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제주문학

제1절 제주인과 일제강점기 문학

일제강점기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식민통치를 당한 35년간(1910∼1945)을 말한다. 한국민족은 그들의 식민지정책으로부터 자기민족을 보위하고 일제를 몰아내어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쟁취하려고 영웅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한국민족의 독립운동과 연합국의 승전으로 마침내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에서 쫓겨났다.
일제강점이 한국역사에 끼친 해독은 참으로 심대한 것이었다. 일본제국주의는 한말까지 꾸준히 전개되던 한국의 자주 근대화를 저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점기간 동안에 한국사회를 정체시키고 온갖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결국은 일제강점의 소산으로 남북 분단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민족이 타의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되어 고통을 받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강점으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여 민족과 민족문화를 보존, 발전시키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전신)가 조직되어 기관지 『한글』을 간행하고,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시작함과 함께 민족어와 한글을 발전시키려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문학부문에서도『創造』(1919)·『廢墟』(1920)·『白鳥』(1922)·『朝鮮文壇』(1924)·『朝鮮文藝』(1929)·『朝鮮詩壇』(1929)·『文藝公論』(1929)·『藝術運動』(1929) 등의 문학지가 창간되고, 한글로 된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창작되었다. 1920년대에는 프로문학도 형성되어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의 참상을 고발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제주문학은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활동들만이 포착된다. 작가들은 고향 의식과 관련되며, 때로는 당대의 현실을 비판한 경우도 있는데, 대체로 관념적 성향을 보여주었다. 제주문단이라면, 그것은 제주문인들의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가. 일제강점기 제주시단

한국시인이 쓴 시를 ‘한국시’라 하듯이, ‘濟州詩(제주시)’란 ‘제주시인’들에 의해 창작된 시라고 할 수 있다. 제주시인은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있거나. 제주에서 유소년 시절 이상을 제주에서 보내고 외지에 나아가 살고 있거나, 외지에서 태어났지만 제주에 정착해서 꾀 오랜 기일이 지나도록 살면서 활동하는 시인들을 말한다.
제주문단에 첫 씨앗을 뿌린 김문준(金文準) ․ 김명식(金明植) ․ 김지원(金志遠) 세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조천(朝天) 출신들이다.  1915년에 김문준(金文準)이 가사 형식으로 농민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農夫歌」가 제주인이 쓴 첫 번째 작품이다. 1920년대에는 김명식과 김지원)의 작품들이 주목된다.
김명식은 『東亞日報』 창간호에 발표한 봄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표현한 「새 봄」과 창간의 감격을 노래한 「비는 노래」를 발표했다. 1930년대에는 제주 해녀들의 애환을 다룬 「해녀의 노래」가 강관순(康寬順)에 의해 씌어졌고, 1940년대에는 김이옥(金二玉) 이 『흐르는 정서』라는 미간행 시집을 남겼다. 일본어로 씌어진 김이옥의 시는 당대 제주인들의 정서가 잘 반영되어 있다.

1. 김문준의 「농부가」

▲김문준

김문준(金文準, 1894년)∼1936)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호는 목우(木牛)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조천에서 태어났다. 1910년(융희 4) 3월 의신학교(義信學校) 보통과를 거쳐, 1912년 제주공립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1915년 3월 경기도 수원의 조선총독부농림학교(朝鮮總督府農林學校,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에 입사를 하였다. 졸업 동기생으로 백남운(白南雲)·이훈구(李勳求) 등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다. 같은 해 경기도 수원의 권업모범장에 취업하였다.
1915년에 『農林學校會』에 시「農夫歌(농부가)」를 발표한다. 개화가사의 형식을 띄는 「農夫歌」를 통해 저항ㆍ자주ㆍ개화의식을 강조하면서, 농부들의 생활을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살피고, 국가에서 농부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므로 2세기의 활동무대에 부각되는 농부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自然으로 터를 삼고 成實으로 武器삼아/ 本分盡守 는農夫 多情기 限量업고/ 駸駸日進 우리事業 東天朝日 氣勢로써/ 發達는 過渡時代 前途永遠 반갑도다/ 十代港口 五大鐵道 交通機關 發達니/ 十三道의 富源所産 輸出輸入 極便이라/ 이가온 힘을쓰 農夫心事 快시고/ 斯業發達 죠흔機會 千秋間에 처음일세// (後斂) 一年三百六十日에 날날마다 滋味집고/ 時刻마다 興趣만킨 農夫生活 뿐이로다/ 家給人足 國泰民安 農夫責任 아니런가/ 어화우리 農夫들아 日高三丈 둥둥 떴네// 守國에도 待濃夫요 富國에도 待濃夫며/ 여러 가지 工商業者 依賴農夫 泰山고/ 法治敎育 져事業과 學者藝者 져人物들/ 農夫信仰 神聖고 希望기 獨火로다/ 더군다나 東半島는 輸入輸出 通商에/ 農夫로써 對象삼고 農夫로써 主人삼네/ 그와흔 壯形勢 農夫福音 이 아닌가/ 二十世紀 活舞臺에 世界的의 農夫되셰(大正三年十一月二十日稿) -김문준의 시 「農夫歌」(1915년에 『農林學校會』).

그후 1918년 4월 제주도 정의공립보통학교(旌義公立普通學校)와 구좌중앙보통학교(舊左中央普通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구좌중앙보통학교에서 1925년 3월부터 1927년까지 교장을 지냈다. 일본의 심한 간섭으로 1927년 7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목격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한 그는 1927년 10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 오사카조선노동조합(大阪朝鮮勞動組合) 집행위원 및 동 노동조합의 북부지부 상임집행위원에 취임하였다. 이어 12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新幹會) 오사카지회를 창립하였다.
1928년 5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 1929년 4월 제주도 출신 송성철(宋性澈) 등이 제주출신 소년들을 규합하여 오사카조선소년연맹을 결성하게 하고, 가을에는 오사카시 히카시나리구(東成區)의 중소 고무공장에서 1,000여 명의 노동자를 끌어들여 오사카고무공조합을 결성했다. 1929년 12월 관서지방협의회(關西地方協議會) 집행위원장 등에 취임하여 일본에서 조선인 노동자의 권익향상에 힘썼다.
1930년 1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해소하고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약칭 全協)에 합류하는 데 반대하여 전협 산하의 한국인위원회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일본 선박업자들의 횡포에 맞서 ‘우리는 우리의 배로’라는 구호 아래 제주 출신들이 오사카와 제주를 왕래하기 위해 제주통항조합준비위원회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1930년 4월에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해 복목환(伏木丸)이 취항하였다.
1930년 4월 오사카노동조합 북부지부를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오사카화학노동조합에 통합하고 그해 5월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일본화학산업 노동조합 대판지부로 개칭한 후 책임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해 5월부터 8월까지 노동대중에게 혁명의식과 항일투쟁을 고무하는 내용의 「뉴스」및 격문을 비롯하여「第2無産者新聞」등을 제작 배포하여 사회주의 의식함양과 반제투쟁을 고무 격려하였다.
1930년 8월 오사카의 고무공장노동자 파업을 준비하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사카이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4월 12일 오사카공소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투옥 중에는 조몽구(趙夢九)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화학노조 오사카지부 책임자가 되어 투쟁을 계속하였다.
일제 경찰은 “1930년 8월 17일 오사카에서 천호모공장 쟁의 비밀지도부 회의 중 거괴(巨魁) 김문준(당시 일본화학산업노조 오사카지부 상임) 등 조선인 5명과 일본인 3명을 검거하였다.”고 밝힐 정도로 김문준을 높이 평가하였다.
출감 후인 1935년 6월 15일 오사카에서 한글신문이었던 『民衆時報(민중시보)』를 창간해 조선인들의 생존권 투쟁과 권익옹호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후 1936년 5월 25일 수감 생활 중 폐결핵이 악화되어 오사카 도네야마치료소에서 치료 중 숨을 거두었다.
일본의 패전 후 일제와 투쟁한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오사카성공원에 ‘현창대판사회운동지전사(顯彰大阪社會運動之戰士)’라는 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에 김문준·조몽구도 일본인과 함께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활동이 일본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제주시 조천읍 조천공동묘지에는 당시 일본에서 보내온 비석이 서 있다. 비문은 고순흠(高順欽, 1893~1977)이 썼으며, 김문준의 문하생이었던 김광추(金光秋)가 대표로 운구위원이 되어 유해를 옮겨 도민장(島民葬)을 거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으로 조천리민장으로 결정하고 안세훈(安世勳)․ 김유환․ 김시용 등이 당시 일본에 있던 고순흠과 연락을 취하면서 1937년 3월 25일에 조천공동묘지에 김문준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2000년 8월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김명식의 「비는 노래」와 「새 봄」

