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겐 ‘빨치산’, ‘게릴라’ 아닌 ‘폭도’

(63) 정보입수, 정세분석, 정치상황에도 관여했던 미CIC

미CIC는 어떤 기관인가?

‘이유는 없다/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 말갛게 행주질한 비어홀의 카운터에/ 돈을 거둬들인 카운터 위에/ 적막이 오듯이/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카운터 같기도 한것이니// 이유는 없다-/ 가다오 너희들의 고장으로 소박하게 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가다오/ 미국인과 소련인은 ‘나가다오’와 ‘가다오’의 차이가 있을 뿐’-김수영(金洙暎)의 시 ‘가다오 나가다오’

미군 조직에서 오늘날의 방첩대가 확립된 것은 진주만공격 직후인 1941년 12월 13일이었다. 애초부터 방첩대는 공산주의 사냥을 위해 탄생한 조직이었다. 미CIC(Counter Intelligence Corps)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Secret Service’의 핵심 목표는 바로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는 일이었다. 물론 정보참모부(G-2)와 CIC의 양자의 관계는 G-2가 ‘상명(上命)’하면 CIC는 ‘하복(下服)’하는 단일 조직의 역할을 담당했다.

미CIC는 8·15광복 이후 남한 주둔 미군의 전투부대인 24군단에 소속된 정보기관이다. 1945년 9월 9일 처음으로 남한에 들어왔다. 활동은 매우 광범위해서 첩보, 정보수집 뿐만 아니라 한국인 정치지도자와 미국인에 대한 사찰도 벌였다. 도쿄(東京) 제441CIC 파견대의 통제를 받다가 1946년 2월 13일 서울에 파견된 제224CIC가 남한에 주둔하는 모든 CIC 파견대에 관한 작전 통제권을 장악하고, 제971CIC 파견대로 교체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미군의 제주도 진주는 1945년 9월 28일이었다. 이어 제59군정 중대가 11월 9일 제주도에 상륙했다. 제59군정중대 사령부와 사령부 중대, 그리고 제주도를 위수지역으로 관할하는 미보병제6사단 제20연대의 1개 중대가 같은 날 제주항에 상륙했다. 제주도에 대한 미군정의 본격적인 점령 정책은 제6사단이 11월 11일 자정부터 일본군의 철수작전을 책임졌던 제24군단 군수지원사령부(ASCOM)로부터 제주도에 대한 통제 업무를 넘겨받으면서 시작됐다.

미군정과 제주도민의 충돌은 1947년 제28주년 3·1절 기념대회 때 시작됐다. 3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주북국민학교에서 기념대회가 열려 평화시위를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미CIC는 제주도의 총파업이 남한 전역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는 시금석일지 모른다고 평가했다.

미군 정보보고서에서는 “좌익의 남한에 대한 조직적인 전술임이 드러났다”고 기록하고 있는가 하면,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 단체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 거점으로 알려졌다는 등 제주도를 좌익 근거지로 간주했다.3·1사건과 총파업, 이어진 도민 대량 검거사태로 제주사회의 불안감이 증폭되는 가운데 1947년 4월 10일에는 한독당 농림부장 출신의 유해진을 제주도지사로 임명했다. 미CIC까지 극우파 인물로 분류한 유해진은 부임하기 직전 “극좌와 극우를 배제해 행정을 추진하겠다”고 언급한 것과는 달리 극단적인 우익강화 및 좌익탄압 정책을 폈다.

▲ 미CIC문서철 < 김구 암살관련 배경정보>.

1948년 미CIC는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철수했으나, 요원의 상당수는 그대로 남아 켈로부대(KLO)와 인간첩보부대(USAF) 요원으로 활동했다. 초토화작전 당시 최소한 임시군사고문단(PMAG), 방첩대(CIC), 그리고 미군 59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한국방첩대는 출범 초기, 한국인들을 개처럼 취급했다. 1948년 5월 27일 조선경비대총사령부 정보처의 특별조사과로 창설돼 이후 ‘특별정보대’를 거쳐, ‘방첩대’로 개편됐고, 나중에는 ‘특무대’로 명칭이 변경됐다. ‘방첩대’라는 명칭이 사용된 시기는 1949년 10월부터 1950년 10월에 이르는 1년여에 불과했다. 이어 제2과(방첩과)를 정보국에서 분리해, 육군본부 직할부대로서 특무부대(Special Operation Unit) 본부가 설치됐다.

