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사람들

그리운 사람들
-함덕해변에서

김관후

기다리지 않아도 될까
그 아픈 세월 꼭꼭 누르고 떠났는데
질질 끌려 저 파도에 묻혔는데
목 놓아 부르지 않아도 될까

숨 헐떡이는 소리,
숨 끊어지는 소리,
힘겨워 숨 돌릴 수 없었구나

서우봉 몬주기알에서 숨져간 님들
해변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될까

살 길 찾아 떠났다는데
부산 저갈치에서 헐떡였다는데
남대문시장에서 좌판을 깔았다는데
밀항선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는데

남은 식솔들 떠난 사람들 부르며
그 사태에 끌려간 동네어른들 위하여
큰 심방 불러 굿판이나 벌여볼까

기다리지 않아도 될까
목 놓아 이름 석자
부르지 않아도 될까

저 모래밭에 하나 둘 불러모으자
두 눈 모으고,
시비 걸고,
써움질하며
크게 된 놈,
어려운 놈,
잘난 놈,
못난 놈
한 올 한 올 그물로 엮어내어

저 해변에 흩어진 울음소리도 하나 둘
저 멸치 떼와 함께 긁어모아
거친 손,
뜨거운 손 맞잡고 버티면서
제상에 숟가락 꽂고 향 피우고
긴 곡소리 얽고 얽어
그 사연 묻혀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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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의 민주주의’가 희망이다

[제주일보] 우리는 과거 민주주의에 절망하면서 살아왔다.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는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탈원전 공론화라는 ‘숙의 민주주의(熟議民主主義·deliberation democracy)’가 실험되면서 한국만큼의 민주주의 국가도 드물다는 생각으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숙의 민주주의’는 ‘심의 민주주의(審議民主主義·iscursive democracy)’라고도 불린다. 깊이 생각하여 충분히 의논한다는 숙의(熟議)가 의사결정의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 형식이다. 합의적(consensus) 의사결정과 다수결 원리의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법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요건은 단순한 투표를 넘어선 실제적인 숙의라는 점에서 민주주의 이론과 다르다.

‘숙의 민주주의’는 서구사회뿐만 아니라 중국, 몽골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좀 더 정치와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촛불혁명을 통해 시민의 직접참여에 대한 욕구가 어느 때보다 팽배한 상황에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을 계기로 ‘숙의 민주주의’는 확산될 전망이다.

오늘날 세계 전역에서 대의제 민주주의가 대다수 민중의 신뢰를 잃고 있다. 무슨 때문일까?

선거로 뽑힌 정치가들이 자기들의 개인적·정파적·계급적 이익만 챙길 뿐, 민중의 삶의 요구에는 거의 혹은 전혀 응답하지 않는 과두 금권지배 체제로 변질·타락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다양한 형태의 ‘숙의 민주주의’이다.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평범한 시민들이 ‘미니 퍼블릭(mini public)’을 구성하여 거기서 국가나 지역공동체의 중대사를 숙고와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결정하는 방법이다.

우리사회에서 ‘숙의 민주주의’를 통한 공론화가 절실한 사안은 무엇이 있을까? 지금 논의를 시작한 선거제도개혁이다. 여야의 이해충돌이나 기득권 챙기기 때문에 정치권 차원에서 제대로 논의되기 어려운 선거제도개혁을 위한 공론화 과정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탈원전 공론화로 자신감을 얻고 부동산 보유세(保有稅) 인상에도 ‘숙의 민주주의’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다. 보유세 인상 등 증세는 국민 다수의 지지가 바탕이 돼야 추진 동력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증세(增稅)의 표적은 다주택자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제주도에서도 어떠한 정책결정 방향을 결정할 때 도민과 함께 만드는 ‘숙의 민주주의’의 방식을 도입하면 어떨까? 단순한 찬․반 양론을 벗어나, 감춰진 갈등을 드러내고 침묵했던 목소리가 터져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이해 당사자들끼리 서로 무엇이 다른지, 무엇은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깊이 토론해 합의의 단서를 찾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2공항 부지 문제는 제주지역 최대 갈등 현안이다. 실제로 성산읍 5개 마을은 반대대책위를 구성, 절차적 타당성과 천연동굴 분포, 오름 절취, 기상 문제 등 부실 용역 의혹을 제기하며 원점 재검토를 요구해 왔다. 성산읍대책위 간부가 목숨을 건 단식농성을 이어가자 제2공항 문제는 전국적 이슈로 떠올랐다.

처음부터 제주도가 도민들의 참여와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통해 이견(異見)들을 좁히고 설득을 중요시하는 민주적 절차를 밟았으면 어땠을까? 다수결로 결정하기보다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으면 어땠을까? 그 본질은 바로 ‘사회적 선택(social choice)’을 위한 공론이다.

‘숙의 민주주의’는 ‘평등한 참여’와 ‘충분한 숙의’를 보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최소한 전체 국민의 모습을 간직한 축소판으로서 미니 퍼블릭을 선정한다면 보다 ‘평등한 참여’가 가능하다. 역동적인 토론과 상호작용을 통해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면 숙의는 더 깊고 넓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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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세비를 줄이자

[제주일보] 요즘 일부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볼 때, 과연 그들에게 세비(歲費)를 지급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지난해 국회 본회에서 노회찬 의원은 국회의원의 세비를 절반으로 줄이고 “같이 잘 살자”는 제안을 하였다. 당시 의원들의 분위기가 너무 조용하였다.
국회의원은 면책특권(免責特權)이나 불체포특권(不逮捕特權)은 말할 것도 없고 사무실 유지비, 차량유지비, 유류비, 우편요금, 비행기나 철도이용 등 수많은 특권이 있다. 1년 세비는 1억4000만원으로 OECD 국가 중 3위이다. 사무실 유지비 및 기름값 등 경비 수천만 원도 별도로 지급된다. 하지만 보수 대비 효과는 OECD 최하위 수준으로 비교된다.
스웨덴 국회의원은 전용차나 개인비서, 그리고 면책특권과 같은 특별한 혜택이 없다. 주당 평균노동시간이 80시간-일반 노동자는 40시간으로 2배를 일한다. 일이 너무 힘들어 재선(再選)을 기피할 정도다. 주로 혼자 일한다. 개인보좌관이나 가방을 들고 따라다니는 비서관이 없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의 나라도 기사는커녕 기름값도 주지 않는다.
덴마크 국회의원은 대부분 자전거로 출퇴근하는데 우리는 검정색 대형승용차 일색 아닌가? 세계에서 가장 부패가 적은 나라, 덴마크의 국회의원은 하루 평균 12시간 일하지만 특권은 없다. 좁은 사무실에 비서는 의원 2명 당 한 명, 사무실 가구도 자비로 구입한다.
우리 국회의원의 보좌관 9명은 너무 많다. 보좌관 문제와 함께 만년 떡밥이 세비 문제이다. 인터넷 포털에 무보수 봉사직으로 해야 한다는 취지의 댓글이 범람한다. 세계 거의 모든 국가는 한국보다 보좌관 숫자가 적다. 유럽 국가는 보좌관이 없고 그냥 국회의원이 몸으로 뛰거나 필요에 따라 공동으로 사용하는 타이피스트가 존재한다.
우리 지방의회 의원들도 국회의원을 빼닮았다. 보좌관을 두어야 한다고 야단이다. 지방의원은 일제 강점기부터 있어왔지만 당시 투표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부유층 정도에 불과했다. 1952년에 지방선거가 시행되면서 이후로 주기적으로 지방의원을 뽑아왔으나 5·16으로 없어졌고 1991년에 재도입되었다.
1991년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될 때 지방의원은 무보수 명예직이었다. 하지만 회의 참석에 따른 수당이 지급되었고 일비·회의수당·회기수당으로 일컬어졌다. 2006년 월정수당으로 변경되면서 유급제가 도입되었고 2007년부터는 월정수당이 연봉제로 바뀌었다. 2008년 법정 기준액이 제정되었다. 그렇다고 로컬 거버넌스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방의원은 주민의 정치적 대표다. 해당 자치단체의 재정·정책·사업·조례 등을 심의·의결하고 행정업무까지 감시·감독할 수 있는 지위를 누린다.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대접과 인사를 받으며 단상 위에 자리 잡고 목에 힘을 준다. 의원세비는 세금으로 지급된다.
요즘 제주도의회 의원들에게 지급되는 의정활동비가 또 인상되었다. 내년에 지급되는 의원들의 월정수당도 인상되었다. 공무원 보수 인상률을 적용한 것이다. 의정활동비를 더하면 내년에 지급되는 의정비는 연간 5701만5000원이다. 생계형 정치꾼이 돼버린 것이 아닐까.
제주도 일자리를 보면, 다른 지역에 비해 전국 최하위 수준이다. 제조업 비중이 낮고 1차·3차 산업 비중이 매우 높다보니 자영업, 일용직, 임시직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그나마 제조업도 음식료품 가공 및 화장품 제조가 대부분이며 10인 미만의 영세기업이 다수이다. 제주도는 재정이 빈약하여 국가에서 보조금을 받아 충당하고 있다. 지방의원들이 의원 활동비나 보좌관 문제부터 들고 나오니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더 어두운 꼴이다. 지방의원들은 서민들과 아픔을 함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주민들은 의정비 인상에만 혈안이 된 의원들을 다음 선거에서 반드시 솎아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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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길두(崔吉斗)의 역사체험과 글쓰기