▲김명식

송산(松山) 김명식(金明植, 1891~1943)의 본관은 김해. 자는 경덕(景德), 호는 송산(松山) 또는 솔뫼. 아버지는 정의현감이었던 김문주(金汶株)이다.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고향 의흥학교(義興學校)에서 초등과정을 마쳤다. 1908년(순종 2) 한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를 거쳐, 1911년 4월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1910년 한성고등보통학교 졸업을 앞둬 겨울방학에 고향으로 내려와 연북정으로 찾아갔다. 어릴 때의 벗 홍두표(洪斗杓:1891~1977)와 고순흠(高順欽:1893~1977)을 불러냈다. 더구나 이 연북정은 김명식이나 홍두표, 고순흠 등이 배웠던 의흥학교의 옛 건물이 아닌가! 
세 동지는 자연 얘기의 화두가 ‘나라는 망했으니 우리들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말로 이어졌다. 먼저 태어난 순서로 산(山), 동산(園), 바위(巖) 등 그 크기 순서로 정하여 그 산이나 동산, 또 바위와 같이 변하지 말자고 다졌다. 이어 산이나 동산이나 바위의 틈에 끼어 자라나는 송매죽(松梅竹)과 같이 변절하지 않은 기개로 끝까지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워 국권을 회복하자고 맹세하였다. 
이러한 뜻에서 각자의 아호(雅號)는 김명식은 송산(松山), 홍두표는 매원(梅園), 고순흠은 죽암(竹巖)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다음 이를 지킬 징표(徵表)로 ‘천지위서(天地爲誓) 일월위증(日月爲證)'(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저 해와 달은 이를 증명할 것이다.)이란 여덟 글자를 혈서(血書)로 썼다. 이를 세한삼우(歲寒三友) 송매죽의 혈맹결의(血盟結義)라 한다. 이때의 김명식이나 홍두표는 22세요, 고순흠은 20세 되던 해의 일이다. 
그 후 제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 김명식은 와세다대학 재학 당시 신입생들에게 “고국을 떠나 적지 일본으로 들어왔으니 이제 실력을 쌓아 조국을 생각하는 인재가 되자”고 역설하였다. 유학생의 단결과 배일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신익희(申翼熙)·안재홍(安在鴻)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조선인유학생학우회 간사부장을 지냈다.
1916년 4월 15일에 조선인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한 대학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적국에서 배우려는 의미를 논함’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하였고, 이후 조선인유학생학우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14년 4월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였던 『學之光(학지광)』을 편집하였고, 1919년에는 2·8독립선언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시조 주몽(朱蒙) 연 땅에/ 천수제(天授帝·고려 태조 왕건)가 지은 이름/ 산고수려(山高水麗) 장할시구/ 단목(檀木·박달나무)에 움이 나고/ 근화(槿花·무궁화)가 새로 필 때/ 동아일보 탄강(誕降)하다/영락제(永樂帝·명나라 3대 왕)의 포부이며/ 을지공(乙支公)의 정신이며/ 원효(元曉)의 자비이며/ 왕인(王仁)의 문화이며/ 서희(徐熙)의 용맹이며/ 개소문(蓋蘇文)의 기개이며/ 신숭겸(申崇謙)의 혼백이며/ 성삼문(成三問)의 구설이라/ 소리소리 정의(正義)이며/ 말말이 인도(人道)로다/ 남해는 깊고 깊고/ 백두는 높고 높다/ 동반도(東半島)/ 만년지(萬年紙)에/ 한양 평원 벼루 삼고/ 한강은 연수(硯水·먹을 갈기 위해 벼루에 붓는 물) 삼고/ 남산은 먹을 삼고/ 송백엽(松柏葉·소나무와 잣나무 잎) 붓을 매고/ 단목(檀木) 같이 굳은 뼈와/ 근화(槿花) 같이 고운 고기/ 설총(薛聰)의 지은 말로/ 세종(世宗)의 만든 글로/ 김생(金生)의 체를 받아/ 무궁무진 써내어/ 남해같이 깊은 내용/ 백두같이 높이 들어/ 질풍악우(疾風惡雨) 겁내지 않고/ 여천동수(與天同壽) 하오리라’- 김명식의 시「비는 노래」(『東亞日報』창간호, 1920년 4월 1일).

‘대리(大理)가 동(動)하다/ 고료(孤廖·외로움)가 파하다/ 상설(霜雪)이 갔다/ 견빙(堅氷)이 풀렸다/ 막힌 샘이 흐르고/ 붉은 산이 푸르다/ 아! 봄이로구나/ 봄이 왔다 봄이 왔다/ 어디에 어디에/ 어둠의 근역(槿域)에/ 마귀도 가고 사탄도 가고/ 파리 떼도 가다/ 일기가 따습고/ 바람이 가볍다/ 새가 울고 꽃이 피고/ 나비가 난다/ 저 무궁화 고운 꽃에/ 나비가 앉는다/ 꽃송이 속에 입부리를/ 깊이깊이 찔렀다/ 두 날개를 너울너울/ 꽃 종자를 날린다/ 황금도 명예도/ 권력도 없다/ 저 꽃에 저 나비에/ 다만 뜨거운 사랑의 결정(結晶) 뿐이다/ 아 황금의 무용(無用) 권력의 패배/ 정(情)의 세계 사랑의 승리/ 아! 사랑 아! 사랑/ 새 봄의 새 사랑’-김명식의 시 「새 봄」(『東亞日報』창간호, 1920년 4월 1일).

1920년 4월 1일 『東亞日報』 창간에 참가하여「大勢와 改造」라는 장문의 논설까지 썼으며, 「니콜라이 레닌은 누구인가」를 연재해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주의 사상을 소개하였다.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1920년 4월 11일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적 노동단체였던 조선노동공제회에 제주출신 고순흠(高順欽)과 함께 평의원으로 참가하였으며, 박중화(朴重華) ·박이규(朴珥圭) 등과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를 조직하고, 간부로서 근로대중을 위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기관지 『共濟』를 발행하여 근로대중의 계몽을 꾀하기도 하였다.

