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봉 해변에서

詩(시)로 읽는 4․3(65)

서우봉 해변에서

한승엽

마을 안팎이 모두 어두컴컴해졌다

중산간 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해안으로 내려오며 심하게 절뚝거렸다

북쪽 바다와 맞닿은 벼랑과 모래밭으로 등 떠미는 바람이 휘몰아쳤다

불쑥 종적을 감추고 멀리 사라질 수도 있었지만, 겨울 파도가 밀려와 가마니 위에 차디찬 육신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손금에 세월의 아픔이 고여 뼈마디가 쑤시는 날이면. 밀려나는 물결에 씻김을 하여도 하늘의 안색이 흐렸다

아직도 벼랑 안쪽에선 새들의 꽁지가 두드럭거리고 있었다

—————— 해방과 더불어 함덕리민들은 역사의 회오리를 견뎌내야 했다. 4ㆍ3초기 무장대가 함덕리를 장악하고 지서는 번번이 무장대의 피습을 받았다. 주민들은 무장대의 요구에 따라 식량과 의복을 산으로 올려 보냈다. 산에 올라간 젊은이들은 산에서 ‘레포’노릇을 했다. 레포란 ‘reporter’에서 유래한 말로 산에서 ’연락병‘으로 지칭했다. 일제 강점기 민족해방투쟁을 하던 때부터 쓰였던 말이다. 보초를 ’빗개(picket)’라고 했던 것도 같은 쓰임새이다. 함덕국민학교에서는 9연대· 2연대 등 군부대 1개 대대가 주둔하였고, 해수욕장과 서우봉은 바로 학살터였다. 조천면 관내 주민 231명, 제주읍 관내 주민 28명, 구좌면 관내 주민 19명, 성산면 관내 주민 2명, 남원면 관내 주민 1명 등 총 281명이 희생된 곳이다. 조천· 함덕은 물론 선흘· 대흘 등 조천면 산간지역, 제주시 삼양· 화북 구좌면 주민 등이 대대본부로 불려 가면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1948년 4월 3일 함덕지서에는 5명의 경찰관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2명이 그날 무장대에 의해 납치되었다. 그 뒤 경찰관이 증원되었다. 5·10선거 무렵에는 10명으로 늘어났다. 토벌작전이 본격적으로 착수된 5월 13일 무장대의 역습이 있었다. 바로 함덕지서 습격사건이다. 한낮에 경찰관 인면피해가 7명에 이른 사건이다. 무장대원들은 경찰관들을 향해 총구를 들이대었다. 오후 4시께 무장대의 집중사경으로 지서주임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무장대의 손에 생포된 경찰관 3명은 대흘지경으로 끌려가 피살되었다. 또 경찰관 2명은 지서건물 속에 숨어 있다가 지서건물이 불타는 바람에 질식사했다. 이런 와중에 지서 앞에서 경찰관 가족도 살해당했다. 한편 경찰은 이 사건 이후 함덕에 응원경찰대 30명을 배치하였다. 함덕리(11월 4일), 신흥리(11월 4일), 조천리(11월 6일) 등 마을에서 무장대 습격에 대한 토벌대의 보복학살이 벌어졌다. 11월 25일에는 조천면 초대 면장이자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 조천면 건준위원장, 조천면 인민위원장, 제주도 민전 부의장 등을 역임했던 김시범이 함덕리 서우봉에서 토벌대에 의해 총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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