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시대의 4.3문학

분단시대의 4․3문학
김관후(작가, 칼럼니스트)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가신 모든 혁명 전사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시인 이산하의 장편 서사시 『한라산』 서문 중에서.

시인 이산하는 1988년 6월 11일 안양교도소에서 항소이유서를 써내려갔다. 1978년 김봉현(金奉鉉)․ 김민주(金民柱)의 < 濟州島 血の歷史-4·3武裝鬪爭の記錄> 을 비밀리에 접하면서『한라산』을 탄생시켰다. 이산하는 1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김봉현․ 김민주의 ‘투쟁의 기록’은 ‘팩트’만을 놓고 볼 때는 매우 사실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장대를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간 혁명 전사들이라고 했다. 또 항소이유서에서 “새벽은 어둠 속에 앉아 기다리는 자에게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신새벽은 그 어둠에 맞서 밤새도록 싸운 자에게만 백만 원군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찾아올 것입니다.”라고 항변하였다.
< 鬪爭の記錄>의 공동저자인 김봉현은 오현중학교 교사로서 제주민주주의민족전선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다가 4․3발발 직전에 일본으로 떠났으며, 김민주는 조천중학원 학생으로 이덕구(李德九)의 제자이며 1948년 7월에 입산, 1949년 4월 붙잡혀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한국전쟁 때 옥문이 열리자 일본으로 피신했다.
나는 1980년대 일본어판 < 鬪爭の記錄>을 어렵게 구하고, 어두운 골방에서 일본어사전을 들추며 숨죽이며 읽었던 시절이 생생하다. 그 후 시인 김명식(金明植)이 아라리연구원 편으로『제주민중항쟁』을 펴내고, 거기에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생사」로 번역되어 나왔다. 김명식의 『제주민중항쟁』은 곧 판금 당하고, 그 역시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제주민중항쟁』에서, 김명식의 지적처럼 < 鬪爭の記錄>은 4․3항쟁을 미제와 우익진영에 대한 남조선 해방운동으로 파악하고 있다. 소련․ 북한․ 남로당과 제주도의 현실을 연결시켜 파악하는 데는 많은 한계를 지녔지만, 미 제국주의, 이승만 정권․ 군경․ 민간단체와, 좌익 및 인민과의 투쟁, 탄압, 학살 등 당시의 역동적인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너 있는 곳/ 거기에/ 한 가닥 평화의 불빛이 있는가/ 억새풀 꽃 같은/ 출렁임 넘치고 있는가/ 상처 입은 가슴 드러내어/ 한의 노래/ 원한의 이야기/ 털어놓을 수 있는/ 한 치 땅 해방공간이 있는가/ 거기에/ 억새풀 꽃 같은 향기 넘치고 있는가/ 남과 북 하나로 엉킨/ 억새풀 꽃 같은/ 만남이 있는가/ 높은 곳 바라지 않은/ 이름 한 점 탐내지 않은/ 거기에 자유의 휘날림이 있는가/ 너 있는 곳/ 거기에/ 아름다운 만남이 남아 있는가/ 남과 북 하나 될/ 통일된 땅이 있는가’-시인 김명식의 서사시『처형도』 중에서.

4·3은 제노사이드(Genocide) 현장이다. 대한민국에서 통일이란 ‘금기(禁忌)’사항이다. 그것은 통일을 가로막는 거대한 괴물 때문이다. 그 괴물은 ‘국가보안법’이다. 통일을 입에 담을 수 없도록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놓고도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옥죄였다.
제주의 비극은 한반도의 허리가 잘려나가는 과정에서 흘린 피였다. 그 어둠 속에서 4․3문학은 탄생하였다. 4․3문학은 저 대지 밑으로 숨어들어간 시대의 전설을 발굴하는 문학이었다.

‘5병대 7병단 1군단/ 김생 김달삼 이호재 박치우 서득은/ 여러 슬기로운 지휘관들의 피/ 아직도 눈 위에 임리하고/ 청옥산 태기산 일월산/ 국방봉 백암산 준령들의 산정 위/ 피바람 불어 끊이지 않은 저/ 험준한 태백산 전구의 이름과’-시인 임화(林和)의 「기지로 돌아가거든」중에서.

