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상과 기념비

[제주일보] 흉상(胸像·bust)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상반신을 다룬 조상(彫像)이다. 조각으로는 고대 그리스도와 로마의 대리석 초상조각에서 많은 예를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이래 널리 행해져 왔으며, 현재는 점토로 제작한 후 청동으로 주조되는 경우가 많다.

1997년 7월 건국대통령이승만기념사업회는 국회개원 50주년을 맞이하여 국회의사당 입구에 제헌국회의장을 지낸 이승만(李承晩)의 흉상건립을 추진하다가 무산되었다. 그의 의회정치 행로가 반민족적이고 반의회적인 행태로 일관했으며, 친일세력과 손잡고 정권을 휘둘렀다는 역사학자들의 반발을 무마시킬 수 없었다.

2000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 있는 박정희(朴政熙) 흉상을 기습적으로 철거했다. 당시 그들은 준비해간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를 흉상에 씌우고 오랏줄을 흉상 목에 감아 끌어내렸다. 흉상이 떨어지면서 콧등이 뭉개졌다. 2016년 12월에도 흉상이 훼손되었다. 얼굴에는 빨간색 스프레이가 뿌려졌고, 군복 깃 소장 계급장 좌우 그리고 군복 중앙 부분이 빨간색으로 칠해졌다. 코는 망치로 맞은 듯 흠집이 나 있었다. 좌대엔 ‘철거하라’는 빨간 글씨가 적혔다.

최근 서울시 강북구가 조병옥(趙炳玉) 미중앙군정청 경무부장의 흉상 건립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는 성명을 내고 “강북구청은 4·3학살 책임자 조병옥 흉상 건립계획을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41년 8월 25일 임전대책협의회가 열린 부민관 강당. 죽음으로써 일본에 보답한다는 결의 아래 친일 거두들과 자리를 함께 한 조병옥. 자못 비장한 어조로 청중을 제압하였다. “조선민중은 아무 요구도 없이 무조건으로 협동하여 전승해서 동아공영권(東亞共榮圈) 건설에 매진함으로써 위정자에게 안심을 줄 것입니다… 조선민중으로 하여금 제국신민으로서 국책에 절대 협력할 것, 그리하여 위정자로 하여금 안심케 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국이 해방되자 조병옥은 미군정 수뇌들과 호흡이 맞고 반공정신이 강하여 경무부장에 취임했다.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린 관덕정 주변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군중들이 몰려오자 일제히 발포가 시작되었다.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3월 10일부터 민·관 총파업이 시작됐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제주도로 내려왔고, 3·1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하였다. 그의 안전대책이란 다른 지방의 응원경찰을 대거 투입하는 것이었다. 전남‧전북 경찰청에서 222명, 경기 경찰 99명이 파견되었다. 제주에 들어온 충남·북 경찰 100명을 합치면 응원경찰은 421명으로 불어났다.

특히 조병옥은 4·3이 발발하자 강경진압을 주장해 수많은 양민 학살을 야기한 책임자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온 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버려야 한다’는 발언을 해 공분을 사기도 했다. 도민 3만명의 희생을 낳은 4·3학살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 4·3의 책임이 있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부역자일 뿐이다.

기념비(記念碑·monument)는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우는 비석을 말한다. 제주시 충혼묘지 입구에는 9연대장 박진경(朴珍景) 추도비가 있다.

‘故陸軍大領密陽朴公珍景追悼碑’(고육군대령밀양박공진경추도비). 4․3당시 초강경 토벌을 통해 도민의 가슴에 상처를 남긴 일본군 출신. 4·3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김익렬(金益烈)을 밀어내고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며 딘(William F. Dean) 미군정장관의 명을 받아 강경 토벌작전을 감행한 장본인. 추도비 앞부분에 누군가 돌로 찍어 놓은 자국이 남아있다. 4·3가해자를 철거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지금처럼 보존하는 대신 구체적인 설명문을 세워 바르게 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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