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랑쉬굴

詩(시)로 읽는 4․3(21)

다랑쉬굴
이동순

무주공산
하도 처참해서
바람도 숨죽이며
저 캄캄한 동굴 속에
지난날 토벌대에게 학살당한 주점들 있나니
제주도 구좌읍 중산간지대
다랑쉬굴에는
행여 연기라도 새어나갈세라
불빛이라도 보일세라
조심조심 밥 지어먹었을 가마솥 두 개
깨어진 항아리
요강단지
녹슨 비녀
늘 끼던 안경 혁대 신발들 옆에
서로 부둥켜안고 숨져간
하얀 해골들 누웠나니
비 오고 바람 부는 수십 년 세월
하도 억장이 막혀
혼령도 저승길 못 가고
지금껏 굴 주변을 울며 헤매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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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위로 쟁반같이 뜨는 달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지은 이름 ‘다랑쉬’. 높은 봉우리라는 뜻을 지닌 ‘달수리’, 한자식으로는 ‘월랑봉(月郞峰)’으로 불리기도 한다. 382.4m라는, 한라산에 비해서는 턱없이 낮은 높이지만, 제주 사람들에게는 ‘오름의 여왕’이라 불린다. 1948년 12월 18일 무장대는 세화리를 습격했다. 대대적인 수색에 나선 토벌대는 천연동굴을 발견했다. 토벌대는 수류탄을 굴속에 던지며 나올 것을 종용했다. 메밀짚과 잡풀로 불을 피워 동굴에 집어넣자 매캐한 연기가 번졌다. 모두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아홉 살 난 어린이 1명과 여자 3명이 포함돼 충격을 주었다. 44년이 흐른 1992년 4월 2일. 다랑쉬굴 속에서는 11구의 유해가 ‘솥과 사발, 녹 먹은 탄피 몇 개’ 등과 함께 발견되었다. 제주4·3연구소에 의해 비극의 현장이 드러났다. 입구 직경이 60~70~㎝로 기어 들어가야 할 만큼 좁지만, 그래서 더욱 몸을 숨길 수 있는 자연 동굴에서 먹고, 자는 피난생활을 한 것이다. 어떤 시신은 허리띠만 남아 있는 백골 상태로 변했다. 여자의 시신에는 비녀가 꽂혀 있었다. 주변에는 안경과 단추, 버클, 썩다 남은 옷가지, 가마솥, 숟가락, 곡괭이 등 102점이 유물이 발견됐다.  그런데 공안당국과 행정기관이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유족들과 협의를 거치지 않고 시신을 산천단 화장터에서 불살라버렸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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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평화 ㅡ4·3, 두 청년 이야기

詩(시)로 읽는 4․3(20)

3일 평화 ㅡ4·3, 두 청년 이야기
오승철

죽어도 장부의 말은 죽지 않는 법이지
한낱 봄 꿈 같은 약속도 약속이라서
연둣빛 4 · 28 만남, 그 약속도 약속이라서

깃발 따라 짚차 한 대 쏙 들어간 구억초등학교
뒷산 조무래기들 꼼짝꼼짝 고사리 꼼짝
첫날밤 신방 엿보듯 훔쳐보고 있었다

조국이란 이름으로 공쟁이 걸지 말자 
저 하늘을 담보한 김익렬 9연대장과 김달삼 인민유격대 사령관 
산촌의 운동회같이 박수갈채 터졌다지

불을 끈 지 사흘 만에 다시 번진 산불처럼
다시 번진 산불처럼 그렇게 꿩은 울어, 전투중지 무장해제 숨바꼭질 꿩꿩, 오라리 연미마을 보리밭에 꿩꿩, 너븐숭이 섯알오름 4‧3 평화공원 양지꽃 흔들며 꿩꿩, 그 소리 무명천 할머니 턱 밑에 와 꿔- 엉꿩
칠십 년 입술에 묻은 이름 털듯 꿩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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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3이 발생하고 25일 만인 4월 28일, 무장대 총책 김달삼(金達三)과 김익렬(金益烈) 국방경비대 9연대장은 구억초등학교에서 평화협상을 맺는다. 72시간 내 전투 중지, 점차적인 무장해제 등의 조항이었다. “김익렬 : 제9연대가 지금까지 전투를 개시하지 않았지만, 군대는 개인의 뜻과 관계없이 명령만 내리면 복종하고 전투를 개시한다. 김달삼 : 당신은 미군정하의 군대인데, 나와의 교섭결과에 대해 얼마나 약속이행의 권한이 있느냐? 김익렬 : 미 군정장관의 지시에 따라왔으며 내가 가진 권한은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의 권한을 대표하며, 오늘 나의 결정은 군정장관의 결정이다. 김달삼 : 나도 제주도의 도민 의거자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 김익렬과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에서 나눈 대화내용이다. 두 사람은 ‘4·28 협상’을 통해 사태 해결에 합의하지만, 사흘 후인 5월 1일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이 ‘오라리 방화사건’을 저지르고, 이를 경찰과 미CIC(방첩대), G-2(정보참모부)가 오히려 무장대의 방화로 뒤집어씌움으로써 평화협상은 결렬되고 만다. 우익청년단이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고, 5월 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상은 깨어진다. 결국 5월 5일 수뇌부 회의에서 김익렬은 조병옥 경무부장과 충돌하기에 이르고 제14연대장으로 전출되었다. 그는 중장으로 예편한 뒤, 1969년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제주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말미암아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마지막으로 들고일어난 민중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경찰감찰청장, 제주군정관, 조병옥 경무부장, 군정청 딘 소장 등 한 사람이라도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다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해결 될 수 있었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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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詩(시)로 읽는 4․3(19)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김수영

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 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 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 놈의 미소하는 사진을
(……)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던 그 사진은
사실은 억압과 폭정의 방패였느니
썩은 놈의 사진이었느니
아아 살인자의 사진이었느니
(……)
-1960년 4월 26일 이른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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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은 4·3 당시 국무회의에서 강경진압작전을 지시했다. 초토화의 책임은 당시 정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게 있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통수권자이며, 미군은 한국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은 제주도에 불법계엄령을 선포했다. 특히 이승만은 입산자 대부분이 ‘공산당 선전에 속거나 집이 불에 타 갈 곳이 없어 도로 산에 올라간 자’임에도 이들을 ‘폭도’라 해 무차별 총살을 명령했다. 이승만이 내세운 최대 이슈는 ‘반공’이었다. 당시 국회를 통과한 국가보안법도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탄생했다. 서북청년회를 동원한 사실도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4·3 당시 군·경을 이승만과 미국이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의 승인 없이는 군사이동도 불가능했다. 이승만은 친일 경찰을 철저하게 활용했다. 4․3사건, 여순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장면 부통령 암살 사건 등의 배후에는 친일 경찰이 있었다. 이승만은 ‘반공’을 이용해 국민들에게 공포를 심었다. 당시에는 친일행위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쉬웠다. 이승만은 친일파청산 주장은 공산당의 연관성이 긴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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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구 산전

詩(시)로 읽는 4․3(18)

이덕구 산전
정군칠

스무엿새 4월의 햇, 살을 만지네
살이 튼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가죽나무 이파리 사시나무 잎 떠는 숲
가죽 얇은 내 사지 떨려오네

