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콜라

코카콜라

문병란

버터에 에그 후라이 기름진 비후스틱

비게 낀 일등국민 뱃속에 가서

과다지방분도 씻어낸 다음

삽상하고 시원하게 스미는 코카콜라

오늘은 가난한 한국 땅에 와서  식물성 창자에

소슬하게  스며들며 회충도 울리고 요충도 울리고

메스꺼운 게트림에 역겨움만 남은

코카콜라 병 마게도 익숙하게 까 젖히며

제법 호기 있게 거드름을 피울 때

유리잔 가득 넘치는 미국산 거품

모든 사람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병을 비우는

슬슬 잘 넘어간다고 제법 뽐내어 마시는 구나

혀끝에스며 목구멍 무사통과하여

재빨리 어두운 창자 속으로 잠적하는 아메리카

뱃속에 꺼저버린 허무한 거품만 남아있더라

혀끝에 시큼한 게트림만 남아 있더라

제법 으스대며 한 병 쭉 들이키며

어허 시원타 거드럭거리는 사람아

-<코카콜라> 중에서 ————————————————————- 1980년대 한국에서 시는 반미투쟁을 포함한 반정부운동의 효과적 도구였다. 창작하기 간편하고 정치적 탄압이 심한 상황에서 배포하기도 쉬웠다. 군사정권의 억압이 극도로 가혹할 때 민족문학 또는 민중문학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반미시는 홍보나 선전선동을 위한 다양한 유인물에 자주 실렸다. 또한 항의시위 노랫말이 되기도 했고, 삽화를 곁들인 자료집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뉴욕타임즈》는 문병란 시인을 “화염병 대신 시를 던진 한국의 저항시인” 이라고 불렀다. 《조선일보》는 시인을 “무등산 등신대(等身大)”라고 불렀다. 그뿐인가. 시인을 가까이서 민주화투쟁의 길을 걸었던 동지들은 “모성을 지닌 끈질긴 대지의 시인” “영원히 늙지 않는 대지의 시인” “가장 도덕적인 시인” “전라도시인, 민중시인, 민족시인” 그리고 “광주의 대부” “무등산의 파수꾼” 이라고도 불렀다. 군사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저항하며 현실의 부조리를 형상화하거나 의식의 내면을 탐구하는 지극히 참여적인 시를 써 온 시인. 왜 이처럼 유독 시인에게만 찬사와 경하와 수식어가 붙는가. 그것은 유신과 군사독재정권 하에서의 문병란은 시인이요, 스승이요, 민주투사로서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순(耳順)이 넘도록 오로지 광주를 지키며 무등산에 올라 무등산을 남한의 백두산이라고 노래한 광주의 시인. 5월 광주의 피비린내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 아래서 꽃향기로 필 수 있었고, 그에 따라 4월 제주도 수많은 영령들의 숨결로 한라산의의 품안에서 고이 잠들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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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은 하나다

시(詩)로 읽는 4·3(79)

조국은 하나다

​김남주

나는 또한 쓰리라

사람들이 오고가는 모든 길 위에

조국은 하나라고

만나고 헤어지고 또다시 만나고

기쁨과 슬픔을 나눠 갖는 우리네

인생길 오르막 위에도 쓰고

내리막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라고 ​

바위로 험한 산길에도 쓰고

파도로 사나운 뱃길에도 쓰고

끊어진 남과 북의 철길 위에도 쓰리라 ​

오 조국이여!

온누리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꽃이여 이름이여

나는 또한번 쓰리라

사람의 눈길이 닿는 모든 사물에

조국은 하나라고 -<조국은 하나다> 중에서 .—————————————————-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3·1기념대회’가 열린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대회장인 안세훈은 “3·1혁명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바로 ‘조국은 하나다’라는 정신에서 출발하였다. 『조국은 하나다』는 《창작과비평》에「잿더미」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한 김남주(金南柱 1946~1994) 시집이다. 시인이 전주교도소에서 출감되기 전, 후배들이 그의 시 애독자를 위해 이전의 시집『진혼가』와『나의 칼 나의 피』에 실렸던 시편들, 그리고 옥중에서 새로 쓴 시를 총 망라해 212편의 시를 모아 시집을 엮었다. 김남주는 자신을 시인이라기보다 전사(戰士)라고 했다. 시는 그에게 이 시대의 모순을 꿰뚫는 무기였다. 자유와 평등, 통일을 위한 도구였다. 그것이 바로 4·3정신과 맥이 통하는 것이 아닐까? 지선 스님은 그의 시는 단순하고 직설적이며 명쾌하고 활발발(活潑潑)하다고 했다. 염무웅 평론가는 그가 느끼는 고통은 ‘동시대의 쓰라린 자부심’이라 했다. 날카로운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시는 민중적 서정성과 전투적 이념성이 병존하는 등 한국민중문학사의 걸출한 창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인은 박정희 유신독재 끝 무렵인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받고부터 9년 3개월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1988년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조국은 하나다』는 1988년 8월에 펴냈다. 김남주 시인이 철창 안에 갇혀 있는 동안에 출판된 옥중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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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동 편지

시(詩)로 읽는 4·3(78)

가문동 편지

정군칠

낮게 엎드린 집들을 지나 품을 옹송그린 포구에

닻을 내린 배들이 젖은 몸을 말린다

누런 바다가 물결 져올 때마다

헐거워진 몸은 부딪쳐 휘청거리지만

오래된 편지봉투처럼 뜯겨진 배들은

어디론가 귀를 열어둔다 저렇게 우리는,

너무 멀지 않은 간격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살을 맞대고 사는 동안

배의 밑창으로 스며든 붉은 녹처럼

더께 진 아픔들이 왜 없었겠나

빛이 다 빠져나간 바다 위에서

생이 더욱 빛나는 집어등처럼 마르며

다시 젖는 슬픔 또한 왜 없었겠나

우리는 어디가 아프기 때문일까

꽃이 되었다가 혹은 짐승의 비명으로 와서는

가슴 언저리를 쓰다듬는 간절함만으로

우리는 또 철벅철벅 물소리를 낼 수 있을까

사람으로 다닌 길 위의 흔적들이 흠집이 되는 날

저 밀려나간 방파제가 바다와 내통하듯

나는 등대 아래 한 척의 배가 된다

이제야 너에게 귀를 연다 ——————————————————– 하귀리는 4ㆍ3 당시 두 개의 마을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귀1구는 속칭 군냉이라 불렀고, 2구는 미수동, 가문동, 개수동, 답동, 번대동이 5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었다. 일주도로면에 대다수 마을이 위치했으나 개수동은 산쪽으로, 가문동은 해안가에 위치했다. 마을유지와 청년들은 1945년 10월 하귀중학원을 설립하여 중등교육을 시작하는 등 많은 활동을 벌였다. 하귀리와 경찰 간의 본격적인 대항은 1947년 3ㆍ1절발포사건 후 시작되었다. 3ㆍ1사건 직후 전도에 걸친 검거선풍의 와중에서 김용관 하귀초등학교 교장이 검거되어 체형 6개월을 언도받았고, 후임으로 이북 출신 교장이 부임하자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벌였다. 미군정은 마을의 움직임에 탄압을 계속하여 하귀중학원생 대부분을 1947년 여름 제주경찰서에 구금하였다. 1948년 5월 25일 새벽, 경찰과 대청단원, 서청이 가문동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주민들을 돈지동산에 집결시켰다. 경찰은 한 사람씩 취조했다. 주민들을 짝 지워 뺨 때리기를 시켰다. 마을 건너 원벵듸에서 주민들을 총살했다.(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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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베트남’

