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가 문제다

“4․3반란사건-오욕의 붉은 역사.” “5․18은 북한의 역사다.” “노회찬의 죽음은 인과응보고 자승자박.” “노회찬 사망 자살 아닌 정황 의심되는 13가지.” “가방모찌 하던 놈이 반란으로 대권 먹고.” “백성들 에이즈 걸려 죽어라고 동성애 지지해 주시고.”
내가 가끔 얼굴을 내미는 카카오톡의 가짜뉴스(Fake News)들이다. 지인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거기에서 빠져나오라는 충고다. 그렇지만 내 생각을 옹호하는 지지자들이 있으니 글쓰기를 계속할 요량(料量)이다.
가짜뉴스는 정치·경제적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언론보도의 형식을 하고 유포된 거짓 정보이다. 그것을 신뢰하기 시작하면 이에 대한 해결 방법이 없다. 특정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고, 정보 편향성으로 인해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만드는 특징을 지녔다.
왜 우리는 가짜뉴스에 더 끌릴까? 진실뉴스에는 없지만 가짜뉴스에는 있는 특성은 무엇일까? 바로 새로움과 놀라움이다. 새로움과 놀라움에서 행복을 느끼는 성향이다. 위험을 감수하거나 몰랐던 사태를 접하는 경험은 뇌에서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방출을 촉진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가짜뉴스가 어떻게 ‘국민의 적’이란 문구로 바뀌었는지 많은 대화를 했다”는 트윗을 날렸다. 설즈버거 NYT 발행인과의 만남 후였다. 설즈버거는 “가짜뉴스란 용어가 거짓이라고 지적했고, 대통령이 언론인을 ‘국민의 적’으로 낙인찍은 데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며 받아쳤다.
가짜뉴스는 독일 메르켈 총리를 테러리스트 옹호자로 둔갑시키고, 오바마를 국민의례를 금지한 친이슬람 또는 반기독교 인사로 낙인찍었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다’는 가짜뉴스가 미(美)대선 기간 중 페이스북에서 가장 많이 공유된 소식이다.
지난 대선 당시 제주에서도 시청, 주요 버스정류장 등에 문재인 후보를 비방하는 유인물을 붙이고 자신의 블로그에 같은 글을 올리는 등 허위사실을 공표한 사람을 긴급 체포했다. 그 사람은 법치자유애국당이라는 이름으로 ‘더불어민주당 종북 공산주의자 빨갱이 북한의 심부름꾼(스파이) 제주에 오시는 것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는 벽보를 붙이기도 했다.
인류의 역사는 곧 가짜뉴스에 대한 투쟁의 역사와 다름없다. 백제 무왕이 지은 ‘서동요(薯童謠)’는 선화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그가 거짓 정보를 노래로 만든 가짜뉴스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났을 때 일본 내무성이 조선인에 대해 악의적으로 허위 정보를 퍼뜨린 일은 가짜뉴스가 잔인한 학살로 이어진 사건이다.
21세기형 가짜뉴스의 특징은 그 논란의 중심에 글로벌 IT기업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디어 플랫폼에 ‘정식기사’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IT 기업들은 ‘디지털 뉴스 중개자’로 부상하는 동시에 가짜뉴스의 온상지가 됐다.
왜 가짜뉴스가 퍼지는 게 문제일까? 가짜뉴스가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당선이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불리한 가짜뉴스를 얼마나 잘 나르느냐로 결정되는 사회를 상상해보라.
이곳에서는 인류가 피를 흘리며 쟁취한 자유와 정의, 평등, 합리적 토론을 통한 의사 결정이라는 민주적 가치가 모래처럼 흩어진다.
시간은 한정돼 있고 뉴스는 범람한다. 이용자는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눈길을 끄는 뉴스가 곧 팔리는 뉴스가 된다. 기사는 현저성(顯著性)과 특이성(特異性)이 있어야 선택받을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여론을 심각하게 오염시킬 수 있는 가짜뉴스의 심각성을 이야기해야 한다.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우리가 언론에 대해 가져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진짜뉴스와 가짜뉴스를 가리는 것이 어려운 세상에서 현명한 미디어 수용자가 되는 방법은 도대체 무엇일까?

카테고리: 글 전체보기 | 댓글 남기기

‘예멘 난민’을 품어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마태오복음 25장 41-42절예수님도 박해자들의 칼을 피해 피난길을 떠나셨다. 이집트에 머물며 난민으로 인생을 시작하셨다.일제강점기에 땅과 집을 뺏긴 수많은 우리 선조들이 연고도 없는 만주로, 연해주로 떠나야 했다. 일자리를 찾아서 또는 4·3의 재앙을 피해 일본으로 이주했다. 지금도 700만명에 이르는 우리 민족이 전 세계에 흩어져 타향살이하고 있다. 근대 한국 사람들의 상당수는 난민이었다. 만주를 향해 달리는 경의선 열차 안이나 상하이행 배 안에는 식민지배의 폭압을 피해 탈출하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만약 중국이 일본 개입 명분을 준다며 상해임시정부를 폐쇄시키고 조선인들을 내쫓았다면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독일작가 테오도어 폰타네(1818 ~1898)는 “낯선 사람들이 제일 먼저 우리에게 고향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고 하였다. 삶의 터전을 떠나온 사람들에 손을 내미는 것은 인류애라는 가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구상에 생존하는 인간으로서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 인간다운 일이다. 제주로 찾아온 549명의 예멘 난민들에 대해 무슬림이기에 ‘테러리스트’나 ‘잠재적인 성범죄자’와 곧장 연결시키며 거부감을 나타낼 수 있다. 난민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자국민 안전’을 얘기한다. 그렇지만 예멘 난민들의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외국인 범죄를 이유로 다문화를 반대하는 태도는 외국인 모두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다. 무슬림 중에 테러리스트가 있다는 이유로 모든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라 단정하는 것이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문을 두드린 난민들은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일자리도 얻고, 세금도 내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학교에 보내며 한국 국민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인류애가 숭고한 이유는 인종도, 지역도, 종교도, 사상도 초월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난민이 6000만명을 넘어섰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도 난민이었다”는 말을 한다. 전쟁과 분쟁이 있는 한 과거에 난민이었던 우리도 다시 난민이 될 수 있다. 우리 민족도 타국에서 난민의 고난과 설움을 짊어지며 살아왔다. 물론 문화적 차이나 종교적 차이로 인해 정착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스페인이 이탈리아·몰타가 거부한 난민선을 받아들였다. 스페인 사람들이 외친 구호는 “관광객은 집으로 가야 하며, 난민은 환영한다”였다. 관광객이 집세를 올리고 도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반면, 난민은 지역 사회를 건설하고 도시에 공헌한다는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난민문제는 자국의 보호를 받지 못하거나 보호 받기를 원하지 않고 외국으로 도피하는 사람들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이다. 난민협약Convention Relating to the Status of Refugees)은 국제사회에 널리 적용되고 있는 난민에 대한 다자 조약으로 1951년 7월 제네바에서 채택되었다. 한국은 1992년 11월 11일 국회의 비준을 받아 난민협약에 가입했다. 한국에도 접수된 난민 신청 건수가 1만건에 이르렀다. 앞으로 한국이 수용해야 할 난민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히브리서 13장 2절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ilbo.net)

카테고리: 신문칼럼 | 댓글 남기기

시-아무 것도 모른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알고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끌려왔는지도 알고 있다

학교 운동장에서 노랑개들이 컹컹거리고
검은개들이 방아쇠에 바람을 집어넣고
이름 석 자 지워진 사람들이
그 앞에서 쓰러져간 사실을
누구는 알고 있고 누구는 모른다

노랑개 검은개들은 육지 것들이라는
사실 하나만은 알고 있다

아무 것도 모른다
소총 외에도 기관총과 수류탄, 헬기기관총 실탄 등
대전차로켓탄인 육십 육 미리 로우 오십 발을 쐈고
티엔티 폭약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아무 것도 모른다
항공대에 이십 미리 벌컨 실탄도 지급했다는 사실을  
공중에 투입된 계엄군도 있었다는 사실을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과
누구는 알고 있다는 사실을
옴팡밭 구덩이에 파묻은 사실만은 알고 있다

제사상을 차치고 향을 피우며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사연을 엮어본다

카테고리: | 댓글 남기기

시-빈 무덤

빈 무덤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런데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아버지 시신이 사라졌다
시신은 원래 무덤에 없었다
시신을 감싸고 있던 수의만이
허공에 흩어져있었다
시신이 없었으니 울음도 묻혔다

빈 무덤이 가족들을 불러 모은다
아버지의 시신이 무덤에 없었지만
누군가가 시신을 훔쳐간 것도 아니지만
하늬바람이 곡을 읊조리기 시작하고
눈밭에 흩어진 아버지의 영혼을 불러모아
허공을 나는 까마귀에게 전할 뿐이다

옛 가족들이 몰래 봉분을 하였다기에
눈물의 흔적을 볼 수 없었다기에
빈 무덤에 벌초를 하며 남은 가족들은
아버지의 심장과 핏줄에 손을 넣어본다
오늘따라 까마귀가 쉰 목소리로 울어댄다

-우리의 예수님은 그저 무기력하게 죽어간 그런 사형수가 아니라 죽음을 물리치신 영광의 메시아이십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무덤을 스스로 열고 일어나셔서 우리와 함께 머무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카테고리: | 댓글 남기기

김정은의 인민복

도널드 트럼프를 만나러 싱가포르 카펠라 호텔로 들어선 김정은의 검은색 인민복(人民服)이 화제다.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習近平)을 만날 때도 인민복을 입었으며, 문재인 대통령과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할 때도 인민복을 입고 등장했다. ‘김정은의 인민복’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 일가에 대한 충성의 의미로 배지를 착용하도록 되어 있으나,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의 얼굴이 들어간 배지를 착용하지 않았다. 김정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남복정상회담 당시 회색 인민복과 갈색 점퍼를 입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 때는 짙은 베이지색 야전 점퍼를 입었다. 인민복은 사회주의국가 지도자의 ‘상징’이며, 원래 중국의 혁명성을 상징한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천안문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했을 당시 입었던 바로 그 옷이다. 그 이후 중국에선 ‘마오 슈트(Maosuit)’라고 불렸다. 원래 인민복은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 이후 쑨원(1866~1925, 孫文)이 입던 것과 같은 모양의 중국의 국민복(國民服)이다. 쑨원은 인민복을 즐겨 입었다. 쑨원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양안(兩岸)과 홍콩, 마카오 그리고 더 나아가 중국계 싱가포르인 등 해외의 화교들까지 존경하는 인물이다. 정치 사상면에서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주장하며 오권분립(五權分立)을 주장했다. 삼민은 민권(民權)․민주(民主)․민생(民生)을 말한다. 인민복의 웃옷에는 주머니가 넷이 있고 옷깃을 세웠다. 1929년에 중국국민당에서 국가의 공식 예복으로 지정될 정도로 그 상징성이 크다. 인민복의 4개 주머니는 각각 예(禮)·의(義)·염(廉)·치(恥)를 뜻한다. 또 윗옷에 달린 5개의 단추는 입법(立法)·사법(司法)·행정(行政)·감찰(監察)·고시(考試)의 오권분립을 의미한다. 김정은이 인민복을 선택한 건 ‘사회주의 국가’라는 북한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중국식 인민복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중국의 전통적인 인민복은 무늬가 없는 민자 형태다. 반면 김정은이 입고 나온 북한식 인민복은 옅은 세로줄이 새겨진 스트라이프 형태다. 이른바 북한식 개량 인민복이다. 한 대북 전문가는 “중국식이 아닌 북한식”이라며 “북한의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일종의 상징성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이 인민복을 입은 이유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이야기가 들린다. “정체성을 보여준다.” “사회주의 국가고 미국과는 다른 체제다.” 김정은이 사회주의 국가를 고수하겠다는 정체성이 제일 큰 것 같다. 북한 주민들이 보기에도 김정은이 우리를 대표해서 인민복을 입었구나 하는 선전적 효과도 있을 것이다. 김정은의 인민복은 빨간 넥타이에 흰색 와이셔츠, 다크한 네이비 컬러의 정장을 착용한 도널드 트럼프의 패션과 사뭇 대조됐다. 트럼프가 빨간 넥타이를 맨 것에 대한 분석도 가지작색이다. 빨간 넥타이는 상대를 압도하겠다는 전략이 숨어있는 패션으로, ‘파워 타이(Power tie)’로 불린다. 타고난 승부사적 기질은 평소 즐겨 매는 강렬한 색상의 붉은색 넥타이 차림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트럼프의 빨간 넥타이는 대통령 취임식, 미중 정상회담 등 중요한 자리마다 같은 차림으로 등장했다. 전통적으로 북한의 최고 지도자는 정치적 노림수에 강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강단과 배포를 보여 왔다. 김정은 위원장이 인민복을 그대로 입고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눈 것은 북한의 물러설 수 없는 의지를 반영하는 상징이 될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카테고리: 글 전체보기 | 댓글 남기기

