에 앞서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려 해변마을로 내려오도록 했다. 그러나 일부 마을에는 소개령이 전달되지 않았고, 혹은 채 전달되기 전에 진압군이 들이닥쳐 방화와 함께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남녀노소 구별없이 집단희생을 당했다. 미군 비밀보고서에는 “9연대가 마을주민들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거나 “2연대는 신분과 무기소지 여부에 관계없이 폭도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가혹한 작전을 벌였다”고 기록돼 있다. 교래리(橋來里)는 예로부터 다리(橋)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진다. 700여 년 전 화전민들에 의해 설촌된 마을이다. 고려시대부터 목마장이 설치되어 준마(駿馬)를 길러내는 지역으로, 왕에게 말을 진상했을 정도로 마장(馬場)이 발달했던 지역이다. 웃리, 알리로 이루어져 약 100여 호의 주민이 살았던 중산간 오지인 이곳에는 초토화작전의 초기부터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1948년 11월 13일(음력 10월 13일) 새벽 5시께, 군인들이 교래리를 포위한 가운데 집집마다 들이닥쳐 다짜고짜 불을 붙이며 총을 쏘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나 다급히 밖으로 뛰어나오던 주민들이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날이 밝아 총성이 멎었을 때 100여 호 모여 살던 교래리는 이미 잿더미로 변했다.  주민들은 인근 야산으로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그들은 느닷없이 들이닥쳐 무조건 불을 지르는 토벌대의 행태에 놀라기도 했지만 가을걷이한 곡식과 우마(牛馬)를 그냥 둘 수가 없어서 ‘며칠만 버티면 괜찮겠지’ 생각하며 간단한 생활집기를 걸머메고 야산의 동굴이나 궤 혹은 움막을 짓고 피신생황을 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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