(제주칼럼) “아가야 아가야, 너는 기억하거라. 한국군이 우리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이 말을 기억하거라” 마을 초입에는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라고 쓴 낡은 ‘증오비’가 서있다. 빈호아 마을은 베트남 중부 지방에 흩어져 있는 80여 곳, 90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는 마을이다. 베트남 꽝응아이성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만행을 기록한 비문이 여러 개 있다. 퐁니·퐁넛 학살사건(Phong Nhi and Phong Nhat massacre)은 1968년 2월 12일 퐁니· 퐁넛 마을 주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의 청룡 부대에 의해 학살당하여 70여명이 죽은 전쟁범죄이다. 퐁니·퐁넛 학살 이외에도 하미 학살사건, 빈호아 학살 등이 있다. ‘베트남에 ‘따이한(大韓, 한국)제사’라는 것이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을 위한 제사다. 따이한 제사는 그래서 마을별로, 지역별로 한날한시에 열린다. 죽은 날이 같으니 온 동네가 집집마다 동시다발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제사를 지낼 사람이 남아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온 가족이 몰살당한 집은 제사를 지낼 수도 없다. ‘차라리 총을 쏴서 깨끗하게 죽이지, 차라리 날 선 칼날로 심장을 찔러 한 방에 죽였으면 그래도 덜 고통스러웠을 텐데…. 한국군 총검은 날이 무뎠다오. 그러니 네 살 배기 나는 아홉 방을 찔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흘 밤낮을 피를 흘리면서도 물 한 방울 못 먹고, 고통으로 온몸을 뒹굴면서 그렇게 죽어갔다고요.’ 구수정의 페이스 북에서 뽑았다. 베트남 푸옌성에서 만난 생존자 ‘크엉’의 구술기록이다. 베트남에서는 전쟁범죄조사위원회를 꾸려 끊임없이 전쟁범죄를 발굴, 조사해 왔다. 그 대부분은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다. 한국군의 특징은 아무런 심의과정 없이, 설명 없이 집단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빈딩(Nghia Binh)성에는 15개의 위령비가 있다. 그 중 380명의 민간인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고자이(Go Day) 마을은 학살의 한 지점일 뿐이다. 이는 참혹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함이다. 베트남에는 최소 30개 이상의 이른바 ‘한국군 증오비’가 있다.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 인도에서 베트남식 삿갓을 일컫는 60개의 ‘넌라’를 전시한 적이 있다. 넌라에는 반티논, 레티소, 응우옌티피, 응우옌꾸이, 까오티삭, 반쑤엔 등의 이름이 적혔다. 1968년 베트남 하미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들이다. 한국의 한베평화재단이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이제는 국가의 책임을 묻습니다’라는 문화제도 열었다.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집회이다. 시민들은 “우리는 진실을 원한다”, “민간인 학살 국가가 책임져라”, “국정원은 정보공개 신속히 시행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1964년부터 시작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꽝남성과 꽝응아이성, 빈딘성과 푸옌성, 카인호아성 등의 마을에서 9천명이 넘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를 만들었다. 한국에서 시작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20주년을 맞았다. 베트남 아이들은 지금도 이렇게 외친다. “싫어요, 한국 사람이잖아요.” 미제국의 패권전쟁에 꼭두각시가 되었던 월남파병, 1964년 국회의 파병 결정으로 참전한 결과, 1973년의 종전까지 8년 6개월 동안 연 31만2853명이 파병되어 전사자는 4624명, 부상자는 1만5000명이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한 태도를 보면 한국은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일본을 비난할 처지가 안 되는지도 모른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가 교육 과정에서 제대로 다뤄지고 있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국정부가 피해자 유족들에게 사과해야 하며 진실을 먼저 밝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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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에서

詩(시)로 읽는 4․3(77)

노근리에서

김예태

그 때 조국은 투병 중이었다

어느 날 숨겨진 병부책(病簿冊)에

썩은 살을 도륙한 노근리의 시술은

히포크라테스를 외면한 음흉한 의사의 오진이었다

맨살로는 너무 더워 개근천 물살로 옷을 짓던 그 해 여름

의사는 아프가니스탄의 난민을 도려내듯

쌍굴 다리 밑으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개근철교엔 아직도 선명한 눈동자들

더러는 조등이 되어 서로의 길목을 비춰주고

더러는 새떼가 되어 하늘로 올랐지만

아버지 깊은 수심은 삭아 내리는 끈에도 철심을 박는다

월유봉에 떠오르는 달은 횃불을 높이 들고

개근천 물살을 따라 해마다 핏빛 복사꽃이 피지만

눈금 없는 저울은 휘날리는 깃발들을 식별할 줄 모른다

노란 꽃다지 만세 합창하며 피어나는 봄날

아버지와 단둘이 노근리 간다

노오란 아지랑이로 흔들리면서 간다 ………………………………………………………………………………………………………………………………. 노근리양민학살사건(老斤里良民虐殺事件, Nogeun-ri Massacre)은 4·3과 쌍둥이다. 1950년 7월 25일~7월 29일 사이에, 미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예하 부대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와 쌍굴 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1994년 4월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은용이《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록 소설을 출간하면서 이 사건은 다시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한겨레》는 마을 주민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그해 5월 4일자로 싣고, 7월 20일자에는 다시 집집마다 ‘떼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스케치기사로 실었다. 그 후 월간지 《말》이 본격적인 취재를 시작하여 그해 7월호에 <6·25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00여 명 학살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자세한 내막을 기사화하였다.《말》은 1999년 6월호에서 <미 제1기병사단 병사들 마침내 입 열다> 제하의 기사로 다시 속보기사를 실었다. 그해 9월 미국AP통신은 당시 미군은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 명령에 따라 학살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하였다. 그해 말 유족들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미육군성은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유족들에 대한 보상 문제를 한국 측과 협의할 예정임을 밝혔다. 2000년 1월 9일 미국 측 대책단장인 루이스 칼데라 미육군성 장관과 민간전문가를 포함한 18명의 미국 측 자문위원단이 내한하여 한국 측 조사반으로부터 사건개요 및 조사상황을 청취한 뒤 충청북도 영동의 사건현장을 찾아 피해 주민들의 증언과 요구사항을 들었다. 피해자들은 끈질긴 노력으로 2004년에는 사건의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법안인 노근리사건특별법이 국회의원 169명의 찬성으로 국회를 통과하였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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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회화

