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개동(奉蓋洞)

詩(시)로 읽는 4․3(13)

봉개동(奉蓋洞)

김종원

타 버려싱게/ 아홉 살 적 풋대추 찾아 기어오르던/ 안마당의 대추나무도/ 타 버려싱게// 날만 새면/ 거르지 않던 동네 식개/ 영장집 가마솥도/ 인젠 찾아볼 수 어싱게// 가을이면/ 갈중이 풋감 물들이고/ 겨울 한낮엔/ 푹푹 내려쌓인 돌담 눈길로/ 키보다 큰 꼬리연 입김처럼 말리던/ 중산 부락/ 나의 봉아오름// 할아버지는 오척 단구/ 술 담배 입도 못 대신/ 대쪽 같은 선비/ 집 한 채 다 타고 잿더미만 남던/ 사삼사건에도/ 눈시울 한번 안 적시더니// 안방 다락/ 이불 베개 삼던 漢書籍 다 타고/ 불꽃 되어 날을 땐/ 손주처럼 발을 구르신/ 金海金氏 문중의 어른/ 아, 그 법 없이도 살 수 있던/ 내 할아버지는/ 지금 봉아오름을 떠나고 어싱게// 타버려싱게/ 글만 알고 곡식 모르던/ 툇마루의 버선발/ 꿈 심던 뒷마당의 죽순도/ 다 타버리고 어싱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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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종원(金鍾元)은 오현고 재학시절 유경환․ 정규남과 함께 3인시집 『생명의 章』으로이름을 날렸다. 서라벌예술대학과 동국대를 거쳐 『사상계』 신인 작품으로 등단하였다. 1975년 3월 자유언론수호 파동으로 조선일보에서 해직되었다. 「奉蓋洞」은 1962년 『제주도』지에 발표한 작품이다. 봉개는 일제강점기에 명도암과 대나오름 등에 일본군이 갱도진지를 파놓았던 마을이다. 그 갱도진지가 4․3 당시에는 주민들의 피신처로 이용되었다.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주민들은 인근 야산과 불타버린 집터에 움막을 짓고 피난살이를 했다. 1949년 1월 21일 군인, 경찰, 대한청년단 등 합동토벌대가 마을에 들이닥쳐 움막에서 숨어 지내던 주민들을 끌어내었다. 마을 주변에 숨어 지내던 주민 40여 명을 멀왓동산으로 끌고 가 집단학살하였다. 1949년 2월 4일 육해공 합동으로 펼쳐진 대규모 작전으로 집단희생을 당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의 ‘사살 360명 포로 130명 기타 의류 등 다량 압수’라는 보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토벌은 비행기와 로케트포, 박격포까지 동원하였으며, 압수품에 총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주민들은 성 안에 함바집을 지어 살았다. 함병선(咸炳善) 연대장이 주민들을 원거주지로 복귀시키는 사업의 일환이었다. 그는 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 일본 패망으로 일군 준위로 제대하고, 해방이후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으며 그 후 보병6사단 2연대장에 임명되고, 중령과 대령으로 진급하는 한편 제14연대가 일으킨 여순10․19사건의 진압작전에 참여하였다. 제주주둔군이 제2연대로 교체되면서 그는 4․3사건 진밥부대로 제주도에 왔다. 미군 비밀문서에는 “함병선 연대장은 신분이나 무기소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가혹한 작전을 폈다”고 기록되어 있다. 2연대 3대대는 바로 서북청년단 출신 장병들로 구성되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제2대 남로당제주도위원장을 지낸 김용관(金龍寬) 등 ‘봉개7인당파’로 인하여 많은 주민들이 희생을 치렀다. 함병선의 성(姓)과 작전과장 김명(金明) 대위의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함명리(咸明里)’로 개칭하였다. 마을 재건 당시 교회를 지었는데 교회 이름도 ‘함명교회’였다. 함병선은 1955년 2월 4일 봉개리를 방문하였다. 그는 주민들로부터 도열 영접을 받았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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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흘곶에서 우는 새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기 시작하네
그 울음 숲을 버리고 어디로 향할까
마을주민들 하나둘 대섭이굴로 모여들고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 치마폭으로 감싸안네
검은개 노랑개의 그림자 어른거리고
꼭꼭 숨어라 내일 아침 볼 수 있을까
총소리 코밑까지 밀려와 심장을 흔들 때
도툴굴 목시물굴 벤뱅듸굴로 몸을 숨겼네
꿔 꿩 꿩, 꿩 우는 소리 묻혀버렸네
쌕쌕거려 구르는 방울새 소리
끼끼끼끼끼 청딱따구리 소리도 숨어버렸네
휫휫 휫 휘잇 삐삐삐삐 휘욧 휘욧 휘이 찌잇
되지빠귀 소쩍새 산솔새 종종종 모두 사라졌네
마파람으로 다복솔 잔가지까지 바르르 떨고
까악까악 까마귀가 저승에서 다시 손짓하는데
탕탕탕 탕탕탕 피눈물소리 가까이 들리는데
아아, 선흘곶이 후후 흔들리며 어디로 숨을까
저승으로 날아가 영영 생이별할까
가슴 한가운데 멍 자국이 아픈 세월 말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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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말들-제주4․3, 제70주년에

떠오르는 말들-제주4․3, 제70주년에
이은봉

쌀, 쌀, 쌀, 만세, 만세, 만세소리, 소리들로 가득한 골목, 도로, 거리, 산간, 총소리, 총소리, 탕탕탕, 탕탕

아우성, 비명, 피, 피, 피……군함, 바다 위, 함포사격, 폭탄 터지는 소리, 살 찢어지는 소리, 후다닥 도망치는 소리

동굴,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사람들, 강아지들 컹컹, 도야지들 꿀꿀…….질그릇, 짚그롯, 감자, 감자 먹는 사람들

동굴, 동굴 입구, 치솟는 연기, 일렬로 늘어서 있는 사람들, 총 든 군인들, 총 든 경찰들, 총 든 서북청년들

나자빠지는 하얀 솜바지. 주저앉는 검정 솜저고리, 흘러내리는 피, 피, 피, 포승줄에 묶인 채 처박혀 있는 사람들

동굴 속, 낡아빠진 고무신, 녹슨 놋수저, 놋젖가락, 찌그러진 반합뚜껑, 삭아빠진 댕댕이그릇, 흩어져 있는 뼈다귀들, 뼈마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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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하면 떠오르는 말은 무엇일까? 4․3은 한동안 ‘폭동’ 취급을 받아왔다. 최근까지 그냥 ‘4·3사건’으로 부른다. 4·3은 아직 제 이름을 찾지 못했다. 왜 아직까지 정명(正名)을 찾지 못했을까? 4․3은 항쟁이다, 4․3은 민중항쟁이다, 4․3은 통일운동이다, 라고 부르자 한다. 4․3하면 떠오르는 이름은 김달삼(金達三)이다, 이덕구(李德九)이다. 아니 토벌대이다, 서북청년단이다. 아아, 4․3하면 떠오르는 말은 폭도였다. 제주사람은 8할이 폭도였다. 4․3하면 떠오르는 말은 미국이다, 미군이다, 미군비행기이다. 아아, 미군이 총을 겨누었는가? 4․3하면 떠오르는 말은 쌀이다. 만세소리다. 도망치는 소리들로 가득한 골목이다. 도로이다. 거리이다. 산간이다. 아아, 죽임의 총소리이다. 탕탕탕, 탕탕. 그에 따르는 아우성이며 비명이다. 피, 군함, 바다 위, 함포사격이다. 폭탄 터지는 소리이다. 후다닥 산으로 오르는 소리이다. 4․3하면 떠오르는 말은 동굴이다. 아아,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사람들이다. 동굴 입구로 치솟는 연기이며 총 든 토벌대들이며 일렬로 늘어서 있는 사람들이다.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눈물이 나는 건, 그 너머에 아픔이 숨겨져 있는 언어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제주의 땅 아래에는 70여 년 동안 켜켜이 쌓인 엉킨 아픔이 있고 아픈 언어가 숨어있다. 4·3의 기억은 그렇게 날이 선 채 70년이라는 시간을 베어왔다. 1948년 당시 제주 인구의 9분의 1 수준인 2만5000∼3만 명이 4·3으로 희생됐다. 희생자의 33%가 어린이·노인·여성이었으며, 희생자의 86%가 토벌대에 의해 발생했다. 토벌대 전사자는 320명으로 집계됐다. 그렇지만 아직도 모르겠다. 4․3은 도대체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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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11)

기지로 돌아가거든
임화

5병대 7병단 1군단  
김생 김달삼 이호제 박치우 서득은
여러 슬기로운 지휘관들의 피
아직도 눈 위에 임리하고
청옥산 태기산 일월산
국망봉 백암산 준령들의 산정 위
피바람 불어 끊이지 않는 저
험준한 태백산 전구의 이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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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林華)가 1952년 7월에 쓴 시, ‘기지로 돌아가거든’의 한 구절이다. 시인은 한국전쟁 이전의 ‘빨치산’인 남로당 인민유격대 지휘관으로 전사한 동지들의 서늘한 이름을 부른다. 임화는 카프의 서기장을 역임하고,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 월북하여 남로당 계열의 입장에서 활동하였고, 한국전쟁 중에는 종군체험을 담은 시 「서울」, 「너 어디에 있느냐」 등을 발표하였다. 이후 북에서 숙청·총살당하는 비운으로 삶을 마감했다. 시에는 5병대 7병단 1군단 소속의 지휘관들이 등장한다. 김생 김달삼 이호제 박치우 서득은. 여기에서 박치우(朴致祐, 1909~1949)와 김달삼(金達三, 본명 이승진)이 눈에 띈다. ‘서양철학 1세대’의 대표적 인물 박치우. “약 2주일 전 태백산 전투에서 적의 괴수 박치우를 사살하였다.” 동아일보 1949년 12월 4일자 신문에 짤막하게 소개된 신태영 육군참모총장의 말이 박치우의 마지막 행적이다. 박치우는 북으로 올라 갈 수밖에 없었다. 1947년 10월 이후부터는 월북한 남로당 잔존 세력을 교육, 유격대로 양성하기 위한 ‘강동정치학원(江東政治學院)’을 세웠다. 평안남도 강동군 입석리의 탄광촌에 마련된 그곳은 당원들을 재규합하고 사상을 벼리고 무장투쟁을 교육하기 위한 군사학교였다. 하지만 자신과 월북한 좌익이 곧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일 것을 그는 직감했다. 1948년 8월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 이후에도 수세에 몰린 남로당 세력은 1949년 9월 총봉기를 통해 강동정치학원생들로 구성된 유격대를 남파했다. ‘여순반란’ 사건 이후 입산한 세력과 더불어 그들은 이미 6월부터 400여 명이 오대산 지구로 투입되었다. 1949년 가을, 박치우와 그의 동지들은 자신의 삶과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죽음의 문턱으로 걸어 들어갔다. 태백산 지구로 투입된 박치우의 1군단은 군경합동 토벌대에 의해 와해되고, 잔류병들은 제3군단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여 끝까지 저항했지만 끝내 태백산 인근에서 주검도 없이 산화했다. 4․3을 주도했던 김달삼은 자신의 최후를 어느 지명에 남겼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공식 지명인 ‘김달삼모가지잘린골(정선군 여량면 봉정리)’.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죽은 어느 빨치산 대장의 ‘잘린 모가지’는 왜 중요했을까.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되지 못했고, 서로를 절멸시키려고 했던 상처는 두터운 피딱지가 되어 말라버렸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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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의 딜레마

