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시)로 읽는 4․3(8)

제주도에 바치는 레퀴엠
김준태

어른들은 그랬다. 이름이 이어도인지 갈매기 섬인지는 모르지만 6․25 한국전쟁이 터지기 3년 전엔가 제주도에서 무슨 난리가 일어나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었다고 말하면서 바로 이 무렵, 그 섬에 수백 명의 젊은이들을 실어다 퍼부어 놓고 두두두두두……..집단총살을 시켜버렸다고 귓속말로 수군 수군거렸다.
해송과 풍란이 바위마다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섬. 어쩌면 유인도보다도 더 많은 슬픔과 더 많은 꽃과 주검의 잔해들이 쌓여있을지 모르는 그 섬을 바라보면서 어른들은 몸서리를 쳤다. 당시 아무도 말할 수 없었던 갈매기 섬, 아아 이어도-어부들은 이어도가 토해내는 미친 듯 한 물음소리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아흐, 그런데 어른들은 마치 무시무시한 비밀처럼 전설 같은 이야기를 서로서로 나누곤 했다. 그 시절 소년 김준태가 엿들은 어른들이 나눈 대화의 한 매목은 이러했다. -이어, 이어, 이어도를 본 사람은 죽는다-는 그것이 그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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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requiem)’은 위령 미사 때 드리는 음악이다. 정식명은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이지만 가사의 첫마디가 “requiem(안식을…)”으로 시작되어 레퀴엠이라 부른다. 진혼곡, 또는 진혼미사곡 등으로 번역되어 쓰이기도 한다. 4·3항쟁과 광주5․18은 국가폭력에 의하여 희생자들이 발생하였다. 둘 다 역사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상처를 알기에 제주의 아픔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진다. ‘역사적 사건’은 시간성 속에서 기억되어 현재의 우리 삶과 미래를 지배하는 원동력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 사건이라 할 수 있는 4·3항쟁과 광주5․18은 과거의 사건으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다. 바로 역사적 기억, 그리고 다양한 문화 예술적 텍스트로 구현되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피해 지역을 고립시켜서 역사 속에 묻었던 것은 4·3항쟁이나 광주5․18이나 무척 닮은꼴이다. 진실과 정의를 외면할 때 우리의 인권과 생명을 말살 시킬 수 있는 나쁜 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죽음과 죽음 사이에/피눈물을 흘리는/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우리들의 아들은/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우리들의 귀여운 딸은/또 어 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시인 김준태(金準泰)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1980년 광주5․18과 그 투쟁의 과정에서 군부에 의해 자행된 폭력에 대한 거부와 민주화를 향한 염원을 드러낸다. ‘제주도에 바치는 레퀴엠’도 마찬가지다. 섬이 가까운 전라도에서 어른들은 비밀처럼 전설 같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저 바다 건너 제주섬에서 무슨 난리가 일어나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이어도를 본 사람은 죽는다”는 이야기다. 국가권력은 제주사람들을 “실어다 퍼부어 놓고 두두두두두…….집단총살을 시켜버렸”다는 소문이다. 이 속에 학살로 인한 아픔이 존재한다. 김준태 시에 나타난 전반적인 시적 주제는 대체로 광주, 역사, 통일문제로 집약된다. 시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뚜렷한 해명방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생명존중과 사랑정신이다. 김준태의 시는 일반적으로 일상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범사회적인 시야로 확산되는 방식이나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역사의 흐름을 짚어나가는 방식을 통해 탄탄한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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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통 보수’가 걱정이다

전형적인 보수주의자는 “옛날이 좋았지! 왜 이놈 저놈 나와서 자꾸 바꾸려 드는지 몰라”라는 말을 한다.
보수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며 점진적인 발전을 검토하는 주의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는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나라에 해가 되는지 아닌지를 검토한다. 진보의 불안정성을 잡아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보수주의자들이 이승만에 대해 내리는 평가도 문제다.
“이승만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시죠! 이 분이 한국전쟁 당시 미국 형님한테 SOS 쳐준 덕분에 지금 우리나라가 북괴 놈들한테 안 넘어가고 이렇게 잘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승만 만세! 멸공의 횃불 만세! 미국 형님 만만세!”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더욱 가관이다.
“박정희는 반신반인으로서 지지리도 못 살던 우리 민족에게 젖과 꿀을 주신 분입니다. 이 분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금 따뜻한 밥을 먹고 살 수 있었을까요! 이 분의 따님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진보는 꼰대고 보수는 꼴통이다’라는 말이 있다. 꼴통보다는 꼰대가 낫지 않느냐는 항변도 있다. 현재와 같은 보수와 진보의 논쟁으로는 21세기의 변화를 분석할 수 없다. 보수와 진보의 진부한 논쟁은 권력 투쟁만을 위한 반대를 위한 반대의 퇴행성을 부추길 뿐이다.
요즘 자유한국당의 행태는 극우적 경향을 띠면서 ‘꼴통 보수’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가 무덤 속에 있어야 할 386 운동권 철학이 정부의 국정철학이 돼 당·정·청을 장악한다고 말했을 때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원내대표까지 극우 정치를 선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막간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행태를 보면서 자유한국당은 합리적 보수정당이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국내 극우 정치는 대통령 탄핵에 극렬히 맞섰던 이른바 가짜 태극기 세력이 정치적인 포악성과 폭력성을 근거해 만들어졌다. 책임 있는 야당이라면 이를 여과하고 정화해 대처해야 하는데 그대로 받아들였다. 극우 정치가 자유한국당 심장에 똬리를 튼 것은 너무 위험하다. 극우로 가는 자유한국당이 참으로 위험스럽다는 이야기이다.
극우 정치는 족보도 없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자신들을 한 순간에 파멸로 몰고 갈 위험한 선택이다. 5·18 망언과 세월호 모욕,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는 회피 수단일 수 있다.
정치 극단주의(Political Extremism)는 극단적인 진영 논리를 우선적으로 내세워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치닫는 정치 성향을 일컫는다. 좌파 성향의 정치 극단주의자들의 경우 ‘빨갱이’, ‘좌좀’, ‘좌빨’이라 불리며, 우파 성향의 정치극단주의자들의 경우 ‘애국보수’, ‘수구꼴통’, ‘우좀’, ‘토착왜구’라고 불린다. 물론 중도는 회색분자라고 논외로 친다.
그 주요 증상으로는 선동하거나 당하며 날조와 조작된 자료를 잘 이용한다. 진영논리에 매몰돼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의 잘못은 관대하게 넘어가거나 변명한다. 그 반대 진영에 대해서는 사소한 흠에도 비난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인다.
뭐든 간에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악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의 사람이나 단체를 ‘너 수꼴, 너 좌좀’식으로 정의하는 순간 욕설이 돼버린다. 우익의 끝에는 ‘수꼴’이 있고 좌익의 끝에는 ‘좌좀’이 있다.
보수도 없고 진보도 없고 ‘수꼴’과 ‘좌좀’의 판이다.
물론 자유한국당이 과거 ‘비대위’까지 만들어 ‘보수의 재건’ 이라는 기치를 내세운 것이 결국 또 한 편의 ‘공염불’이란 것을 증명하는 꼴이 아닌 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정녕 자유한국당은 국민 소수의 지지를 받는 보수꼴통으로 남고 싶은 것일까? 자유한국당의 지나친 극우 민족주의 행각으로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잔영을 떠오르게 한다.
거리로 뛰쳐나가고 악을 쓰는 자유한국당을 보면서 걱정이 앞선다. 한국 정치가 제 길을 찾으려면 정당부터 정신을 차리고 국민부터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국민은 늘 깨어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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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7)

반공강연․ 1 -관덕정에서
김경홍

길은 보이지 않았다
타향길이거나 아니면
아버지 나를 연명시킨 산길이거나 간에
길이 있다면 형틀을 이어매고도 갈 수가 있는데
하루를 살거나 그만 끝장내거나
길이 있다면
가는 길을 구걸하고도 싶은데
길은 보이지 않았다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적개심으로
찾아 헤매인 길
배신을 하거나 내가 당하거나
길이 있다면
가는 길을 강탈하고도 싶은데
길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광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책가방들이
안개무리로 뿌리 채 일어서
보일 듯 말 듯 떠오른 길은
이내 땅속으로 가라앉고
핏대를 세우고 불러도, 나발을 불고 부르짖어도
거짓은 언제나 거짓인 것처럼
써 준 대본을 읽을 때
눈물로 피눈물로 외칠 때도
거짓은 언제나 거짓인 것처럼
가야할 길은 보이지 않고
——————————————————————–시인의 아버지는 1948년 입산한다. 1950년 어머니가 조부모를 학살한 토벌군인과 개가해 의붓형을 낳고, 1956년 아버지가 8년의 피신 끝에 중문지서에 자수하고 제주, 서귀포, 성산포를 돌며 반공강연을 시작한다. 아버지는 당국이 써 준 대본을 읽을 때도 눈물로 외칠 때도 거짓은 언제나 거짓인 것처럼 가야할 길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재결합하였고, 종종 기관으로 끌려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999년 연작 시집 < 인동꽃 반지>를 상재(上梓)한다. 아버지의 반공주의(反共主義, Anti-Communism)는 거짓 반공주의였다. 1901년 신축년농민항쟁 당시 장두 이재수(李在秀))가 효수(梟首)된 광장. 3·1운동 28주기기념식을 끝내고 수천 명이 모여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양과자를 먹지 말자’고 외치던 광장. 1949년 6월 무장유격대 사령관 이덕구(李德九)의 시신이 내걸려 있던 광장. 그 광장에서 아버지가 당국이 써 준 대본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 아버지의 피눈물이 거짓이 거짓인 것처럼 시인의 거짓 파괴의 길은 너무 길고 험하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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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6)

4월 그 길
한문용

그날처럼 빛바랜 4월길을 걸었다
관투모살, 정뜨르비행장
한결 같은 파도소리와
골방에서조차 들리는
정의로운 할아버지 목소리
젊음 꽃 져버린 아버지 흐느낌
영혼의 소리는 들을 수 없어도
귓바퀴를 쫑긋 세우면
4월 숨소리 지금도 가지런하다
세월을 떠안은 기억 속에 벼린 울림
어눌한 기도 천상을 흐를 때마다
찌든 얼굴나무 한 그루를 심었던 나
살가운 봄볕에 나폴 거리는 동백꽃잎처럼
바람결에 떨어져도 아프지 않는 몸살
가버리면 그만인데, 보내버리면 그만인데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은
4월 그 길
——————————————————————–
시인 한문용(韓文用)이 찾아나선 4월길은 너무 길고 험하다. 시인은 그 한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2013년 시집『서우봉노래』도 출간하였다. < 정의로운 할아버지> 한백흥(韓伯興)과 < 젊은 꽃 져버린 아버지> 한재진(韓在珍). 두 영혼을 끌어안고 < 바람결에 떨어져도 아프지 않는 몸살>을 않고 있으며, < 가버리면 그만인데, 보내버리면 그만인데>를 읊조리지만 < 바람결에 떨어져도 아프지 않는 몸살>을 앓고 있다. 1948년 11월 1일 토벌대가 주민들을 모래사장에 집결시키고 청년6명을 끌고나와 처형하려 했다. 마을이장 한백흥이 나서 “이 청년들의 신원을 보증할 테니 죽이지 말라”며 만류했다. 토벌대는 오히려 “이 자도 폭도의 일당이다”라며 한백흥을 총살하고 청년들과 함께 파묻었다. 청년시절 조천3.1만세운동을 적극 주도하고 가담한 함덕리의 대표적 인물. 일본 경찰에 붙잡혀, 징역 4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4․3 당시 억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한 몸 내던진 몸이지만, 그동안 독립유공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2002년부터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음에도 17년이 지나서야 어렵게 인정을 받았다. 한백흥의 아들 한재진은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령이 발동되어 산지주정공장에 구금되었고, 동료들과 함께 정뜨르비행장에서 학살되었다. 시인의 운명이 어찌 이처럼 잔혹할 수가 있을까. 지금 시인의 내면에 불타오르는 분노는 역사의 시어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문학은 시대적 아픔의 표현이다. 문학은 사회적 약자들의 분노를 승화시켰을 때 생명력을 획득한다. 분노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비굴하게 굴복하기만 했던 권력에 대항할 용기를 주기도 한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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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5)

사월이여 먼 날이여
김시종

내 자란 마을이 참혹했던 때,
통곡이 겹겹이 가라앉은 그 때
겨우 찾은 해방마저
억압에 시달려 몸부림치던
그 때,
상처 입은 제주
보금자리 고향 내버리고
제 혼자 연명한
비겁한 사나이
4․3이래 육십여 년
골수에 박힌 주문이 되어
날이면 밤마다
중얼거려온 한 가지 소망
잠드시라
4․3의 피여
귀안의 송뢰되어
잊지 않고 다스리시라
변색한 의지
바래진 사상
알면서도 잊어야했던
기나긴 세월
자기를 다스리며
화해하라
화목하라——————————————————————————————————
‘디아스포라(Diaspora)’는 ‘씨를 뿌린다’의 의미다. 고향을 떠나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거주하는 것을 뜻한다. ‘경계인(境界人, marginal man)’으로 살면서 제주를 품고 머리와 손은 일본어를 사용한 시인 김시종(金時鐘). 일본공산당에서 이탈하면서 결국 ‘귀국선’을 타지 못한 채 남한과 북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1990년대 초까지 조선적(朝鮮籍)으로 살았다. 4·3사건에 휘말려 1949년 일본으로 탈출하기 전까지 제주에서 보냈다. 남로당 제주읍당 세포로 활동하면서 산에서 4·3을 3개월 정도 체험했다. 우리가 시인의 『니이가타』에 주목하는 것은 제주 바닷가 해안에 밀어 올려진 물화된 4·3의 죽음이 핏빛 바다로 물들게 한 ‘달러문명’의 종주국 미국을 인식할 수 있다. 시인은 일본의 계간 학술지 ‘캉(環)’에 권두시로 4·3 연작시를 발표했다. ‘새가 말을 하는 가을(鳥語の秋)’, ‘4월이여, 먼 날이여'(四月よ, 遠い日よ), ‘여정(旅)’등 3편이다. 그의 시에서 4월은 여전히 잔혹한 달이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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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4)/

경계의 사람 -김석범/
김수열/

나는
남쪽 사람도 북쪽 사람도 아니요
그러니까 나는 무국적저요
나는
분단 이전 조선 사람이요

제주4․3도 마찬가지요
반 토막 4․3은 4․3이 아니란 말이요
온전한 4․3은
통일된 조국에서의 4․3이요
그러나 제주43은 곧 통일인 거요

4․3을 한다는 거?
저기, 저, 저 백비, 저걸 일으켜 세우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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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산도(火山島)>의 작가 김석범(金石範)의 문학은 기억과의 투쟁이다. 4·3은 ‘말살당한 기억’이다. 입 밖에 내선 안 되는 일이었고, 알아도 몰라야 하는 일이었다. 권력이 몰아붙인 ‘기억의 타살’이었고, 강요된 “기억의 자살”이었다. 김석범은 1925년 일본 오사카 출생의 재일조선인으로 4․3진상규명과 평화인권 운동에 매진해온 무국적자다. 1990년대 초까지 조선적(朝鮮籍)으로 살았다. 조선은 이미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다. 1957년 최초의 4․3소설 < 까마귀의 죽음>을 발표했고, 1976년에는 역시 4․3을 주제로 한 대하소설 < 화산도>를 일본 문예춘추사 ‘문학계’에 연재하기 시작해 1997년 탈고했다. 그는 4․3을 지속적인 작품의 소재로 삼았으며 2015년 제1회 제주4․3평화상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김석범은 4․3운동과 4․3문학에서 상징적 인물이다.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국적도 아닌 무국적자인 김석범이야말로 경계인(境界人)으로서 월경(越境)하는 삶을 몸소 실천해 왔다. 원래의 조선적에서 한국 국적으로 바꾸지 않은 재일조선인(이들은 제도상 무국적이다)을 일본정부는 암묵적으로 북한 국적처럼 취급해왔다. 그는 한국인도, 북한인도, 일본인도 아니었다. 패전국 일본이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은 재일 한인들에게 일방적으로 부여한 ‘조선적’을 고집했다. 남·북·일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국적을 찾아 떠나도, 남과 북이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를 회유해도, 김석범은 분단된 나라 어디에도 속하길 원치 않았다. 그는 무국적자였고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백성으로 남았다. 그의 4․3문학에서는 미일 제국주의(帝國主義)의 탐욕에 맞서는 제주섬의 항쟁과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그의 문학에 구현되는 제주민중의 투쟁 양상과 평화 세상을 향한 염원은 구미중심주의가 지닌 왜곡된 편견을 드러내면서 동아시아적 가치를 여실히 보여준다. 따라서 김석범 문학을 살피는 것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창조적 가치를 통해 세계문학을 재편해 나가는 노정에서 매우 유용한 작업이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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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3)

詩(시)로 읽는 4․3(3)

점령지에서 아메리카군
김명식

1945년 8월 15일
이날은 해방의 날이 아니란다
제국-아메리카 병사들
LST군함에 몸을
담고
미지의 땅
제주섬에서
작전명령을 기다린다
M1 소총과
수류탄
저장된 CIC의 정보 분석에 따라
살해의 임무를 해온 미 병사들은
콩밭에서
도로변에서
조국의 딸들을 쓰러뜨렸다네 (…………)