詩(시)로 읽는 4․3(76)

영어회화

박노해

누나는 못 배워서

무식한 공순이지만

영석이 너만은 공부 잘해서

꼭 꼭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하지만 영석아

남위에 올라서서

피눈물 흘리게 하지는 말아라

네가 영어공부에 열중할 때마다

누나는 노조에서 배운

우리나라 역사가 생각난다

부유층 아들딸들이 유치원서부터

영어회화 교육에다

외국인 학교 나가고

중학생인 네가 잠꼬대로까지

영어회화 중얼거리고

거리 간판이나 상표까지

꼬부랑글씨 천지인데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도

영어회화쯤 매끈하게 굴릴 수 있어야

세련되고 교양 있는 현대인이라는데

무식한 공순이 누나는

미국 전자회사 세컨 라인 리더 누나는

자꾸만 자꾸만 노조에서 배운

우리나라 역사가 생각난다

-<영어회화> 중에서……………………………………………………………………………………………… 4·3은 우리나라 역사다. 4․3은 미군정시대에 일어났을 뿐더러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에 비롯되었다. 모든 것이 미군정에 의해 이루어졌음의 미군정 보고서 등의 미국문서에 입증되고 있다. 4·3 당시 영어회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으며, 그들은 요직에 발탁되었다. 1984년《노동의 새벽》을 펴낸 박노해는 노동자 시인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다, 1993년 《참된 시작》에서는 미국에 대해 더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20세기에는 사회주의혁명을 꿈꿨으나, 21세기에는 `사람만이 희망`인 사회가 오기를 꿈꾸고 있다. `박노해`란 이름은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을 뜻한다. 1978년부터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해고·수배·지하조직 등 산전수전 다 겪은 후, 1991년 안기부에 구속되어 무기징역 형을 선고 받았다. 특사로 출옥할 때까지 8년간을 0.75평 독방에서 지냈다. 감옥 안에서 `참된 시는 날카로운 외침이 아니라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둥근 소리여야 한다`는 정신적 변화를 겪었다. 4·3의 둥근 소리도 존재할까?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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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항선은 25시에 떠나네

詩(시)로 읽는 4․3(75)

밀항선은 25시에 떠나네

김성주

오사카로 가는

밀항선은 25시에 떠나네

정뜨르비행장으로 끌려간 아비

이호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쓰러진 어미

둘둘 말은 총소리를 품고 큰아버지가 떠나네

월남으로 가는

군함은 정오에 떠났다네

가슴에 매달린 훈장보다

통장에 찍힐 숫자의 꿈을 품고

태극기 물결을 누비며 작은아버지는 떠났다네

오사카로 가는

밀항선은 25시에 떠나네

그 사내

천둥번개의 밤바다에 재물이 됐다고

이쿠노쿠 뒷골목 공장에서 손가락 두 개 잘렸다고

북송선을 탔다고

총알 탄 소문들이 나를 조준하네

하롱베이로 가는

비행기는 정오에 떠난다네

베트남 정글을 누비던 맹호

여지없이 쓰러지던 사냥감들

오사카로 가는

밀항선은 25시에 떠나네

——————————————————————–그 시절 제주사람들은 환난을 피하여 밀항선을 탔다. 해방이 되어 환국한 사람들이 다시 밀항선에 몸을 실었다. 그 밀항선이 25시에 떠난다. ‘25시’는 1949년 발표된 C.V. 게오르규의 소설 제목이다. 하루의 24시간이 모두 끝나고도 영원히 다음날 아침이 오지 않고 아무도 구원해줄 수 없는 최후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25시는 현재의 시간일 수 있다. 옛 제주도 관문인 제주항 산지부두는 떠나는 사람들을 눈물로 배웅하는 이별의 장소였다. 그 시절 환난을 피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주항을 통해 들고났을까? 누군가는 죽음을 피하여 떠났고 누군가는 이별을 슬퍼하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컴컴한 어둠에 영문도 모르고 실려 나간 이후 영영 돌아오지 못한 이들. 제주항 맞은편 주정공장에 잡혀있던 사람들이다. 주정공장은 당시 수용소로 활용되었다. 산지항은 군법회의에 의해 육지부 형무소로 끌려가는 도민들이 떠났던 바로 그 곳이다. 목포로 대전으로 인천으로 부산으로 끌려갔던 사람들. 다수가 산지항에서 배에 태워져 바다에 수장되기도 하였다. 특히 1948년 겨울 희생자의 시신이 사라봉 인근으로 떠올랐다는 증언도 있다. 1950년 예비검속 수감자들이 산지항을 통해 바다에 실려나가 수장되었다는 증언도 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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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항쟁가

詩(시)로 읽는 4․3(74)

인민항쟁가

임화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 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

더운 피 흘리며 말하던 동무

쟁쟁히 가슴 속 울려온다

동무야 잘 가거라 원한의 길을

복수의 끓는 피 용솟음친다

백색 테러에 쓰러진 동무

원수를 찾아 떨리는 총칼

조국의 자유를 팔려는 원수

무찔러 나가자 인민유격대 ——————————————————————-

임화(林和)는 경향파 시인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을 대표한다. 박헌영에게 매료되어 남로당 노선을 걸었다. 1947년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하였으나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미제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조선 최고의 작곡가’로 알려진 김순남(金順男) 작곡하고 임화가 작사한 ‘남조선 빨치산의 노래’와 박찬모(朴贊謨)가 작사한 ‘제주도 빨치산의 노래’가 잘 알려져 있다. 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인민들의4·3투쟁사』에는 “그들은 간고하던 항일무장투쟁의 나날들을 회상하며, 또 그때마다 혁명의 각종 노래로써 사기를 돋우며 모든 곤란과 슬픔을 이어나갔다.「제주도빨치산의노래」,「남조선형제를잊지말라」,「전평의노래」,「유격대행진곡」,「나팔수의노래」,「적기가」,「해방의노래」,「추도가」,「민전가」,「인터내쇼날」 등의 혁명가요를 성난 파도와 같이 드높게 부르며, 항쟁의 기량을 불러일으켰다”고 쓰고 있다. 「인민항쟁가」는 김순남이 작곡하여 남·북조선 모두에서 애국가처럼 불리었다. 김순남이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미군정의 식량정책의 실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발발한 대구10월사건(十月事件)을 기리기 위해 1946년 작곡한 노래이다. 미군정은 계엄령을 내리고 친일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동원하여 잔인하게 진압했다. 김순남도 「인민항쟁가」를 작곡하여 체포령이 내려지자 월북했다. 남한에서는 80년대 이후 일부 운동권에서 이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으며 KBS 교향악단이 노래를 연주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제주4·3 추모앨범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임화가 작사하고 김순남이 노래한 「해방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 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 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여/ 놈들에게 빼앗겼던 토지와 공장/ 정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제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랴”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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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의 최후 그리고