“이제 강탈의 무서운 손톱은 함부로 조국의 자취를 할퀴고”
-시인 최길두(崔吉斗)의 역사체험과 글쓰기

-시인 최길두의 생애
“내 故鄕은/ 섬의 나라라/ 파-란 물결 춤을 춰 좋아라// 情든 땅/ 꿈의 나라라/ 하-얀 燈臺 깜박여서 좋아라// 밤이면, 離別의 뱃고동에/ 섬 색시에 젖는 옷고름// 떠나는 눈물 수건에 그 안타까움/ 어찌 안 좋아// 오/ 내 고향/ 동백꽃 피는 나의 고향/ 상처도 가지가지매/ 어쩌라고 안 그려요 글쎄/ 내 故鄕은/ 섬의 나라라/ 물새들 날아 좋아라/ 情든 땅/ 꿈의 나라라/ 人魚떼 울어 좋아라// 날이 새면-갯변가에/ 靑春의 피리 불던/ 사랑의/ 曲調曲調에/ 그 옛이라 안 좋은가.// 아하/ 내 故鄕/ 구름 피는 나의 故鄕/ 옛 자취도/ 갖이, 갖이매/ 어쩌라고 안 그러 글쎄”-최길두 시 「故鄕의 노래」(1938)

시인 최길두(崔吉斗)는 1917년에 제주시에서 태어나 시·소설·시나리오·무용가극 등을 두루써 온 작가로 활동하다 2002년 85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제주공립보통학교와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 구례군농회기수(農會技手)와 제주도농회기수를 지냈다. 광복 후 제주상고와 제주중 등 여러 중학교 및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7년 교편생활을 접고 작품 활동에 전념하면서, 1964년 1월 23일 시내 청춘다방에서 결성된 제주문인협회의 전신 제주문학자협회 결성에도 참가, 희곡분과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제주여자중고교 예술제 악극 원작·연출(1962) 등의 경력과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78)에서 「鼎沼岩 花煎놀이」 연출을 맡았다. 특히 1965년 연합신문 주최 희곡 공모에서 입선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시를 썼으며, 시집을 발간한 것은 광복 이후이다. 해방 후 최초의 문학 동인지인『 新生』의 주역으로 제주문학의 디딤돌 역할을 놓기도 했다. 작품집으로는 시집 無明土』(1989)․『異端의 妖花』·『老期의 流浪』·『異國의 하늘아래서』, 소설집 『海山脈』(1993)을 비롯하여, 『虛無한 사랑이여 이대로 安寧』·『悲戀의 江』, 회고록 『黃昏의 길목에서』(1994), 시나리오 작품집『雪花』· 『비련(悲戀)의 강(江)』·『 素心草』 등이 있고, 무용가극으로 『봄의 頌歌』·『봄을 기다리는 順伊의 집』 등이 있다. 특히 『海山脈』은 이재수난과 제주4․3을 연결 짓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해방 전후, 제주사의 한복판에 서서 생생한 삶을 체험하며, 그 혼란의 역사를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나갔던 제주문학의 증인이다. 일제강점기에 비밀독서회(秘密讀書會)와 청진단파사건(淸津短波事件)을 경험했고, 해방 후에는 ‘4·3’으로 거센 폭풍에 휘말리기도 했다. 1947년의 3·1절기념 시위사건에 연루(連累)되어 포고령 위반죄로 5,000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제주4·3사건이 발발한 후인 1948년 11월 제주공립농업학교에 감금되었다. 특히 최길두는 제주보통공립학교 동기동창들을 품속에 간직하고 살았다. 노령의 동창회에 참석하여, 한국사회와 제주사회를 흔들던 박충훈· 강재량 ·고범준․ 문종후 ·박진후· 백창운· 김방훈 등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의 장남인 가수 최진은 아남레코드 전속가수와 배호 가요제본부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칠성로를 소재로 옛 추억을 표현한 서정성 짙은 음악「칠성로이야기」로 데뷔했으며, 그가 부른 「해송」 역시 제주바다의 모진 바람을 이겨내는 강한 소나무를 인생의 등불에 비유한 노래다.

-비밀독서회와 청진단파사건

“-너는/ 妖邪스런 魔女에 사랑받는 慘酷의 獸柵/ -醜惡을 좋아하는 구대기의 凱歌/ -冷血動物의 個性있는 世界/ -人爲的인 地獄을 자랑하는 文明의 허울 좋은 鐵面皮의 化粧師/ -世紀의 冒險的인 자랑/ -無錢家의 住家/ 故鄕 잃은 猛虎떼의 우리./ 그리고 無慙한 屠殺場// 오 너희들의 反省없는/ 人面獸心의 얼굴이여/ 또 만나리라/ 나의 巨强한 思想의 鐵馬는// 너희들의 腐敗한/ 鄕愁가 그립단다/ (제주도 淸津事件에서 獨房)”-최길두의 시 「無題 5-監獄」(1943)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으로 어용(御用)은 가중되고, 젊은 학도들은 징병이란 이름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전쟁의 암운은 거칠기만 하였고, 전방은 농무(濃霧)로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콩나물이 시루 속에서 자라듯이 제주도에서 항일청년들의 모임인 비밀독서회가 결성이 되고, 바로 그 중심에 최길두가 있었다. 40년대 초부터 뜻있는 지식인청년들이 비밀독서회를 조직, 일어로 번역된 세계사상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조선이 나아갈 길에 대해 토론했다. 최길두는 회장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비밀독서회는 일주일에 두 번 모였다. 최길두의 집과 광인청년으로 통하는 이상희(李相熙)의 집이었다. 이상희는 머리는 깎지 않고 고슴도치 모양이며, 신발은 짚신에다 너덜한 한복차림이었다. 일경의 눈을 피해 광인으로 분장하고 징용을 피하였다. 회원들은 우리 역사책과 세계사상전집, 세계문학전집을 비밀리에 돌려서 읽었다. 모이는 날에는 우애를 도모하고, 전시(戰時)를 논하고, 독립을 기원하며, 읽은 책을 토론했다. 비밀독서회는 처음 7명이 결속된 모임이었다. 최길두를 비롯, 이상희․ 김운제(金雲濟)· 김귀석(金貴錫)· 정기준 ․조수인․ 윤한구(尹漢九)등. 한 달에 한 번은 산천단에서 회합을 열었다. 니이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도취하기도 하였다. 이상희는 한국전쟁 당시 바다로 끌려가 아깝게도 운명하였다. “지금의 전황(戰況)은 어떤가? 정말 조선민족이 독립될 수 있을까? 피 끓는 청년으로써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그들의 공통된 과제가 되었다. 당시 일본군대본영(大本營)은 그들의 허위선전을 통하여, 그들의 패배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황군(皇軍)의 대승리를 조선민중에게 선전하고 있었다. 이들 독서회원들은 조선민족의 독립을 갈구하며 이를 위한 국제성세의 상황인식을 위해 비밀리에 단파수신라디오를 구해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李承晩)의 「2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했다. 독서회의 멤버가운데 김운제와 김귀석은 일경(日警)의 감시가 심해지자 모의소령(謀議蘇領) 이 가까운 청진으로 가서 불라디보스토크로의 탈출을 시도하다가 함경북도 변경마을에 서 일본군국경수비대에 체포된다. 당시 청진일보와 경기일보는「不逆朝鮮人一抹打盡」이라는 기사로 자세하게 보도한다. 이것이 바로 청진단파사건이다. 두 사람은 12월 추운 겨울 청진감옥에 수감이 되었다. 모진 고문이 이어지고 이들은 제주도 친구들을 불기 시작했다. 청진경찰서 특별수사반은 급기야 명단을 가지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가장 주목했던 것은 누구의 지도와 사상적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가 바로 최길두였다. 최길두는 형사대의 습격을 받고 수감되었다. 최길두가 징용을 피하고자 제주보통공립학교 위촉강사로 몸담고 있을 때였다. 청진단파사건은 태풍이었다. 감방은 초만원이었다. 1945년 1월 3일 관련자 12명이 검거된다. 최길두를 비롯 이상희 고영수(高榮洙)․ 김용수(金瑢洙)․ 윤한구(尹漢求)․ 오기윤(吳基允)․고창위(高昌位)․ 추성환 ․이기형․ 이호택 ․고영일․ 박창재(朴昌宰) 등이다. 최길두는 사상범으로 취조가 시작되었다. “너는 조선문학을 한다면서…..”. “너의 지도를 톡톡히 받았어!”, “너의 사상적 지도와 존경하는 선배라 그랬어!”, “소련으로 넘어가려는 계획과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등의 끔직한 취조였다. 물론 고문도 이어졌다. 감방의 하늘은 절망의 하늘이며, 얼굴을 비춰줄 별 하나가 없었다. 목이 타도 목을 추겨줄 물 한 방울이 없었다. 주위는 철책이며 감시하는 호랑이나 사자뿐이다.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가족들이다. 형사는 한쪽에 두 주전자를 들고 와서 책상 위로 두면서 “어서 먹어라”고 윽박질렀다. 감방의 식사는 콩을 넣은 꽁보리밥이며, 찬은 해초에 소금을 뿌린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문학! 그래도 사상? 떠벌이지 마! 졸장부 사나이…….” 최길두는 결국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연행된 윤한구는 청진감옥에서 옥사했으며, 김귀석은 행방은 아직까지 알 바가 없다. 최길두는 「故苑」이란 제목의 시에서 「불러 부질없는 무궁(無窮)의 국토(國土)는/ 悍惡한 倭族人의 鐵槍에 못박혀/ 어두움의 獄處로 못박혀 맡아/ 반만년(半萬年)의 겁이 깃들은 故苑은/ 그 따사로운 모습이 서노니!」라고 그 아픔을 노래했다. 「故苑」은 사적123호인 창경궁(昌慶宮)을 의미한다. 민족을 사랑하고 항일정신에 눈을 뜬 시인의 독서와 시작업은 오직 민족해방을 염원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나는 解放이 되면서 聽診 외에 별 罪없이 숱한 獄苦를 치렀다. 解放은 다시없는 기쁨이 아니고 한겨레가 다투는 괴로움이었다. 8․15의 解放은 民族의 自由와 기쁨을 안겨주었지만…….단합(團合)을 잃고 右往左往거리는 방황이었다.” -최길두의 자서전 『황혼의 길목에서』81쪽