또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3월에는 북파공작을 임무로 하는 첩보부대(HID, Headquater of Intelligence Detachment)가 정보국으로부터 분리됐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육군방첩부대’, 1968년에는 ‘육군보안사령부’, 1977년 ‘국군보안사령부’, 1991년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됐다.

“‘방첩대(CIC)’라는 세 글자는 한국인들에게 공포스러운 단어였다. 왜냐하면 한국 방첩대는 정말이지 잔인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미군 방첩대에 대해서도 똑같이 받아들였다.” – 잭 셀즈(Jack D. Sells), 제111 방첩지대 특수요원(Special Agent)의 인터뷰에서

▲ 국군기무사령부.

우익 강화에 개입한 미CIC

1947년 8·15 기념일을 앞두고 경찰은 좌파세력에 대한 검거작전에 들어갔다. 민전간부와 남로당원 심지어 공무원 등에 대한 일제단속에 나섰다. 제주도청 공무원 8명을 포함해 민전 간부와 세무서 직원, 도립병원 의사와 간호사, 우편국 교환수 등 20여명이 검거됐다.

‘거(去) 14일 돌연 행동을 개시한 경찰당국에서는 민전 간부를 비롯하여, 남로당원, 도 직원(학무과장 이관석씨 외 7명), 도립의원 직원(의사 1명, 간호부 1명), 우편국 교환수 등을 검거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그 후 미CIC와 경찰당국, 검찰당국이 협력하여 즉시 취조에 착수하였던 바, 17일에는 민전 의장 박경훈씨 외 수 명이 석방되었다 하는데, 18일 현재 판명된 바에 의하면 홍종언(洪宗彦) 한사택(韓四澤) 김인규(金仁奎) 백남섭(白南燮) 김이환(金二煥․婦女) 고봉효(高奉孝) 강대석(康大錫)씨 등 기타 수 명이 석방되었다 하며, 한편 학무과장 이관석(李琯石)씨를 비롯한 도 직원 7명과 민전 간부 등은 계속하여 검찰당국의 취조를 받고 있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8월 20일

1947년 9월부터 대동청년단과 서북청년회가 발족됐다. 또한 조선민족청년단 제주도단부도 창립됐다. 우파청년단체로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 제주도지부와 광복청년회 제주도지회가 조직돼 있었다. 1947년 11월 중앙에 보고된 대청제주지부의 단원 수는 1000여명이었다.

우파청년단체들이 조직을 강화하는데 유해진 도지사와 미CIC의 역할이 컸다. 미CIC 요원들이 제주에 상주한 것은 3·1사건과 3·10총파업 직후인 1947년 3월 중순께였다. 제주CIC의 첫 보고는 그 해 3월 21일 제출된 ‘제주 우익정당이 허약하다’는 내용부터 시작됐다. 「971방첩대 역사」 에 의하면 미CIC 제주지구대는 1948년 말에도 계속 운영된 것으로 되어있다.

미CIC는 1947년 12월에 의미심장한 첩보보고를 한다. 그것은 “제주도의 여론은 만일 경찰이 빠른 시일 내에 정의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모든 조직들이 제주경찰감찰청을 공격하리라는 것” 또한 1948년 1월 제주 CIC의 보고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최근 좌익인사들의 활동’이란 제목의 미24군단 정보보고서도 눈길을 끈다.