“북조선에서 소련이 극좌파분자만을 선호한다고 하면 여기 남조선에서 미국은 반대로 가려하고 있소. (………) 극우파가 아닌 모든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그 활동을 방해받고 있소. (………) 친애하는 김 선생.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나는 아직도 미군정 하에서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 고통 받고 있소이다.” 1947년 7월 19일 아침, 몽양 여운형(呂運亨)은 영문잡지 《Voice of Korea》의 발행인 김용중(金龍中)에게 영문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엔 죽음을 예견하는 내용이 있었다. 미군정은 정치적인 필요성 때문에 몽양을 중시하고 가까이 하였지만, 그를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 날 오후 1시, 서울 혜화동 로터리 근방에서 트럭 1대가 갑자기 들이닥쳐 몽양이 탄 자동차를 가로막았다. 이어 한지근(韓智根)이 나타나 몽양이 탄 자동차로 달려가 2발의 총탄을 쏘았다. 2발은 몽양의 복부와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고, 병원으로 호송 중에 그는 절명하였다. 당시 몽양의 옆에 있던 제주출신 고경흠(高景欽)은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조국…” 그리고 “조선…”이었으며, 미소를 띤 얼굴로 죽었다.’고 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62세. 여운형이 죽은 후 미군정은 그의 소지품 중에서 북한으로 보내는 편지들을 수거하였다. 그밖에 몽양은 언론사로 중외일보를 운영하고 있었다. 몽양은 해방공간에서 중도적 사상을 바탕으로 좌우 합작을 시도한 인물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최근까지도 첨예한 이념 갈등 속에서 엇갈렸다. 2005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2급)을 추서 받았는데, 그의 업적에 비해 훈장 등급이 낮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그 결과, 2008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1급)을 추서 받으면서 격상됐다. 그렇다면 몽양의 옆에 있던 고경흠 과연 누구인가? 한마디로 민족주의 언론인이며 문예운동을 전개한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46년 5월 독립신보를 창간하여 주필로 있으며 자주독립을 바탕으로 한 겨레의 오롯한 통일을 위해 애썼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도쿄로 건너가서 <노동자신문>과 <현계단>을 찍어내고, <전기><인터내셔날><무산자> 같은 잡지를 펴낸 문필가로 활동했으며, 그가 쓴 글 가운데 <독립신보> 1947년 3월 26일치에 실린 ‘대지에 봄은 왔건만 민족의 봄은 안 오나!!’가 있다. “해방 후 한 때는 강도 절도로 시민들은 공포 속 싸여 있었고, 지금엔 테러와 파괴로 인하여 인민은 공포 속에 싸이고 있다. 근대 민주주의국가에서 야간 통행금지라는 것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인데 거기다 증오의 싸이렌까지 듣게 되는 것은 우울한 우리네 살림을 더욱 우울하게 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고경흠이 펼친 진보적 문예운동은 제주문학사에 한 부분을 장식할 일이라 여겨진다. 필자는 2018년 제주도문학사를 편찬할 당시 집필위원으로 참여하여 <일제강점기 제주문학>과 <제주4·3과 제주문학> 부분을 집필하면서, 제주에서 처음으로 고경흠을 소개한 사실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경흠은 일본 도쿄에서 <제3전선(第三戰線)>을 찍어내었으며, 특히 국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개편에 참여하고 사회주의적 문예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5월 이후 ≪독립신보≫의 논설위원, 주필로 여운형·백남운(白南雲) 등 중도좌파의 노선을 대변하였다.  1946년 11월 월북하여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중앙후보위원이 되었다가 숙청되었다. 그리고 제주출신 강창일 전 국회의원이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기념사업회는 1991년 7월19일 몽양 여운형선생 추모사업회로 창립됐으며, 2005년 2월17일 사단법인으로 전환해 선양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대립과 갈등이 일상화된 지금 몽양의 중도의 사상과 통합의 리더십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이래저래 몽양은 제주와 인연이 너무 깊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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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풍경(戒嚴風景)

詩(시)로 읽는 4․3(73)

계엄풍경(戒嚴風景)

리민용

빗물이

변색된 하늘에서 쏟아진다

진압부대의 방패가

번갯불에 빛을 발하고

무장경찰의 곤봉도

벼락 침에 반짝이고 있다

도시에 하나의 새로운 경계선이 나타났다

한쪽은 비무장의 군중이고

한쪽은 가스 최루탄

민성로(民生路) 민첸로(民權路)에서 민족로(民族路)까지

서로 대치하고 있는 습기로

축축한 어두운 밤

————————————————————————————————— 리민용(李敏勇) 시인은 대만시단의 ‘화려한 기수’로 불리며, <시의 영광>, <자백서>, <아마도>, <해엽> 등 이성에 바탕을 둔 역사의식으로 중량감이 내재된 작품을 발표했다. 대만 2.28사건이 벌어진 1947년 태어났다. 1947년 대만의 2.28사건은 1948년 제주4.3과, 1979년 대만의 미려도사건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흡사한 양상을 띠고 있다. 1945년 10월 25일 중화민국 대표연합군은 대만을 무력으로 접수한다. 이후 중국 본토가 중화민국(국민당)이 중화인민공화국(공산당)으로 대체된 후에, 대만으로 망명한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는 점거통치하고 있던 대만을 반공(反共)과 반격의 기지로 삼았다. 일당화를 추진하고 장기적인 계엄통치를 실시했다. 2.28사건은 1947년 2월 28일 대만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를 일컫는 말이다. 일제식민통치나 다름없던 국민당의 탄압으로 발생했다. 사건은 2월 27일 정부의 전매사업 품목인 담배를 밀수하던 노인이 단속 공무원에게 구타를 당한 것에, 주변의 시민들이 항의하는 과정에서 단속원의 총에 맞아 사망하며 본격적으로 촉발됐다. 분노한 시민들은 사건 발생지인 타이베이를 시작으로 대만 전역에서 봉기했으나, 3월 초 군대에 의해 진압 당하며 이 과정에서 2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사제담배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생긴 충돌만이 원인은 아니다. 당시 대만은 2차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으나, 연합군 대표 자격으로 들어온 중화민국 중국국민당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대만 본토의 ‘본성인’들은 49년 이후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과 함께 들어온 대륙의 ‘외성인’들로부터 차별 및 폭압을 받았다. 수사과정에서의 충돌 이전부터 대만인들에게는 폭압에 대한 불만이 내재되었으며, 중국국민당의 점거통치와 행정 부패 등을 타파해야겠다는 민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미군정과 경찰로부터 억압당한 제주도민들의 상황과 흡사하다. 제주4.3은 미군정의 폭압에 대한 도민들의 봉기로 볼 수도 있으나, 그 이전부터 제주도의 젊은 지식인들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며 항쟁해왔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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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월-정강산에서

詩(시)로 읽는 4․3(72)