울담 쓰러진 서너 평 산밭이
스물아홉 피 맑은 그의 집이었다 하네
아랫동네를 떠나 산중턱까지 올라온
아랫동네 사기사발과 무쇠솥이 깨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네
그 숲에나 잡목으로 서,
살 부비고 싶었네
그대 한 시절에 무릎 꿇은 것, 아니라
한 시절이 그대에게 무릎 꿇은 것, 이라
손전화기 문자 꾹꾹 눌렀네

산벚나무 꽃잎 떨어지네
음복하는 술잔 속 그 꽃잎 반가웠네
그대 발자국 무수한 산 밭길의 살비듬
어깨 서서히 데워주었네
나 며칠 북받쳐 앓고 싶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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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구산전(山田)은 사려니숲길 입구에서 천미천을 지나 바로 오른편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한참 가다 내창을 건너 올라가면 나온다. 원래는 산으로 은신했던 봉개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주민들이 귀순한 1949년 봄 이후엔 이덕구(李德九) 부대가 주둔했다. 속칭 ‘시안모루’, ‘북받친밭’이라 불리는 곳이다. 움막을 지었던 흔적이 남아있고 음식을 해 먹었던 무쇠솥과 그릇들이 남아있다. 후세대들이 이름 붙인 이덕구산전. 봄 여름 가을 겨울……언제든 아름답고 아련하다. 이덕구는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미쓰메이칸(立命館) 대학 경제학부 재학 중 관동군에 입대하였다. 1945년 귀향한 뒤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을 가르쳤다. 얼굴은 살짝 곰보이며 미남형이었다. 늘 목소리가 컸으니 이는 미군정에 의해 구인되어 고문을 받을 때 고막이 파열되었기 때문이다. 입산하여 인민유격대 3․1지대장으로 제주읍․ 조천면․ 구좌면에서 활동했다. 김달삼(金達三)이 1948년 8월 21일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뒤 남로당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과 인민유격대사령관 직책을 이어받았다. 1949년 6월 7일 16시 화북지구 제623고지에서 사살되었다. 자살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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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17)

경인(庚寅)-1950
김경종

山河万變水東流(산천 만 번 변하여도 물 동으로 흐르나니)
白首呼兒泣古洲(옛 물가에 눈물 떨구며 아들 찾는 백발이여)
節義當年忠死地(절의는 이 해 맞아 충성스레 죽어가고)
兵戈此日㤼灰樓(전쟁이 겁나고나 이날 누대 재 되었네)
神明倘識焦心恨(신명이 행여 타는 한스러운 맘을 알까)
世亂空添觸目愁(세상의 어지러움에 괜스레 더해진 근심)
骨肉不知烏有在(아들이 어디 있는지 아아 알지 못 하겠네)
惟魂遙向故園遊(혼 되어 노닐었던 옛 동산을 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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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섬에 불어 닥친 비극을 맨 먼저 드러낸 것은 문학이다. 4·3문학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그들은 죽어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언어를 발견하는 일이다. 민중의 기억은 대학살에 대한 기억이다. “본도의 4·3사건에 아들 창령이 뜻밖의 환난을 당해 진주에 붙들려 갔는데 때마침 적병이 들이닥쳐 생사를 알지 못했다. 한 번 가서 탐문해 보았지만 이미 죽은 뒤였다. 다시 촉석루를 찾아보니 또한 재가 되어버렸다. 드디어 그 원운을 취하여 비참한 감회를 적어본다.”(本道四三之變家兒昌玲以橫厄拘在晉州適遭敵兵入城生死不知一往探問事已逝矣又見矗石樓亦灰矣遂取其原韻以叙悲懷)는「경인(庚寅)-1950」의 원래 제목이다. 과거 북제주문화원에서 발간한 석우(石友) 김경종(金景鍾, 1888~1962)의 『白首餘音』의 번역은 이미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는 백규상(白圭尙)이 수고하였다. 저자 석우는 일제강점기 시절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고 은일(隱逸)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뛰어난 시재(詩才)를 드러낸 우리고장의 정통유학자이다. 모두 2권으로, 시(詩)와 문(文)을 각 권에 따로 모아 연대별로 기록하였다. 저자는 노형동에서 태어나 영주음사(瀛洲吟社)의 사장을 지내며 사문(斯文)이 쇠퇴해진 가운데 유림을 규합하는 데 힘쓴 인물이다. 영주음사는 1924년 봄 도내 문인 123명이 모여 설리한 문인단체였다. 석우는 전라북도 계화도(界火島)에 건너가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로부터 여러 해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석우는 당대 제주의 유림인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 행은(杏隱) 김균배(金勻培) 등과 교유하며 칠성로에서 한약방을 운영해 생계를 해결하면서 시 짓기를 즐겼다. 1947년 3월 1일로부터 1948년 4월 3일을 거쳐 1954년까지 4‧3사건과 관련하여 사법부의 재판을 받고 형을 언도받은 사람들은 수천 명에 달하였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벌금형‧구류‧집행유예 등을 언도 받았지만, 금고‧징역 등의 실형을 언도 받은 사람들은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이들 형무소 재소자들은 형기를 채우고 출소하기도 하였지만, 열악한 형무소 수감 환경 때문에 옥사하기도 하였고, 상당수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불순분자를 처분하라는 상부 명령에 따라 총살당하였다. 석우의 아들 김창진(金昌珍)의 경우 김천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白首餘音』에는 1949년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당시 4·3의 진상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보낸 장문의 편지글 「與李承晩書 己丑(1949)」과 나중에 쓴 성토문 「李承晩聲討文 庚寅(1950)」은 육지형무소에 수감됐던 4·3 연루자들의 무고한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승만의 만행과 죄상을 폭로한 글이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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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16)