1945년 9월 29일, 미 군정청의 설치는
전후 제국-아메리카가
제주도를 품에 품으려 한
침략전쟁이 시작되는 날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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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은 풀과도 같은 것이다. 밟아도 베어도 잘라도 찢어도 쏘아도 오히려 땅속 아래서 엉키며 부등켜안으며 아침 해와 더불어 슬며시 일어서서 드디어 푸르름을 지니며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생동하는 존재이다. 1988년 아라리연구원이 펴낸『제주민중항쟁』(전3권)의 편자대표 김명식(金明植) 시인은 “이제 제주도 민중은 40여년의 어둠과 짓밟힘을 헤치고 다시 딛고 일어서는 아침의 해를 마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고백했다. 제주민중은 일어서고 있다. 슬며시 슬며시, 상처난 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4․3에 물든 피를 씻어내며 예리한 칼벽을 넘어 해방의 새날을 예비하고 있다. <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미군정은 1945년부터 3년간 남한을 법적으로 통제했고, 그 뒤에도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군사와 경찰을 통제했다”며 미국 책임론을 제기했다. < 제주도 반란>의 저자 존 메릴(John Merill)은 “4·3은 미군정 시기 소련과의 협력관계가 파국을 맞고 냉전이 자리잡아가던 시기에 일어났다. 미군 고문관들은 4·3 전 기간에 걸쳐 제주도에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는 고문관들이 직접적인 지휘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 정부가 펼쳤던 정책 역시 한 원인이다”며 미국의 책임과 이승만 정부의 책임을 지적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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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와 애국가

김순남이 조선인에게 ‘조선 최고의 작곡가’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인민항쟁가’였다. 1947년에 나온 ‘인민항쟁가’는 남·북조선 모두에서 애국가처럼 불리었다. 임화(林和)가 쓴 노랫말이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는/ 우리의 주검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렇게 죽엄을 맹서한 깃발을.” 우리 ‘애국가’는 안익태(安益泰, 1906~1965)가 작곡했다. 작사가는 윤치호(尹致昊)·안창호(安昌浩)·민영환(閔泳煥) 등이라는 설이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애국가는 처음에는 ‘올드 랭 사인’의 선율에 맞춰서 부르다가 안익태가 선율을 작곡해 지금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몇몇 분은 애국가가 북한이나 다른 나라 국가에 비해 너무 행진곡풍에 장엄하거나 당차거나 웅장하지 않고 너무 소박하고 초라한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안익태의 ‘애국가’가 관행상 ‘국가’로 불려왔지만, 현재 법적으로 지정된 대한민국의 애국가는 없다. 그래서 1960~1970년대에도 새로운 ‘애국가’를 제정하자는 운동이 있었고, ‘국가제정 위원회’를 구성해 애국가의 가사와 감상적인 곡조의 문제점을 들어 새 국가를 만들려고 준비도 했었다.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는 192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뒤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유럽에 진출한 당대에 드문 서양 음악가였다. 1935년 12월 28일 한인예배당에서 심혈을 경주해 창작한 ‘애국가’의 새 곡조를 연주했다. 그 멜로디를 ‘한국 환상곡’ 4악장에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민요 ‘이별의 노래(Ald lang syne)’에 가사를 붙인 것을 1936년 작곡했으며, 정부 수립과 함께 국가가 됐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안익태에 대한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그의 일본명은 ‘에키타이 안’. 그가 본격적으로 친일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였다. 1941년 독-소 전쟁이 벌어지자, 일제는 유럽 지역 자국민 소개령을 내렸다. 이에 그는 베를린 주재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의 유럽 첩보망 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 1896~1969)를 찾아가 상담을 요청한다. 그 덕분에 그는 1941~1944년까지 만 2년 반 동안 에하라의 베를린 자택에 머물 수 있었다. 안익태가 1941년 일본 명절에 일왕의 시대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곡인 ‘기미가요’를 피아노로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1944년 히틀러의 생일 기념으로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을 비롯해 동맹국(독일·이탈리아 등)과 점령국(프랑스), 우방국(스페인)에서만 30차례의 공연을 지휘한다. 자신이 작곡한 ‘에텐라쿠’, ‘만주국 환상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 등도 연주했다. 특히 그는 나치 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이 됐다. 그 회원증에서 그는 출생지를 평양이 아닌 도쿄로 속여서 적기도 했다. 선진국 같았으면 우리의 ‘애국가’는 벌써 폐기됐을 것이다. 그동안 안익태는 친일파로만 알려져 왔는데, 최근 친나치 행적마저 확인됐다.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애국가의 작곡가가 반민족 행위자라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민족의 정체성, 과거사 문제 등에 엄정한 입장을 견지하는 유럽의 선진국에서라면 벌써 폐기했을 것이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가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의 친일 행적을 분석한 신간 ‘안익태 케이스’가 관심을 끌고 있으며,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도 안익태가 수록돼 있다. 안익태는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고 국립묘지에 묻혔으나, 2000년대 이후 각종 자료를 통해 일제에 부역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영국이나 일본, 군주가 있는 중동의 몇몇 나라에서는 대체적으로 왕을 찬양하는 국가 가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의례를 할 때 국기에 대한 경례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그리고 애국가를 제창한다. 진보진영에서는 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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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라는 말, 어떻게 생겨났을까?

[김관후 칼럼] 4.3희생자와 유족은 ‘빨갱이’와 ‘빨갱이 새끼’…친일파 반대해도 빨갱이

# 빨갱이와 빨치산

“빨갱이란 단지 공산주의 이념의 소지자를 지칭하는 낱말이 아니었다.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 죽음을 당하지만 항변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 김득중의 《빨갱이의 탄생》 중에서

과거 4.3희생자는 ‘빨갱이’, 그 유족은 ‘빨갱이 새끼’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했다. 도대체 빨갱이가 무엇이기에 제주4.3이 빨갱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나의 고교시절, 머리가 좋은 학생들은 서울대와 사관학교를 주로 지원했는데, 사관학교 지원생들 대부분이 사상검증에서 걸려들어 떨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바로 4.3이라는 굴레 때문이었다.

빨갱이란 단어의 어원은 일본강점기 시절 항일무장유격대를 지칭한 ‘파르티잔(빨치산)’에서 유래되었다. 유격대원을 뜻하는 ‘파르티잔(partisan)’과 공산주의를 뜻하는 ‘빨강’에서 연유되었다. 파르티잔의 러시아 발음이 우리말로 빠르지잔→ 빨치잔→빨치산으로 변형되다 빨강이란 말과 결합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유격대의 현대적 의미는 ‘게릴라(guerrilla)’이다. 프랑스어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파르티잔이 빨치산으로 변형됐고, 최종적으로 빨갱이가 되었다. 파르티잔은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말이나, 현재는 유격대원·편의대원(便衣隊員)을 말한다.

그러니까 빨갱이는 북한의 붉은 기나 공산혁명을 상징하는 빨간색 혹은 적화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빨갱이는 항일 유격대원을 지칭하는 빨치산에서 비롯되었다. 항일 유격대원 가운데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많았고, 거기서 이어져 한국전쟁 때 공산당 유격대원도 빨치산으로 부르게 됐다. 이 말이 나중에는 공산주의자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확장됐다.

한국전쟁 중 인민재판 장면.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해방 뒤 남한의 빨치산은 1946년부터 시작되었다. 그해 10월 친일경찰의 악행과 각종 사회문제 때문에 대구에서 시작된 10월 인민항쟁은 전국을 휩쓸었다. 항쟁을 진압한 뒤 미군과 경찰은 항쟁을 주도했던 세력들을 체포·구속하였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조직이 ‘야산대(野山隊)’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본격적인 빨치산의 시작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단독정부수립에 맞선 제주4.3항쟁에서부터였다.

4.3항쟁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무산시켰고, 이에 대해 미군정은 초토화전술을 대표하는 가혹한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내륙의 빨치산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지 2달여 만에 발생한 여순사건에서 본격화 되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953년에 휴전이 되었음에도 1955년까지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이 남부군의 이름으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이후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과 반공을 국시로 했던 박정희를 거치면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대한민국에서는 좌익 계통을 통틀어 비하하고 적대감을 조성하는 용어로 ‘빨갱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 일제의 ‘아카’는 독립운동가

“1940년대의 남부 조선에서 볼셰비키, 멘셰비키는 물론, 아나키스트, 사회민주당, 자유주의자, 일부의 크리스찬, 일부의 불교도, 일부의 공맹교인, 일부의 천도교인, 그리고 주장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로서 사회적 환경으로나 나이로나 아직 확고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잡힌 것이 아니요, 단지 추잡한 것과 부정사악한 것과 불의한 것을 싫어하고, 아름다운 것과 바르고 참된 것과 정의를 동경 추구하는 청소년들, 그 밖에도 XXX과 XXXX당의 정치노선을 따르지 않는 모든 양심적이요 애국적인 사람들 이런 사람을 통틀어 빨갱이라고 불렀느니라.”
– 소설가 채만식의 < 도야지>, 창비사 《문장》 27호, 1948년 10월.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의 순국 관련 기사를 보도한 일본의 한 신문.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빨치산은 일제시기부터 있었다. 국내에서는 일제 말기 징병·징용을 피해서 산으로 들어갔던 젊은이들은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적은 규모이며 조직적인 것도 아니었다. 국외에서는 보다 더 조직적이며 많은 규모의 항일빨치산이 만들어졌다. 조선의용군·동북항일연군으로 불린 세력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일제에 치열하게 저항하였고, 때로는 국내 진공작전까지 시도하였다.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匪賊)’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다.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한반도에서 빨갱이의 어원은 일경(日警)에 그 뿌리를 두었다.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가를 가두고 사상 전향을 강요했다. 그 과정에서 체포자 명부의 독립운동가들 이름에 빨간 점을 찍어 놓고 ‘아카’라고 불렀다. ‘아카(あか)’는 빨갛다는 의미이며 빨갱이는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매도한 최초의 단어였던 셈이다.

빨갱이라는 단어 자체의 빨간색을 뜻하는 아카는 원래 공산주의자들의 상징이 빨간색(적색)이라서 일본에서도 그렇게 부른 것이다. 당시 일본 경찰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일종의 정치범수용소와 비슷한 곳에 가둬넣고 사상전향 교육을 시켰는데, 이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명부에 빨간 점을 찍어 놓고 아카라고 불렀다.

일제가 1932년 일본 관동군 사령관의 통제를 받는 괴뢰정권 만주국을 건국한 후 게릴라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하여 낮은 단계의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전후로는소련 공산당 지도하에 동북항일연군에 편입되어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했다. 이것이 일제하의 빨치산 역사다.

우리나라 독립투사들은 넓은 의미에서 모두 빨갱이들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 치하에서 못살고 못 배우다 보니 파르티잔이라는 외국어를 발음하기가 어려워서 빨치산이란 우리나라식 이름으로 변형이 된 것이 아닐까? 그것은 서양 문물이 처음 들어올 때 베토벤을 ‘배도빈’이라 부르고 차이코프스키를 ‘차갑석’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일과 유사하다.

아카와 빨갱이는 둘 다 사람의 속성을 ‘빨강(赤)’이라는 색깔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리고 그 의미가 일차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지칭하는 것이다. 아카는 포섭의 대상이거나 ‘배재한 채 포섭’하는 대상이었다.

“빨갱이는 북한의 붉은 기나 공산혁명을 상징하는 색깔 빨강 혹은 적화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빨갱이’는 항일 유격대원을 지칭하는 빨치산에서 나왔다. 당시 항일 유격대원 가운데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많았고, 거기서 이어져 한국전쟁 때 공산당 유격대원도 빨치산으로 부르게 됐다. 이 말이 나중에는 공산주의자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확장됐다.”
– 양정철의 《세상을 바꾸는 언어》중에서.

# 해방 직후의 ‘빨갱이’ 용법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빨갱이’란 말이 유행이다. 이는 공산당을 말하는 것인데 수박같이 겉은 퍼렇고 속이 빨긴 놈이 있고 수밀도 모양으로 겉도 희고 속도 흰데 씨만 빨간 놈이 있고 토마토나 고추 모양으로 안팎이 다 빨간 놈도 있다. 어느 것이 진짜 빨간 놈인지는 몰라도 토마토나 고추 같은 빨갱이는 소아병자일 것이요, 수박같이 거죽은 퍼렇고 속이 붉은 것은 기회주일자일 것이요, 진짜 빨갱이는 수밀도같이 겉과 속이 다 희어도 속 알맹이가 빨간자일 것이다. 중간파나 자유주의자까지도 극우가 아니면 ‘빨갱이’라 규정짓는 그 자들이 빨갱이 아닌 빨갱이인 것이다. 이 자들이 민족 분열을 시키는 건국 범죄자인 것이다….”
– < 독립신보>, 1947년 9월 12일

빨갱이의 탄생은 1946년 반탁(反託)과 찬탁(贊託)이 대립할 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연합국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한국에는 반탁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런데 전날 저녁까지 반탁을 주장하던 공산주의자들이 1946년 1월 2일 아침부터 돌연 신탁통치 찬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소련의 지령을 받은 것이었다.

이때부터 한국의 백성들에게는 못 믿을 좌익, 상종 못할 좌익, 민족반역의 좌익이라는 이미지가 탄생하였고, 그에 조롱으로 ‘빨갱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6년 10월 공산당에 의한 대구 폭동이 발발하여 남한에 혼란과 유혈이 몰아치면서 ‘빨갱이’라는 용어는 고착되었다.

우익청년단체들의 문제점을 보도한 < 동아일보> 1947년 6월 9일자 신문. ‘남조선 테로 진상’이란 제목 아래 ‘주모 단체는 해산을 명령…협박·공갈·금품강요는 엄벌’이라는 부제도 보인다.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해방 후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공산당 치하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을 공산당 동조자라며 빨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친일 군경이었던 김종원과 노덕술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여 심하게 고문했고, 항일무장투쟁의 전설인 김원봉(金元鳳) 투사를 체포하여 ‘빨갱이 두목’이라고 모욕하며 뺨을 때렸다.

실제 상징 언어로 ‘빨갱이’가 대두한 것은 해방정국, 이승만의 등장부터다. ‘빨갱이’는 단순히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미군정과 친일파 반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에 씌우는 주술로 쓰였다. 친일파 청산을 거론해도, 외세 배격을 주장해도 ‘빨갱이’라는 굴레가 씌워져 탄압받고 죽임을 당했다.

“중간파나 자유주의자까지도 극우가 아니면 ‘빨갱이’라고 규정짓는 그 자들이 빨갱이 아닌 빨갱이인 것이다. 이 자들이 민족분열을 시키는 건국 범죄자인 것이다.”
– < 독립신보>, 1947년 9월 12일

그래서 ‘이 자들’에게는 백범 김구도 빨갱이가 되었다.

“이승만은 국민을 좌와 우로 나누어 비국민을 제거 대상으로 보고 각종 단체와 민주인사까지 빨갱이로 몰아서 정치보복과 학살을 자행했다.”
– 김득중의 《빨갱이의 탄생》 중에서

빨갱이란 말이 정치적 반대파를 공격하는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은 이승만이다. 1947년 4월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이 자국에 보낸 문서에는 빨갱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4월 27일 이승만 환영 집회에서도 ‘빨갱이들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나왔다.

그러니까 빨갱이가 ‘공산주의자’라는 뜻을 지니게 된 것은 1947년 무렵이며 1948년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4.3사건과 여순사건을 계기로 ‘빨갱이 프레임’이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이전 빨갱이는 ‘공산주의자’와 다소 다른 의미를 지녔다.

1947년 4월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이 자국에 보낸 문서에 “4월 27일 이승만 환영 집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박멸하라’, ‘빨갱이들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나왔다”라고 명시됐고, 1947년 9월 12일 자 < 독립신보>에 “빨갱이라는 말이 퍽 유행된다. 이것은 공산당을 말하는 것…”이라고 적히면서 빨갱이에 대한 의미 변화가 있음을 말해준다.

“조금만 불똥이 튀어도 폭발할 것 같은 화약고, 이것이 남한의 현재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한 가지 고무적인 현상은 높은 교육수준을 가진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들 대부분이 일제에 협력하였지만 이러한 오명은 곧 사라질 것이다. 이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으며 가장 큰 그룹이 한민당이다.”
– 미군정 정치 고문 베닝호프(H.M.benning-hoff)의 초기 보고서 중에서.

# 제주4.3과 빨갱이

“무엇을 보았는가/ 빨갱이 제주민중은 경계하라고/ 관덕정 허공에 걸려놓은 모가지야/ 볼 수 없는 눈동자야/ 무엇을 보았는가/ 공포의 그림자 짙게 드리우는 그들의 눈망울을/ 메마른 땅위에 스미는 너의 핏방울을/ 보았는가/ 가슴팍 주머니에 달랑 꽂혀 있는 숟가락아/ 무엇을 꿈꾸는가”
– 김규중의 시 < 이덕구> 전문

1948년 5월, 처형을 기다리는 제주 주민들.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1947년 3월 1일, 3.1절을 기념하는 민중 집회에 미군정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하였다. 1948년 4월 3일 이후 제주 민중은 ‘비국민’인 빨갱이로 취급되어 초법적으로 죽음을 당했다. 제주 민중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온몸으로 항거했고, 이승만과 미군정은 이런 제주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1948년 5.10 총선거 치르고 1년 뒤에 재선거를 치르기 전까지 제주섬은 ‘붉은 섬(Red island)’으로 낙인 찍혔다. 이승만과 미군정의 지배 권력은 제주도의 8할을 붉은색으로 칠하여, 붉은 섬 혹은 ‘RED ISLAND’라고 명명했다. 당시에 그 붉은색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수많은 양민들이 붉은 색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어갔다. 그 대량학살을 ‘레드 헌트’(RED HUNT)라고 불렀다. 레드 헌트는 문자 그대로의 ‘빨갱이 사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용어는 중세의 ‘마녀 사냥’(WITCH HUNT)에 빗대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이 자행한 학살은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보냈던 아우슈비츠보다 훨씬 더 잔인한 학살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반공주의를 이용한 빨갱이 몰이는 공고해져 갔다. 1948년 11월 섬의 중산간 지대 130여 개 마을들이 초토화 불길에 싸였다. 그 붉은 빛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섬주민의 1/9에 해당하는 최소 3만 명이 학살당하고 130여 개 마을이 소각되었다. 4.3은 종전 후 냉전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 구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엄청난 학살사건에서, 미국은 손에 피가 묻지 않았다고 해서 무죄인가?