서강월-정강산에서

마오쩌둥

 국민당 군대의 깃발 산 아래 내려보이고

산 위에서는 홍군의 북소리, 피리소리 요란하게 들리는데

적의 군대 주의를 천겹만겹 둘러싸도

나는 그저 내려다보며 움직이지 않네

일찌감치 방어진 삼엄하게 쳐놓았고

모두가 한 마음이니 금성철벽(金城鐵壁)을 쌓아놓은 듯

황양계(黃洋界)에 박격포소리 진동을 하고 나서

전령의 보고를 접하자니 적들은 밤새 도주해 버렸다고

——————————————————————-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1928년 가을에 시「서강월(西江月)-정강산(井岡山)에서」를 지었다. 마오의 시편들이 지니는 혁명적 서사성 이외에 우리는 주요한 예술적 특점들을 대할 수 있다. 마오는 무(武)와 문(文)을 절묘하게 엮었다. 1920년 11월 중국공산당이 창당되고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당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마오는 후난에서 당을 건설하라는 지침을 받고 1921년 8월 창사로 돌아왔다. 1926년 8월 마오는 농민 세력을 규합해 국민당과 합작으로 후난 성의 군벌을 물리치고 창사에 들어가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서강월-정강산에서」에서 ‘정강산’은 호남과 강서 두 성의 경계지역을 가로지르는 나소산맥의 중간에 위치한 산이다. 1928년 마오는 정강산의 모평이라는 곳에서 당 대표회의를 열어 정치문제와 이 지역에서의 당의 임무에 관해 「중국의 홍색정권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결의를 발표하였다. 마오의 홍군은 1930년 10월 창사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공산당의 기세에 위기감을 느낀 국민당은 1927년부터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공세에 밀린 공산당은 ‘경이적인 업적’으로 기록되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1934년 10월부터 1935년 6월까지 이어진 대장정 기간 동안 중국공산당은 죽음과 고통으로 가득 찬 악몽 같은 행군을 이어갔다. 마오의 군대는 칭하이와 간쑤의 늪지와 산악 지대를 행군하는 지옥 같은 행군을 이겨냈다. 마오는 1934년 강서성 서금(瑞金)에서 개최된 제2회 전국공동대표회의에서 이렇게 설파하였다. “수천 년 동안 우리를 지배한 봉건황제의 성과 궁전은 견고하지 않았던가? 민중이 떨쳐 일어나면서 속속 무너지고 말았다. 러시아 황제는 세계 제일의 흉포한 황제였지만,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이 일어나자 과연 계속 존재할 수 있었던가? 존재할 수 없었다. 진정한 금성철벽이란 무엇인가. 진정으로 혁명을 옹호하는 몇 천 만의 민중인 것이다.” 1936년 옌안에서 마오와 공산당은 서부 지역에 머무르면서 내부의 힘을 기를 수 있었다. 대장정을 완수한 마오가 분파 투쟁을 종료시키고 당의 지도권을 획득한 시기도 옌안시대였다. 대장정은 마오 개인에게는 당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자신을 중심으로 당 지도력을 확보하기 시작한 마오는 1943년 중국공산당에서 공산당중앙위원회 주석과 정치국 의장을 동시에 겸임하게 되었다. 공산당 총비서는 “이제 중국은 강력하고 위대한 혁명가로서 시련을 이겨낸 진정한 지도자를 갖게 되었다”고 선언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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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71)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눕는다.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시에 꼭 정해진 해석이란 없다. 시는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 민중은 풀과 같은 것이다. ‘풀’은 여리고 상처받기 쉽지만 질긴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 ‘바람’은 무수히 많은 생명들을 괴롭히고 억누르는 힘으로 상정해 보자. 바람이 불면 풀이 흔들리고 또 땅까지 휘어진다. 풀의 움직임이 반복된다. 풀이 먼저 흔들리고 이어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일어설 경우 역시 어떤 때는 풀이 먼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바람이 먼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주민중도 풀과 같다. 풀처럼 일어선다. 상처 난 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자기를 역사의 정방 향으로 세운다. 주체자의 몫을 다하기 위하여 4·3에 물든 피를 씻어내며 희생당한 이웃들의 무덤을 다듬으며 맺힌 원한을 풀고 있다. 양민을 학살한 모든 세력들을 낱낱이 찾아내어 아직은 상하좌우에 진쳐있는 예리한 칼벽을 넘고 있다. ‘풀’을 ‘민중’으로 바람을 ‘억압자’로 볼 수도 있다. 제주민중은 70여년의 어둠과 짓밟힘을 헤치고 다시 딛고 일어서는 아침의 해를 마중하였다. 4·3은 밟아도 베어도 잘라도 찢어도 쏘아도 오히려 땅속 아래서 아래서 엉키며 부둥켜안으며 아침 해와 더불어 슬며시 일어서서 드디어 푸르름을 지니며 꽃을 피우고 열매 맺고 있다. 그래서「풀」에서 민중의 의미는 한결 풍요로워진다. 민중은 억압 세력에 눌려 늘 고통을 당하고 늘 좌절한다. 순간순간 보면 그런 것 같지만 긴 시간을 두고 전체적으로 보면, 민중이란 그러면서도 늘 삶을 이어갈 뿐만 아니라 때로는 억압 세력을 압도하기도 한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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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의 묘지-제주4․3항쟁에 부쳐

詩(시)로 읽는 4․3(70) 바람, 의 묘지-제주4․3항쟁에 부쳐

이민숙

바람이 죽어서 가는 골목, 바람이 분다…………..살아야겠다

사랑이 죽어 날아가는 허공, 바람이 분다……………살아야겠다

그리움 죽어서 더한 그리움, 바람이 분다……………살아야겠다

너머 너머 암흑 너머, 바람이 분다……………………살아야겠다

적막타 제주도 윤슬 나무, 바람이 분다…………..살아야겠다

바람 깃털로 휘날리는 하루가 떠오른다 동그란 열애 ——————————————————————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Paul Valery, 1871~1945)의 시 ‘해변의 묘지(Le cimetiere marin)’에서  뽑아보았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해변의 묘지는 우리의 시간이 묻힌 언덕이다. 그 언덕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4ㆍ3은 바로 바람이 죽어서 가는 길목이다. 4ㆍ3은 사랑이 죽어 날아가는 허공이다. 그리움이 죽었다. 암흑이다. 그렇지만 바람이 불고, 살아야한다. 미군정 하에서 일어난 4․3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1960년 4월 19일 이전까지는 남로당에 의해 주도된 공산반란이고, 군경에 의하여 피살된 자는 모두 무장유격대원이거나 그 동조자라는 것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1960년 5월 제주대생 7명이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조직, 진상조사 작업에 나섰다. 1960년 4․19혁명으로 비로소 시작된 4․3사건에 대한 논의는 다음해 5․16군사정변으로 중단되었다. 4․3사건 진상규명 운동은 1989년에 이르러 더욱 활기를 띠었다. 제주지역의 사회단체들은 ‘4월제 공동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제주항쟁 추모제’를 제주시민회관에서 개최했다. 1990년 유족들은 ‘제주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를 조직했다. 20세기를 보름 남겨둔 1999년 12월 16일 국회는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세계사란 자유의식에 있어서의 진보과정이며, 우리는 그 과정의 필연성을 인식해야 한다.” 헤겔(Friedrich Hegel)의 문장에 나오는 말이다. 역사에서 진보란 필연적인 것이다. 진보가 필연적이라는 것은 역사가 우연한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인류의 진화와 더불어 인류 역사는 진보 되고 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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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빨강