• 제주일보 승인 2019.06.03 19:26

불교 조계종이 불교 의식을 따르지 않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했다. 부처님 오신 날 법요식에서 합장(合掌)과 관불 의식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종교의 문제를 넘어 상식과 합리성, 존중과 이해를 갖추지 못 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황교안을 보면 딜레마에 빠진 느낌이다. 박근혜가 감옥에 갔을 때 그는 대통령권한대행이었다. 자신이 모시던 대통령의 옥바라지를 해줘야 할지 아니면 모른 척해야 할지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책상과 의자를 넣어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했지만, 반입이 되지 않았다. 태극기집회 노인들은 박근혜를 ‘묻지마’ 지지하는 유권자들이다. 표를 의식한다면 친박 이미지가 필요하다. 황교안은 박근혜에 대한 비판 여론과 상관에 대한 의리, 그리고 태극기 표 등 이러한 계산 속에서 책·걸상을 넣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을 것이다.
제주를 찾은 황교안이 ‘제주4·3특별법’ 처리에 대해서 말을 아꼈다. ‘국민 속으로-민생투쟁 대장정’ 일정으로 제주를 찾아서 보인 행동이다. 4·3특별법 개정안 처리계획을 묻는 말에 “원내에서 면밀하게 챙겨, 합리적인 방안을 찾겠다”고 짧게 답변했다. 이것 역시 그의 딜레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요즘 언론은 황교안이 ‘5·18 광주’, ‘불교’, ‘보수 통합’ 등 3가지 난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그의 3대 딜레마라고 분석한다. 그가 “무슨 염치로 5·18 기념식에 참석하느냐”는 집중 공세를 받았지만, 광주를 찾았다. 석가탄신일 법요식에서 합장하지 않았고 대신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불교계 반발이 나왔다. 보수 대통합의 실마리가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중대 과제다. ‘공안검사→법무부 장관→국무총리’라는 엘리트 코스를 거쳐 온 황교안은 서울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검찰에서 대검 공안1과장,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장, 서울중앙지검 2차장, 대구고검장을 역임하는 등 공안통 경력을 쌓았다. 공안검사 역시 그에게는 딜레마다.
공안검사(公安檢事)는 대공·선거·학원·외사·노동 등의 사건을 담당한 검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공안이란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뜻하는 말로, 공안검사는 원래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탄생했다. 1948년 8월 검찰청법 제정에 따라 공안검사가 생긴 이래 국가 안위나 공공 안녕보다는 정권 수호의 앞잡이 역할을 해 왔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아 왔다.
황교안은 1998년 공안 수사의 교과서로 불리는 책 ‘국가보안법 해설’을 펴내 ‘미스터 국가보안법’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2009년에 쓴 ‘집회시위법 해설서’에서도 4·19혁명을 ‘혼란’으로,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표현했다. 2009년 용산 참사를 두고는 ‘농성자들의 불법·폭력성이 원인이었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황교안은 걸핏하면 “이 정권의 좌파 독재가 끝날 때까지 결코 투쟁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좌파’도 시민들이 싫어하고 ‘독재’도 싫어하니 그 둘을 조합한 것 같다. 여기서 ‘좌파’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 모호하다. 또 ‘독재’ 운운한 그의 발언에 문제가 심각하다.
‘독재’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전매특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절 황교안처럼 대정부 집회를 했다면 처형됐거나 남산에 끌려가 거꾸로 매달렸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를 ‘좌파 독재’라고 꾸짖는 황교안의 모습은 자못 비장하지만 한없이 우습다. 그래서 황교안은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공안검사 출신이 독재 타도를 외친다’는 눈살을 받고 있다. 그는 이런 세간의 지적을 의식한 듯 ‘독재국가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좌파 독재를 종식하라고 했더니, 독재를 이야기한다고 (저에게) 뭐라고 한다”고 주장했다.
독재자(Strongman)는 견제받지 않는 절대 권력을 가진 집권자를 말한다. 또는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인 사람을 빗대어 일컫기도 한다. 원의(原意)는 ‘홀로(獨) 재단(裁)하는 자(者)’다. 예쁜 옷감을 자기 멋대로 가위질하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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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10)

잠들지 않는 남도
안치환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아~ 아~ 아~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노을빛 젖은 물결에 일렁이는 저녁 햇살상처 입은 섬들이 분노에 찬 눈빛이여,갈숲에 파고드는 저승새의 울음소리는아 한스러이 흐르는 한라의 눈물이어라

아~ 아~ 아~ 아~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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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긴 길을 걸어야 인간이 인간으로 불려질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전쟁터를 날아야 포탄이 없어질까/ 얼마나 더 죽어야 인간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까.’ 반전 가수 밥 딜런(Bob Dylan)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다. 201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은 포크 송의 아버지로 불린다.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상 선정 이유로 “미국의 전통음악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출했다”고 했다. 밥 딜런처럼 안치환(安致煥)도 어떤 문학상이든 수상할 필요성을 느낀다.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반역(反逆·叛逆, rebellion)은 기존의 권위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통곡(痛哭, weep)은 큰 슬픔으로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것을 가리킨다. 주로, 마음이 몹시 괴로울 때나 개인적 혹은 국가적인 위기 때, 죄를 회개할 때 통곡한다. 성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백성의 통곡 소리를 들으신다고 했다. 안치환은 평소 사람과 시를 엄청 좋아한다. 그의 곡 대부분이 시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많으며, 몇몇 대표곡은 아예 시에 멜로디를 붙여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앨범 하나를 통째로 시인 하나의 시에 멜로디를 붙여서 발표하거나, 시인에게 바치는 앨범 등 여러 가지로 시와 관련이 깊은 가수다. 정호승, 김남주, 김지하, 안도현 등등….. 특히 김남주의 시를 좋아한다. 1980년대 4․3의 상처와 아픔을 비장하게 묘사한 < 잠들지 않는 남도>는 대학가에서 콘 호응을 얻었고 자연스레 4․3의 노래로 공인받았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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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9)

한라산으로 난 길
김성주

붉은 꽃들이 부산스레 수풀을 헤치며 산을 오른다
붉은 꽃들이 붉은 열매를 남기고 툭툭 진다
붉은 꽃을 따라간 푸른 잎들이 붉은 잎으로 산을 내려온다
모두를 떠나보내고, 산은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는 것이었다

계절이 산을 오르고 내릴 때마다
산이 울어 핏줄이 터지고 섬이 젖는 것이었다
새들이 붉은 열매를 물고 날다가, 이따금
그 붉은 빛이 산의 피울음인 것을 알고는 떨구기도 했다

그리고 밤이면 몰래/ 마을로 내려와 우는 아이를 잠재우곤 했는데
산이 마을로 내려오는 것을 막으려고, 어제부터
밤새껏 가로등이 눈을 부라리며 보초를 서는 것이었다

부하의 총에 죽은 섬에서 제일 높은 군인이 취임 연단에 서던 날
“삼십만 제주도민 다 죽어도 좋다. 온 섬 다 태워도 좋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우렁우렁 연설 소리
한라산을 정복하는 건 남반도의 정산 자리에 오르는 일

날벼락 떨어져 타오르는 불길이 심장에서 쏟아지는 핏물이
이정표로선/ 한라산으로 난 길이 상여 길임을 아는지
소름을 털며 소 울음이 먼저 산으로 간다

오늘, 나는 그 길에 술 한 잔 올리고/ 때늦은 문상(問喪)염불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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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4.3희생자는 ‘빨갱이’, 그 유족은 ‘빨갱이 새끼’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한라산으로 난 길은 빨갱이가 되는 죽음의 길이었다. 1948년 5월 6일 제주지역 연대장이 교체되었다. 김익렬(金益烈) 중령을 해임하고 박진경(朴珍景) 중령을 발령하였다. 박진경은 일제 말기 일본군으로서 제주도에 주둔한 바 있다. 6월 18일 부하에 의해 암살될 때까지 한 달 열흘 가량 제주도에 머물며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연대장 취임식 때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는 발언을 했다. 박진경은 미군의 인정을 받아, 6월 1일 대령으로 진급하고, 6월 18일 그의 작전 방침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박진경이 암살당하자 미군사령부는 6월 21일 새로운 연대장으로 최경록(崔慶祿) 중령을, 부연대장에 송요찬(宋堯讚) 소령을 임명하였다. 이들은 모두 일제 때 전투경험을 가진 일본군 준위 출신으로서 미군정 시대에는 나란히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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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8)

