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구와 체 게바라

이덕구와 체 게바라

Ⅰ.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우린 아직 죽지 않았노라/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내 육신 비록 비바람에 흩어지고/깃발 더 이상 펄럭이지 않지만/울울창창 헐벗은 숲 사이/휘돌아 감기는 바람소리 사이/까마귀 소리 사이로/나무들아 돌들아 풀꽃들아 말해다오/말해다오 메아리가 되어/돌 틈새 나무뿌리 사이로/복수초 그 끓는 피가/눈 속을 뚫고 일어서리라/우리는 싸움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노라’ – 김경훈의 시 「이덕구 산전」 전문.

4・3은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시비의 문제이다. 해방이 되자 미군정은 지배의 장막을 치기 시작했다. 미군정시기에 발생한 4․3, 제주민중의 항거와 투쟁은 누구에 대한 항거였으며, 무엇을 위한 투쟁이었는가? 그 항거와 투쟁의 전선에 이덕구(李德九, 1920년~1949)가 있었다.
1945년 9월8일 맥아더 포고령이 발표된다. 군인 경찰은 물론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미군이 차지한다. 참다못한 제주도민들은 1947년 3월1일 독립만세를 재연했다. 경찰은 총질을 시작했다. 1948년 5월 10일 단독선거를 실시했고 도민은 선거를 거부하고 산에 오른다.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red island)’라 부른 미군정은 ’초토화작정을 펼쳐 중산간마을 95%를 불태우고, 3만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다. 미군정이 자행한 제노사이드(genocide)이다.
이덕구는 조천읍 신촌리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리쓰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學) 경제학부 재학 중 학병으로 관동군에 입대했다. 1945년 귀향한 뒤 조천중학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남로당 제주도지부 군사부장이며 김달삼(金達三)이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러 황해도 해주로 떠난 뒤 인민유격대장을 이어받았다. 결국 토벌대의 진압에 덜미가 잡힌다. 1949년 6월 7일 새벽 3시, 섬을 탈출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李鉉相)과 합류할 계획으로 하산하다가 경찰에게 포위됐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 6월 8일 관덕정 광장에는 십자형 틀에 묶인 시신이 전시되었다.
처연한 비운의 혁명가 이덕구. 일가족이 전멸되었다. 작은가오리오름 부근에서 최후를 맞는다. 교전과정에서 자결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에서 질문 하나가 있다. 남로당이 민중의 에너지가 된 점은 평가되지만 미군과 이승만 집단이 제주민중을 직접 살해한 구실을 그들이 일부 제공하지 않았느냐는 의문 말이다.

‘친애하는 장병, 경찰관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펴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총은 우리들이 피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총부리를 당신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 앞에 쏘지 말라. 귀한 총자 총탄 알 허비 말라.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준다. 그 총은 총 임자에게 돌려주자. 제주도 인민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로 쫓겨내기 위해 매국노 이승만 일당을 반대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부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은 인민의 편으로 넘어가라.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 지켜주는 빨치산들과 함께 싸우라. 친애하는 당신들은 내내 조선인민의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라’ -1948년 10월 24일 이덕구의 포고문.

이덕구의 포고문 내용 중에 < 침략자 미제>와 < 매국노 이승만>이라는 문구가 눈에 밟힌다. 4․3당시 남한 정부는 수립되지 않았으며, 미군정이 한반도 이남을 관할하고 있었다. 민중을 진압한 장본인은 미군정이었다. 무력으로 진압한 장본인도 미군정이었다.
“상공엔 미군정찰기가 날고, 제1선에는 전투를 지휘하는 미군 지프가 질주하고 있으며, 해양에는 근해를 경계하는 미군합의 검은 연기가 끊일 사이 없이 작전을 벌였다.”는 당시 조선중앙일보(1948년 6월 6일자) 보도는 무엇을 말함인가?
“I don’t care about the cause, my mission is to suppress only(원인에는 관심이 없다. 내 임무는 진압뿐이다)”라는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은 2주면 사태를 평정할 것이라고 했다. 미 군사고문단이 1948년 가을 이후의 초토화 작전에 직·간접으로 개입하였다. 정부는 그해 11월 17일 제주도 전역에 걸쳐 계엄령(戒嚴令, Martial law)을 선포하고 강경진압을 전개했다. 이덕구는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Ⅱ.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