詩(시)로 읽는 4․3(69)

난빨강

박성우

난 빨강이 좋아 새빨간 빨강이 좋아

발랑 까지고 싶게 하는 발랄한 빨강

누가 뭐라든지 신경 쓰지 않고 튀는 빨강

빨강 립스틱 빨강 바지 빨강 구두

그냥 빨간 말고 발라당 까진 빨강이 좋아

빼지도 않고 앞뒤 재지도 않는 빨강

빨빨대며 쏘다니는 철딱서니 같아서 좋아

그 어디로든 뛰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빨강

난 빨강이 좋아, 새빨간 빨강이 좋아

해종일 천방지축 쏘다니는 말썽쟁이, 같은 세상

빨랑 나도 빨강이 되고 싶어 빨랑

빨랑, 빨강이 되어 싸돌아다니고 싶어

빨빨 싸돌아다니다가 어느새 나도

빨강이 될 거야 새빨간 빨강

빵강 치마 슈퍼우먼이 될 거야

빨강 팬티 슈퍼맨이 될 거야

빨강 구름 빨강 바다 빨강 빌딩숲 만들어 날아다닐 거야

새빨간 거짓말 같은 빨강

막대사탕처럼 달달하게 빨리는 빨강

혀를 내밀면 혓바닥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을 것 같은 달콤한 빨강

빨~강, 하고 말만 해도

세상이 온통 빨개질 것 같은 끈적끈적한 빨강 —————————————————————————————– ‘빨갱이’. 가슴이 떨리고 내려앉는 단어이다. 그 어떤 전염병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서운 병이 ‘빨갱이’가 아닐까? 이 병에 걸리면 100% 목숨을 잃고 가족과 친척까지 굴비처럼 엮여서 깊은 산골짜기나 바다에서 총에 맞아 죽어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기에 ‘비국민’인 ‘빨갱이’는 초법적으로 죽음을 당했다. 이승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세웠다. 이승만은 국민을 ‘좌’와 ‘우’로 나누어 ‘비국민’을 제거대상으로 보고, 각종 단체와 민주인사까지 ‘빨갱이’로 몰아서 정치보복과 학살을 자행했다. 우리나라에서 ‘빨갱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탄생하였을까?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운동이나 민족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지칭하였고, 해방공간에서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빨갱이란 단지 공산주의 이념의 소지자를 지칭하는 낱말이 아니다.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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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들 -연극 ‘조천중학원’

詩(시)로 읽는 4․3(68) 청춘들 -연극 ‘조천중학원’

김병택

혁명의 시대에 단단한 얼음을 깨고

강을 건너려 했던 청춘들이었다

손으로 하늘을 가리며,

청춘들은 시대의 횃불을 든 투사가 되어

끊임없이 무대 모서리를 돌았다

모든 것이 희미해질 훗날까지도

뚜렷하게 남을 청춘들의 자취였다

사랑도 물론 있었지만,

그것이 현실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었다

어둠의 시대에 불을 밝혀,

새로운 현실을 만들고자 했던 청춘들이었다  …………………………………………………………………………………………………………………………………………………………………. 연극 ‘조천중학원’은 놀이패 한라산에서 4ㆍ3 70주년 기념으로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영했던 연극이다. 1946년 3월에 개교하고, 5개 학급에 학생 수는 200여명. 1948년 5ㆍ10선거 이후, 4ㆍ3으로 인해 대부분 교사와 학생이 피신하자 설립 2년여 만에 폐원되었다. 교사들도 대부분 일본 등지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들이었고 교육열 또한 어느 곳 보다 뜨거웠다. 조천중학원 출신들은 “그때의 강의가 지금의 대학강의 못지않았다.”고 회고한다. 교사들은 거의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던 유학생들로 해방 직후 귀향한 사람들이다. 교사로 현복유ㆍ 김동환ㆍ 김민학 ㆍ이덕구 등이 근무했으며, 그 밖에 김석환 김응환 한평섭 등이 잠시 적을 두었다. 교사들은 모두가 4.3항쟁 당시 항쟁지도부에 참여하였다. 학생들은 자치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민중과의 연대투쟁을 전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천중학원 학생 김용철이 조천지서 유치 이틀 만에 숨졌다. 시체의 검시결과 그는 혹독한 고문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천지서에서 숨진 김용철은 학교에서는 리더급 학생이었지만 몸이 약한 편이었다. 해방 후 주민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자치정부 구성과 교육이었다. 자치적 공동체 의식이 강한 지역적 특성과 일제 때부터 계속된 민족해방운동의 전통. 민족세력의 영향력 등으로 45년 9월 제주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잇따라 결성됐다. 인민위원회의 구성과 병행하여 민중이 주력한 것은 자주교육운동을 통한 사상과 학문의 보급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농업학교 하나밖에 없었던 제주도에 오현중, 제주중, 제주여중 등을 창설하는 것을 필두로 1945년부터 1946년까지 27개 학교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문맹퇴치를 위한 무수한 강습소를 세우고 『제주신문』도 펴냈다. 조국이 해방된 마당에 먼저 교육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퍼져 나갔던 것이다. 조천 함덕 신촌 신흥 등지에서 학생들이 몰렸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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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질문법

詩(시)로 읽는 4․3(67)

사월의 질문법

서안나

사월은 무엇입니까

물에 젖습니까

ㄱ과 ㄴ입니까

톱니바퀴입니까 익명성입니까

경찰입니까 질문입니까(…………)