북촌리의 봄
박은영

한 여인의 젖을 아이가 빨고 있었다
말 못하는 어린 것의 울음이 서모(*서우봉)에서 부는 바람소리 같았다
핏덩이를 등에 업은 어미의 자장가가 들리는 듯한데
젖몸살을 앓던 아침, 붉은 비린내가 퉁퉁 불어 마을을 떠돌아다녔다 새들이 총소리를 물고 둥지로 날아갔다 소란스런 포란의 방향, 꽃을 내준 가지가 동쪽으로 기울었다
그것은 서쪽에서 해가 뜰 일
서모에서 부는 바람소리가 말 못하는 어린 것의 울음 같았다
뚝뚝, 지는 목숨들 사이
아이는 나오지 않는 젖을 한사코 빨아대고 있었다
어미를 살려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그 힘으로 동백꽃이 피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봄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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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북촌리의 봄」은 2014년 4․3평화문학상 시 부문 수상작품이다. 시인 박은영은 수상소감에서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얼마나 몸서리치게 우셨습니까. 아직도 캄캄한 동굴 깊이 숨어있을 분들, 그 분들의 손을 잡고 함께 밖으로 나오고 싶었습니다”고 쓰고 있다. 1947년 8월 31일 불법 삐라를 단속하던 경찰관과 북촌주민이 충돌, 쌍방이 부상자를 낸 사건이 벌어졌다. 오전 11시께 경찰은 마을에서 삐라를 붙이던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이 발포로 3명이 총상을 입었다. 1948년 5월 10일 오후 4시. 북촌투표소가 불에 탔다. 투표용지가 파손되었다. 1949년 1월 17일 마을 어귀에서 토벌대 2명이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숨졌다. 아침에 세화 주둔 제2연대 3대대의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은 것이다. 마을 원로들은 숙의 끝에 군인 시신을 들것에 담아 함덕 대대본부로 찾아갔다. 군인들은 본부에 찾아간 10명의 연로자 가운데 경찰 가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살해 버렸다. 그리고 장교의 인솔 아래 2개 소대 쯤 되는 병력이 마을을 덮쳤다. 그 때 시간은 오전 11시 전후. 군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들이닥쳐 총부리를 겨누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학교운동장으로 내몰고는 온 마을을 불태웠다. 4백여 채의 가옥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학교운동장에 모인 1,000명가량의 마을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에 집결시킨 뒤, 주민을 20명씩 묶어 학교 동쪽 당팟과 서쪽 너분숭이 인근 옴팡밭으로 끌고 가 집단 총살했다. 주민학살극은 오후 5시께 대대장의 중지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4․3에 대해 30여 년간 망각과 침묵을 강요당하던 시절, 작가 현기영은 북촌리 대학살을 다룬 작품 「순이삼촌」을 1978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하면서 4․3을 시대의 한복판으로 끌어올렸다. 이 작품은 국가폭력의 실상을 폭로하고, 진상규명의 필요성 그리고 치유와 추모의 당위성을 널리 확산시키는 디딤돌이 됐다. 현기영 작가는 4․3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1979년 군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고 소설 「순이삼촌」은 14년 간 금서가 됐다. 또 하나의 4․3 소재의 장편소설인 자전적 성장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1999)가 국방부의 불온도서로 선정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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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보는 늙은이

벨 보는 늙은이
황금녀

저녁 해굴메
어뜩 고쳐 사민
이 밤도 벨 송송
이녁 엇이
트는 에도 돌뢍 뎅기는 미죽은 벨 나
늙은이 다인 눈광 눈 다댁염져
아- 눈도 다이어사
벨 치 보석이 뒈염신고라
왁왁 시상에서 시름 젭단 늙은이
울럿이 벨 멍 시름 시끄단 늙은이
요 들국 걲엉
이녁 쿰더레
씩 앵겨 네시민
손  번 끈 심어 봐시민
“이녁 눈에도 저 벨이 베레 졈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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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롱 싀상』은 팔순을 넘긴 황금녀 시인이 4․3기억을 되살린 제주어 시집이다. 시인의 어린 시절 체험과 그로 인한 눈물과 회한의 세월, 그리고 평화와 상생을 염원하는 생생한 제주어로 독자와 손을 잡는다. 그 중「벨 보는 늙은이」에서 제주어를 표준어로 풀어보면 “해굴메: 해 그림자, 어뜩: 깜빡, 고쳐: 비켜, 이녁 엇이: 그대 없이, 미죽은: 풀이 죽은, 다인 눈: 닳아진 눈, 다댁이다: 마주치다, 왁왁: 캄캄한, 시름: 걱정, 젭단: 버거워, 울럿이: 우두커니, 시끄단: 덜어내며, 쿰더레: 품 속, 앵겨: 안겨, 네시민: 드렸으면, 끈: 힘껏, 심어: 붙잡아, 이녁: 그대, 베레다: 보이다”이다. 시집『베롱 싀상』을 통하여 4․3사건 회오리에 휩쓸려 남편이나 가까운 가속을 잃고도 치열한 삶을 살아온 제주 여인들의 한을 풀어 놓았다. 바로 민중의 입말로 건져 올린 4․3의 기억이다. 생생한 제주어의 질감은 때론 거칠고 때론 요령부득이다. 제주어라서 더욱 실감이 나고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4․3을 제주어로 표현하면 더 생생하고 더 아프다. 노년에 이르러 9살 함덕마을 아이가 4․3사건의 회오리에 휩쓸려 가속을 잃고도 치열한 삼을 살아온 제주 여인들의 한을 풀어놓았다.「벨 보는 늙은이」처럼 치열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팔순 할머니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제주어 동시집 『고른베기』도 일품이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꿈을 담은 동시를 문화사적으로 언어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제주어로 들려준다. 아이들이 음과 뜻을 이해하기 쉽게 오른쪽 페이지에 표준어로 된 동시를 함께 실었다. 황금녀 시인은 1939년 함덕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시에 관심을 갖게 돼 문학회 등에서 활동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 MBC 창사 기념 문예공모에서 수기가 당선된 후 2004년부터 펜을 들었다. 현재 창조문예와 제주어보존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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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친일과 그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예비검속에 의한 대대적인 학살사건을 자행하였다. 계엄군은 섯알오름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총살하였다. 전쟁이 끝난 1956년 5월 18일, 5년 9개월 만에 억울한 죽음이 세상에 드러났다. 1961년 5․16 이후 묘지에 세웠던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라는 비석은 땅 속에 파묻혀졌다. 쿠데타 주체들이 피학살자 유족에 대한 대대적인 청소였다. 박정희와 그 주역들은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왜 광분했을까?
“저는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입니다. 친일 군인으로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고, 해방 직후에는 광복군 중대장을 지냈습니다. 형제 때문에 남로당에 입당해 공산 활동을 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자수를 해서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오늘날까지 살아왔습니다.”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朴政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임시정부요인 백강(白岡) 조경한(趙擎韓) 선생을 찾아가 공화당 입당을 권유하면서 한 이야기의 내용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를《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면서, 그 근거로 1939년 만주국군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작성하였다는 신문 기사를 공개하였다.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자)에 실린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의 기사이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조국은 일본을 말한다. 그러니까 박정희는 극우 친일파였고, 빨갱이라는 좌익 사상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지원하면서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했다. 그는 만주군 중위가 되었고, 해방 직후 숙군 대상자로 재판받고 사형을 구형받은 남로당 군사부의 비밀 당원이었으며, 군사쿠데타의 주모자였다.
박정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군(軍)이라는 개념과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다. 청와대 집무실에서 일본군 장교 복장에 점퍼차림을 한 채 가죽장화를 신고 말채찍을 들고 접견인을 맞이했을 정도였다. 딸 박근혜는 어떤가? 세월호 침몰 때도 최태민의 딸 최순실과 함께 지내며 방관한 것은 아버지를 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과 전두환에 대한 우파진영이나 민주진영 모두 논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 박정희 정권의 존재가 없었다면 경제발전은 생각하기 어렵다는 말은 결코 신기(神奇)가 아닌 최대의 딜레마이다. 개발을 위해 박정희의 독재가 필연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경제정책은 독재의 구실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박정희 경제성장을 신화처럼 믿고 있다. 한 사람이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영웅 사관에 빠져 있다. 박정희 몰락 계기가 된 것은 부마항쟁이다. 그것은 바로 경제문제 때문이었다.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높은 착취율에 기반을 둔 것이다. 바로 ‘토건 국가’적인 정책이다. 성장 위주의 정책 속에서 “저임금-저곡가 체제”, “자연을 마구잡이로 이용하고 파괴하는 착취 체계”의 이중의 착취 위에 건설된 것이다.
또 언론탄압은 어떤가?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로 대표되는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일명 ‘프레스카드제’를 실시하여 파시즘체제에서의 전형적인 언론 통제를 시작하였다. 국가보안법과 긴급조치로 수시로 언론을 탄압하였기에 1973년에는 도쿄에서 납치돼 온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름을 기사화할 수 없어 ‘재야인사’로만 표기하였다.
2012년 외국 언론들은 박근혜가 대통령의 당선을 전하며 박정희를 독재자로 평했다. 미국주간지 타임을 비롯하여 LA타임스, 뉴욕타임스, 영국의 가디언 모두 공통적으로 박정희를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군림했던 독재자(South Korea’s longest-ruling dictator)로 평가하였다. 프랑스의 르몽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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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14)

