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인 땅의 노래

詩(시)로 읽는 4․3(63)

묶인 땅의 노래

나기철

이 영어의 땅 떠날 수는 없네

내게 밥을 주고 휴식을 주는 곳

이 영어의 땅 미워할 수가 없네

허나 등 뒤에서

얼굴 바꾸며 채찍 들고

매일같이

나도 모르게 내리치고

달아나는 자여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 내리치고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 내리치는 자여

이미 내 살 떨어지고

피는 막혔어도

나 이제 떠날 수가 없네

높이 더 높이 서서 꼿꼿이

젖은 눈빛 바라봐야 하네 —————————————————————————————————- 묶인 땅에는 평화가 없다. 그래서 노래도 없다. 왜 묶인 땅이 되었을까? 시인은 이 영어(囹圄)의 땅을 떠날 수 없다고 한다. 왜 떠날 수 없는가? 밥과 휴식을 주니까 미워할 수가 없다고 한다. 투르먼 스타우트(Thurman A. Stout) 소령을 사령관으로 한 제59군정 중대는 1945년 9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를 출발 제주도에 오기까지 제주도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었다. 미군정은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공식적인 통치 기구로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정과 도민의 충돌은 1947년 3월 1일의 제28주년 3·1절 제주도 기념대회 때 시작되었다. 관덕정에서 군중들은 평화시위를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3·1절 사건과 총파업, 이어진 대량 검거 사태로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그 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의 5·10선거를 성공시키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경주했다. 미군정은 4·3사건의 진압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개입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한국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제주도 문제의 해결 방안을 건의하는 등 계속 제주도를 주시하였다. 아아, 영어의 땅임이 분명하다. 평화를 뜻하는 말로 유대교의 살롬(sālom), 그리스의 에이레네(eirēnē)와 로마의 팍스(pax), 중국의 화평(和平), 인도의 샹티(śānti)는 각각 정의, 질서, 친화와 평온, 편안한 마음을 평화의 주요소로 삼았다. 마하트마 간디 (Mohandas Karamchand Gandhi)는 평화를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황이 아니라, 정의가 구현된 상황으로 보았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목사는 “진정한 평화는 단지 긴장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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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벵디 하늘을 향해

詩(시)로 읽는 4․3(62)

만벵디 하늘을 향해

김진숙

눈물이 헤퍼지는 걸 보면 저들도 아는가 봐

영문도 알지 못하는 총질 창질이 부끄러워

먼 마을 토종개들도 옥타브를 낮추고

봄볕에도 펴지 못한 아우의 살갗처럼

부스럼 배롱나무에 붉은 살점 돋는 사월

만벵디 하늘을 향해 가지 끝을 세우네

관세음 천수로도 닿지 않은 길이 있어

나무도 사람도 돌아오지 못한 길에

육십 년 목젖이 붉은 굴뚝새를 보았네

——————————————————————- 벵듸는 넓은 들판이되 현무암 덩어리가 사방에 퍼져 있어 땅이 도드라진 자리이다. 1950년 8월 4일 도내 4개 경찰서에 예비 검속된 사람은 820여명이다. 8월 20일(음력 7월 7일) 집단 총살되거나 수장 당했다. 그날은 칠월칠석(七月七夕)이다. 은하수의 양 끝 둑에 살고 있는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이 1년에 한 번 만나는 날이 칠석이다. 너무나 사랑을 속삭이던 두 별은 옥황상제의 노여움으로 1년에 한 번 칠석 전날 밤에 은하수를 건너 만나게 된다. 이 때 까치[작(鵲)]와 까마귀[오(烏)]가 날개를 펴서 다리를 놓아주는데, 이 다리를 오작교(烏鵲橋)라 한다. 그래서 칠석날 아침에 비가 내리면 견우직녀 상봉의 눈물이요, 저녁에 비가 내리면 이별의 눈물이라 한다. ‘만벵디묘역’은 섯알오름에서 학살된 시신을 1956년 3월 30일 수습해 조성한 묘역이다. 한림면·대정면·안덕면 예비검속자는 총 344명이었고 이들 가운데 252명이 군(해병대)에 송치되었다. 유족들이 몰래 모여 칠성판, 광목, 가마니를 준비하고 새벽 2~3시께에 섯알오름으로 트럭을 몰고 가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했다. 해병대 제3대대 대원들은 경찰로부터 인계받은 예비검속자들을 섯알오름 탄약고 터로 끌고 가 총살하였다. 총살은 두 차례 이뤄졌다.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오전 5시에, 한림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됐던 사람들은 같은 날 오전 2시에 총살됐다. 총살 당일 유가족 들이 몰려들어 시신을 수습하려 했다. 군인들이 제지해 유가족들은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만벵디묘역에 묻혀있는 이들은 한림항 어업조합 창고, 무릉지서 창고에 갇혔다가 희생당한 사람들이다. 이 사건의 희생자는 62명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만벵디묘역에는 현재 46위가 안장돼 있다. 만벵디묘역의 터는 유족 중 한 명이 무상으로 내놓았다. 당시 유족들은 머리 모양이나 치아, 썩지 않고 남은 옷, 소지품 등으로 일부의 시신을 구별했다. 나머지 132구는 백조일손지묘에 모셔져 있다. “기다림에 지쳐 살과 뼈는 흙으로 돌아가고 체온은 햇볕에게 보태어 야만의 땅엔 날줄과 씨줄로 곱게 엮은 저토록 고운 벌판인데…” (강덕환 시 ‘만벵디’ 中) 제주로 불어닥친 모진 광풍에 스러진 이들에게 현실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이는 결국 ‘기다림에 지쳐 돌아간 이들’이 묻힌 땅의 푸르름이 저토록 고와서는 아닐까.(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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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명비

詩(시)로 읽는 4․3(61) 각명비

허유미

내려다보면 읽히지 않고

엎드리면 읽히는 이름들이 있다

동에서 서로 기억해야 할지

땅에서 하늘로 기억해야 할지

기억해두기 전 까마귀 울음과 함께

흩어져버릴 것 같은 이름들이 있다

봄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이름들

새벽이면 젖은 몸으로 다시 돌아와

빈 요 위에 누울 것 같은 이름들

천 개의 손으로 쓰다듬어 읽어야 할 이름들이 있다

읽고 나면 겨울이 온 육신을 누른 듯

뼈마디가 시린데도 양지로 몸을 돌릴 수 없다

물결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이름들로

4월 풍경이 휘청거린다 ——————————————————————–

역사 이래로 영웅만을 기념하던 인류는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민초들의 역사를 기념하기 시작했다. 4․3평화공원은 4․3사건으로 인한 제주도 민간인 학살과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 인권기념공원이다. 무엇보다 희생자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진 각명비(刻銘碑)와 위패(違牌), 시신을 찾지 못해 묘조차 만들지 못한 행방불명인 표석들이 직접 겪어보지 않은 역사임에도 가슴 찌르는 아픔으로 다가온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는지 각명비에 이름이 새겨진 희생자만 무려 1만 4,000여 명에 이르고 행방불명인 표석은 3,700여 개에 이른다. 실제 4·3사건으로 희생된 제주도민은 3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희생자의 이름과 성별, 연령, 사망일시 등이 새겨진 각명비를 천천히 지나다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덜컥 멈춰 서는 순간이 있다. ‘ㅇㅇㅇ의 자’라고 적힌 1세의 남자아이. 세상에 나온 지 며칠이나 됐을까. 이름도 채 가질 새 없이 그대로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그 아이가 너무나 가여워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시인 이종형도 그의 시 ‘각명비’ 마지막 연에서 “4ㆍ3 평화공원/ 각명비 위에 내려앉은 산 까마귀 한 마리가/ 검은 부리로 톡톡,/ 그 겨울의 이름들을/ 다시 새기고 있다.”고 읊고 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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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때로 우리를 토벌했습니까