– 『新生』 탄생과 최길두의 활약

“나/ 벗님의 무덤가에/ 찾아 울어보것만/ 피어 香기는 것 말없는 들꽃/ 限없이 그려 불러 痛哭해도/ 그대 잠자코 먼 곳으로 잠들어라// 彌勒과도 같이/ 碑銘의 차돌 밑에/ 그대 무어라 말이 없어도/ 생각건대 人間도 슬기러워/ 그 이름도 아름다운 < 詩人!>이었던 것을…….// 이제/ 웃음도 가고/ 노래도 가고/ 피고 진 薔薇처럼 그대는 덧없어도// 그대 남긴 寶玉의 노래/ 永遠한 샘인 양/ 끊임이 없을 것을…….// 자거라/ 平安히 黃泉의 꽃그늘에/ 다시 못 올 碑銘이여/ 고-히 자거라(詩人 金以玉을 추도하며)-최길두의 시 「詩人의 碑銘」(1994)

‘제주현대문학 前史’는 김문준(金文準)·김명식(金明植)·김지원(金志遠)·신동식(申東植)·강관순·김이옥(金二玉)·김병헌(金秉憲)·최길두·이영복(李永福)·오본독언(吳本(篤彦)·이시형(李蓍珩) 등 작가중심이다. 1940년대에는 시인 김이옥(金二玉)이 『흐르는 情緖』라는 미간행 시집을 남겼다. 일본어로 쓰인 김이옥의 시는 당대 제주인들의 정서가 잘 반영되어 있다. 최길두는 1944년 11월 일본에 거주하던 김이옥이 고향을 방문했을 때, 그의 시 47편을 옮겨 적어 유실을 막았고 해방 후에는 그를 추도하는 글을 썼다. 김이옥의 작품은「이여도」·「海女·1」·「海女·2」·「슬픈 海女여」·「나의 노스탈쟈여」·「먼 他鄕에서」·「訪故哀賦」·「옛城에 過去를 묻지 말아라」·「나는 詩人」·「사랑스런 나의 집」등이 있다. 특히 최길두는 일제징용을 피하여 전남 장흥군 대덕면 신월리 매형산판(妹兄山坂)에서 숨어살면서 쓴 한편의 사랑시 「山사람들」과, 그 후 매형과 서울로 올라가 돈화문과 창경원을 구경하고, 두 편의 민족시(民族詩)를 썼다. 「敦化門」과 「古苑」이 바로 그 작품이다.

“……(전략)……어두운/ 이 터로/ 잠들은 넋이여!/ 그들은 大韓의 老翁이 아니냐/ 부엉이의 울음 속에 꿈꾸는 애들이여/ 너희들은 檀君의 아들이 아니냐/ -싸늘한 문벼개에 來日을 꿈꾸는/ 暗黑한 밤거리로/ 大韓의 魂아// 아무리 歷史는 强者의 손아귀에/ 그 形體를 바뀐다 할지라도/ 여기에 소름 치는 비꼬움의 現實이/ 어찌 詩人의/ 가슴을 잠재우랴!…..(후략)….” -최길두의 시 「敦化門」중에서 .(1942)

“……(전략)…..너의 憂鬱은 이곳에 깊노라/ 나의 괴로움은 여기에 미치노라!/ 오!/ 故苑이여!/ 눈물의 昌慶圓아!/ 멍이 든 너의 悲憤을 말하려마….// 이제/ 强奪의/ 무서운 손톱은/ 함부로 祖國의 자취를 할퀴고/ 一國의 애달픈 運命의 사슬을/ 暗鬱한 살 窓으로 말하는가 보나니/ 터저라고 불러보는/ 白衣民의 國土는/ -다만 鐵柵 안에 짐승만이 우는가….(후략)”- 최길두의 시 「古苑」중에서.(1942)

해방이 되자 국내외 각처에서 활동하다가 귀향한 뜻있는 지식인들이 모여 1946년 1월 시사 문제와 문학을 위주로 하는 제주도 최초의 잡지『新生』을 간행했다. 그 중심에 시인 최길두가 있었다. 발행인은 高日昊(필명 高石志)이고, 이영구(李永福의 옛이름)․이시형(李蓍珩)․김병헌(金秉憲) 등이 동인으로 참여했다.『新生』편집 후기에 “우리 고향에서 나온 시인 金二玉 군의 시집 『흐르는 情緖』의 文獻을 이 新生誌面을 통하여 소개된 것이 퍽이나 질겁다.” 하고 있다. 본문에는 “三十을 終幕으로 不幸히도 夭折해 버린” 그에 대한 시평과 추도의 글도 실려 있다. 최길두가 보관하고 있던 시인 김이옥의 시작노트와 제목과 일부 시를 번역해서 실었다.『新生』은 제주에서 처음으로 발간된 종합 교양지이지만, 잡지 간행 주체에 문학인들이 다수 포함됐고, 잡지 구성에서도 문학 작품의 비중이 절반을 넘었다. 신국판 형태로 발간되었다. 내용은 크게 시사적인 것(논설, 논단 등)과 문학적인 것(시, 소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석지의 「情神革命」과 이일선(李一鮮)의「宗敎社會思潮」, 김종륜(金琮崙)의 「道義의 擁護」등은 완전 독립 쟁취에 대한 기대와 과제 등이 주를 이룬다. 특히 최길두는 이영복과 함께 동인지를 발간하면서 제주문학의 기반을 닦았다. 문학 작품으로는 김이옥·최길두·이영복의 작품들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최길두는 최일(崔一)이란 필명(筆名)으로 시 「廢墟」·「哀貧의 農者」를, KT라는 필명으로「詩人鄕」 등 3편을 발표하고, ‘鄕土詩人 金二玉을 追悼하여’라는 글도 썼다.