▲김명식의 기고문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던 1920년 6월 28일 경향 각지에서 조직되고 있던 청년회의 연합통일체를 조직하기 위해, 장덕수(張德秀)·오상근(吳祥根)·장도빈(張道斌)·박일병(朴一秉)·안확(安廓) 등 50여 명과 함께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를 발족시켰다.
이어 그해 12월 서울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전국 각지의 116개 청년 단체의 대표자 124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고, 지방부 집행 위원에 선출되었다.
1921년 1월 장덕수·오상근 등과 함께 조선청년회연합회를 중앙에서 지도할 목적으로 서울청년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노동운동에도 참여하여, 1921년 3월 조선노동공제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 제2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2년 1월 박희도(朴熙道)에게 출판사를 설립할 것을 권유,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창립하게 하고, 사장 박희도, 전무이사 이병조(李秉祚)와 더불어 이사 겸 주필에 취임하여, 월간지 『新生活』을 발행하였다. 또한, 신일용(辛日鎔)·유진희(兪鎭熙) 등을 기자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김명식이 1921년 6월 3일부터 8월 31일까지 61회에 걸쳐 『東亞日報』에 쓴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는 조선에 공개적으로 소개된 최초의 볼라디미르 레닌(Lenin) 일대기였다.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해 있던 김명식은 레닌의 지원 자금이 국내로 들어와 1922년 3월 동아일보를 떠나 사회주의사상의 전파와 운동의 길로 나선다.
1922년 11월 ‘러시아혁명 5주년 기념호’로 발행된 『新生活』 11호에 게재된 김명식의 ‘러서아혁명 5주년기념’, 신일용의 ‘5년 전의 금일을 회고’ 등의 글이 ‘적화사상’을 선전했다고 해 재판에 회부되었다.
공판에서는 단연 방청객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이가 있었다. ‘공산주의에 찬성하는가?’라는 재판장의 질문에 ‘마르크스의 사상에 공명하며 연구하고 찬성하오’라고 당당히 답하며, 공판을 사회주의사상의 선전장으로 활용한 신생활사의 주필 송산 김명식이 바로 그였다.
  1923년 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김명식은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시달리다 이후 제주도에 내려왔다가 1927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협동전선체였던 신간회 제주지부가 결성되자 지회장을 맡았다. 이때 송종현(宋鍾炫)은 간사였고, 강창보(姜昌輔)와 김택수(金澤銖)는 회원이었다.
 
“합병 이후 근대적 의미와 색채를 가진 필화와 논전은 동아일보가 선진(先進)일 듯하다. 그리고 동아일보 창간시대의 조선 청년은 사상적 기근이 극도에 달하였었다. 재래사상으로부터는 이탈하였지만 그 빈자리에 채울 만한 신사상은 얻지 못하였다. 무슨 자유니 무슨 자결이니 하는 의미를 아는 자 적었고 또 알려주는 자 없었다. 일찍 문예부흥이니 종교혁명이니 하는 말과 미국에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이 있었고 불국(佛國)에 대혁명이 있었고 영국에 산업혁명이 있었단 말은 들었지마는 그들이 모두 무슨 사상과 주의의 실현인지 아는 자 적었고 또 알려주는 자 없었다. 더구나 로서아의 신(新)사실은 물을 곳이 없었다. 이러한 시대에 동아일보는 나왔다. 그리하여 국제연맹과 윌슨의 평화원칙을 알려 주었다. 또 루소와 몬테스큐를 전하고 아담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을 전하고 또 루터와 칼빈을 전하였다. 그럼으로 사상에 주리든 청년들의 동아일보로 향함은 분천(奔川·흐르는 물)을 급히 따라가는 갈마(渴馬·목마른 말)와 흡사하였고, 동아일보에는 청년 사상의 원천인 관(觀)이 있었다.”- 김명식의 「필화(筆禍)와 논전(論戰)」(『三千里』, 1934년 11월호).
1930년 오사카에서 조선인 노동운동을 지도하다가 검거돼 일본의 오사카형무소에 재수감된 뒤 『新生活』 필화 사건의 남은 형기 동안 복역하였다. 1938년쯤에 고향에 돌아왔고 일제의 고문으로 건강을 크게 해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국제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1940년 4월 1일부터 10일까지 7차례에 걸쳐 신문 기고로는 마지막으로 보이는 「제1차 대전 후의 세계사」를 『東亞日報』에 연재하였다.
이 연재물에서 “역사관의 허무사항은 금물이며, 인류문화는 쉬지 않고 향상한다. 어떤 시기에 어느 문명이 파멸되어도 다른 문명이 생겨 그를 대신한다.”며 인류문화의 연속성을 역설하였다.
창씨개명을 완강히 거부하는 한편, “사망신고는 조국광복과 민족해방이 되거든 하라, 내 눈 부릅떠 일본이 멸망하는 꼴을 똑똑히 보고 나서 눈감겠노라”는 유언을 남기며 세화리에 있는 차녀 김순실의 집에서 해방을 2년 앞둔 1943년 4월 11일 눈을 감았다.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명식이 쓴「로서아의 산 文學」(『新生活』1922.4) ․「戰爭과 文學」(『三千里文學』1938.4)은 대표적인 문학평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형 김형식(金瀅植)도 일찍이 『朝鮮文藝』(1917~1918)에 한시 2백여 편과 한문 30여 편을 발표한 바 있어, 이를 2004년 북제주문화원에서 『革菴散稿』번역본으로 출판하여 관심을 끈 바 있다.

3. 김지원의 「울안의 盟誓」
“날즘생도 제깃을 차자드는데/ 굼벵이도 제궁에 숨어 자는데/ 눈보라 휩뿌리는 이깁흔 겨울밤/ 내터를 등지고 어데로 가는고/ 흰옷입은 파리한 얼골들이여/(……….)/남전북답 집안세간 황소뺏긴 선물이니// 악착한 괴물에 피를빨리고/ 영폭한 아귀에 고기를 뜻겨/ 뼈만남은 앙상한꼴 내쫏기는 무리여(………….)-淸津驛에서(1926.12.10)” – 김지원의 시「내쫏기는 무리
들」 부분.

‘날짐승도 제 말을 쓰거든/ 들짐승도 제 말을 쓰거든/ 하물며 사람에게 제 말이 없을까 보냐// 집은 없어지고 세간을 잃었다 헤도/ 혀는 뽑히고 두 손은 묶였다 해도/ 차라리 칼을 물고 없어질망정/ 어찌 내 마음 내 말이야 뺏길까 보냐// 오로지 사람된 이여/ 내 마음을 한쪽 가진 신이여/ 제 마음 나타내는 제 말을’(1927.1.5)-김지원의 시 「제 말 제 마음」전문.

“참사랑 죽이면 죄인이 된다/ 세상도 참부숴 죄인이 된다/ 탈박쓴 인생은 죽여야겟다/ 거짓된 세상은 불살을진뎌/ 필연의 불법은 이러케 당했다// 거짓을 얼사안고 곤두박질을 친다/ 사람은 사람을 싸먹고 배를브린다/ 종족은 종족을 깨물고 버터져간다/ 이놈의 세상은 이러케 싸노앗다(1927.4.2)” -김지원의 시「必然의 律法」.

