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별들과 꽃들은’

“척박한 이 땅의 역사는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진실을 감추려는 자들 사이에서 언제나 끊임없이 피를 흘려왔습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얼마나 더 이 땅을 붉은 피로 물들여야 새로운 세상이 올 수 있을지 아직은 아무도 모릅니다.” 시인 이산하는 1988년 6월 11일 안양교도소에서 항소이유서를 써내려간다. 그는 그 해 10월 3일 개천절 특사로 가석방된다. 그 전해 3월에 4․3사건을 다룬 ‘한라산’이라는 장편서사시를 발표했다가 필화를 겪었다. 시인은 4․3피해자 증언을 채록한 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 피의 투쟁사’를 비밀리에 접하면서 ‘한라산’을 써내려갔다.하지만 상당히 전위적이고 강력한 표현 때문에 그는 결국 1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박근혜 정권에서 총리를 했던 공안검사 황교안은 시인이 쓴 항소이유서를 보고 평생 콩밥을 먹이겠다고 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시인의 정치 의식과 작품은 별개라고 말한다. 정치 ‘의식’이 문학을 훼손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비평가들은 시인의 내면에 무지하거나 아니면 시와 정치의 관계를 떼어 놓고 싶은 보수적인 무의식을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가신 모든 혁명전사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장편서사시 ‘한라산’ 서문이다. 우리는 4․3의 제주도를 흔히 ‘가스실 없는 한국판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라고 표현한다. 시인은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서 안 쓴다면 역사의 방관자가 된다고 했다. 시인은 양심으로 역사를 꿰뚫어봐야 진정한 시인이라고 했다. 시인은 자신의 젊음을 피로 얼룩졌던 1948년 4월 3일에 고스란히 바쳤다. 두려움보다는 역사의 진실과 민중들의 장엄함이 그의 용기이자 힘이었다. 민중의 역사 안에는 도저히 눈으로 볼 수 없고 입으로 담을 수 없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참혹한 죽음과 쓰라린 상처들이 하나하나 역린처럼 꽂혀 있다. “한국 현대사 앞에서는 우리는 모두 상주이다./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 곳에 뜬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고/ 그 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별들과 꽃들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이산하 시집 ‘한라산’ 서시 중에서. ‘한라산’에는 4․3항쟁 기간 일어난 일뿐 아니라 4․3항쟁이 일어나게 된 세계사적 배경과 역사적 사실들이 시대적 흐름으로 서술됐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제국주의가 약소국을 침탈하고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유린했는지, 특히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그들의 권력을 등에 업은 서북청년단 등 반공단체의 잔인한 만행들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장편서사시 ‘한라산’을 읽는 것은 우리가 저지른 침묵의 죄를 용서 받는 일이다. 환상의 섬 ‘제주도’는 이승만과 미군정에 의해 도륙당하고 난자당한 참혹한 4․3 현장으로 각인됐다. 세계가 제국주의의 땅따먹기 각축장이 돼버린 현실이었다. 그 당시 불었던 저항의 바람, 그리고 제주도에서 자행된 살육, 해방 후 평화의 시대가 아닌 다시 폭력의 시대를 맞이해야 했고 그에 거침없이 저항했던 민중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인의 항소이유서에는 이런 글도 눈에 띈다. “새벽은 어둠 속에 앉아 기다리는 자에게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신새벽은 그 어둠에 맞서 밤새도록 싸운 자에게만 백만 원군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똑같은 이슬을 먹고도 벌은 꿀을 만들지만 뱀은 독을 만듭니다. 그 독을 먹고 자라는 파쇼하의 법정이란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나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판결이 내려지기를 바랍니다.”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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