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눈물’

[제주일보]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때/ 부두의 새악시 아롱져진 옷자락/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목포의 눈물’은 문일석(文一石) 작사, 손목인(孫牧人) 작곡, 이난영(李蘭影) 노래의 대중가요이다. 1935년 초 ‘조선일보’에서 향토노래 현상모집을 실시했고, 거기서 당선된 가사에 곡을 붙였다.
‘목포’하면 제주사람들은 ‘목포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목포는 제주4․3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1947년 3․1절 28주년 기념식 집회과정에서 벌어진 6명의 총격 사망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에 뒤이은 3․10 총파업에 가담한 자 가운데 주동자는 기소되어 처음으로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징역살이를 하였다.
어디 그 뿐인가? 1948년 무장대의 습격을 시작으로 제주4․3은 경찰과 무장대의 상호 무력 충돌로 격화되어 갔다. ‘군법회의 명령’에 나와 있는 1659명의 대상자들은 제주도에서 사살된 249명을 제외하고 각각 목포·마포·대구·인천·전주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1948~1949년도 목포교도소 출소좌익수명단’에는 제주 출신 군법회의 재판 관련 재소자가 다수 확인되었다. 목포형무소 집단탈옥사건은 1949년 9월 14일에 발생하여 일주일 뒤 진정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변혁세력들에 대한 무리한 탄압의 결과였다. 1949년 9월 14일 오후 5시 재소자 400여 명이 목포형무소 내 무기를 습격하고 탈옥하였다. 사고 당시 수용인원은 넘쳤으며, 그래서 탈옥 폭동에 참가한 죄수는 무기를 들었으며 그 후 군경 합동 공격으로 탈옥수는 즉시 진압되고 일부는 완전히 탈옥하기도 하였다.
당시 미국대사관이 본국 국무성에 보낸 자료에도 “대부분의 탈옥자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으로 복역 중에 있던 정치범들”이라고 하였다.
목포형무소에는 600명 가량의 제주 출신 재소자가 있었다. 사건 당일 출소한 제주 출신 재소자는 총 51명에 달한다는 기록도 있다. 왜 그들은 무기를 들고 탈옥해야만 했을까. 해방 직후 목포형무소의 수용인원은 300~400명 정도였는데, 탈옥사건이 날 당시에 1000여 명 이상이 수감되어 실질적으로 통제가 불가능하고 수용소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그곳에는 좌·우익의 갈등으로 여수순천사건이나 제주4․3항쟁 같은 사건으로 사상범으로 취급받은 사람들도 대거 수감되어 있었다. 수용인원이 정원보다 초과되어 공장 등을 감방으로 전용하였다. 악질 장기수용자를 원칙적으로 목포에는 수용 않기로 되어있는데 이들을 너무 많이 수용하였다. 군인으로서 당시 숙청을 당한 자들이 다수 수용되었다. 기동대원이 부족했다.
그 후 탈옥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목포경찰의 발표에 의하면 탈옥수 413명 중 체포 85명, 사살 298명, 자수자 10명, 미체포 23명, 총기 회수 10정이라는 사실이다.
체포되지 않은 사람도 20여 명이나 되었다. 목포형무소 집단탈옥사건은 우선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주4․3항쟁이나 여순사건의 경우처럼 광복 이후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사상적 갈등에서 민족적 비극이라 볼 수 있다.
‘목포의 눈물’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가/ 못 오는 임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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