김지원(金志遠, 1903~1927)은 조천 출신으로 12세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갔고, 서울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1924년부터 1927년 사이에 일본 도쿄와 서울을 왕래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조선문단

『朝鮮文壇』과『朝鮮日報』 등을 통해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27년에 행방불명되었다. 『朝鮮文壇』은 1924년 10월 1일자로 창간된 문예잡지이다. 이광수(李光洙)가 주재(主宰)하고, 방인근(方仁根)이 자금을 전담, 편집 겸 발행인이 되어 조선문단사를 차려 발행했다.
김지원은 양주동(梁柱東)·이태준(李泰俊)·나도향(羅稻香) 등과 교류하였으며 시 25편과 산문 2편을 남겼다. 초기에는 퇴폐적이고 허무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는 작품을 쓰다가 점차 시대적인 문제를 포착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1920년대 지식인들의 내면세계를 정밀하게 드러내고 시대적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작품을 썼다는 점에서 근대 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차지한다.
김지원은 1924년 『朝鮮日報』에 시 「깨어진 칠보탑」과 『金星』에 「나의 기원」을 발표했으며, 1925년 『朝鮮文壇』에「哀願」과 「거지 할미」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다. 또 이듬해「에도(江戶)의 풍경」(『朝鮮日報』) ․「유곽」(금성) ․ 「마즈막 올리는 祈禱」(조선문단) ․「火山의 노래」(『朝鮮文壇』) ․ 「NHIL」(『朝鮮文壇』) ․ 「허무의 왕국」(『朝鮮文壇』) 등 여러 편, 1927년 「울안의 盟誓」(『東亞日報』) 등 여러 편, 1928년 「새해맞이」(『朝鮮日報』)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의 작품은 시대상황과 당시의 심경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어떤 작품에서는 사회와 문명 비평적 시각도 매우 번득인다. 초기에 허무적인 작품을 발표했지만, 후기에는 사회적 자아에 눈을 떠 민족의 현실을 노래하였다. 그의 호적에는 “단기 4260(1927)년 5월 1일 오후 2시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2,152번지에서 사망, 동거자 金錫推 단기 4294(1961)년 8월 28일 신고”라고 되어 있다.

“내 밤반〔夜半〕에 일어나 울안을 한 바퀴 돈다/ 별빗이 아롱진 고요한 밤의 꿈조차 조는듯한데/ 내홀노일어나 울안을 한바퀴돌다/ (……….)/ 내 밤반에 거듭일어나 무덤가 髑體를 어루만즈다/ 검푸른 불빗이 감박이는 무덤가 구진비 나리는데/ 내홀노 엄니를 떨며 무덤가 촉루를 어르만즈다/ (…………)/ 내빔빈에 세 번째 일어나 하날을 대처나를갈다/ 圓光이무르녹는 놉다란하날 北斗조차 나려다보는데/ 내홀노일어나 주먹을쥐고 하날을 대처 나를갈다/ 촉누가 거의된 이꼴일망정 그래도/ 숨결은 불타올으니 文明의 利器는 못가젓을망정/ 독기와 화살은 새로윗노니/ 나를갈며 나를갈며/ 내원수를처/ 거짓을 깨치노라/-1927 仲秋 마지막선언에서(1927.11.24 동아)-김지원의 시「울안의 盟誓」.

4. 강관순의 「해녀의 노래」

“우리는 가엾은 제주도의 해녀들/ 불쌍한 살림살이 세상도 안다/ 추운 날 무더운 날 비거 오는 날에도/ 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어린 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 종일 헤엄치나 번 것은 기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이른 봄 고향 산천 부모형제 이별하고/ 온 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어/ 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각처 조선․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가간 설치해 놓고/ 우리의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가엾은 우리해녀 어데로 갈까”-강관순의 시「해녀의 노래」전문.

강관순(康寬順 : 1909~1942)은 사회주의운동가로 1932년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저항하기 위해 일어난 제주도해녀투쟁(일명 ‘세화리 해녀항쟁’)을 주도하였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옥중에서 작사하여 항일운동가로 널리 불리던 「海女의 노래」가 전해진다.
필명(筆名)은 강철(康哲). 본관은 곡산(谷山), 강대길(康大吉)의 차남으로 구좌읍 연평리 929번지에서 태어났다. 우도(牛島)의 영명의숙(永明義塾)을 마치고 1926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 모교 영명의숙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계몽극을 만들어 공연도 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문맹 퇴치 운동도 하여 부녀자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제주청년동맹에서 활동하였던 청년들은 1930년 이후 새로운 형태의 비밀 조직에 나섰다. 이 시기 가장 주목되는 비밀 조직은 1930년 3월 구좌면 일대에서 결정된 혁우동맹(革友同盟)이었다. 혁우동맹은 제4차 공산당에 가입하였던 신재홍이 주도하였다.
신재홍(申才弘:우도)은 1930년 구좌면 세화리 문도배(文道培:세화)의 집에서 오문규(吳文奎:하도)․ 강관순․ 김성오(金聲五:우도)․ 김순종․ 김시곤(金時坤:세화)․ 부대현 등을 규합하여 혁우동맹을 조직하였고, 조직은 사회주의 이념 하에 민족 해방을 목표로 내걸었던 비밀 결사였다.
 강관순은 1931년 6월 상순 자택에서 신재홍의 권유로 제주도 야체이카 결사의 당외(黨外) 기관원으로 가입, 또 동지 김성오와 함께 우도의 고자화(高子華) 집에서 고봉준(高奉俊), 고원한(高元瀚)과 회합하여 ‘적(赤)’이라고 칭하는 당외 기관을 만들어 강관순은 연락부원, 김성오는 청년부원, 고원한은 여성부원, 고자화는 농민부원이 되어 적(赤)을 순차적으로 좌경화․ 급진화하는 방향으로 전환을 도모하였다.
  1932년 1월부터 해녀항일운동이 일어나면서 비사(秘社)의 내용의 탄로되어 일경에 체포되었다. 당시 김성오(金聲五)․ 강관순(康寬順) ․신재홍(申才弘)․ 우봉준(禹奉俊)․ 이두삼(李斗三)․ 고자화(高子華)․ 정찬식(鄭贊植)․ 공덕봉(孔德奉)․ 고기창(高基昌)․ 강희준(姜熙俊)․ 양봉윤(梁奉潤)․ 윤대홍(尹大弘)․ 고한조(高漢祚) 등 13명이 검속되고 그는 1933년 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자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강관순은 옥중에서 「海女의 노래」 4절을 지었는데 마침 동지 오문규를 면회 왔던 오문규의 부인 홍무향이 이 노래의 가사를 몰래 건네받아 청년 운동가에 전해진 것을 당시 「도쿄(東京) 행진곡」의 곡조에 부쳐 부른 것이다.
이 노래는 전도에 파급되고 출가 해녀에 의해 한반도 및 일본중국까지 전파되어 당시 제주의 노래로 불리어졌다. 형기를 마쳐 출옥하자 동지 김성오와 함께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원산(元山)으로 건너가 항해사 을종(乙種) 시험을 치러 합격, 김성오는 승선의 길을 택했으나 그는 옥고로 말미암아 몸이 허약하여 주저앉았다.
 1942년 봄 함북 청진(淸津)에서, 고문과 옥고에 시달린 결과로 폐병으로 병사, 부인 김유생(金有生)이 만삭의 몸으로 남편의 시신을 고향으로 반장(返葬)하였다. 부인은 이후 유복녀와 함께 우도에서 정열(貞烈)을 지키며 살았는데 그 미모를 탐내어 젊은이들이 늘 괴롭히자, 하루는 동네 향회에 나가 내 X은 내 서방 강관순이 죽으면서 같은 날, 같은 시에 같이 죽어버렸으니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외쳤다. 이에 우도 사람들은 참으로 강관순의 아내다운 모습이라고 칭찬하였다.
1996년 여름 우도의 선착장에 그의 「海女의 노래」 비(碑)를 세웠다. 또 해녀 항일 운동의 진원지 세화에도 「노래비」가 세워졌다.