시인 임화가 1952년 7월에 쓴 시 「기지로 돌아가거든」이다. 임화는 조선플로레타리아예술가동맹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인민항쟁가」,「해방의 노래」,「제주도빨치산의 노래」등의 시를 남겼다. 시에 등장하는 김달삼(金達三)은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에서 4․3사건에 대한 열설을 하기도 했다.
시「기지로 돌아가거든」에는 5병대 7병단 1군단 소속 지휘관들이 등장한다. 1948년 8월 21일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 이후 남로당 세력은 강동정치학원생들로 구성된 유격대를 남파했다. 제3군단 김달삼 부대는 남하하여 저항했지만 태백산 인근에서 산화했다. 김달삼은 자신의 최후를 긴 지명에 남겼다. ‘김달사모가지잘린골(정선군 여량면 봉정리).
4․3역사의 분기점은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집회’다. 제주민중이 내뿜던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의 기운은 그날의 발포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민족의 완전·절대·통일 독립이라는 염원, 그 열망을 외세가 짓누름에 대한 저항, 급기야 민중의 자주·자결을 다시 꿈꾸며 해방과 독립의 항쟁은 시작되었다. 4․3문학도 ‘남과 북 하나로 엉킨/ 억새풀 꽃 같은/ 만남’을 위하여 탄생하였다. 우리의 분단현실을 자각하고 그걸 개선하고, 또한 분단으로부터 생기는 모든 비극이나 억압과 차별들을 극복해내는 문학. 문학적으로 극복해내는 것, 문학적으로 드러내는 것, 이런 것들은 결국 세계성이다. 분단은 거대한 폭력의 산물이며, 4․3은 분단 폭력의 예이다.
4․3의 제주도를 흔히 ‘가스실 없는 한국판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라고 표현한다. 작가는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서 안 쓴다면 역사의 방관자다. 민중의 역사 안에는 도저히 눈으로 볼 수 없고 입으로 담을 수 없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참혹한 죽음과 쓰라린 상처들이 하나하나 역린처럼 꽂혀 있다.
‘제주도’는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도륙당하고 난자당한 참혹한 4․3현장으로 각인됐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의 8할을 붉은색으로 칠하여, ‘RED ISLAND’라고 명명했다. 당시에 그 붉은색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들이 저지른 제노사이드의 범죄는 금기의 영역이다.
4․3항쟁은 오랫동안 냉동되었다. 도전하는 도민들은 용공분자로 낙인찍힌 채,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투옥되었다. 그 당시 불었던 저항의 바람, 그리고 자행된 살육, 그에 거침없이 저항했던 민중의 역사. 항쟁의 역사적 의미는 유보되어 왔으며, 그것은 심지어 왜곡되기도 하였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숨 막히게 작용했다. 그 산물 냉전이데올로기가 굴욕과 억압의 삶을 강요했다. 일곱 살 난 아이가 이른바 토벌작전이란 이름아래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살해당해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30만 도민이 없어지더라도 대한민국 존립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몰살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어 3만여 주민이 학살되어도 역사적 판단중지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4․3문학이 냉동된 역사를 하나씩 풀기 시작하였다. 그 피의 역사, 오욕의 역사를 기술하는 일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눈물 없이 잠들 수 없는 역사, 아직도 냉동된 역사는 빙하처럼 작가 앞에 서 있다. 분단시대이기에 그 피의 역사, 오욕의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4․3의 트라우마는 그들의 자식, 손자에게도 미쳐 있어서 그들 역시 그 기억을 되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수많은 젊은 인재를 그 사태에 잃어버린 도민 대다수에겐 자신을 보호해 줄 언어도, 학벌도, 재력도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4.3문학이 탄생했다.
발표자는 발표문에서 < 오성찬과 현길언의 소설들, 일부 번역된 김석범의 소설도 주목받았다>고 짧게 쓰고 있다. 현길언이 ‘4․3=남로당의 반란’이라 규정한 것과 관련해 4․3단체들이 ‘양식을 버린 노(老) 작가의 추락‘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발표자는 발제문에서 현길언(玄吉彦)의 소설들은 주목받았다고 짧게 표현하고 있지만, 과거 「맺힘에서 풀림까지, 그 멀고 어두운 거리-현길언의 ‘우리들의 조부님’ 론」에서는 ‘4․3탐구의 신호탄 격의 소설’, ‘4․3이 제주인들에게 커다란 한으로 맺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현길언을 옹호하고 있다. 그리고 소년소설 「다들 어디로 갔을까」를 아름다운 시절과 참혹한 역사가 적절히 만남으로써 그 의미가 극대화 대었고, 그 울림이 만만찮다고 하고 있다.
과거 현길언은 2012년 7월 9일 국민일보의〔여의도포럼-현길언〕을 집필하면서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을 칭송하였다. 두 대통령이 역사적인 비전을 갖고 직무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자’는 꿈을 제시했고, 박정희는 ‘잘살아 보자’는 꿈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또 2013년 「본질과 현상」(여름호)에 ‘과거사 청산과 역사 만들기-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중심으로’ 제하의 글에서 “제주4.3은 남로당이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일으킨 반란”이라며 제주4․3진상보고서가 이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현길언이 ‘4․3=남로당의 반란’으로 규정한 것과 관련해 2013년 6월 27일, 제주4․3유족회가 성명을 내고 ‘4․3을 폄훼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다음날 6월 28일 (사)제주4.3연구소와 (사)제주민예총, 제주4.3도민연대 등은 공동으로 논평을 내고 “양식을 버린 노(老)작가의 추락”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에 대해서 주제발표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4.3단체들은 “현길언씨의 글은 4.3의 역사적 사실이나 과정의 팩트에 근거하지 않은 졸문이며, 의도적 곡필이자 악필”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현길언은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역사적 실상을 왜곡한 부실한 보고서이며 정치권력에 의한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한 『정치권력과 역사왜곡』이란 책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김대중정부 시절 제정된 특별법의 문제점과 그 법에 의해 작성된 진상 보고서의 편향성을 주장하고 제주4·3의 비극을 극복하는 방법과 보고서를 보완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현길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하여 시비를 걸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편파적인 역사학자나 언론인이 전념시킨 악령에 이끌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추인했고, 제주4․3은 태어나지 말아야 할 정부에 저항해 일어난 ‘사태’라 하며, ‘반란’을 옹호하였다. 제주4․3평화공원에 세워진 백비(白碑)의 의미까지 먹칠하고 나섰다. 그동안 극우세력들은 작가나 학자의 입을 통해 제주4․3흔들기에 앞장서 왔다. 현길언도 마찬가지로 제주4․3을 왜곡하고 있다.
– 2016년 9월 28일 낮 12시50분부터 4.3평화공원에서 예정됐던 현길언의 특강 < 제주의 가슴아픈 현대사 4.3>이 강연 시작을 코앞에 둔 오전에 취소됐다. 이번 특강은 방송작가, 방송PD, 로케이션 매니저 등을 초청해 제주에서 진행하는 문광부 주최 초청 강연이었다. ‘4.3을 왜곡하는 인물이 4.3을 소개하는 강사로 나서는게 말이 되느냐’고 4.3유족회가 강하게 항의하면서 일정이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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