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의 시 ‘풀’의 전문이다. 김수영의 ‘풀’은 196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실렸다. 시인이 사고를 당한 뒤 유고로 나왔다. ‘풀’은 1968년 5월에 지은 시다. 이 시에서 ‘풀’은 ‘민족이나 민중 혹은 한 개인의 끈질긴 생명력과 저항의 상징’이며 ‘바람’은 ‘불의나 부조리’라고 해석된다. 그리고 주제는 ‘민족이나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설정된다.시인은 현실에 대한 고발과 비판적 지성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실 참여주의자들은 사회 의식을 직시하고 서민 의식을 바탕으로 사회 부조리에 대한 고발과 비판적 내용을 작품화했다. 김수영, 신동문, 신경림, 조태일, 김지하, 최하림, 이성부 등이 대표적 시인이다. 김수영의 ‘풀’을 ‘비판적 현실 의식의 시’로 규정하면서, 그의 작품 경향을 ‘참된 시민 의식적 시인으로서의 통찰과 안목을 발휘했다’고 했다. 풀과 바람, 누웠다 일어서고, 울다가 웃고, 빨리와 늦게 등 대립적인 시어의 반복을 통해 주제 의식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 가장 두드러지다. 또 반복과 대구를 통해 운율을 형성하고 상징적인 시어를 사용해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시작(詩作)은 머리로 짓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짓는 것도 아니고,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수영의 말이다.‘풀’과 ‘바람’은 각각 ‘민중’과 ‘불의’를 의미한다. 바람이 아무리 거칠게 불어도 그 힘으로 풀을 뽑지는 못한다. 반면 풀은 때로는 바람에 순응하는 듯 보이지만 바람보다 먼저 행동하고 결코 꺾이지 않는 능동적이고 강한 삶을 살아낸다. 그래서 민중은 풀과 같은 것이다. ‘풀’은 여리고 상처받기 쉽지만 질긴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 ‘바람’은 무수히 많은 생명을 괴롭히고 억누르는 힘으로 상정해 보자. 바람이 불면 풀이 흔들리고 또 땅까지 휘어진다. 풀의 움직임이 반복된다. 풀이 먼저 흔들리고 이어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일어설 경우 역시 어떤 때는 풀이 먼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바람이 먼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렇다면 제주민중도 풀과 같다. 풀처럼 일어선다. 상처 난 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자기를 역사의 정방향으로 세운다. 주체자의 몫을 다하기 위해 4·3에 물든 피를 씻어내며 희생당한 이웃들의 무덤을 다듬으며 맺힌 원한을 풀고 있다. 양민을 학살한 모든 세력을 낱낱이 찾아내어 아직은 상하 좌우에 진 쳐있는 예리한 칼벽을 넘고 있다. 그러니까 풀을 ‘민중’으로 바람을 ‘억압자’로 볼 수도 있다. 제주민중은 70여 년의 어둠과 짓밟힘을 헤치고 다시 딛고 일어서는 아침의 해를 마중했다.4·3은 밟아도 베어도 잘라도 찢어도 쏘아도 오히려 땅속 아래서 엉키며 부둥켜안으며 아침 해와 더불어 슬며시 일어서서 드디어 푸르름을 지니며 꽃을 피우고 열매 맺고 있다. 그래서 ‘풀’에서 민중의 의미는 한결 풍요로워진다. 민중은 억압 세력에 눌려 늘 고통을 당하고 늘 좌절한다. 순간순간 보면 그런 것 같지만 긴 시간을 두고 전체적으로 보면 민중이란 그러면서도 늘 삶을 이어갈 뿐만 아니라 때로는 억압 세력을 압도하기도 한다.어두운 시대 상황 앞에서 민중은 침묵할 수밖에 없지만 그곳은 패배가 아닌 또다시 일어나기 위한 잠깐의 침묵이며 다시 일어날 강인한 민중의 모습이다. 바람과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풀이 더 크고 넓은 생명력을 가지게 됨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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