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동 편지

시(詩)로 읽는 4·3(78)

가문동 편지

정군칠

낮게 엎드린 집들을 지나 품을 옹송그린 포구에

닻을 내린 배들이 젖은 몸을 말린다

누런 바다가 물결 져올 때마다

헐거워진 몸은 부딪쳐 휘청거리지만

오래된 편지봉투처럼 뜯겨진 배들은

어디론가 귀를 열어둔다 저렇게 우리는,

너무 멀지 않은 간격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살을 맞대고 사는 동안

배의 밑창으로 스며든 붉은 녹처럼

더께 진 아픔들이 왜 없었겠나

빛이 다 빠져나간 바다 위에서

생이 더욱 빛나는 집어등처럼 마르며

다시 젖는 슬픔 또한 왜 없었겠나

우리는 어디가 아프기 때문일까

꽃이 되었다가 혹은 짐승의 비명으로 와서는

가슴 언저리를 쓰다듬는 간절함만으로

우리는 또 철벅철벅 물소리를 낼 수 있을까

사람으로 다닌 길 위의 흔적들이 흠집이 되는 날

저 밀려나간 방파제가 바다와 내통하듯

나는 등대 아래 한 척의 배가 된다

이제야 너에게 귀를 연다 ——————————————————– 하귀리는 4ㆍ3 당시 두 개의 마을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귀1구는 속칭 군냉이라 불렀고, 2구는 미수동, 가문동, 개수동, 답동, 번대동이 5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었다. 일주도로면에 대다수 마을이 위치했으나 개수동은 산쪽으로, 가문동은 해안가에 위치했다. 마을유지와 청년들은 1945년 10월 하귀중학원을 설립하여 중등교육을 시작하는 등 많은 활동을 벌였다. 하귀리와 경찰 간의 본격적인 대항은 1947년 3ㆍ1절발포사건 후 시작되었다. 3ㆍ1사건 직후 전도에 걸친 검거선풍의 와중에서 김용관 하귀초등학교 교장이 검거되어 체형 6개월을 언도받았고, 후임으로 이북 출신 교장이 부임하자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벌였다. 미군정은 마을의 움직임에 탄압을 계속하여 하귀중학원생 대부분을 1947년 여름 제주경찰서에 구금하였다. 1948년 5월 25일 새벽, 경찰과 대청단원, 서청이 가문동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주민들을 돈지동산에 집결시켰다. 경찰은 한 사람씩 취조했다. 주민들을 짝 지워 뺨 때리기를 시켰다. 마을 건너 원벵듸에서 주민들을 총살했다.(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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