제주도에 바치는 레퀴엠
김준태

어른들은 그랬다. 이름이 이어도인지 갈매기 섬인지는 모르지만 6․25 한국전쟁이 터지기 3년 전엔가 제주도에서 무슨 난리가 일어나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었다고 말하면서 바로 이 무렵, 그 섬에 수백 명의 젊은이들을 실어다 퍼부어 놓고 두두두두두……..집단총살을 시켜버렸다고 귓속말로 수군 수군거렸다.
해송과 풍란이 바위마다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섬. 어쩌면 유인도보다도 더 많은 슬픔과 더 많은 꽃과 주검의 잔해들이 쌓여있을지 모르는 그 섬을 바라보면서 어른들은 몸서리를 쳤다. 당시 아무도 말할 수 없었던 갈매기 섬, 아아 이어도-어부들은 이어도가 토해내는 미친 듯 한 물음소리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아흐, 그런데 어른들은 마치 무시무시한 비밀처럼 전설 같은 이야기를 서로서로 나누곤 했다. 그 시절 소년 김준태가 엿들은 어른들이 나눈 대화의 한 매목은 이러했다. -이어, 이어, 이어도를 본 사람은 죽는다-는 그것이 그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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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requiem)’은 위령 미사 때 드리는 음악이다. 정식명은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이지만 가사의 첫마디가 “requiem(안식을…)”으로 시작되어 레퀴엠이라 부른다. 진혼곡, 또는 진혼미사곡 등으로 번역되어 쓰이기도 한다. 4·3항쟁과 광주5․18은 국가폭력에 의하여 희생자들이 발생하였다. 둘 다 역사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상처를 알기에 제주의 아픔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진다. ‘역사적 사건’은 시간성 속에서 기억되어 현재의 우리 삶과 미래를 지배하는 원동력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 사건이라 할 수 있는 4·3항쟁과 광주5․18은 과거의 사건으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다. 바로 역사적 기억, 그리고 다양한 문화 예술적 텍스트로 구현되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피해 지역을 고립시켜서 역사 속에 묻었던 것은 4·3항쟁이나 광주5․18이나 무척 닮은꼴이다. 진실과 정의를 외면할 때 우리의 인권과 생명을 말살 시킬 수 있는 나쁜 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죽음과 죽음 사이에/피눈물을 흘리는/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우리들의 아들은/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우리들의 귀여운 딸은/또 어 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시인 김준태(金準泰)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1980년 광주5․18과 그 투쟁의 과정에서 군부에 의해 자행된 폭력에 대한 거부와 민주화를 향한 염원을 드러낸다. ‘제주도에 바치는 레퀴엠’도 마찬가지다. 섬이 가까운 전라도에서 어른들은 비밀처럼 전설 같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저 바다 건너 제주섬에서 무슨 난리가 일어나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이어도를 본 사람은 죽는다”는 이야기다. 국가권력은 제주사람들을 “실어다 퍼부어 놓고 두두두두두…….집단총살을 시켜버렸”다는 소문이다. 이 속에 학살로 인한 아픔이 존재한다. 김준태 시에 나타난 전반적인 시적 주제는 대체로 광주, 역사, 통일문제로 집약된다. 시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뚜렷한 해명방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생명존중과 사랑정신이다. 김준태의 시는 일반적으로 일상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범사회적인 시야로 확산되는 방식이나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역사의 흐름을 짚어나가는 방식을 통해 탄탄한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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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통 보수’가 걱정이다

전형적인 보수주의자는 “옛날이 좋았지! 왜 이놈 저놈 나와서 자꾸 바꾸려 드는지 몰라”라는 말을 한다.
보수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며 점진적인 발전을 검토하는 주의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는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나라에 해가 되는지 아닌지를 검토한다. 진보의 불안정성을 잡아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보수주의자들이 이승만에 대해 내리는 평가도 문제다.
“이승만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시죠! 이 분이 한국전쟁 당시 미국 형님한테 SOS 쳐준 덕분에 지금 우리나라가 북괴 놈들한테 안 넘어가고 이렇게 잘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승만 만세! 멸공의 횃불 만세! 미국 형님 만만세!”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더욱 가관이다.
“박정희는 반신반인으로서 지지리도 못 살던 우리 민족에게 젖과 꿀을 주신 분입니다. 이 분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금 따뜻한 밥을 먹고 살 수 있었을까요! 이 분의 따님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진보는 꼰대고 보수는 꼴통이다’라는 말이 있다. 꼴통보다는 꼰대가 낫지 않느냐는 항변도 있다. 현재와 같은 보수와 진보의 논쟁으로는 21세기의 변화를 분석할 수 없다. 보수와 진보의 진부한 논쟁은 권력 투쟁만을 위한 반대를 위한 반대의 퇴행성을 부추길 뿐이다.
요즘 자유한국당의 행태는 극우적 경향을 띠면서 ‘꼴통 보수’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가 무덤 속에 있어야 할 386 운동권 철학이 정부의 국정철학이 돼 당·정·청을 장악한다고 말했을 때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원내대표까지 극우 정치를 선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막간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행태를 보면서 자유한국당은 합리적 보수정당이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국내 극우 정치는 대통령 탄핵에 극렬히 맞섰던 이른바 가짜 태극기 세력이 정치적인 포악성과 폭력성을 근거해 만들어졌다. 책임 있는 야당이라면 이를 여과하고 정화해 대처해야 하는데 그대로 받아들였다. 극우 정치가 자유한국당 심장에 똬리를 튼 것은 너무 위험하다. 극우로 가는 자유한국당이 참으로 위험스럽다는 이야기이다.
극우 정치는 족보도 없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자신들을 한 순간에 파멸로 몰고 갈 위험한 선택이다. 5·18 망언과 세월호 모욕,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는 회피 수단일 수 있다.
정치 극단주의(Political Extremism)는 극단적인 진영 논리를 우선적으로 내세워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치닫는 정치 성향을 일컫는다. 좌파 성향의 정치 극단주의자들의 경우 ‘빨갱이’, ‘좌좀’, ‘좌빨’이라 불리며, 우파 성향의 정치극단주의자들의 경우 ‘애국보수’, ‘수구꼴통’, ‘우좀’, ‘토착왜구’라고 불린다. 물론 중도는 회색분자라고 논외로 친다.
그 주요 증상으로는 선동하거나 당하며 날조와 조작된 자료를 잘 이용한다. 진영논리에 매몰돼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의 잘못은 관대하게 넘어가거나 변명한다. 그 반대 진영에 대해서는 사소한 흠에도 비난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인다.
뭐든 간에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악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의 사람이나 단체를 ‘너 수꼴, 너 좌좀’식으로 정의하는 순간 욕설이 돼버린다. 우익의 끝에는 ‘수꼴’이 있고 좌익의 끝에는 ‘좌좀’이 있다.
보수도 없고 진보도 없고 ‘수꼴’과 ‘좌좀’의 판이다.
물론 자유한국당이 과거 ‘비대위’까지 만들어 ‘보수의 재건’ 이라는 기치를 내세운 것이 결국 또 한 편의 ‘공염불’이란 것을 증명하는 꼴이 아닌 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정녕 자유한국당은 국민 소수의 지지를 받는 보수꼴통으로 남고 싶은 것일까? 자유한국당의 지나친 극우 민족주의 행각으로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잔영을 떠오르게 한다.
거리로 뛰쳐나가고 악을 쓰는 자유한국당을 보면서 걱정이 앞선다. 한국 정치가 제 길을 찾으려면 정당부터 정신을 차리고 국민부터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국민은 늘 깨어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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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7)

반공강연․ 1 -관덕정에서
김경홍

길은 보이지 않았다
타향길이거나 아니면
아버지 나를 연명시킨 산길이거나 간에
길이 있다면 형틀을 이어매고도 갈 수가 있는데
하루를 살거나 그만 끝장내거나
길이 있다면
가는 길을 구걸하고도 싶은데
길은 보이지 않았다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적개심으로
찾아 헤매인 길
배신을 하거나 내가 당하거나
길이 있다면
가는 길을 강탈하고도 싶은데
길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광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책가방들이
안개무리로 뿌리 채 일어서
보일 듯 말 듯 떠오른 길은
이내 땅속으로 가라앉고
핏대를 세우고 불러도, 나발을 불고 부르짖어도
거짓은 언제나 거짓인 것처럼
써 준 대본을 읽을 때
눈물로 피눈물로 외칠 때도
거짓은 언제나 거짓인 것처럼
가야할 길은 보이지 않고
——————————————————————–시인의 아버지는 1948년 입산한다. 1950년 어머니가 조부모를 학살한 토벌군인과 개가해 의붓형을 낳고, 1956년 아버지가 8년의 피신 끝에 중문지서에 자수하고 제주, 서귀포, 성산포를 돌며 반공강연을 시작한다. 아버지는 당국이 써 준 대본을 읽을 때도 눈물로 외칠 때도 거짓은 언제나 거짓인 것처럼 가야할 길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재결합하였고, 종종 기관으로 끌려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999년 연작 시집 < 인동꽃 반지>를 상재(上梓)한다. 아버지의 반공주의(反共主義, Anti-Communism)는 거짓 반공주의였다. 1901년 신축년농민항쟁 당시 장두 이재수(李在秀))가 효수(梟首)된 광장. 3·1운동 28주기기념식을 끝내고 수천 명이 모여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양과자를 먹지 말자’고 외치던 광장. 1949년 6월 무장유격대 사령관 이덕구(李德九)의 시신이 내걸려 있던 광장. 그 광장에서 아버지가 당국이 써 준 대본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 아버지의 피눈물이 거짓이 거짓인 것처럼 시인의 거짓 파괴의 길은 너무 길고 험하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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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6)