“관광객이 무섭다”

제주일보|승인2018.06.19

[제주일보] 제주가 무섭다. 관광객이 무섭다. 중국인이 무섭다. 제주가 관광도시로 발전하면서 양적 성장을 이뤘지만 도민과 관광객의 불만도 높아지고 있다. 많은 인파 때문에 경치를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구경하기 바쁘다는 불평이 쏟아지고 있다. 기상 악화로 공항이 폐쇄되면 관광객들은 꼼짝없이 갇히고 공항 대기실은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관광객 증가의 폐해는 도민들에게 돌아간다. 교통 정체 및 사고 증가, 생태계 파괴, 환경오염, 쓰레기, 상하수도 과부하 등 주민들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관광객들이 도시를 점령하고 삶을 침범해 주민들이 쫓겨나는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 현상까지 발생한다. 투어리스티피케이션은 투어(Tour)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합성어이다. 관광객들이 주거지역을 침범하여 발생하는 문제이다. 거주민들이 이주하는 현상까지 발생할 수 있다. 생활이 불편해지자 주민들이 관광 명소가 되는 것을 저지하는 외국의 사례도 있다.
영국 BBC방송은 최근 ‘너무 많은 관광객 때문에 씨름하고 있는 세계 관광지 5곳’ 중 하나로 제주를 꼽았다. 외국인 강력범죄가 기승을 부린다. 불법체류가 다반사이며 살인, 인질강도, 절도, 뺑소니, 집단 폭행 등이 부지기수다. 성매매 같은 음성적인 사건까지 확대된다.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던 신자가 중국인이 휘두른 흉기에 찔린 사례도 있었다. ‘묻지마 피습’이다.
무사증 제도로 전 세계 180개 국가를 대상으로 입도를 허락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제주가 다른 지역으로 빠져 나가는 거점이 되고 있다.
제주도의 관광·개발 정책을 돌아보고 앞으로 지향해야 할 새로운 관광·발전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점이다. 여기에는 제2공항 계획도 포함된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어느 후보 하나 관광객 과밀형상을 심도 있게 제기하지 않았으며, 유권자 역시 관심 밖 일이었다.
외국의 예를 들어보자. 외신에 따르면 필리핀 휴양지 보라카이섬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필리핀 정부가 잠정 폐쇄를 결정한 것. 필리핀 대통령은 보리카이섬을 ‘시궁창’이라고 표현했다. “정말로 썩은 냄새가 난다”는 그의 말이 모든 걸 대변해주는 듯하다.
인도네시아 발리도 ‘쓰레기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수백명의 자원봉사자들을 동원해 해변의 페트병 쓰레기 등을 수거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태국도 영화 ‘비치’로 유명한 피피레의 마야만을 폐쇄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폭발적으로 가세하면서 ‘관광 오염’을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른 것이 주요 요인으로 지목됐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주민들이 관광객들을 막아서는 시위에 나섰다는 뉴스도 나왔다. 배 위에 올라 입항하는 크루즈를 막고 ‘우리는 당신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피켓과 깃발을 흔들었다. 스페인 마요르카섬에서는 시민 3000여 명이 ‘관광객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피켓을 들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한 시민활동가가 관광버스를 공격했다.
유럽의 관광지들은 ‘숙박세’ 명목으로 여행객에게 돈을 받는다. “관광객 때문에 삶이 파괴되고 있다”는 주민들의 시위도 이어진다. 남의 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여러분, 제발 도와주세요! 관광객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제발 오지 말아주세요.(Please support us not coming to our village. We’re suffering from tourists)”
특히 제주지역 관광객 수용 한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다시 한 번 체크해 볼 필요가 있다. 지역주민이 숨을 쉴 수 있는 분위가가 먼저이다. 그 결과를 토대로 주권자로서 도민들이 제주의 백년대계 차원에서 도정시책을 수정할 것을 강력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관광객 유치는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해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적정선이 필요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엄격한 관광객 총량 제한 등 ‘섬’이라는 환경에 맞는 선제 대응이 필요하다. 관광객 수를 관리하기 위한 ‘관광객 카운팅 시스템’의 도입은 어떨까.

카테고리: 글 전체보기 | 댓글 한 개

‘소확행’과 제주도

요즘 ‘소확행(小確幸)’이 뜨고 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는 말이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트렌드 코리아 2018’이 제시해 한국에도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라이프 트렌드이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 트렌드와도 궤를 같이 한다. 경제성장이 정체하면서 남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행복을 추구하는 트렌드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소확행’은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에세이 ‘랑겔한스섬의 오후(1986)’에서 처음 쓰인 말이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과 같이 바쁜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즐거움이다.
평범한 행복, 소소한 가치에 집중하는 행복 키워드가 대중의 공감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귀여운 소품, 반려동물, 맛있는 음식, 오후의 커피 한잔. 이용자들이 공유하는 ‘소확행’은 대다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다. 화려한 휴가 사진으로 도배된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 게시물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소확행’과 더불어 제주도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여행객들이 제주도에 와서 힘들게 돌아다니기보다는 여유롭게 추억을 남기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제주도 여행에서는 바쁘게 움직이지 않아도 힐링하는 기분으로 상쾌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제주도는 계획 하나 세우지 않고도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일까? 제주도는 곳곳에 가득한 명소와 즐길 거리, 먹거리가 여행에는 최적의 장소일까? 최근에는 제주도 한 달 살기, 힐링여행 등 독특한 여행 테마로 즐기는 이들도 늘었다.
거창하지 않아도 소소한 쉼으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는 ‘소확행’ 트렌드 덕분이다.
제주지역에서는 이에 발맞추어 소확행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제주시건강가정지원센터는 6월 초부터 1인 가구 프로젝트 ‘소확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으로 진행되는 1인 가구 프로그램이며 반찬 만들기·정리수납 강의 등으로 구성돼 있다.
JTBC ‘효리네 민박’이나 tvN ‘숲 속의 작은 집’은 일상의 소중함을 조명한 대표적인 힐링 프로그램이다. 바로 ‘소확행’ 프로그램이다. 자연 속에서 미니멀 라이프를 즐기며 스스로 행복을 찾는다는 콘셉트이다. 그러나 ‘숲 속의 작은 집’은 시청률이 떨어진다는 소문이다.
이처럼 ‘소확행’으로 제주가 뜨고 있지만, 염려하는 주민들도 많다. 유입 인구까지 늘어나면서 도시와 시골의 구분이 없어졌고, 땅과 아파트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관광객은 꺼져라(Tourists, Go Away!)” “당신은 지금 이 곳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You Are Destroying This Area)” ‘사랑의 도시’ 베니스처럼 거칠고 낯선 시위의 풍경과 메시지들이 제주도에서 타전될 지 아무도 모른다.
제주시내 중심가로 나가면 밀리는 차량으로 피곤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관광객 숫자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증가 속도이다. 준비가 안 된 상태로 관광객이 갑자기 늘면서 쓰레기 문제 같은 오버투어리즘(과잉관광)의 전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베니스의 주민들은 관광객들이 남기고 가는 소음과 쓰레기와 혼잡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베니스의 골목골목 관광을 반대하는 행진이 이어졌다. 제주의 마을을, 도시를, 삶을 잃지 않기 위해 제주도민은 무엇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청정 제주도가 쓰레기 섬이 되고 있다.

카테고리: 글 전체보기 | 댓글 남기기

시인 한문용의 ‘엄니’

[제주일보] ‘최후의 아픔 딛고/ 언제나 그랬냐는 듯 다시 쇠무릎을 폈습니다./ 기 쇠한 지 한참 되었어도/ 여요(餘饒)로운 당신 눈빛은/ 평상 일상이셨습니다// 관절이 두 번 끊어지는 아픔에도/ 홀로 서기 여섯 해/ 귀가 닫혀도/ 엄니 가슴은 별처럼 뜨겁습니다’

-시인 한문용의 ‘엄니’ 중에서.

제주시인 한문용(韓文鏞)의 사모곡은 절절하다. 왜 시인의 어머니는 하늘에 송송 떠있는 별을 세고만 있을까?

그의 시집 ‘서우봉 노래’를 다시 펴들고 어머니를 ‘엄니’로 부르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시인의 어머니 현명석(玄明錫) 여사는 남편 한재진(韓在珍) 선생과 사별하자 아들을 홀로 키웠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으로 정뜨르비행장에서 학살당하고 시신조차 찾지 못한 상태이다.

당시 수재들이 입학한다는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현명석 여사는 올해 아흔이며, 치매로 병원을 전전하다 요양원으로 옮긴 상태다.

‘예비검속’은 범죄 방지의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 구금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요시찰인에 대한 일제 검거가 이루어졌고, 제주읍과 서귀포‧모슬포 경찰서에 검속된 자들에 대한 군 당국의 총살 집행이 이루어졌다.

제주읍‧조천면‧애월면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 집행은 두 번에 걸쳐 실시되었다.

처음 집행은 1950년 8월 4일. 제주경찰서‧주정공장 등지에 수감되어 있던 수백명을 제주항으로 끌고 가서 배에 태우고 바다 한가운데로 가서 수장시켰다. 두 번째 집행은 1950년 8월 19일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실시되었다. 주로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던 예비검속자들을 트럭에 싣고 제주비행장으로 끌고 가서 총살시켜 암매장하였다.

시인 한문용의 할아버지 한백흥(韓佰興) 역시 4․3 당시 총살당하였다.

시인의 운명과 빼닮은 ‘만다라(曼茶羅)’의 작가 김성동(金聖東)의 삶. 작가의 아버지 김봉한은 박헌영의 비선(秘線)이었으며 1948년 예비검속됐고, 1950년 역시 총살당했다.