“…..(전략)……貧困과 虛弱-飢餓의 埋葬으로 주책없는 눈물을 뿌리치며간 다우 비우시려오! 그래도 여브오/ -주녀의 악몽에서 눈을 뜨구려/ -중책의 의자를 바라보구려/ 떠리진 갈옷과 메마른 골상 북데기의 잠자리 악취의 냄새/ 머리에서 발까지 경멸의 농부들의 주럭난 자태를 그려보구려. 엇떠한 고옥으로 술푼의형제 게우…..(후략)”-최길두의 시「哀貧의 農者」중에서

이영복의 작품으로는 「追憶」·「悔淚」·「憂鬱」 등의 시와 「夜路」라는 소설이 있다. 특히 「夜路」는 해방 직후 제주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그 외에 김병헌(金秉憲)의 「바다의 思索」·김필규(金必圭)의 「田園에서」· 김덕양(金德孃)의 「輓歌」를 소개하고 있다. 김이옥의 유고시 「노스타루쟈」·「生活」·「墓標」등 일본어 작품을 최길두가 부분번역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영복은 1940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제1외국어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년 3개월 만에 중퇴하고 노동자가 되었다. 『靑年作家』 1942년 7월호에 일본어 소설 「畑堂任」을 발표하였다. 이영복은 1943년 8월 오사카에서 체포되어 강제 귀국 당하였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濟州民報』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제주4·3 후에 문학 활동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이시형은 1944년 『國民文學』 8월호에 「이여도」가, 1945년 『國民文學』 2월호에 「新任敎師」가 추천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광복 후 제주농업중학교 교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1947년에 3·1절기념 시위사건이 발발하고, 이시형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투쟁 방침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한국전쟁 때 예비 검속되어 수장(水葬)된 것으로 알려졌다.
『新生』은 해방 직후 제주 지역의 문화적 역량을 자율적으로 결집한 최초의 성과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다만 『新生』의 주역들이 4·3사건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고 지속적인 활동을 하지 못해 전쟁기에 형성되는 문단 등에서 제외되었다.

“조급히 흐르는 물살에 바위를 두드리면/ 어두운 램프에 떠올라 보인다/ 검은 안색에/ 눈시울 적시고 있는 슬픈 해녀여/ 생명 짧은 처녀이기에/ 멋 부리는 심정에서 사온 치마를/ 벽에 그을린 채 바다에서 지새노라면/ 나오누나 가느다라이 휘파람 한숨”-김이옥의 시「슬픈 海女여」

“해녀야/ 깨어 있느냐// 春三月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바다에/ 비바리 裸身을 내던져// 영차 영차 가는 곳은 어드메냐// 바다 속/ 전복 소라의 나라에/ 주인이사 기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검은 몸뚱이의 풍만함이 애처롭구나”-김이옥의 시 「海女 1」
-제주4․3에 연루되다

“평화의 섬 이 땅에/ 怪毒스런 벌레떼가 侵食한 이래/ 이들의 생활은 어둠으로 방황했다/ 무서리가 까린 虛荒한 들판에서/ < 삶>의 싹이 꺾인 그들에게는/ 다시 캄캄한 虛空 저 멀리/ 彗星처럼 손짓하는 세계가 있다”-최길두의 시 「無明土」에서(1947)

해방이후 잠시 평온했던 제주문단은 제주4․3으로 또 한 차례 거센 폭풍에 휘말리게 된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소리 없이 죽어가던 시절, 문인들이라고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최길두는 계엄사령부에 의해 자신의 시집 『無明土』가 몰수당하고 연행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해방 이후 일제치하의 암울했던 시절을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그린 시집 『無明土』는 그 제목 때문에 대한민국이 ‘어두운 땅’으로 표현했다는 오해를 받았다. 『新生』에 참여한 최길두․ 이시형․ 이일선 등 제주출신 문인들은 제주4․3에도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제주에서 최초로 결성된 정당조직은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제주도(島)위원회였다. 1946년 2월에는 통일전선체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 民族戰線)을 결성, 제1차 미‧소 공위에 공동으로 대처하기도 하였다. 제주민전 결성식은 1947년 2월 23일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일구락부에서 있었다. 의장단으로 남로당 제주도위원장 안세훈, 승려인 이일선(李一鮮), 제주중 교장 현경호(玄景昊) 등 3명이 추대되었다.『新生』 창간호에 「宗敎社會思潮」를 기고한 이일선이 바로 의장단에 보였다. 이날 제주민전 결성식에서 명예의장으로 스탈린‧박헌영‧김일성(金日成)‧허헌‧김원봉(金元鳳)‧유영준(劉英俊)이 추대되었다.
“< 詩>는 나의 연인! < 生>의 동반자! 광상(狂想)과 명상(暝想)으로 환상시(幻想詩)의 동굴을 찾아 헤매면서……험준한 늪(沼)을 건너면서 오늘을 걸어왔던 인생의 나날…..노기(老氣)에 이르러 1989년 장편시집 『無名土』를 폈으며 젊은 날의 꿈을 거닐었던 『異端의 妖花』도 펴냈던 것이다.”- 최길두의 회고록 『黃昏의 길목에서』 51쪽

최길두는 그의 회고록에서 ‘幻想詩’의 동굴을 찾아 헤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광상(狂想)과 명상(暝想)으로 덧칠한 시인의 환상시는 과연 어떤 시인가? 광상은 미치는 것이며, 명상은 어두운 것이다. 환상(幻想, fantasy)은 정신분석학 용어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 따르면 과거의 트라우마(trauma)적인 사건을 무의식적 욕망에 따라 현재에 소환하여 재구성할 때 시각적으로 무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자크 라캉(Jacgues Lacan)은 환상이 무의식의 욕망을 시각적으로 무대화하는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정식화를 받아들이고, 동시에 환상의 보호 기능을 강조하였다. 왜 최길두에게 트라우마적인 사건이 소환됐을까? 그것은 바로 강압적인 일제 말 비밀독서회 사건으로 빚어진 그 어두운 밑바닥 체험이며, 현대의 최대 비극인 제주4·3사건 당시 소위 유지사건으로 감금된 상태에서 인간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체험 때문이다.
최길두가 그의 회고록 『黃昏의 길목에서』에서 “나는 3個餘月의 죽음의 獨房에서 목숨을 支撑하고 풀려나왔다.”고 고백했듯이, 조국의 해방공간도 시인에게는 풀어나갈 수 없는 막힌 공간이며 또한 한 많은 세월이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해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미군정은 4월 5일 아침 전남 경찰 약 100명을 응원대로 편성해 급파하는 동시에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시령부를 설치하였다. 5월 3일 딘(William F. Dean) 군정장관은 무장대를 총공격해 사건을 단시일 내에 해결하라고 경비대총사령부에 명령했다. 1948년 11월 중순께, 대규모의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됐다.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미군은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벌어진 강경진압작전 때에는 서너 살 난 어린이부터 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총살당했기 때문이다. 1948년 가을경 제9연대 본부가 주둔하고 있는 제주농업학교에는 ‘농업학교 수용소에 갇히지 않으면 유명인사가 아니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제주도의 법조‧행정‧교육‧언론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감금돼 있었다. 여기에 시인 최길두도 감금돼 있었다.
농업학교 수용소 수감자 중에는 최원순(崔元淳, 제주지법 법원장), 김방순(金邦順, 제주지검 검사), 현경호(玄景昊, 초대 제주중 교장‧민전 공동의장), 이관석(李琯石, 제주도 학무과장‧제주중 교장), 고칠종(高七鍾, 농업학교 교사), 박경훈(朴景勳, 제주신보 사장‧전 도지사‧민전 공동의장 역임), 신두방(申斗玤, 제주신보사 전무), 김호진(金昊辰, 제주신보사 편집국장), 현인하(玄仁廈, 경향신문 기자 겸 제주지사장), 이상희(李尙熹, 서울신문 제주지사장), 강재량(康才良, 신한공사 주정공장장), 양문필(梁文弼, 신한공사 제주농장장), 오창흔(吳昶昕, 의사) 배두봉(裵斗鳳, 항일운동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 천막을 쳐서 마련한 수용소는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대기소와 같았다. 최길두는 수용소 안에서 그들의 만행(蠻行)을 예언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라고 몰아 죽였다’거나 ‘여러 여성을 겁탈했다’는 내용도 시인에게는 너무나 처절하게 들렸다. 그는 “탁성록(卓星祿)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예쁜 여자들만 여러 번 바꿔가며 살았는데 나중에 제주를 떠나게 되자 동거하던 여인을 사라봉에서 죽이고 갔다. 그는 사형권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증언했다.