詩(시)로 읽는 4․3(59)

우리는 때로 우리를 토벌했습니까

문충성

우리는 때로 우리를 토벌했습니까

우리는 때로 우리를 습격했습니까

제주 섬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산 폭도가 되고 빨갱이가 되고

산간 마을들 불탔습니까

그 섬마을 사람들 총에 맞고 죽창에 찔려 죽임을 당했습니까

비록 그 비참한 삶이 지난 세기 1940~50년대뿐이었겠습니까

제주 바다 수평선 건너온 사람들

그 사람들 핏빛 이데올로기들

10대 나의 소년은 낯선 겁에 질려 말조차 잃어버렸습니까

2연대에 내준 아아, 우리 북초등학교

관덕정 근처 칠성통 입구 헌병대 근처

아득히 봉홧불 타오르던 오름들 보입니까 그 처참한 주검들 ——————————————————————– 5․10선거를 반대하는 무장대의 기습으로 시작된 4․3사건은 1954년 9월 21일 주도자들이 진압될 때까지 토벌대에 의하여 양민들이 학살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에 봉홧불이 피어오르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행정기능이 마비되고 치안 불안상태가 지속되었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청년들은 좌익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그들이 제주도를 해방구로 선언했다. 토벌(討伐) 또는 정벌(征伐, punitive expedition)은 특정 사람 또는 세력에 대한 징벌적 원정 행위이다. 일반적으로 불복종 세력 또는 도덕적 불온세력에 대해 이루어지는 원정의 경우 토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대전에 있던 제2연대가 투입된다. 함병선(咸炳善)) 대령이 이끈 제2연대가 1948년 12월 29일 제주도로 이동한다. 무장대는 이덕구(李德九)의 지휘 하에 있었다. 함병선은 무장대를 섬멸하기 위해 1949년 1월 4일부터 항공기와 함정의 지원을 받아 토벌작전을 폈다. 함병선은 갱생원(更生院)을 설치하고 집중적인 선무(宣撫)활동도 벌였다. 1개월 사이에 1,500여 명이 산에서 내려와 갱생원으로 갔다. 2연대는 1949년 1월 13일, 남원면 의귀리에서 공비 3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제주역사는 국가와 이데올로기 역사 속에 묻혀갔다. 일제강점기, 4·3, 한국전쟁을 거치며 상처와 눈물의 뜻을 캐내야 할 것 같던 땅. 제주섬의 아이가 시인이 되어 노래한다. 죄 없는 민중들, 언제 우리가 그랬냐는 강렬한 톤. 항변하듯, 제주사람들의 상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되 노골적이지 않다. 1948년 연좌제가 부활했다. 4·3유족들은 연좌제로 무고한 희생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유족에게 대물림됐다. 군·경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사법처리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공직 진출, 취직, 승진, 사관학교 등 각종 입학시험과 해외 출입 등에 온갖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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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구

詩(시)로 읽는 4․3(60) 이덕구

김규중

무엇을 보았는가

빨갱이 제주민중은 경계하라고

관덕정 허공에 걸려놓은 모가지야

볼 수 없는 눈동자야

무엇을 보았는가

공포의 그림자 짙게 드리우는

그들의 눈망울을 메마른 땅 위에 스미는

너의 핏방울을 보았는가

가슴팍 주머니에 달랑 꽂혀 있는

숟가락아 무엇을 꿈꾸는가 —————————————————————–

이덕구(李德九)는 남로당제주도지부 군사부장이며 김달삼에 이은 제2대 인민유격대장이다. 조천읍 신촌리에서 태어났다.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리쓰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學) 경제학부 재학 중 1943년 학병으로 관동군에 입대했다. 1945년 귀향한 뒤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을 가르쳤다. 얼굴은 살짝 곰보이며 미남형이다. 늘 목소리가 컸으니 이는 미군정에 의해 구인(拘引)되어 고문을 받을 때 고막이 파열되어 귀가 멀어졌기 때문이다. 김달삼(金達三)이 1948년 8월 21일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러 간 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과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 직책을 이어받았다. 이덕구가 지휘하는 유격대 주력부대는 토벌대를 포위해 기습 공격하고 제주읍을 급습해 도청을 방화하고 지서를 습격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토벌대의 대공세 이후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무장 대원도 100여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결국 1949년 6월 경찰과 교전을 벌이다 최후를 맞았고 1949년 6월 7일 16시 화북지구 제623고지에서 경찰과 교전하다 사망하였다. 제주경찰서 화북지서 김영주 경사가 지휘하는 경찰부대는 작은가오리 부근 정글 속에서 이덕구 부대와 교전 끝에 이덕구를 사살하는 한편 그의 보신부하까지 체포하였다. 이덕구 일가족 대부분이 희생되었다. 부인 양후상과 다섯 살 아들 이진우, 두 살 딸도 죽었다. 큰형 이호구의 부인과 아들, 딸, 둘째 형 이좌구의 부인과 아들, 사촌 동생 이신구, 이성구 등도 경찰에 의해 죽었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 관덕정 앞 제주경찰서 정문 입구에 그의 시신을 걸쳐 세워 전시하였다. 북한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회에서는 그에게 국가훈장 3급을 서훈(敍勳)하였다. 북한은 애국열사능(愛國烈士陵)에 그의 묘비를 건립하였다. 이덕구 산전은 사려니 숲길을 통해 찾아들어간다.  그 샛길을 따라가다 만난 표지판, “……. 주민들은 은신하기 좋은 곳을 찾아 헤매다 더욱 산 속 깊이 들어갔으며 이곳 ‘시안모루’, ‘북받친 밭’까지 와서 은신생활을 했었다. 이곳은 피난 주민들이 떠난 1949년 봄 이후에는 무장대 사령부인 이덕구 부대가 잠시 주둔하기도 했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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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누구인가