변변한 무기도 없이 억제할 수 없는 분노만 가지고 봉기한 젊은이들을 무찌르기 위해 무고한 양민 최소 3만 명을 소탕한 것이 바로 4.3사건이다. 양민 100을 죽이면 그 중에 게릴라 한 명쯤은 끼어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게릴라 200명을 죽이기 위해서 양민 3만을 소탕했다.

4.3의 대참사는 빨갱이는 아예 사람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는 그러한 무서운 야만주의가 저지른 사건이었다. 빨갱이는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아예 사람이 아니었거나, 하등 인간 즉 야만인으로 간주되었다. 미국은 하와이왕국 침략 행위를 사과했듯이, 몇 년 전에 인디안 학살행위에 대해 사과했듯이, 4.3 참사에 대해서도 사과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이 4.3에 책임져야 할 구체적 근거는 무엇일까? 1947년 3.1절 집회에서 미군정 경찰의 발포로 인한 인명 살상이고 이에 항의하는 제주 도민에 대한 무차별 연행 등 대탄압이다.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발발 이후 평화적 해결의 길을 거부하고 무력충돌의 격화와 대규모 희생을 낳을 수밖에 없는 강경진압정책 선택이다. 5.10 단독선거에서 제주도 2개 선거구 선거 무산 이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파견된 브라운 대령의 강경진압 작전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갖고 있던 미 군사고문단이 1948년 가을 이후의 무차별 대량학살을 제어하기는커녕 초토화 작전에 직·간접으로 개입하여 학살을 부추긴 사실 등이다.

미국은 4.3 학살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 도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미국은 한국 정부 및 시민사회와 함께 4.3에 대한 미군정과 미군사고문단의 법적,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 또한 미국은 진상조사를 바탕으로 4.3에 대한 법적, 정치적, 도덕적 책임에 상응하는 피해회복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 /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출처 : 제주의소리(http://www.jeju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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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 (2)

[詩(시)로 읽는 4·3] (2)

진주해 온 미군
-이산하

(…………..) 미국은 왔다. 쌀의 나라로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환상의 나라로, 해방군이 아니라 정복자로서,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공산주의 전통과 지도자를 가진 나라, 그 나라의 인민들이 체온처럼 배인 주눅을 벗어내고 이 뜨거운 해방의 날을 위해, 그리고 어쩌면 시작된 해방의 매듭을 짓기 위해 한창 훌쩍이며 용을 틀고 있을 때, 저 핏빛 여명을 헤쳐 지친 영혼에 감격을 안겨줄 새로운 시대가 열어주는 문턱, 바로 그 문지방을 넘으려고 할 때, 그때 그만 와버린 것이다. 이 모든 것에 찬물을 얹으며 두 개의 칼과 하나의 방패를 들고.

20세기 중반, 한 시대를 특징짓는 가장 큰 싸움, 두 개의 세계관 사이의, 두 개의 강대국 간의 격렬한 충돌을 예고하면서 한 손에는 착취의 칼, 한 손에는 냉전의 칼, 그리고 한 몸쯤 넉넉히 가릴 우산처럼 큰 해방군의 방패를 마구 휘두르면서 마침내 그들이 왔다. 와서 북북 찢어버리고 계획대로 하나하나 접수해갔다.(……………..) (장편연작시 ‘한라산’ 중에서)

—————————————————이산하(李山河)는 1987년 3월 25일 발간된 ‘녹두서평’에 4·3사건을 다룬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구속되어 필화를 겪는다. ‘한라산’은 1300행의 미완의 서사시로 미국과 역대정권에 의해 철저히 은폐돼 온 4·3사건을 격정적인 언어로 적나라하게 고발함으로써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산하는 즉시 수배됐으나 도피했으며, 1987년 11월 11일 결국 구속된다. 1989년 10월 3일 이산하는 개천절 특사로 석방된다. 이듬해 1990년 이산하는 ‘한라산’을 완성하기 위해 2년 간 제주도에 머문다. 현장을 둘러본 이산하는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악할 수 있나”라며 충격을 받고 절필을 선언한다. 이때의 심경을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거기서부터 시를 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마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조사하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다보니 너무나 참혹하고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이산하는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않는다. 1999년 늦여름 이산하는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를 내놓으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4·3은 미군정 시대 일어났다. 미군정은 당시 통치 주체이자 권력 담당자였고, 또 민간인 대량학살을 가져온 강경 진압과 초토화 작전을 입안하였으며, 작전권을 쥐고 있었다. 1945년 9월 9일 중앙청에서는 일장기(日章旗)가 내려지고 성조기(星條旗)가 게양되었다. 38선 이남 남한에서 미군정(美軍政) 3년이 시작되었다.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존 하지(John R. Hodge) 중장 휘하의 제24군단이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명령에 의해 38도선 이남의 점령군으로 결정됐다. 미군의 최초 진주는 제24군단의 인천 상륙이 있은 지 꼭 20일이 지난 1945년 9월 28일이었다. 오전 8시 미 보병 제7사단 무장 해제 팀이 LSM 2척을 이용해 제주항에 도착했고, 1시간 뒤인 오전 9시에는 제24군단의 항복접수팀이 C47 수송기 2대를 이용해 제주비행장에 도착했다. 이어 제59군정 중대가 11월 9일 제주도에 상륙했다. 미군정과 제주도민의 충돌은 1947년 3월 1일의 제28주년 3·1절 제주도 기념대회 때 시작되었다. <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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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읽는 4․3(1)

4·3정신
김경훈

뭘 가지고 4·3정신이라고 하는가?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
어둠에서 빛으로?

자주독립과 해방통일이
4·3의 정신이다

무엇이 4·3의 전국화 세계화인가?

4·3의 전국화는
중앙정부에 의한 지방의 희생과
한반도의 통일의지를
전국에 전파하는 것이다

4·3의 세계화는
미국이 4·3에 관여한 죄상과
자국의 자주의지를
세계에 전염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빛이요 평화요 상생이다
—————————————————4·3은 제주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문제이고 과제이다. 4·3평화공원에는 백비(白碑)가 놓여있다. 언젠가 이름을 찾아 새겨놓기 위해서다. ‘화산도’의 저자 김석범은 ‘4·3정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 정부를 부정하는 것이 나의 4·3정신이며 친일파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4·3정신을 계승할 수 없다!”고 했다. 미국이 4·3에 책임져야 할 근거는 무엇일까? 1947년 3·1절 집회에서 미군정 경찰의 발포로 인한 인명살상이다.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발발 이후 무력충돌의 격화와 대규모 희생을 낳을 수밖에 없는 강경진압정책의 선택이다. 5·10 단독선거에서 2개 선거구 선거 무산 이후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의 강경진압 작전이다. 정부 수립 이후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갖고 있던 미 군사고문단이 1948년 가을 이후의 초토화 작전에 직·간접으로 개입하여 학살을 부추긴 사실이다. 4·3의 화해와 상생은 바로 평화이다. 평화는 ‘분쟁과 다툼이 없이 서로 이해하고, 우호적이며, 조화를 이루는 상태’이다. 노르웨이의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평화를 직접적인 폭력이 없는 상태인 소극적 평화와 갈등을 비폭력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적극적 평화로 구분하였다.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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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시인 ‘김수영’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 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 다시 누웠다. //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 발목까지 / 발밑까지 눕는다 /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시인 김수영(金洙暎)이 현실적 자유주의의 절정을 노래한 ‘풀’의 전문이다.풀은 개인 또는 민중일 수 있고, 너인 동시에 나일 수 있다. 바람의 구속을 거부하고 풀의 자유를 노래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와 이를 위한 정치적 자유를 옹호하고 있다.김수영은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이승을 하직했다. 시인은 반주류(反主流)를 상징하며 현실을 비판한다. 시인은 당대에 부재한 자유와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노래한다. 독재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시인은 으레 정치적 자유를 노래한다. 주류의 처지에서 보면 그들은 매우 위험하고 불온한 세력이다.시인과 대치되는 ‘속물(俗物, snob)’은 원래 지위가 낮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지배계급과 중산층 이상의 사회에서 ‘유행만 좇는 귀족’이나 ‘잘난 체 하는 어리석음과 겉치레’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바뀌었다. 속물주의(俗物主義)는 금전이나 명예 따위에서, 먼 미래를 내다보기보다는 눈 앞에 닥친 이익에만 관심을 두고 행동하는 사고방식이나 태도를 보인다.“유명이 유명을 먹고, 더 유명한 것이 덜 유명한 것을 먹고 덜 유명한 것이 더 유명한 것을 잡아 누르려고 기를 쓴다. 이쯤 되면 지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의 대제도(大制度)는 지옥이다. 이 지옥 속의 레슬러들이 속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속물이다. 아무 것도 안 붙인 가슴보다는 지옥의 훈장이라도 붙이고 있는 편이 덜 허전하다.”시인 김수영이 ‘동서문화’에 에세이 ‘이 거룩한 속물들’을 쓴 것은 그가 횡사하기 한 해 전인 1967년 봄이다.그는 여기에서 5·16 이후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꿔 살아야 했으며, 세상의 거악에는 팔뚝질 못 하고 설렁탕에 왜 고기가 이거뿐이냐고 심술이나 부리며 사는 소시민의 속물성, 그 자체를 거침없이 자학하고 힐난했다. 속물은 모든 걸 돈으로 본다. 관직도 돈이고 시간도 돈이다. 밥상을 살리는 땅도 평당 얼마로 환원되는 부동산일 뿐이며, 사랑의 보금자리인 집도 고수익을 남기는 투자 대상일 뿐이다.속물들은 땅에 투자하면 속지 않는다는 뜻으로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외친다. 속물들은 공직자 청문회에 나와 ‘땅을 사랑하기 때문에’ 시골에 농지를 사놓았다고 뻔뻔스레 말한다. 사람이 돈의 논리로 무장한 것이 속물주의다. 4․19혁명을 통해 김수영은 비로소 시인으로 완성된다. 난해시에서 참여시로, 서정시에서 혁명시로 나아가던 그는 4·19 전에 내놓은 ‘하……그림자가 없다’에서 이미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고 하며 혁명을 예감한다.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적으로 싸워야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그림자가 없다…”김수영의 시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일체의 권위주의를 거부한다. 또한 개인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며, 추상적 자유주의를 넘어선 구체적 자유주의를 요청한다. 시인 김수영이 너무 그립다. 그의 사후 50주년을 기념해 지난해 ‘김수영 전집’ 결정판이 출간돼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 문학에서 김수영은 여전히 뜨거운 이름이다. 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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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정신으로 통일독립을 쟁취하자

김관후 kghoo21@naver.com 2019년 02월 26일 화요일 11:45   0면
[김관후 칼럼] 잠녀항쟁과 4.3항쟁으로 이어진 ‘3.1혁명’

# 3.1운동은 피 흘린 혁명 

“우리나라의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을 일으킨 원인이며 신천지의 개벽이니……우리 민족이 3.1헌전(憲典)을 발동한 원기이며 동년 4윌 11일에 13도 대표로 조직된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정부와 임시헌장 10조를 만들어 반포하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힘으로써 이족전제를 전복하고 5천년 군주정치의 허울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여 사회의 계급을 없애는 제일보의 착수였다. 우리는 대중이 핏방울로 창조한 국가형성의 초석인 대한민국을 절대로 옹호하며 확립함에 같이 싸울 것임.” 
–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大韓民國 建國 綱領)’ 중에서

임시정부는 충칭(Chongqing, 中慶) 시기에 임시정부 주변의 한국국민당(金九), 한국독립당(趙素昻), 조선혁명당(池靑天)을 합당함으로써 1940년에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정부 역량을 강화하였다. 이어 1941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공포하였다. 건국강령은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이라 정의하였다.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받아들인 건국강령은 ‘새로운 민주주의 확립과 사회계급의 타파, 경제적 균등주의의 실현’을 주창하였다. 

“3.1대혁명은 한국 민족이 부흥과 재생을 위해 일으킨 운동이었다. … 우리는 3.1절을 기념할 때 반드시 3.1대혁명의 정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3.1대혁명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은 바로 반일독립과 민주자유이다. … 자존과 공존, 민주와 단결, 기개와 도의, 자신과 자존이야말로 3.1대혁명 정신의 요체이자 전부라 할 수 있다.” 
– 1943년 ‘대공보(大公報)’에 실린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석(釋) 3.1혁명정신’ 중에서 

1943년 백범 김구는 중국 < 대공보> 지에 기고한 ‘석(釋) 3.1혁명 정신’에서 3.1운동을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다. 임시정부는 3.1경축식을 매년 성대하게 열면서 중국·인도·필리핀·대만·베트남 등지의 독립 운동가들을 초청했는데, 이때마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을 ‘한국혁명과 세계혁명의 조류가 만난 획기적 시점’으로 규정하였다. 
백범 김구는 “마땅히 분발하고 가일층 노력하여 3.1운동을 완성함으로써 미완의 혁명대업을 완수해야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의미를 “3.1대혁명은 한국민족 부흥을 위한 재생적 운동이다. 달리 말해 이 운동은 단순히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는 운동만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이 5000년 이래로 갈고 닦아온 민족정기와 민족의식을 드높이자는 것이다”라고 더욱 확대시킨다.
백범 김구는 ‘3.1독립선언’을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운동의 차원을 넘은, 한민족 안에 있던 ‘정기’와 ‘의식’을 새롭게 살리는 운동으로 파악한다. 그가 얘기하는 ‘3.1대혁명’의 기본정신은 즉 5000년 이래로 갈고닦은 민족정신 네 가지는 ▲자존과 공존정신 ▲민주와 단결정신 ▲기개와 절의 및 도의 정신 ▲자신감과 자존정신이다. 이 같은 민족정신이 ‘3.1대혁명 중에 최고조로 발양되었다’라고 백범은 3.1절 24주년이 되는 해에 동포들에게 고하며, 이를 계승, 발양(發揚)할 것을 당부했다. 

3.1운동은 민주주의 운동을 함유한 범민족적 투쟁으로 3월 1일에 단순한 독립정신의 의미만을 넣을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3.1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부른 것은 비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만이 아니었다. 해방 정국에서 쏟아져 나온 모든 언론은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자연스럽게 불렀다. 1946년부터 진행된 3.1기념식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불렀다. 
2019년 3.1혁명 100년, 대한민국 100년, 임시정부 100년의 해이다. 우리 헌법은 1948년 제헌헌법 이래 1987년 현행 헌법까지 아홉 차례나 바뀌지만, 전문에서 3.1운동이 빠진 적이 없다. 올해는 전국적으로 200만여 명이 참여했던 사상 최대의 민족운동 3.1운동이 100주년을 맞는 해다. 3.1운동은 민족의 독립을 약속한 ‘민주혁명’이다. 
이민족(異民族) 전제(專制)와 군주정치(君主政治)의 동시타파! 그 원동력은 3.1이었고, 3.1 대중의 ‘핏방울’이었다. ‘혁혁한 혁명’으로서의 ‘3.1대혁명’의 요체이다. 비폭력투쟁이 변혁의 동력임을 세계사적 모델로 실증해낸 게 우리의 3.1이다. 그야말로 ‘맨손 혁명’이었다.

# 대한민국 헌법과 3.1혁명 
 
​”3.1민족운동이라는 것이 일본정부의 유인(裕仁, 히로히토)정권 밑에서 제도를 고치자는 혁명이 아닙니다. 대한이 일본에게 뺏겼던 그 놈을 광구(匡救)하자는 운동인 만큼 혁명은 아닙니다. ‘항쟁’이라고 할지언정 혁명은 아니요. 혁명은 국내적 일이라는 게 혁명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태조가 고려왕조를 전복시킨 것이 혁명이고, 갑오의 운동이 혁명운동이고 우리 조선이 일본하고 항쟁하는 것은 혁명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여기다가 ‘혁명’을 쓴다면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이 ‘혁명’글자를 변경해서 ‘항쟁’이라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조국현(曺國鉉) 국회의원, 제헌국회 속기록에서 
 
​해방 후 제헌국회의 헌법 조문 축조심의에서 ‘혁명’, ‘항쟁’, ‘운동’ 등의 명칭이 논의되다가 ‘3.1운동’으로 결정됐다. 외세에 대한 저항을 ‘혁명’으로 부르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몇몇 의원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일어난 5·4운동을 중국은 ‘5·4운동’과 함께 ‘5·4혁명’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3.1절이라는 명칭은 역사적 유산에 걸맞은 이름이 아니다. 5․10총선거 이후 헌법을 제정할 때, 전문 초안에도 ‘3.1혁명’으로 표현됐다. 그러나 한민당의 조국현 의원이 “독립운동은 혁명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3.1혁명이란 명칭에 거부감을 나타냈고, 기존의 ‘혁명’이란 명칭을 사용하던 이승만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후 ‘기미삼일운동’이란 명칭으로 헌법 전문 수정안이 제출되었고, 사회를 맡은 이승만이 토론을 막은 채 수정안을 표결에 붙여 ‘재석의원 157인 중 가 91, 부 16’으로 통과됨으로써 3.1운동이란 명칭이 사용됐다. 반일독립의 민족운동의 시야로만 3.1운동을 해석하게 된 것이다.1948년 제헌국회가 개원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완수하기 위한 헌법 제정에 돌입했을 때3.1혁명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이다. ​유진오를 중심으로 한 헌법기초위원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는 문구로 헌법 전문을 초안했다. 3.1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고 곧 서른 명의 제헌 국회의원들도 찬동을 표했다.
그러자 이에 기존까지 3.1혁명이라는 용어를 고수하던 이승만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미삼일운동’이란 단어에 찬동을 표한다. 혁명이란 것이 국내의 정부를 번복한다는 것인데 원수의 나라가 이 땅을 지배한 것을 두고 ‘혁명’이라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논리에서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미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때 한인자유대회에서 3.1운동을 ‘1919년 혁명’, ‘역사상에서 최초로 있었던 혁명’, ‘비폭력 혁명’, ‘새로운 혁명’ 등으로 언급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더욱이 3.1혁명이라는 표현은 중국 관내의 언론이나 진독수(陳獨秀)같은 지식인도 사용했고, 심지어는 미국의 매체에서조차 ‘혁명봉기(Revolutionary Uprising)’ 등으로 언급한 적이 있었다. 