5. 김이옥의 「슬픈 해녀여」

“해녀야/ 깨어 있느냐// 春三月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바다에/ 비바리 裸身을 내던져// 영차 영차 가는 곳은 어드메냐// 바다 속/ 전복 소라의 나라에/ 주인이사 기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검은 몸뚱이의 풍만함이 애처롭구나”-김이옥의 시 「海女 1」.

김이옥(金二玉, 1918~1945)은 제주시 이도동 출신으로 소년 시절부터 주로 일본에 살면서 고장노동을 했다. 광복 직전 화재가 발생하여 책과 원고들이 소실되었다. 김이옥은 ‘김영(金影)’․ ‘황야경작(荒野耕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1944년 귀향하여 일본어로 쓴 47편의 시를 적은 육필시집을 최길두(崔吉斗)에게 맡겨두었다.
최길두는 해방후 창간한 동인지『新生』에 보관하고 있던 육필시집을 『흐르는 情緖』라는 미간행 시집으로 소개하고, 일부 작품을 번역하여 실었다.
『新生』에는 “삼십을 종막으로 불행히도 요절해 버린” 그에 대한 시평과 추도의 글도 실려 있다. 김영(金影)의 시 「破船」은 김이옥의 작품이다.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의 ‘탐라문화총서(13) 『濟州文學(1915~1945)』(1995)’에 김이옥의 작품 중 「이여도」, 「해녀(海女)·1」,「해녀(海女)·2」,「슬픈 해녀여」,「나의 노스탈쟈여」,「먼 타향에서」,「방고애부(訪故哀賦)」, 「옛성에 과거를 묻지 말아라」, 「나는 시인(詩人)」,「사랑스런 나의 집」 등 37편의 번역시가 일본어 원문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조급히 흐르는 물살에 바위를 두드리면/ 어두운 램프에 떠올라 보인다/ 검은 안색에/ 눈시울 적시고 있는 슬픈 해녀여/ 생명 짧은 처녀이기에/ 멋부리는 심정에서 사온 치마를/ 벽에 그을린 채 바다에서 지새노라면/ 나오누나 가느다라이 휘파람 한숨”-김이옥의 시「슬픈 해녀여」.

6. 최길두의 「無題 5-監獄」

“내 故鄕은/ 섬의 나라라/ 파-란 물결 춤을 춰 좋아라// 情든 땅/ 꿈의 나라라/ 하-얀 燈臺 깜박여서 좋아라// 밤이면, 離別의 뱃고동에/ 섬 색시에 젖는 옷고름// 떠나는 눈물 수건에 그 안타까움/ 어찌 안 좋아// 오/ 내 고향/ 동백꽃 피는 나의 고향/ 상처도 가지가지매/ 어쩌라고 안 그려요 글쎄/ 내 故鄕은/ 섬의 나라라/ 물새들 날아 좋아라/ 情든 땅/ 꿈의 나라라/ 人魚떼 울어 좋아라// 날이 새면-갯변가에/ 靑春의 피리 불던/ 사랑의/ 曲調曲調에/ 그 옛이라 안 좋은가.// 아하/ 내 故鄕/ 구름 피는 나의 故鄕/ 옛 자취도/ 갖이, 갖이매/ 어쩌라고 안 그러 글쎄”-최길두 시 「故鄕의 노래」(1938) .

“水精보다도 맑은 純潔의 젖줄/ 사탄 뒤끓으는 地獄으로 하여금/ 人間像의 不幸한 사랑의 나그내.// 가시밭길 흙탕길 죽음길 걸었나니/ 그 이름도 아름다운/ 人類의 십자가여”-「十字架」(1939).

최길두(崔吉斗, 1917~2003)는 제주시에서 태어나 시·소설·시나리오·무용가극 등을 두루 써 온 작가로 활동하다 2002년 85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제주공립보통학교와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 구례군농회기수(農會技手)와 제주도농회기수를 지냈다.
그는 1937년 「絶望」을 비롯하여 「鄕土의 꿈이」·「無心」·「懷鄕」·「懺悔」 등을 1938년에 「思想)」·「故鄕의 노래」·「暮景)」등을, 1939년에 「平生」· 哀戀」·「四行詩」 등을 내놓고 있다. 1944년 11월 일본에 거주하던 시인 김이옥(金二玉)이 고향을 방문하였을 때, 그의 시 47편을 옮겨 적어 유실을 막기도 하였다.

“-너는/ 妖邪스런 魔女에 사랑받는 慘酷의 獸柵/ -醜惡을 좋아하는 구대기의 凱歌/ -冷血動物의 個性있는 世界/ -人爲的인 地獄을 자랑하는 文明의 허울 좋은 鐵面皮의 化粧師/ -世紀의 冒險的인 자랑/ -無錢家의 住家/ 故鄕 잃은 猛虎떼의 우리./ 그리고 無慙한 屠殺場// 오 너희들의 反省없는/ 人面獸心의 얼굴이여/ 또 만나리라/ 나의 巨强한 思想의 鐵馬는// 너희들의 腐敗한/ 鄕愁가 그립단다/ (제주도 淸津事件에서 獨房)”-최길두의 시 「無題 5-監獄」(1943).

