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딸’을 아시는지?

아버지의 딸(father’s daughter)’을 아시는 지? ‘아버지의 딸’은 미국 심리학자 모린 머독(Maureen Murdock)의 ‘여성영웅의 탄생(The Heroine’s Journey)’에 등장하는 개념이다.

‘자신을 주로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아버지의 남성적 가치로부터 관심 받고 인정받기를 갈구해온 여자’가 바로 ‘아버지의 딸’이다. 아버지가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모습은 딸의 야망에 불을 지핀다.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의 행보에 말들이 많다. 그는 권위적 통치를 일삼던 ‘아버지 박정희’처럼 민주적 의식과 소통 능력이 부족해 보이고, ‘아버지 박정희’가 구사했던 뛰어난 용인술과 국정 장악력은 갖추지 못한 것처럼 느낀다는 평가도 있다.

그렇다면 제주도에 대한 ‘아버지와 딸’의 셈법은 어떨까? 제주4·3의 첫 진상 규명 운동은 1960년 4·19혁명에서 비롯됐다.

4·19혁명은 도민들에게도 희망으로 다가섰다. 거기에는 도민들이 움츠리고 입을 열지 못했던 ‘4·3문제 해결’이라는 과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 박정희’는 이를 용납할 리가 없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경, ‘아버지 박정희’가 중심이 된 쿠데타군은 제주4·3에도 재갈을 물리고 말았다. 이튿날 1961년 5월 17일, 4·3사건 진상 규명동지회 이문교, 박경구 회원이 검거되었다.

진상 규명을 요구했던 모슬포 유족들도 고초를 겪었다. 그해 6월 15일 경찰은 ‘백조일손위령비(百祖一孫慰靈碑)’를 부숴서 땅속에 파묻어버렸다. 경찰은 모슬포지서 급사에게 술을 먹인 후 해머를 주어 비석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백조(百祖), 132명의 유골은 ‘아버지 박정희’의 쿠데타로 흩어졌다.

‘아버지 박정희’의 군사 정권 하에서 4·3사건에 대한 논의는 불허되었다. 서슬 퍼런 반공법, 국가보안법과 연좌제 등의 구도 하에서 논의 자체가 힘들어졌다. 그렇지만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제주4·3에 대한 논의는 다시 불처럼 일어났다.

1992년 4월,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132구의 두개골이 수습되었고, 다시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를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백 분이지만 그 손자들은 다 한 손자였다.

그동안 제주4·3은 질곡의 역사와 아픔을 딛고 4·3특별법 제정을 시작으로 진상 조사 보고서 채택과 대통령의 공식 사과, 제주4·3평화공원 조성에 이르기까지 도민들의 아픔을 달래 왔다.

제주4·3에 대하여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도 ‘제주4·3희생자 국가추념일 지정’을 실천함으로써 제주도민과 유족들의 가슴속 깊은 아픔을 치유하려는 듯했다.

그렇지만 올해 제68주년 4·3희생자 추념식에도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4년째 아직까지 한 번도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 박정희’가 제주4·3에 대한 가해 행위로 인한 콤플렉스가 아니고 또 무엇일까?

‘아버지 박정희’ 곁에서 아버지가 규정한 기준이 사회적 기준임을 지켜보며 자란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처럼 살아온 것이 아닐까?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은 부득이하게 ‘아버지 박정희’가 향한 길을 따라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머린 머독은 “어떤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생각하고, 남성들과 경쟁하고, 남성들의 게임에서 남성을 이기는 방법을 배우는 것에 크나큰 자부심을 느낀다. 이런 여성들은 영웅적인 성취를 이룬다. 하지만 많은 여성이 결코 ‘충분하지’ 않을 거라는 느낌, 신경을 갉아 먹히는 듯한 괴로움을 느낀다. 그들은 남성들과 같아지고 싶어 점점 더 많은 일을 한다”고 말했다.

제발 ‘아버지의 딸’,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박정희’와 같아지려고도 말고, 더 많은 일을 하려고도 말았으면 한다.

이 글은 카테고리: 글 전체보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