“허물어진 저 城가 비추는 달은/ 그 옛날에 그 모습 세로웁고나/ 老松그늘 욱어진 芳草 언덕에/ 홀로앉아 옛 노래 불러 보나니// 아름다운 그 時節 그대 목소리/ 아스라이 속삭여 들려오것만/ 따사로운 그 님의 모습은 가고/ 나 홀-로 님의 노래 불러 봄이여// 對答 없이 지새는 달 그림자는/ 아련히도 옛 懷抱 잠겨있는데/ 그 어디에 님의 모습 더듬어 봐도/ 속절없이 달빛만 흘러가누나(1949년)”-최길두의 시「荒城의 追憶」

-어째서 『異端의 沃花』일까

“저만치 落陽이 보인다. 나이 七十七世. .櫓저어 온 航海를 돌아보면 < 삶>이 바다위에 떠오르는 懷古가 아련하다. 一草花꽃 피는 봄이 있었고….草綠 무르익는 여름 있는가 하면…… 紅葉이 물드는 가을도 있었다. 어느 사이 해 저무는 아득한 水平線에 낙양이 보인다.// 오 땀으로 노저어온 人生의 滄浪위에 수없이 떠 흐르는 過去의 殘骸! 嬰兒의 따사로운 亂房이 있었고, 靑春이 불붙는 사람도 있었으며-友情과 貪慾과 情熱을 쫓아 이로 하여금 全紙로 나가 사운 悔恨의 孱骨들………..이제 젊은 날에 썼던 이삭의 < 詩>를 모아 < 落穗幽室>의 시집을 펴낸다. 그 이름도 多情한 『異端의 沃化』, 『怒氣의 流)』. 50年도 지나간 오늘 落照를 기념하는 열매인가 보다. 東京으로 떠나면서……..(제주시 都坪洞) 自宅에서)” –< 落穗有實>의 머리말.

‘< 落穗有實>의 머리말’ 글은 1994년 국학자료원에서 발간한 시인 최길두의 시집 『異端의 妖花)』의 서문(序文)이다. 여기에서 최길두는 1937년부터 작품을 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37년에 「絶望」을 비롯하여 「鄕土의 꿈이」·「無心」·「懷鄕」·「懺悔」 등을 1938년에 「思想)」·「故鄕의 노래」·「暮景)」등을, 1939년에 「平生」· 哀戀」·「四行詩」 등을 내놓고 있다. 최길두는 정통 가톨릭 신자이다. 그의 시집 제목에 차용된 ‘이단(異端, hersy)’은 가톨릭에서 정통학파나 종파에서 벗어나 다른 학설을 주장하는 일이나 교파를 말한다. 어째서 미치고 어두운 환상시의 동굴을 헤맸을까? 또 거기에 어째서 아리따운 꽃일까? 그것은 시인의 본성일 수밖에 없다. 헬라어 원어 ‘하이레시스(hairesis)’의 기본 의미는 ‘선택’(choice), ‘의견’(opinion)으로서 단순히 ‘분파’, ‘파’ 등을 일컫는 경우(행 22:22)와 ‘교회 내에서의 편당’(고전 11:19)을 뜻하는 경우, 그리고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이단’(벧후 2:1) 등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유다인들은 바올로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 있다가 “이런 놈은 아예 없애 버려라. 죽일 놈이다”하고 소리 질렀다.”-신약성서 사도행전 11:22.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진실한 사람들이 사람들이 드러나려면 분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신약성서 고린토전서 11:19.

“전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거친 예언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도 거짓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몰래 끌어 들일 뿐만 아니라 피를 흘리셔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주인을 부인하며 자기 자신들의 멸망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신약성서 베드로후서 2:1.
오늘날 ‘이단’이란 표현은 거의 대부분 복음에서 떠나 다른 복음을 좇거나 교회 내에서 당파심을 불러 일으켜 교회의 분란을 조성하는 경우에 국한해서 사용된다. 초대교회 시대 기독교는 당시의 정통 종교라 할 수 있는 유대교에 대해 ‘이단’으로 불려졌다. 세속의 조직에서도 정통적 신조에 대해 이설(異說)을 내세워 파당을 짓는 자를 가리켜 이단이라고 부르며, 한 동아리가 아니라고 보는 것을 ‘이단시(異端視)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시인 최길두는 어째서 굳이 ‘異端’이란 말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하필 ‘ 沃花’일까?

“눈물이여/ 외로움이여// 이브. 아담과 같은 괴로움이여// 사탄의 慾望으로/ 聖架의 眞理를 저버린 헛된 바람// 熱望은 深淵斷崖에서 墮落하고/ 曙光은 거문 獄門을 닫았다// 暗黑한 곳이다/ 울어도 부르짖어도/ 갈 바 없는 獄處다// 이 門을 두들기고/ 저 門을 두들기고/ 오는 것/ 불덩이, 배암, 악귀// 오/ 한줄기 太陽은 어디 있는지/ 地獄으로 헤매는/ 나의 絶望을…..”-최길두의 시「絶望」(1937)

“水精보다도 맑은 純潔의 젖줄/ 사탄 뒤끓으는 地獄으로 하여금/ 人間像의 不幸한 사랑의 나그네.// 가시밭길 흙탕길 죽음길 걸었나니/ 그 이름도 아름다운/ 人類의 십자가여 ”-최길두의 시 「十字架」(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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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물가에 눈물 떨구며 아들 찾는 백발이여’

‘옛 물가에 눈물 떨구며 아들 찾는 백발이여’
-아들 차령을 잃고 슬픔으로 여생을 보낸 시인 김경종(金景鍾)

1. 석우 김경종은 누구인가?

2005년쯤일까? 문우들과 대화중에 시인 김학선과 김성수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자신들 할아버지 석우(石友) 김경종(金景鍾, 1888~1962)의 유고집 『白首餘音』을 서울에 있는 형 김학무가 보관하고 있는데 북제주문화원에서 변역·출간하면 어떠하겠느냐는 이야기였다. 북제주문화원이 고서를 번역하여 출판 중이라, 일단 유고집을 보고 평가를 내리고 싶었다. 그들 형제 중 김학렬은 오현고와 연세대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에서 오랫동안 봉직했던 눈여겨보았던 후배이기도 하다. 
『白首餘音』원본이 도착하고, 절친한 젊은 번역가 백규상(白圭尙)에게 평가를 부탁하였다. 백규상은 소농(小農) 오문복(吳文福)의 수제자로 이미 탁월한 번역 실력이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白首餘音』 번역본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白首餘音』의 저자 김경종은 누구인가? 일제강점기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고 은일(隱逸)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뛰어난 시재(詩才)를 드러낸 우리고장의 정통유학자. 제주시 노형동에서 태어나 작고할 때까지 영주음사(瀛洲吟社)의 사장을 지내며 사문(斯文)이 쇠퇴해진 가운데 유림을 규합하는 데 힘쓴 인물. 영주음사는 1924년 봄 도내 문인 123명이 모여 설리한 문인단체였다.
김경종은 전라북도 계화도(界火島)에 건너가,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로부터 여러 해 가르침을 받았다. 간재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 13세 때까지 오서오경(五書五經)을 두루 읽다가, 21세 때 충청도 아산(牙山)에서 유학사상을 익혔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국권침탈을 목도하고서, 해도(海島)로 들어가 후학을 양성하고자하는 결의를 보이기도 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68세였다. 1913년 73세 때에는 더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계화도로 옮겨, 10여 년 동안 후학을 양성하면서 성리학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특히 김경종은 당대 제주의 유림인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 행은(杏隱) 김균배(金勻培, 1888~1982) 등과 교유하며 칠성로에서 한약방을 운영해 생계를 해결하면서 시 짓기를 즐겼다. 김석익은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이미 기울어지자 민족혼을 진작할 계책을 찾아 먼저 『耽羅紀年』저술에 몰두하여 1915년에 완성하였고, 1916년 가을에 『耽羅觀風案』의 오류와 빠진 부분을 수정하였다. 2015년에 『耽羅紀年』이 제주문화원에서 번역․ 발간되었다.
김경종은 『白首餘音』에 수록된 시작품「행은 김균배의 회갑운을 따서(次杏隱金勻培回甲韻)」를 통하여 김균배와의 우정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김균배는 조천면 북촌리에서 출생하여 수은(水隱) 김희돈(金熙敦)과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에게 수학하였다. 2005년에 행은의 『謹齋 北學日記』가 북제주문화원에서 번역․ 발간되었다.