대동아전쟁으로 어용(御用)은 가중되고, 젊은 학도들은 징병이란 이름으로 끌려갔다. 전쟁의 암운은 거칠기만 하였고, 전방은 농무(濃霧)로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콩나물이 시루 속에서 자라듯이 제주도에서 항일청년들의 모임인 비밀독서회가 결성이 되고, 바로 그 중심에 최길두가 있었다.
40년대 초부터 뜻있는 지식인청년들이 비밀독서회를 조직, 일어로 번역된 세계사상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조선이 나아갈 길에 대해 토론했다. 최길두는 회장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비밀독서회는 일주일에 두 번 모였다.
최길두의 집과 광인청년으로 통하는 이상희(李相熙)의 집이었다. 이상희는 머리는 깎지 않고 고슴도치 모양이며, 신발은 짚신에다 너덜한 한복차림이었다. 일경의 눈을 피해 광인으로 분장하고 징용을 피하였다. 이상희는 한국전쟁 당시 바다로 끌려가 아깝게도 운명하였다.
비밀독서회는 처음 7명이 결속된 모임이었다. 최길두를 비롯, 이상희․ 김운제(金雲濟)· 김귀석(金貴錫)· 정기준 ․조수인․ 윤한구(尹漢九)등. 한 달에 한 번은 산천단에서 회합을 열었다. 니이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도취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전황(戰況)은 어떤가? 정말 조선민족이 독립될 수 있을까? 피 끓는 청년으로써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그들의 공통된 과제가 되었다. 당시 일본군대본영(大本營)은 그들의 허위선전을 통하여, 그들의 패배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황군(皇軍)의 대승리를 조선민중에게 선전하고 있었다.
이들 독서회원들은 조선민족의 독립을 갈구하며 이를 위한 국제성세의 상황인식을 위해 비밀리에 단파수신라디오를 구해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李承晩)의 「2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했다.
독서회의 멤버가운데 김운제와 김귀석은 일경(日警)의 감시가 심해지자 모의소령(謀議蘇領)이 가까운 청진으로 가서 불라디보스토크로의 탈출을 시도하다가 함경북도 변경마을에서 일본군국경수비대에 체포된다. 당시 청진일보와 경기일보는「不逆朝鮮人一抹打盡」이라는 기사로 자세하게 보도한다. 이것이 바로 청진단파사건(淸津短波事件)이다.
두 사람은 12월 추운 겨울 청진감옥에 수감이 되었다. 모진 고문이 이어지고 이들은 제주도 친구들을 불기 시작했다. 청진경찰서 특별수사반은 급기야 명단을 가지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가장 주목했던 것은 누구의 지도와 사상적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가 바로 최길두였다.
최길두는 형사대의 습격을 받고 수감되었다. 최길두가 징용을 피하고자 제주보통공립학교 위촉강사로 몸담고 있을 때였다. 청진단파사건은 태풍이었다. 감방은 초만원이었다. 1945년 1월 3일 관련자 12명이 검거된다. 최길두를 비롯 이상희 고영수(高榮洙)․ 김용수(金瑢洙)․ 윤한구(尹漢求)․ 오기윤(吳基允)․고창위(高昌位)․ 추성환 ․이기형․ 이호택 ․고영일․ 박창재(朴昌宰) 등이다.
최길두는 사상범으로 취조가 시작되었다. “너는 조선문학을 한다면서…..” “너의 지도를 톡톡히 받았어!” “너의 사상적 지도와 존경하는 선배라 그랬어!” “소련으로 넘어가려는 계획과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등의 끔직한 취조였다. 물론 고문도 이어졌다.
감방의 하늘은 절망의 하늘이며, 얼굴을 비춰줄 별 하나가 없었다. 목이 타도 목을 추겨줄 물 한 방울이 없었다. 주위는 철책이며 감시하는 호랑이나 사자뿐이다.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가족들이다. 형사는 한쪽에 두 주전자를 들고 와서 책상 위로 두면서 “어서 먹어라”고 윽박질렀다. 감방의 식사는 콩을 넣은 꽁보리밥이며, 찬은 해초에 소금을 뿌린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문학! 그래도 사상? 떠벌이지 마! 졸장부 사나이…….” 최길두는 결국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연행된 윤한구는 청진감옥에서 옥사했으며, 김귀석은 행방은 아직까지 알 바가 없다.
최길두는 「故苑」이란 제목의 시에서 “불러 부질없는 무궁(無窮)의 국토(國土)는/ 悍惡한 倭族人의 鐵槍에 못박혀/ 어두움의 獄處로 못박혀 맡아/ 반만년(半萬年)의 겁이 깃들은 故苑은/ 그 따사로운 모습이 서노니!”라고 그 아픔을 노래했다. 「故苑」은 사적 123호인 창경궁(昌慶宮)을 의미한다. 민족을 사랑하고 항일정신에 눈을 뜬 시인의 독서와 시작업은 오직 민족해방을 염원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나. 일제강점기 제주소설

‘한국작가’가 쓴 소설을 ‘한국소설’이라 하듯이, ‘제주소설’이란 ‘제주작가’들에 의해 창작된 소설이다. 제주인들에 의해 현대소설이 발표된 것은 194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시형(李蓍珩)의 「이여도(イヨ島)」(1944)·「신임교사(新任敎師)」(1945), 이영복(李永福)의 「밭당님(畑堂任)」(1942), 오본독언(吳本篤彦)의 「귀착지(歸着地)」(1941)·「양지바른 집(日向の家)」·「한춘(寒春)」·「긍지(矜持)」(1943)·「기반(羈絆)」(1943)·「휴월(虧月)」(1944)·「애(崖)」(1944)·「바다 멀리(冲遠く)」(1944)·「해녀(海女)」(1944)·「맥적(麥笛)」(1944)·「쌍엽(雙葉)」(1944)·「금선(琴線)」(1945) 등이 발표되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일본어로 된 것들이다. 친일적인 요소가 나타나는 작품들도 있지만, 일제 말기 제주도의 상황과 제주 사람들의 의식·정서를 보여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1. 이시형의 「이여島」

이시형(李蓍珩, 1921~1950)은 애월보통학교를 졸업, 일본의 아이치현[愛知懸]에 있는 서미잠사학교(西尾蠶絲學校)를 거쳐 경성사범학교 강습과와 혜화전문학교 흥아과(興亞科)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전라남도 곡성의 삼기공립보통학교, 전라남도 함평의 함평공립소학교, 함경북도 경성공립농업학교, 제주공립농업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4년 ‘궁원삼치(宮原三治)’라는 이름으로 『國民文學』 8월호에 「이여島」가, 1945년 『國民文學』 2월호에 「新任敎師」가 추천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이여島」는 제주읍을 주요 배경으로 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의 갈등을 그려낸 작품으로, 교사 체험이 반영된 작품으로 보인다.
광복 후 제주농업중학교 교사로 재임하였다. 1947년에 3·1절 기념 시위 사건이 발발하자 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활동하면서 투쟁 방침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한국전쟁 때 예비 검속되어 수장(水葬)된 것으로 알려졌다.

2. 이영복의 「畑堂任」

이영복(李永福, 1921~2004)는 )은 애월읍 금성리에서 출생했다. 옛이름은 이영구(李永九). 아버지가 상해임시정부 독립기금 지원 혐의로 연루되어 그 여파로 보통학교밖에 수학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숭실중학교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해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1937년 평양으로 건너가 서점점원을 하며 문학 서적을 접하게 된다. 1938년 아버지에 의해 강제 귀향하여 한글잡지 『아이생활』․ 『농민생활』 지국을 운영했다.
1940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京都〕외국어전문학교 산하의 제1외국어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년 3개월 만에 중퇴하고 노동자가 되었으며, 주로 일본 문인들과 교류하며 문학 활동을 하였다.
일본청년문학자협회 회원이 되면서 『靑年作家』 1942년 7월호에 모리야마 이페이[森山一兵]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어 소설 「畑堂任(밭당님)」을 발표하였다. 「畑堂任」의 배경은 한경면 고산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성격이 괴팍한 한 노파의 삶을 그린 것이다. 학업중단협회 가입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다가 1943년 8월 오사카에서 체포되어 강제 귀국당하였다. ‘李永九’란 이름을 ‘李永福’으로 개명한 것은 4․3사건 당시 무장대 지도자 이덕구(李德九)와 비숫한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친척이 아니냐고 추궁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46년 『新生』에는 李永九란 이름으로 단편소설 「夜路」, 시 「追憶」, ‘YKR(Young-ku, Lee)’라는 이름으로 시 「悔淚」우울을 발표했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濟州民報』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제주4·3 후에 문학 활동을 중단하였다. 제주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작품을 썼으며, 제주 방언을 소설에 처음으로 구사한 소설가였다.