“유구한 역사의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 제도를 수립하며….” – 1948년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 헌법수정안 

# 잠녀항쟁의 배후 혁우동맹 

1919년 3.1혁명 이후 제주도(島)에서도 항일운동은 전개되었다. 제주도 내의 사회주의자들은 1925년 3월 신인회(新人會)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청년 운동이다. 신인회의 활동이 일제의 탄압을 받자 1925년 9월 제주청년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제주청년연합회는 청년 조직의 정비에 주력하고자 1928년 4월 10일 모슬포에서 제주청년연합회 총회를 열어 제주청년동맹으로 개편하였다.
1928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로 핵심 인물이 체포되고 제주청년동맹과 지부의 집회가 봉쇄되는 등의 탄압으로 활동이 위축되었다. 그 중에서도 1933년에 결성된 ‘제주도농민조합 사건’으로  많은 항일 운동가들이 일제에 붙잡혀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으로는 가장 많은 인원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사회주의 청년들은 ‘혁우동맹(革友同盟)’ 등의 비밀 조직을 결성하여 소년 운동이나 잠녀항쟁, 동아통항조합, 농민운동 등 생산 현장에서의 반일 활동의 배후로 활동하였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야체이카운동이자  잠녀항쟁을 지도한 ‘혁우동맹 사건’. 잠녀들은 일어선다. 1930년 이후 펼쳐진 잠녀항쟁의 주체로 그들이 등장한다. 그건 스스로를 지키려는 생존투쟁이었으며, 거기엔 잠녀들의 의식이 깨어있었기에 가능했다. 
제주지역에서는 법정사 항일투쟁, 조천만세운동과 함께 잠녀항쟁을 3대 항일운동으로 부른다. 그러나 잠녀항쟁은 다른 항일운동과 달리 여성이 주체였던 어민투쟁이었다. 잠녀항쟁은 1931~1932년에 걸쳐 구좌·성산·우도의 잠녀들이 생존권을 침해하는 일제와 해녀조합에 항거한 여성어민집단의 생존권 수호를 위한 운동이었다.
더구나 여성이 주체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야학을 개설했던 사회주의 계열 혁우동맹 청년들의 역할이 컸다. 혁우동맹은 1930년 3월 세화리 문도배의 집에서 결성됐다. 사회주의 항일 단체로 강관순(康寬順), 신재홍(申才弘), 오문규(吳文奎), 문도배(文道培), 김시곤(金時坤), 김성오(金聲五) 등이 중심이 되었다. 
1932년 1월부터 구좌읍에서 잠녀항쟁이 일어나면서 비밀 결사가 탄로되어 관련자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체포된 인물은 강관순을 비롯하여 김성오, 신재홍, 우봉준(禹奉俊), 이두삼(李斗三), 고자화, 정찬식(鄭贊植), 공덕봉(孔德奉), 고기창(高基昌), 강희준(姜熙俊), 양봉윤(梁奉潤), 윤대홍(尹大弘) 등이었다.
잠녀항쟁은 성산과 우도, 구좌 잠녀들을 중심으로 일제의 생존권 수탈에 항거하여 일으킨 운동이다. 이들은 혁우동맹 산하 하도강습소 1기 졸업생들로서 야학을 통해 민족교육을 받았던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고차동(고순효), 김계석 등의 잠녀 대표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운동은 청년 민족 운동가들과 연계하여 잠녀항쟁을 단순한 생존권 투쟁의 차원에서 항일운동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하였다.
 
# 4.3항쟁 도화선은 3.1절 발포  

항쟁(抗爭, resistance)은 국가 권력자들이 부당한 폭력을 휘두를 때 맞서 폭력을 쓰며 싸우는 것이다. 폭동은 사회에 폭력을 벌이는 것에 중점을 뒀지만, 항쟁은 특정 상대를 향해 맞서 싸우는 걸 말한다. 폭동이 감정 적에 더 가깝다면 항쟁은 이성에 따른 것에 가깝다. 
4.3항쟁의 도화선(導火線)은 1947년 3월 1일 제주읍내에서 3.1혁명 시위 군중에게 경찰이 무차별 발포, 사상자를 내면서 비롯되었다. 바로 3.1혁명 기념일이 바로 4.3항쟁의 시발점이다. 3.1혁명 제28주년 기념대회에서 ‘3.1혁명정신으로 한국의 통일독립을 쟁취하자’, ‘미국은 남한에서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평화적 집회를 가졌다. 이에 대한 미군정의 대답은 경찰 기마대의 무차별 발포였다. 결국 6명의 사망자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은 발포 사건을 정당 방위로 주장, 민심 수습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3월 10일부터 제주에서는 세계사에서도 드문 민관(民官)합동 대규모 총파업이 전개되었다. 이 파업은 발포 경관의 처벌, 경찰 수뇌부의 인책 사임, 희생자 유족 보상 등을 요구 했다. 파업에는 제주도청을 비롯한 도내 165개 관공서 국영기업 단체들이 참여했다.  도내 초․중등학교가 항의 휴교를 했고, 상점들도 이에 동참해 문을 닫았다. 
경찰 자료에 따르면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전 기관단체가 총파업을 실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제주출신 경찰관 일부가 파업에 동참했다가 파면당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미군정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본토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원들이 대거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군은 즉시 철수 하라!”, “망국 단독선거 절대반대!”,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조국통일 만세!”, “투옥 중인 애국인사 석방하라!” 

제주도지사가 외지 사람으로 교체됐고, 제주출신 경찰관들이 사표를 내거나 뒷전으로 밀렸다. 본토에서 파견된 경찰과 서북청년단원들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조금이라도 불평하는 주민들은 무자비하게 연행․ 투옥·고문했다. 심지어 억지로 죄인을 만들아 금품을 갈취하는 등 백색테러가 잇따랐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되었고, 긴장 상황은 계속되었다. 4.3 발발 직전까지 1년간 2500여 명이 구금되었다. 특히 1948년 3월에 들어서면서 조천․ 모슬포 지서 등지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 사회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때마침 ‘5․10 단선’ 결정으로 전국의 정치상항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좌파뿐만 아니라 김구․ 김규식 등 일부 우파와 중도파에서도 ‘5․10 단선’ 반대 대열에 나섰다. 제주 민중 역시 5․10 단선 반대투쟁에 점화, 1948년 4월 3일 경찰관서를 습격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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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사건, 3·1혁명

“3·1대혁명은 한국 민족이 부흥과 재생을 위해 일으킨 운동이었다. 우리는 3·1절을 기념할 때 반드시 3·1대혁명의 정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이 중국 ‘대공보’에 기고한 ‘석(釋) 3·1혁명 정신’에는 3·1운동의 성격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부른 것은 비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만이 아니었다. 해방 정국에서 쏟아져 나온 모든 언론은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자연스럽게 불렀다.
1946년부터 진행된 3·1절 기념식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불렀다. 이는 5·10 단독총선 결과로 탄생한 제헌국회의 제헌헌법 논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3·1운동을 3·1혁명으로 바꿔 부르는 방안에 대한 학계의 검토”를 요청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도 “3·1운동을 3·1혁명이란 용어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3·1운동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혁명(Revolution, 革命)이란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 또는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 등을 의미한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우리는 그 의미와 정신을 살려 촛불혁명으로 이어가고 있다. ‘3·1운동’을 ‘3·1혁명’이란 용어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3·1운동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해방 후 제헌국회의 헌법 조문 축조심의에서 ‘혁명’, ‘항쟁’, ‘운동’ 등의 명칭이 논의되다가 ‘3·1운동’으로 결정됐다.
외세에 대한 저항을 ‘혁명’으로 부르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몇몇 의원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일어난 5·4운동을 중국은 ‘5·4운동’과 함께 ‘5·4혁명’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3·1운동은 당장의 독립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실패했다는 냉소적 견해에서부터, 좀 더 정치적·이념적 대립으로 가자면 혁명이라는 말은 좌파 세력이 좋아하는 말이라며 3·1혁명이라는 말을 재조명하는 것조차 막으려 하기도 한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한국 근현대사의 쟁점과 과제를 연구해온 민족문제연구소는 몇 해 전부터 3·1혁명 100주년 기념 사업회를 운영, 3·1절에 제대로 된 이름 찾아주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3·1절이라는 명칭에는 역사적 의미가 충분히 포함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3·1독립운동은 민족자주 독립운동인 동시에, 민주주의운동이다. 상징적인 사실은 3·1운동 이후 대한제국(大韓帝國)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3·1운동은 민주주의운동을 함유한 범민족적 투쟁으로 3·1절에 단순한 독립정신의 의미만을 넣을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3·1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한 시민은 청와대 청원을 통해 ‘3·1운동, 3·1절 이름을 바꿔달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청원 글을 통해 “3·1운동이라는 표기는 일제에 의해 강제된 표현”이라며 “1919년 3월 ‘기미 독립운동’ 당시 언론의 표현은 ‘기미 정치 운동’, ‘기미 만세운동’으로 표현했으나 (나중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정치’, ‘만세’라는 표현 사용에 제약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명시된 3·1운동, 이제 이름부터 바꿔 대한민국의 역사 인식을 바로 세워 달라”며 “‘3·1독립운동 거사일’, ‘만세절’ 등 역사 인식을 담아낼 수 있는 용어를 하루빨리 찾아 달라”고 제안했다.
프랑스대혁명처럼 이전의 역사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국민이 주인이 된 시대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이며 혁명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3·1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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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제주문학

제1절 제주인과 일제강점기 문학

일제강점기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식민통치를 당한 35년간(1910∼1945)을 말한다. 한국민족은 그들의 식민지정책으로부터 자기민족을 보위하고 일제를 몰아내어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쟁취하려고 영웅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한국민족의 독립운동과 연합국의 승전으로 마침내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에서 쫓겨났다.
일제강점이 한국역사에 끼친 해독은 참으로 심대한 것이었다. 일본제국주의는 한말까지 꾸준히 전개되던 한국의 자주 근대화를 저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점기간 동안에 한국사회를 정체시키고 온갖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결국은 일제강점의 소산으로 남북 분단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민족이 타의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되어 고통을 받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강점으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여 민족과 민족문화를 보존, 발전시키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전신)가 조직되어 기관지 『한글』을 간행하고,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시작함과 함께 민족어와 한글을 발전시키려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문학부문에서도『創造』(1919)·『廢墟』(1920)·『白鳥』(1922)·『朝鮮文壇』(1924)·『朝鮮文藝』(1929)·『朝鮮詩壇』(1929)·『文藝公論』(1929)·『藝術運動』(1929) 등의 문학지가 창간되고, 한글로 된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창작되었다. 1920년대에는 프로문학도 형성되어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의 참상을 고발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제주문학은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활동들만이 포착된다. 작가들은 고향 의식과 관련되며, 때로는 당대의 현실을 비판한 경우도 있는데, 대체로 관념적 성향을 보여주었다. 제주문단이라면, 그것은 제주문인들의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가. 일제강점기 제주시단

한국시인이 쓴 시를 ‘한국시’라 하듯이, ‘濟州詩(제주시)’란 ‘제주시인’들에 의해 창작된 시라고 할 수 있다. 제주시인은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있거나. 제주에서 유소년 시절 이상을 제주에서 보내고 외지에 나아가 살고 있거나, 외지에서 태어났지만 제주에 정착해서 꾀 오랜 기일이 지나도록 살면서 활동하는 시인들을 말한다.
제주문단에 첫 씨앗을 뿌린 김문준(金文準) ․ 김명식(金明植) ․ 김지원(金志遠) 세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조천(朝天) 출신들이다.  1915년에 김문준(金文準)이 가사 형식으로 농민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農夫歌」가 제주인이 쓴 첫 번째 작품이다. 1920년대에는 김명식과 김지원)의 작품들이 주목된다.
김명식은 『東亞日報』 창간호에 발표한 봄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표현한 「새 봄」과 창간의 감격을 노래한 「비는 노래」를 발표했다. 1930년대에는 제주 해녀들의 애환을 다룬 「해녀의 노래」가 강관순(康寬順)에 의해 씌어졌고, 1940년대에는 김이옥(金二玉) 이 『흐르는 정서』라는 미간행 시집을 남겼다. 일본어로 씌어진 김이옥의 시는 당대 제주인들의 정서가 잘 반영되어 있다.

1. 김문준의 「농부가」

▲김문준

김문준(金文準, 1894년)∼1936)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호는 목우(木牛)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조천에서 태어났다. 1910년(융희 4) 3월 의신학교(義信學校) 보통과를 거쳐, 1912년 제주공립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1915년 3월 경기도 수원의 조선총독부농림학교(朝鮮總督府農林學校,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에 입사를 하였다. 졸업 동기생으로 백남운(白南雲)·이훈구(李勳求) 등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다. 같은 해 경기도 수원의 권업모범장에 취업하였다.
1915년에 『農林學校會』에 시「農夫歌(농부가)」를 발표한다. 개화가사의 형식을 띄는 「農夫歌」를 통해 저항ㆍ자주ㆍ개화의식을 강조하면서, 농부들의 생활을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살피고, 국가에서 농부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므로 2세기의 활동무대에 부각되는 농부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自然으로 터를 삼고 成實으로 武器삼아/ 本分盡守 는農夫 多情기 限量업고/ 駸駸日進 우리事業 東天朝日 氣勢로써/ 發達는 過渡時代 前途永遠 반갑도다/ 十代港口 五大鐵道 交通機關 發達니/ 十三道의 富源所産 輸出輸入 極便이라/ 이가온 힘을쓰 農夫心事 快시고/ 斯業發達 죠흔機會 千秋間에 처음일세// (後斂) 一年三百六十日에 날날마다 滋味집고/ 時刻마다 興趣만킨 農夫生活 뿐이로다/ 家給人足 國泰民安 農夫責任 아니런가/ 어화우리 農夫들아 日高三丈 둥둥 떴네// 守國에도 待濃夫요 富國에도 待濃夫며/ 여러 가지 工商業者 依賴農夫 泰山고/ 法治敎育 져事業과 學者藝者 져人物들/ 農夫信仰 神聖고 希望기 獨火로다/ 더군다나 東半島는 輸入輸出 通商에/ 農夫로써 對象삼고 農夫로써 主人삼네/ 그와흔 壯形勢 農夫福音 이 아닌가/ 二十世紀 活舞臺에 世界的의 農夫되셰(大正三年十一月二十日稿) -김문준의 시 「農夫歌」(1915년에 『農林學校會』).