작가의 어머니 한희전은 여성동맹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모진 고문에 옥고까지 치렀다. 작가의 단편 ‘민들레꽃반지’는 치매에 걸려 여맹위원장 시절 노래를 부르며 남편이 선물한 민들레꽃 무늬 반지를 정성껏 닦던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김성동이 네 살 때인 1948년 12월 중순 무렵.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지 석 달 후였고, 제주4․3이 일어난 지 여덟 달 만이었다. 아버지 김봉한이 아들 김성동을 보기 위해 집(충남 보령)으로 숨어들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잠복하고 있던 경찰이 아버지를 덮쳤다. 서울시경 특별경찰대 소속이었다. 우익 서북청년단원들이다. 4․3항쟁 당시 양민들을 학살한 공로로 특경대에 뽑힌 서북청년단원들의 행태와 빼닮았다. 김봉한을 비롯한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한 장소는 대전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이다.

대전형무소 역시 제주 출신 ‘1949년 군법회의’ 대상자 300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한국전쟁 이후 제주에 살아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전쟁 발발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등과 관련된 정치사상범과 일반 죄수 등 4000명 정도가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은 예외 없이 골령골에서 집단 학살당했다.

시인 한문용의 ‘엄니’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를 하고 있다.

‘도무지 하해(河海)와 같은 그 마음 헤아릴 길 없습니다/ 영욕의 세월 살았어도/ 엄니께 허무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지금/ 엄니는 하늘에 송송 떠 있는 별을/ 하나 둘 세고 있을 겁니다’

-시인 한문용의 ‘엄니’ 중에서.

카테고리: 4.3 칼럼 | 댓글 남기기

역사와 교육

[제주일보] ‘과거는 서사(序詞)이다(What is past is prologue).’

미국국립문서관의 현판의 글귀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는 그의 대표작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을 남겼다.

역사란 과거 사실을 바르게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으로 출발, 현재적 관점에서 이를 재구성하고 확립함으로써 미래를 내다보는 바른 안목을 기르는 것이라는 의미다. ‘과거가 곧 현재이자 미래’라는 이야기다.

지난달 오현중학교 정문에는 ‘우리는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하얀 광목에 검은 글씨의 현수막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오현중학교 기억주간(4월 2일~4월 20일)이란다. 현수막에는 ‘4․3 4․13 4․16 4․19’라는 옛 사건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사건 날자 밑에는 설명을 덧붙였다. 제주4․3의 아픔과 평화의 소중함-1948.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조국의 독립-1919. 세월호의 비극, 우리 모두의 아픔-2014. 4․19혁명으로 되찾은 민주주의의 가치-1960.

제주도교육청 정문 앞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4․3 70년 이후, 4․3은 교육으로 기억되고 전승될 것입니다. 4․3평화․인권교육을 씨앗으로, 항구적인 평화 생명의 가치를 피우겠습니다.’

제주도교육청은 4․3유족들을 일일명예교사로 임명하여 교단에 세우기도 하였다. 학생과 지역 사회를 잇는 얼마나 사려 깊은 교육방법인가.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잘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의 나무는 뿌리가 깊기에 그동안 수많은 굴욕과 비참한 역사가 있었어도 절대로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 뿌리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도 깊고 넓을 수 있는가와 어떻게 해서 줄기와 가지를 굵게 만들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무성한 이파리와 탐스러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를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줄기와 가지를 굵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학생들의 역할이다.

지금 자라나며 배우는 학생들은 줄기와 가지를 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꿈이 살아있어야 하며, 그래야 무성한 이파리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밑바닥에 바로 ‘역사의 기억’이 존재한다.

기억과 역사는 과거를 다루는 방법이다. 역사는 학문적으로 정립되어 인정되고 있는 데 비해, 기억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며, 직관적이라는 측면에서 주목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과 역사는 개별적인 영역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화하는 수단으로 동시에 활용된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은 ‘기억과 역사’이다.

제주4․3을 망각하지 않기 위한 것….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되풀이해서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

제주4․3의 아픔은 반드시 기억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된다. 70년 전 제주 땅의 비극이 오늘날에도 재현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제주4․3을 꼭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땅의 평화를 실현하는 길은 무엇일까.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집단학살이 있었다. 아우슈비츠수용소 정문에는 ‘아우슈비츠 학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기억의 터는 역사교육 현장이다. 4․3유적지는 바로 교육현장이다. 오현중학교는 기억을 되살리는 교육현장의 모델이다. 제주도교육청의 “4․3은 교육으로 기억되고 전승될 것입니다”라는 선언은 바른 교육 모델을 제시하는 모범 사례이다.

분단된 조국에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남북 화해의 모습이 서서히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역사와 교육의 바른 길 찾기, 이것이 새로운 출발점이다.

카테고리: 글 전체보기 | 댓글 남기기

시-독수리처럼 날았네

독수리처럼 날았네
-제주잠녀 김옥련

김 관 후

성산망에 불싸라 지미망에 불싸라
쇠비름 뿌리를 바위에 탁탁쳤다네
 한길 두길 들어가니 저승길이 오락가락
뭍의 밭과 바다 밭을 독수리처럼 날았다네
야간학교에서 조국독립의 새순을 읽었다네
해녀조합장 다구치 데이키 제주도사(濟州島司)
암 브로커들과 결탁, 구전입찰(口錢入札) 시키자
바깥물질에서 벌어들인 수익까지 뜯기자
세화리 장터에서 대표연설에 나선
애기상군 제주잠녀 김옥련
밀려오는 성난 파도 밀어제치며
일체의 지정판매를 절대 반대한다고     
계약보증금은 생산자가 보관하도록 하라고
구름떼처럼 몰려든 군중 앞에서
목 놓아 울며 소리질렀다네
하도리에서 세화리에서 소섬에서 종달리와 오조리에서
머리에는 물수건을 쓰고, 그 위에 물안경을 쓴
제주잠녀들 손에손에 정게호미와 빗창을 들고
다구치 데이키 제주도사에게 항거했다네
일경(日警)이 김옥련을 검거하고
고문대 위에 꽁꽁 동여매고
코 속으로 물을 쏟아 부어 졸도시켰다네
옥살이 중에도 몰래 기밀문서를 전달하고
한겨울에 찬물고문을 받기도 했다네
 제주잠녀 김옥련이 독수리처럼 날아
깊디깊은 푸른 물속을 드나들며  
성산망에 불싸라 지미망에 불싸라
지금도 쇠비름 뿌리를 바위에 탁탁 치고 있다네

카테고리: | 댓글 남기기

‘목포의 눈물’

[제주일보]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때/ 부두의 새악시 아롱져진 옷자락/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목포의 눈물’은 문일석(文一石) 작사, 손목인(孫牧人) 작곡, 이난영(李蘭影) 노래의 대중가요이다. 1935년 초 ‘조선일보’에서 향토노래 현상모집을 실시했고, 거기서 당선된 가사에 곡을 붙였다.
‘목포’하면 제주사람들은 ‘목포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목포는 제주4․3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1947년 3․1절 28주년 기념식 집회과정에서 벌어진 6명의 총격 사망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에 뒤이은 3․10 총파업에 가담한 자 가운데 주동자는 기소되어 처음으로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징역살이를 하였다.
어디 그 뿐인가? 1948년 무장대의 습격을 시작으로 제주4․3은 경찰과 무장대의 상호 무력 충돌로 격화되어 갔다. ‘군법회의 명령’에 나와 있는 1659명의 대상자들은 제주도에서 사살된 249명을 제외하고 각각 목포·마포·대구·인천·전주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1948~1949년도 목포교도소 출소좌익수명단’에는 제주 출신 군법회의 재판 관련 재소자가 다수 확인되었다. 목포형무소 집단탈옥사건은 1949년 9월 14일에 발생하여 일주일 뒤 진정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변혁세력들에 대한 무리한 탄압의 결과였다. 1949년 9월 14일 오후 5시 재소자 400여 명이 목포형무소 내 무기를 습격하고 탈옥하였다. 사고 당시 수용인원은 넘쳤으며, 그래서 탈옥 폭동에 참가한 죄수는 무기를 들었으며 그 후 군경 합동 공격으로 탈옥수는 즉시 진압되고 일부는 완전히 탈옥하기도 하였다.
당시 미국대사관이 본국 국무성에 보낸 자료에도 “대부분의 탈옥자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으로 복역 중에 있던 정치범들”이라고 하였다.
목포형무소에는 600명 가량의 제주 출신 재소자가 있었다. 사건 당일 출소한 제주 출신 재소자는 총 51명에 달한다는 기록도 있다. 왜 그들은 무기를 들고 탈옥해야만 했을까. 해방 직후 목포형무소의 수용인원은 300~400명 정도였는데, 탈옥사건이 날 당시에 1000여 명 이상이 수감되어 실질적으로 통제가 불가능하고 수용소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그곳에는 좌·우익의 갈등으로 여수순천사건이나 제주4․3항쟁 같은 사건으로 사상범으로 취급받은 사람들도 대거 수감되어 있었다. 수용인원이 정원보다 초과되어 공장 등을 감방으로 전용하였다. 악질 장기수용자를 원칙적으로 목포에는 수용 않기로 되어있는데 이들을 너무 많이 수용하였다. 군인으로서 당시 숙청을 당한 자들이 다수 수용되었다. 기동대원이 부족했다.
그 후 탈옥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목포경찰의 발표에 의하면 탈옥수 413명 중 체포 85명, 사살 298명, 자수자 10명, 미체포 23명, 총기 회수 10정이라는 사실이다.
체포되지 않은 사람도 20여 명이나 되었다. 목포형무소 집단탈옥사건은 우선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주4․3항쟁이나 여순사건의 경우처럼 광복 이후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사상적 갈등에서 민족적 비극이라 볼 수 있다.
‘목포의 눈물’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가/ 못 오는 임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카테고리: 신문칼럼 | 댓글 남기기

‘화순 1946’

