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와 문지기

김관후/작가·칼럼니스트
풍찬노숙(風餐露宿)!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한데서 먹고 잔다. 독립 투쟁에 헌신한 백범(白帆) 김구(金九)의 삶은 그야말로 풍찬노숙의 나날이었다. 어디 백범뿐이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고심분투한 애국지사들 모두가 풍찬노숙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문지기! 문지기는 문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데 과거 애국지사 중에 굳이 풍찬노숙의 문지기를 자처하며 나선 분들이 있으니, 그 역시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일이다. ‘어든 대문을/ 들어갈꼬/ 서울 남대문/ 쇠 걸었네/ 그러나저러나/ 들어옴세/ 남대야/ 문어리/ 어든 대문을/ 들어갈꼬/ 서울 남대문/ 쇠 걸었네/ 그러나저러나/ 들어옴세/ 남대야/ 문어리’
백범 김구가 상하이에 도착한 1919년 4월 13일.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안창호(安昌鎬)를 찾아가 “임정의 문지기를 하겠소” 했더니 경무국장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그가 문지기를 자원한 것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어떤 일이든 하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로 부르는 “날으는 홍범도가”를 탄생시킨 홍범도(洪範圖).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홍범도. 불모의 땅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서 하루의 생계를 걱정하며 말년을 보낸 고려극장 문지기 홍범도.
그렇지만 홍범도를 70대 극장 문지기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40년부터 1943년 사망하기 전까지 극장 앞을 지켰다. 일제의 고문으로 옥사한 부인, 의병으로 나섰다가 먼저 세상을 등진 아들,
“북지십년 만주십년 경찰백지 일자무식 문 도깨비 문형순!/ 어느 경찰 출신은 문형순을 그렇게 음률을 맞추어 기억했다// 왜 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라는 거야?/ 안 돼!// 광복군 출신으로, 친일 군경과 맞짱 뜰 수 있는 배짱과 용기// 너희 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이게 뭐야?/ 부당함으로 불이행!// 말년엔 여느 독립 운동가들처럼 쓸쓸하게 죽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북지십년 만주십년 경찰백지 일자무식 문 도깨비 유방백세(流芳百世) 문형순!” 김경훈 시인 시 「부당함으로 불이행」
2018년 10월 25일 경찰의 날을 맞아 4·3의인 故 문형순(文亨淳)이 경찰 영웅으로 선정되었다. 제주4·3 당시 부당한 국가권력의 지시에 맞서 제주도민의 생명을 구한 ‘명예로운 경찰의 표상’으로 평가한 결과였다. 국가의 직접적이고, 부당한 폭력을 ‘불이행’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수많은 도민의 목숨을 구해낸 ‘국민의 경찰’, ‘민주주의의 경찰’상을 몸소 보여준 고 문형순 서장. 4·3으로 희생된 도민들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엄연히 존재하는 국가폭력의 희생자이지만 그는 고귀한 희생과 헌신은 빛났다.
그런데 문형순은 안타깝게도 퇴직한 다음에는 경찰에게 쌀을 나눠주는 배급소, 이런 곳에서 일을 하였고, 극장에서 매표원과 문지기 일을 하면서 어렵게 생활하다가 향년 70세에 후손도 없이 혼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다.
문형순은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세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바로 육군사관학교의 뿌리이다. 그 후 고려혁명군의 군사교관으로 복무하고, 만주 한인사회의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을 역임했으며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을 겸임했다. 그 후 북지 허베이 성에서 지하공작대에 복무했으며 광복군으로 활동하다 귀국하여 제주도에서 경찰이 되었다.
문형순은 4.3사건 때 계엄군의 총살 명령을 거부하고, 수백 명의 민간인을 살렸다. 문형순 서장 앞으로 군 당국이 공문을 보냈다. “부당함으로 불이행.” 서장은 명령이 부당하기 때문에 이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결국은 200명이 넘는 민간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문형순의 극장에서 매표원과 문지기 일이 더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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