4․3 사건
김용해

오오, 침묵이로구나
땅 속에는 울부짖는 침묵이로구나
땅 위에는 짖어대는 침묵이로구나
눈물도 침묵이로구나, 통곡도 침묵이로구나
원한도 침묵이로구나, 죽음도 침묵이로구나
총칼 앞에서 침묵이로구나
고문 앞에서 침묵이로구나

오오, 감옥이로구나
벽이 탄탄한 감옥이로구나
산 자와 주근 자의 감옥이로구나
길도 막히고 기억도 막힌 감옥이로구나
민주도 감옥이로구나
자유도 해방도 모두 감옥이로구나
4․3사건은 감옥 속에 처박힌 꿈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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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은 ‘한국판 아우슈비츠(Auschwitz) 홀로코스트’이다. 군경토벌대와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등이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했다. 제주섬은 침묵을 강요당하는 감옥이었다.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하는 행위를 총칭한다. 고유명사로 쓸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한다. 4․3사건, “오 침묵이로구나”. 총칼 앞에 침묵이었고, 고문 앞에 침묵이었다. 4․3사건, “오오 감옥이로구나”. 민주도 감옥이었고, 자유도 해방도 감옥이었다. 침묵과 감옥이 바로 4․3사건이다. 오, 사물이 되어야만 갇힐 수 있는 저 깊은 침묵의 감옥이 시인은 아련한 것이 아닐까? 4․3의 대비극은 곧이어 일어난 한반도 한국전쟁 다음가는 아픔이었다. 허나 어찌된 일이야, 그날 이후 말하면 절대 안 되는 것이었다. “침묵하라!” 아무고 그때 그 일을 말해서 안 되는 것이었다. 누구든 그 때의 일을 벙긋했다간 국가공권력의 이름 아래 온갖 고통을 당해야 했다. 슬픔을 슬픔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제주섬은 감옥이었다. 우리 시대에 벌어진 사건을 어떻게 외면하겠느냐. 현재의 역사는 바로 과거 역사의 상처 위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4․3은 탄탄한 바위였다. 감옥 같은 바위가 되어 우리 앞에 군림하고 있었으며 풀리지 않는 숙제를 안고 아무리 밀치고 열어보려고 안간힘을 써도 그것은 더욱 거세게 버티고 있을 뿐 움직여 주려하지 않았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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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개동(奉蓋洞)

詩(시)로 읽는 4․3(13)

봉개동(奉蓋洞)

김종원

타 버려싱게/ 아홉 살 적 풋대추 찾아 기어오르던/ 안마당의 대추나무도/ 타 버려싱게// 날만 새면/ 거르지 않던 동네 식개/ 영장집 가마솥도/ 인젠 찾아볼 수 어싱게// 가을이면/ 갈중이 풋감 물들이고/ 겨울 한낮엔/ 푹푹 내려쌓인 돌담 눈길로/ 키보다 큰 꼬리연 입김처럼 말리던/ 중산 부락/ 나의 봉아오름// 할아버지는 오척 단구/ 술 담배 입도 못 대신/ 대쪽 같은 선비/ 집 한 채 다 타고 잿더미만 남던/ 사삼사건에도/ 눈시울 한번 안 적시더니// 안방 다락/ 이불 베개 삼던 漢書籍 다 타고/ 불꽃 되어 날을 땐/ 손주처럼 발을 구르신/ 金海金氏 문중의 어른/ 아, 그 법 없이도 살 수 있던/ 내 할아버지는/ 지금 봉아오름을 떠나고 어싱게// 타버려싱게/ 글만 알고 곡식 모르던/ 툇마루의 버선발/ 꿈 심던 뒷마당의 죽순도/ 다 타버리고 어싱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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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종원(金鍾元)은 오현고 재학시절 유경환․ 정규남과 함께 3인시집 『생명의 章』으로이름을 날렸다. 서라벌예술대학과 동국대를 거쳐 『사상계』 신인 작품으로 등단하였다. 1975년 3월 자유언론수호 파동으로 조선일보에서 해직되었다. 「奉蓋洞」은 1962년 『제주도』지에 발표한 작품이다. 봉개는 일제강점기에 명도암과 대나오름 등에 일본군이 갱도진지를 파놓았던 마을이다. 그 갱도진지가 4․3 당시에는 주민들의 피신처로 이용되었다.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주민들은 인근 야산과 불타버린 집터에 움막을 짓고 피난살이를 했다. 1949년 1월 21일 군인, 경찰, 대한청년단 등 합동토벌대가 마을에 들이닥쳐 움막에서 숨어 지내던 주민들을 끌어내었다. 마을 주변에 숨어 지내던 주민 40여 명을 멀왓동산으로 끌고 가 집단학살하였다. 1949년 2월 4일 육해공 합동으로 펼쳐진 대규모 작전으로 집단희생을 당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의 ‘사살 360명 포로 130명 기타 의류 등 다량 압수’라는 보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토벌은 비행기와 로케트포, 박격포까지 동원하였으며, 압수품에 총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주민들은 성 안에 함바집을 지어 살았다. 함병선(咸炳善) 연대장이 주민들을 원거주지로 복귀시키는 사업의 일환이었다. 그는 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 일본 패망으로 일군 준위로 제대하고, 해방이후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으며 그 후 보병6사단 2연대장에 임명되고, 중령과 대령으로 진급하는 한편 제14연대가 일으킨 여순10․19사건의 진압작전에 참여하였다. 제주주둔군이 제2연대로 교체되면서 그는 4․3사건 진밥부대로 제주도에 왔다. 미군 비밀문서에는 “함병선 연대장은 신분이나 무기소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가혹한 작전을 폈다”고 기록되어 있다. 2연대 3대대는 바로 서북청년단 출신 장병들로 구성되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제2대 남로당제주도위원장을 지낸 김용관(金龍寬) 등 ‘봉개7인당파’로 인하여 많은 주민들이 희생을 치렀다. 함병선의 성(姓)과 작전과장 김명(金明) 대위의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함명리(咸明里)’로 개칭하였다. 마을 재건 당시 교회를 지었는데 교회 이름도 ‘함명교회’였다. 함병선은 1955년 2월 4일 봉개리를 방문하였다. 그는 주민들로부터 도열 영접을 받았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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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흘곶에서 우는 새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기 시작하네
그 울음 숲을 버리고 어디로 향할까
마을주민들 하나둘 대섭이굴로 모여들고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 치마폭으로 감싸안네
검은개 노랑개의 그림자 어른거리고
꼭꼭 숨어라 내일 아침 볼 수 있을까
총소리 코밑까지 밀려와 심장을 흔들 때
도툴굴 목시물굴 벤뱅듸굴로 몸을 숨겼네
꿔 꿩 꿩, 꿩 우는 소리 묻혀버렸네
쌕쌕거려 구르는 방울새 소리
끼끼끼끼끼 청딱따구리 소리도 숨어버렸네
휫휫 휫 휘잇 삐삐삐삐 휘욧 휘욧 휘이 찌잇
되지빠귀 소쩍새 산솔새 종종종 모두 사라졌네
마파람으로 다복솔 잔가지까지 바르르 떨고
까악까악 까마귀가 저승에서 다시 손짓하는데
탕탕탕 탕탕탕 피눈물소리 가까이 들리는데
아아, 선흘곶이 후후 흔들리며 어디로 숨을까
저승으로 날아가 영영 생이별할까
가슴 한가운데 멍 자국이 아픈 세월 말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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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말들-제주4․3, 제70주년에