그후 1918년 4월 제주도 정의공립보통학교(旌義公立普通學校)와 구좌중앙보통학교(舊左中央普通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구좌중앙보통학교에서 1925년 3월부터 1927년까지 교장을 지냈다. 일본의 심한 간섭으로 1927년 7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목격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한 그는 1927년 10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 오사카조선노동조합(大阪朝鮮勞動組合) 집행위원 및 동 노동조합의 북부지부 상임집행위원에 취임하였다. 이어 12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新幹會) 오사카지회를 창립하였다.
1928년 5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 1929년 4월 제주도 출신 송성철(宋性澈) 등이 제주출신 소년들을 규합하여 오사카조선소년연맹을 결성하게 하고, 가을에는 오사카시 히카시나리구(東成區)의 중소 고무공장에서 1,000여 명의 노동자를 끌어들여 오사카고무공조합을 결성했다. 1929년 12월 관서지방협의회(關西地方協議會) 집행위원장 등에 취임하여 일본에서 조선인 노동자의 권익향상에 힘썼다.
1930년 1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해소하고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약칭 全協)에 합류하는 데 반대하여 전협 산하의 한국인위원회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일본 선박업자들의 횡포에 맞서 ‘우리는 우리의 배로’라는 구호 아래 제주 출신들이 오사카와 제주를 왕래하기 위해 제주통항조합준비위원회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1930년 4월에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해 복목환(伏木丸)이 취항하였다.
1930년 4월 오사카노동조합 북부지부를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오사카화학노동조합에 통합하고 그해 5월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일본화학산업 노동조합 대판지부로 개칭한 후 책임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해 5월부터 8월까지 노동대중에게 혁명의식과 항일투쟁을 고무하는 내용의 「뉴스」및 격문을 비롯하여「第2無産者新聞」등을 제작 배포하여 사회주의 의식함양과 반제투쟁을 고무 격려하였다.
1930년 8월 오사카의 고무공장노동자 파업을 준비하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사카이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4월 12일 오사카공소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투옥 중에는 조몽구(趙夢九)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화학노조 오사카지부 책임자가 되어 투쟁을 계속하였다.
일제 경찰은 “1930년 8월 17일 오사카에서 천호모공장 쟁의 비밀지도부 회의 중 거괴(巨魁) 김문준(당시 일본화학산업노조 오사카지부 상임) 등 조선인 5명과 일본인 3명을 검거하였다.”고 밝힐 정도로 김문준을 높이 평가하였다.
출감 후인 1935년 6월 15일 오사카에서 한글신문이었던 『民衆時報(민중시보)』를 창간해 조선인들의 생존권 투쟁과 권익옹호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후 1936년 5월 25일 수감 생활 중 폐결핵이 악화되어 오사카 도네야마치료소에서 치료 중 숨을 거두었다.
일본의 패전 후 일제와 투쟁한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오사카성공원에 ‘현창대판사회운동지전사(顯彰大阪社會運動之戰士)’라는 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에 김문준·조몽구도 일본인과 함께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활동이 일본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제주시 조천읍 조천공동묘지에는 당시 일본에서 보내온 비석이 서 있다. 비문은 고순흠(高順欽, 1893~1977)이 썼으며, 김문준의 문하생이었던 김광추(金光秋)가 대표로 운구위원이 되어 유해를 옮겨 도민장(島民葬)을 거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으로 조천리민장으로 결정하고 안세훈(安世勳)․ 김유환․ 김시용 등이 당시 일본에 있던 고순흠과 연락을 취하면서 1937년 3월 25일에 조천공동묘지에 김문준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2000년 8월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김명식의 「비는 노래」와 「새 봄」

▲김명식

송산(松山) 김명식(金明植, 1891~1943)의 본관은 김해. 자는 경덕(景德), 호는 송산(松山) 또는 솔뫼. 아버지는 정의현감이었던 김문주(金汶株)이다.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고향 의흥학교(義興學校)에서 초등과정을 마쳤다. 1908년(순종 2) 한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를 거쳐, 1911년 4월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1910년 한성고등보통학교 졸업을 앞둬 겨울방학에 고향으로 내려와 연북정으로 찾아갔다. 어릴 때의 벗 홍두표(洪斗杓:1891~1977)와 고순흠(高順欽:1893~1977)을 불러냈다. 더구나 이 연북정은 김명식이나 홍두표, 고순흠 등이 배웠던 의흥학교의 옛 건물이 아닌가! 
세 동지는 자연 얘기의 화두가 ‘나라는 망했으니 우리들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말로 이어졌다. 먼저 태어난 순서로 산(山), 동산(園), 바위(巖) 등 그 크기 순서로 정하여 그 산이나 동산, 또 바위와 같이 변하지 말자고 다졌다. 이어 산이나 동산이나 바위의 틈에 끼어 자라나는 송매죽(松梅竹)과 같이 변절하지 않은 기개로 끝까지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워 국권을 회복하자고 맹세하였다. 
이러한 뜻에서 각자의 아호(雅號)는 김명식은 송산(松山), 홍두표는 매원(梅園), 고순흠은 죽암(竹巖)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다음 이를 지킬 징표(徵表)로 ‘천지위서(天地爲誓) 일월위증(日月爲證)'(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저 해와 달은 이를 증명할 것이다.)이란 여덟 글자를 혈서(血書)로 썼다. 이를 세한삼우(歲寒三友) 송매죽의 혈맹결의(血盟結義)라 한다. 이때의 김명식이나 홍두표는 22세요, 고순흠은 20세 되던 해의 일이다. 
그 후 제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 김명식은 와세다대학 재학 당시 신입생들에게 “고국을 떠나 적지 일본으로 들어왔으니 이제 실력을 쌓아 조국을 생각하는 인재가 되자”고 역설하였다. 유학생의 단결과 배일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신익희(申翼熙)·안재홍(安在鴻)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조선인유학생학우회 간사부장을 지냈다.
1916년 4월 15일에 조선인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한 대학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적국에서 배우려는 의미를 논함’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하였고, 이후 조선인유학생학우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14년 4월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였던 『學之光(학지광)』을 편집하였고, 1919년에는 2·8독립선언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시조 주몽(朱蒙) 연 땅에/ 천수제(天授帝·고려 태조 왕건)가 지은 이름/ 산고수려(山高水麗) 장할시구/ 단목(檀木·박달나무)에 움이 나고/ 근화(槿花·무궁화)가 새로 필 때/ 동아일보 탄강(誕降)하다/영락제(永樂帝·명나라 3대 왕)의 포부이며/ 을지공(乙支公)의 정신이며/ 원효(元曉)의 자비이며/ 왕인(王仁)의 문화이며/ 서희(徐熙)의 용맹이며/ 개소문(蓋蘇文)의 기개이며/ 신숭겸(申崇謙)의 혼백이며/ 성삼문(成三問)의 구설이라/ 소리소리 정의(正義)이며/ 말말이 인도(人道)로다/ 남해는 깊고 깊고/ 백두는 높고 높다/ 동반도(東半島)/ 만년지(萬年紙)에/ 한양 평원 벼루 삼고/ 한강은 연수(硯水·먹을 갈기 위해 벼루에 붓는 물) 삼고/ 남산은 먹을 삼고/ 송백엽(松柏葉·소나무와 잣나무 잎) 붓을 매고/ 단목(檀木) 같이 굳은 뼈와/ 근화(槿花) 같이 고운 고기/ 설총(薛聰)의 지은 말로/ 세종(世宗)의 만든 글로/ 김생(金生)의 체를 받아/ 무궁무진 써내어/ 남해같이 깊은 내용/ 백두같이 높이 들어/ 질풍악우(疾風惡雨) 겁내지 않고/ 여천동수(與天同壽) 하오리라’- 김명식의 시「비는 노래」(『東亞日報』창간호, 1920년 4월 1일).

‘대리(大理)가 동(動)하다/ 고료(孤廖·외로움)가 파하다/ 상설(霜雪)이 갔다/ 견빙(堅氷)이 풀렸다/ 막힌 샘이 흐르고/ 붉은 산이 푸르다/ 아! 봄이로구나/ 봄이 왔다 봄이 왔다/ 어디에 어디에/ 어둠의 근역(槿域)에/ 마귀도 가고 사탄도 가고/ 파리 떼도 가다/ 일기가 따습고/ 바람이 가볍다/ 새가 울고 꽃이 피고/ 나비가 난다/ 저 무궁화 고운 꽃에/ 나비가 앉는다/ 꽃송이 속에 입부리를/ 깊이깊이 찔렀다/ 두 날개를 너울너울/ 꽃 종자를 날린다/ 황금도 명예도/ 권력도 없다/ 저 꽃에 저 나비에/ 다만 뜨거운 사랑의 결정(結晶) 뿐이다/ 아 황금의 무용(無用) 권력의 패배/ 정(情)의 세계 사랑의 승리/ 아! 사랑 아! 사랑/ 새 봄의 새 사랑’-김명식의 시 「새 봄」(『東亞日報』창간호, 1920년 4월 1일).

1920년 4월 1일 『東亞日報』 창간에 참가하여「大勢와 改造」라는 장문의 논설까지 썼으며, 「니콜라이 레닌은 누구인가」를 연재해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주의 사상을 소개하였다.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1920년 4월 11일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적 노동단체였던 조선노동공제회에 제주출신 고순흠(高順欽)과 함께 평의원으로 참가하였으며, 박중화(朴重華) ·박이규(朴珥圭) 등과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를 조직하고, 간부로서 근로대중을 위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기관지 『共濟』를 발행하여 근로대중의 계몽을 꾀하기도 하였다.

▲김명식의 기고문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던 1920년 6월 28일 경향 각지에서 조직되고 있던 청년회의 연합통일체를 조직하기 위해, 장덕수(張德秀)·오상근(吳祥根)·장도빈(張道斌)·박일병(朴一秉)·안확(安廓) 등 50여 명과 함께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를 발족시켰다.
이어 그해 12월 서울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전국 각지의 116개 청년 단체의 대표자 124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고, 지방부 집행 위원에 선출되었다.
1921년 1월 장덕수·오상근 등과 함께 조선청년회연합회를 중앙에서 지도할 목적으로 서울청년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노동운동에도 참여하여, 1921년 3월 조선노동공제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 제2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2년 1월 박희도(朴熙道)에게 출판사를 설립할 것을 권유,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창립하게 하고, 사장 박희도, 전무이사 이병조(李秉祚)와 더불어 이사 겸 주필에 취임하여, 월간지 『新生活』을 발행하였다. 또한, 신일용(辛日鎔)·유진희(兪鎭熙) 등을 기자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김명식이 1921년 6월 3일부터 8월 31일까지 61회에 걸쳐 『東亞日報』에 쓴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는 조선에 공개적으로 소개된 최초의 볼라디미르 레닌(Lenin) 일대기였다.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해 있던 김명식은 레닌의 지원 자금이 국내로 들어와 1922년 3월 동아일보를 떠나 사회주의사상의 전파와 운동의 길로 나선다.
1922년 11월 ‘러시아혁명 5주년 기념호’로 발행된 『新生活』 11호에 게재된 김명식의 ‘러서아혁명 5주년기념’, 신일용의 ‘5년 전의 금일을 회고’ 등의 글이 ‘적화사상’을 선전했다고 해 재판에 회부되었다.
공판에서는 단연 방청객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이가 있었다. ‘공산주의에 찬성하는가?’라는 재판장의 질문에 ‘마르크스의 사상에 공명하며 연구하고 찬성하오’라고 당당히 답하며, 공판을 사회주의사상의 선전장으로 활용한 신생활사의 주필 송산 김명식이 바로 그였다.
  1923년 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김명식은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시달리다 이후 제주도에 내려왔다가 1927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협동전선체였던 신간회 제주지부가 결성되자 지회장을 맡았다. 이때 송종현(宋鍾炫)은 간사였고, 강창보(姜昌輔)와 김택수(金澤銖)는 회원이었다.
 
“합병 이후 근대적 의미와 색채를 가진 필화와 논전은 동아일보가 선진(先進)일 듯하다. 그리고 동아일보 창간시대의 조선 청년은 사상적 기근이 극도에 달하였었다. 재래사상으로부터는 이탈하였지만 그 빈자리에 채울 만한 신사상은 얻지 못하였다. 무슨 자유니 무슨 자결이니 하는 의미를 아는 자 적었고 또 알려주는 자 없었다. 일찍 문예부흥이니 종교혁명이니 하는 말과 미국에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이 있었고 불국(佛國)에 대혁명이 있었고 영국에 산업혁명이 있었단 말은 들었지마는 그들이 모두 무슨 사상과 주의의 실현인지 아는 자 적었고 또 알려주는 자 없었다. 더구나 로서아의 신(新)사실은 물을 곳이 없었다. 이러한 시대에 동아일보는 나왔다. 그리하여 국제연맹과 윌슨의 평화원칙을 알려 주었다. 또 루소와 몬테스큐를 전하고 아담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을 전하고 또 루터와 칼빈을 전하였다. 그럼으로 사상에 주리든 청년들의 동아일보로 향함은 분천(奔川·흐르는 물)을 급히 따라가는 갈마(渴馬·목마른 말)와 흡사하였고, 동아일보에는 청년 사상의 원천인 관(觀)이 있었다.”- 김명식의 「필화(筆禍)와 논전(論戰)」(『三千里』, 1934년 11월호).
1930년 오사카에서 조선인 노동운동을 지도하다가 검거돼 일본의 오사카형무소에 재수감된 뒤 『新生活』 필화 사건의 남은 형기 동안 복역하였다. 1938년쯤에 고향에 돌아왔고 일제의 고문으로 건강을 크게 해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국제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1940년 4월 1일부터 10일까지 7차례에 걸쳐 신문 기고로는 마지막으로 보이는 「제1차 대전 후의 세계사」를 『東亞日報』에 연재하였다.
이 연재물에서 “역사관의 허무사항은 금물이며, 인류문화는 쉬지 않고 향상한다. 어떤 시기에 어느 문명이 파멸되어도 다른 문명이 생겨 그를 대신한다.”며 인류문화의 연속성을 역설하였다.
창씨개명을 완강히 거부하는 한편, “사망신고는 조국광복과 민족해방이 되거든 하라, 내 눈 부릅떠 일본이 멸망하는 꼴을 똑똑히 보고 나서 눈감겠노라”는 유언을 남기며 세화리에 있는 차녀 김순실의 집에서 해방을 2년 앞둔 1943년 4월 11일 눈을 감았다.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명식이 쓴「로서아의 산 文學」(『新生活』1922.4) ․「戰爭과 文學」(『三千里文學』1938.4)은 대표적인 문학평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형 김형식(金瀅植)도 일찍이 『朝鮮文藝』(1917~1918)에 한시 2백여 편과 한문 30여 편을 발표한 바 있어, 이를 2004년 북제주문화원에서 『革菴散稿』번역본으로 출판하여 관심을 끈 바 있다.

3. 김지원의 「울안의 盟誓」
“날즘생도 제깃을 차자드는데/ 굼벵이도 제궁에 숨어 자는데/ 눈보라 휩뿌리는 이깁흔 겨울밤/ 내터를 등지고 어데로 가는고/ 흰옷입은 파리한 얼골들이여/(……….)/남전북답 집안세간 황소뺏긴 선물이니// 악착한 괴물에 피를빨리고/ 영폭한 아귀에 고기를 뜻겨/ 뼈만남은 앙상한꼴 내쫏기는 무리여(………….)-淸津驛에서(1926.12.10)” – 김지원의 시「내쫏기는 무리
들」 부분.

‘날짐승도 제 말을 쓰거든/ 들짐승도 제 말을 쓰거든/ 하물며 사람에게 제 말이 없을까 보냐// 집은 없어지고 세간을 잃었다 헤도/ 혀는 뽑히고 두 손은 묶였다 해도/ 차라리 칼을 물고 없어질망정/ 어찌 내 마음 내 말이야 뺏길까 보냐// 오로지 사람된 이여/ 내 마음을 한쪽 가진 신이여/ 제 마음 나타내는 제 말을’(1927.1.5)-김지원의 시 「제 말 제 마음」전문.

“참사랑 죽이면 죄인이 된다/ 세상도 참부숴 죄인이 된다/ 탈박쓴 인생은 죽여야겟다/ 거짓된 세상은 불살을진뎌/ 필연의 불법은 이러케 당했다// 거짓을 얼사안고 곤두박질을 친다/ 사람은 사람을 싸먹고 배를브린다/ 종족은 종족을 깨물고 버터져간다/ 이놈의 세상은 이러케 싸노앗다(1927.4.2)” -김지원의 시「必然의 律法」.

김지원(金志遠, 1903~1927)은 조천 출신으로 12세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갔고, 서울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1924년부터 1927년 사이에 일본 도쿄와 서울을 왕래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조선문단

『朝鮮文壇』과『朝鮮日報』 등을 통해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27년에 행방불명되었다. 『朝鮮文壇』은 1924년 10월 1일자로 창간된 문예잡지이다. 이광수(李光洙)가 주재(主宰)하고, 방인근(方仁根)이 자금을 전담, 편집 겸 발행인이 되어 조선문단사를 차려 발행했다.
김지원은 양주동(梁柱東)·이태준(李泰俊)·나도향(羅稻香) 등과 교류하였으며 시 25편과 산문 2편을 남겼다. 초기에는 퇴폐적이고 허무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는 작품을 쓰다가 점차 시대적인 문제를 포착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1920년대 지식인들의 내면세계를 정밀하게 드러내고 시대적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작품을 썼다는 점에서 근대 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차지한다.
김지원은 1924년 『朝鮮日報』에 시 「깨어진 칠보탑」과 『金星』에 「나의 기원」을 발표했으며, 1925년 『朝鮮文壇』에「哀願」과 「거지 할미」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다. 또 이듬해「에도(江戶)의 풍경」(『朝鮮日報』) ․「유곽」(금성) ․ 「마즈막 올리는 祈禱」(조선문단) ․「火山의 노래」(『朝鮮文壇』) ․ 「NHIL」(『朝鮮文壇』) ․ 「허무의 왕국」(『朝鮮文壇』) 등 여러 편, 1927년 「울안의 盟誓」(『東亞日報』) 등 여러 편, 1928년 「새해맞이」(『朝鮮日報』)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의 작품은 시대상황과 당시의 심경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어떤 작품에서는 사회와 문명 비평적 시각도 매우 번득인다. 초기에 허무적인 작품을 발표했지만, 후기에는 사회적 자아에 눈을 떠 민족의 현실을 노래하였다. 그의 호적에는 “단기 4260(1927)년 5월 1일 오후 2시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2,152번지에서 사망, 동거자 金錫推 단기 4294(1961)년 8월 28일 신고”라고 되어 있다.

“내 밤반〔夜半〕에 일어나 울안을 한 바퀴 돈다/ 별빗이 아롱진 고요한 밤의 꿈조차 조는듯한데/ 내홀노일어나 울안을 한바퀴돌다/ (……….)/ 내 밤반에 거듭일어나 무덤가 髑體를 어루만즈다/ 검푸른 불빗이 감박이는 무덤가 구진비 나리는데/ 내홀노 엄니를 떨며 무덤가 촉루를 어르만즈다/ (…………)/ 내빔빈에 세 번째 일어나 하날을 대처나를갈다/ 圓光이무르녹는 놉다란하날 北斗조차 나려다보는데/ 내홀노일어나 주먹을쥐고 하날을 대처 나를갈다/ 촉누가 거의된 이꼴일망정 그래도/ 숨결은 불타올으니 文明의 利器는 못가젓을망정/ 독기와 화살은 새로윗노니/ 나를갈며 나를갈며/ 내원수를처/ 거짓을 깨치노라/-1927 仲秋 마지막선언에서(1927.11.24 동아)-김지원의 시「울안의 盟誓」.