4월 그 길
한문용

그날처럼 빛바랜 4월길을 걸었다
관투모살, 정뜨르비행장
한결 같은 파도소리와
골방에서조차 들리는
정의로운 할아버지 목소리
젊음 꽃 져버린 아버지 흐느낌
영혼의 소리는 들을 수 없어도
귓바퀴를 쫑긋 세우면
4월 숨소리 지금도 가지런하다
세월을 떠안은 기억 속에 벼린 울림
어눌한 기도 천상을 흐를 때마다
찌든 얼굴나무 한 그루를 심었던 나
살가운 봄볕에 나폴 거리는 동백꽃잎처럼
바람결에 떨어져도 아프지 않는 몸살
가버리면 그만인데, 보내버리면 그만인데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은
4월 그 길
——————————————————————–
시인 한문용(韓文用)이 찾아나선 4월길은 너무 길고 험하다. 시인은 그 한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2013년 시집『서우봉노래』도 출간하였다. < 정의로운 할아버지> 한백흥(韓伯興)과 < 젊은 꽃 져버린 아버지> 한재진(韓在珍). 두 영혼을 끌어안고 < 바람결에 떨어져도 아프지 않는 몸살>을 않고 있으며, < 가버리면 그만인데, 보내버리면 그만인데>를 읊조리지만 < 바람결에 떨어져도 아프지 않는 몸살>을 앓고 있다. 1948년 11월 1일 토벌대가 주민들을 모래사장에 집결시키고 청년6명을 끌고나와 처형하려 했다. 마을이장 한백흥이 나서 “이 청년들의 신원을 보증할 테니 죽이지 말라”며 만류했다. 토벌대는 오히려 “이 자도 폭도의 일당이다”라며 한백흥을 총살하고 청년들과 함께 파묻었다. 청년시절 조천3.1만세운동을 적극 주도하고 가담한 함덕리의 대표적 인물. 일본 경찰에 붙잡혀, 징역 4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4․3 당시 억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한 몸 내던진 몸이지만, 그동안 독립유공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2002년부터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음에도 17년이 지나서야 어렵게 인정을 받았다. 한백흥의 아들 한재진은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령이 발동되어 산지주정공장에 구금되었고, 동료들과 함께 정뜨르비행장에서 학살되었다. 시인의 운명이 어찌 이처럼 잔혹할 수가 있을까. 지금 시인의 내면에 불타오르는 분노는 역사의 시어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문학은 시대적 아픔의 표현이다. 문학은 사회적 약자들의 분노를 승화시켰을 때 생명력을 획득한다. 분노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비굴하게 굴복하기만 했던 권력에 대항할 용기를 주기도 한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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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5)

사월이여 먼 날이여
김시종

내 자란 마을이 참혹했던 때,
통곡이 겹겹이 가라앉은 그 때
겨우 찾은 해방마저
억압에 시달려 몸부림치던
그 때,
상처 입은 제주
보금자리 고향 내버리고
제 혼자 연명한
비겁한 사나이
4․3이래 육십여 년
골수에 박힌 주문이 되어
날이면 밤마다
중얼거려온 한 가지 소망
잠드시라
4․3의 피여
귀안의 송뢰되어
잊지 않고 다스리시라
변색한 의지
바래진 사상
알면서도 잊어야했던
기나긴 세월
자기를 다스리며
화해하라
화목하라——————————————————————————————————
‘디아스포라(Diaspora)’는 ‘씨를 뿌린다’의 의미다. 고향을 떠나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거주하는 것을 뜻한다. ‘경계인(境界人, marginal man)’으로 살면서 제주를 품고 머리와 손은 일본어를 사용한 시인 김시종(金時鐘). 일본공산당에서 이탈하면서 결국 ‘귀국선’을 타지 못한 채 남한과 북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1990년대 초까지 조선적(朝鮮籍)으로 살았다. 4·3사건에 휘말려 1949년 일본으로 탈출하기 전까지 제주에서 보냈다. 남로당 제주읍당 세포로 활동하면서 산에서 4·3을 3개월 정도 체험했다. 우리가 시인의 『니이가타』에 주목하는 것은 제주 바닷가 해안에 밀어 올려진 물화된 4·3의 죽음이 핏빛 바다로 물들게 한 ‘달러문명’의 종주국 미국을 인식할 수 있다. 시인은 일본의 계간 학술지 ‘캉(環)’에 권두시로 4·3 연작시를 발표했다. ‘새가 말을 하는 가을(鳥語の秋)’, ‘4월이여, 먼 날이여'(四月よ, 遠い日よ), ‘여정(旅)’등 3편이다. 그의 시에서 4월은 여전히 잔혹한 달이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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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4)/

경계의 사람 -김석범/
김수열/

나는
남쪽 사람도 북쪽 사람도 아니요
그러니까 나는 무국적저요
나는
분단 이전 조선 사람이요

제주4․3도 마찬가지요
반 토막 4․3은 4․3이 아니란 말이요
온전한 4․3은
통일된 조국에서의 4․3이요
그러나 제주43은 곧 통일인 거요

4․3을 한다는 거?
저기, 저, 저 백비, 저걸 일으켜 세우는 거요
——————————————————————-
< 화산도(火山島)>의 작가 김석범(金石範)의 문학은 기억과의 투쟁이다. 4·3은 ‘말살당한 기억’이다. 입 밖에 내선 안 되는 일이었고, 알아도 몰라야 하는 일이었다. 권력이 몰아붙인 ‘기억의 타살’이었고, 강요된 “기억의 자살”이었다. 김석범은 1925년 일본 오사카 출생의 재일조선인으로 4․3진상규명과 평화인권 운동에 매진해온 무국적자다. 1990년대 초까지 조선적(朝鮮籍)으로 살았다. 조선은 이미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다. 1957년 최초의 4․3소설 < 까마귀의 죽음>을 발표했고, 1976년에는 역시 4․3을 주제로 한 대하소설 < 화산도>를 일본 문예춘추사 ‘문학계’에 연재하기 시작해 1997년 탈고했다. 그는 4․3을 지속적인 작품의 소재로 삼았으며 2015년 제1회 제주4․3평화상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김석범은 4․3운동과 4․3문학에서 상징적 인물이다.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국적도 아닌 무국적자인 김석범이야말로 경계인(境界人)으로서 월경(越境)하는 삶을 몸소 실천해 왔다. 원래의 조선적에서 한국 국적으로 바꾸지 않은 재일조선인(이들은 제도상 무국적이다)을 일본정부는 암묵적으로 북한 국적처럼 취급해왔다. 그는 한국인도, 북한인도, 일본인도 아니었다. 패전국 일본이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은 재일 한인들에게 일방적으로 부여한 ‘조선적’을 고집했다. 남·북·일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국적을 찾아 떠나도, 남과 북이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를 회유해도, 김석범은 분단된 나라 어디에도 속하길 원치 않았다. 그는 무국적자였고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백성으로 남았다. 그의 4․3문학에서는 미일 제국주의(帝國主義)의 탐욕에 맞서는 제주섬의 항쟁과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그의 문학에 구현되는 제주민중의 투쟁 양상과 평화 세상을 향한 염원은 구미중심주의가 지닌 왜곡된 편견을 드러내면서 동아시아적 가치를 여실히 보여준다. 따라서 김석범 문학을 살피는 것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창조적 가치를 통해 세계문학을 재편해 나가는 노정에서 매우 유용한 작업이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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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3)

詩(시)로 읽는 4․3(3)

점령지에서 아메리카군
김명식

1945년 8월 15일
이날은 해방의 날이 아니란다
제국-아메리카 병사들
LST군함에 몸을
담고
미지의 땅
제주섬에서
작전명령을 기다린다
M1 소총과
수류탄
저장된 CIC의 정보 분석에 따라
살해의 임무를 해온 미 병사들은
콩밭에서
도로변에서
조국의 딸들을 쓰러뜨렸다네 (…………)

1945년 9월 29일, 미 군정청의 설치는
전후 제국-아메리카가
제주도를 품에 품으려 한
침략전쟁이 시작되는 날이라네(…………)
——————————————————————–
민중은 풀과도 같은 것이다. 밟아도 베어도 잘라도 찢어도 쏘아도 오히려 땅속 아래서 엉키며 부등켜안으며 아침 해와 더불어 슬며시 일어서서 드디어 푸르름을 지니며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생동하는 존재이다. 1988년 아라리연구원이 펴낸『제주민중항쟁』(전3권)의 편자대표 김명식(金明植) 시인은 “이제 제주도 민중은 40여년의 어둠과 짓밟힘을 헤치고 다시 딛고 일어서는 아침의 해를 마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고백했다. 제주민중은 일어서고 있다. 슬며시 슬며시, 상처난 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4․3에 물든 피를 씻어내며 예리한 칼벽을 넘어 해방의 새날을 예비하고 있다. <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미군정은 1945년부터 3년간 남한을 법적으로 통제했고, 그 뒤에도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군사와 경찰을 통제했다”며 미국 책임론을 제기했다. < 제주도 반란>의 저자 존 메릴(John Merill)은 “4·3은 미군정 시기 소련과의 협력관계가 파국을 맞고 냉전이 자리잡아가던 시기에 일어났다. 미군 고문관들은 4·3 전 기간에 걸쳐 제주도에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는 고문관들이 직접적인 지휘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 정부가 펼쳤던 정책 역시 한 원인이다”며 미국의 책임과 이승만 정부의 책임을 지적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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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와 애국가