알약을 삼키면

왜 녹슨 철봉 맛이 날까요

사월에는 왜 꽃이 아름다운가요

씨발이라는 말이 자꾸 생각납니다

지랄병 걸린 애들이

7시간씩 사라지곤 합니다

사월은

왜 검정 같은 것이 만져집니까

지울수록 빛이 됩니까

뭉클하고 끈적거립니까

불쑥 질

문처럼

내 손을 움켜잡습니다

—————————————————————— 4․3은 도대체 무엇인가? 미국(美國)은 아름다운 나라인가? 미국(米國)은 쌀의 나라인가? 4․3은 너무도 불가사의하다. 전대미문이고 미증유의 대참사이다. 인간이 인간을, 동족이 동족을 그렇게 무참히 파괴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죽음이 아니다. 짐승도 그런 떼죽음은 없다. 4․3의 실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인구의 1/9에 해당하는 최소 3만 명이 학살당하고 130여 개 마을이 소각되었다. 수만의 사람들은 자신이 왜 죽어가는 지도 모르면서 죽어갔다. 미국을 모르고, 미국의 세계전략도 모르고, 섬 주민들에게 몰살을 몰고 온 4․3은 도무지 이해불능이다. 그들은 제주도의 8할을 붉은 색으로 칠하였다. 그 붉은 색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다시 묻는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과거 4ㆍ3은 공산세력에 의한 폭동이었다. 지금 4ㆍ3은 항쟁이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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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교체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그 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더운 피 흘리며 말하던 동무/쟁쟁히 가슴 속 울려온다/동무야 잘 가거라 원한의 길을/복수의 끓는 피 용솟음친다//백색 테러에 쓰러진 동무/원수를 찾아 떨리는 총칼/조국의 자유를 팔려는 원수/무찔러 나가자 인민유격대” 김순남이 조선인에게 ‘조선 최고의 작곡가’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인민항쟁가’였다. 1947년에 나온 ‘인민항쟁가’는 남·북조선 모두에서 애국가처럼 불리었다. 임화가 쓴 노랫말이다. 좌익에 의해 광범위하게 불렸고, 북한은 물론이고 남한에서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80년대 이후 일부 운동권에서 이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KBS교향악단이 노래를 연주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제주4·3 관련 추모 앨범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우리 애국가 작사자를 두고 논란이 많다. 윤치호설, 안창호설, 민영환설 등이 있다. 가장 유력한 작사자 후보는 윤치호다. 윤치호는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 역시 친일파이자 친나치주의자이다. 애국가에 관한 현행 규정은 대통령 훈령 제368로 ‘국민의례 규정’이고, 법률적 근거는 없다. 애국가는 단지 애국가일 뿐, 국가로 제정된 바가 없다. ‘안익태 애국가’는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전제해야할 사실은 국가와 애국가는 다르다는 것이다. ‘안익태 애국가’는 공식적인 국가가 아니다. 안익태가 친일파로 밝혀진 상황에서 윤치호가 작사가로 인정된다면 애국가라는 노래 자체가 민족의 배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노래가 되어 버린다. ‘안익태 애국가’ 자체가 표절이라는 지적도 있다. 불가리아 민요 ‘오 도브루자의 땅이여(О,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를 표절했다는 것이다. 또 안익태가 1940년대 초부터 수년간 독일 베를린을 거점으로 ‘친일 행위와 결합된 나치 부역(附逆)’을 했다.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을 찬양하는 <만주국 환상곡>을 작곡하여 연주한 전력도 알려졌다. 사실 애국가를 교체하자는 논의는 1960년대부터 있어왔고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애국가를 교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무산되었다. 과거 일부 민주화운동 진영은 민주항쟁의 상징이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새로운 국가로 불러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했다. 지금까지 민중진영은 애국가가 민중의 마음을 대변하는데 내용적 한계가 있다며, 모든 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 그 노래는 광주항쟁 이후, 윤상원․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을 기념하면서 부르기 시작하여 널리 퍼졌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그런데 소리꾼 임진택이 최근 우리민요 아리랑 곡조에 애국가 가사를 붙여 새로운 애국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아리랑 애국가’를 대안으로 제시한 셈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겨레의 혼을 담은 민족의 노래고, 민중의 노래다. 아리랑 자체로 애국가다. 아리랑을 애국가의 곡조로 차용할 명분과 자격은 차고 넘친다. ‘아리랑 애국가’의 ‘아리랑’은 1926년 나운규가 제작 감독 주연한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이다.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아리랑은 바로 나운규 선생의 아리랑이다. ‘나운규 아리랑’은 1926년 영화 상영 이후 오랜 시간 우리 국민 사이에서 애국가 이상으로 사랑받아 왔다.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한국사람 누구에게나 사랑받은 곡이다. 특히 해외 동포에게 아리랑의 영향력은 애국가보다 더 클 것이다. 적잖은 외국인도 아리랑을 알고 있다. 우리의 역사성과 특수성, 보편성을 모두 갖춘 곡이다. 지역과 파벌, 좌우 세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알고 좋아한다. 아리랑을 우리 애국가로 부르면 이른바 ‘친일 애국가 논란’을 깔끔히 넘어설 수 있다는 논리이다. 글쎄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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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참

詩(시)로 읽는 4․3(66)

동참

체 게바라

의지와 신념만 있으면

행운은 무조건 따라오게 되어 있다고 믿는

젊은 지도자 카스트로가

자신의 혁명 대열에 합류하자고 했다

그는

무장투쟁으로 자신의 조국을

해방시키겠다고 했다

나는

물론 동참하겠다고 했다

나에게도 행운이 따라올지 모르겠다

이제 그곳에서 나는

방랑하는 기사의 망토를 벗어버리고

전사의 무기를 받아들임으로써

빗발치는 총알 속을 누벼야 하리라 ———————————————————————————————–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1928 ~ 1967, Che Guevara).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극찬했다.「동참」을 읽다보면 바로 제주4·3의 산사람들을 연상시킨다. 4·3당시 산사람 지도부이다. 체 게바라의 참혹한 죽음은 ‘전사 그리스도’ 란 별명을 붙이게까지 했다. 미국에서조차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다. 혹자는 ‘혁명도 사회주의도 사라진 지금 오로지 체 게바라만 살아남았다’고 할 정도로 전설의 혁명가로 살아남아 있다. 체 게바라는 1955년 쿠바의 망명 정치가인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당시 카스트로는 1952년 쿠바의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가 쿠데타로 선거가 무산된 뒤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체포, 복역 후 멕시코로 망명한 상태였다.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를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아는 강인하면서도 온화한 새로운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1956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게릴라 투쟁을 시작하면서 쿠바 내 반정부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게릴라의 세력은 급성장하였다. 이 활동 중 체 게바라가 보여준 능력과 인간미는 그를 피델 카스트로에 이은 반군의 2인자로까지 끌어 올렸다. 체 게바라는 자신이 지휘하는 제2군을 이끌고 산타클라라에서 승리하였다. 많은 쿠바의 민중들이 체 게바라의 군대에 동조하였다. 마침내 1959년 1월 1일 독재자 바티스타가 도미니카로 망명하면서 반군들은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혁명을 성공하였다. 피델 카스트로는 총리가 되었고 체 게바라는 그간의 활동을 인정받아 쿠바국민이 되었으며, 각료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5년 4월,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에게 ‘쿠바에서 할 일은 다 끝났다’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전략)…어른이 되었을 때 가장 혁명적인 사람이 되도록 준비하여라. 이 말은 네 나이에는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정의를 지지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라. 나는 네 나이에 그러지를 못했단다. 그 시대에는 인간의 적이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네게는 다른 시대를 살 권리가 있다. 그러니 시대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후략)”-1966년 2월 체 게바라가 딸 일디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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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우봉 해변에서

詩(시)로 읽는 4․3(65)