교회는 누구인가 김관후/작가·칼럼니스트 <제주칼럼>2002년의 사스, 2009년의 신종플루, 2012년의 메르스에 이어 2019년의 코로나19까지 바이러스성 전염병은 지속적으로 발병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은 모범적인 코로나 대응국가로 등극했고 충분히 자긍심을 가져도 될 만한 국민성을 보여주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한국이 시작하여 세계가 따라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와 ‘진단키트’이다. 드라이브 스루 방식은 신천지 교회에서 슈퍼감염자가 발생한 지 불과 닷새 만에 채택된 것이다. 진단키트는 민간의 여러 업체에 의해 동시다발로 개발되었다. ‘교회(Ecclesia)’라는 말은 ‘불러 모음’을 뜻하며, ‘백성의 집회’를 말한다. 라틴 말 Ecclesia는 그리스 말의 ek-kalein ‘밖으로 부르다’에서 나왔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초기 공동체는 스스로를 ‘교회’라고 부름으로써 자신들이 그 집회의 계승자임을 자처한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온 세상에서 모으시는 백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교회는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누구인가?”, “누가 교회인가?”라고 묻는다. 또 그렇게 물어야 한다. 교회를 더 이상 교의적이고 비인격적인 제도로만 이해하지 않겠다는 진지하고도 비장한 의도이다. 우리가 “하느님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고 “하느님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과도 같다. 교회는 살아 있다. 교회는 인격이며 너와 나이고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일요일이 가까워지면 긴장감이 높아지는 곳이 바로 교회다. 주일예배는 정말 어떤 상황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인가. 일시적 예배 금지는 정말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더 나아가 종교를 탄압하는 일일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성경 구절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그동안 정부는 종교 모임 자제 요청을 해왔다. 그러나 일부 개신교는 정부 요청에도 주일 예배를 강행했다. 때문에 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천주교나 불교는 솔선수범해서 미사와 법회를 중단하고 또 불교계는 부처님 오신 날 행사도 연기하였다. 유독 일부 개신교 교회들이 예배를 강행하였다. 한국 교회는 건물 안으로 보이게 하는 예배 중심으로 성장했다. 한국교회는 교회를 건물로 본다. 원래 교회라고 하는 것은 건물이 아니고 사람이 아닌가. 우리가 현재 드리는 예배는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나서 생겨났다. 성경에서는 어디에도 일요일 오전에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는 구절이 없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일요일 날 모임을 가졌는데 그때 지역에 흩어진 성도들이 집집마다 모였던 작은 모임이 바로 교회이다. 일부 교회가 집단 예배를 강행해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것은 종교의 공공성을 망각한 우리의 수치이다. 밀접 접촉으로 인해 생길 전염 가능성이 큰 다중이용시설에 대한 이용 권고와 행정명령이 교회와 종교 탄압이라는 주장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한국 교회는 생명 존중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교회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은 대개 ‘가톨릭교회’, ‘천주교회’가 공식 명칭인데, 이는 눈에 보이는 공간의 개념인 성당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믿음을 가진 신앙 공동체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만 가톨릭 내에서도 성당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교회를 사용하기도 하니, 교회를 장소적 개념으로 사용해도 틀린 것은 아닌 것 같다. 종교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느 종교든지 신앙을 가질 수 있고 각기 신앙 가지는 걸 강제하지 말라는 것이다. 강제로 믿게 하는 게 종교 자유의 침해이다.  코로나19 위기는 그게 아니다.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가기 위해서 안전을 지켜가기 위해서 집단감염을 막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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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알오름의 봄

詩(시)로 읽는 4․3(58)

섯알오름의 봄

이애자

이념의 리트머스에 산이 온통 붉더라네

적엽을 털어내던 섯알오름 등 굽은 해송

반사적 과민반응이 내게 일침을 놓네

사삼사삼 사상사상 말꼬리가 잡혔는지

희뜩 뒤집힌 눈알로 천계를 구르다

빈 하늘 손도장 찍고 위령탑에 걸린 낮달

푸르르 칠색 춤사위 불귀의 객 달래네

저 장끼 박수무당 목울대가 붓도록

비문에 파묻은 혼백 꺼-억 꺼-억 부르네

유채꽃 송이마다 부싯돌을 그으며

알뜨르 활주로에 유도등 켜는 햇살

사월의 탑승객처럼 학살터에도 봄이 드네 —————————————————————————————————– 대정읍 상모리에 자리한 송오름[송악산] 북쪽에 알 오름 세 개가 동서로 뻗어있다. 동쪽 것을 동알오름, 서쪽 것을 섯알오름, 가운데 것을 셋알오름이라 한다. 한자로 쓸 때는 각각 동란봉(東卵峯)·중란봉(中卵峯)·서란봉(西卵峯)으로 썼다. 섯알오름 꼭대기에는 일제 강점기에 설치한 고사포 진지가 있고, 그 남쪽 기슭에는 학살터가 있다. 섯알오름 서쪽에는 일제 강점기에 이용했던 비행장터가 있고, 일제가 파서 이용했던 벙커(bunker)가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당국에서는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을 체포 구금했다. 이때 제주지구 계엄당국에서도 820명의 주민을 검속했다. 당시 모슬포 경찰서 관내 한림·한경·대정·안덕 등지에서도 374명이 검속됐는데, 이들 중 149명을 대정읍 상모리 절간 고구마 창고에 수감하였다가 195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새벽 4~5시경 집단학살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날 새벽 2시경 한림지서에 검속되었던 63명도 계엄당국에 의해 집단총살 당하였다. 섯알오름 학살터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기 때문에 암매장 구덩이도 두 개가 만들어졌다. 우선 학살 당일 소문을 들은 유족 300여명이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학살현장에 모여들어 27구 정도의 유해를 구덩이 밖으로 인양하여 수습하던 중 군 당국의 무력저지 때문에 꺼내 놓은 시신마저 다시 구덩이에 놓은 채 수습을 포기해야 했다. 6년여가 지난 1956년 3월 30일 당시 한림지서에 수감되었다가 희생된 63구의 시신이 유족들에 의해 수습되어 한림면 금악리 공동장지에 안장했다. 이 소문을 들은 모슬포지서 수감 희생자 유족들이 1956년 4월 28일 시신수습을 시도했으나 또 다시 군의 저지로 무산됐다. 하지만 유족들의 요구로 시신발굴허가를 받았고, 1956년 5월 18일 발굴을 통해 149구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중 식별이 가능한 17구의 시신을 제외한 132구는 백조일손 묘역에 안장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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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섬, 동백꽃, 지다

詩(시)로 읽는 4․3(57)

제주섬, 동백꽃, 지다

변종태

어머니는 뒤뜰의 동백나무를 잘라버렸습니다

젊은 나이에 뎅겅 죽어버린 아버지 생각에

동백꽃보다 붉은 눈물을 흘리며

동백나무의 등걸을 자르셨지요

계절은 빠르게 봄을 횡단(橫斷)하는데,

끊임없이 꽃을 떨구는 동백,

붉은 눈물을 떨구는 어머니, 동백꽃

목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먼 산 이마가 아직 허연데

망나니의 칼끝에 떨어지던 목숨,

꼭 그 빛으로 떨어져 내리던,

붉은 눈물, 붉은 슬픔을

붐이었습니다, 분명히

떨어진 동백 위로

더 붉은 동백꽃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심장 위로 덜커덕,

쓰린 바람이 훑고 지나갑니다

먼저 떨어진 동백꽃 위로

더 붉은 동백이 몸을 날렸습니다

봄이었고요

아직도 한라산 자락에 잔설(殘雪)이 남은 4월이었고요

—————————————————————— 미군정 관계자들은 제주섬을 ‘제2의 모스크바’, ‘빨치산의 섬’이라 칭하였고 무장봉기 가담자들을 ‘산사람’, ‘폭도’, ‘무장공비’, ‘적구(赤狗 붉은 개)’라고 불렀다. 초대 주한미군 고문단 단장이었던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은 서슴없이 ‘미국식 빨갱이 토벌전’을 명령하였다. 군정장관 딘(William F. Dean) 소장은 ‘살해 방화는 외지에서 온 공산당원의 소행’이라는 선전하였다. 한라산을 오르는 붉은 꽃은 붉은 열매를 남기고 떨어지고, 붉은 꽃을 따라 산으로 오른 푸른 잎은 붉은 잎이 되어 산을 내려온다. 새들이 붉은 열매를 물고 날다가 붉은 빛이 산의 피울음인 것을 안다. 산은 모두가 붉은 꽃이다. 일경(日警)은 독립운동가들 이름에 빨간 점을 찍어 놓고 ‘아카’라고 불렀다. ‘아카(あか)’는 빨갛다는 의미이다. 독립투사들도 ‘아카’ 빨갱이들이었다. 아카와 빨갱이는 둘 다 사람의 속성을 ‘빨강(赤)’이라는 색깔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빨치산은 1946년부터 시작되었다. 친일경찰의 악행과 각종 사회문제 때문에 대구에서 시작된 10월 인민항쟁은 전국을 휩쓸었다. 탄압에 맞서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조직이 ‘야산대(野山隊)’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빨갱이는 단순히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미군정과 친일파 반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에 씌우는 주술로 쓰였다. 친일파 청산을 거론해도, 외세 배격을 주장해도 ‘빨갱이’라는 굴레가 씌워져 탄압받고 죽임을 당하였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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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숯가마