“장수하는 집안에는 크고 화한 유풍 있어(壽家自有泰和風) / 통달함과 궁함으로 어찌 천작을 논하리(天爵何論達與窮)/ 평일에는 쌓인 책에 훗날을 꾀했으며(平日貯書遺後計)/ 늘그막 이룬 덕은 앞 공적을 따른 것을(晩年成德賴前功)/ 남녘고을 오랜 모임 시에는 상대 없고(南州舊社詩無敵)/ 북해의 술동이엔 술이 텅 빈 적 없어(北海深樽酒不空)/ 그대와 난 동년임이 우연한 일 아닐지니(君我同庚非偶事)/ 늙어서 몸과 마음 사귐을 허하였네(老來交興許心躬)” -「次杏隱金勻培回甲韻」(행은 김균배의 회갑운을 따서)

2. 백수여음의 내용

석우 김경종은 고종 25년(1888)에 제주시 노형동에서 태어나 경술옥사(庚戌屋社)․무자년난리(戊子年亂離)․경인사변(庚寅事變) 등 구한말 이후의 격동하는 세상의 간난을 한 몸으로 겪으며 사문(斯文)의 쇠퇴(衰退)를 한탄하였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제주 성안의 칠성로에서 한약방을 경영, 생계를 해결하면서 뜻을 함께 하는 벗들과 시 짓기를 즐겨하였다.
『白首餘音』은 2권으로, 시(詩)와 문(文)을 각 권에 따로 모아 연대별로 기록하였다. 시의 구성은 병술년(丙戌, 1946) 이전의 18수와 병술년 이후 정유년(丁酉, 1946)까지의 362수로 총 380수이다. 칠언절구(七言絶句) 28수, 칠언율시(七言律詩)가 352수이다. 병술년 이전의 시가 18수에 불과하다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왜정치하에서 철저히 은거하였고 광복 후에 한 가닥 사도부흥의 희망을 가지고 시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송암(松岩) 오기두(吳琪斗)․ 문연(文淵) 고경수(高景洙)․ 우석(右石) 최원순(崔元淳) 등 당시 교유했던 인물들과 단오(端午) ․칠석(七夕) ․중양(重陽)․ 제석(除夕) 등의 세시퐁속, 사시(四時)의 변화에 따른 자연풍경과 시절세태의 변화, 거기서 느끼는 노년의 감회 등을 읊고 있다.
평범한 음풍영월(吟風詠月)로 보이지만 자세히 음미해 보면 인생을 직관하고 하늘의 뜻에 순응하려는 도학자(道學者)로서의 마음가집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연대를 표기하지 않고 기록하여 놓은 병술년 이전의 시가 18수 불과하다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일본치하에서는 철저히 은거하였고 광복 후에 한 가닥 사도부흥(斯道復興)의 희망을 가지고 시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문장은 을유년(乙酉, 1945)부터 병신년(丙申, 1956)까지의 총 28편의 글을 수록하고 있다. 무자년 제주4․3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당시 경찰 당국과 서북청년단의 만향을 지적한「이승만에게(與李承晩書  己丑)」, 경인사변 직후 이승만 대통령을 성토한 「이승만 성토문( 李承晩聲討文  庚寅)」등이 눈에 띈다. 충(忠)과 의(義) 앞에서는 사사로이 목숨을 보전치 않으려는 곧은 절개가 드러나 보인다. 또 직언하는 태도 역시 조선시대 언관(言官)들의 전형(典型)과 아주 닮았다. 문의 구성은 서(序) 10편, 설(說) 3편, 기(記) 3편, 서(書) 1편, 제(題) 1편, 제문(祭文) 3편, 조문(弔文) 3편, 성토문(聲討文) 1편, 상량문(上樑文) 2편, 언행록(言行錄) 1편 등이다.
석우 김경종은 말년에 수전증(手顫症)으로 붓을 집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수초(手草)함에 있어 문자를 연필로 기록하였다. 반백(半白)의 세월에 연분(鉛粉)이 닳아 희미해졌다.

3. 제주4·3, 너무도 불가사의하다   

“아, 너무도 불가사의하다. 믿을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전대미문이고 미증유의 대참사이다. 인간이 인간을, 동족이 동족을 그렇게 무참히 파괴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죽음이 아니다. 짐승도 그런 떼죽음은 없다.”-소설가 현기영의 「쇠와 살」에서   제주4·3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최소 3만 명이 학살당하고 130여 개 마을이 소각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왜 죽었는지 모르면서 죽어갔다. 미국을 모르고, 미국의 세계전략도 모르고, 섬 주민들에게 몰살을 가져온 제주4·3은 도무지 이해불능이다. 그들은 제주도의 8할을 붉은 색으로 칠하여, ‘붉은 섬’ 혹은 ‘Red Island’라고 명명했는데, 그 붉은 색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 대량학살을 그들은 ‘Red Hunt’라고 불렀다. 
제주섬에 불어닥친 비극을 맨 먼저 드러낸 것은 문학이다. 문학은 제주도민에 드리운 상처가 얼마나 큰 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고발한다.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가 나오고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기 전, 이미 문학은 제주4·3의 진실을 분명한 언어로 담아왔다. 
제주4․3 작가들은 정권에 의한 ‘관제 기억’에 대항하는 ‘민중의 기억’을 역사화하는 책무가 있다. 제주4·3에 대한 기억을 말살하려 했던 공권력의 공식 기억은 제주4·3을 봉기한 사람과, 당시 죽은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라고 했다. 이게 얼마나 왜곡되었는가? 4·3문학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그들은 죽어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언어를 발견하는 일이다. 민중의 기억은 대학살에 대한 기억이다. 정권이 이 기억을 말살시키려 했다. 그렇지만 작가는 민중의 기억을 되살려서 정권의 불합리한 공식 기억을 물리쳐야 한다. ‘관제 기억’에 대항한 ‘기억투쟁’을 촉구해야 한다. 그것이 4·3문학의 몫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 전선에서, 제주공동체의 몫을 수행하였는가? 제주작가들이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부분이 제주4·3기간 동안에, 식자층이라 불리는 유학자들에 의해 한문으로 쓰여진 문자(文字)들로, 대표적인 유학자 김경종의 『白首餘音』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찰은 산으로 도피한 자들을 쫓지 않고 바닷가 마을로 소개된 사람들을 체포해 한 장소에 모아놓고 눈을 감도록 한 뒤 매수한 사내에게 지목하게 하고 모두 죽여버립니다. 이 무슨 참담한 지경입니까?” 제주4·3 당시 제주의 유학자 석우 김경종(1888-1962) 선생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4·3의 실상을 알리고 이를 막아줄 것을 호소하는 서한과 한국전쟁 당시 형무소 수감자들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학살 책임을 통렬히 꾸짖는 글이 발견됐다. 북제주문화원이 최근 펴낸 석우 선생의 < 백수여음>이라는 문집에는 당시 군·경과 서북청년단의 행패와 이승만의 책임을 서릿발처럼 비판하는 글이 포함돼 눈길을 모으고 있다. 이 문집에는 시 380수와 문장 28편이 수록됐으며, 그가 생전에 직접 육필로 쓴 글들이다. 석우는 당대 제주의 유림인 심재 김석익, 행은 김균배 등과 교유하며 제주시 칠성로에서 한약방을 운영해 생계를 해결하면서 시 짓기를 즐겨 문인단체인 ‘영주음사’에 참여하기도 한 한학자다. 4·3사건 당시 장남을 잃은 그는 1949년 이승만에게 보낸 장문의 서한에서 “군·경이 무자비한 방법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즐긴다”며 군·경의 진압실태를 폭로했다. “이러한 말을 믿지 못하면 본인을 망언한 죄로 먼저 다스려달라”며 자신에게 책임을 먼저 물을 것을 요청한 석우는 “그렇지 않으면 경찰을 쫓아내고 참혹하게 죽은 귀신들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1950년에 쓴 ‘이승만 성토문’에서는 이승만의 학살책임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있다. “옛날 항적(항우)은 진나라의 항복한 병사 40만여명을 살해하였다. 만세에 모두 무도하다고 일컫는다. 지금 이승만이 나라 안 죄수 수십만여명을 죽였으니 포학무도함이 항적과 더불어 어떠한가”라며 4·3 희생자와 한국전쟁 당시 형무소 재소자들에 대한 집단학살의 책임을 물었다. “어찌하여 스스로 백성을 죽여 시체가 산과 같고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게 하였는가. 모든 군자들이 나란히 성토에 호응하여 잔학함을 통렬히 벌주고 민족을 보호한다면 천만다행이다” 손자인 김학렬(55·한국은행 경제교육센터 원장)씨는 “할아버지가 일신의 불리함을 알았다면 어두웠던 시대에 이 문집을 폐기했을 것”이라며 “불의함을 참지않으면서도 시인이자 한학자로서 고매한 삶을 추구하셨다”고 말했다. 제주/허호준 기자’ -한겨레신문 2007년 4월 3일 기사