‘제주도는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층 지도자들과 대중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있다. 좌익인사들은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으며, 소위 좌익분자라고 불리우는 인사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제주도민들은 국내외적 정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익이나 좌익에서 터져 나오는 모든 종류의 선전선동에 쉽게 휩쓸린다. 우익인사들은 ‘빨갱이 공포’를 강조하며 주로 청년단체와 공직에서 좌익인사들의 척결을 통하여 섬을 장악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제주도의 좌익은 반미를 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의 테러는 우익이 선동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제주도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며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다.’ – Hq. USAFIK, G-2 Weekly Summary, No. 123, January 23, 1948.

‘도민청(島民靑)위원장 김택수씨가 서울에서 수도청에 피검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동씨는 그 후 미CIC의 취조를 받고 있었는데 피검된 지 4,5일 만에 삭방되었다 하며 범죄사실이 전혀 없었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4월 30일

‘거(去) 14일 돌연 행동을 개시한 경찰당국에서는 민전 간부를 비롯하여, 남로당원, 도 직원(학무과장 이관석씨 외 7명), 도립의원 직원(의사 1명, 간호부 1명), 우편국 교환수 등을 검거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그 후 미CIC와 경찰당국, 검찰당국이 협력하여 즉시 취조에 착수하였던 바, 17일에는 민전 의장 박경훈씨 외 수 명이 석방되었다 하는데, 18일 현재 판명된 바에 의하면 홍종언(洪宗彦) 한사택(韓四澤) 김인규(金仁奎) 백남섭(白南燮) 김이환(金二煥․婦女) 고봉효(高奉孝) 강대석(康大錫)씨 등 기타 수 명이 석방되었다 하며, 한편 학무과장 이관석(李琯石)씨를 비롯한 도 직원 7명과 민전 간부 등은 계속하여 검찰당국의 취조를 받고 있다 한다.’-제주신보 1947년 8월 20일

▲ 훈련중인 미 육군 스트라이커 장갑차 부대.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미CIC 요원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성무)는 4일 기자회견을 열고 “백범 김구 시해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요원이자 우익단체인 백의사 특공대원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했다”고 밝혔다. 미 제1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조지 실리 소령이 백범 암살 직후인 1949년 6월 29일 작성한 이 문서는 ‘김구-암살관련 배경정보’란 제목 아래 “나는 그를 정보원으로, 후에 한국 주재 CIC 요원으로 알고 있었다”며 “안두희는 백의사 혁명단 1소조 구성원으로 백의사 지도자인 염동진이 명령을 내리면 암살을 거행하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고 기록돼 있다. 실리 소령은 1946년부터 1948년 12월까지 한국 주재 CIC파견대에서 근무한 한국통으로, 20개월간 염동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원회는 “백의사는 염동진이 해방 직전 평양에서 조직한 대동단을 모태로 1945년 11월 서울에서 월남한 청년·학생들이 중심이 돼 조직한 단체로, 반공 테러활동과 함께 미군 CIC와 연계하에 대북 첩보활동을 펼쳤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백의사는 1945년 9월 현준혁(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장)을 암살했고, 1946년 3월에는 신익희와 연계하에 대북 테러공작을 전개, 김일성·김책·강양욱 암살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실리 소령은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범들도 이 지하조직의 구성원으로 알려져 있다”고 적었다. 염동진은 1932년 중국 낙양군관학교를 졸업, 중국군에서 활동하다가 관동군에 체포돼 첩보요원으로 변절한 인물로, 6·25당시 북한군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성무 위원장은 “현재로선 미국이나 백의사가 백범 암살에 개입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며 “관련자료를 계속 발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기철기자’ -조선일보 2001년 9월 4일