4. 강관순의 「해녀의 노래」

“우리는 가엾은 제주도의 해녀들/ 불쌍한 살림살이 세상도 안다/ 추운 날 무더운 날 비거 오는 날에도/ 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어린 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 종일 헤엄치나 번 것은 기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이른 봄 고향 산천 부모형제 이별하고/ 온 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어/ 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각처 조선․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가간 설치해 놓고/ 우리의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가엾은 우리해녀 어데로 갈까”-강관순의 시「해녀의 노래」전문.

강관순(康寬順 : 1909~1942)은 사회주의운동가로 1932년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저항하기 위해 일어난 제주도해녀투쟁(일명 ‘세화리 해녀항쟁’)을 주도하였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옥중에서 작사하여 항일운동가로 널리 불리던 「海女의 노래」가 전해진다.
필명(筆名)은 강철(康哲). 본관은 곡산(谷山), 강대길(康大吉)의 차남으로 구좌읍 연평리 929번지에서 태어났다. 우도(牛島)의 영명의숙(永明義塾)을 마치고 1926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 모교 영명의숙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계몽극을 만들어 공연도 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문맹 퇴치 운동도 하여 부녀자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제주청년동맹에서 활동하였던 청년들은 1930년 이후 새로운 형태의 비밀 조직에 나섰다. 이 시기 가장 주목되는 비밀 조직은 1930년 3월 구좌면 일대에서 결정된 혁우동맹(革友同盟)이었다. 혁우동맹은 제4차 공산당에 가입하였던 신재홍이 주도하였다.
신재홍(申才弘:우도)은 1930년 구좌면 세화리 문도배(文道培:세화)의 집에서 오문규(吳文奎:하도)․ 강관순․ 김성오(金聲五:우도)․ 김순종․ 김시곤(金時坤:세화)․ 부대현 등을 규합하여 혁우동맹을 조직하였고, 조직은 사회주의 이념 하에 민족 해방을 목표로 내걸었던 비밀 결사였다.
 강관순은 1931년 6월 상순 자택에서 신재홍의 권유로 제주도 야체이카 결사의 당외(黨外) 기관원으로 가입, 또 동지 김성오와 함께 우도의 고자화(高子華) 집에서 고봉준(高奉俊), 고원한(高元瀚)과 회합하여 ‘적(赤)’이라고 칭하는 당외 기관을 만들어 강관순은 연락부원, 김성오는 청년부원, 고원한은 여성부원, 고자화는 농민부원이 되어 적(赤)을 순차적으로 좌경화․ 급진화하는 방향으로 전환을 도모하였다.
  1932년 1월부터 해녀항일운동이 일어나면서 비사(秘社)의 내용의 탄로되어 일경에 체포되었다. 당시 김성오(金聲五)․ 강관순(康寬順) ․신재홍(申才弘)․ 우봉준(禹奉俊)․ 이두삼(李斗三)․ 고자화(高子華)․ 정찬식(鄭贊植)․ 공덕봉(孔德奉)․ 고기창(高基昌)․ 강희준(姜熙俊)․ 양봉윤(梁奉潤)․ 윤대홍(尹大弘)․ 고한조(高漢祚) 등 13명이 검속되고 그는 1933년 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자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강관순은 옥중에서 「海女의 노래」 4절을 지었는데 마침 동지 오문규를 면회 왔던 오문규의 부인 홍무향이 이 노래의 가사를 몰래 건네받아 청년 운동가에 전해진 것을 당시 「도쿄(東京) 행진곡」의 곡조에 부쳐 부른 것이다.
이 노래는 전도에 파급되고 출가 해녀에 의해 한반도 및 일본중국까지 전파되어 당시 제주의 노래로 불리어졌다. 형기를 마쳐 출옥하자 동지 김성오와 함께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원산(元山)으로 건너가 항해사 을종(乙種) 시험을 치러 합격, 김성오는 승선의 길을 택했으나 그는 옥고로 말미암아 몸이 허약하여 주저앉았다.
 1942년 봄 함북 청진(淸津)에서, 고문과 옥고에 시달린 결과로 폐병으로 병사, 부인 김유생(金有生)이 만삭의 몸으로 남편의 시신을 고향으로 반장(返葬)하였다. 부인은 이후 유복녀와 함께 우도에서 정열(貞烈)을 지키며 살았는데 그 미모를 탐내어 젊은이들이 늘 괴롭히자, 하루는 동네 향회에 나가 내 X은 내 서방 강관순이 죽으면서 같은 날, 같은 시에 같이 죽어버렸으니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외쳤다. 이에 우도 사람들은 참으로 강관순의 아내다운 모습이라고 칭찬하였다.
1996년 여름 우도의 선착장에 그의 「海女의 노래」 비(碑)를 세웠다. 또 해녀 항일 운동의 진원지 세화에도 「노래비」가 세워졌다.

5. 김이옥의 「슬픈 해녀여」

“해녀야/ 깨어 있느냐// 春三月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바다에/ 비바리 裸身을 내던져// 영차 영차 가는 곳은 어드메냐// 바다 속/ 전복 소라의 나라에/ 주인이사 기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검은 몸뚱이의 풍만함이 애처롭구나”-김이옥의 시 「海女 1」.

김이옥(金二玉, 1918~1945)은 제주시 이도동 출신으로 소년 시절부터 주로 일본에 살면서 고장노동을 했다. 광복 직전 화재가 발생하여 책과 원고들이 소실되었다. 김이옥은 ‘김영(金影)’․ ‘황야경작(荒野耕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1944년 귀향하여 일본어로 쓴 47편의 시를 적은 육필시집을 최길두(崔吉斗)에게 맡겨두었다.
최길두는 해방후 창간한 동인지『新生』에 보관하고 있던 육필시집을 『흐르는 情緖』라는 미간행 시집으로 소개하고, 일부 작품을 번역하여 실었다.
『新生』에는 “삼십을 종막으로 불행히도 요절해 버린” 그에 대한 시평과 추도의 글도 실려 있다. 김영(金影)의 시 「破船」은 김이옥의 작품이다.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의 ‘탐라문화총서(13) 『濟州文學(1915~1945)』(1995)’에 김이옥의 작품 중 「이여도」, 「해녀(海女)·1」,「해녀(海女)·2」,「슬픈 해녀여」,「나의 노스탈쟈여」,「먼 타향에서」,「방고애부(訪故哀賦)」, 「옛성에 과거를 묻지 말아라」, 「나는 시인(詩人)」,「사랑스런 나의 집」 등 37편의 번역시가 일본어 원문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조급히 흐르는 물살에 바위를 두드리면/ 어두운 램프에 떠올라 보인다/ 검은 안색에/ 눈시울 적시고 있는 슬픈 해녀여/ 생명 짧은 처녀이기에/ 멋부리는 심정에서 사온 치마를/ 벽에 그을린 채 바다에서 지새노라면/ 나오누나 가느다라이 휘파람 한숨”-김이옥의 시「슬픈 해녀여」.

6. 최길두의 「無題 5-監獄」

“내 故鄕은/ 섬의 나라라/ 파-란 물결 춤을 춰 좋아라// 情든 땅/ 꿈의 나라라/ 하-얀 燈臺 깜박여서 좋아라// 밤이면, 離別의 뱃고동에/ 섬 색시에 젖는 옷고름// 떠나는 눈물 수건에 그 안타까움/ 어찌 안 좋아// 오/ 내 고향/ 동백꽃 피는 나의 고향/ 상처도 가지가지매/ 어쩌라고 안 그려요 글쎄/ 내 故鄕은/ 섬의 나라라/ 물새들 날아 좋아라/ 情든 땅/ 꿈의 나라라/ 人魚떼 울어 좋아라// 날이 새면-갯변가에/ 靑春의 피리 불던/ 사랑의/ 曲調曲調에/ 그 옛이라 안 좋은가.// 아하/ 내 故鄕/ 구름 피는 나의 故鄕/ 옛 자취도/ 갖이, 갖이매/ 어쩌라고 안 그러 글쎄”-최길두 시 「故鄕의 노래」(1938) .

“水精보다도 맑은 純潔의 젖줄/ 사탄 뒤끓으는 地獄으로 하여금/ 人間像의 不幸한 사랑의 나그내.// 가시밭길 흙탕길 죽음길 걸었나니/ 그 이름도 아름다운/ 人類의 십자가여”-「十字架」(1939).

최길두(崔吉斗, 1917~2003)는 제주시에서 태어나 시·소설·시나리오·무용가극 등을 두루 써 온 작가로 활동하다 2002년 85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제주공립보통학교와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 구례군농회기수(農會技手)와 제주도농회기수를 지냈다.
그는 1937년 「絶望」을 비롯하여 「鄕土의 꿈이」·「無心」·「懷鄕」·「懺悔」 등을 1938년에 「思想)」·「故鄕의 노래」·「暮景)」등을, 1939년에 「平生」· 哀戀」·「四行詩」 등을 내놓고 있다. 1944년 11월 일본에 거주하던 시인 김이옥(金二玉)이 고향을 방문하였을 때, 그의 시 47편을 옮겨 적어 유실을 막기도 하였다.

“-너는/ 妖邪스런 魔女에 사랑받는 慘酷의 獸柵/ -醜惡을 좋아하는 구대기의 凱歌/ -冷血動物의 個性있는 世界/ -人爲的인 地獄을 자랑하는 文明의 허울 좋은 鐵面皮의 化粧師/ -世紀의 冒險的인 자랑/ -無錢家의 住家/ 故鄕 잃은 猛虎떼의 우리./ 그리고 無慙한 屠殺場// 오 너희들의 反省없는/ 人面獸心의 얼굴이여/ 또 만나리라/ 나의 巨强한 思想의 鐵馬는// 너희들의 腐敗한/ 鄕愁가 그립단다/ (제주도 淸津事件에서 獨房)”-최길두의 시 「無題 5-監獄」(1943).

대동아전쟁으로 어용(御用)은 가중되고, 젊은 학도들은 징병이란 이름으로 끌려갔다. 전쟁의 암운은 거칠기만 하였고, 전방은 농무(濃霧)로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콩나물이 시루 속에서 자라듯이 제주도에서 항일청년들의 모임인 비밀독서회가 결성이 되고, 바로 그 중심에 최길두가 있었다.
40년대 초부터 뜻있는 지식인청년들이 비밀독서회를 조직, 일어로 번역된 세계사상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조선이 나아갈 길에 대해 토론했다. 최길두는 회장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비밀독서회는 일주일에 두 번 모였다.
최길두의 집과 광인청년으로 통하는 이상희(李相熙)의 집이었다. 이상희는 머리는 깎지 않고 고슴도치 모양이며, 신발은 짚신에다 너덜한 한복차림이었다. 일경의 눈을 피해 광인으로 분장하고 징용을 피하였다. 이상희는 한국전쟁 당시 바다로 끌려가 아깝게도 운명하였다.
비밀독서회는 처음 7명이 결속된 모임이었다. 최길두를 비롯, 이상희․ 김운제(金雲濟)· 김귀석(金貴錫)· 정기준 ․조수인․ 윤한구(尹漢九)등. 한 달에 한 번은 산천단에서 회합을 열었다. 니이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도취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전황(戰況)은 어떤가? 정말 조선민족이 독립될 수 있을까? 피 끓는 청년으로써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그들의 공통된 과제가 되었다. 당시 일본군대본영(大本營)은 그들의 허위선전을 통하여, 그들의 패배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황군(皇軍)의 대승리를 조선민중에게 선전하고 있었다.
이들 독서회원들은 조선민족의 독립을 갈구하며 이를 위한 국제성세의 상황인식을 위해 비밀리에 단파수신라디오를 구해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李承晩)의 「2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했다.
독서회의 멤버가운데 김운제와 김귀석은 일경(日警)의 감시가 심해지자 모의소령(謀議蘇領)이 가까운 청진으로 가서 불라디보스토크로의 탈출을 시도하다가 함경북도 변경마을에서 일본군국경수비대에 체포된다. 당시 청진일보와 경기일보는「不逆朝鮮人一抹打盡」이라는 기사로 자세하게 보도한다. 이것이 바로 청진단파사건(淸津短波事件)이다.
두 사람은 12월 추운 겨울 청진감옥에 수감이 되었다. 모진 고문이 이어지고 이들은 제주도 친구들을 불기 시작했다. 청진경찰서 특별수사반은 급기야 명단을 가지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가장 주목했던 것은 누구의 지도와 사상적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가 바로 최길두였다.
최길두는 형사대의 습격을 받고 수감되었다. 최길두가 징용을 피하고자 제주보통공립학교 위촉강사로 몸담고 있을 때였다. 청진단파사건은 태풍이었다. 감방은 초만원이었다. 1945년 1월 3일 관련자 12명이 검거된다. 최길두를 비롯 이상희 고영수(高榮洙)․ 김용수(金瑢洙)․ 윤한구(尹漢求)․ 오기윤(吳基允)․고창위(高昌位)․ 추성환 ․이기형․ 이호택 ․고영일․ 박창재(朴昌宰) 등이다.
최길두는 사상범으로 취조가 시작되었다. “너는 조선문학을 한다면서…..” “너의 지도를 톡톡히 받았어!” “너의 사상적 지도와 존경하는 선배라 그랬어!” “소련으로 넘어가려는 계획과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등의 끔직한 취조였다. 물론 고문도 이어졌다.
감방의 하늘은 절망의 하늘이며, 얼굴을 비춰줄 별 하나가 없었다. 목이 타도 목을 추겨줄 물 한 방울이 없었다. 주위는 철책이며 감시하는 호랑이나 사자뿐이다.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가족들이다. 형사는 한쪽에 두 주전자를 들고 와서 책상 위로 두면서 “어서 먹어라”고 윽박질렀다. 감방의 식사는 콩을 넣은 꽁보리밥이며, 찬은 해초에 소금을 뿌린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문학! 그래도 사상? 떠벌이지 마! 졸장부 사나이…….” 최길두는 결국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연행된 윤한구는 청진감옥에서 옥사했으며, 김귀석은 행방은 아직까지 알 바가 없다.
최길두는 「故苑」이란 제목의 시에서 “불러 부질없는 무궁(無窮)의 국토(國土)는/ 悍惡한 倭族人의 鐵槍에 못박혀/ 어두움의 獄處로 못박혀 맡아/ 반만년(半萬年)의 겁이 깃들은 故苑은/ 그 따사로운 모습이 서노니!”라고 그 아픔을 노래했다. 「故苑」은 사적 123호인 창경궁(昌慶宮)을 의미한다. 민족을 사랑하고 항일정신에 눈을 뜬 시인의 독서와 시작업은 오직 민족해방을 염원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나. 일제강점기 제주소설

‘한국작가’가 쓴 소설을 ‘한국소설’이라 하듯이, ‘제주소설’이란 ‘제주작가’들에 의해 창작된 소설이다. 제주인들에 의해 현대소설이 발표된 것은 194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시형(李蓍珩)의 「이여도(イヨ島)」(1944)·「신임교사(新任敎師)」(1945), 이영복(李永福)의 「밭당님(畑堂任)」(1942), 오본독언(吳本篤彦)의 「귀착지(歸着地)」(1941)·「양지바른 집(日向の家)」·「한춘(寒春)」·「긍지(矜持)」(1943)·「기반(羈絆)」(1943)·「휴월(虧月)」(1944)·「애(崖)」(1944)·「바다 멀리(冲遠く)」(1944)·「해녀(海女)」(1944)·「맥적(麥笛)」(1944)·「쌍엽(雙葉)」(1944)·「금선(琴線)」(1945) 등이 발표되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일본어로 된 것들이다. 친일적인 요소가 나타나는 작품들도 있지만, 일제 말기 제주도의 상황과 제주 사람들의 의식·정서를 보여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1. 이시형의 「이여島」

이시형(李蓍珩, 1921~1950)은 애월보통학교를 졸업, 일본의 아이치현[愛知懸]에 있는 서미잠사학교(西尾蠶絲學校)를 거쳐 경성사범학교 강습과와 혜화전문학교 흥아과(興亞科)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전라남도 곡성의 삼기공립보통학교, 전라남도 함평의 함평공립소학교, 함경북도 경성공립농업학교, 제주공립농업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4년 ‘궁원삼치(宮原三治)’라는 이름으로 『國民文學』 8월호에 「이여島」가, 1945년 『國民文學』 2월호에 「新任敎師」가 추천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이여島」는 제주읍을 주요 배경으로 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의 갈등을 그려낸 작품으로, 교사 체험이 반영된 작품으로 보인다.
광복 후 제주농업중학교 교사로 재임하였다. 1947년에 3·1절 기념 시위 사건이 발발하자 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활동하면서 투쟁 방침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한국전쟁 때 예비 검속되어 수장(水葬)된 것으로 알려졌다.