“警察輩不追山谷之逃避捕提海村之踈開聚立一場所皆令合目而一巡察之合目甚固然後使買收漢指之買收漢指之多則所得亦多故被指此東指西盡殺之鳴呼此何慘境那若其山谷逃避者追捕之如是殺之則道民皆悅服也何其老弱七十八十婦人幼兒如是慘酷那”(경찰들은 산골로 도피한 자들을 쫓지 않고 바닷가 마을로 소개된 사람들을 체포하여 한 장소에 모아 세워두고 눈을 감게 명령을 내리고는 한 번 순찰을 합니다. 눈을 감게 명령을 내리고는 한 번 순찰을 합니다. 눈을 감으라고 거듭한 연후에 매수한 사내를 시켜 지목하게 합니다. 매수한 사내의 가리킴이 많으면 얻은 것도 또한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저쪽을 가리키고 이쪽을 가리키고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가리키는 대로 모두 죽여 버립니다. 아아! 이 무슨 참담한 지경입니까? 산골에 도피한 자들을 쫓아가 체포하여 이와 같이 한다면 도민이 모두 기뻐하며 좇을 것입니다. 어찌 그 칠팔십의 노약자와 부녀자, 어린아이들에게 이와 같이 참혹한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김경종의 「與李承晩書」(이승만에게)중 일부

‘與李承晩書/ 濟州儒生金景鍾致書于/ ………(中略)…….本島人民非皆暴動也中間不良子弟不聽父母)之訓 暗相呼應而成黨 作群連絡山賊威脅村落督出穀錢畵深夜現東出西避以尋國軍之力禁之不能……..(後略) (제주 유생 김경종은 이승만 각하께 편지를 올립니다…..(중략)…… 본도의 백성들은 모두 다가 폭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선량하지 못한 자제들이 부형의 훈계를 듣지 않고 서로 불러 응하여 모임을 만들고 무리를 이루어 산적들과 연락하고 촌락을 위협하여 곡식과 돈을 내치길 재촉하며 낮에는 숨었다가 밤에는 드러내며 동쪽에서 나왔다가 서쪽으로 피하니 평범한 국군의 힘으로는 금하게 할 수가 없고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양민 소개령이 내려져 불사르니 불량한 자들은 산 속으로 도피하고 선량한 자들은 바닷가 마을로 소개되었습니다. 진정 그 세력의 처음에 어찌하였습니까? 경찰들은 산골로 도피한 자들은 쫓지 않고 바닷가 마을로 소개된 사람들을 체포하여 한 장소에 모아 세워두고 눈을 감게 명령을 내리고는 한 번 순찰을 합니다. 눈을 감으라고 거듭한 연후에 매수한 사내를 시켜 지목하게 합니다. 매수한 사내의 가리킴이 많으면 얻은 것도 또한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저쪽을 가리키고 이쪽을 가리키고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가리키는 대로 모두 죽여 버립니다. 아아! 이 무슨 참담한 지경입니까? 산골에 도피한 자들을 쫓아가 체포하여 이와 같이 한다면 도민이 모두 기뻐하며 좇을 것입니다. 어찌 그 칠팔십의 노약자와 부녀자, 어린 아이들에게 이와 같이 참혹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 군인들이 지나간 곳에는 옥석이 함께 불타지만 얼굴에는 혹여 괴이치도 않습니다. 이른바 지방치안의 책무로써 그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합니다. 아아! 경찰들은 저 무슨 마음입니까? 또한 겨를 없이 소개되다 도중에 방황하는 자들이 소개된 자들이 참혹함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이끌고 산골로 들어가 버리니 이것이 이른바 연못으로 물고기를 몰고 수풀로 참새를 모는 것입니다. 온 산의 바람과 눈에 얼어 죽고 굶어 죽다 남은 목숨들과 먼저 도피한 자들이 함께 섞여 귀순하여 옴에 죄가 없는 자들은 새로 만든 부락으로 보내고 죄가 있는 자들은 형무소로 보냈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죽은 자들은 선량한 백성들의 늙고 약한 사람들입니다. 죽지 않은 자들은 불량한 젊은이들입니다. 죽어 마땅한데 죽지 않고, 죽지 말아야 하는데 죽는 것, 이것은 신령과 사람이 원통해 하고 노여워하는 것입니다. 또한 시내로 소개된 자들의 말로는, 서북청년단의 불학무식한 자들로 특수부대를 만들어 종일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가두게 합니다. 한 명의 이름을 불러 고문하고 좌우로 붙잡아 두들겨 기절에 이르면 묻기를, “너는 산폭도에 가담했느냐? 너는 남로당에 가입했느냐? 너는 돈과 곡식을 많이 내쳤느냐?” 기절한 사람이 답할 수 없고 다만 고개를 흔들고 턱을 움직이면 말하길, “저놈이 모두 자수하고 승낙하였다.”며 청취서를 작성하여 이를 보냅니다. 사찰단과 경찰국서장, 부설 군재판 또한 청취서에 의거하여 재판을 함에 일 년, 이 년, 삼 년, 사 년, 오 년을 선고합니다………(중략)………당시의 경찰들을 먼저 쫓아내고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용납하지 못하게 하시어 무죄한데 참혹하게 죽은 혼령들을 널리 불러내어 죽은 귀신들의 원한을 풀어주십시오. 다음은 감옥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풀려나야 하는데 풀어주지 않음은 밝지 못한 것입니다. 풀려주지 말아야 하는데 풀어주는 것 또한 밝지 못한 것입니다. 분명케 조사한 연후에 죄상을 드러내어 사람을 죽이고 방화하고 돈과 곡식을 훔치고 빼앗음을 범한 자들은 종신의 금고로써 뒷사람들의 본보기로 보이시고 시내에 소개되어 체포된 자들은 바로 먼저 풀어 주십시오. 그 나머지 사소한 죄로 갇혀 타인에 해되지 않는 자들 또한 모두 풀어 주십시오. 신령과 사람들의 노여움을 풀어 주시고 한 마음으로 힘을 모은다면 삼팔선의 장벽을 앉아서도 허물어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신령과 백성들을 노하게 하고서 국가의 일을 이룬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본생의 구구한 이 말은 평범한 한 사내로서의 사사로운 견해가 아니라 곧 대중의 원하는 바입니다. 또한 국가가 꾀하는 정책에 두려운 것이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개가 두려워하며 재배합니다.)’- 김경종의 「與李承晩書-己丑」(이승만에게)중 일부