詩(시)로 읽는 4․3(56) 오래된 숯가마

홍성운

참나무 한 단쯤은 등짐 지고 넘었을 거다

관음사 산길을 따라 몇 리를 가다보면

숲 그늘 아늑한 곳에

부려놓은 숯가마 하나

못 다한 이야기가 여태 남았는지

말문을 열어둔 채 가을하늘을 바라본다

숯쟁이 거무데데한 얼굴

얼핏 설핏 떠오른다

큰오색딱따구리 둥지 치는 소리야

적막강산 이 산중을 외려 위무하지만

무자년 터진 소문에

발길 모두 끊겼느니

시월상달 한라산 단풍은 그때 화기로 타는 거다

누군가를 뜨겁게 했던 내 기억은 아득하여도

한 시절 사리 머금은

그 잉걸불 오늘도 탄다 ——————————————————————————————————- 세월의 침식 작용으로 인해 그 원형이 많이 훼손됐겠지만 숲 그늘은 그 상흔을 보듬어준다. 섬 사내의 거무데데한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을진대, 시월상달 한라산의 단풍은 무자년의 화기가 남아 아직도 잉걸불로 타고 있다. 그 단풍을 보면서 시적 화자는 “누군가를 뜨겁게 했던” 기억으로 그의 얼굴에 홍조가 일고 있음을 어렵잖게 읽어낼 수 있다. 결국 이 작품은 선경후정(先景後情)의 바탕에 4․3이라는 서사가 가미되어 탄생했으며, 크게 외치지는 않지만 서경․서정․서사가 세 축을 이루는 시인의 시세계에 근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섬에 산다는 건 절반은 기다림”이라는 고백에 싱숭생숭 꽃이 핀다. “가슴에 외등을 단 섬 사내의 고집”처럼 특유의 바람과 설렘으로 난만한 제주. 시인은 그런 곳곳의 꽃과 풀과 나무의 사생활을 캐며 섬의 일생을 필사하는 중이다. 올레, 한담, 부록마을 같은 제주살이의 안팎도 살뜰히 옮겨 적고 있다. 그가 읽는 섬그늘은 깊고 푸르고 정겹고 따뜻하다. ‘무자년’의 숯가마도 그렇게 제주만의 역사를 다시 쓰는 숯가마로 거듭나고 있다. 오래된 등대 ‘도대불’과 돌아서면 솟아나는 ‘몰래물’로 삶의 목을 축이며 가는 시인의 웃음 실린 눈초리에 오늘도 제주가 다습게 실린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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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서신’

‘옥중서신’

한국의 메이저신문 중 하나는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는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를 말을 인용하여 보수단체의 광고를 연일 내보낸다. 그 광고를 유심히 본 독자는 “참으로 인용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투덜거릴 수 있겠다.
‘옥중서신(Captivity Epistles)’으로 유명한 사람은 독일의 사제였던 디트리히 본회퍼이다. 그는 반나치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히틀러 암살을 도모하였다. 그렇지만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옥중서신’은 바로 본회퍼가 당국에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의 투옥시절에 쓴 신앙고백적인 편지의 모음이다.
얼마 전 우리 역사에 옥중서신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측근 변호인을 통해 흘려보낸 글이다. 총선을 앞두고 보수 세력의 일대 결집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처음 탄핵된 대통령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성찰 대신, 현실 정치인으로서 잔광(殘光)을 뿌리면서 훗날을 기약하는 정치 행위를 재개한 것이다.
그렇지만 박근혜의 ‘옥중서신’은 사람들을 참으로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신에서 총선을 앞두고 보수야권의 단일대오를 촉구하였다. 감옥에서까지 총선 지침을 내리고 적극적으로 선거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본회퍼와 박근혜의 ‘옥중서신’은 그 결이 처음부터 달랐다. 본회퍼가 바라본 당시의 독일 상황은 어떠했는가? 마치 어떤 미친 사람이 대로로 차를 몰고 간다면 나는 목사로서 그 미친 차량에 사고를 당한 사람의 장례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나 해주는 것으로 만족하겠는가? 만일 내가 그 현장을 목격했다면 그 미친 사람으로 부터 핸들을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을 하고 있다.
박근혜의 메시지는 태극기세력을 향해 야당을 중심으로 단결하라고 주문한 것으로 읽힌다. 결국 이 세력, 저 세력을 다 합쳐 ‘도로 친박당’ ‘도로 새누리당’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냥 한풀이로 생각하고 넘어가기엔 기가 막힌 망동(妄動)이요, 아직도 자신이 감옥에 왜 갇혀 있는지 모르는 한심한 작태다. 국정농단에 이어 또 새로운 국기문란 행위이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김대중의 옥중서신과 김지하나 김남주의 옥중시(詩)는 감옥보다 더 어두운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에게 역설적 광휘를 선사해준 사례들이다. 김남주는 1979년 남민전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어 만 10년 만에 풀려나온 ‘옥중시인’의 대명사다.
옥중서신의 역사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한 번쯤 물어야 한다. 박근혜는 정의로운 싸움을 하다가 옥에 갇혔는가? 박근혜는 부당하게 박해받는 저항 인사인가? 어쨌든 옥중서신의 역사는 오명 하나를 기록하게 되었다. 박근혜의 옥중서신은 정의로운 약자도 아니고 탄압받는 소수자도 아닌, 스스로 탄핵을 불러온 실패한 정치인이 다시 지지세력 결집을 유도한 정치적 포고문이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왜 갇혔던가?
본회퍼는 나치스에 저항하고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웠다가 체포되어 사형당한 분이다. 당시 독일은 히틀러를 옹호하는 교회와 하느님 중심을 부르짖은 교회로 분열되어 있었다. 본회퍼는 후자인 ‘고백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로서 신앙의 양심을 지켜 스위스 국경을 넘는 많은 유대인에게 도움을 주었고, 2차대전의 참상과 독일 교회의 현실을 알리는 운동을 지속했다.
일련의 저항, 체포, 죽음의 과정에서 본회퍼는 자신의 생각을 ‘옥중서신’의 형태로 남겨두었는데, 인간의 한계가 곧 신(神)의 역사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믿음으로 불의에 저항했던 그는 종전을 불과 몇 달 앞두고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은 본회퍼의 길이 ‘옥중서신’에 적힌 대로 “낮아짐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기는 하지만 사랑과 용서의 길”이었음을 깊은 감동으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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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른다고 한다

詩(시)로 읽는 4․3(55)