떠오르는 말들-제주4․3, 제70주년에
이은봉

쌀, 쌀, 쌀, 만세, 만세, 만세소리, 소리들로 가득한 골목, 도로, 거리, 산간, 총소리, 총소리, 탕탕탕, 탕탕

아우성, 비명, 피, 피, 피……군함, 바다 위, 함포사격, 폭탄 터지는 소리, 살 찢어지는 소리, 후다닥 도망치는 소리

동굴,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사람들, 강아지들 컹컹, 도야지들 꿀꿀…….질그릇, 짚그롯, 감자, 감자 먹는 사람들

동굴, 동굴 입구, 치솟는 연기, 일렬로 늘어서 있는 사람들, 총 든 군인들, 총 든 경찰들, 총 든 서북청년들

나자빠지는 하얀 솜바지. 주저앉는 검정 솜저고리, 흘러내리는 피, 피, 피, 포승줄에 묶인 채 처박혀 있는 사람들

동굴 속, 낡아빠진 고무신, 녹슨 놋수저, 놋젖가락, 찌그러진 반합뚜껑, 삭아빠진 댕댕이그릇, 흩어져 있는 뼈다귀들, 뼈마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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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하면 떠오르는 말은 무엇일까? 4․3은 한동안 ‘폭동’ 취급을 받아왔다. 최근까지 그냥 ‘4·3사건’으로 부른다. 4·3은 아직 제 이름을 찾지 못했다. 왜 아직까지 정명(正名)을 찾지 못했을까? 4․3은 항쟁이다, 4․3은 민중항쟁이다, 4․3은 통일운동이다, 라고 부르자 한다. 4․3하면 떠오르는 이름은 김달삼(金達三)이다, 이덕구(李德九)이다. 아니 토벌대이다, 서북청년단이다. 아아, 4․3하면 떠오르는 말은 폭도였다. 제주사람은 8할이 폭도였다. 4․3하면 떠오르는 말은 미국이다, 미군이다, 미군비행기이다. 아아, 미군이 총을 겨누었는가? 4․3하면 떠오르는 말은 쌀이다. 만세소리다. 도망치는 소리들로 가득한 골목이다. 도로이다. 거리이다. 산간이다. 아아, 죽임의 총소리이다. 탕탕탕, 탕탕. 그에 따르는 아우성이며 비명이다. 피, 군함, 바다 위, 함포사격이다. 폭탄 터지는 소리이다. 후다닥 산으로 오르는 소리이다. 4․3하면 떠오르는 말은 동굴이다. 아아,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사람들이다. 동굴 입구로 치솟는 연기이며 총 든 토벌대들이며 일렬로 늘어서 있는 사람들이다.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눈물이 나는 건, 그 너머에 아픔이 숨겨져 있는 언어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제주의 땅 아래에는 70여 년 동안 켜켜이 쌓인 엉킨 아픔이 있고 아픈 언어가 숨어있다. 4·3의 기억은 그렇게 날이 선 채 70년이라는 시간을 베어왔다. 1948년 당시 제주 인구의 9분의 1 수준인 2만5000∼3만 명이 4·3으로 희생됐다. 희생자의 33%가 어린이·노인·여성이었으며, 희생자의 86%가 토벌대에 의해 발생했다. 토벌대 전사자는 320명으로 집계됐다. 그렇지만 아직도 모르겠다. 4․3은 도대체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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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11)

기지로 돌아가거든
임화

5병대 7병단 1군단  
김생 김달삼 이호제 박치우 서득은
여러 슬기로운 지휘관들의 피
아직도 눈 위에 임리하고
청옥산 태기산 일월산
국망봉 백암산 준령들의 산정 위
피바람 불어 끊이지 않는 저
험준한 태백산 전구의 이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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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林華)가 1952년 7월에 쓴 시, ‘기지로 돌아가거든’의 한 구절이다. 시인은 한국전쟁 이전의 ‘빨치산’인 남로당 인민유격대 지휘관으로 전사한 동지들의 서늘한 이름을 부른다. 임화는 카프의 서기장을 역임하고,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 월북하여 남로당 계열의 입장에서 활동하였고, 한국전쟁 중에는 종군체험을 담은 시 「서울」, 「너 어디에 있느냐」 등을 발표하였다. 이후 북에서 숙청·총살당하는 비운으로 삶을 마감했다. 시에는 5병대 7병단 1군단 소속의 지휘관들이 등장한다. 김생 김달삼 이호제 박치우 서득은. 여기에서 박치우(朴致祐, 1909~1949)와 김달삼(金達三, 본명 이승진)이 눈에 띈다. ‘서양철학 1세대’의 대표적 인물 박치우. “약 2주일 전 태백산 전투에서 적의 괴수 박치우를 사살하였다.” 동아일보 1949년 12월 4일자 신문에 짤막하게 소개된 신태영 육군참모총장의 말이 박치우의 마지막 행적이다. 박치우는 북으로 올라 갈 수밖에 없었다. 1947년 10월 이후부터는 월북한 남로당 잔존 세력을 교육, 유격대로 양성하기 위한 ‘강동정치학원(江東政治學院)’을 세웠다. 평안남도 강동군 입석리의 탄광촌에 마련된 그곳은 당원들을 재규합하고 사상을 벼리고 무장투쟁을 교육하기 위한 군사학교였다. 하지만 자신과 월북한 좌익이 곧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일 것을 그는 직감했다. 1948년 8월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 이후에도 수세에 몰린 남로당 세력은 1949년 9월 총봉기를 통해 강동정치학원생들로 구성된 유격대를 남파했다. ‘여순반란’ 사건 이후 입산한 세력과 더불어 그들은 이미 6월부터 400여 명이 오대산 지구로 투입되었다. 1949년 가을, 박치우와 그의 동지들은 자신의 삶과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죽음의 문턱으로 걸어 들어갔다. 태백산 지구로 투입된 박치우의 1군단은 군경합동 토벌대에 의해 와해되고, 잔류병들은 제3군단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여 끝까지 저항했지만 끝내 태백산 인근에서 주검도 없이 산화했다. 4․3을 주도했던 김달삼은 자신의 최후를 어느 지명에 남겼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공식 지명인 ‘김달삼모가지잘린골(정선군 여량면 봉정리)’.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죽은 어느 빨치산 대장의 ‘잘린 모가지’는 왜 중요했을까.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되지 못했고, 서로를 절멸시키려고 했던 상처는 두터운 피딱지가 되어 말라버렸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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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의 딜레마