김순남이 조선인에게 ‘조선 최고의 작곡가’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인민항쟁가’였다. 1947년에 나온 ‘인민항쟁가’는 남·북조선 모두에서 애국가처럼 불리었다. 임화(林和)가 쓴 노랫말이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는/ 우리의 주검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렇게 죽엄을 맹서한 깃발을.” 우리 ‘애국가’는 안익태(安益泰, 1906~1965)가 작곡했다. 작사가는 윤치호(尹致昊)·안창호(安昌浩)·민영환(閔泳煥) 등이라는 설이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애국가는 처음에는 ‘올드 랭 사인’의 선율에 맞춰서 부르다가 안익태가 선율을 작곡해 지금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몇몇 분은 애국가가 북한이나 다른 나라 국가에 비해 너무 행진곡풍에 장엄하거나 당차거나 웅장하지 않고 너무 소박하고 초라한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안익태의 ‘애국가’가 관행상 ‘국가’로 불려왔지만, 현재 법적으로 지정된 대한민국의 애국가는 없다. 그래서 1960~1970년대에도 새로운 ‘애국가’를 제정하자는 운동이 있었고, ‘국가제정 위원회’를 구성해 애국가의 가사와 감상적인 곡조의 문제점을 들어 새 국가를 만들려고 준비도 했었다.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는 192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뒤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유럽에 진출한 당대에 드문 서양 음악가였다. 1935년 12월 28일 한인예배당에서 심혈을 경주해 창작한 ‘애국가’의 새 곡조를 연주했다. 그 멜로디를 ‘한국 환상곡’ 4악장에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민요 ‘이별의 노래(Ald lang syne)’에 가사를 붙인 것을 1936년 작곡했으며, 정부 수립과 함께 국가가 됐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안익태에 대한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그의 일본명은 ‘에키타이 안’. 그가 본격적으로 친일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였다. 1941년 독-소 전쟁이 벌어지자, 일제는 유럽 지역 자국민 소개령을 내렸다. 이에 그는 베를린 주재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의 유럽 첩보망 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 1896~1969)를 찾아가 상담을 요청한다. 그 덕분에 그는 1941~1944년까지 만 2년 반 동안 에하라의 베를린 자택에 머물 수 있었다. 안익태가 1941년 일본 명절에 일왕의 시대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곡인 ‘기미가요’를 피아노로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1944년 히틀러의 생일 기념으로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을 비롯해 동맹국(독일·이탈리아 등)과 점령국(프랑스), 우방국(스페인)에서만 30차례의 공연을 지휘한다. 자신이 작곡한 ‘에텐라쿠’, ‘만주국 환상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 등도 연주했다. 특히 그는 나치 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이 됐다. 그 회원증에서 그는 출생지를 평양이 아닌 도쿄로 속여서 적기도 했다. 선진국 같았으면 우리의 ‘애국가’는 벌써 폐기됐을 것이다. 그동안 안익태는 친일파로만 알려져 왔는데, 최근 친나치 행적마저 확인됐다.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애국가의 작곡가가 반민족 행위자라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민족의 정체성, 과거사 문제 등에 엄정한 입장을 견지하는 유럽의 선진국에서라면 벌써 폐기했을 것이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가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의 친일 행적을 분석한 신간 ‘안익태 케이스’가 관심을 끌고 있으며,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도 안익태가 수록돼 있다. 안익태는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고 국립묘지에 묻혔으나, 2000년대 이후 각종 자료를 통해 일제에 부역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영국이나 일본, 군주가 있는 중동의 몇몇 나라에서는 대체적으로 왕을 찬양하는 국가 가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의례를 할 때 국기에 대한 경례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그리고 애국가를 제창한다. 진보진영에서는 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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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라는 말, 어떻게 생겨났을까?

[김관후 칼럼] 4.3희생자와 유족은 ‘빨갱이’와 ‘빨갱이 새끼’…친일파 반대해도 빨갱이

# 빨갱이와 빨치산

“빨갱이란 단지 공산주의 이념의 소지자를 지칭하는 낱말이 아니었다.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 죽음을 당하지만 항변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 김득중의 《빨갱이의 탄생》 중에서

과거 4.3희생자는 ‘빨갱이’, 그 유족은 ‘빨갱이 새끼’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했다. 도대체 빨갱이가 무엇이기에 제주4.3이 빨갱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나의 고교시절, 머리가 좋은 학생들은 서울대와 사관학교를 주로 지원했는데, 사관학교 지원생들 대부분이 사상검증에서 걸려들어 떨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바로 4.3이라는 굴레 때문이었다.

빨갱이란 단어의 어원은 일본강점기 시절 항일무장유격대를 지칭한 ‘파르티잔(빨치산)’에서 유래되었다. 유격대원을 뜻하는 ‘파르티잔(partisan)’과 공산주의를 뜻하는 ‘빨강’에서 연유되었다. 파르티잔의 러시아 발음이 우리말로 빠르지잔→ 빨치잔→빨치산으로 변형되다 빨강이란 말과 결합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유격대의 현대적 의미는 ‘게릴라(guerrilla)’이다. 프랑스어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파르티잔이 빨치산으로 변형됐고, 최종적으로 빨갱이가 되었다. 파르티잔은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말이나, 현재는 유격대원·편의대원(便衣隊員)을 말한다.

그러니까 빨갱이는 북한의 붉은 기나 공산혁명을 상징하는 빨간색 혹은 적화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빨갱이는 항일 유격대원을 지칭하는 빨치산에서 비롯되었다. 항일 유격대원 가운데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많았고, 거기서 이어져 한국전쟁 때 공산당 유격대원도 빨치산으로 부르게 됐다. 이 말이 나중에는 공산주의자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확장됐다.

한국전쟁 중 인민재판 장면.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해방 뒤 남한의 빨치산은 1946년부터 시작되었다. 그해 10월 친일경찰의 악행과 각종 사회문제 때문에 대구에서 시작된 10월 인민항쟁은 전국을 휩쓸었다. 항쟁을 진압한 뒤 미군과 경찰은 항쟁을 주도했던 세력들을 체포·구속하였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조직이 ‘야산대(野山隊)’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본격적인 빨치산의 시작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단독정부수립에 맞선 제주4.3항쟁에서부터였다.

4.3항쟁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무산시켰고, 이에 대해 미군정은 초토화전술을 대표하는 가혹한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내륙의 빨치산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지 2달여 만에 발생한 여순사건에서 본격화 되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953년에 휴전이 되었음에도 1955년까지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이 남부군의 이름으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이후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과 반공을 국시로 했던 박정희를 거치면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대한민국에서는 좌익 계통을 통틀어 비하하고 적대감을 조성하는 용어로 ‘빨갱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 일제의 ‘아카’는 독립운동가

“1940년대의 남부 조선에서 볼셰비키, 멘셰비키는 물론, 아나키스트, 사회민주당, 자유주의자, 일부의 크리스찬, 일부의 불교도, 일부의 공맹교인, 일부의 천도교인, 그리고 주장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로서 사회적 환경으로나 나이로나 아직 확고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잡힌 것이 아니요, 단지 추잡한 것과 부정사악한 것과 불의한 것을 싫어하고, 아름다운 것과 바르고 참된 것과 정의를 동경 추구하는 청소년들, 그 밖에도 XXX과 XXXX당의 정치노선을 따르지 않는 모든 양심적이요 애국적인 사람들 이런 사람을 통틀어 빨갱이라고 불렀느니라.”
– 소설가 채만식의 < 도야지>, 창비사 《문장》 27호, 1948년 10월.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의 순국 관련 기사를 보도한 일본의 한 신문.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빨치산은 일제시기부터 있었다. 국내에서는 일제 말기 징병·징용을 피해서 산으로 들어갔던 젊은이들은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적은 규모이며 조직적인 것도 아니었다. 국외에서는 보다 더 조직적이며 많은 규모의 항일빨치산이 만들어졌다. 조선의용군·동북항일연군으로 불린 세력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일제에 치열하게 저항하였고, 때로는 국내 진공작전까지 시도하였다.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匪賊)’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다.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한반도에서 빨갱이의 어원은 일경(日警)에 그 뿌리를 두었다.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가를 가두고 사상 전향을 강요했다. 그 과정에서 체포자 명부의 독립운동가들 이름에 빨간 점을 찍어 놓고 ‘아카’라고 불렀다. ‘아카(あか)’는 빨갛다는 의미이며 빨갱이는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매도한 최초의 단어였던 셈이다.

빨갱이라는 단어 자체의 빨간색을 뜻하는 아카는 원래 공산주의자들의 상징이 빨간색(적색)이라서 일본에서도 그렇게 부른 것이다. 당시 일본 경찰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일종의 정치범수용소와 비슷한 곳에 가둬넣고 사상전향 교육을 시켰는데, 이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명부에 빨간 점을 찍어 놓고 아카라고 불렀다.

일제가 1932년 일본 관동군 사령관의 통제를 받는 괴뢰정권 만주국을 건국한 후 게릴라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하여 낮은 단계의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전후로는소련 공산당 지도하에 동북항일연군에 편입되어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했다. 이것이 일제하의 빨치산 역사다.

우리나라 독립투사들은 넓은 의미에서 모두 빨갱이들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 치하에서 못살고 못 배우다 보니 파르티잔이라는 외국어를 발음하기가 어려워서 빨치산이란 우리나라식 이름으로 변형이 된 것이 아닐까? 그것은 서양 문물이 처음 들어올 때 베토벤을 ‘배도빈’이라 부르고 차이코프스키를 ‘차갑석’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일과 유사하다.

아카와 빨갱이는 둘 다 사람의 속성을 ‘빨강(赤)’이라는 색깔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리고 그 의미가 일차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지칭하는 것이다. 아카는 포섭의 대상이거나 ‘배재한 채 포섭’하는 대상이었다.

“빨갱이는 북한의 붉은 기나 공산혁명을 상징하는 색깔 빨강 혹은 적화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빨갱이’는 항일 유격대원을 지칭하는 빨치산에서 나왔다. 당시 항일 유격대원 가운데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많았고, 거기서 이어져 한국전쟁 때 공산당 유격대원도 빨치산으로 부르게 됐다. 이 말이 나중에는 공산주의자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확장됐다.”
– 양정철의 《세상을 바꾸는 언어》중에서.

# 해방 직후의 ‘빨갱이’ 용법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빨갱이’란 말이 유행이다. 이는 공산당을 말하는 것인데 수박같이 겉은 퍼렇고 속이 빨긴 놈이 있고 수밀도 모양으로 겉도 희고 속도 흰데 씨만 빨간 놈이 있고 토마토나 고추 모양으로 안팎이 다 빨간 놈도 있다. 어느 것이 진짜 빨간 놈인지는 몰라도 토마토나 고추 같은 빨갱이는 소아병자일 것이요, 수박같이 거죽은 퍼렇고 속이 붉은 것은 기회주일자일 것이요, 진짜 빨갱이는 수밀도같이 겉과 속이 다 희어도 속 알맹이가 빨간자일 것이다. 중간파나 자유주의자까지도 극우가 아니면 ‘빨갱이’라 규정짓는 그 자들이 빨갱이 아닌 빨갱이인 것이다. 이 자들이 민족 분열을 시키는 건국 범죄자인 것이다….”
– < 독립신보>, 1947년 9월 12일

빨갱이의 탄생은 1946년 반탁(反託)과 찬탁(贊託)이 대립할 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연합국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한국에는 반탁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런데 전날 저녁까지 반탁을 주장하던 공산주의자들이 1946년 1월 2일 아침부터 돌연 신탁통치 찬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소련의 지령을 받은 것이었다.