2. 이영복의 「畑堂任」

이영복(李永福, 1921~2004)는 )은 애월읍 금성리에서 출생했다. 옛이름은 이영구(李永九). 아버지가 상해임시정부 독립기금 지원 혐의로 연루되어 그 여파로 보통학교밖에 수학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숭실중학교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해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1937년 평양으로 건너가 서점점원을 하며 문학 서적을 접하게 된다. 1938년 아버지에 의해 강제 귀향하여 한글잡지 『아이생활』․ 『농민생활』 지국을 운영했다.
1940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京都〕외국어전문학교 산하의 제1외국어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년 3개월 만에 중퇴하고 노동자가 되었으며, 주로 일본 문인들과 교류하며 문학 활동을 하였다.
일본청년문학자협회 회원이 되면서 『靑年作家』 1942년 7월호에 모리야마 이페이[森山一兵]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어 소설 「畑堂任(밭당님)」을 발표하였다. 「畑堂任」의 배경은 한경면 고산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성격이 괴팍한 한 노파의 삶을 그린 것이다. 학업중단협회 가입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다가 1943년 8월 오사카에서 체포되어 강제 귀국당하였다. ‘李永九’란 이름을 ‘李永福’으로 개명한 것은 4․3사건 당시 무장대 지도자 이덕구(李德九)와 비숫한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친척이 아니냐고 추궁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46년 『新生』에는 李永九란 이름으로 단편소설 「夜路」, 시 「追憶」, ‘YKR(Young-ku, Lee)’라는 이름으로 시 「悔淚」우울을 발표했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濟州民報』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제주4·3 후에 문학 활동을 중단하였다. 제주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작품을 썼으며, 제주 방언을 소설에 처음으로 구사한 소설가였다.

3. 오본독언의 「歸着地」

오본독언(吳本篤彦, 1921~?)은 창씨개명이며 본명은 미상이다. 제주시 이도동 소재 제주 삼성혈 부근에서 태어나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일제강점기 말기에 적잖은 소설을 일본어로 썼다. 1941년 소설 「歸着地」가 친일단체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익찬(文化翼贊) 현상 소설에 입선하였다. 『國民文學』 1943년 9월호에 「矜持」와 1943년 11월호에 「羈絆」이 추천되어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矜持」」는 1930년대 중반의 제주읍의 면모를 잘 드러낸 작품으로서 당시 제주인들의 의식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모두 일본어로 쓰여졌고 친일적인 성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歸着地」(1941)·「日向の家)」·「寒春」·「矜持」(1943)·「羈絆」(1943)·「虧月」(1944)·「崖」(1944)·「冲遠く」(1944)·「海女」(1944)·「麥笛」(1944)·「雙葉」(1944)·「琴線」(194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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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혁암 김형식의『革菴散稿(혁암산고)』

혁암(革菴) 김형식(金瀅植, 1886~1929)은 농은(農隱) 김문주(金汶株)의 차남으로 농은의 4남인 송산(松山) 김명식(金明植)과 형제지간으로 1914년 12월부터 2년여를 조천면장으로 재임했으며 당대 시문(詩文)에서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아우 金在植 ․金明植과 조카 金址煥․ 金甲煥, 모두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김형식은 일제강점기 직접 항일운동을 펼치지는 않았지만, 3․1운동 이후 호를 피애(避避礙)에서 혁암(革菴)으로 바꾸고, 민족의식을 드러낸 많은 시문을 남겼다.
『革菴散稿』는 김형식의 한시·한문을 번역한 책이다. 일제시대 시문(詩文)의 대가인 최영년(崔永年)이 1917년 4월부터 1918년 10월까지 발행했던 국․한문 혼용잡지인 『朝鮮文藝』에 실렸던 선생의 시문 230여 편(한시 200여 편, 한문 30여 편)이 포함되어 있다.

‘三百年前有此樓(삼백년전유차루) 삼백 년전 지어진 이 망루/ 依然古蹟至今留(의연고적지금류) 의연히 지금까지 남아있네/ 海流東注天窮處(해류동주천궁처) 바다 동쪽으로 흘러 하늘 닿는 곳/ 山勢北來地盡頭(산세북래지진두) 산세 북쪽으로 내려와 땅 끝 머리에/ 館下垂楊鴉陣暮(관하수양아진모) 관아래 수양버들엔 저녁 까마귀 때/ 城邊腐草鬼燐秋(성변부초귀린추 토성) 썩은 풀엔 가을 도채비불/ 危欄逈出烟波上(위란형출연파상) 위태한 난간 저녁 연기위로 아련히 솟아있고/ 回首風塵淚不收(회수풍진루불수) 이 풍진 세상 돌아보니 눈물 거둘 수 없네/’-金瀅植의 시 「登戀北亭」 전문.

연북정은 조천 포구에 높이 쌓은 석축대위에 지어진 정자로 북쪽은 시원한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으며, 남쪽으로 한라산이 바로 보이는 곳이다. 선조 23년(1590) 목사 이옥이 창건하여 처음엔 쌍벽정(雙碧亭)이라 명명하였는데, 선조 32년(1599) 목사 성윤문(成允文)이 중수(重修)하여 연북정(戀北亭)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혁암은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 수은(水隱) 김희돈(金熙敦)․ 해은(海隱) 김희정(金羲正)․ 만취(晩翠) 김시우(金時雨) 등과 교류하면서 만와(晩窩) 김지호(金址鎬)․ 소림(小林) 오태직(吳泰稷)․ 농은(農隱) 김희선(金熙璿)과 그의 백부의 유시(遺詩)를 정리하여 서문을 쓰기도 했을 만큼 당대 시와 문에서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革菴散稿」에서 혁암은 영주십경과 한시 몇 수를 제외하면 주로 주변 인물들과의 우정, 객지에서의 향수 등 일상의 감회를 서슴없이 읊고 있다.

라. 고경흠과 계급문예운동

1. 고경흠의 삶과 사상

“문학의 영역의 지도적 위치는 그의 온갖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입장에 있어 노동계급에 속한다. 농민작가는 우정대우를 받으며, 우리의 무조건적 지지를 받아야 된다. 우리의 과제는 그들의 성장하고 있는 일단을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궤도에 도입시키는데 있다.”- 조선공산당의 「문학테제」(1925년).
 
고경흠

고경흠(高景欽, 1910~?)은 서울 정동공립보통학교 졸업하고, 1925년 제주의 첫 사상 단체인 신인회(新人會)를 창립하였고, 1926년 2월 경성중학을 중퇴한 후, 그해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했다. 1927년 3월 일본 도쿄로 건너가 고학하였다.
1927년 5월 재도쿄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 홍효민(洪曉民)·이북만(李北滿) 등과 함께 제3전선사(第三戰線社)를 설립하고 기관지 『第三戰線』을 발간했다.
제3전선사의 하계 전국순회 강연이 끝난 후, 박영희(朴英熙) 등을 만나 9월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개편에 참여하였으며, 조선프로예맹 도쿄지부를 결성하여 사회주의 문예운동을 전개했다. 10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과 신흥과학연구회에 가입했다. 1928년 9월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중도 퇴학하였고, 10월 신간회 도쿄지회에 가입하였다가, 일본경찰의 지명수배를 피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1929년 3월 상해에서 ML파 공산주의 그룹의 지도자들과 만나 코민테른 ‘12월 테제’에 의거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방침을 협의했다.
그 후 일본으로 돌아가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재건에 참여하고, 출판부에 배속되어 기관지인 『勞動者農民新聞』․ 『現階段』의 발간 업무에 종사했다. 그리고 조선프로예맹 도쿄지부를 당재건운동에 활용하기 위해 합법적인 출판사 무산자사(無産者社)에 참여했다.
1930년 4월 도쿄에서 『戰旗』․ 『인터내쇼날』․ 『無産者』 등의 잡지 발간을 주관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 볼셰비키화의 임무」․ 「조선 문제를 위하여」․ 「조선에 있어서 혁명적 앙양과 공산당의 임무」․ 「민족개량주의의 반동적 도량을 분쇄하라」․ 「평양파업의 의의와 공산당의 활동 임무」․ 「조선공산당의 당면문제」․ 「조선에 있어서 반제국주의 협동전선의 제 문제」․ 「조선에 있어서의 농민문제」 등을 집필하여 당재건 운동과 조선혁명에 관한 방침을 천명했다.
그해 11월 상하이로 가서 한위건(韓偉健)을 만나 당재건 운동의 방침을 협의했으며, 1931년 2월 조공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과 선전부원이 되었다. 4월 조공재건설동맹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로 조직을 변경하고 출판위원으로 선정되었고, 도쿄에서 무산자사를 근거지로 삼아 『코뮤니스트』․ 『烽火』 등의 기관지 출판 사업에 종사했다. 8월 하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김남천‧한재덕 등과 함께 1933년 5월 경성지법에서 예심에 회부되었으며, 4년형을 받고 법정에서 사상전향을 선언했다.
그 뒤 출옥하여 여운형(呂運亨)이 사장으로 있던 『朝鮮中央日報』 편집부원이 되었으며, 1938년 7월 전향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線思想報國聯盟) 경성지부 간사가 되었다.
해방직전 1944년 여운형 등이 조직한 건국동맹을 바탕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고경흠을 비롯 여운형․ 안재홍․ 최근우 등 중도좌우파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조선총독부로 부터 치안유지권․ 방송국․ 언론기관 등을 이양 받고 전국 각지에 지부를 세워 당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내부에서 좌익의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안재홍 등 민족주의자들이 탈퇴하고 인민공화국으로 이름이 바뀐 후에는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해체되고 말았다.

2. 카프(KAPF)의 방향전환에 연관

“실천은 (이론적) 인식보다 우위에 있는 것인바, 왜냐하면 실천이란 보편적이라고 하는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현실성이라고 하는 가치도 지니기 때문이다.”- V. I. Lenin, [철학노트], 1915.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orea Artist Proletarian federation, 1925.8.23∼1935.5. 21)은 1925년 8월경 조직되어 35년 해산한 사회주의계열의 문예운동단체이다. 머리글자를 따서 ‘카프(KAPF)’라고 약칭한다. 기관지로 『文藝運動』(1926), 『藝術運動』(1927)을 발간하였다.
창립 당시 구성원은 박영희ㆍ김기진ㆍ이호ㆍ김영팔ㆍ이익상ㆍ박용대ㆍ이적효 ㆍ이상화(李相和)ㆍ조명희(趙明熙)ㆍ 이기영(李箕永)ㆍ 박팔양(朴八陽)ㆍ김양 등이다. 카프의 초기 활동은 흔히 신경향파(新傾向派) 문학, 혹은 자연발생적 프로문학으로 불린다.
카프의 본격적인 활동은 1926년 『文藝運動』을 발간하고, 다음해 9월 이른바 조직의 제1차 방향전환이라 불리는 조직개편과 함께 이루어진다. 제1차 방향전환은 지금까지를 자연발생적 단계로 규정하고 명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작품행동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투쟁을 실현하기 위한 무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논강에 적시하여 정치투쟁을 위한 투쟁예술의 무기로서 조직의 임무를 규정하였다.
제2차 방향전환은 당시 고경흠 등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카프는 1931년 8월부터 10월까지 한위건ㆍ양명 등에 의한 조선공산당협의회사건과 연루된 세칭 ‘카프 1차사건’을 겪게 된다. 도쿄에서 발행된 『無産者』의 국내 배포와 영화 『地下村』 사건으로 11명의 동맹원이 체포되어 카프의 조직 활동은 크게 위축된다. 이 기간 중에 예술대중화나 농민문학론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창작방법론으로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론과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론이 제출되었다.
이처럼 ‘카프 검거사건’이란 1931년과 1934년 두 차례에 걸쳐 있었던 카프회원들에 대한 일제의 검거사건이다. 일제는 30년대 이후 침략전쟁을 확대해나가면서 식민지 조선에는 병참기지화·민족말살정책을 강요, 그 일환으로 저항성 있는 문학 활동을 철저히 탄압하는 한편 친일문학운동을 적극 조장했는데, 카프 검거는 저항 문학 활동에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에서 일으킨 사건이다.
1931년 7월 1차 검거에서 박영희·김기진·고경흠·임화·안막·이기영·이평산 등이 검거되고, 그 후 카프는 비합법운동화를 주장하는 경향과 합법적 범위 내에서의 활동을 주장하는 경향으로 분열, 양자의 대립이 심화되어 마침내 1932년 합법운동론자들이 탈퇴·전향했다. 이로써 카프는 크게 위축되었으며, 1934년 7월 2차검거 후 해체되었다.
결국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이다.”라는 유명한 전향문을 쓴 박영희와 백철(白鐵) 등이 조직으로부터 이탈하면서 카프는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더구나 일제로부터 직접적으로 해산 압력까지 받아 카프 지도부는 동맹원들에 대한 서면질의 형태를 밟아 1935년 김남천 등이 카프 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카프는 공식적으로 해체하였다.
이 무렵 소련의 라프(RAPP)와 일본의 나프에 영향받아 임화ㆍ안함광(安含光) 등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둘러싼 논의를 전개하였고, 이기영의 「고향」, 강경애의(姜敬愛)의 「인간문제」 등이 이 시기에 산출된 대표작이다. 이후 프로문학 진영은 조직이 해체된 상태에서 전체적으로 침체기에 빠졌다가, 8ㆍ15광복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조선문학가동맹으로 다시 재건되었다.

“해방 후 유쾌할 것이라고는 그리 찾아볼 수 없는 우리네 살림살이와 국제적으로 몇 번이고 약속되었던 조선독립은 미소의 의견 불합으로 여지껏 공위가 열리지 않고 국내의 모든 공장은 모리배와 원료 부족 등으로 파손 내지 정지 상태에 있고 쌀값과 모든 물건 값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듯 선량한 인민과 월급쟁이들을 울리고 있으며 광목 고무신이 우리네 살림에 가장 긴요한 것인데도 거리에서 광목 한 자 볼 수 없고 고무신이라고는 노인네 뱃가죽 같은 한번 신으면 찢어져 없어지는 것이다. 해방이 됐다고 고국에 돌아온 전재 동포들은 움 속에 있게 되고 단간방이라도 제 집을 지닌 사람은 해방 후 창호지 하나를 똑똑이 못 바르고 그날그날 밥걱정과 원인 모르는 테러와 공포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고경흠의 글 『獨立新報』 1947년 3월 26일

마. 기타 제주출신 작가들

신동식(申東植)은 1925년 3월 『朝鮮文壇』에 당선 시로 「濟州島」를 발표했다. 이 시는 1920년대 제주도의 정경을 묘사했는데, 제주적인 정취가 넘치는 작품이다. 귤 향기, 한라산, 망아지, 잠녀, 농부의 속요(俗謠) 등 제주적인 것을 소재로 쓰인 작품이다. 이 시를 통해서 1920년대의 제주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1919년 조천만세운동에 앞장섰던 김장환(金章煥)은 박종화 등과 함께 ‘피는 꽃’ 동인으로 활동했는데 김지원 ․김명식과 같은 마을, 같은 집안이다.
오정민(吳禎民)은 생몰 연대, 출생지, 성장과정 및 학력 등은 미상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의 오무라〔大村益夫〕교수는 도쿄의 탐라연구회에서 발간하는 『濟州島』(1998)에 실린 「濟州文學을 생각한다」는 글에서 문학평론가 오정민〔山田榮助〕이 제주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오정민은 1943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國民文學의 新倫理」로 당선된 이후 친일평론을 다수 발표하였다.
양종호(梁鐘浩)는 애월읍 상가리 출신으로 양원정수(良原正樹)란 이름으로 일본 『關西文學』에 시를 발표하였다.