서우봉 해변에서

한승엽

마을 안팎이 모두 어두컴컴해졌다

중산간 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해안으로 내려오며 심하게 절뚝거렸다

북쪽 바다와 맞닿은 벼랑과 모래밭으로 등 떠미는 바람이 휘몰아쳤다

불쑥 종적을 감추고 멀리 사라질 수도 있었지만, 겨울 파도가 밀려와 가마니 위에 차디찬 육신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손금에 세월의 아픔이 고여 뼈마디가 쑤시는 날이면. 밀려나는 물결에 씻김을 하여도 하늘의 안색이 흐렸다

아직도 벼랑 안쪽에선 새들의 꽁지가 두드럭거리고 있었다

—————— 해방과 더불어 함덕리민들은 역사의 회오리를 견뎌내야 했다. 4ㆍ3초기 무장대가 함덕리를 장악하고 지서는 번번이 무장대의 피습을 받았다. 주민들은 무장대의 요구에 따라 식량과 의복을 산으로 올려 보냈다. 산에 올라간 젊은이들은 산에서 ‘레포’노릇을 했다. 레포란 ‘reporter’에서 유래한 말로 산에서 ’연락병‘으로 지칭했다. 일제 강점기 민족해방투쟁을 하던 때부터 쓰였던 말이다. 보초를 ’빗개(picket)’라고 했던 것도 같은 쓰임새이다. 함덕국민학교에서는 9연대· 2연대 등 군부대 1개 대대가 주둔하였고, 해수욕장과 서우봉은 바로 학살터였다. 조천면 관내 주민 231명, 제주읍 관내 주민 28명, 구좌면 관내 주민 19명, 성산면 관내 주민 2명, 남원면 관내 주민 1명 등 총 281명이 희생된 곳이다. 조천· 함덕은 물론 선흘· 대흘 등 조천면 산간지역, 제주시 삼양· 화북 구좌면 주민 등이 대대본부로 불려 가면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1948년 4월 3일 함덕지서에는 5명의 경찰관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2명이 그날 무장대에 의해 납치되었다. 그 뒤 경찰관이 증원되었다. 5·10선거 무렵에는 10명으로 늘어났다. 토벌작전이 본격적으로 착수된 5월 13일 무장대의 역습이 있었다. 바로 함덕지서 습격사건이다. 한낮에 경찰관 인면피해가 7명에 이른 사건이다. 무장대원들은 경찰관들을 향해 총구를 들이대었다. 오후 4시께 무장대의 집중사경으로 지서주임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무장대의 손에 생포된 경찰관 3명은 대흘지경으로 끌려가 피살되었다. 또 경찰관 2명은 지서건물 속에 숨어 있다가 지서건물이 불타는 바람에 질식사했다. 이런 와중에 지서 앞에서 경찰관 가족도 살해당했다. 한편 경찰은 이 사건 이후 함덕에 응원경찰대 30명을 배치하였다. 함덕리(11월 4일), 신흥리(11월 4일), 조천리(11월 6일) 등 마을에서 무장대 습격에 대한 토벌대의 보복학살이 벌어졌다. 11월 25일에는 조천면 초대 면장이자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 조천면 건준위원장, 조천면 인민위원장, 제주도 민전 부의장 등을 역임했던 김시범이 함덕리 서우봉에서 토벌대에 의해 총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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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사 ‘백선엽’

<제주칼럼>“백 장군님을 위한 자리는 서울 현충원에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 백 장군님은 6ㆍ25전쟁 영웅으로 자유대한민국을 구한 분이다. ‘6ㆍ25의 이순신’이라고 평가해도 될 것이다.”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자신의 페이스 북에 백선엽 관련 글을 올렸다. ‘백 장군’은 바로 백선엽이다.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함세웅 신부는 백선엽을 향해 “사좌하지 않는 악질 친일파”라고 했다. “독립군 토벌했던 간도특설대가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더냐!” 애국지사의 후손들이 재향군인회를 규탄하는 목소리다. 재향군인회가 백선엽을 ‘군의 영웅이자 국군의 뿌리’라고 주장하자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은 “대한민국재향군인회는 해체하라”며 단체 해산을 촉구했다. 여기에서 원희룡 지사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4ㆍ3당시 양민을 학살한 주범은 일본군 출신의 친일 세력이며, 그들이 군대의 무력을 활용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4ㆍ3발발 직후부터 종료직전까지 진압하는 책임을 맡았던 박진경ㆍ 최경록ㆍ 송요찬ㆍ 함병선 연대장은 모두 일본군 출신이다. 이들에 대한 원 지사의 평가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백선엽의 친일행적을 비판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를 비판하면 수구세력이 일어나 “한국전쟁 영웅을 공격하는 것은 빨갱이 종북세력”이라며 공격한다. 지금 정치권에서도 찬반 논쟁이 불을 뿜고 있다. 백선협은 1943년 4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했다. 그해 12월 리허성에서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국군 중위였다. 특히 간도특설대에 복무하면서 항일독립군들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다. 그의 만주군관학교 입교는 자발적 친일의 전형이다. 만주국 장교가 되려면 연령, 기혼여부, 까다로운 신원조회, 신체검사, 필기시험, 면접 등을 거쳐야 했다. 지원을 한다고 손아귀에 있었으며 일본육사의 만주분교라고 불리기도 했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하였다. 다음은 ‘간도특설부대가’이다.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 위한/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선구자의 사명을 안고/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건군은 짧아도/전투에서 용맹 떨쳐/대화혼(大和魂)은 우리를 고무한다/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천황(天皇)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백선엽 회고록 <간도특설대의 비밀>에서 그는 자신이 조선인을 토벌했다고 인정했다. “우리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 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백선엽의 친일행적을 입증하는 자료는 또 있다. 2000년 일본에서 발간된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이라는 책. “간도특설대의 본래 임무는 잠입, 파괴 공작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특수부대, 스페셜 포스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 만주 국군 중에서 총검 대회, 검도, 사격 대회가 열리면 간도특설대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친일파 청산의 실패는 과거의 역사로 끝나지 않는다. 친일파들은 친미와 반공 이데올로기 그리고 일제 군국주의의 파쇼적 사고방식을 새로운 생존의 무기로 삼았다. 친일파들 중 상당수는 6·25 전쟁이 터지면서 ‘반공애국투사’로 변신해 자신의 친일행각을 덮으려 했다. 백선엽은 광복 이후 국군 창설과정에 합류해 한국전쟁 당시 1사단장, 1군단장, 휴전회담 한국대표 등을 역임했다. 또 “제주4.3사건 이후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군대 내 좌익분자들을 그냥 둘 수 없어 당시 10만 병력 중 약5%를 숙군했다”며 반공 투사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남로당에 연루됐던 박정희를 살려준 것도 백선엽이다. 1949년 당시 육군 정보국장이던 백선엽은 박정희가 석방되는데 크게 기여했고, 문관으로 육군 정보국에서 일하게 했다. 박정희가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할 때도 육군참모총장이던 백선엽이 도움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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