안두희(安斗熙)는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운전기사 박기서에게 몽둥이로 피살됐다. 그는 1947년 월남 후 서북청년회 간부로 활동했으며,또 미CIC 정보원이자 우익 테러조직인 백의사(白衣社) 자살 특공대원이었다. 그가 간부로 몸담었던 백의사는 반공 테러단체로서 요인 암살 및 극우 테러 활동을 하였으며, 서북청년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안두희는 적어도 1948년 말까지 미군971CIC 파견대의 정보원이자 요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49년 당시 이미 최고의 정보·공작전문가였으며, 이승만 권력서클의 6차례에 걸친 강도 높은 스크린 과정에서 최고 적임자로 선발됐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안두희는 맥아더 사령부의 대북 특수공작기관인 한국연락사무소(KLO)를 모방해 한국정부가 추진한 청량리정보학교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KLO는 한국 전쟁을 전후한 시기 대북첩보공작으로 유명한 기관으로 미군이 벌인 대북첩보·공작·유격전의 최선봉에 서있었다. 1955년 그는 이승만의 1956년 대통령선거 승리를 위해 한국독립당을 재건하는 활동에 착수했다.

김구 암살후 1959년 안두희는 일본 오사카에 다시 나타났다. 그의 임무는 재일교포 북송을 저지하기 위해 니카타 항에 정박중인 소련 수송선을 폭파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이승만 사설기관으로 도쿄에 설치된 경무대 기관책임자 위혜림과 요원 나카지마와 협력했다. 그러나 그 임무는 나카지마가 일본기자에게 정보를 제공, 언론에 대서특필됨으로써 중단됐다.

▲ 김구 선생의 피 묻은 옷과 데드 마스크.

▲ 안두희 총에 맞아 사망한 백범 김구선생.

미CIC, 당시 제주상황에 개입

미CIC는 일제시대에 은행사택으로 사용됐던 적산사옥에 제주사무소를 설치, 상주했다. 책임자는 사복 차림의 미군 대위급이었으며, 한국사람 1명을 포함해 미군 장교 2~3명이 주둔했다. 비밀리에 활동하던 CIC요원들도 있었다. 미CIC는 경찰·경비대·우익단체들로부터 정보를 취합·통제했을 뿐만 아니라, 자체 요원들로부터 정보를 입수, 정세를 분석하고 정치상황에도 직접 관여했다. 또 미 CIC장교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지부를 맡을 사람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3월 21일자로 된 2건의 방첩대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의 우익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독립당 제주도지부는 조직도 빈약하고 자금도 충분치 못하다. 각 당은 섬 전체에 단지 1000명의 회원이 있을 뿐이다. 두 당은 좌익인사들의 심한 반대로 정치적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주도의 좌익에 대한 여러 보고서에 따르면 좌익인사들은 제주도 인구의 60~80%에 이르고 있다. 제주도에서 파업 사태로 고무되었던 좌익인사들은 최근 많은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 해서 정치 상황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것 같다.’-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7년 3월 25일~1947년 3월 26일 (No. 489, 1947. 3. 26. 보고)

제주 현지의 미CIC 보고는 1947년 ‘3월 21일자’부터 시작된다. 1947년 6월의 미CIC 보고는 제주도 좌·우익의 미·소 공동위원회에 관한 ‘견해’를 분석 보고하고 있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 보고가 “비밀정보원(a confidential informant)이 5월 하순 대정면에서 몇몇 좌·우익들 간에 있었던 회담내용을 요약 보고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미CIC가 은밀하게 한국인 정보원을 두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최근 방첩대 보고에 따르면 제주도민들은 그들의 정치관계에 있어서 우익으로 기울고 있다. 우익 대한민주청년동맹은 과거 좌익의 본거지에서 공공연히 선전활동을 벌이고 있다. 최근 경찰의 좌익정당 분쇄 활동이 우익 단체가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입지를 넓혀준 것이다. 우익인사들은 좌익인사들이 우익의 주도권에 대하여 더 이상 어떤 조직화 작업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우익인사들은 연설과 포스터 부착 활동으로 회원수를 늘려 가고 있다. (CIC 정기보고 제525호)’-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7년 5월 2일~1947년 5월 3일 (No. 521, 1947. 5. 3. 보고)

미CIC가 권유했던 조선민족청년단 제주도단부 창립위원회 결성식이 1947년 11월 5일 거행됐다. 이날 결성식에서 위원장에 최남식(崔南植), 부위원장에 문봉택(文奉澤)·오광해(吳光海) 등이 각각 선출됐다.