• 제주일보 승인 2019.06.03 19:26

불교 조계종이 불교 의식을 따르지 않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했다. 부처님 오신 날 법요식에서 합장(合掌)과 관불 의식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종교의 문제를 넘어 상식과 합리성, 존중과 이해를 갖추지 못 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황교안을 보면 딜레마에 빠진 느낌이다. 박근혜가 감옥에 갔을 때 그는 대통령권한대행이었다. 자신이 모시던 대통령의 옥바라지를 해줘야 할지 아니면 모른 척해야 할지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책상과 의자를 넣어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했지만, 반입이 되지 않았다. 태극기집회 노인들은 박근혜를 ‘묻지마’ 지지하는 유권자들이다. 표를 의식한다면 친박 이미지가 필요하다. 황교안은 박근혜에 대한 비판 여론과 상관에 대한 의리, 그리고 태극기 표 등 이러한 계산 속에서 책·걸상을 넣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을 것이다.
제주를 찾은 황교안이 ‘제주4·3특별법’ 처리에 대해서 말을 아꼈다. ‘국민 속으로-민생투쟁 대장정’ 일정으로 제주를 찾아서 보인 행동이다. 4·3특별법 개정안 처리계획을 묻는 말에 “원내에서 면밀하게 챙겨, 합리적인 방안을 찾겠다”고 짧게 답변했다. 이것 역시 그의 딜레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요즘 언론은 황교안이 ‘5·18 광주’, ‘불교’, ‘보수 통합’ 등 3가지 난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그의 3대 딜레마라고 분석한다. 그가 “무슨 염치로 5·18 기념식에 참석하느냐”는 집중 공세를 받았지만, 광주를 찾았다. 석가탄신일 법요식에서 합장하지 않았고 대신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불교계 반발이 나왔다. 보수 대통합의 실마리가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중대 과제다. ‘공안검사→법무부 장관→국무총리’라는 엘리트 코스를 거쳐 온 황교안은 서울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검찰에서 대검 공안1과장,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장, 서울중앙지검 2차장, 대구고검장을 역임하는 등 공안통 경력을 쌓았다. 공안검사 역시 그에게는 딜레마다.
공안검사(公安檢事)는 대공·선거·학원·외사·노동 등의 사건을 담당한 검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공안이란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뜻하는 말로, 공안검사는 원래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탄생했다. 1948년 8월 검찰청법 제정에 따라 공안검사가 생긴 이래 국가 안위나 공공 안녕보다는 정권 수호의 앞잡이 역할을 해 왔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아 왔다.
황교안은 1998년 공안 수사의 교과서로 불리는 책 ‘국가보안법 해설’을 펴내 ‘미스터 국가보안법’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2009년에 쓴 ‘집회시위법 해설서’에서도 4·19혁명을 ‘혼란’으로,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표현했다. 2009년 용산 참사를 두고는 ‘농성자들의 불법·폭력성이 원인이었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황교안은 걸핏하면 “이 정권의 좌파 독재가 끝날 때까지 결코 투쟁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좌파’도 시민들이 싫어하고 ‘독재’도 싫어하니 그 둘을 조합한 것 같다. 여기서 ‘좌파’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 모호하다. 또 ‘독재’ 운운한 그의 발언에 문제가 심각하다.
‘독재’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전매특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절 황교안처럼 대정부 집회를 했다면 처형됐거나 남산에 끌려가 거꾸로 매달렸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를 ‘좌파 독재’라고 꾸짖는 황교안의 모습은 자못 비장하지만 한없이 우습다. 그래서 황교안은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공안검사 출신이 독재 타도를 외친다’는 눈살을 받고 있다. 그는 이런 세간의 지적을 의식한 듯 ‘독재국가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좌파 독재를 종식하라고 했더니, 독재를 이야기한다고 (저에게) 뭐라고 한다”고 주장했다.
독재자(Strongman)는 견제받지 않는 절대 권력을 가진 집권자를 말한다. 또는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인 사람을 빗대어 일컫기도 한다. 원의(原意)는 ‘홀로(獨) 재단(裁)하는 자(者)’다. 예쁜 옷감을 자기 멋대로 가위질하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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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10)

잠들지 않는 남도
안치환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아~ 아~ 아~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노을빛 젖은 물결에 일렁이는 저녁 햇살상처 입은 섬들이 분노에 찬 눈빛이여,갈숲에 파고드는 저승새의 울음소리는아 한스러이 흐르는 한라의 눈물이어라

아~ 아~ 아~ 아~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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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긴 길을 걸어야 인간이 인간으로 불려질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전쟁터를 날아야 포탄이 없어질까/ 얼마나 더 죽어야 인간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까.’ 반전 가수 밥 딜런(Bob Dylan)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다. 201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은 포크 송의 아버지로 불린다.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상 선정 이유로 “미국의 전통음악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출했다”고 했다. 밥 딜런처럼 안치환(安致煥)도 어떤 문학상이든 수상할 필요성을 느낀다.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반역(反逆·叛逆, rebellion)은 기존의 권위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통곡(痛哭, weep)은 큰 슬픔으로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것을 가리킨다. 주로, 마음이 몹시 괴로울 때나 개인적 혹은 국가적인 위기 때, 죄를 회개할 때 통곡한다. 성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백성의 통곡 소리를 들으신다고 했다. 안치환은 평소 사람과 시를 엄청 좋아한다. 그의 곡 대부분이 시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많으며, 몇몇 대표곡은 아예 시에 멜로디를 붙여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앨범 하나를 통째로 시인 하나의 시에 멜로디를 붙여서 발표하거나, 시인에게 바치는 앨범 등 여러 가지로 시와 관련이 깊은 가수다. 정호승, 김남주, 김지하, 안도현 등등….. 특히 김남주의 시를 좋아한다. 1980년대 4․3의 상처와 아픔을 비장하게 묘사한 < 잠들지 않는 남도>는 대학가에서 콘 호응을 얻었고 자연스레 4․3의 노래로 공인받았다.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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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9)

한라산으로 난 길
김성주

붉은 꽃들이 부산스레 수풀을 헤치며 산을 오른다
붉은 꽃들이 붉은 열매를 남기고 툭툭 진다
붉은 꽃을 따라간 푸른 잎들이 붉은 잎으로 산을 내려온다
모두를 떠나보내고, 산은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는 것이었다

계절이 산을 오르고 내릴 때마다
산이 울어 핏줄이 터지고 섬이 젖는 것이었다
새들이 붉은 열매를 물고 날다가, 이따금
그 붉은 빛이 산의 피울음인 것을 알고는 떨구기도 했다