제주일보|승인2018.03.18

[제주일보] 4․3 이전의 4․3. 해방 직후인 1946년 전남 화순탄광사건을 다룬 뮤지컬 ‘화순 1946’이 제주 무대에 섰다. 주민들이 해방1주년 기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광주로 향하던 중 너릿재 터널에서 군대와 경찰을 앞세운 미군정의 발포로 학살당한 사건을 소재로 한 ‘역사 팩션(fact+piction) 드라마’이다. 바로 4․3 이전의 4․3이다. 너릿재는 광주와 화순 사이에 있는 국도 제22호선과 국도 제29호선 상에 존재하는 고개이다. 지금은 너릿재 터널이 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때 처형된 농민군들이 널(관)을 끌고 왔다하여 널재에서 변화하여 너릿재가 되었다. 1980년대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에는 화순과 광주를 오가던 시민군들이 공수부대의 총격으로 사망한 역사적으로 가슴 아픈 사건을 겪은 곳이기도 하다. 너릿재 옛길은 1971년 너릿재 터널이 개통되면서 현재는 도로로 이용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왜 화순탄광사건인가?
절망의 끝에서도 일어서고자 했던, 내일은 오리라 믿었던 사람들. 인간의 고결함과 존엄에 대한 이야기. 바로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바로 4·3의 축소판이다. 역사적 배경도 서로 맞닿아 있다. 4·3이 미군정 하에서 발생했던, 제주만의 아픔이 아닌 대한민국 역사의 사건이자 아픔이라면 화순탄광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뮤지컬 ‘화순 1946’ 공연에서는 제주4·3의 아픔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애기동백꽃의 노래’도 흘러나와 역사적 사건의 기억을 공유하였다.
 ‘산에산에 하얗게 눈이 내리면/ 들판에 붉게붉게 꽃이 핀다네/ 님 마중 나갔던 계집아이가/ 타다타다 붉은 꽃 되었다더라// 님그리던 마음도 봄꽃이 되어/ 하얗게 님의 품에 안기었구나/ 우리누이 같은 꽃 애기동백꽃/ 봄이 오면 푸르게 태어나거라// 붉은 애기 동백꽃 붉은 진달래/ 다 같은 우리나라 곱디고운 꽃/ 남이나 북이나 동이나 서나/ 한 핏줄 한 겨레 싸우지 마라// 애기동백꽃 지면 겨울이 가고/ 봄이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울긋불긋 단풍에 가을도 가면/ 애기동백 꽃 피는 겨울이 온다’
 화순탄광은 일본인 소유의 탄광들이었다. 일본인들이 철수하며 탄광이 무주공산(無主空山)과 다름없게 되자 광부들이 자체적으로 탄광 시설을 관리했다. 광부 1700여 명이 일했다. 가족까지 포함하면 5000여 명이 의존해 생활했다. 미군정이 운영권을 인수한 1945년 11월 화순 탄광에서는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全國評議會)가 조직됐다.
1946년 광복1주년 기념식. 기념식에 참석하려던 광부들이 미군정과 충돌하였다. 10월 30일부터 파업을 시작했다. 파업사유는 식량 배급과 임금의 인상이었다. 미군 방첩대와 경찰은 노동조합을 급습했다. 지도부 5명이 체포됐으나 호송 과정에서 이를 제지하는 광부들과 유혈 충돌을 빚었다. 이후 대규모 검거가 있었다. 이러한 파업 진압으로 노동조합은 결집력을 잃었고 11월에 파업은 일단락됐다.
미군정은 우익과 합세해 1947년 7월 우익 성향을 가진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약칭 노총)의 산하 노조가 화순 탄광에 공식 출범했다. 화순 탄광에서 식량난과 저임금 등의 고질적인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 남아 노총 주도의 탄광에서도 1960년대까지 파업이 계속되었다
뮤지컬 ‘화순 1946’은 2015년 9월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서 초연(初演)되었다. 이어 2016년 9월에도 광화문 광장에서 폭발했다. 초연 이후 ‘한국의 레미제라블’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배우들이 내뿜는 눈빛과 노래는 그야말로 터질 듯한 집단적 에너지를 뿜어내며 무대를 가득 채웠다. 소름 돋는 합창과 함께 장대한 서사를 타고 흐르고 마침내 배우와 관객을 하나로 끓어오르게 했다.

카테고리: 글 전체보기 | 댓글 남기기

역사의 변절자

[제주일보] 변절자(變節者)는 절개나 지조를 지키지 않고 그 마음을 바꾼 사람이다. 배반자(背反者)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turncoat’이다.
중세유럽의 군대에서는 특정 유니폼을 입었는데, 적에게 투항하기 위해서는 유니폼의 색을 바꿔야 했다. 또 다른 표현으로 ‘renegade’가 있다. 자신이 믿던 종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말한다.
콩나물은 콩을 이용하여 싹을 키우는 것이고, 숙주나물은 녹두에 싹이 나서 키운 것이다.
왜 녹두로 키운 것은 녹두나물이 아니라 숙주나물이라 부를까? 녹두나물은 쉽게 변질되고 상한다.
신숙주(申叔舟)는 조선 초기에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의 이름이 녹두나물을 대신한 것은 그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세조가 찬탈해 간 단종의 왕위를 복위시키려는 과정에서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옛 주인에게 등을 돌리고 뒤늦게 편입된 사람일수록 곧잘 강경론을 펴고 옛 주인에게 가혹하고 새 주인에게 더욱 충직해진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지사를 가장 가혹하게 고문했던 것도 일경(日警)의 앞장이 노릇을 했던 한국인 형사들이다.
일제하에서 관료를 지냈던 사람들이 자유당 치하에서는 이승만에게 거의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다.
‘친일인명사전(親日人名辭典)’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 4389명의 친일 행각과 광복 전후의 행적을 담은 사전이다.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신체적·물리적·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친일반민족행위와 부일협력행위를 한 인물을 수록한 사전이다.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된 제주 출신으로는 최원순(崔元淳)을 비롯, 강명옥(康明玉)·고권삼(高權三)·박종훈(朴鍾壎)·차윤홍(車潤弘)·홍양명(洪陽明)·고문규(高文奎)·양봉화(梁鳳華)·오건일(吳健一)·임관호(任琯鎬)·임두욱(任斗旭) 등이다.
면면을 살펴보면 제주현대사에 이름을 올린 인물들도 눈에 띄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시인 양성우는 박정희 군사독재를 비판한 ‘겨울공화국’을 낭독하여 교직에서 파면되었다. 1988년 평화민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기 위하여 한나라당에 입당하였고,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캠프에 참여하여 당선을 도왔다. 반유신 투사에서 한나라당 입당과 이명박 지지로 돌아선 것이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열사의 사망 이후의 대치정국에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로 그들의 죽음을 비난해 ‘변절 논란’에 휩싸인 시인 김지하. 그는 2009년 촛불 시위 반대와 노무현 대통령 추모객들을 비난하는 행보를 보였으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지지한 데 이어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리영희 교수를 매도했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반년 뒤인 2003년 9월호 ‘현대문학’에서 박근혜의 수필을 가리켜 “몽테뉴와 베이컨 수필의 전통을 잇는(…)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진주와도 같다”고 극찬한 문학평론가 이태동. 그는 박근혜의 에세이는 우리들의 삶에 등불이 되는 아포리즘들이 가득한,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진주와도 같다고 평가했다.
“박근혜 수필은 그가 경험했던 처절한 삶에 대한 느낌을 지극히 절제된 언어로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부조리한 삶의 현실과 죽음에 관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의 코드를 탐색해서 읽어내는 인문학적인 지적 작업에 깊이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성이 있는 울림으로 다가온다.”

카테고리: 글 전체보기 | 댓글 남기기

토지는 누구의 것인가

[제주일보] 토지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국회와 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개헌 관련 여론조사에서 토지공개념을 도입해야 한다는 응답률이 61.8%를 기록했다.
공개념 도입은 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국회 연설에서 주장하였고, 노태우 정부 시절에도 진지하게 논의한 적이 있다. 토지가 노동의 성과물을 빼앗아가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토지공개념이다.
구약성서 시대 유대인들은 토지는 하느님의 것이고, 인간은 단지 토지를 이용하고 보전할 책임을 위임받았을 뿐이라고 보았다. 토지는 공동체의 것이며, 각자는 그것을 빌려 쓰는 것이라는 사고다. 성경은 토지를 하나님의 것으로 규정하고 매매를 금지하고 있다(레 25:23). 또 사람들이 임의로 분배 받은 토지의 경계표를 이동할 수 없도록(신 19:14), 소유에 대한 욕심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지주들은 일하지 않고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혹은 절약하지 않고도 잠자는 가운데도 더 부유해진다. 전 사회의 노력으로부터 발생하는 토지가치의 증가분은 사회에 귀속되어야 하며 소유권을 갖고 있는 개인에게 귀속되어서는 안 된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토지로 발생하는 소득불평등이 창의와 자유를 억압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토지는 인류 역사 그 자체다. 인간은 토지에서 지낼 곳과 먹을 것, 입을 것 등을 얻는다.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피를 흘리는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토지가 다른 물건과 같은 재화로 여겨졌고, 부를 축적하고 늘리는 용도로 쓰게 됐다.
조선시대 토지관은 왕토(王土)사상이다. 토지도 하늘 아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왕의 것이라는 뜻이다. 왕은 토지에서 세금을 걷을 권리를 신하에게 주어 정권을 유지했다. 모든 땅은 소유권을 위임받은 지주도 자신의 땅이라 생각했으며, 이 땅에서 소작하는 농민들도 자기 땅이라고 생각했다. 토지는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토지관이다.
대만은 ‘평균지권(平均地權)’을 헌법에 규정하여 토지공개념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평균지권은 토지는 전 국민 소유이므로 국민이 골고루 보유하고, 특정인이 과도하게 소유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스페인 헌법은 투기적인 토지사용에 규제가 필요하다고 규정했다. 공공기관에 의한 도시계획은 사회적으로 이익을 주는 행위로 이해하고 이에 따른 편익을 각 지역사회가 향유할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은 토지 등 부동산의 공평한 분배를 강조하고 있다.
한국의 토지가격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전체 토지가격은 국내총생산(GDP)의 4.2배에 이른다. 투기를 막기 위한 제도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분별하게 개발한 것이 더 큰 원인이다.
한국의 토지는 국민의 1%가 절반을 갖고 있다. 재산세 등 보유세는 외국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러고도 토지투기가 근절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세계 최고 수준의 땅값은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도 무관치 않다. 젊은이들이 왜 결혼을 하지 않는가? ‘소득이 낮아서’ ‘집이 마련되지 않아서’ 등은 결국 높은 부동산 가격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 높은 땅값은 생활비와 생산비용을 압박해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린다.
“토지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를 실현하기 위한 이론적, 실천적 작업을 계속할 필요가 있다.
토지공개념은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권을 적절히 제한해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것이다.
반대론자들은 토지공개념이 반시장적이라고도 주장한다. 부동산 투기는 사회의 전반적인 주거비·임대료 상승으로 이어진다. 한정된 토지를 소수의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면 절대 다수는 최소한의 공간도 점유하지 못하게 된다.

카테고리: 글 전체보기 | 댓글 남기기

흉상과 기념비

[제주일보] 흉상(胸像·bust)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상반신을 다룬 조상(彫像)이다. 조각으로는 고대 그리스도와 로마의 대리석 초상조각에서 많은 예를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이래 널리 행해져 왔으며, 현재는 점토로 제작한 후 청동으로 주조되는 경우가 많다.

1997년 7월 건국대통령이승만기념사업회는 국회개원 50주년을 맞이하여 국회의사당 입구에 제헌국회의장을 지낸 이승만(李承晩)의 흉상건립을 추진하다가 무산되었다. 그의 의회정치 행로가 반민족적이고 반의회적인 행태로 일관했으며, 친일세력과 손잡고 정권을 휘둘렀다는 역사학자들의 반발을 무마시킬 수 없었다.

2000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 있는 박정희(朴政熙) 흉상을 기습적으로 철거했다. 당시 그들은 준비해간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를 흉상에 씌우고 오랏줄을 흉상 목에 감아 끌어내렸다. 흉상이 떨어지면서 콧등이 뭉개졌다. 2016년 12월에도 흉상이 훼손되었다. 얼굴에는 빨간색 스프레이가 뿌려졌고, 군복 깃 소장 계급장 좌우 그리고 군복 중앙 부분이 빨간색으로 칠해졌다. 코는 망치로 맞은 듯 흠집이 나 있었다. 좌대엔 ‘철거하라’는 빨간 글씨가 적혔다.

