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들 -연극 ‘조천중학원’

詩(시)로 읽는 4․3(68) 청춘들 -연극 ‘조천중학원’

김병택

혁명의 시대에 단단한 얼음을 깨고

강을 건너려 했던 청춘들이었다

손으로 하늘을 가리며,

청춘들은 시대의 횃불을 든 투사가 되어

끊임없이 무대 모서리를 돌았다

모든 것이 희미해질 훗날까지도

뚜렷하게 남을 청춘들의 자취였다

사랑도 물론 있었지만,

그것이 현실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었다

어둠의 시대에 불을 밝혀,

새로운 현실을 만들고자 했던 청춘들이었다  …………………………………………………………………………………………………………………………………………………………………. 연극 ‘조천중학원’은 놀이패 한라산에서 4ㆍ3 70주년 기념으로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영했던 연극이다. 1946년 3월에 개교하고, 5개 학급에 학생 수는 200여명. 1948년 5ㆍ10선거 이후, 4ㆍ3으로 인해 대부분 교사와 학생이 피신하자 설립 2년여 만에 폐원되었다. 교사들도 대부분 일본 등지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들이었고 교육열 또한 어느 곳 보다 뜨거웠다. 조천중학원 출신들은 “그때의 강의가 지금의 대학강의 못지않았다.”고 회고한다. 교사들은 거의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던 유학생들로 해방 직후 귀향한 사람들이다. 교사로 현복유ㆍ 김동환ㆍ 김민학 ㆍ이덕구 등이 근무했으며, 그 밖에 김석환 김응환 한평섭 등이 잠시 적을 두었다. 교사들은 모두가 4.3항쟁 당시 항쟁지도부에 참여하였다. 학생들은 자치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민중과의 연대투쟁을 전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천중학원 학생 김용철이 조천지서 유치 이틀 만에 숨졌다. 시체의 검시결과 그는 혹독한 고문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천지서에서 숨진 김용철은 학교에서는 리더급 학생이었지만 몸이 약한 편이었다. 해방 후 주민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자치정부 구성과 교육이었다. 자치적 공동체 의식이 강한 지역적 특성과 일제 때부터 계속된 민족해방운동의 전통. 민족세력의 영향력 등으로 45년 9월 제주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잇따라 결성됐다. 인민위원회의 구성과 병행하여 민중이 주력한 것은 자주교육운동을 통한 사상과 학문의 보급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농업학교 하나밖에 없었던 제주도에 오현중, 제주중, 제주여중 등을 창설하는 것을 필두로 1945년부터 1946년까지 27개 학교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문맹퇴치를 위한 무수한 강습소를 세우고 『제주신문』도 펴냈다. 조국이 해방된 마당에 먼저 교육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퍼져 나갔던 것이다. 조천 함덕 신촌 신흥 등지에서 학생들이 몰렸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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