‘(전략)…어른이 되었을 때 가장 혁명적인 사람이 되도록 준비하여라. 이 말은 네 나이에는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정의를 지지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라. 나는 네 나이에 그러지를 못했단다. 그 시대에는 인간의 적이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네게는 다른 시대를 살 권리가 있다. 그러니 시대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후략)’-1966년 2월 체 게바라가 딸 일디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혁명은 오직 무장봉기로만 가능하다’는 휴머니스트이며 리얼리스트인 체 게바라(Che Guevara,1928~1967). 아르헨티나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저술가,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 부유한 집안의 의사로서의 삶을 버리고 혁명가로서 삶. 과테말라․쿠바․콩고․볼리비아로 이어진 붉은 궤적. ‘전사(戰士) 그리스도’로 추앙받는 사람. 남미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 앞에 가장 엄격했던 그 사람 체 게바라.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그를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극찬했다. 미국에서조차 가장 뜨겁게 인기 있는 인물로 소비되고 있다. 혹자는 ‘혁명도 사회주의도 사라진 지금 오로지 체 게바라만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그의 사진은 붉은 티셔츠에 인쇄되어 젊은이의 가슴팍을 장식한다. 그의 이름이 들어간 시계, 심지어 맥주까지 나오면서 ‘체 게바라’라는 이름은 하나의 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다.
체 게바라는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이 처한 현실과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는다. 과테말라에 머물면서 하코보 아르벤즈 정권이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생각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때 아르벤즈 정권은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츠(United Fruit Company)가 소유한 토지를 국유화하려 했다. 미CIC는 군부를 움직여 그 정권을 엎어버렸다. 그는 “민중은 물질적으로 굶주렸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에 더욱 굶주려 있다”는 하코보 아르벤즈의 사상에 대한 경외심을 간직하게 된다.
체 게바라는 1954년 과테말라를 거쳐 멕시코로 망명하였으며, 그곳에서 쿠바출신의 사회주의혁명가들을 만난다. 쿠바는 미국과 소수부호들이 다스리는 나라였으며, 인민들은 굶주리고 탄압받고 있었다. 쿠바혁명이 성공한 뒤에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볼리비아까지 가서 목숨 걸고 또 혁명을 일으키려다 죽은 이상주의자이다. 쿠바혁명 승리 후 토지개혁의 준비에 착수하였다. 쿠바국립은행 총재, 쿠바 산업부장관, 1962년에 쿠바통일혁명조직 비서국에서 일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에서 군부쿠데타를 통해 집권하는 독재자들은 거의 미국의 군사학교 출신이었다.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경우 헌법을 수호해야할 책임이 있는 군대, 경찰, 의회가 등을 돌리거나 방관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Ⅲ. 죽음 앞에 선 혁명가
‘관덕정 광장에 읍민이 운집한 가운데 전시된 그의 주검은 카키색 허름한 일군복 차림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집행인의 실수였는지 장난이었는지 그 시신이 예수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에 높이 올려져있었다. 그 때문에 더욱 그랬던지 구경하는 어른들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심란해 보였다. 두 팔을 벌린 채 옆으로 기울어진 얼굴, 한쪽 입귀에서 흘러내리다 만 핏물 줄기가 엉겨 있었지만 표정은 잠자는 듯 평온했다. 그리고 집행인이 앞가슴 주머니에 일부러 꽂아놓은 숟가락 하나, 그 숟가락이 시신을 조롱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었다.’-현기영의 소설 『‘지상의 숟가락 하나』 중에서(68-69쪽).