최근 서울시 강북구가 조병옥(趙炳玉) 미중앙군정청 경무부장의 흉상 건립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는 성명을 내고 “강북구청은 4·3학살 책임자 조병옥 흉상 건립계획을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41년 8월 25일 임전대책협의회가 열린 부민관 강당. 죽음으로써 일본에 보답한다는 결의 아래 친일 거두들과 자리를 함께 한 조병옥. 자못 비장한 어조로 청중을 제압하였다. “조선민중은 아무 요구도 없이 무조건으로 협동하여 전승해서 동아공영권(東亞共榮圈) 건설에 매진함으로써 위정자에게 안심을 줄 것입니다… 조선민중으로 하여금 제국신민으로서 국책에 절대 협력할 것, 그리하여 위정자로 하여금 안심케 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국이 해방되자 조병옥은 미군정 수뇌들과 호흡이 맞고 반공정신이 강하여 경무부장에 취임했다.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린 관덕정 주변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군중들이 몰려오자 일제히 발포가 시작되었다.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3월 10일부터 민·관 총파업이 시작됐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제주도로 내려왔고, 3·1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하였다. 그의 안전대책이란 다른 지방의 응원경찰을 대거 투입하는 것이었다. 전남‧전북 경찰청에서 222명, 경기 경찰 99명이 파견되었다. 제주에 들어온 충남·북 경찰 100명을 합치면 응원경찰은 421명으로 불어났다.

특히 조병옥은 4·3이 발발하자 강경진압을 주장해 수많은 양민 학살을 야기한 책임자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온 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버려야 한다’는 발언을 해 공분을 사기도 했다. 도민 3만명의 희생을 낳은 4·3학살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 4·3의 책임이 있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부역자일 뿐이다.

기념비(記念碑·monument)는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우는 비석을 말한다. 제주시 충혼묘지 입구에는 9연대장 박진경(朴珍景) 추도비가 있다.

‘故陸軍大領密陽朴公珍景追悼碑’(고육군대령밀양박공진경추도비). 4․3당시 초강경 토벌을 통해 도민의 가슴에 상처를 남긴 일본군 출신. 4·3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김익렬(金益烈)을 밀어내고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며 딘(William F. Dean) 미군정장관의 명을 받아 강경 토벌작전을 감행한 장본인. 추도비 앞부분에 누군가 돌로 찍어 놓은 자국이 남아있다. 4·3가해자를 철거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지금처럼 보존하는 대신 구체적인 설명문을 세워 바르게 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카테고리: 글 전체보기 | 댓글 남기기

선생님 영면하소서

[제주일보] 어찌 그리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습니까? 어찌 그리 급하게 떠날 수 있습니까? 어찌 그리 할 일을 산처럼 쌓아두고 삶을 거둘 수 있습니까? 고향 제주를 그리 흠모하면서 어찌 고향산천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까? 재일 탐라연구회 김민주(金民柱) 선생님이 별세하였습니다. 향년 아흔 하나입니다.

선생님은 필자를 늘 격려해주었고, 늘 바른 역사로 인도했던 분입니다. 2006년 3월이라 기억됩니다. 탐라연구회가 발간하는 ‘濟州島’에 필자의 단편소설 ‘두 노인’이 일본어로 번역․소개되었습니다. 며칠 후, 일본에서 서신이 도착하였고 선생님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 자기의 삶과 빼닮았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후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선생님이 고향 제주를 찾았을 때 상면의 기쁨도 나누었습니다. 상면 장소는 4․3유족회 사무실이었습니다. 선생님이 필자를 만나러 사무실까지 먼 걸음을 한 것입니다. 어렵게 귀국하고 고향에서 찾아갈 곳도 많은데 필자와의 만남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1960년대 초 제주4·3연구의 ‘고전’ ‘濟州島人民들의 4·3武裝鬪爭史’를 김봉현(金奉鉉) 선생님과 공저(共著)한 분입니다. 물론 ‘鬪爭史’는 좌익적 시각에 편향돼 있지만 ‘팩트’만을 놓고 볼 때는 매우 사실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김봉현 선생님은 일본 관서대학과 명치대학에서 역사학과 지리학을 공부한 분입니다. 해방공간에서 오현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1960년에 제주도 개국설화부터 일제 말기까지를 꿰뚫는 ‘濟州島歷史誌’를 출판해 향토사 연구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988년은 4․3의 불씨를 당긴 기억해야 할 해입니다. 4․3사건 40주년을 맞은 그 해 4월 3일 여의도 여성백년회관에서는 제주사회문제협의회 주최로, 일본 도쿄YMCA에서는 탐라연구회 주최로 4․3세미나가 열렸습니다. 바로 4·3진상규명 논의의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탐라연구회는 1985년 1월 29일 도쿄에서 선생님을 중심으로 결성했습니다. 그 후 1991년 제주도문화상 지역사회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2004년 제주도연구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석한 선생님은 ‘북한과 제주4·3사건’을 주제로 강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조천중학원 학생으로 1948년 7월 입산, 1949년 4월 붙잡혀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한국전쟁 때 옥문이 열리자 일본으로 피신했습니다. 조천중학원은 1946년 3월 설립하여 200여 명이 재학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15세에서 20대 후반이며. 야간에는 초등학교 교사, 면사무소 직원들까지도 강의를 받았습니다. 교사들 대부분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교사와 학생들이 수시로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경찰의 감시도 심했습니다.

학생들 또한 교사들을 돕거나 직접 활동하여 항쟁 와중에 대부분 죽었습니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심부름을 시키면 중산간의 산길을 혼자 다니다가 잡혀서 고문당하고 고문 과정에서 죽기도 하였습니다. 모든 제반사항은 논의를 거친 후에 결정되었고 학생회장도 ‘자치위원장’으로 불렀습니다.

1948년 11월 4일 무장대가 습격하여 조천면사무소를 불태웠습니다. 조천중학원은 건물만 방화된 것이 아니라 학적부도 모두 불에 탔습니다. 5·10선거 후에는 교사와 학생들이 대부분 피신했으며 이후 ‘빨갱이 학교’라 하여 폐원 조치했습니다. 사실 1947년 3·1절 시위 및 3·10 총파업 이후 미군정과 서북청년회의 탄압을 받아 수업이 어려웠습니다.

선생님이 운명했다는 소식은 너무 큰 충격입니다. 책을 발간할 때 마다 뜨거운 격려를 주셨고, 그래서 필자는 용기를 내어 뚜벅뚜벅 여기까지 걸어왔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은 떠났지만 4․3을 바로 정립하겠는 의지에 따라 후배들이 나설 때입니다.

카테고리: 글 전체보기 | 댓글 한 개

그리운 사람들

그리운 사람들
-함덕해변에서

김관후

기다리지 않아도 될까
그 아픈 세월 꼭꼭 누르고 떠났는데
질질 끌려 저 파도에 묻혔는데
목 놓아 부르지 않아도 될까

숨 헐떡이는 소리,
숨 끊어지는 소리,
힘겨워 숨 돌릴 수 없었구나

서우봉 몬주기알에서 숨져간 님들
해변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될까

살 길 찾아 떠났다는데
부산 저갈치에서 헐떡였다는데
남대문시장에서 좌판을 깔았다는데
밀항선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는데

남은 식솔들 떠난 사람들 부르며
그 사태에 끌려간 동네어른들 위하여
큰 심방 불러 굿판이나 벌여볼까

기다리지 않아도 될까
목 놓아 이름 석자
부르지 않아도 될까

저 모래밭에 하나 둘 불러모으자
두 눈 모으고,
시비 걸고,
써움질하며
크게 된 놈,
어려운 놈,
잘난 놈,
못난 놈
한 올 한 올 그물로 엮어내어

저 해변에 흩어진 울음소리도 하나 둘
저 멸치 떼와 함께 긁어모아
거친 손,
뜨거운 손 맞잡고 버티면서
제상에 숟가락 꽂고 향 피우고
긴 곡소리 얽고 얽어
그 사연 묻혀두자

카테고리: | 댓글 남기기

‘숙의 민주주의’가 희망이다

[제주일보] 우리는 과거 민주주의에 절망하면서 살아왔다.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는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탈원전 공론화라는 ‘숙의 민주주의(熟議民主主義·deliberation democracy)’가 실험되면서 한국만큼의 민주주의 국가도 드물다는 생각으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숙의 민주주의’는 ‘심의 민주주의(審議民主主義·iscursive democracy)’라고도 불린다. 깊이 생각하여 충분히 의논한다는 숙의(熟議)가 의사결정의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 형식이다. 합의적(consensus) 의사결정과 다수결 원리의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법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요건은 단순한 투표를 넘어선 실제적인 숙의라는 점에서 민주주의 이론과 다르다.

‘숙의 민주주의’는 서구사회뿐만 아니라 중국, 몽골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좀 더 정치와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촛불혁명을 통해 시민의 직접참여에 대한 욕구가 어느 때보다 팽배한 상황에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을 계기로 ‘숙의 민주주의’는 확산될 전망이다.

오늘날 세계 전역에서 대의제 민주주의가 대다수 민중의 신뢰를 잃고 있다. 무슨 때문일까?

선거로 뽑힌 정치가들이 자기들의 개인적·정파적·계급적 이익만 챙길 뿐, 민중의 삶의 요구에는 거의 혹은 전혀 응답하지 않는 과두 금권지배 체제로 변질·타락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다양한 형태의 ‘숙의 민주주의’이다.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평범한 시민들이 ‘미니 퍼블릭(mini public)’을 구성하여 거기서 국가나 지역공동체의 중대사를 숙고와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결정하는 방법이다.

우리사회에서 ‘숙의 민주주의’를 통한 공론화가 절실한 사안은 무엇이 있을까? 지금 논의를 시작한 선거제도개혁이다. 여야의 이해충돌이나 기득권 챙기기 때문에 정치권 차원에서 제대로 논의되기 어려운 선거제도개혁을 위한 공론화 과정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탈원전 공론화로 자신감을 얻고 부동산 보유세(保有稅) 인상에도 ‘숙의 민주주의’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다. 보유세 인상 등 증세는 국민 다수의 지지가 바탕이 돼야 추진 동력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증세(增稅)의 표적은 다주택자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제주도에서도 어떠한 정책결정 방향을 결정할 때 도민과 함께 만드는 ‘숙의 민주주의’의 방식을 도입하면 어떨까? 단순한 찬․반 양론을 벗어나, 감춰진 갈등을 드러내고 침묵했던 목소리가 터져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이해 당사자들끼리 서로 무엇이 다른지, 무엇은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깊이 토론해 합의의 단서를 찾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2공항 부지 문제는 제주지역 최대 갈등 현안이다. 실제로 성산읍 5개 마을은 반대대책위를 구성, 절차적 타당성과 천연동굴 분포, 오름 절취, 기상 문제 등 부실 용역 의혹을 제기하며 원점 재검토를 요구해 왔다. 성산읍대책위 간부가 목숨을 건 단식농성을 이어가자 제2공항 문제는 전국적 이슈로 떠올랐다.

처음부터 제주도가 도민들의 참여와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통해 이견(異見)들을 좁히고 설득을 중요시하는 민주적 절차를 밟았으면 어땠을까? 다수결로 결정하기보다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으면 어땠을까? 그 본질은 바로 ‘사회적 선택(social choice)’을 위한 공론이다.

‘숙의 민주주의’는 ‘평등한 참여’와 ‘충분한 숙의’를 보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최소한 전체 국민의 모습을 간직한 축소판으로서 미니 퍼블릭을 선정한다면 보다 ‘평등한 참여’가 가능하다. 역동적인 토론과 상호작용을 통해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면 숙의는 더 깊고 넓어질 수 있다.

