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개동(奉蓋洞)

詩(시)로 읽는 4․3(13)

봉개동(奉蓋洞)

김종원

타 버려싱게/ 아홉 살 적 풋대추 찾아 기어오르던/ 안마당의 대추나무도/ 타 버려싱게// 날만 새면/ 거르지 않던 동네 식개/ 영장집 가마솥도/ 인젠 찾아볼 수 어싱게// 가을이면/ 갈중이 풋감 물들이고/ 겨울 한낮엔/ 푹푹 내려쌓인 돌담 눈길로/ 키보다 큰 꼬리연 입김처럼 말리던/ 중산 부락/ 나의 봉아오름// 할아버지는 오척 단구/ 술 담배 입도 못 대신/ 대쪽 같은 선비/ 집 한 채 다 타고 잿더미만 남던/ 사삼사건에도/ 눈시울 한번 안 적시더니// 안방 다락/ 이불 베개 삼던 漢書籍 다 타고/ 불꽃 되어 날을 땐/ 손주처럼 발을 구르신/ 金海金氏 문중의 어른/ 아, 그 법 없이도 살 수 있던/ 내 할아버지는/ 지금 봉아오름을 떠나고 어싱게// 타버려싱게/ 글만 알고 곡식 모르던/ 툇마루의 버선발/ 꿈 심던 뒷마당의 죽순도/ 다 타버리고 어싱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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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종원(金鍾元)은 오현고 재학시절 유경환․ 정규남과 함께 3인시집 『생명의 章』으로이름을 날렸다. 서라벌예술대학과 동국대를 거쳐 『사상계』 신인 작품으로 등단하였다. 1975년 3월 자유언론수호 파동으로 조선일보에서 해직되었다. 「奉蓋洞」은 1962년 『제주도』지에 발표한 작품이다. 봉개는 일제강점기에 명도암과 대나오름 등에 일본군이 갱도진지를 파놓았던 마을이다. 그 갱도진지가 4․3 당시에는 주민들의 피신처로 이용되었다.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주민들은 인근 야산과 불타버린 집터에 움막을 짓고 피난살이를 했다. 1949년 1월 21일 군인, 경찰, 대한청년단 등 합동토벌대가 마을에 들이닥쳐 움막에서 숨어 지내던 주민들을 끌어내었다. 마을 주변에 숨어 지내던 주민 40여 명을 멀왓동산으로 끌고 가 집단학살하였다. 1949년 2월 4일 육해공 합동으로 펼쳐진 대규모 작전으로 집단희생을 당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의 ‘사살 360명 포로 130명 기타 의류 등 다량 압수’라는 보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토벌은 비행기와 로케트포, 박격포까지 동원하였으며, 압수품에 총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주민들은 성 안에 함바집을 지어 살았다. 함병선(咸炳善) 연대장이 주민들을 원거주지로 복귀시키는 사업의 일환이었다. 그는 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 일본 패망으로 일군 준위로 제대하고, 해방이후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으며 그 후 보병6사단 2연대장에 임명되고, 중령과 대령으로 진급하는 한편 제14연대가 일으킨 여순10․19사건의 진압작전에 참여하였다. 제주주둔군이 제2연대로 교체되면서 그는 4․3사건 진밥부대로 제주도에 왔다. 미군 비밀문서에는 “함병선 연대장은 신분이나 무기소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가혹한 작전을 폈다”고 기록되어 있다. 2연대 3대대는 바로 서북청년단 출신 장병들로 구성되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제2대 남로당제주도위원장을 지낸 김용관(金龍寬) 등 ‘봉개7인당파’로 인하여 많은 주민들이 희생을 치렀다. 함병선의 성(姓)과 작전과장 김명(金明) 대위의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함명리(咸明里)’로 개칭하였다. 마을 재건 당시 교회를 지었는데 교회 이름도 ‘함명교회’였다. 함병선은 1955년 2월 4일 봉개리를 방문하였다. 그는 주민들로부터 도열 영접을 받았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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