참고문헌

강철 편, 1983, 『재일조선인사연표』, 웅산각.
고시홍, 1984, 「제주문단사」,『제주문학』13, 제주문인협회.
강만길·성대경(1998),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8).
김관후, 2017, 「이제 강탈의 무서운 손톱은 함부로 조국의 자취를 할퀴고-시인 최길두의 역사체험과 글쓰기」, 제주문학 70호.
김동윤, 2001,「20세기 제주문학사 서설」,『영주어문』3, 영주어문학회.
김병택, 2010, 『제주예술의 사회사』상․하권. 보고사
김병택, 2005,『제주현대문학사』, 제주대학교 출판부.
김성동, 2018, 「진보적 민족주의 언론인 고경흠」, 『주간경향』 1269호.
김희문 저, 오문복 역, 2003, 『수은시집(水隱詩集)』,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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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국주, 1981, 『조선사회운동사사전』, 사회평론.
濟州道, 2006, 『濟州道誌』 1~6卷, 濟州道誌編纂委員會.
韓國藝術文化團體總聯合會, 1988.『濟州文化藝術白書』
한국문인협회제주도지회, 2008. 『제주문협50년』.
제주의소리 자료 (http://www.jeju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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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문학이여!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의 시 ‘절정(絶頂)’이다. ‘절정’의 배경은 위기감이며 극한(極限) 의식이다. 동시에 그에 맞서고 있는 주체의 결연한 의지와 초극(超克)의 자세이다.
그것은 상황의 열악함에 결코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불퇴전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해 보려는 숭고한 의지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Jonath an Swift)는 1975년에 죽어 세인트트릭 성당에 묻혔다.
벽면에는 그가 직접 쓴 다음과 같은 라틴어 비문이 새겨졌다.
‘신학박사이자 이 성당의 참사회장인 조나단 스위프트의 시신이 이곳에 묻혀 있다. 이제는 맹렬한 분노가 더 이상 그의 마음을 괴롭힐 수 없으리라. 나그네여, 떠나시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전력을 다해 지고의 자유를 얻으려 한 이 사람을 본받으시오.’
흔히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의 작가로 알려진 조나단 스위프트는 영국 문학사뿐만 아니라 서구 문학사 전체를 통해서도 가장 탁월했던 풍자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그가 지녔던 극단적 분노에 대한 문학적 표출 방식으로서의 풍자라는 장르를 선택하게 되었다.
우리가 말하는 분노는 언제나 나쁜 것일까?
“정의는 그 안에 분노를 지닌다. 정의에서 나오는 분노는 진보의 한 요소가 된다.”
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의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에 나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지만 성전을 더럽힌 장사꾼과 환전상들에게는 의로운 분노로 정화시켰다.
문학은 시대적 아픔의 표현이다. 문학은 사회적 약자들의 분노를 승화시켰을 때 생명력을 획득한다. 분노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비굴하게 굴복하기만 했던 권력에 덤벼들 용기를 주기도 한다.
러시아혁명은 “차르 폐하, 국민들이 굶고 있나이다, 식량을 주소서, 충성으로 섬기겠나이다”라고 애원하던 국민들에게 총질을 해대자 분노한 백성들이 일으켰다.
시인 이산하의 장편서사시 ‘한라산’은 분노의 절정에 도달한다. 세계가 제국주의의 땅따먹기 각축장이 되어버린 현실을 직시한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의 실체와 탐욕의 정치, 전국에서 불었던 저항의 바람을 시에 기록한다.
제주도에서 자행된 살육, 해방 후 평화의 시대가 아닌 폭력의 시대를 다시 맞이해야 했고 그에 거침없이 저항했던 우리나라의 근대사와 민중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민중의 역사 안에는 도저히 눈으로 볼 수 없고 입으로 담을 수 없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참혹한 죽음과 쓰라린 상처들이 하나하나 꽂혀 있다. 피로 얼룩진 1948년 4월 3일에 자신의 젊음을 고스란히 세워두었다. 두려움보다는 역사의 진실과 민중들의 장엄함이 그의 용기이자 힘이었다.
제주4․3항쟁의 진실을 알렸던 장편서사시 ‘한라산’은 현기영 작가의 ‘순이삼촌’과 함께 제주4․3항쟁 70주년을 맞아 ‘촛불혁명’과 함께 다시 주목되었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가신 모든 혁명전사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
‘한라산’은 더 깊숙한 숲으로 안내하듯 ‘제1장 정복자’부터 ‘2장 폭풍전야’, ‘3장 포문을 열다’, ‘4장 불타는 섬‘에 걸쳐 뜨거운 항쟁의 역사가 서사적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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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과 여성 피해

“밤이면 인공기/ 낮에는 태극기/ 오라고 오고, 모이라면 모이고/ 가라면 가고, 그러다 죽으라면 죽음의 길로/ 가는 나그네// 아버지여, 삼촌이여, 누이여/ 아아, 스무 살의 나의 누이여/ 토벌대 최 상사의 폭행에 항거하다/ 총살당한 감산리 땅 우리 누이 강명옥!/ 1949년 2월 4일(음력)/ 스무 살 나이로 아깝게 죽은 나의 누이여!”
 시인 김용해의 ‘감산리 누이여’의 마지막 부분이다.
제주4․3으로 인한 여성들의 피해는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2중, 3중의 고통을 반영한다. 강명옥은 스무 살 감산리 처녀. 그의 집에 주둔했던 ‘최 상사’가 처녀를 겁탈하려다 반항하자 총을 쏘았다. 강명옥은 군인의 겁탈을 죽음으로 막았다.
4․3 당시 남성 못지않게 여성의 피해는 다반사(茶飯事)였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보면 제주4․3 민중봉기 전후에 서북청년단 등이 자행한 여성들에 대한 만행은 상상할 수가 없다.
여성 피해자들의 증언을 어렵게 만드는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가 여성들의 피해를 다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여성들이 피해자의 위치에서 만이 아니라 제주4․3의 주체로서 역할에 대한 이야기들은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페미사이드(Femicide)’는 여성(Fe male)과 살해(Homicide)를 합친 용어다. 범행 동기나 가해자와 상관없이 여자라는 이유로 혹은 여자라는 점을 노리고 살해하는 것이다. 인종 또는 민족에 대한 말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에 빗대어 만든 신조어이다.
페미사이드는 일반적으로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이 심한 불평등 사회일수록 많이 발생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완력과 사회·경제적 지위가 달리는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연애·동거·혼인 상대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을 가리켜 페미사이드라고 정의한다.
1976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여성 대상 범죄 국제재판에서 여성학자 다이애나 러셀(Diana E. H. Russell)은 페미사이드에 대해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이 용어를 공식적으로 정의한 바 있다.
제주4․3중앙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는 현재 1만4233명이다. 그 중 남자가 1만1251명이고 여자가 2982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4․3 사건 전체 희생자 수로 판단할 수는 없다. 아직도 신고하지 않았거나 미확인 희생자가 많다. 특히 10세 이하 어린이와 61세 이상 노인이 전체 희생자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여성의 희생자는 20%를 넘고 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김용해의 시 ‘누이에게’는 이렇게 전개된다.
 “단단한 돌멩이로/ 슬픔을 눌러놓고/ 단단한 돌멩이로/ 아픔도 눌러놓고/ 당당하게 바람 받고 섰는 누이여// 모든 풀들이 다 누워도/ 혼자서 벌판에 우뚝 선 누이여// 바위같이 뻔뻔한 총칼 앞에도/ 감옥처럼 차가운 권력 앞에도/ 돌보다 작은 가슴 열고/ 당당하게 선 누이여/ 4․3의 누이여”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왜 죽어가는 지도 모르면서 죽어갔다.
미국을 모르고, 미국의 세계 전략도 모르고, 섬 주민들에게 몰살을 몰고 온 4․3은 도무지 이해불능이었다.
그들은 제주도의 8할을 붉은 색으로 칠해 ‘붉은 섬’이 라고 명명했는데, 그 붉은 색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 대량학살을 그들은 ‘빨갱이 사냥’이라고 불렀다. 거기에 연약한 여성의 신음소리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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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002호 ‘지영록’

“진시쯤에 화북소에 들어와 정박하였다. 판관 이하 영목의 사람들과 이속들이 모두 후선머리에 왔고, 구사(舊使)는 포구에 내려온 지가 벌써 며칠이 되었다. 나는 포촌에 머물며 편히 쉬었다. 잠시 후 드디어 성에 들어갔는데 서로 거리가 10리 남짓하였다.”
야계 이익태(李益泰, 1633~1704)가 제주섬에 도착한 것은 1694년 6월 29일이다. ‘지영록(知瀛錄)’은 당시 제주의 실상을 일기체로 기록한 글로 수고본(手稿本)으로 작성됐다. 그의 후손들이 제주박물관에 기증했다.
‘영(瀛)’은 ‘영주(瀛州)’를 의미하는데 이는 제주의 옛 지명이다. 1997년 제주문화원이 번역·출간했다.
이익태는 1694년 7월부터 1696년 9월까지 제주목사를 역임했다. ‘지영록’은 그가 제주의 풍물들을 시문(詩文)을 곁들여 기록한 책이다. 제주도의 최초 인문지리지다.
특히 외국인의 표류 상황에 대한 기록을 통해 조선 시대 해양교류사, 표류민 송환 체제, 외국인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노력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그 가운데 1687년 8월 ‘김대황’이라는 제주도민이 출항한 이후 파도에 휩쓸려 베트남에 이르렀다가 귀국한 내용인 ‘김대황 표해일록(金大璜 漂海日錄)’은 조선 시대 베트남 관련 기록으로 희소성이 있다는 평가다. 2011년 제주문화원은 ‘지영록’을 재발간하기도 했다.
향토 사료에도 ‘스테디셀러’가 있다. 초판을 펴낸 이후 책을 구하고 싶다는 요청이 많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제주 정착민 증가와 맞물려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리라.
제주문화원의 ‘스테디셀러’가 어디 ‘지영록’뿐인가?
1994년 창립 이래 제주지방사 관련 향토 사료가 60여 권에 이른다.
1996년 김윤식(金允植, 1835~19 22)의 ‘속음청사(續陰靑史)’를 시작으로 1997년 ‘지영록’, 그리고 지난해 김석익(金錫翼, 1885~1956)의 ‘역주 탐라기년(譯註 耽羅紀年)’까지 묵직한 번역서들이 주류를 이룬다.
‘속음청사’는 운양 김윤식이 자신이 체험한 사건들을 기록한 한문 일기다. 제주로 유배온 1897년 12월부터 이재수의 난이 발생해 1901년 7월 전남 무안군 지도(智島)로 이배되기까지의 기록이 촘촘하다.
제주에서 겪었던 방성칠·이재수의 난에 대한 기록만이 아니라 당시의 국내·외 정세, 제주도 유배인의 생활, 부패한 관료의 행태 등이 담겼다.
또 석우 김경종(金景鍾, 1888~19 62)의 ‘백수여음(白首餘音)’은 4․3문학의 백미(白眉)로 꼽히고 있다.
무자년 제주4․3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당시 경찰 당국과 서북청년단의 만행을 지적한 ‘이승만에게(與李承晩書 己丑)’, 경인사변 직후 이승만 대통령을 성토한 ‘이승만 성토문(李承晩聲討文 庚寅)’등이 눈에 띈다. 사사로이 목숨을 보전치 않으려는 곧은 절개가 드러나 보인다.
그동안 문화재청은 유형문화재 가운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 유물을 ‘보물(寶物)’로 지정해왔다. 지금까지 2000여 건이 넘는다. 이번에 ‘지영록’을 대한민국의 보물 2002호로 지정·발표했다. 현재 제주에는 국가 지정 보물 7개가 있어 ‘지영록’이 확정돼 총 8개 보물을 보유하게 된다. 기존 보물 7개는 제주관덕정, 제주불탑사5층 석탑, 탐라순력도, 안중근 의사 유묵, 예산 김정희 종가유물 일괄, 최익현 초상, 제주향교 대성전 등이다.
“계유(癸酉·숙종 19년 1698) 7월 26일 왜인 3명이 대정현경 차귀소(大靜縣境 遮歸所) 연변에 표박했다가 두모촌 사람 집에 뛰어 들었다. 머리는 죄다 깎았는데 양쪽 머리 사이에만 약간의 머리털을 남겨서 머리통 뒤에 고리를 지어 묶었다.”
‘지영록’ 끝부분의 ‘표왜인기(漂倭人記)’에서 뽑아봤다.(제주일보| 승인 2018.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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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승천기’ 유감

일본은 제주해군기지에서 열린 ‘2018년 대한민국 해군 국제관함식’에 해상자위대 함정의 불참을 통보했다.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 때문이다.
일본군은 1945년 3월 20일 본토 수호를 위한 ‘결호(決號)작전 준비요강’에 따라 제주도를 무대로 ‘결7호 작전’을 수립했다.
제주에서도 전투기 비행장과 갱도 진지, 고사포 진지 등 각종 전투시설 건설이 시작됐고 수많은 도민이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국가기록원에는 제주도민 8715명이 이런 노역에 강제동원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루에 제주섬 곳곳에서 수백명씩 동원된 것을 고려하면 연인원은 5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붉은색 동그라미 주변으로 햇살이 강렬하게 퍼져 나가는 모습을 그린 깃발. 제국주의 시대 일장기와 함께 일본 국기로 대접받던 깃발. ‘떠오르는 태양의 기운’이란 뜻을 담고 있다는 깃발. 이것이 바로 욱일승천기다.
일본은 1998년, 2008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두 차례의 관함식에도 욱일승천기를 달고 참여했다.
욱일승천기가 문제 시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욱일승천기가 일본의 ‘제국주의’ 혹은 ‘군국주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우경화(右傾化)가 가속화되고 있는 일본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보며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욱일승천기의 등장에 우려를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욱일숭천기를 ‘전범기(戰犯旗, War Criminal Flag)’라고 부른다.
전범기는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들의 국기와 관련 단체의 상징기를 말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군기였던 욱일승천기, 독일 나치당의 당기였던 하켄크로이츠,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이 사용했던 파시즈 등이 있다.
욱일승천기는 온라인 사전 ‘위키피디아’엔 ‘전범기’로 등재돼 있다. 일본의 정식 국기인 일장기와는 다르지만 일본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국기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과거 이들 국가들의 식민통치나 침략, 학살로 큰 피해를 입었던 국가들의 경우 전범기 사용을 금기 시 하고 있다. 특히 독일 나치의 상징이었던 하켄크로이츠의 경우 법률로써 사용이 금지돼 있다. 그것이 평화의 섬 제주에서 펄럭일 뻔 했다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욱일승천기는 일본이 1870년 처음 육군기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1889년 일본 해군이 뒤이어 군기로 채택해 일본군의 상징이 됐다. 일본이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자 욱일승천기는 ‘대동아기’로 불리며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세계 대전이 종료되자 욱일승천기는 사용이 금지됐다. 일본군이 해산된 후 자위(自衛) 목적으로 창설된 해상 자위대가 1952년부터 16줄기의 햇살을 가진 군기로 제정하면서 다시 부활했다. 현재는 육상 자위대 또한 일본군이 사용하던 욱일기를 변형한 8줄기의 햇살을 가진 군기를 사용하고 있다.
2018 해군 국제관함식에 국내·외 함정 39척과 항공기 24대, 45개국 대표단이 참가해 대한민국 역사 상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그런 국제관함식에 욱일승천기가 깃발을 흔들며 들이닥쳤다면….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욱일승천기는 아시아를 피로 물들이며 2000만명을 살해한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이다. 나치 전범기 이상의 끔찍한 상징물을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에서 공공연히 흔들고, 그것도 모자라 대표팀 유니폼으로 입고 나온 것은 모독이다.
2000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 있는 박정희 흉상을 기습적으로 철거했다.
그들은 욱일승천기를 흉상에 씌우고 오랏줄을 흉상 목에 감아 끌어내렸다. 흉상이 떨어지면서 콧등이 뭉개졌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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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지브롤터’

제주도를 ‘동양의 지브롤터(Gibr altar)’라 부른다. 1946년 10월 21일에 AP통신 시사평론가 화이트가 “제주도는 전략기지로서 동양의 지브롤터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되면서 파문이 일었다. 그렇다면 지브롤터는 과연 어떤 곳일까?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브롤터는 영국령의 반도이다. 영국 해군과 공군을 지키는 견고한 기지이다. 그곳을 두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러 민족이 쟁탈전을 벌여왔다. 세계대전 때에는 미군 작전기지로 독일군의 폭격을 받기도 했다. 그곳의 법적 지위는 1830년 영국의 직할 식민지(Crown Colony)에서 1946년 영국령 해외영토(Overseas Territory)로 변경되었다. 우리는 동굴음악회하면 우도가 떠오른다. 스페인 남단 지브롤터의 성 미카엘 동굴(St. Michael’s Cave)에서도 음악회가 열린다. 로마시대부터 신비의 동굴로 유명하다. 동굴은 지브롤터 해협으로 연결되면서 그 바다 밑의 길이는 24㎞, 깊이는 62.5m이다. 2차 대전 때는 응급병원도 차려졌으며 ‘미스 지브롤터’ 선발대회도 열리고 그 중 음악 연주회가 압권이다.
제주도는 동아시아 지중해의 목젖과 같은 위치이다. 한반도 지도를 거꾸로 돌려놓고 보면 제주도가 제일 앞에 나와 있다. 바로 중심이다. 중국과 일본이 바로 지척에 있고, 조금만 더 나아가면 동남아시아가 앞에 자리잡고 있다. 문화적, 전략적, 상업적 요충지라는 의미다.
그래서 제주도는 예로부터 지정학적으로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제주도에서 저 엄청난 학살사건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제주도가 언제든지 동북아의 화약고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제주도를 ‘동양의 지브롤터’라고 하는 것일까?
이처럼 동북아시아의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 받아왔다. 몽골족이 세운 원(元)이 제주도를 점령해 100년 가까이 지배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모슬포 지역에 비행장을 만들고 오오무라(大村) 해군항공대를 설치해 중국 대륙을 향한 폭격기지로 삼았다. 지리적 중요성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의 상황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일본에게는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전쟁 상대인 미국에게는 일본으로 진격하기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할 섬’으로 부각되면서 전쟁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은 1945년 초 본토 사수를 위한 대미(對美)결전의 최후 보루로 삼기 위해 섬 전체를 요새화하였다.
이로 인해 주민들이 당한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일본군은 어뢰정 기지를 만들기 위해 해안 절벽에 굴을 파도록 했다. 미군 함정이 다가올 경우 어뢰정을 타고 미군 함정에 돌진해 배를 폭파시키겠다는 ‘바다의 가미카제’였다. 성산 일출봉, 대정읍 송악산, 함덕해수욕장 인근의 서우봉 등 아름다운 해안 절벽마다 줄지어 뚫려있는 굴이 어뢰정 기지이다.
1948년 3월 28일 이승만(李承晩)은 방한 중인 미 육군성 차관 드래퍼(Draper)와의 회담에서 “미국이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설치하고자 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말을 들었다”면서 “한국정부가 수립되면 한국인들은 매우 기꺼이 미국이 제주도에 영구적인 기지를 설치하도록 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또한 1949년 5월 제주를 방문한 유엔한국위원단은 보고서를 통해 “대한해협 남쪽 그리고 일본의 남부와 중국의 북부 해안에 위치한 제주도의 전략적 중요성은 명백하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지브롤터에 해군기지가 있는 것처럼 제주도에도 해군기지가 있다. 너무나 빼닮은 꼴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강정해군기지가 미국을 대신하여 중국과 맞설 ‘불침 항모’라고 강조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견제로 제주도에 해군기지와 공군기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부 군사전문가들은 “중국과 일본은 이어도와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자국의 이익을 키우려는데, 우리끼리 모여 평화, 평화 읊는다고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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