3. 오본독언의 「歸着地」

오본독언(吳本篤彦, 1921~?)은 창씨개명이며 본명은 미상이다. 제주시 이도동 소재 제주 삼성혈 부근에서 태어나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일제강점기 말기에 적잖은 소설을 일본어로 썼다. 1941년 소설 「歸着地」가 친일단체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익찬(文化翼贊) 현상 소설에 입선하였다. 『國民文學』 1943년 9월호에 「矜持」와 1943년 11월호에 「羈絆」이 추천되어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矜持」」는 1930년대 중반의 제주읍의 면모를 잘 드러낸 작품으로서 당시 제주인들의 의식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모두 일본어로 쓰여졌고 친일적인 성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歸着地」(1941)·「日向の家)」·「寒春」·「矜持」(1943)·「羈絆」(1943)·「虧月」(1944)·「崖」(1944)·「冲遠く」(1944)·「海女」(1944)·「麥笛」(1944)·「雙葉」(1944)·「琴線」(194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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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혁암 김형식의『革菴散稿(혁암산고)』

혁암(革菴) 김형식(金瀅植, 1886~1929)은 농은(農隱) 김문주(金汶株)의 차남으로 농은의 4남인 송산(松山) 김명식(金明植)과 형제지간으로 1914년 12월부터 2년여를 조천면장으로 재임했으며 당대 시문(詩文)에서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아우 金在植 ․金明植과 조카 金址煥․ 金甲煥, 모두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김형식은 일제강점기 직접 항일운동을 펼치지는 않았지만, 3․1운동 이후 호를 피애(避避礙)에서 혁암(革菴)으로 바꾸고, 민족의식을 드러낸 많은 시문을 남겼다.
『革菴散稿』는 김형식의 한시·한문을 번역한 책이다. 일제시대 시문(詩文)의 대가인 최영년(崔永年)이 1917년 4월부터 1918년 10월까지 발행했던 국․한문 혼용잡지인 『朝鮮文藝』에 실렸던 선생의 시문 230여 편(한시 200여 편, 한문 30여 편)이 포함되어 있다.

‘三百年前有此樓(삼백년전유차루) 삼백 년전 지어진 이 망루/ 依然古蹟至今留(의연고적지금류) 의연히 지금까지 남아있네/ 海流東注天窮處(해류동주천궁처) 바다 동쪽으로 흘러 하늘 닿는 곳/ 山勢北來地盡頭(산세북래지진두) 산세 북쪽으로 내려와 땅 끝 머리에/ 館下垂楊鴉陣暮(관하수양아진모) 관아래 수양버들엔 저녁 까마귀 때/ 城邊腐草鬼燐秋(성변부초귀린추 토성) 썩은 풀엔 가을 도채비불/ 危欄逈出烟波上(위란형출연파상) 위태한 난간 저녁 연기위로 아련히 솟아있고/ 回首風塵淚不收(회수풍진루불수) 이 풍진 세상 돌아보니 눈물 거둘 수 없네/’-金瀅植의 시 「登戀北亭」 전문.

연북정은 조천 포구에 높이 쌓은 석축대위에 지어진 정자로 북쪽은 시원한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으며, 남쪽으로 한라산이 바로 보이는 곳이다. 선조 23년(1590) 목사 이옥이 창건하여 처음엔 쌍벽정(雙碧亭)이라 명명하였는데, 선조 32년(1599) 목사 성윤문(成允文)이 중수(重修)하여 연북정(戀北亭)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혁암은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 수은(水隱) 김희돈(金熙敦)․ 해은(海隱) 김희정(金羲正)․ 만취(晩翠) 김시우(金時雨) 등과 교류하면서 만와(晩窩) 김지호(金址鎬)․ 소림(小林) 오태직(吳泰稷)․ 농은(農隱) 김희선(金熙璿)과 그의 백부의 유시(遺詩)를 정리하여 서문을 쓰기도 했을 만큼 당대 시와 문에서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革菴散稿」에서 혁암은 영주십경과 한시 몇 수를 제외하면 주로 주변 인물들과의 우정, 객지에서의 향수 등 일상의 감회를 서슴없이 읊고 있다.

라. 고경흠과 계급문예운동

1. 고경흠의 삶과 사상

“문학의 영역의 지도적 위치는 그의 온갖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입장에 있어 노동계급에 속한다. 농민작가는 우정대우를 받으며, 우리의 무조건적 지지를 받아야 된다. 우리의 과제는 그들의 성장하고 있는 일단을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궤도에 도입시키는데 있다.”- 조선공산당의 「문학테제」(1925년).
 
고경흠

고경흠(高景欽, 1910~?)은 서울 정동공립보통학교 졸업하고, 1925년 제주의 첫 사상 단체인 신인회(新人會)를 창립하였고, 1926년 2월 경성중학을 중퇴한 후, 그해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했다. 1927년 3월 일본 도쿄로 건너가 고학하였다.
1927년 5월 재도쿄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 홍효민(洪曉民)·이북만(李北滿) 등과 함께 제3전선사(第三戰線社)를 설립하고 기관지 『第三戰線』을 발간했다.
제3전선사의 하계 전국순회 강연이 끝난 후, 박영희(朴英熙) 등을 만나 9월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개편에 참여하였으며, 조선프로예맹 도쿄지부를 결성하여 사회주의 문예운동을 전개했다. 10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과 신흥과학연구회에 가입했다. 1928년 9월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중도 퇴학하였고, 10월 신간회 도쿄지회에 가입하였다가, 일본경찰의 지명수배를 피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1929년 3월 상해에서 ML파 공산주의 그룹의 지도자들과 만나 코민테른 ‘12월 테제’에 의거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방침을 협의했다.
그 후 일본으로 돌아가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재건에 참여하고, 출판부에 배속되어 기관지인 『勞動者農民新聞』․ 『現階段』의 발간 업무에 종사했다. 그리고 조선프로예맹 도쿄지부를 당재건운동에 활용하기 위해 합법적인 출판사 무산자사(無産者社)에 참여했다.
1930년 4월 도쿄에서 『戰旗』․ 『인터내쇼날』․ 『無産者』 등의 잡지 발간을 주관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 볼셰비키화의 임무」․ 「조선 문제를 위하여」․ 「조선에 있어서 혁명적 앙양과 공산당의 임무」․ 「민족개량주의의 반동적 도량을 분쇄하라」․ 「평양파업의 의의와 공산당의 활동 임무」․ 「조선공산당의 당면문제」․ 「조선에 있어서 반제국주의 협동전선의 제 문제」․ 「조선에 있어서의 농민문제」 등을 집필하여 당재건 운동과 조선혁명에 관한 방침을 천명했다.
그해 11월 상하이로 가서 한위건(韓偉健)을 만나 당재건 운동의 방침을 협의했으며, 1931년 2월 조공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과 선전부원이 되었다. 4월 조공재건설동맹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로 조직을 변경하고 출판위원으로 선정되었고, 도쿄에서 무산자사를 근거지로 삼아 『코뮤니스트』․ 『烽火』 등의 기관지 출판 사업에 종사했다. 8월 하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김남천‧한재덕 등과 함께 1933년 5월 경성지법에서 예심에 회부되었으며, 4년형을 받고 법정에서 사상전향을 선언했다.
그 뒤 출옥하여 여운형(呂運亨)이 사장으로 있던 『朝鮮中央日報』 편집부원이 되었으며, 1938년 7월 전향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線思想報國聯盟) 경성지부 간사가 되었다.
해방직전 1944년 여운형 등이 조직한 건국동맹을 바탕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고경흠을 비롯 여운형․ 안재홍․ 최근우 등 중도좌우파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조선총독부로 부터 치안유지권․ 방송국․ 언론기관 등을 이양 받고 전국 각지에 지부를 세워 당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내부에서 좌익의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안재홍 등 민족주의자들이 탈퇴하고 인민공화국으로 이름이 바뀐 후에는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해체되고 말았다.

