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영면하소서

[제주일보] 어찌 그리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습니까? 어찌 그리 급하게 떠날 수 있습니까? 어찌 그리 할 일을 산처럼 쌓아두고 삶을 거둘 수 있습니까? 고향 제주를 그리 흠모하면서 어찌 고향산천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까? 재일 탐라연구회 김민주(金民柱) 선생님이 별세하였습니다. 향년 아흔 하나입니다.

선생님은 필자를 늘 격려해주었고, 늘 바른 역사로 인도했던 분입니다. 2006년 3월이라 기억됩니다. 탐라연구회가 발간하는 ‘濟州島’에 필자의 단편소설 ‘두 노인’이 일본어로 번역․소개되었습니다. 며칠 후, 일본에서 서신이 도착하였고 선생님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 자기의 삶과 빼닮았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후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선생님이 고향 제주를 찾았을 때 상면의 기쁨도 나누었습니다. 상면 장소는 4․3유족회 사무실이었습니다. 선생님이 필자를 만나러 사무실까지 먼 걸음을 한 것입니다. 어렵게 귀국하고 고향에서 찾아갈 곳도 많은데 필자와의 만남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1960년대 초 제주4·3연구의 ‘고전’ ‘濟州島人民들의 4·3武裝鬪爭史’를 김봉현(金奉鉉) 선생님과 공저(共著)한 분입니다. 물론 ‘鬪爭史’는 좌익적 시각에 편향돼 있지만 ‘팩트’만을 놓고 볼 때는 매우 사실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김봉현 선생님은 일본 관서대학과 명치대학에서 역사학과 지리학을 공부한 분입니다. 해방공간에서 오현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1960년에 제주도 개국설화부터 일제 말기까지를 꿰뚫는 ‘濟州島歷史誌’를 출판해 향토사 연구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988년은 4․3의 불씨를 당긴 기억해야 할 해입니다. 4․3사건 40주년을 맞은 그 해 4월 3일 여의도 여성백년회관에서는 제주사회문제협의회 주최로, 일본 도쿄YMCA에서는 탐라연구회 주최로 4․3세미나가 열렸습니다. 바로 4·3진상규명 논의의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탐라연구회는 1985년 1월 29일 도쿄에서 선생님을 중심으로 결성했습니다. 그 후 1991년 제주도문화상 지역사회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2004년 제주도연구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석한 선생님은 ‘북한과 제주4·3사건’을 주제로 강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조천중학원 학생으로 1948년 7월 입산, 1949년 4월 붙잡혀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한국전쟁 때 옥문이 열리자 일본으로 피신했습니다. 조천중학원은 1946년 3월 설립하여 200여 명이 재학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15세에서 20대 후반이며. 야간에는 초등학교 교사, 면사무소 직원들까지도 강의를 받았습니다. 교사들 대부분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교사와 학생들이 수시로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경찰의 감시도 심했습니다.

학생들 또한 교사들을 돕거나 직접 활동하여 항쟁 와중에 대부분 죽었습니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심부름을 시키면 중산간의 산길을 혼자 다니다가 잡혀서 고문당하고 고문 과정에서 죽기도 하였습니다. 모든 제반사항은 논의를 거친 후에 결정되었고 학생회장도 ‘자치위원장’으로 불렀습니다.

1948년 11월 4일 무장대가 습격하여 조천면사무소를 불태웠습니다. 조천중학원은 건물만 방화된 것이 아니라 학적부도 모두 불에 탔습니다. 5·10선거 후에는 교사와 학생들이 대부분 피신했으며 이후 ‘빨갱이 학교’라 하여 폐원 조치했습니다. 사실 1947년 3·1절 시위 및 3·10 총파업 이후 미군정과 서북청년회의 탄압을 받아 수업이 어려웠습니다.

선생님이 운명했다는 소식은 너무 큰 충격입니다. 책을 발간할 때 마다 뜨거운 격려를 주셨고, 그래서 필자는 용기를 내어 뚜벅뚜벅 여기까지 걸어왔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은 떠났지만 4․3을 바로 정립하겠는 의지에 따라 후배들이 나설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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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영면하소서에 1개의 응답

  1. 이종민 님의 말:

    발표하시는 새 글 들 받아 읽고 싶읍니다…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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