이때부터 한국의 백성들에게는 못 믿을 좌익, 상종 못할 좌익, 민족반역의 좌익이라는 이미지가 탄생하였고, 그에 조롱으로 ‘빨갱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6년 10월 공산당에 의한 대구 폭동이 발발하여 남한에 혼란과 유혈이 몰아치면서 ‘빨갱이’라는 용어는 고착되었다.

우익청년단체들의 문제점을 보도한 < 동아일보> 1947년 6월 9일자 신문. ‘남조선 테로 진상’이란 제목 아래 ‘주모 단체는 해산을 명령…협박·공갈·금품강요는 엄벌’이라는 부제도 보인다.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해방 후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공산당 치하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을 공산당 동조자라며 빨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친일 군경이었던 김종원과 노덕술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여 심하게 고문했고, 항일무장투쟁의 전설인 김원봉(金元鳳) 투사를 체포하여 ‘빨갱이 두목’이라고 모욕하며 뺨을 때렸다.

실제 상징 언어로 ‘빨갱이’가 대두한 것은 해방정국, 이승만의 등장부터다. ‘빨갱이’는 단순히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미군정과 친일파 반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에 씌우는 주술로 쓰였다. 친일파 청산을 거론해도, 외세 배격을 주장해도 ‘빨갱이’라는 굴레가 씌워져 탄압받고 죽임을 당했다.

“중간파나 자유주의자까지도 극우가 아니면 ‘빨갱이’라고 규정짓는 그 자들이 빨갱이 아닌 빨갱이인 것이다. 이 자들이 민족분열을 시키는 건국 범죄자인 것이다.”
– < 독립신보>, 1947년 9월 12일

그래서 ‘이 자들’에게는 백범 김구도 빨갱이가 되었다.

“이승만은 국민을 좌와 우로 나누어 비국민을 제거 대상으로 보고 각종 단체와 민주인사까지 빨갱이로 몰아서 정치보복과 학살을 자행했다.”
– 김득중의 《빨갱이의 탄생》 중에서

빨갱이란 말이 정치적 반대파를 공격하는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은 이승만이다. 1947년 4월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이 자국에 보낸 문서에는 빨갱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4월 27일 이승만 환영 집회에서도 ‘빨갱이들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나왔다.

그러니까 빨갱이가 ‘공산주의자’라는 뜻을 지니게 된 것은 1947년 무렵이며 1948년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4.3사건과 여순사건을 계기로 ‘빨갱이 프레임’이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이전 빨갱이는 ‘공산주의자’와 다소 다른 의미를 지녔다.

1947년 4월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이 자국에 보낸 문서에 “4월 27일 이승만 환영 집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박멸하라’, ‘빨갱이들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나왔다”라고 명시됐고, 1947년 9월 12일 자 < 독립신보>에 “빨갱이라는 말이 퍽 유행된다. 이것은 공산당을 말하는 것…”이라고 적히면서 빨갱이에 대한 의미 변화가 있음을 말해준다.

“조금만 불똥이 튀어도 폭발할 것 같은 화약고, 이것이 남한의 현재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한 가지 고무적인 현상은 높은 교육수준을 가진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들 대부분이 일제에 협력하였지만 이러한 오명은 곧 사라질 것이다. 이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으며 가장 큰 그룹이 한민당이다.”
– 미군정 정치 고문 베닝호프(H.M.benning-hoff)의 초기 보고서 중에서.

# 제주4.3과 빨갱이

“무엇을 보았는가/ 빨갱이 제주민중은 경계하라고/ 관덕정 허공에 걸려놓은 모가지야/ 볼 수 없는 눈동자야/ 무엇을 보았는가/ 공포의 그림자 짙게 드리우는 그들의 눈망울을/ 메마른 땅위에 스미는 너의 핏방울을/ 보았는가/ 가슴팍 주머니에 달랑 꽂혀 있는 숟가락아/ 무엇을 꿈꾸는가”
– 김규중의 시 < 이덕구> 전문

1948년 5월, 처형을 기다리는 제주 주민들.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1947년 3월 1일, 3.1절을 기념하는 민중 집회에 미군정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하였다. 1948년 4월 3일 이후 제주 민중은 ‘비국민’인 빨갱이로 취급되어 초법적으로 죽음을 당했다. 제주 민중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온몸으로 항거했고, 이승만과 미군정은 이런 제주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1948년 5.10 총선거 치르고 1년 뒤에 재선거를 치르기 전까지 제주섬은 ‘붉은 섬(Red island)’으로 낙인 찍혔다. 이승만과 미군정의 지배 권력은 제주도의 8할을 붉은색으로 칠하여, 붉은 섬 혹은 ‘RED ISLAND’라고 명명했다. 당시에 그 붉은색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수많은 양민들이 붉은 색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어갔다. 그 대량학살을 ‘레드 헌트’(RED HUNT)라고 불렀다. 레드 헌트는 문자 그대로의 ‘빨갱이 사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용어는 중세의 ‘마녀 사냥’(WITCH HUNT)에 빗대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이 자행한 학살은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보냈던 아우슈비츠보다 훨씬 더 잔인한 학살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반공주의를 이용한 빨갱이 몰이는 공고해져 갔다. 1948년 11월 섬의 중산간 지대 130여 개 마을들이 초토화 불길에 싸였다. 그 붉은 빛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섬주민의 1/9에 해당하는 최소 3만 명이 학살당하고 130여 개 마을이 소각되었다. 4.3은 종전 후 냉전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 구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엄청난 학살사건에서, 미국은 손에 피가 묻지 않았다고 해서 무죄인가?

변변한 무기도 없이 억제할 수 없는 분노만 가지고 봉기한 젊은이들을 무찌르기 위해 무고한 양민 최소 3만 명을 소탕한 것이 바로 4.3사건이다. 양민 100을 죽이면 그 중에 게릴라 한 명쯤은 끼어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게릴라 200명을 죽이기 위해서 양민 3만을 소탕했다.

4.3의 대참사는 빨갱이는 아예 사람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는 그러한 무서운 야만주의가 저지른 사건이었다. 빨갱이는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아예 사람이 아니었거나, 하등 인간 즉 야만인으로 간주되었다. 미국은 하와이왕국 침략 행위를 사과했듯이, 몇 년 전에 인디안 학살행위에 대해 사과했듯이, 4.3 참사에 대해서도 사과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이 4.3에 책임져야 할 구체적 근거는 무엇일까? 1947년 3.1절 집회에서 미군정 경찰의 발포로 인한 인명 살상이고 이에 항의하는 제주 도민에 대한 무차별 연행 등 대탄압이다.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발발 이후 평화적 해결의 길을 거부하고 무력충돌의 격화와 대규모 희생을 낳을 수밖에 없는 강경진압정책 선택이다. 5.10 단독선거에서 제주도 2개 선거구 선거 무산 이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파견된 브라운 대령의 강경진압 작전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갖고 있던 미 군사고문단이 1948년 가을 이후의 무차별 대량학살을 제어하기는커녕 초토화 작전에 직·간접으로 개입하여 학살을 부추긴 사실 등이다.

미국은 4.3 학살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 도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미국은 한국 정부 및 시민사회와 함께 4.3에 대한 미군정과 미군사고문단의 법적,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 또한 미국은 진상조사를 바탕으로 4.3에 대한 법적, 정치적, 도덕적 책임에 상응하는 피해회복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 /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출처 : 제주의소리(http://www.jeju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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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 (2)

[詩(시)로 읽는 4·3] (2)

진주해 온 미군
-이산하

(…………..) 미국은 왔다. 쌀의 나라로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환상의 나라로, 해방군이 아니라 정복자로서,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공산주의 전통과 지도자를 가진 나라, 그 나라의 인민들이 체온처럼 배인 주눅을 벗어내고 이 뜨거운 해방의 날을 위해, 그리고 어쩌면 시작된 해방의 매듭을 짓기 위해 한창 훌쩍이며 용을 틀고 있을 때, 저 핏빛 여명을 헤쳐 지친 영혼에 감격을 안겨줄 새로운 시대가 열어주는 문턱, 바로 그 문지방을 넘으려고 할 때, 그때 그만 와버린 것이다. 이 모든 것에 찬물을 얹으며 두 개의 칼과 하나의 방패를 들고.

20세기 중반, 한 시대를 특징짓는 가장 큰 싸움, 두 개의 세계관 사이의, 두 개의 강대국 간의 격렬한 충돌을 예고하면서 한 손에는 착취의 칼, 한 손에는 냉전의 칼, 그리고 한 몸쯤 넉넉히 가릴 우산처럼 큰 해방군의 방패를 마구 휘두르면서 마침내 그들이 왔다. 와서 북북 찢어버리고 계획대로 하나하나 접수해갔다.(……………..) (장편연작시 ‘한라산’ 중에서)

—————————————————이산하(李山河)는 1987년 3월 25일 발간된 ‘녹두서평’에 4·3사건을 다룬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구속되어 필화를 겪는다. ‘한라산’은 1300행의 미완의 서사시로 미국과 역대정권에 의해 철저히 은폐돼 온 4·3사건을 격정적인 언어로 적나라하게 고발함으로써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산하는 즉시 수배됐으나 도피했으며, 1987년 11월 11일 결국 구속된다. 1989년 10월 3일 이산하는 개천절 특사로 석방된다. 이듬해 1990년 이산하는 ‘한라산’을 완성하기 위해 2년 간 제주도에 머문다. 현장을 둘러본 이산하는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악할 수 있나”라며 충격을 받고 절필을 선언한다. 이때의 심경을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거기서부터 시를 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마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조사하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다보니 너무나 참혹하고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이산하는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않는다. 1999년 늦여름 이산하는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를 내놓으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4·3은 미군정 시대 일어났다. 미군정은 당시 통치 주체이자 권력 담당자였고, 또 민간인 대량학살을 가져온 강경 진압과 초토화 작전을 입안하였으며, 작전권을 쥐고 있었다. 1945년 9월 9일 중앙청에서는 일장기(日章旗)가 내려지고 성조기(星條旗)가 게양되었다. 38선 이남 남한에서 미군정(美軍政) 3년이 시작되었다.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존 하지(John R. Hodge) 중장 휘하의 제24군단이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명령에 의해 38도선 이남의 점령군으로 결정됐다. 미군의 최초 진주는 제24군단의 인천 상륙이 있은 지 꼭 20일이 지난 1945년 9월 28일이었다. 오전 8시 미 보병 제7사단 무장 해제 팀이 LSM 2척을 이용해 제주항에 도착했고, 1시간 뒤인 오전 9시에는 제24군단의 항복접수팀이 C47 수송기 2대를 이용해 제주비행장에 도착했다. 이어 제59군정 중대가 11월 9일 제주도에 상륙했다. 미군정과 제주도민의 충돌은 1947년 3월 1일의 제28주년 3·1절 제주도 기념대회 때 시작되었다. <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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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읽는 4․3(1)

4·3정신
김경훈

뭘 가지고 4·3정신이라고 하는가?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
어둠에서 빛으로?