그리고 밤이면 몰래/ 마을로 내려와 우는 아이를 잠재우곤 했는데
산이 마을로 내려오는 것을 막으려고, 어제부터
밤새껏 가로등이 눈을 부라리며 보초를 서는 것이었다

부하의 총에 죽은 섬에서 제일 높은 군인이 취임 연단에 서던 날
“삼십만 제주도민 다 죽어도 좋다. 온 섬 다 태워도 좋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우렁우렁 연설 소리
한라산을 정복하는 건 남반도의 정산 자리에 오르는 일

날벼락 떨어져 타오르는 불길이 심장에서 쏟아지는 핏물이
이정표로선/ 한라산으로 난 길이 상여 길임을 아는지
소름을 털며 소 울음이 먼저 산으로 간다

오늘, 나는 그 길에 술 한 잔 올리고/ 때늦은 문상(問喪)염불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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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4.3희생자는 ‘빨갱이’, 그 유족은 ‘빨갱이 새끼’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한라산으로 난 길은 빨갱이가 되는 죽음의 길이었다. 1948년 5월 6일 제주지역 연대장이 교체되었다. 김익렬(金益烈) 중령을 해임하고 박진경(朴珍景) 중령을 발령하였다. 박진경은 일제 말기 일본군으로서 제주도에 주둔한 바 있다. 6월 18일 부하에 의해 암살될 때까지 한 달 열흘 가량 제주도에 머물며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연대장 취임식 때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는 발언을 했다. 박진경은 미군의 인정을 받아, 6월 1일 대령으로 진급하고, 6월 18일 그의 작전 방침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박진경이 암살당하자 미군사령부는 6월 21일 새로운 연대장으로 최경록(崔慶祿) 중령을, 부연대장에 송요찬(宋堯讚) 소령을 임명하였다. 이들은 모두 일제 때 전투경험을 가진 일본군 준위 출신으로서 미군정 시대에는 나란히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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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8)

제주도에 바치는 레퀴엠
김준태

어른들은 그랬다. 이름이 이어도인지 갈매기 섬인지는 모르지만 6․25 한국전쟁이 터지기 3년 전엔가 제주도에서 무슨 난리가 일어나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었다고 말하면서 바로 이 무렵, 그 섬에 수백 명의 젊은이들을 실어다 퍼부어 놓고 두두두두두……..집단총살을 시켜버렸다고 귓속말로 수군 수군거렸다.
해송과 풍란이 바위마다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섬. 어쩌면 유인도보다도 더 많은 슬픔과 더 많은 꽃과 주검의 잔해들이 쌓여있을지 모르는 그 섬을 바라보면서 어른들은 몸서리를 쳤다. 당시 아무도 말할 수 없었던 갈매기 섬, 아아 이어도-어부들은 이어도가 토해내는 미친 듯 한 물음소리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아흐, 그런데 어른들은 마치 무시무시한 비밀처럼 전설 같은 이야기를 서로서로 나누곤 했다. 그 시절 소년 김준태가 엿들은 어른들이 나눈 대화의 한 매목은 이러했다. -이어, 이어, 이어도를 본 사람은 죽는다-는 그것이 그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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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requiem)’은 위령 미사 때 드리는 음악이다. 정식명은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이지만 가사의 첫마디가 “requiem(안식을…)”으로 시작되어 레퀴엠이라 부른다. 진혼곡, 또는 진혼미사곡 등으로 번역되어 쓰이기도 한다. 4·3항쟁과 광주5․18은 국가폭력에 의하여 희생자들이 발생하였다. 둘 다 역사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상처를 알기에 제주의 아픔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진다. ‘역사적 사건’은 시간성 속에서 기억되어 현재의 우리 삶과 미래를 지배하는 원동력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 사건이라 할 수 있는 4·3항쟁과 광주5․18은 과거의 사건으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다. 바로 역사적 기억, 그리고 다양한 문화 예술적 텍스트로 구현되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피해 지역을 고립시켜서 역사 속에 묻었던 것은 4·3항쟁이나 광주5․18이나 무척 닮은꼴이다. 진실과 정의를 외면할 때 우리의 인권과 생명을 말살 시킬 수 있는 나쁜 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죽음과 죽음 사이에/피눈물을 흘리는/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우리들의 아들은/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우리들의 귀여운 딸은/또 어 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시인 김준태(金準泰)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1980년 광주5․18과 그 투쟁의 과정에서 군부에 의해 자행된 폭력에 대한 거부와 민주화를 향한 염원을 드러낸다. ‘제주도에 바치는 레퀴엠’도 마찬가지다. 섬이 가까운 전라도에서 어른들은 비밀처럼 전설 같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저 바다 건너 제주섬에서 무슨 난리가 일어나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이어도를 본 사람은 죽는다”는 이야기다. 국가권력은 제주사람들을 “실어다 퍼부어 놓고 두두두두두…….집단총살을 시켜버렸”다는 소문이다. 이 속에 학살로 인한 아픔이 존재한다. 김준태 시에 나타난 전반적인 시적 주제는 대체로 광주, 역사, 통일문제로 집약된다. 시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뚜렷한 해명방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생명존중과 사랑정신이다. 김준태의 시는 일반적으로 일상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범사회적인 시야로 확산되는 방식이나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역사의 흐름을 짚어나가는 방식을 통해 탄탄한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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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통 보수’가 걱정이다