‘한 방첩대 정보원(신뢰도 C-3)의 보고에 따르면 최근 제주도청에 근무하는 공무원 13명이 남로당에 가입했다. 이들은 8월 15일에 지사를 암살할 계획이다. 극우파 제주도지사는 좌익인사들에게는 인기가 없다. 그의 암살을 요구하는 삐라가 여러 장 뿌려졌다. (미 CIC 정보요약)’-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7년 8월 6일~1947년 8월 7일 (No. 601, 1947. 8. 7. 보고)

1946년 제주농업학교와 오현중에서 일제 잔재교육과 파쇼교육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이 있었다. 1947년 2월 양과자반대 시위, 3월의 3·1절 시위 등이 바로 그런 흐름을 반영하고 있었다. 1947년 6월 2일 제주여중생 180명이 학교 당국에 고등과 설치를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런데 미CIC가 이 사건 배경에는 ‘공산주의 사상’이 깔려 있는 듯 하다는 정세분석을 상부에 보고하고 있다.

또 미CIC는 4·3의 발발을 앞둔 시점에서 제주사태가 날이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음을 예의 분석하고 있었다. 1947년 12월의 보고에는 “제주 CIC가 최근 한 정보원으로부터 들은 제주도 여론은 만일 제주도 경찰이 빠른 시일내에 정의를 회복하지 못할 경우 좌익의 모든 조직들이 제주감찰청을 공격하리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제주 방첩대가 최근 한 정보원으로부터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만일 빠른 시일 내에 경찰에 정의를 실현시키지 못한다면 모든 조직들이 제주감찰청을 공격할 것이라는 것이 제주도의 여론이다.’-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7년 12월 12일~1947년 12월 13일 (No. 708, 1947. 12. 13. 보고)

또 1948년 2월의 보고에는 “좌익계로부터 압수한 문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바에 따르면 ‘2월 중순과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에서 폭동 발발이 예상된다”는 기록도 있다.

‘제주도-공산주의자들은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키도록 명령하였다. 1월 22일 남로당 조천지부에서 열렸던 공산주의자들의 불법회의장을 급습한 경찰이 노획해서 번역한 문건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요구했다. 또한 “경찰 간부와 고위 공무원을 암살하고, 경찰 무기를 탈취하라”는 지침이 발표되었다. (미 CIC 정보요약, 2월 5일 노획문서 번역) 몇몇 남로당 간부들이 새벽 3시에 회의장을 급습한 경찰을 피해 달아난 것으로 여겨지지만, 모임에 참석했던 106명이 체포되었고, 같은 날 정오 이전에 63명이 추가로 검거되었다. 등사기와 다량의 서류가 압수되었다. (미 CIC 정보요약, 2월 5일, C-3)’-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2월 5일~1948년 2월 6일 (No. 752, 1948. 2. 6. 보고)

4·3이 발발하자 미군 정보요원들도 활발히 움직였다. 미 정보참모부는 미군정요원과 CIC요원, 그리고 경비대·경찰 및 서청·대청 등의 우익단체들로부터 정보를 입수,「G-2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군보고서는 그들의 국익과 부합되게 항상 ‘우익적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용어동원에서도 ‘빨치산’이나 ‘게릴라’란 가치중립적 표현보다는 ‘폭도들'(mob)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 미군이 피난민을 검색하고 있다.