자주독립과 해방통일이
4·3의 정신이다

무엇이 4·3의 전국화 세계화인가?

4·3의 전국화는
중앙정부에 의한 지방의 희생과
한반도의 통일의지를
전국에 전파하는 것이다

4·3의 세계화는
미국이 4·3에 관여한 죄상과
자국의 자주의지를
세계에 전염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빛이요 평화요 상생이다
—————————————————4·3은 제주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문제이고 과제이다. 4·3평화공원에는 백비(白碑)가 놓여있다. 언젠가 이름을 찾아 새겨놓기 위해서다. ‘화산도’의 저자 김석범은 ‘4·3정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 정부를 부정하는 것이 나의 4·3정신이며 친일파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4·3정신을 계승할 수 없다!”고 했다. 미국이 4·3에 책임져야 할 근거는 무엇일까? 1947년 3·1절 집회에서 미군정 경찰의 발포로 인한 인명살상이다.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발발 이후 무력충돌의 격화와 대규모 희생을 낳을 수밖에 없는 강경진압정책의 선택이다. 5·10 단독선거에서 2개 선거구 선거 무산 이후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의 강경진압 작전이다. 정부 수립 이후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갖고 있던 미 군사고문단이 1948년 가을 이후의 초토화 작전에 직·간접으로 개입하여 학살을 부추긴 사실이다. 4·3의 화해와 상생은 바로 평화이다. 평화는 ‘분쟁과 다툼이 없이 서로 이해하고, 우호적이며, 조화를 이루는 상태’이다. 노르웨이의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평화를 직접적인 폭력이 없는 상태인 소극적 평화와 갈등을 비폭력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적극적 평화로 구분하였다.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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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시인 ‘김수영’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 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 다시 누웠다. //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 발목까지 / 발밑까지 눕는다 /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시인 김수영(金洙暎)이 현실적 자유주의의 절정을 노래한 ‘풀’의 전문이다.풀은 개인 또는 민중일 수 있고, 너인 동시에 나일 수 있다. 바람의 구속을 거부하고 풀의 자유를 노래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와 이를 위한 정치적 자유를 옹호하고 있다.김수영은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이승을 하직했다. 시인은 반주류(反主流)를 상징하며 현실을 비판한다. 시인은 당대에 부재한 자유와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노래한다. 독재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시인은 으레 정치적 자유를 노래한다. 주류의 처지에서 보면 그들은 매우 위험하고 불온한 세력이다.시인과 대치되는 ‘속물(俗物, snob)’은 원래 지위가 낮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지배계급과 중산층 이상의 사회에서 ‘유행만 좇는 귀족’이나 ‘잘난 체 하는 어리석음과 겉치레’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바뀌었다. 속물주의(俗物主義)는 금전이나 명예 따위에서, 먼 미래를 내다보기보다는 눈 앞에 닥친 이익에만 관심을 두고 행동하는 사고방식이나 태도를 보인다.“유명이 유명을 먹고, 더 유명한 것이 덜 유명한 것을 먹고 덜 유명한 것이 더 유명한 것을 잡아 누르려고 기를 쓴다. 이쯤 되면 지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의 대제도(大制度)는 지옥이다. 이 지옥 속의 레슬러들이 속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속물이다. 아무 것도 안 붙인 가슴보다는 지옥의 훈장이라도 붙이고 있는 편이 덜 허전하다.”시인 김수영이 ‘동서문화’에 에세이 ‘이 거룩한 속물들’을 쓴 것은 그가 횡사하기 한 해 전인 1967년 봄이다.그는 여기에서 5·16 이후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꿔 살아야 했으며, 세상의 거악에는 팔뚝질 못 하고 설렁탕에 왜 고기가 이거뿐이냐고 심술이나 부리며 사는 소시민의 속물성, 그 자체를 거침없이 자학하고 힐난했다. 속물은 모든 걸 돈으로 본다. 관직도 돈이고 시간도 돈이다. 밥상을 살리는 땅도 평당 얼마로 환원되는 부동산일 뿐이며, 사랑의 보금자리인 집도 고수익을 남기는 투자 대상일 뿐이다.속물들은 땅에 투자하면 속지 않는다는 뜻으로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외친다. 속물들은 공직자 청문회에 나와 ‘땅을 사랑하기 때문에’ 시골에 농지를 사놓았다고 뻔뻔스레 말한다. 사람이 돈의 논리로 무장한 것이 속물주의다. 4․19혁명을 통해 김수영은 비로소 시인으로 완성된다. 난해시에서 참여시로, 서정시에서 혁명시로 나아가던 그는 4·19 전에 내놓은 ‘하……그림자가 없다’에서 이미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고 하며 혁명을 예감한다.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적으로 싸워야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그림자가 없다…”김수영의 시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일체의 권위주의를 거부한다. 또한 개인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며, 추상적 자유주의를 넘어선 구체적 자유주의를 요청한다. 시인 김수영이 너무 그립다. 그의 사후 50주년을 기념해 지난해 ‘김수영 전집’ 결정판이 출간돼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 문학에서 김수영은 여전히 뜨거운 이름이다. 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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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정신으로 통일독립을 쟁취하자

김관후 kghoo21@naver.com 2019년 02월 26일 화요일 11:45   0면
[김관후 칼럼] 잠녀항쟁과 4.3항쟁으로 이어진 ‘3.1혁명’

# 3.1운동은 피 흘린 혁명 

“우리나라의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을 일으킨 원인이며 신천지의 개벽이니……우리 민족이 3.1헌전(憲典)을 발동한 원기이며 동년 4윌 11일에 13도 대표로 조직된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정부와 임시헌장 10조를 만들어 반포하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힘으로써 이족전제를 전복하고 5천년 군주정치의 허울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여 사회의 계급을 없애는 제일보의 착수였다. 우리는 대중이 핏방울로 창조한 국가형성의 초석인 대한민국을 절대로 옹호하며 확립함에 같이 싸울 것임.” 
–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大韓民國 建國 綱領)’ 중에서

임시정부는 충칭(Chongqing, 中慶) 시기에 임시정부 주변의 한국국민당(金九), 한국독립당(趙素昻), 조선혁명당(池靑天)을 합당함으로써 1940년에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정부 역량을 강화하였다. 이어 1941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공포하였다. 건국강령은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이라 정의하였다.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받아들인 건국강령은 ‘새로운 민주주의 확립과 사회계급의 타파, 경제적 균등주의의 실현’을 주창하였다. 

“3.1대혁명은 한국 민족이 부흥과 재생을 위해 일으킨 운동이었다. … 우리는 3.1절을 기념할 때 반드시 3.1대혁명의 정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3.1대혁명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은 바로 반일독립과 민주자유이다. … 자존과 공존, 민주와 단결, 기개와 도의, 자신과 자존이야말로 3.1대혁명 정신의 요체이자 전부라 할 수 있다.” 
– 1943년 ‘대공보(大公報)’에 실린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석(釋) 3.1혁명정신’ 중에서 

1943년 백범 김구는 중국 < 대공보> 지에 기고한 ‘석(釋) 3.1혁명 정신’에서 3.1운동을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다. 임시정부는 3.1경축식을 매년 성대하게 열면서 중국·인도·필리핀·대만·베트남 등지의 독립 운동가들을 초청했는데, 이때마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을 ‘한국혁명과 세계혁명의 조류가 만난 획기적 시점’으로 규정하였다. 
백범 김구는 “마땅히 분발하고 가일층 노력하여 3.1운동을 완성함으로써 미완의 혁명대업을 완수해야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의미를 “3.1대혁명은 한국민족 부흥을 위한 재생적 운동이다. 달리 말해 이 운동은 단순히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는 운동만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이 5000년 이래로 갈고 닦아온 민족정기와 민족의식을 드높이자는 것이다”라고 더욱 확대시킨다.
백범 김구는 ‘3.1독립선언’을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운동의 차원을 넘은, 한민족 안에 있던 ‘정기’와 ‘의식’을 새롭게 살리는 운동으로 파악한다. 그가 얘기하는 ‘3.1대혁명’의 기본정신은 즉 5000년 이래로 갈고닦은 민족정신 네 가지는 ▲자존과 공존정신 ▲민주와 단결정신 ▲기개와 절의 및 도의 정신 ▲자신감과 자존정신이다. 이 같은 민족정신이 ‘3.1대혁명 중에 최고조로 발양되었다’라고 백범은 3.1절 24주년이 되는 해에 동포들에게 고하며, 이를 계승, 발양(發揚)할 것을 당부했다. 

