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 한 장

詩(시)로 읽는 4․3(32)
엽서 한 장
김영란

붉은 소인 마포형무소 아버지 엽서 한 장
낭설처럼
생트집처럼
인생에 끼어들어
와르르 허물고 가는
천추의 저 낙인

반백 년 흘렀어도 풀지 못한 한이 있어
뿔뿔이 흩어진 가족 그 안부를 다시 물으며
명 긴 게 벌이라 시던 어머니 생각합니다

인생은 낙장불입
못 바꾸는 패하나
빈속에 깡소주

독거노인 냉방에서
아버지 서러운 생애를
그리움으로 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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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형무소(麻浦刑務所)는 정부수립 초까지 사용되었던 형무소이다. 1908년에 경성감옥이 서울서대문구에 지어졌다. 8.15 광복이후 마포형무소로, 1961에는 마포교도소로 각각 개칭했다. 1995년에 마포구 공덕동 105번지 마포형무소 자리에 “1912년 일제(日帝)가 경성형무소를 설치하여 항일(抗日)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옥고(獄苦)를 치렀던 유적지”라고 적힌 표석이 설치되었다. 4․3사건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군법회의는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두 차례 실시되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벌금형․ 구류․ 집행유예 등을 언도 받았지만, 금고․ 징역 등의 실형을 언도 받은 사람들은 제주도에 형무소가 없었기 때문에 전국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일반재판 수형인들은 목포․ 광주형무소에, 군법회의 대상자들은 서대문․ 마포․ 대전 ․대․구 목포․ 인천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군법회의』명령에 복형장소가 마포형무소로 기재된 사람은 223명으로 모두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여기에다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어 마포형무소로 이송된 사람이 96명이므로, 마포형무소 재소자는 총319명이다. 상당수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총살당하였다. 6월 25일 당일 오후 2시 25분 치안국장의 명의로 각 경찰국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형무소 경비의 건’을 전화통신문으로 긴급 하달하였다. 제주에서 이송된 재소자는 일반재판 수형인 200여 명과, 두 차례 군법회의 대상자 중에 만기 출소한 사람을 제외한 2,350여 명이 한국전쟁 직후에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제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되었다. 서대문․ 마포형무소와 인천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은 북한 인민군이 형무소를 장악함에 따라 출소하여 각지로 흩어졌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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