나는 모른다고 한다
한기팔

나는 모른다고 한다
모른다고 모른다고 한다
바람 앞에서
모른다고 하고
풀잎 소리에도 모른다고 한다

그 난리 통에
나는 열 살 박이 소년(小年)
산사람들이 내려와
반장집이 어디냐 구장(區長)집이 어디냐 물으면
모른다고 하고
토벌대(討伐隊)가 와서
이 동네에는 산으로 산 사람이 없느냐고 물으면
모른다 모른다고 했다.
——————————————————————-
「나는 모른다고 한다」에 등장하는 자전적 화자는 ‘열 살 박이 소년’이다. 제주4․3의 난리 통에 무력한 소년은 어떤 질문을 받더라도 다만 모른다고 대답했을 뿐이다. 납득할 수 없는 4․3의 폭거는 소년을 점점 그 현실로부터 도망치게 만들었다. 소년은 생존하기 위해 회피의 방식을 터득하게 된다. 부당한 사회적 원인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고통을 느끼지만, 이 상황을 개인이나 집단의 힘으로 개선할 가능성이 없을 때 ‘한의 정서’가 나타난다. 이렇게 작품 속 어린 화자의 트라우마는 ‘한(恨)’의 성격을 띤다. 비록 개인에게서 발현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집단적 차원의 폭력이자 트라우마라는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희생양으로 등장하는 자전적 화자가 ‘열 살 박이 소년’이라는 데서, 그 비극은 독자들에게 더욱 무겁게 깊게 다가간다. 항가불능의 집단적 폭거는 도저히 종식시키거나 개선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이로 인해 어린 화자는 ‘모른다’라는 회피의 방식으로 그 상황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국을 위해 불가리아로 쳐들어가 무고한 민간인을 처참하게 학살한 조르바는 오그레에게 말한다. “조국이 어디든 우리 모두는 한 형제예요. 조국이 있는 한 인간은 짐승신세를 면하지 못합니다.” 조국의 이름으로 전쟁에 가담해 적국의 시민을 학살한 조르바의 깨달음은 뒤늦은 것이었으나 통렬하기 그지없다. 모든 인간은 조국보다 우선한다. 조국이 내세우며 민간인 학살을 강제하는 정부와 권력자는 죄악이다. 4.3은 겨우 시작일 뿐이다. 일제강점기와 전쟁과 민주화운동을 지나면서 국민을 향해 수없이 자행된 국가폭력들에 대한 사과는 시작도 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제대로 된’ 사법부의 사과도, 경찰의 사과도, 군대의 사과도, 국가의 사과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들에게 끌려가고, 그들에게 죽어간 사람은 그렇게나 많았는데도. 책임은 넓게, 사죄는 깊게. 그 후 용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는-결국 우리의 화두로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 국가폭력에 희생된 모든 영령의 명복을 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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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진목

詩(시)로 읽는 4․3(54)

터진목
장영춘

세상 뜬 어느 사내
회오리바람 몰고 온
닿을 듯 닿지 못한 젖은 손을 내밀며
터진목 붉은 발자국 모래알을 날린다

만선의 꿈을 한번
이룬 적 있었는가

겨우내 모래톱에 새겨 넣은 불립문자
오늘은 누구의 죄를 단죄하려 드는가
—————————————————————————————————–
터진목은 성산 앞바다 광치기 해변을 말한다. 산리는 본섬에 딸린 작은 섬이었다. 고립된 것은 아니고 썰물 때 드러나는 모래톱이 본섬을 이어줬다. 이 ‘터진 길목(터진목)’을 따라 사람들이 왕래했다. 성산리는 4·3사건 발발 초기에 무장대가 한차례 경찰지서를 습격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하면서 죽음과 통곡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서북청년단은 광복이후 월남한 사람들이 만든 평남·함북·함남·황해청년회 등 이북 출신 청년단체가 통합해 1946년 서울에서 결성된 반공우익 집단이다. 서청제주지부(단장 김재능)는 1947년 조직됐다. 이들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테러행위는 제주도민의 감정을 자극해 4·3 발발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서청특별중대는 성산초등학교를 접수해 1년간 주둔했다. 이들은 군복만 입었을 뿐 명찰과 계급장도 없었다. 군번이 없었고 군적에도 이름이 등재되지 않은 ‘군인 아닌 군인’이었다. 학교 건물에서 숙식하던 이들은 학교 옆 감자 창고에 주민들을 붙잡아 온 후 취조를 했다. 서청 특별중대의 존재는 성산면·구좌면 주민들에겐 악몽이었다. 이들은 주민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 대부분 총살했는데 그 장소가 성산리의 ‘터진목’과 ‘우뭇개동산’이었다. 온평리, 난산리, 수산리, 고성리 등 4·3 당시 희생된 성산면 관내 주민 대부분이 이곳 터진목에서 희생됐다. 이외에도 구좌면 세화, 하도, 종달리 등에서도 붙잡혀 온 주민들이 이곳에서 희생된 경우가 많았다. 현재 터진목 초입에는 성산읍4·3희생자 유족회가 2010년 11월 5일에 세운 위령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 위령비에는 추모글과 함께 성산면4·3희생자 467위의 이름이 마을별로 새겨져 있다. 한편 이곳에는 2008년 프랑스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르 클레지오(Jean Marie Gustave Le Clezio)의 ‘제주기행문’ 일부가 새겨진 빗돌이 자리해 ‘어떻게 이 아름다운 곳이 학살터로 변했는지?’ 그 연유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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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오름의 진실은

詩(시)로 읽는 4․3(53)

칠오름의 진실은
박효찬

우리 동창은 칠오름에 집이 없는데 산다
눈이 쌓인 겨울엔 간장 하나에 밥을 먹어야하고
4월이 되면 붉게 물든 고냉이술 언덕에서 함께 운다
고깔모자를 쓴 칠오름에서
신들의 축제에 지식인을 부르고 역적을 부른다
밤이 되면 먹을 것을 찾아 봉아름으로
목이 마르면 죽창으로 붉은 동백꽃을 꺾었다
무자년 4월
혈흔도 없이 사라져버린 무수한 사람들
칠오름 자연동굴 속 이야기는 흔적이 없다
———————————————————————————
오름 역시 4·3 당시 피난처였다. 토벌대가 마을로 들이닥치면 주민들은 오름으로 숨어들어갔다. 일제강점기 시절, 봉개동 일대는 일본군 96사단 예하의 293연대본부가 주둔해 있었다. 명도암 뿐만 아니라 주변 오름은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대규모 갱도진지 등 군사시설을 구축하였다. 이곳 역시 4·3 피난처가 되었다. 명도암에 연대본부가 있었기 때문에 명도암오름과 칠오름, 열안지오름, 노리오름 등에도 갱도동굴들을 볼 수 있다. 고냉이술은 칠오름의 북동쪽에 동·서쪽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곶자왈 지역이다. 고냉이술에도 진지동굴이 남아있다. 고냉이술 갱도의 길이는 70여m 정도이며 내부에 크고 작은 방 3곳과 통로 2곳이 만들어져 있다. 오름과 오름 사이, 마그마가 흐르던 용암지대였던 곶자왈은 구멍이 쑹쑹 뚫린 바위로 가득한 황무지에 다름 아니었다. 제주도를 피의 공포 속으로 내몰았던 4․3 당시 곶자왈 역시 토벌대를 피해 숨어든 주민들의 피난처가 되어주기도 했다. 거칠고 사나우며 척박했다. 오랜 세월 버려진 땅이었다. 먹을 것 귀하던 시절, 도토리며 양하(襄荷) 같은 구황식물을 아낌없이 선물했다. 고냉이술굴은 용암종유와 용암유석 등 동굴 생성물이 일부 남아 있는 용암동굴이며, 일제 강점기때 일본군이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내부를 정비하면서 일부 훼손 되었다. 역시 피난처였다. 칠오름을 칡오름이라고도 한다. 칡이 많은데서 칡오름 또는 칠오름으로 불려온다. 한자로는 칡 갈(葛) 자를 써서 갈악(葛岳)으로 표기돼 있다. 제주어로 칡은 보통 ‘칙’ 또는 ’끅‘이라고 하는데 일부지역에서는 ‘ 칠’이라고도 한다. 다른 하나는, 명도암 남쪽에서 내려오는 오름 가운데 일곱 번째 오름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자 표기도 칠봉(七峰) 또는 칠악(七岳)으로 돼 있다. 맨끝의 칠오름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열돼 있다는 풍수설이다. 조선시대 유학자 김진용(金晉鎔)의 은거지로 유서가 깊은 명도암은 봉개동에서도 2㎞쯤 올라간 중산간에 형제봉· 열안지오름·칡오름으로 둘러싸인 한갓진 마을이다. 1965년 10월 탄신 6회갑 기념으로 이숭녕(李崇寧)의 명문으로 된 ‘명도암김진용선생유허비(明道菴金晉鎔先生遺墟碑)’가 명도암오름에 건립되었다. 아늑한 분지를 이루며 병풍 구실을 하는 이들 오름들 가운데 칠오름은 마을의 북동쪽, 번영로에서 올라오는 간이 포장도로 동쪽에 길게 솔수평이 능선을 흘리고 누워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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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오등봉