카테고리: 신문칼럼 | 댓글 남기기

의원세비를 줄이자

[제주일보] 요즘 일부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볼 때, 과연 그들에게 세비(歲費)를 지급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지난해 국회 본회에서 노회찬 의원은 국회의원의 세비를 절반으로 줄이고 “같이 잘 살자”는 제안을 하였다. 당시 의원들의 분위기가 너무 조용하였다.
국회의원은 면책특권(免責特權)이나 불체포특권(不逮捕特權)은 말할 것도 없고 사무실 유지비, 차량유지비, 유류비, 우편요금, 비행기나 철도이용 등 수많은 특권이 있다. 1년 세비는 1억4000만원으로 OECD 국가 중 3위이다. 사무실 유지비 및 기름값 등 경비 수천만 원도 별도로 지급된다. 하지만 보수 대비 효과는 OECD 최하위 수준으로 비교된다.
스웨덴 국회의원은 전용차나 개인비서, 그리고 면책특권과 같은 특별한 혜택이 없다. 주당 평균노동시간이 80시간-일반 노동자는 40시간으로 2배를 일한다. 일이 너무 힘들어 재선(再選)을 기피할 정도다. 주로 혼자 일한다. 개인보좌관이나 가방을 들고 따라다니는 비서관이 없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의 나라도 기사는커녕 기름값도 주지 않는다.
덴마크 국회의원은 대부분 자전거로 출퇴근하는데 우리는 검정색 대형승용차 일색 아닌가? 세계에서 가장 부패가 적은 나라, 덴마크의 국회의원은 하루 평균 12시간 일하지만 특권은 없다. 좁은 사무실에 비서는 의원 2명 당 한 명, 사무실 가구도 자비로 구입한다.
우리 국회의원의 보좌관 9명은 너무 많다. 보좌관 문제와 함께 만년 떡밥이 세비 문제이다. 인터넷 포털에 무보수 봉사직으로 해야 한다는 취지의 댓글이 범람한다. 세계 거의 모든 국가는 한국보다 보좌관 숫자가 적다. 유럽 국가는 보좌관이 없고 그냥 국회의원이 몸으로 뛰거나 필요에 따라 공동으로 사용하는 타이피스트가 존재한다.
우리 지방의회 의원들도 국회의원을 빼닮았다. 보좌관을 두어야 한다고 야단이다. 지방의원은 일제 강점기부터 있어왔지만 당시 투표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부유층 정도에 불과했다. 1952년에 지방선거가 시행되면서 이후로 주기적으로 지방의원을 뽑아왔으나 5·16으로 없어졌고 1991년에 재도입되었다.
1991년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될 때 지방의원은 무보수 명예직이었다. 하지만 회의 참석에 따른 수당이 지급되었고 일비·회의수당·회기수당으로 일컬어졌다. 2006년 월정수당으로 변경되면서 유급제가 도입되었고 2007년부터는 월정수당이 연봉제로 바뀌었다. 2008년 법정 기준액이 제정되었다. 그렇다고 로컬 거버넌스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방의원은 주민의 정치적 대표다. 해당 자치단체의 재정·정책·사업·조례 등을 심의·의결하고 행정업무까지 감시·감독할 수 있는 지위를 누린다.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대접과 인사를 받으며 단상 위에 자리 잡고 목에 힘을 준다. 의원세비는 세금으로 지급된다.
요즘 제주도의회 의원들에게 지급되는 의정활동비가 또 인상되었다. 내년에 지급되는 의원들의 월정수당도 인상되었다. 공무원 보수 인상률을 적용한 것이다. 의정활동비를 더하면 내년에 지급되는 의정비는 연간 5701만5000원이다. 생계형 정치꾼이 돼버린 것이 아닐까.
제주도 일자리를 보면, 다른 지역에 비해 전국 최하위 수준이다. 제조업 비중이 낮고 1차·3차 산업 비중이 매우 높다보니 자영업, 일용직, 임시직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그나마 제조업도 음식료품 가공 및 화장품 제조가 대부분이며 10인 미만의 영세기업이 다수이다. 제주도는 재정이 빈약하여 국가에서 보조금을 받아 충당하고 있다. 지방의원들이 의원 활동비나 보좌관 문제부터 들고 나오니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더 어두운 꼴이다. 지방의원들은 서민들과 아픔을 함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주민들은 의정비 인상에만 혈안이 된 의원들을 다음 선거에서 반드시 솎아내야 할 것이다.

카테고리: 글 전체보기 | 댓글 한 개

시인 최길두(崔吉斗)의 역사체험과 글쓰기

“이제 강탈의 무서운 손톱은 함부로 조국의 자취를 할퀴고”
-시인 최길두(崔吉斗)의 역사체험과 글쓰기

-시인 최길두의 생애
“내 故鄕은/ 섬의 나라라/ 파-란 물결 춤을 춰 좋아라// 情든 땅/ 꿈의 나라라/ 하-얀 燈臺 깜박여서 좋아라// 밤이면, 離別의 뱃고동에/ 섬 색시에 젖는 옷고름// 떠나는 눈물 수건에 그 안타까움/ 어찌 안 좋아// 오/ 내 고향/ 동백꽃 피는 나의 고향/ 상처도 가지가지매/ 어쩌라고 안 그려요 글쎄/ 내 故鄕은/ 섬의 나라라/ 물새들 날아 좋아라/ 情든 땅/ 꿈의 나라라/ 人魚떼 울어 좋아라// 날이 새면-갯변가에/ 靑春의 피리 불던/ 사랑의/ 曲調曲調에/ 그 옛이라 안 좋은가.// 아하/ 내 故鄕/ 구름 피는 나의 故鄕/ 옛 자취도/ 갖이, 갖이매/ 어쩌라고 안 그러 글쎄”-최길두 시 「故鄕의 노래」(1938)

시인 최길두(崔吉斗)는 1917년에 제주시에서 태어나 시·소설·시나리오·무용가극 등을 두루써 온 작가로 활동하다 2002년 85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제주공립보통학교와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 구례군농회기수(農會技手)와 제주도농회기수를 지냈다. 광복 후 제주상고와 제주중 등 여러 중학교 및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7년 교편생활을 접고 작품 활동에 전념하면서, 1964년 1월 23일 시내 청춘다방에서 결성된 제주문인협회의 전신 제주문학자협회 결성에도 참가, 희곡분과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제주여자중고교 예술제 악극 원작·연출(1962) 등의 경력과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78)에서 「鼎沼岩 花煎놀이」 연출을 맡았다. 특히 1965년 연합신문 주최 희곡 공모에서 입선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시를 썼으며, 시집을 발간한 것은 광복 이후이다. 해방 후 최초의 문학 동인지인『 新生』의 주역으로 제주문학의 디딤돌 역할을 놓기도 했다. 작품집으로는 시집 無明土』(1989)․『異端의 妖花』·『老期의 流浪』·『異國의 하늘아래서』, 소설집 『海山脈』(1993)을 비롯하여, 『虛無한 사랑이여 이대로 安寧』·『悲戀의 江』, 회고록 『黃昏의 길목에서』(1994), 시나리오 작품집『雪花』· 『비련(悲戀)의 강(江)』·『 素心草』 등이 있고, 무용가극으로 『봄의 頌歌』·『봄을 기다리는 順伊의 집』 등이 있다. 특히 『海山脈』은 이재수난과 제주4․3을 연결 짓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해방 전후, 제주사의 한복판에 서서 생생한 삶을 체험하며, 그 혼란의 역사를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나갔던 제주문학의 증인이다. 일제강점기에 비밀독서회(秘密讀書會)와 청진단파사건(淸津短波事件)을 경험했고, 해방 후에는 ‘4·3’으로 거센 폭풍에 휘말리기도 했다. 1947년의 3·1절기념 시위사건에 연루(連累)되어 포고령 위반죄로 5,000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제주4·3사건이 발발한 후인 1948년 11월 제주공립농업학교에 감금되었다. 특히 최길두는 제주보통공립학교 동기동창들을 품속에 간직하고 살았다. 노령의 동창회에 참석하여, 한국사회와 제주사회를 흔들던 박충훈· 강재량 ·고범준․ 문종후 ·박진후· 백창운· 김방훈 등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의 장남인 가수 최진은 아남레코드 전속가수와 배호 가요제본부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칠성로를 소재로 옛 추억을 표현한 서정성 짙은 음악「칠성로이야기」로 데뷔했으며, 그가 부른 「해송」 역시 제주바다의 모진 바람을 이겨내는 강한 소나무를 인생의 등불에 비유한 노래다.

