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가 문제다

“4․3반란사건-오욕의 붉은 역사.” “5․18은 북한의 역사다.” “노회찬의 죽음은 인과응보고 자승자박.” “노회찬 사망 자살 아닌 정황 의심되는 13가지.” “가방모찌 하던 놈이 반란으로 대권 먹고.” “백성들 에이즈 걸려 죽어라고 동성애 지지해 주시고.”
내가 가끔 얼굴을 내미는 카카오톡의 가짜뉴스(Fake News)들이다. 지인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거기에서 빠져나오라는 충고다. 그렇지만 내 생각을 옹호하는 지지자들이 있으니 글쓰기를 계속할 요량(料量)이다.
가짜뉴스는 정치·경제적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언론보도의 형식을 하고 유포된 거짓 정보이다. 그것을 신뢰하기 시작하면 이에 대한 해결 방법이 없다. 특정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고, 정보 편향성으로 인해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만드는 특징을 지녔다.
왜 우리는 가짜뉴스에 더 끌릴까? 진실뉴스에는 없지만 가짜뉴스에는 있는 특성은 무엇일까? 바로 새로움과 놀라움이다. 새로움과 놀라움에서 행복을 느끼는 성향이다. 위험을 감수하거나 몰랐던 사태를 접하는 경험은 뇌에서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방출을 촉진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가짜뉴스가 어떻게 ‘국민의 적’이란 문구로 바뀌었는지 많은 대화를 했다”는 트윗을 날렸다. 설즈버거 NYT 발행인과의 만남 후였다. 설즈버거는 “가짜뉴스란 용어가 거짓이라고 지적했고, 대통령이 언론인을 ‘국민의 적’으로 낙인찍은 데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며 받아쳤다.
가짜뉴스는 독일 메르켈 총리를 테러리스트 옹호자로 둔갑시키고, 오바마를 국민의례를 금지한 친이슬람 또는 반기독교 인사로 낙인찍었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다’는 가짜뉴스가 미(美)대선 기간 중 페이스북에서 가장 많이 공유된 소식이다.
지난 대선 당시 제주에서도 시청, 주요 버스정류장 등에 문재인 후보를 비방하는 유인물을 붙이고 자신의 블로그에 같은 글을 올리는 등 허위사실을 공표한 사람을 긴급 체포했다. 그 사람은 법치자유애국당이라는 이름으로 ‘더불어민주당 종북 공산주의자 빨갱이 북한의 심부름꾼(스파이) 제주에 오시는 것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는 벽보를 붙이기도 했다.
인류의 역사는 곧 가짜뉴스에 대한 투쟁의 역사와 다름없다. 백제 무왕이 지은 ‘서동요(薯童謠)’는 선화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그가 거짓 정보를 노래로 만든 가짜뉴스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났을 때 일본 내무성이 조선인에 대해 악의적으로 허위 정보를 퍼뜨린 일은 가짜뉴스가 잔인한 학살로 이어진 사건이다.
21세기형 가짜뉴스의 특징은 그 논란의 중심에 글로벌 IT기업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디어 플랫폼에 ‘정식기사’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IT 기업들은 ‘디지털 뉴스 중개자’로 부상하는 동시에 가짜뉴스의 온상지가 됐다.
왜 가짜뉴스가 퍼지는 게 문제일까? 가짜뉴스가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당선이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불리한 가짜뉴스를 얼마나 잘 나르느냐로 결정되는 사회를 상상해보라.
이곳에서는 인류가 피를 흘리며 쟁취한 자유와 정의, 평등, 합리적 토론을 통한 의사 결정이라는 민주적 가치가 모래처럼 흩어진다.
시간은 한정돼 있고 뉴스는 범람한다. 이용자는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눈길을 끄는 뉴스가 곧 팔리는 뉴스가 된다. 기사는 현저성(顯著性)과 특이성(特異性)이 있어야 선택받을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여론을 심각하게 오염시킬 수 있는 가짜뉴스의 심각성을 이야기해야 한다.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우리가 언론에 대해 가져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진짜뉴스와 가짜뉴스를 가리는 것이 어려운 세상에서 현명한 미디어 수용자가 되는 방법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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