詩(시)로 읽는 4․3(52)

어머님의 오등봉 양전형
누가 여기를 바람 길로 열어두었나
산과 산 사이 어둠 속
가벼워진 몸 휘휘 날았겠지
무자년 들녘 같은 어느 문전
창백한 얼굴 살며시 들었는데
어디라 고개 드느냐 너는 지금 바람이다
얼김에 한 목소리 얼얼하게 맞았겠지
날마다 오등봉 사잇길 눈감은 바람
무른 생선 같은 세월 풀어 던지며
사연은 살갑노라 둘둘 말아들고
어머니는 정처 없이 가도 가도 끝이 없네
달이 헐쭉한 밤 별 앞에 서면
아수라에 여윈 그 목숨 비추일까
늙어가는 누이의 창가에 기척이 들고
기다리던 그림자인 듯 아른거릴까
오등봉 침침한 굴 속
아직도 무자년인가봐
휑한 들녘에 시린 바람, 은결든 듯 이는 군
————————————————————————————————–
제주시 아라동의 오등마을은 옛 이름이 오드싱(오드승)이다. 이 마을에 있는 오름 이름도 오드싱오름이다. 오드싱오름은 오등마을과 정실마을의 중간, 농진청 시험장 북동쪽가까이에 가로누운 풀밭이름이다. 보통 한자명 오등봉(梧登峰)으로 불리며 옛지도에서는 오등악(吾等岳)․ 오등생악(吾等生岳), 또는 오봉악(梧鳳岳)이란 표기도 볼 수 있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두 줄기 계곡의 합수머리에 반원형으로 뚫린 거대한 암석이 커다란 아치를 이루고 있어 방선문(訪仙門)이라 일컬어진다. 조금 상류에 자리한 우선대(遇仙臺))라 불리는 큰 바위는 방선문과 함께 들렁귀의 명소로 이름나 있다. 영구춘화(瀛邱春花)는 영구십경 중의 한 명칭으로 조선시대 문인들이 십경(十景)에 각각 제(題)를 붙여지었던 것이다. 영주십경에 처음 제시를 한 것은 헌종때 제주목사(재임기간 1841~1843)로 있던 이원조(李源祚)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십경의 차례와 명칭을 엄격한 원칙에 따라 매기고 제시하여 정립한 것은 제주사람 매계(梅溪) 이한우(李漢雨)이다. 1948년 4월 3일 오드싱오름에 봉화가 올랐고 5․10선거 때는 거의 전주민이 열안지오름까지 올라 선거를 보이콧했다. 5월 8일,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하여 선거관리위원장과 대동청년단장의 가족 등을 학살한 사건은 주민들에게 충격을 몰고 왔다. 특히 6월 초순경 11연대 소속 9연대 1대대가 죽성 설새미에 주둔하게 되었다. 1948년 11월 7일 군인들은 오등리 전체 가옥에 대하여 불을 지르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피신했다. 1951년 오드싱을 중심으로 성을 쌓고 재건하면서 집단회생을 시작한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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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인-박춘옥

詩(시)로 읽는 4․3(51)

수형인-박춘옥
이창선

70여년의 한의 세월 눈물로 증언하는
한 거인 던진 한마디 4․3이 머우꽈?
죄 어신 똑똑한 사람 잡아당 다 죽였수게

두 살 난 아들대령 곳찌간 전주형무소
아픔과 고통 어떵 말로다 를 것꽈
그 설움 당해보지 않고 말로허영 몰라마씀

아방도 죽어불곡 고생허멍 살단 보난
그 아들 일흔셋 이 살암수다
4․3이 무언지도 모른 아흔 셋의 수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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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면 가시리 출신인 수형인 박춘옥(호적이름 박내은)은 두 살 이들과 함께 ‘1948년 군법회의’에 의해 수감되었다. 수형인명부에 의하면 그는 가시리가 본적이고 1948년 12월 28일 징역 1년을 언도 받고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되어있다. 그는 1948년 11월 11일(음력) 산에서 붙잡혔다. 의귀국민하교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귀포경찰서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전기고문과 ‘비행기’ 태우기 고문을 받았다. 제주경찰서로 옮겨질 때 친정어머니와 동생들은 풀려났고 어린 아들과 은 한 달이나 구금생활을 하고 전주형무소로 옮겨졌다. 4․3사건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군법회의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두 차례 실시되었다. 「군법회의 명령」에는 2530명(1948년 군법회의분 871명, 1949년 군법회의분 1,659명) 피고인 명부가 별첨되어 있다. 군법회의 대상자들은 서울․ 인천․ 대전․ 대구 전주․ 목포 등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어 재소자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1950년 6․25전쟁이 발생하자 각 형무소별 불순분자 처리방침에 따라 상당수가 총살 처리되었다. 일부는 옥문이 열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행방불명됨으로써 지금까지 생사를 모르고 있다. 「군법회의 명령」에 적혀진 1948년 군법회의분 871명의 군법회의 대상자들은 제주도에서 사형에 처해진 38명을 제외하고 각각 목포․ 마포․ 서대문․ 대구․ 인천․ 전주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여성들은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징역 15년 3명, 징역 5년 7명, 징역 1년 38명이다. 1949년 군법회의분 1,659명은 제주도에서 사살된 249명을 제외하고 각각 마포․ 대구․ 대전․ 목포․ 인천전주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여성들은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무기징역 3명, 징역 7년 21명, 징역 5년 13명, 징역 3년 25명, 징역 1년 22명 등 총 84명이다. 그들은 「구형법」 제77조(내란죄) 위반죄 또는 「국방경비법」 제32조(적에 대한 구원통신 연락죄), 제33조(간첩죄) 위반죄로 1년부터 20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군법회의는 그 근거법인 국방경비법 소정의 절차를 전혀 준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 제22조 “모든 국민은 법률의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에서 도출되는 문명국가의 재판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절차조차 갖추지 못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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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공간 혁신’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학교는 적절한 공간인가?

우리는 인생의 상당 부분을 학교에서 보낸다. 교육의 주인이 학생이라면 학교 공간의 주인도 학생이어야 한다.

아이들의 관점에서 아이들의 눈높이로 아이들의 생각을 반영해 아이들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학교 공간을 바꿔 나가는 것은 그 자체로 창의적이고 새로운 교육을 실천하는 일이다.