-비밀독서회와 청진단파사건

“-너는/ 妖邪스런 魔女에 사랑받는 慘酷의 獸柵/ -醜惡을 좋아하는 구대기의 凱歌/ -冷血動物의 個性있는 世界/ -人爲的인 地獄을 자랑하는 文明의 허울 좋은 鐵面皮의 化粧師/ -世紀의 冒險的인 자랑/ -無錢家의 住家/ 故鄕 잃은 猛虎떼의 우리./ 그리고 無慙한 屠殺場// 오 너희들의 反省없는/ 人面獸心의 얼굴이여/ 또 만나리라/ 나의 巨强한 思想의 鐵馬는// 너희들의 腐敗한/ 鄕愁가 그립단다/ (제주도 淸津事件에서 獨房)”-최길두의 시 「無題 5-監獄」(1943)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으로 어용(御用)은 가중되고, 젊은 학도들은 징병이란 이름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전쟁의 암운은 거칠기만 하였고, 전방은 농무(濃霧)로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콩나물이 시루 속에서 자라듯이 제주도에서 항일청년들의 모임인 비밀독서회가 결성이 되고, 바로 그 중심에 최길두가 있었다. 40년대 초부터 뜻있는 지식인청년들이 비밀독서회를 조직, 일어로 번역된 세계사상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조선이 나아갈 길에 대해 토론했다. 최길두는 회장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비밀독서회는 일주일에 두 번 모였다. 최길두의 집과 광인청년으로 통하는 이상희(李相熙)의 집이었다. 이상희는 머리는 깎지 않고 고슴도치 모양이며, 신발은 짚신에다 너덜한 한복차림이었다. 일경의 눈을 피해 광인으로 분장하고 징용을 피하였다. 회원들은 우리 역사책과 세계사상전집, 세계문학전집을 비밀리에 돌려서 읽었다. 모이는 날에는 우애를 도모하고, 전시(戰時)를 논하고, 독립을 기원하며, 읽은 책을 토론했다. 비밀독서회는 처음 7명이 결속된 모임이었다. 최길두를 비롯, 이상희․ 김운제(金雲濟)· 김귀석(金貴錫)· 정기준 ․조수인․ 윤한구(尹漢九)등. 한 달에 한 번은 산천단에서 회합을 열었다. 니이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도취하기도 하였다. 이상희는 한국전쟁 당시 바다로 끌려가 아깝게도 운명하였다. “지금의 전황(戰況)은 어떤가? 정말 조선민족이 독립될 수 있을까? 피 끓는 청년으로써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그들의 공통된 과제가 되었다. 당시 일본군대본영(大本營)은 그들의 허위선전을 통하여, 그들의 패배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황군(皇軍)의 대승리를 조선민중에게 선전하고 있었다. 이들 독서회원들은 조선민족의 독립을 갈구하며 이를 위한 국제성세의 상황인식을 위해 비밀리에 단파수신라디오를 구해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李承晩)의 「2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했다. 독서회의 멤버가운데 김운제와 김귀석은 일경(日警)의 감시가 심해지자 모의소령(謀議蘇領) 이 가까운 청진으로 가서 불라디보스토크로의 탈출을 시도하다가 함경북도 변경마을에 서 일본군국경수비대에 체포된다. 당시 청진일보와 경기일보는「不逆朝鮮人一抹打盡」이라는 기사로 자세하게 보도한다. 이것이 바로 청진단파사건이다. 두 사람은 12월 추운 겨울 청진감옥에 수감이 되었다. 모진 고문이 이어지고 이들은 제주도 친구들을 불기 시작했다. 청진경찰서 특별수사반은 급기야 명단을 가지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가장 주목했던 것은 누구의 지도와 사상적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가 바로 최길두였다. 최길두는 형사대의 습격을 받고 수감되었다. 최길두가 징용을 피하고자 제주보통공립학교 위촉강사로 몸담고 있을 때였다. 청진단파사건은 태풍이었다. 감방은 초만원이었다. 1945년 1월 3일 관련자 12명이 검거된다. 최길두를 비롯 이상희 고영수(高榮洙)․ 김용수(金瑢洙)․ 윤한구(尹漢求)․ 오기윤(吳基允)․고창위(高昌位)․ 추성환 ․이기형․ 이호택 ․고영일․ 박창재(朴昌宰) 등이다. 최길두는 사상범으로 취조가 시작되었다. “너는 조선문학을 한다면서…..”. “너의 지도를 톡톡히 받았어!”, “너의 사상적 지도와 존경하는 선배라 그랬어!”, “소련으로 넘어가려는 계획과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등의 끔직한 취조였다. 물론 고문도 이어졌다. 감방의 하늘은 절망의 하늘이며, 얼굴을 비춰줄 별 하나가 없었다. 목이 타도 목을 추겨줄 물 한 방울이 없었다. 주위는 철책이며 감시하는 호랑이나 사자뿐이다.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가족들이다. 형사는 한쪽에 두 주전자를 들고 와서 책상 위로 두면서 “어서 먹어라”고 윽박질렀다. 감방의 식사는 콩을 넣은 꽁보리밥이며, 찬은 해초에 소금을 뿌린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문학! 그래도 사상? 떠벌이지 마! 졸장부 사나이…….” 최길두는 결국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연행된 윤한구는 청진감옥에서 옥사했으며, 김귀석은 행방은 아직까지 알 바가 없다. 최길두는 「故苑」이란 제목의 시에서 「불러 부질없는 무궁(無窮)의 국토(國土)는/ 悍惡한 倭族人의 鐵槍에 못박혀/ 어두움의 獄處로 못박혀 맡아/ 반만년(半萬年)의 겁이 깃들은 故苑은/ 그 따사로운 모습이 서노니!」라고 그 아픔을 노래했다. 「故苑」은 사적123호인 창경궁(昌慶宮)을 의미한다. 민족을 사랑하고 항일정신에 눈을 뜬 시인의 독서와 시작업은 오직 민족해방을 염원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나는 解放이 되면서 聽診 외에 별 罪없이 숱한 獄苦를 치렀다. 解放은 다시없는 기쁨이 아니고 한겨레가 다투는 괴로움이었다. 8․15의 解放은 民族의 自由와 기쁨을 안겨주었지만…….단합(團合)을 잃고 右往左往거리는 방황이었다.” -최길두의 자서전 『황혼의 길목에서』81쪽

– 『新生』 탄생과 최길두의 활약

“나/ 벗님의 무덤가에/ 찾아 울어보것만/ 피어 香기는 것 말없는 들꽃/ 限없이 그려 불러 痛哭해도/ 그대 잠자코 먼 곳으로 잠들어라// 彌勒과도 같이/ 碑銘의 차돌 밑에/ 그대 무어라 말이 없어도/ 생각건대 人間도 슬기러워/ 그 이름도 아름다운 < 詩人!>이었던 것을…….// 이제/ 웃음도 가고/ 노래도 가고/ 피고 진 薔薇처럼 그대는 덧없어도// 그대 남긴 寶玉의 노래/ 永遠한 샘인 양/ 끊임이 없을 것을…….// 자거라/ 平安히 黃泉의 꽃그늘에/ 다시 못 올 碑銘이여/ 고-히 자거라(詩人 金以玉을 추도하며)-최길두의 시 「詩人의 碑銘」(1994)

‘제주현대문학 前史’는 김문준(金文準)·김명식(金明植)·김지원(金志遠)·신동식(申東植)·강관순·김이옥(金二玉)·김병헌(金秉憲)·최길두·이영복(李永福)·오본독언(吳本(篤彦)·이시형(李蓍珩) 등 작가중심이다. 1940년대에는 시인 김이옥(金二玉)이 『흐르는 情緖』라는 미간행 시집을 남겼다. 일본어로 쓰인 김이옥의 시는 당대 제주인들의 정서가 잘 반영되어 있다. 최길두는 1944년 11월 일본에 거주하던 김이옥이 고향을 방문했을 때, 그의 시 47편을 옮겨 적어 유실을 막았고 해방 후에는 그를 추도하는 글을 썼다. 김이옥의 작품은「이여도」·「海女·1」·「海女·2」·「슬픈 海女여」·「나의 노스탈쟈여」·「먼 他鄕에서」·「訪故哀賦」·「옛城에 過去를 묻지 말아라」·「나는 詩人」·「사랑스런 나의 집」등이 있다. 특히 최길두는 일제징용을 피하여 전남 장흥군 대덕면 신월리 매형산판(妹兄山坂)에서 숨어살면서 쓴 한편의 사랑시 「山사람들」과, 그 후 매형과 서울로 올라가 돈화문과 창경원을 구경하고, 두 편의 민족시(民族詩)를 썼다. 「敦化門」과 「古苑」이 바로 그 작품이다.

“……(전략)……어두운/ 이 터로/ 잠들은 넋이여!/ 그들은 大韓의 老翁이 아니냐/ 부엉이의 울음 속에 꿈꾸는 애들이여/ 너희들은 檀君의 아들이 아니냐/ -싸늘한 문벼개에 來日을 꿈꾸는/ 暗黑한 밤거리로/ 大韓의 魂아// 아무리 歷史는 强者의 손아귀에/ 그 形體를 바뀐다 할지라도/ 여기에 소름 치는 비꼬움의 現實이/ 어찌 詩人의/ 가슴을 잠재우랴!…..(후략)….” -최길두의 시 「敦化門」중에서 .(1942)

“……(전략)…..너의 憂鬱은 이곳에 깊노라/ 나의 괴로움은 여기에 미치노라!/ 오!/ 故苑이여!/ 눈물의 昌慶圓아!/ 멍이 든 너의 悲憤을 말하려마….// 이제/ 强奪의/ 무서운 손톱은/ 함부로 祖國의 자취를 할퀴고/ 一國의 애달픈 運命의 사슬을/ 暗鬱한 살 窓으로 말하는가 보나니/ 터저라고 불러보는/ 白衣民의 國土는/ -다만 鐵柵 안에 짐승만이 우는가….(후략)”- 최길두의 시 「古苑」중에서.(1942)

해방이 되자 국내외 각처에서 활동하다가 귀향한 뜻있는 지식인들이 모여 1946년 1월 시사 문제와 문학을 위주로 하는 제주도 최초의 잡지『新生』을 간행했다. 그 중심에 시인 최길두가 있었다. 발행인은 高日昊(필명 高石志)이고, 이영구(李永福의 옛이름)․이시형(李蓍珩)․김병헌(金秉憲) 등이 동인으로 참여했다.『新生』편집 후기에 “우리 고향에서 나온 시인 金二玉 군의 시집 『흐르는 情緖』의 文獻을 이 新生誌面을 통하여 소개된 것이 퍽이나 질겁다.” 하고 있다. 본문에는 “三十을 終幕으로 不幸히도 夭折해 버린” 그에 대한 시평과 추도의 글도 실려 있다. 최길두가 보관하고 있던 시인 김이옥의 시작노트와 제목과 일부 시를 번역해서 실었다.『新生』은 제주에서 처음으로 발간된 종합 교양지이지만, 잡지 간행 주체에 문학인들이 다수 포함됐고, 잡지 구성에서도 문학 작품의 비중이 절반을 넘었다. 신국판 형태로 발간되었다. 내용은 크게 시사적인 것(논설, 논단 등)과 문학적인 것(시, 소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석지의 「情神革命」과 이일선(李一鮮)의「宗敎社會思潮」, 김종륜(金琮崙)의 「道義의 擁護」등은 완전 독립 쟁취에 대한 기대와 과제 등이 주를 이룬다. 특히 최길두는 이영복과 함께 동인지를 발간하면서 제주문학의 기반을 닦았다. 문학 작품으로는 김이옥·최길두·이영복의 작품들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최길두는 최일(崔一)이란 필명(筆名)으로 시 「廢墟」·「哀貧의 農者」를, KT라는 필명으로「詩人鄕」 등 3편을 발표하고, ‘鄕土詩人 金二玉을 追悼하여’라는 글도 썼다.

“…..(전략)……貧困과 虛弱-飢餓의 埋葬으로 주책없는 눈물을 뿌리치며간 다우 비우시려오! 그래도 여브오/ -주녀의 악몽에서 눈을 뜨구려/ -중책의 의자를 바라보구려/ 떠리진 갈옷과 메마른 골상 북데기의 잠자리 악취의 냄새/ 머리에서 발까지 경멸의 농부들의 주럭난 자태를 그려보구려. 엇떠한 고옥으로 술푼의형제 게우…..(후략)”-최길두의 시「哀貧의 農者」중에서

이영복의 작품으로는 「追憶」·「悔淚」·「憂鬱」 등의 시와 「夜路」라는 소설이 있다. 특히 「夜路」는 해방 직후 제주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그 외에 김병헌(金秉憲)의 「바다의 思索」·김필규(金必圭)의 「田園에서」· 김덕양(金德孃)의 「輓歌」를 소개하고 있다. 김이옥의 유고시 「노스타루쟈」·「生活」·「墓標」등 일본어 작품을 최길두가 부분번역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영복은 1940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제1외국어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년 3개월 만에 중퇴하고 노동자가 되었다. 『靑年作家』 1942년 7월호에 일본어 소설 「畑堂任」을 발표하였다. 이영복은 1943년 8월 오사카에서 체포되어 강제 귀국 당하였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濟州民報』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제주4·3 후에 문학 활동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이시형은 1944년 『國民文學』 8월호에 「이여도」가, 1945년 『國民文學』 2월호에 「新任敎師」가 추천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광복 후 제주농업중학교 교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1947년에 3·1절기념 시위사건이 발발하고, 이시형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투쟁 방침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한국전쟁 때 예비 검속되어 수장(水葬)된 것으로 알려졌다.
『新生』은 해방 직후 제주 지역의 문화적 역량을 자율적으로 결집한 최초의 성과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다만 『新生』의 주역들이 4·3사건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고 지속적인 활동을 하지 못해 전쟁기에 형성되는 문단 등에서 제외되었다.