2. 카프(KAPF)의 방향전환에 연관

“실천은 (이론적) 인식보다 우위에 있는 것인바, 왜냐하면 실천이란 보편적이라고 하는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현실성이라고 하는 가치도 지니기 때문이다.”- V. I. Lenin, [철학노트], 1915.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orea Artist Proletarian federation, 1925.8.23∼1935.5. 21)은 1925년 8월경 조직되어 35년 해산한 사회주의계열의 문예운동단체이다. 머리글자를 따서 ‘카프(KAPF)’라고 약칭한다. 기관지로 『文藝運動』(1926), 『藝術運動』(1927)을 발간하였다.
창립 당시 구성원은 박영희ㆍ김기진ㆍ이호ㆍ김영팔ㆍ이익상ㆍ박용대ㆍ이적효 ㆍ이상화(李相和)ㆍ조명희(趙明熙)ㆍ 이기영(李箕永)ㆍ 박팔양(朴八陽)ㆍ김양 등이다. 카프의 초기 활동은 흔히 신경향파(新傾向派) 문학, 혹은 자연발생적 프로문학으로 불린다.
카프의 본격적인 활동은 1926년 『文藝運動』을 발간하고, 다음해 9월 이른바 조직의 제1차 방향전환이라 불리는 조직개편과 함께 이루어진다. 제1차 방향전환은 지금까지를 자연발생적 단계로 규정하고 명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작품행동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투쟁을 실현하기 위한 무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논강에 적시하여 정치투쟁을 위한 투쟁예술의 무기로서 조직의 임무를 규정하였다.
제2차 방향전환은 당시 고경흠 등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카프는 1931년 8월부터 10월까지 한위건ㆍ양명 등에 의한 조선공산당협의회사건과 연루된 세칭 ‘카프 1차사건’을 겪게 된다. 도쿄에서 발행된 『無産者』의 국내 배포와 영화 『地下村』 사건으로 11명의 동맹원이 체포되어 카프의 조직 활동은 크게 위축된다. 이 기간 중에 예술대중화나 농민문학론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창작방법론으로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론과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론이 제출되었다.
이처럼 ‘카프 검거사건’이란 1931년과 1934년 두 차례에 걸쳐 있었던 카프회원들에 대한 일제의 검거사건이다. 일제는 30년대 이후 침략전쟁을 확대해나가면서 식민지 조선에는 병참기지화·민족말살정책을 강요, 그 일환으로 저항성 있는 문학 활동을 철저히 탄압하는 한편 친일문학운동을 적극 조장했는데, 카프 검거는 저항 문학 활동에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에서 일으킨 사건이다.
1931년 7월 1차 검거에서 박영희·김기진·고경흠·임화·안막·이기영·이평산 등이 검거되고, 그 후 카프는 비합법운동화를 주장하는 경향과 합법적 범위 내에서의 활동을 주장하는 경향으로 분열, 양자의 대립이 심화되어 마침내 1932년 합법운동론자들이 탈퇴·전향했다. 이로써 카프는 크게 위축되었으며, 1934년 7월 2차검거 후 해체되었다.
결국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이다.”라는 유명한 전향문을 쓴 박영희와 백철(白鐵) 등이 조직으로부터 이탈하면서 카프는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더구나 일제로부터 직접적으로 해산 압력까지 받아 카프 지도부는 동맹원들에 대한 서면질의 형태를 밟아 1935년 김남천 등이 카프 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카프는 공식적으로 해체하였다.
이 무렵 소련의 라프(RAPP)와 일본의 나프에 영향받아 임화ㆍ안함광(安含光) 등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둘러싼 논의를 전개하였고, 이기영의 「고향」, 강경애의(姜敬愛)의 「인간문제」 등이 이 시기에 산출된 대표작이다. 이후 프로문학 진영은 조직이 해체된 상태에서 전체적으로 침체기에 빠졌다가, 8ㆍ15광복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조선문학가동맹으로 다시 재건되었다.

“해방 후 유쾌할 것이라고는 그리 찾아볼 수 없는 우리네 살림살이와 국제적으로 몇 번이고 약속되었던 조선독립은 미소의 의견 불합으로 여지껏 공위가 열리지 않고 국내의 모든 공장은 모리배와 원료 부족 등으로 파손 내지 정지 상태에 있고 쌀값과 모든 물건 값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듯 선량한 인민과 월급쟁이들을 울리고 있으며 광목 고무신이 우리네 살림에 가장 긴요한 것인데도 거리에서 광목 한 자 볼 수 없고 고무신이라고는 노인네 뱃가죽 같은 한번 신으면 찢어져 없어지는 것이다. 해방이 됐다고 고국에 돌아온 전재 동포들은 움 속에 있게 되고 단간방이라도 제 집을 지닌 사람은 해방 후 창호지 하나를 똑똑이 못 바르고 그날그날 밥걱정과 원인 모르는 테러와 공포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고경흠의 글 『獨立新報』 1947년 3월 26일

마. 기타 제주출신 작가들

신동식(申東植)은 1925년 3월 『朝鮮文壇』에 당선 시로 「濟州島」를 발표했다. 이 시는 1920년대 제주도의 정경을 묘사했는데, 제주적인 정취가 넘치는 작품이다. 귤 향기, 한라산, 망아지, 잠녀, 농부의 속요(俗謠) 등 제주적인 것을 소재로 쓰인 작품이다. 이 시를 통해서 1920년대의 제주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1919년 조천만세운동에 앞장섰던 김장환(金章煥)은 박종화 등과 함께 ‘피는 꽃’ 동인으로 활동했는데 김지원 ․김명식과 같은 마을, 같은 집안이다.
오정민(吳禎民)은 생몰 연대, 출생지, 성장과정 및 학력 등은 미상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의 오무라〔大村益夫〕교수는 도쿄의 탐라연구회에서 발간하는 『濟州島』(1998)에 실린 「濟州文學을 생각한다」는 글에서 문학평론가 오정민〔山田榮助〕이 제주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오정민은 1943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國民文學의 新倫理」로 당선된 이후 친일평론을 다수 발표하였다.
양종호(梁鐘浩)는 애월읍 상가리 출신으로 양원정수(良原正樹)란 이름으로 일본 『關西文學』에 시를 발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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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윤, 2001,「20세기 제주문학사 서설」,『영주어문』3, 영주어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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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2018, 「진보적 민족주의 언론인 고경흠」, 『주간경향』 1269호.
김희문 저, 오문복 역, 2003, 『수은시집(水隱詩集)』,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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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州道, 2006, 『濟州道誌』 1~6卷, 濟州道誌編纂委員會.
韓國藝術文化團體總聯合會, 1988.『濟州文化藝術白書』
한국문인협회제주도지회, 2008. 『제주문협50년』.
제주의소리 자료 (http://www.jeju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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