교육부가 학교 건축 공간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학교 공간 혁신’으로 재구성하는 사업에 손을 댔다. ‘학교시설 환경 개선 5개년 계획’을 세우고 교실 공간부터 혁신하기 시작했다. 책걸상이 놓인 전통적인 모습의 교실에서 벗어나 놀이 공간처럼 만들어진 미래형 학교 공간을 만드는 데 예산도 지원된다.

지금 학생들은 자유의지를 박탈당한 채 틀에 박힌 일과와 학사일정에 따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고 통제당하고 있다.

학교의 공간 구조는 비슷한 형태를 가진 교도소나 병영 등과 근본적으로 같은 공간 구성 방식이다. 직선으로 마주하는 복도, 신발장 등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학교의 모습이다. 네모난 교실, 고정된 책상으로 아이들을 가두고 있다.

학교의 설계도와 교도소의 설계도를 놓고 비교하니 어느 것이 학교이고 어느 것이 교도소인지 분간이 어렵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게 됐을까?

1960년대 이후 학생 수가 급증하면서 학교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효율적인 학교 설계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 결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학교의 전형적인 모습이 등장한 것이다. 또한 당시의 주입식 교육방식도 표준화된 학교 모습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학교마다 커다랗게 딸린 운동장은 군대 연병장에 대응된다. 학생들의 체육 활동 그 자체보다는 아침 조회 같은 이런저런 행사 때마다 전교생을 죄다 불러 모아 사열시키기 위한 공간이다. 그 때문에 학생들의 체육 활동에 있어서는 비효율적이다.

과거 우리는 군대의 연병장 같은 운동장에서 교장의 훈화를 들어야 했다. 과거 일제는 유사시 학생들을 군인으로 이용하려고 했고 군대의 공간 구조를 그대로 이식했다. 일제에 의한 국권 피탈로 한국의 교육은 일본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도구였다. 그 영향 때문일까? 일본은 우민정책(愚民政策)을 그들의 식민지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우리 사회는 제도로서의 학교가 왜 변해야 하는지를 잊은 채 어두운 망각 속에서 지난 한 세기를 보냈다. 일자형 건물,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교실 등으로 획일화된 공간은 학교를 지배하는 교육 이데올로기의 결과다. 학교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의 틀 안에서 아이들의 생각과 활동을 길들이기 위한 공간이었고 그 공간의 중심에 아이들이 없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모든 학교는 거의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네모난 건물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책상, 네모난 의자, 네모난 운동장, 네모난 놀이터 등. 네모난 곳에서 하루 대부분을 생활하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지는 곳이 학교라는 공간이다.

우리는 과거 한 쪽에 복도를 끼고 줄줄이 늘어선 교실에서 공부했다. 교단을 향해 빼곡히 들어찬 책걸상에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앉았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선 학생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선생님들. 권위적이고 획일화된 학교의 모습과 그 안에서 학생들이 겪는 억압과 통제는 서로 맞물려 있다.

교육의 민주화가 실현되면서 학교 교육의 변화, 그리고 학교 공간의 혁신을 이야기하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리고 학교 공간의 변화를 꾀하는 시도들이 이슈가 되고 있다. 또 건축 분야에서는 변화하는 교육 과정과 사용자에 맞춘 학교 공간 디자인의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위해 연구 중이고 교육 분야에서는 교육 철학의 기조를 세우고 이에 맞춰 학교 공간을 변화하려고 연구하고 있다.

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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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참회-고사리 반근

詩(시)로 읽는 4․3(50)

사월 참회-고사리 반근
김영숙

사월 들판에서 고사리를 꺾는 것은
미안한 사람 불러 사과하는 것이다
수백 번 허리를 꺾어 절을 하는 것이다

손끝에서 똑똑똑 온종일 꺾인 것은
푸른 나의 오만이다 종주먹 꼭 쥐고선
비벼도 흔적이 남는 고사리밥 같은 것

참선에 든 할미꽃 그 옆에서
사월의 내 참회는 손부리가 까맣다
봄 하루 노동의 댓가 자존심이 반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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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懺悔)는 자신이 범한 죄나 과오를 깨닫고 뉘우치는 일이다. ‘참(懺)’은 산스크리트의 ‘크샤마(kama)’가 원뜻으로 ‘인(忍)’을 의미한다. 실수를 뉘우치는 ‘회(悔)’와는 의미가 약간 다르지만, 점차로 ‘참’과 ‘회’가 동일시되어서 ‘참회’라는 말이 쓰였다. 불교에서는 포살(布薩) 및 자자(自恣)라고 불리는 참회법이 행해졌다. 포살은 보름에 한번 계본(戒本)을 외워 죄과의 수를 세고, 자기가 범한 죄가 있으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참회하고, 연장의 승려로부터 용서를 받는다. 자자는 안거(安居) 동안의 마지막 날에 승려들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며, 각자 참회·고백하는 방법이다. 가톨릭에서는 참회를 감정의 과장을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공식적인 용어로는 쓰지 않고 대신 ‘고해(告解)’ 또는 ‘고백(告白)’이라고 하여 성사(聖事)의 하나로 본다. 고백은 세례를 받은 자가 청죄(聽罪)의 자격을 가진 사제(司祭)에게 죄를 고백하여 용서를 받는 의식절차이다. 참회록은 자서전의 일종으로 자신이 지난날에 저지른 과오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대표적인 참회록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장 지퍼 루소, 레프 톨스토이의 것이 있다. 이 3개를 묶어 3대 참회록(또는 고백록)이라고 알려져 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하기 닷새 전에 「참회록」란 시를 썼다.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의 부끄러움, 반성과 성찰 등이 주제로 시를 읽다보면 저절로 마음이 슬퍼진다. 윤동주는 1월 29일에 창씨개명 계를 신고했다. 그런데 이 ‘1942년 1월 29일’이란 날짜는 반드시 그의 시 ‘참회록’이 쓰인 ‘1942년 1월 24일’이란 날짜와 연결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가 창씨개명 계를 신고한 날은 ‘참회록’을 쓴지 닷새만이다. 그 시기와 작품의 제목과 내용, 그리고 상황을 볼 때, 그가 ‘참회록을 씀으로써 자신의 감정과 각오를 일단 정리한 뒤에 연전에다 창씨개명 계를 신고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일본 유학을 결정하고 그걸 위해선 자신의 손으로 창씨개명 계를 신고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각오했을 때, 그 뼈아픈 욕됨으로 인해 쓰인 것이 ’참회록이다. 시인의 사월 참회는 고사리 반근이다. 고사리 반근이 그리 하찮은가? 수백 번 허리를 꺾어 수확하는 고사리 반근이야말로 바로 시인에게는 사월에 머리 숙이는 최상의 예절이다.(김관호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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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별곡

詩(시)로 읽는 4․3(49)