임화는 미CIC의 간첩이었나

‘찬란한 새 시대의 향연(饗宴) 가운데서/ 우리는 향그런 방향(芳香) 우에/ 화염같이 붉은/한 잔 포도주를 요구한다// 새벽 공격의 긴 의논이 끝난 뒤 야영은/ 뼛속까지 취해야 하지 않느냐// 명령일하(命令一下)// 리란 싸움이 부르는 영원한 진리다/ 그러나 나는 또한 패배를 후회하지 않는다/ 승패란 자고로 싸움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피로하지 않는 것이다/ 적에 대한 미움을 늦추지 않는 것이다/ 멸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지혜 때문에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최후의 결별에 임하여 무엇 때문에/한 그릇 냉수로 흥분을 식힐 필요가 있느냐/ 벗들아! 결코 위로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서는 아니된다// 동백꽃은 희고 해당화는 붉고 애인은 그보다도 아름답고/ 우리는 고향의 단란과 고요한 안식을 얼마나 그리워하느냐/ 아 이러한 모든 속에서 떠나가는 슬픔을/ 나는 형언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 잔 냉수로 머리를 식힌 채/ 화려했던 희망과 꿈이 묻히는/ 무덤을 찾느니보단/ 아! 내일 아침 깨어지는 꿈을 위해설지라도/ 꽃과 애인과 승리와 패배와 원수까지를/ 한 정열로 찬미할 수 있는 우리 청춘을 위하여/ 벗들아! 축복의 붉은 술잔울 들자’-임화의 시 「한 잔 포도주를」

▲ 시인 임화.
임화(林和)의 시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의 나이 21세 때 가장 뛰어난 시군(詩群)에 속하는 < 우리 오빠와 화로>, < 네거리의 순이> 등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일제의 전시체제가 가동하자 < 황국위문작가단>과 < 조선문인보국회>에 이름을 올렸다. 해방 다음날인 8월16일 ‘조선문학건설본부’를 만드는가 하면, 8월18일에는 그 상부조직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조직하고, 12월3일에는 ‘조선문학가동맹’ 결성을 주도했다. 또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의 외곽세력으로 움직였다.

그러다 당 지도부가 대거 월북하자 그도 1947년 10월께 월북한다. 그는 6·25가 터지자 ‘조선문화총동맹’을 조직하고 부위원장을 역임한다. 그러나 휴전협정 사흘 뒤인 1953년 7월30일 그는 남로당 간부 11명과 함께 ‘미제간첩’으로 기소돼 8월6일 사형을 선고받은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임화가 북한의 주장처럼 정말 ‘미제간첩’이었을까?. 당시 북한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의 심문기록에 “1945년 10월 미CIC와 결탁해 간첩행위의 길에 들어섰다”고 답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좌익의 기대를 모았던 이강국과 나란히 미CIC의 앞잡이가 됐다는 것은 난센스다. 오히려 임화·이강국이 역으로 미군정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미CIC에 접근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런데 북한의 ‘판결문’에 보면 임화는 “1945년 12월부터 미군 정탐기관 또는 남조선 미군정청 공보처 여론국장이었던 공동피소자 설정식 등과 련계를 맺고 당 및 문화단체의 중요비밀을 제공하였다”고 하여 임화와 미CIC의 연결고리에 설정식(薛貞植)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설정식은 북한 ‘판결문’에는 “1946년 9월 공동피소자 림화의 보증으로 자기의 정체를 은폐하고 당에 잠입하였으나 1949년 12월 변절”했다고 되어 있다. 그는 원래 1945년 11월부터 여론국장으로 있다 1947년 1월부터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사무차관으로 근무했고, 북한이 변절했다고 기록한 1949년 12월에는 좌익 영자신문 < 서울타임스(Seoul times)>의 주필로 있었다.

임화가 미제간첩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의 행적을 살펴봐도 드러난다. 그가 월북 전부터 천재 작곡가 김순남과 콤비를 이루어 만든 < 해방의 노래> < 해방조선의 노래> 등 많은 노래 가운데는 < 인민항쟁가>가 있다. 임화가 작사하고 김순남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당시 북한에서 국가(國歌) 대용으로 불렸고, 남한에서도 널리 유행하여 남한 경찰관이 이 노래를 무심결에 흥얼대다 옷을 벗는 일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한다. 당대를 지배하던 유행도, 가치관도, 사상도, 그 무엇도…. 지금 임화의 시는 다시 살아나 대한민국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그래서 옛사람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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