이덕구의 시신은 효수(梟首)되어 전봇대에 걸렸다. 시신 옆에는 ‘이덕구의 말로를 보라’를 글귀가 붙어있었다. 시신은 대중에게 전시되었다가 남수각에서 화장됐으나, 다음 날 큰비가 내리는 바람에 유골이 빗물에 떠내려갔다. 광장에 내걸린 건 유격대장의 시신뿐만이 아니다. ‘폭도’이거나 ‘폭도로 몰린 사람들’까지 관덕정 앞에 끌려나와 효수됐다.
‘공비적멸가(共匪寂滅歌)’가 드높이 울려 퍼졌다. 그 광장에 목 잘린 머리통들이 등장했다. 잘린 목 그루터기에 살점이 너덜너덜한 머리통들을 창끝에 호박통 꿰듯 꿰어 들고 혹은 머리칼을 움켜서 허리춤에 대롱대롱 매달고서 토벌대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읍내 한길을 동서남북으로 행진했다.

‘굳건한 이념은 고도의 기술도 무너뜨릴 수 있다/전쟁에 충실한 미군들의 최대 약점은/그들의 맹목적인 전쟁관에 있다, 그들은/자기들과의 전쟁에서 죽은 자들만 존경할 뿐이다/그런 자들과의 싸움에서 우리는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단지 무모한 희생만은 피해야 한다//그러나 오로지 투쟁만이 미국을 물리칠 수 있다/이 투쟁은/단지 최루탄에 대항하여 돌을 던지는 시가전이나/평화적인 총파업이어서는 안 된다/또한 괴뢰정부가 흥분한 민중에 의해/불과 며칠 사이에 붕괴되게끔 하는 것/그런 싸움이 되어서도 안 된다/그 투쟁은 장기적이어야 하며,/또 적들로 하여금 충분히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이 투쟁의 전선은 게릴라들이 잠복하는 곳,/바로 그곳이다/도시의 중심,/투사들의 고향,/농민들이 학살당하는 곳/적들의 포화에 파괴된 마을과 도시들이/바로 전선인 것이다//적들이 우리로 하여금 싸우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다/우리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우리는 오직 싸움 준비를 하고/그 싸움을 시작할 결단만을 내릴 뿐이다’-체 게바라의 시 「싸움의 이유」 전문.

체 게바라는 말했다. “민중의 힘은 정부군을 이겨낼 수 있다. 우리는 혁명을 이루기에 가장 적당한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민중봉기는 그런 조건들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그는 미군의 지원을 받는 볼리비아 독재정권의 정부군에 부상을 입은 몸으로 체포되었다. 그의 남미에서의 인기와 남미 국가들을 장악하는 데 골머리를 앓던 미국은 그의 총살에 동의했다.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 9일 마리오 테란이라는 볼리비아의 하사관의 손에 의해 사살되었다. 죽기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알아두어라 너는 지금 사람을 죽이고 있다” 체 게바라를 향해 방아쇠를 당신 마리오 테란은 6개월 후 자신의 집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체 게바라가 죽은 후 그의 시신을 확인한 영국의 < 가디언> 기자는 이렇게 썼다. “나는 1963에 쿠바에서 체 게바라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미국에 대항한 전투에서 전 세계의 급진적인 군대를 지휘하려고 시도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제 그는 죽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그와 함께 사라질 수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체 게바라는 사후 그 영향력이 더 커져갔다. 그의 사체는 30년 후 볼리비아에서 발굴 되어 쿠바로 옮겨졌다. 그는 쿠바혁명의 성공 물꼬를 튼 산타클라라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 추억했다. “에르네스토는 진실에 열광적이었습니다. 진실은 그의 환영이었지요. 전투할 때는 냉정했고 혁명과 관련된 모든 일에 굽힐 줄 몰랐던 만큼 그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유머가 넘치는 아이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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