4․3 별곡
윤봉택

죽어 있음이 편안하였던 시절
이제 다시 살아 있음이
죄가 되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침묵 후에 말하려 하는 것은
그날의 고자질, 아픔, 총칼, 죽창이 아닙니다
묘비명 없이 시방도 저승길 가고 계실
나 설운님들에게 이승의 우리 이름으로
떠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일만 사천육백 일 동안 비겁하였던 거짓을
참회하려 함입니다
오 그리하여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되게 하려 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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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지난 시절 말하지 못한 금기(禁忌)의 시간을 참회한다. 그 말하지 못한 침묵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시인에게는 더 이상의 ‘고자질’이나 ‘아픔’으로 상징되는 ‘반목’이 아니다. 70여 년 간 4․3은 침묵, 금기, 왜곡에 포위돼있었다. 지금도 4․3은 ‘빨갱이 폭동’이라는 딱지가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 언론은 한국전쟁 이후 현대사에서 인명피해가 가장 컸던 4.3을 제대로 기사화하지 못하고 있다. 4․3은 제주만의 역사로 갇혀있다. ‘총칼’ ‘죽창’으로 상징되는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에게 4․3의 역사가 있은 후 < 일만 사천육백 일 동안> 참아 왔던 아픔의 역사를 말하지 못했던 거짓을 참회하는 행동이 된다. 시인은 참회라는 형식의 내적 성찰을 통해 더 이상 “나와 너”가 아닌 “우리”라는 삶의 공동체 틀에서 살아가고 싶음을 이야기한다. 역사적 아픔을 딛고 사랑으로 기인한 더불어 사는 삶의 모습이 제주인의 정신이며 제주문학에 나타나는 작가정신이다. 원래 금기는 종교적 관습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접촉이나 언급이 금지되는 일이다. 금지되는 것에는 행동과 말 양쪽이 포함된다. 터부(taboo,tabu)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구기(拘忌)’라고도 하며, 우리나라의 민속 현장에서는 ‘가리는 일’, ‘금하는 일’ 등으로 불리고 있으며, 더러는 ‘지키는 일’, ‘삼가는 일’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실제로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여서는 안 되고, 무엇인가에 근접하거나 손을 대어서는 안 되고, 무엇인가를 입에 올려서는 안 되고, 또 어느 대상을 보거나 들어서도 안 되는 것이 금기이다. 그렇다고 금기가 언제나 기피나 회피 쪽에 일방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정한 짓을 해서는 안 될 경우 부정에 빠지지 않게 목욕재계하는 것은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무엇인가를 하지 말라는 금령이 있을 경우, 하지 않음으로써 보장될 어느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행동하는 일이 우리의 민속 현장에서 쓰이고 있는 ‘지킴’이나 ‘가림’에는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속신앙에서 문제되는 ‘깨끗함’과 ‘더러움’, ‘청정(淸淨)’과 ‘부정’의 이원론적 대립을 두고 볼 때, 금기는 더러움이나 오염 또는 부정에 걸리지 않고, 청정·맑음·깨끗함을 보장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종교적 오염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금기이다. 부정을 타는 것은 오염이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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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詩(시)로 읽는 4․3(48)
달력
정일근

북제주군 찬 바람벽에 예수처럼 못 박힌 달력, 제주 이모 달력에는 4월이 없다

3월이 가면 4월이 오는데 4월이 가면 5월이 오는데 이모, 제주 이모의 달력에는 4월이 없다 3월과 5월 사이 4월이 없는 달력뿐이다

만화방창 4월에 닿아 꽃구경 한 번 못하고 뼛속까지 잔뜩 움츠렸다 3월에서 5월로 길게 훌쩍 건너가서는 뒤돌아보지도 않는 이모

예순 해 동안 4월이 없는 제주 이모의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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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주 이모의 달력에는 4월이 없을까? 왜 제주 이모의 가슴 속에서 4월을 지워 버렸을까? ‘인민항쟁 관계자를 즉시 석방하라!’ ‘최고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정권은 즉시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 파쇼분자의 능멸!’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기념 제주대회’가 열린 제주북초등학교 주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군중 수는 대략 2만 5천~3만 명. 1948년 4월 3일 새벽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올랐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제주4․3을 경험한 사람들은 말한다. 이념과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마구잡이로 죽여 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 총살은 기본으로, 비협조적인 사람이나 경찰과 군인의 가족들은 본보기로 참수형에 처했다. 연좌제를 적용한다며 친인척이나 면식이 있는 사람들을 공개처형했다. 손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육지 출신 군경이 직접 죽이지 않고 제주 사람으로 구성된 민보단을 이용해 사람들을 한라산에 몰아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살기 위해 한라산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사냥’하였고, 이들이 추위에 못 버텨 귀순하자 격리 수용하다가 한국전쟁의 발발로 이들을 학살하는 일도 있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을 모아두고 돌팔매질을 하게 린치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비학동산에서는 임산부를 나체로 팽나무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들의 잔인함에 대한 증언 중에는, 당시 폐허가 된 마을에서는 땅을 조금만 파도 시체가 마치 젓갈(멸치젓. 제주말로 ‘멜젯’) 담근 것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는 증언. ‘민간인’을 과녁으로 쓰는 서청이나 군대의 ‘사격장’이었던 제주섬. 심지어 일본군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영아 살해‘마저 있었다. 이를 수습하고 진압하려 한 14연대는, 자신들이 개입하기 전까지 살아남은 제주도의 거주자 대부분이 직간접적인 가해자라는 상황 속에 수습할 타이밍을 놓쳐, 보복성의 성격을 가진 여수사건으로 이어진다. 모든 학살은 1940년대, 1950년대의 섬에서 벌어졌다.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배가 몇 척 없을 정도로, 제주도는 거의 단절된 섬이었다. 그 시대에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몇 사람만 거치면 4촌 아래 혈족일 수준으로 외부 사람의 유입이 적을 텐데, 그곳에서 연좌제를 적용하여 잔인한 학살을 하였다. 그 학살의 시발점인 4․3사건. 그래서 제주 이모의 달력에는 4월을 영원히 지워야 했다.(작가․ 칼럼니스트 김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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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증인 큰넓궤

(시)로 읽는 4․3(47)
산 증인 큰넓궤
김순선

언제 난리가 끝날지 알 수 없지만
며칠만 꼭꼭 숨어 있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오순도순 버티던 동광리 사람들

눈 녹인 물을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보지만
한숨 소리 점점 깊어지고
쉬이 새벽은 오지 않고
인심은 점점 야박하여지고

끝내, 토벌대에 추적당한
큰넓궤 사람들
토벌대 무차별 총탄 앞에
허망하게 쓰러졌다

햇빛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허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캄캄한 동굴 속에서
무참히 매장되었다
영원한 무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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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 몇몇 지주와 관리들이 곡식을 매점매석하면서 쌀값이 폭등하자, 미군정은 공출제도를 부활시켰다. 1947년 8월 보리 공출을 독려하기 위해 관청 직원들이 동광리를 방문했다가 청년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했다. 미군정의 ‘미곡수집령’에 반대한 이 사건으로 청년 3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1948년 11월 15일 새벽, 토벌대는 주민들을 무등이왓에 집결시켰다. 마을 유지들을 추려내 밭에서 총살했다. 토벌대는 그해 12월 11일 청·장년 20여 명을 또 다시 학살했다. 큰넓궤 입구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지만 이곳을 지나면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다. 주민들은 큰넓궤로 숨어들었다. ‘궤’는 암반과 암반 사이의 공간, 천연동굴을 뜻한다. 주민 120여 명은 이곳에 은신하며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토벌대의 집요한 추적 끝에 굴 안으로 진입하자, 주민들은 이불에서 솜을 뜯어내 고춧가루를 뿌린 후 불을 붙여 매운 연기가 동굴 밖으로 나가도록 부채질을 했다. 토벌대는 굴 입구에 돌을 쌓아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은 후 철수했다. 다음날 청년들은 굴 입구에 쌓여 있는 돌을 치우고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한라산을 바라보며 무작정 산으로 들어갔다. 한라산 영실 인근 볼레오름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눈 위에 난 발자국을 보며 쫓아온 토벌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주민들은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에 있는 단추공장에 수용됐다. 주민들은 정방폭포로 끌려가 집단 총살을 당했다. 동광리 희생자는 큰넓궤에 숨어 있다가 정방폭포에서 총살당한 40여 명을 포함해 모두 153명에 이르고 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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