전형적인 보수주의자는 “옛날이 좋았지! 왜 이놈 저놈 나와서 자꾸 바꾸려 드는지 몰라”라는 말을 한다.
보수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며 점진적인 발전을 검토하는 주의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는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나라에 해가 되는지 아닌지를 검토한다. 진보의 불안정성을 잡아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보수주의자들이 이승만에 대해 내리는 평가도 문제다.
“이승만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시죠! 이 분이 한국전쟁 당시 미국 형님한테 SOS 쳐준 덕분에 지금 우리나라가 북괴 놈들한테 안 넘어가고 이렇게 잘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승만 만세! 멸공의 횃불 만세! 미국 형님 만만세!”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더욱 가관이다.
“박정희는 반신반인으로서 지지리도 못 살던 우리 민족에게 젖과 꿀을 주신 분입니다. 이 분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금 따뜻한 밥을 먹고 살 수 있었을까요! 이 분의 따님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진보는 꼰대고 보수는 꼴통이다’라는 말이 있다. 꼴통보다는 꼰대가 낫지 않느냐는 항변도 있다. 현재와 같은 보수와 진보의 논쟁으로는 21세기의 변화를 분석할 수 없다. 보수와 진보의 진부한 논쟁은 권력 투쟁만을 위한 반대를 위한 반대의 퇴행성을 부추길 뿐이다.
요즘 자유한국당의 행태는 극우적 경향을 띠면서 ‘꼴통 보수’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가 무덤 속에 있어야 할 386 운동권 철학이 정부의 국정철학이 돼 당·정·청을 장악한다고 말했을 때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원내대표까지 극우 정치를 선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막간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행태를 보면서 자유한국당은 합리적 보수정당이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국내 극우 정치는 대통령 탄핵에 극렬히 맞섰던 이른바 가짜 태극기 세력이 정치적인 포악성과 폭력성을 근거해 만들어졌다. 책임 있는 야당이라면 이를 여과하고 정화해 대처해야 하는데 그대로 받아들였다. 극우 정치가 자유한국당 심장에 똬리를 튼 것은 너무 위험하다. 극우로 가는 자유한국당이 참으로 위험스럽다는 이야기이다.
극우 정치는 족보도 없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자신들을 한 순간에 파멸로 몰고 갈 위험한 선택이다. 5·18 망언과 세월호 모욕,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는 회피 수단일 수 있다.
정치 극단주의(Political Extremism)는 극단적인 진영 논리를 우선적으로 내세워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치닫는 정치 성향을 일컫는다. 좌파 성향의 정치 극단주의자들의 경우 ‘빨갱이’, ‘좌좀’, ‘좌빨’이라 불리며, 우파 성향의 정치극단주의자들의 경우 ‘애국보수’, ‘수구꼴통’, ‘우좀’, ‘토착왜구’라고 불린다. 물론 중도는 회색분자라고 논외로 친다.
그 주요 증상으로는 선동하거나 당하며 날조와 조작된 자료를 잘 이용한다. 진영논리에 매몰돼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의 잘못은 관대하게 넘어가거나 변명한다. 그 반대 진영에 대해서는 사소한 흠에도 비난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인다.
뭐든 간에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악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의 사람이나 단체를 ‘너 수꼴, 너 좌좀’식으로 정의하는 순간 욕설이 돼버린다. 우익의 끝에는 ‘수꼴’이 있고 좌익의 끝에는 ‘좌좀’이 있다.
보수도 없고 진보도 없고 ‘수꼴’과 ‘좌좀’의 판이다.
물론 자유한국당이 과거 ‘비대위’까지 만들어 ‘보수의 재건’ 이라는 기치를 내세운 것이 결국 또 한 편의 ‘공염불’이란 것을 증명하는 꼴이 아닌 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정녕 자유한국당은 국민 소수의 지지를 받는 보수꼴통으로 남고 싶은 것일까? 자유한국당의 지나친 극우 민족주의 행각으로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잔영을 떠오르게 한다.
거리로 뛰쳐나가고 악을 쓰는 자유한국당을 보면서 걱정이 앞선다. 한국 정치가 제 길을 찾으려면 정당부터 정신을 차리고 국민부터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국민은 늘 깨어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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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7)

반공강연․ 1 -관덕정에서
김경홍

길은 보이지 않았다
타향길이거나 아니면
아버지 나를 연명시킨 산길이거나 간에
길이 있다면 형틀을 이어매고도 갈 수가 있는데
하루를 살거나 그만 끝장내거나
길이 있다면
가는 길을 구걸하고도 싶은데
길은 보이지 않았다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적개심으로
찾아 헤매인 길
배신을 하거나 내가 당하거나
길이 있다면
가는 길을 강탈하고도 싶은데
길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광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책가방들이
안개무리로 뿌리 채 일어서
보일 듯 말 듯 떠오른 길은
이내 땅속으로 가라앉고
핏대를 세우고 불러도, 나발을 불고 부르짖어도
거짓은 언제나 거짓인 것처럼
써 준 대본을 읽을 때
눈물로 피눈물로 외칠 때도
거짓은 언제나 거짓인 것처럼
가야할 길은 보이지 않고
——————————————————————–시인의 아버지는 1948년 입산한다. 1950년 어머니가 조부모를 학살한 토벌군인과 개가해 의붓형을 낳고, 1956년 아버지가 8년의 피신 끝에 중문지서에 자수하고 제주, 서귀포, 성산포를 돌며 반공강연을 시작한다. 아버지는 당국이 써 준 대본을 읽을 때도 눈물로 외칠 때도 거짓은 언제나 거짓인 것처럼 가야할 길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재결합하였고, 종종 기관으로 끌려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999년 연작 시집 < 인동꽃 반지>를 상재(上梓)한다. 아버지의 반공주의(反共主義, Anti-Communism)는 거짓 반공주의였다. 1901년 신축년농민항쟁 당시 장두 이재수(李在秀))가 효수(梟首)된 광장. 3·1운동 28주기기념식을 끝내고 수천 명이 모여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양과자를 먹지 말자’고 외치던 광장. 1949년 6월 무장유격대 사령관 이덕구(李德九)의 시신이 내걸려 있던 광장. 그 광장에서 아버지가 당국이 써 준 대본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 아버지의 피눈물이 거짓이 거짓인 것처럼 시인의 거짓 파괴의 길은 너무 길고 험하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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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로 읽는 4․3(6)

4월 그 길
한문용

그날처럼 빛바랜 4월길을 걸었다
관투모살, 정뜨르비행장
한결 같은 파도소리와
골방에서조차 들리는
정의로운 할아버지 목소리
젊음 꽃 져버린 아버지 흐느낌
영혼의 소리는 들을 수 없어도
귓바퀴를 쫑긋 세우면
4월 숨소리 지금도 가지런하다
세월을 떠안은 기억 속에 벼린 울림
어눌한 기도 천상을 흐를 때마다
찌든 얼굴나무 한 그루를 심었던 나
살가운 봄볕에 나폴 거리는 동백꽃잎처럼
바람결에 떨어져도 아프지 않는 몸살
가버리면 그만인데, 보내버리면 그만인데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은
4월 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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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문용(韓文用)이 찾아나선 4월길은 너무 길고 험하다. 시인은 그 한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2013년 시집『서우봉노래』도 출간하였다. < 정의로운 할아버지> 한백흥(韓伯興)과 < 젊은 꽃 져버린 아버지> 한재진(韓在珍). 두 영혼을 끌어안고 < 바람결에 떨어져도 아프지 않는 몸살>을 않고 있으며, < 가버리면 그만인데, 보내버리면 그만인데>를 읊조리지만 < 바람결에 떨어져도 아프지 않는 몸살>을 앓고 있다. 1948년 11월 1일 토벌대가 주민들을 모래사장에 집결시키고 청년6명을 끌고나와 처형하려 했다. 마을이장 한백흥이 나서 “이 청년들의 신원을 보증할 테니 죽이지 말라”며 만류했다. 토벌대는 오히려 “이 자도 폭도의 일당이다”라며 한백흥을 총살하고 청년들과 함께 파묻었다. 청년시절 조천3.1만세운동을 적극 주도하고 가담한 함덕리의 대표적 인물. 일본 경찰에 붙잡혀, 징역 4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4․3 당시 억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한 몸 내던진 몸이지만, 그동안 독립유공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2002년부터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음에도 17년이 지나서야 어렵게 인정을 받았다. 한백흥의 아들 한재진은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령이 발동되어 산지주정공장에 구금되었고, 동료들과 함께 정뜨르비행장에서 학살되었다. 시인의 운명이 어찌 이처럼 잔혹할 수가 있을까. 지금 시인의 내면에 불타오르는 분노는 역사의 시어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문학은 시대적 아픔의 표현이다. 문학은 사회적 약자들의 분노를 승화시켰을 때 생명력을 획득한다. 분노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비굴하게 굴복하기만 했던 권력에 대항할 용기를 주기도 한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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