“조급히 흐르는 물살에 바위를 두드리면/ 어두운 램프에 떠올라 보인다/ 검은 안색에/ 눈시울 적시고 있는 슬픈 해녀여/ 생명 짧은 처녀이기에/ 멋 부리는 심정에서 사온 치마를/ 벽에 그을린 채 바다에서 지새노라면/ 나오누나 가느다라이 휘파람 한숨”-김이옥의 시「슬픈 海女여」

“해녀야/ 깨어 있느냐// 春三月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바다에/ 비바리 裸身을 내던져// 영차 영차 가는 곳은 어드메냐// 바다 속/ 전복 소라의 나라에/ 주인이사 기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검은 몸뚱이의 풍만함이 애처롭구나”-김이옥의 시 「海女 1」
-제주4․3에 연루되다

“평화의 섬 이 땅에/ 怪毒스런 벌레떼가 侵食한 이래/ 이들의 생활은 어둠으로 방황했다/ 무서리가 까린 虛荒한 들판에서/ < 삶>의 싹이 꺾인 그들에게는/ 다시 캄캄한 虛空 저 멀리/ 彗星처럼 손짓하는 세계가 있다”-최길두의 시 「無明土」에서(1947)

해방이후 잠시 평온했던 제주문단은 제주4․3으로 또 한 차례 거센 폭풍에 휘말리게 된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소리 없이 죽어가던 시절, 문인들이라고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최길두는 계엄사령부에 의해 자신의 시집 『無明土』가 몰수당하고 연행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해방 이후 일제치하의 암울했던 시절을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그린 시집 『無明土』는 그 제목 때문에 대한민국이 ‘어두운 땅’으로 표현했다는 오해를 받았다. 『新生』에 참여한 최길두․ 이시형․ 이일선 등 제주출신 문인들은 제주4․3에도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제주에서 최초로 결성된 정당조직은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제주도(島)위원회였다. 1946년 2월에는 통일전선체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 民族戰線)을 결성, 제1차 미‧소 공위에 공동으로 대처하기도 하였다. 제주민전 결성식은 1947년 2월 23일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일구락부에서 있었다. 의장단으로 남로당 제주도위원장 안세훈, 승려인 이일선(李一鮮), 제주중 교장 현경호(玄景昊) 등 3명이 추대되었다.『新生』 창간호에 「宗敎社會思潮」를 기고한 이일선이 바로 의장단에 보였다. 이날 제주민전 결성식에서 명예의장으로 스탈린‧박헌영‧김일성(金日成)‧허헌‧김원봉(金元鳳)‧유영준(劉英俊)이 추대되었다.
“< 詩>는 나의 연인! < 生>의 동반자! 광상(狂想)과 명상(暝想)으로 환상시(幻想詩)의 동굴을 찾아 헤매면서……험준한 늪(沼)을 건너면서 오늘을 걸어왔던 인생의 나날…..노기(老氣)에 이르러 1989년 장편시집 『無名土』를 폈으며 젊은 날의 꿈을 거닐었던 『異端의 妖花』도 펴냈던 것이다.”- 최길두의 회고록 『黃昏의 길목에서』 51쪽

최길두는 그의 회고록에서 ‘幻想詩’의 동굴을 찾아 헤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광상(狂想)과 명상(暝想)으로 덧칠한 시인의 환상시는 과연 어떤 시인가? 광상은 미치는 것이며, 명상은 어두운 것이다. 환상(幻想, fantasy)은 정신분석학 용어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 따르면 과거의 트라우마(trauma)적인 사건을 무의식적 욕망에 따라 현재에 소환하여 재구성할 때 시각적으로 무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자크 라캉(Jacgues Lacan)은 환상이 무의식의 욕망을 시각적으로 무대화하는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정식화를 받아들이고, 동시에 환상의 보호 기능을 강조하였다. 왜 최길두에게 트라우마적인 사건이 소환됐을까? 그것은 바로 강압적인 일제 말 비밀독서회 사건으로 빚어진 그 어두운 밑바닥 체험이며, 현대의 최대 비극인 제주4·3사건 당시 소위 유지사건으로 감금된 상태에서 인간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체험 때문이다.
최길두가 그의 회고록 『黃昏의 길목에서』에서 “나는 3個餘月의 죽음의 獨房에서 목숨을 支撑하고 풀려나왔다.”고 고백했듯이, 조국의 해방공간도 시인에게는 풀어나갈 수 없는 막힌 공간이며 또한 한 많은 세월이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해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미군정은 4월 5일 아침 전남 경찰 약 100명을 응원대로 편성해 급파하는 동시에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시령부를 설치하였다. 5월 3일 딘(William F. Dean) 군정장관은 무장대를 총공격해 사건을 단시일 내에 해결하라고 경비대총사령부에 명령했다. 1948년 11월 중순께, 대규모의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됐다.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미군은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벌어진 강경진압작전 때에는 서너 살 난 어린이부터 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총살당했기 때문이다. 1948년 가을경 제9연대 본부가 주둔하고 있는 제주농업학교에는 ‘농업학교 수용소에 갇히지 않으면 유명인사가 아니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제주도의 법조‧행정‧교육‧언론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감금돼 있었다. 여기에 시인 최길두도 감금돼 있었다.
농업학교 수용소 수감자 중에는 최원순(崔元淳, 제주지법 법원장), 김방순(金邦順, 제주지검 검사), 현경호(玄景昊, 초대 제주중 교장‧민전 공동의장), 이관석(李琯石, 제주도 학무과장‧제주중 교장), 고칠종(高七鍾, 농업학교 교사), 박경훈(朴景勳, 제주신보 사장‧전 도지사‧민전 공동의장 역임), 신두방(申斗玤, 제주신보사 전무), 김호진(金昊辰, 제주신보사 편집국장), 현인하(玄仁廈, 경향신문 기자 겸 제주지사장), 이상희(李尙熹, 서울신문 제주지사장), 강재량(康才良, 신한공사 주정공장장), 양문필(梁文弼, 신한공사 제주농장장), 오창흔(吳昶昕, 의사) 배두봉(裵斗鳳, 항일운동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 천막을 쳐서 마련한 수용소는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대기소와 같았다. 최길두는 수용소 안에서 그들의 만행(蠻行)을 예언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라고 몰아 죽였다’거나 ‘여러 여성을 겁탈했다’는 내용도 시인에게는 너무나 처절하게 들렸다. 그는 “탁성록(卓星祿)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예쁜 여자들만 여러 번 바꿔가며 살았는데 나중에 제주를 떠나게 되자 동거하던 여인을 사라봉에서 죽이고 갔다. 그는 사형권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증언했다.

“허물어진 저 城가 비추는 달은/ 그 옛날에 그 모습 세로웁고나/ 老松그늘 욱어진 芳草 언덕에/ 홀로앉아 옛 노래 불러 보나니// 아름다운 그 時節 그대 목소리/ 아스라이 속삭여 들려오것만/ 따사로운 그 님의 모습은 가고/ 나 홀-로 님의 노래 불러 봄이여// 對答 없이 지새는 달 그림자는/ 아련히도 옛 懷抱 잠겨있는데/ 그 어디에 님의 모습 더듬어 봐도/ 속절없이 달빛만 흘러가누나(1949년)”-최길두의 시「荒城의 追憶」

-어째서 『異端의 沃花』일까

“저만치 落陽이 보인다. 나이 七十七世. .櫓저어 온 航海를 돌아보면 < 삶>이 바다위에 떠오르는 懷古가 아련하다. 一草花꽃 피는 봄이 있었고….草綠 무르익는 여름 있는가 하면…… 紅葉이 물드는 가을도 있었다. 어느 사이 해 저무는 아득한 水平線에 낙양이 보인다.// 오 땀으로 노저어온 人生의 滄浪위에 수없이 떠 흐르는 過去의 殘骸! 嬰兒의 따사로운 亂房이 있었고, 靑春이 불붙는 사람도 있었으며-友情과 貪慾과 情熱을 쫓아 이로 하여금 全紙로 나가 사운 悔恨의 孱骨들………..이제 젊은 날에 썼던 이삭의 < 詩>를 모아 < 落穗幽室>의 시집을 펴낸다. 그 이름도 多情한 『異端의 沃化』, 『怒氣의 流)』. 50年도 지나간 오늘 落照를 기념하는 열매인가 보다. 東京으로 떠나면서……..(제주시 都坪洞) 自宅에서)” –< 落穗有實>의 머리말.

‘< 落穗有實>의 머리말’ 글은 1994년 국학자료원에서 발간한 시인 최길두의 시집 『異端의 妖花)』의 서문(序文)이다. 여기에서 최길두는 1937년부터 작품을 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37년에 「絶望」을 비롯하여 「鄕土의 꿈이」·「無心」·「懷鄕」·「懺悔」 등을 1938년에 「思想)」·「故鄕의 노래」·「暮景)」등을, 1939년에 「平生」· 哀戀」·「四行詩」 등을 내놓고 있다. 최길두는 정통 가톨릭 신자이다. 그의 시집 제목에 차용된 ‘이단(異端, hersy)’은 가톨릭에서 정통학파나 종파에서 벗어나 다른 학설을 주장하는 일이나 교파를 말한다. 어째서 미치고 어두운 환상시의 동굴을 헤맸을까? 또 거기에 어째서 아리따운 꽃일까? 그것은 시인의 본성일 수밖에 없다. 헬라어 원어 ‘하이레시스(hairesis)’의 기본 의미는 ‘선택’(choice), ‘의견’(opinion)으로서 단순히 ‘분파’, ‘파’ 등을 일컫는 경우(행 22:22)와 ‘교회 내에서의 편당’(고전 11:19)을 뜻하는 경우, 그리고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이단’(벧후 2:1) 등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유다인들은 바올로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 있다가 “이런 놈은 아예 없애 버려라. 죽일 놈이다”하고 소리 질렀다.”-신약성서 사도행전 11:22.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진실한 사람들이 사람들이 드러나려면 분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신약성서 고린토전서 11:19.

“전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거친 예언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도 거짓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몰래 끌어 들일 뿐만 아니라 피를 흘리셔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주인을 부인하며 자기 자신들의 멸망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신약성서 베드로후서 2:1.
오늘날 ‘이단’이란 표현은 거의 대부분 복음에서 떠나 다른 복음을 좇거나 교회 내에서 당파심을 불러 일으켜 교회의 분란을 조성하는 경우에 국한해서 사용된다. 초대교회 시대 기독교는 당시의 정통 종교라 할 수 있는 유대교에 대해 ‘이단’으로 불려졌다. 세속의 조직에서도 정통적 신조에 대해 이설(異說)을 내세워 파당을 짓는 자를 가리켜 이단이라고 부르며, 한 동아리가 아니라고 보는 것을 ‘이단시(異端視)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시인 최길두는 어째서 굳이 ‘異端’이란 말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하필 ‘ 沃花’일까?

“눈물이여/ 외로움이여// 이브. 아담과 같은 괴로움이여// 사탄의 慾望으로/ 聖架의 眞理를 저버린 헛된 바람// 熱望은 深淵斷崖에서 墮落하고/ 曙光은 거문 獄門을 닫았다// 暗黑한 곳이다/ 울어도 부르짖어도/ 갈 바 없는 獄處다// 이 門을 두들기고/ 저 門을 두들기고/ 오는 것/ 불덩이, 배암, 악귀// 오/ 한줄기 太陽은 어디 있는지/ 地獄으로 헤매는/ 나의 絶望을…..”-최길두의 시「絶望」(1937)

“水精보다도 맑은 純潔의 젖줄/ 사탄 뒤끓으는 地獄으로 하여금/ 人間像의 不幸한 사랑의 나그네.// 가시밭길 흙탕길 죽음길 걸었나니/ 그 이름도 아름다운/ 人類의 십자가여 ”-최길두의 시 「十字架」(1939)

카테고리: 글 전체보기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