3.1운동은 민주주의 운동을 함유한 범민족적 투쟁으로 3월 1일에 단순한 독립정신의 의미만을 넣을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3.1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부른 것은 비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만이 아니었다. 해방 정국에서 쏟아져 나온 모든 언론은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자연스럽게 불렀다. 1946년부터 진행된 3.1기념식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불렀다. 
2019년 3.1혁명 100년, 대한민국 100년, 임시정부 100년의 해이다. 우리 헌법은 1948년 제헌헌법 이래 1987년 현행 헌법까지 아홉 차례나 바뀌지만, 전문에서 3.1운동이 빠진 적이 없다. 올해는 전국적으로 200만여 명이 참여했던 사상 최대의 민족운동 3.1운동이 100주년을 맞는 해다. 3.1운동은 민족의 독립을 약속한 ‘민주혁명’이다. 
이민족(異民族) 전제(專制)와 군주정치(君主政治)의 동시타파! 그 원동력은 3.1이었고, 3.1 대중의 ‘핏방울’이었다. ‘혁혁한 혁명’으로서의 ‘3.1대혁명’의 요체이다. 비폭력투쟁이 변혁의 동력임을 세계사적 모델로 실증해낸 게 우리의 3.1이다. 그야말로 ‘맨손 혁명’이었다.

# 대한민국 헌법과 3.1혁명 
 
​”3.1민족운동이라는 것이 일본정부의 유인(裕仁, 히로히토)정권 밑에서 제도를 고치자는 혁명이 아닙니다. 대한이 일본에게 뺏겼던 그 놈을 광구(匡救)하자는 운동인 만큼 혁명은 아닙니다. ‘항쟁’이라고 할지언정 혁명은 아니요. 혁명은 국내적 일이라는 게 혁명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태조가 고려왕조를 전복시킨 것이 혁명이고, 갑오의 운동이 혁명운동이고 우리 조선이 일본하고 항쟁하는 것은 혁명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여기다가 ‘혁명’을 쓴다면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이 ‘혁명’글자를 변경해서 ‘항쟁’이라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조국현(曺國鉉) 국회의원, 제헌국회 속기록에서 
 
​해방 후 제헌국회의 헌법 조문 축조심의에서 ‘혁명’, ‘항쟁’, ‘운동’ 등의 명칭이 논의되다가 ‘3.1운동’으로 결정됐다. 외세에 대한 저항을 ‘혁명’으로 부르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몇몇 의원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일어난 5·4운동을 중국은 ‘5·4운동’과 함께 ‘5·4혁명’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3.1절이라는 명칭은 역사적 유산에 걸맞은 이름이 아니다. 5․10총선거 이후 헌법을 제정할 때, 전문 초안에도 ‘3.1혁명’으로 표현됐다. 그러나 한민당의 조국현 의원이 “독립운동은 혁명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3.1혁명이란 명칭에 거부감을 나타냈고, 기존의 ‘혁명’이란 명칭을 사용하던 이승만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후 ‘기미삼일운동’이란 명칭으로 헌법 전문 수정안이 제출되었고, 사회를 맡은 이승만이 토론을 막은 채 수정안을 표결에 붙여 ‘재석의원 157인 중 가 91, 부 16’으로 통과됨으로써 3.1운동이란 명칭이 사용됐다. 반일독립의 민족운동의 시야로만 3.1운동을 해석하게 된 것이다.1948년 제헌국회가 개원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완수하기 위한 헌법 제정에 돌입했을 때3.1혁명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이다. ​유진오를 중심으로 한 헌법기초위원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는 문구로 헌법 전문을 초안했다. 3.1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고 곧 서른 명의 제헌 국회의원들도 찬동을 표했다.
그러자 이에 기존까지 3.1혁명이라는 용어를 고수하던 이승만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미삼일운동’이란 단어에 찬동을 표한다. 혁명이란 것이 국내의 정부를 번복한다는 것인데 원수의 나라가 이 땅을 지배한 것을 두고 ‘혁명’이라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논리에서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미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때 한인자유대회에서 3.1운동을 ‘1919년 혁명’, ‘역사상에서 최초로 있었던 혁명’, ‘비폭력 혁명’, ‘새로운 혁명’ 등으로 언급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더욱이 3.1혁명이라는 표현은 중국 관내의 언론이나 진독수(陳獨秀)같은 지식인도 사용했고, 심지어는 미국의 매체에서조차 ‘혁명봉기(Revolutionary Uprising)’ 등으로 언급한 적이 있었다. 

“유구한 역사의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 제도를 수립하며….” – 1948년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 헌법수정안 

# 잠녀항쟁의 배후 혁우동맹 

1919년 3.1혁명 이후 제주도(島)에서도 항일운동은 전개되었다. 제주도 내의 사회주의자들은 1925년 3월 신인회(新人會)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청년 운동이다. 신인회의 활동이 일제의 탄압을 받자 1925년 9월 제주청년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제주청년연합회는 청년 조직의 정비에 주력하고자 1928년 4월 10일 모슬포에서 제주청년연합회 총회를 열어 제주청년동맹으로 개편하였다.
1928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로 핵심 인물이 체포되고 제주청년동맹과 지부의 집회가 봉쇄되는 등의 탄압으로 활동이 위축되었다. 그 중에서도 1933년에 결성된 ‘제주도농민조합 사건’으로  많은 항일 운동가들이 일제에 붙잡혀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으로는 가장 많은 인원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사회주의 청년들은 ‘혁우동맹(革友同盟)’ 등의 비밀 조직을 결성하여 소년 운동이나 잠녀항쟁, 동아통항조합, 농민운동 등 생산 현장에서의 반일 활동의 배후로 활동하였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야체이카운동이자  잠녀항쟁을 지도한 ‘혁우동맹 사건’. 잠녀들은 일어선다. 1930년 이후 펼쳐진 잠녀항쟁의 주체로 그들이 등장한다. 그건 스스로를 지키려는 생존투쟁이었으며, 거기엔 잠녀들의 의식이 깨어있었기에 가능했다. 
제주지역에서는 법정사 항일투쟁, 조천만세운동과 함께 잠녀항쟁을 3대 항일운동으로 부른다. 그러나 잠녀항쟁은 다른 항일운동과 달리 여성이 주체였던 어민투쟁이었다. 잠녀항쟁은 1931~1932년에 걸쳐 구좌·성산·우도의 잠녀들이 생존권을 침해하는 일제와 해녀조합에 항거한 여성어민집단의 생존권 수호를 위한 운동이었다.
더구나 여성이 주체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야학을 개설했던 사회주의 계열 혁우동맹 청년들의 역할이 컸다. 혁우동맹은 1930년 3월 세화리 문도배의 집에서 결성됐다. 사회주의 항일 단체로 강관순(康寬順), 신재홍(申才弘), 오문규(吳文奎), 문도배(文道培), 김시곤(金時坤), 김성오(金聲五) 등이 중심이 되었다. 
1932년 1월부터 구좌읍에서 잠녀항쟁이 일어나면서 비밀 결사가 탄로되어 관련자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체포된 인물은 강관순을 비롯하여 김성오, 신재홍, 우봉준(禹奉俊), 이두삼(李斗三), 고자화, 정찬식(鄭贊植), 공덕봉(孔德奉), 고기창(高基昌), 강희준(姜熙俊), 양봉윤(梁奉潤), 윤대홍(尹大弘) 등이었다.
잠녀항쟁은 성산과 우도, 구좌 잠녀들을 중심으로 일제의 생존권 수탈에 항거하여 일으킨 운동이다. 이들은 혁우동맹 산하 하도강습소 1기 졸업생들로서 야학을 통해 민족교육을 받았던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고차동(고순효), 김계석 등의 잠녀 대표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운동은 청년 민족 운동가들과 연계하여 잠녀항쟁을 단순한 생존권 투쟁의 차원에서 항일운동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하였다.
 
# 4.3항쟁 도화선은 3.1절 발포  

항쟁(抗爭, resistance)은 국가 권력자들이 부당한 폭력을 휘두를 때 맞서 폭력을 쓰며 싸우는 것이다. 폭동은 사회에 폭력을 벌이는 것에 중점을 뒀지만, 항쟁은 특정 상대를 향해 맞서 싸우는 걸 말한다. 폭동이 감정 적에 더 가깝다면 항쟁은 이성에 따른 것에 가깝다. 
4.3항쟁의 도화선(導火線)은 1947년 3월 1일 제주읍내에서 3.1혁명 시위 군중에게 경찰이 무차별 발포, 사상자를 내면서 비롯되었다. 바로 3.1혁명 기념일이 바로 4.3항쟁의 시발점이다. 3.1혁명 제28주년 기념대회에서 ‘3.1혁명정신으로 한국의 통일독립을 쟁취하자’, ‘미국은 남한에서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평화적 집회를 가졌다. 이에 대한 미군정의 대답은 경찰 기마대의 무차별 발포였다. 결국 6명의 사망자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은 발포 사건을 정당 방위로 주장, 민심 수습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3월 10일부터 제주에서는 세계사에서도 드문 민관(民官)합동 대규모 총파업이 전개되었다. 이 파업은 발포 경관의 처벌, 경찰 수뇌부의 인책 사임, 희생자 유족 보상 등을 요구 했다. 파업에는 제주도청을 비롯한 도내 165개 관공서 국영기업 단체들이 참여했다.  도내 초․중등학교가 항의 휴교를 했고, 상점들도 이에 동참해 문을 닫았다. 
경찰 자료에 따르면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전 기관단체가 총파업을 실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제주출신 경찰관 일부가 파업에 동참했다가 파면당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미군정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본토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원들이 대거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군은 즉시 철수 하라!”, “망국 단독선거 절대반대!”,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조국통일 만세!”, “투옥 중인 애국인사 석방하라!” 

제주도지사가 외지 사람으로 교체됐고, 제주출신 경찰관들이 사표를 내거나 뒷전으로 밀렸다. 본토에서 파견된 경찰과 서북청년단원들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조금이라도 불평하는 주민들은 무자비하게 연행․ 투옥·고문했다. 심지어 억지로 죄인을 만들아 금품을 갈취하는 등 백색테러가 잇따랐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되었고, 긴장 상황은 계속되었다. 4.3 발발 직전까지 1년간 2500여 명이 구금되었다. 특히 1948년 3월에 들어서면서 조천․ 모슬포 지서 등지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 사회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때마침 ‘5․10 단선’ 결정으로 전국의 정치상항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좌파뿐만 아니라 김구․ 김규식 등 일부 우파와 중도파에서도 ‘5․10 단선’ 반대 대열에 나섰다. 제주 민중 역시 5․10 단선 반대투쟁에 점화, 1948년 4월 3일 경찰관서를 습격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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