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빈곤 ‘가난’

 

                                  김관후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의 시 ‘가난한 사랑노래’ 전문)

  ‘가난’은 물질적 빈곤을 가리킨다. 인간생활을 인간답게 영위하기에 필요한 경제적 재화의 결핍이 가난이다. 가난은 현대인들이 수치스럽게 여기고 배척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불쌍한 가난뱅이들’을 상대로 자선을 베푼다. 그러나 지금, 불쌍한 가난뱅이들은 자기네 빈곤을 의식하게 되었고, 일단 그 빈곤의 원인을 포착하면서 거기에 대해 항거가 시작되었다. 현대의 독특한 현상은 이 빈곤이 ‘집단적 빈곤’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자기들 사이에 유대를 맺고, 자기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조직적으로 투쟁하며, 그 같은 상황에서 혜택을 받는 자들에게 공동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물질적 빈곤’은 인간이하의 상황임이 분명하다. 가난하다는 것은 굶어 죽고 무식하고 남에게 수탈당하고, 그러면서도 본인은 그것도 모르며, 자기가 떳떳한 하나의 인격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빈곤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보장받아야 할 능력과 기회를 총체적으로 박탈당한 상태이며, 인권이 전반적으로 침해된 상황이다. 빈곤을 인권의 문제로 제기하는 이유는 그것이 개인의 무능력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결과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국가가 빈곤퇴치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IMF 사태 이후 중산층 일부가 빈곤층에 편입되었다. 1998~99년 사이 전국민의 6.2%가 빈곤층으로 유입되었으며, 이어 상대빈곤률이 증가하였다. 상대빈곤률은 2004년 최대치를 기록했으며, 이는 양극화현상으로 나타났다. 요즘 빈곤층은 일하면서도 빈곤에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 도시 빈민촌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기가 끊어진 집이 많다. 한달에 몇 만원의 전기 요금을 못내 전기가 끊어지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전기조차 이용하지 못하는 세대는 지난 한 해에만 48만6362가구에 이르렀다. 방에 전깃불을 밝히고, 텔레비전을 켜고, 선풍기를 돌리는 것. 그 가장 기본적인 행위조차 할 수 없는 이들에게 도움의 빛은 희미하기만 하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시스템을 만들어주는 것이 정부의 존재 이유고,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닐까?.

가난한 사람들의 벗 테레사는 “만일 가난한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내가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굶주린 사람, 고독한 사람, 집 없는 어린이 살아갈 집을 찾아다니는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찾아 오셨으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 말하였다. 가난한클라라수녀회(Poor Clare)라는 가톨릭 단체가 있다. 가난하게 살기로 서약하고, 기도와 고행, 명상 및 육체노동에 헌신하고 지극히 엄격한 은둔생활과 금식 및 금욕생활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직자 모임이며,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의 관계는 과연 어쩐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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