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형인-박춘옥

詩(시)로 읽는 4․3(51)

수형인-박춘옥
이창선

70여년의 한의 세월 눈물로 증언하는
한 거인 던진 한마디 4․3이 머우꽈?
죄 어신 똑똑한 사람 잡아당 다 죽였수게

두 살 난 아들대령 곳찌간 전주형무소
아픔과 고통 어떵 말로다 를 것꽈
그 설움 당해보지 않고 말로허영 몰라마씀

아방도 죽어불곡 고생허멍 살단 보난
그 아들 일흔셋 이 살암수다
4․3이 무언지도 모른 아흔 셋의 수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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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면 가시리 출신인 수형인 박춘옥(호적이름 박내은)은 두 살 이들과 함께 ‘1948년 군법회의’에 의해 수감되었다. 수형인명부에 의하면 그는 가시리가 본적이고 1948년 12월 28일 징역 1년을 언도 받고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되어있다. 그는 1948년 11월 11일(음력) 산에서 붙잡혔다. 의귀국민하교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귀포경찰서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전기고문과 ‘비행기’ 태우기 고문을 받았다. 제주경찰서로 옮겨질 때 친정어머니와 동생들은 풀려났고 어린 아들과 은 한 달이나 구금생활을 하고 전주형무소로 옮겨졌다. 4․3사건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군법회의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두 차례 실시되었다. 「군법회의 명령」에는 2530명(1948년 군법회의분 871명, 1949년 군법회의분 1,659명) 피고인 명부가 별첨되어 있다. 군법회의 대상자들은 서울․ 인천․ 대전․ 대구 전주․ 목포 등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어 재소자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1950년 6․25전쟁이 발생하자 각 형무소별 불순분자 처리방침에 따라 상당수가 총살 처리되었다. 일부는 옥문이 열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행방불명됨으로써 지금까지 생사를 모르고 있다. 「군법회의 명령」에 적혀진 1948년 군법회의분 871명의 군법회의 대상자들은 제주도에서 사형에 처해진 38명을 제외하고 각각 목포․ 마포․ 서대문․ 대구․ 인천․ 전주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여성들은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징역 15년 3명, 징역 5년 7명, 징역 1년 38명이다. 1949년 군법회의분 1,659명은 제주도에서 사살된 249명을 제외하고 각각 마포․ 대구․ 대전․ 목포․ 인천전주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여성들은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무기징역 3명, 징역 7년 21명, 징역 5년 13명, 징역 3년 25명, 징역 1년 22명 등 총 84명이다. 그들은 「구형법」 제77조(내란죄) 위반죄 또는 「국방경비법」 제32조(적에 대한 구원통신 연락죄), 제33조(간첩죄) 위반죄로 1년부터 20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군법회의는 그 근거법인 국방경비법 소정의 절차를 전혀 준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 제22조 “모든 국민은 법률의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에서 도출되는 문명국가의 재판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절차조차 갖추지 못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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