‘(前略)承晩之爲人尙不及項籍之奴염而其暴虛無道則與項籍齊等……(下略) (전략)승만이라는 위인은 오히려 항적의 종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그 포학무도함은 항적과 더불어 나란하다. 하늘의 도는 지극히 공정하여 항적의 죄는 스스로 목을 벰에 이르렀다. 승만의 죄는 천 번 참수하고 만 번 도륙을 내어도 오히려 남은 죄가 있다. 감히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예와 같이 이 백성의 위에 거한다. 대개 일찍이 논한 요즘의 국가의 난적은 곧 공산당의 살인방화자이다. 만약 그 공산당의 무리라면 죽임이 가하고 멸함이 가할 것이다. 지금 이른바 죄수라는 자들 모두가 다 그러한 무리는 아니다. 혹은 유인에 빠지고 혹은 모략에 빠지고 혹은 혐의에 빠지고 혹은 재액에 빠진 자들이다. 경찰들은 산중의 폭도를 보면 머뭇거리며 피하며 체포도 할 수 없으면서 다만 민간의 혐의자들만을 체포하여 죄목을 끌어 만든다. 또한 선량한 백성 중 재액에 빠진 자들을 모아서 돈과 곡식을 빼앗긴 것으로 죄목을 끌어 만든다. 가령 죄수 중에는 진범으로 죽일 수 있는 자는 열에 혹 한둘이고, 혐의를 끌어 만들 수 있는 자는 열에 대여섯이고, 양민 중에 재액을 당한 자는 열에 팔구이다. 대략 이와 같은데 남한의 수십의 형무소는 차고 넘치어 수십만에 이르고 있다. 북군의 입성에 미치어 “부화뇌동할 염려가 있다.”고 말하고는 급히 학살령을 내리었으니 (죄의) 경중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심하게 모두다 죽여 버렸다. 승만의 포학무도가 이에 여기에 이르렀다. 저(승만이)가 말했듯이 부화뇌동의 염려가 있었다면 미리 먼저 각각 돌아갈 곳으로 석방을 하여 그 아비와 아들, 형제들이 기뻐하고 서로 경사로 여겨 나라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윗사람에게 복종하였을 것이다. 혹 한둘의 부화뇌동하는 자가 있어 적군과 더불어 한 몸이 되었다면 쫒아내고 죽이고 멸함이 모두 가할 것이다. 어찌하여 스스로 그 백성을 죽여 시체가 산과 같고 흐르는 피가 내를 이르게 하였는가? 옛사람의 이른바 ‘위로 천왕께 고하고 아래로 방백에 고함’에 또한 전할 곳이 없다면 국제연합안보이사회에 고하여 그 죄를 크게 성토하여 서녘 하늘의 약수의 밖으로 보내어 동방예의지국에 함께 설 수 없게 함이 가할 것이다. 국내의 모든 군자들이 나란히 성토에 호응하여 잔학함을 통렬히 벌주고 민족을 보호한다면 천만 다행일 것이다.)’ – 김경종의 「李承晩聲討文  庚寅」(이승만 성토문)중 일부

4. 아들 김창진 김천형무소에서 운명

제주4‧3사건의 기점이 되었던 1947년 3월 1일로부터 1948년 4월 3일을 거쳐 1954년까지 4‧3사건과 관련하여 사법부의 재판을 받고 형을 언도받은 사람들은 수천 명에 달하였다. 제주4‧3사건 관련 재판으로는 제주지방법원‧광주지방법원‧대구고등법원‧대법원 등에서 치러진 일반재판과 미군정 당시 행해진 군정재판, 군인‧군속을 대상으로 한 군법회의 등이 있었다.
4‧3사건 관련 재판을 받았던 상당수의 사람들은 벌금형‧구류‧집행유예 등을 언도 받았지만, 금고‧징역 등의 실형을 언도 받은 사람들은 제주도에 형무소가 없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이들 형무소 재소자들은 형기를 채우고 출소하기도 하였지만, 열악한 형무소 수감 환경 때문에 옥사하기도 하였고, 상당수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불순분자를 처분하라는 상부 명령에 따라 총살당하였다. 이들 형무소 재소 중 사망자들에 대해서는 희생 일시‧장소‧경위 등을 알 길이 없어 그 유가족들은 그들을 행방불명 희생자로 4‧3사건위원회에 신고하였다.
‘1948년 군법회의’로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 가운데 무기징역 24명은 1949년 3월 4일에 대구형무소에 이송되었다. 징역 15년형 202명은 목포형무소에 수감된 지 얼마 없어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징역 10년형‧5년형 일부는 김천형무소로 이송되었다가 1950년 4월 28일 부천형무소로 옮겨졌다. 목포형무소에서 진주형무소로 이송된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 대구형무소에 있던 10여 명은 1950년 1월 14일‧17일 양일에 걸쳐서 부산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전주형무소 수감자 일부는 형무소가 비좁아져서 1949년 4월 안동형무소로 이감하였다.
‘1949년 군법회의’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 300명 대부분은 1950년 1월 17일과 20일에 부산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전쟁 발발 후 10월 3일에 다시 150여 명이 마산형무소로 옮겨갔다.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200여 명의 여성 재소자들은 수감 한 달만에 대부분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석우 김경종의 아들 김창진(金昌珍)의 경우 김천형무소에서 한국전쟁으로 사망하여, 남은 가족들은 제주4·3희생자 신고를 마친 상태이다. 특히 『白首餘音』에는 1949년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당시 제주4·3의 진상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보낸 장문의 편지글 「與李承晩書 己丑(1949)」(여이승만서 기축)과 나중에 쓴 성토문 「李承晩聲討文 庚寅(1950)」(이승만성토문 경인)은 육지형무소에 수감됐던 제주4·3 연루자들의 무고한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승만의 만행과 죄상을 폭로한 글이다.
그리고 『白首餘音』에 수록된 시 중 다음은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애석하게 써 내려간 작품이다.

「本道四三之變家兒昌玲以橫厄拘在晉州適遭敵兵入城生死不知一往探問事已逝矣又見矗石樓亦灰矣遂取其原韻以叙悲懷」(본도의 4·3사건에 아들 창령이 뜻밖의 환난을 당해 진주에 붙들려 갔는데 때마침 적병이 들이닥쳐 생사를 알지 못했다. 한 번 가서 탐문해 보았지만 이미 죽은 뒤였다. 다시 촉석루를 찾아보니 또한 재가 되어버렸다. 드디어 그 원운을 취하여 비참한 감회를 적어본다.)

“山河万變水東流(산천 만 번 변하여도 물 동으로 흐르나니)/ 白首呼兒泣古洲(옛 물가에 눈물 떨구며 아들 찾는 백발이여)/ 節義當年忠死地(절의는 이 해 맞아 충성스레 죽어가고)/ 兵戈此日?灰樓(전쟁이 겁나고나 이날 누대 재 되었네)/  神明倘識焦心恨(신명이 행여 타는 한스러운 맘을 알까)/ 世亂空添觸目愁(세상의 어지러움에 괜스레 더해진 근심)/ 骨肉不知烏有在(아들이 어딨는지 아아 아지 못 하겠네)/ 惟魂遙向故園遊(혼 되어 노닐었던 옛 동산을 향하는가)”

5. 두 지사에 대하 작품은 부정적

초대 박경훈 지사가 물러나고, 제2대 유해진 지사가 부임하였다. 이에 석우 김경종의 「도지사 유해진을 맞으며(仰本道知事柳海辰)」라는 시작품을 남긴다.

“전화의 안개구름 나라에 걷혔으니(戰國烟雲捲海東) / 태평시대 벼슬길 예 오늘 같아지고(昇平宦路古今同)/ 어양땅 상서로운 보리비는 집집마다(漁陽瑞삼千家雨)/ 소백의 감당교화 나라안에 퍼진다네(召伯甘棠一國風) / 죽마 탄 아이들은 기뻐 덕을 칭송하고(竹馬歡聲兒頌德)/ 부들채찍 은택으로 다시 공을 입올리니(蒲鞭惠澤更稱功)/ 우리고을 다행히 어진 지사를 얻어서(吾州幸得賢知事)/ 이곳의 도민들이 감화됨을 보겠구려(可見斯民感化中)”-「仰本道知事柳海辰」(도지사 유해진을 맞으며)

제주도지사는 초대 박경훈(朴景勳)에 이어 1947년 4월 10일 전북출신인 유해진(1947.4~1948.5 재직)이 발령됐다. 그는 ‘극우파’였다. 제주도에 내려오면서 경호원 격으로 서청 단원 7명을 데리고 왔다. 유해진은 관공리의 숙청작업부터 손을 대었다. 관리들을 가려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파직시켰다.
유해진 지사는 1947년 11월부터 미군정청의 특별감사를 받았다. 제주군정청 법무관과 CIC 대표의 의견서는 유 지시가 극우파라는 점,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상대를 좌익분자로 몰고 가는 매카시즘이 강하다는 점, 그리고 우익 집회를 제외한 좌파나 중도파의 집회를 허가하지 않아 불법집회를 양사해 내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익강화 정책을 폈던 유해진 지사는 광복청년회와 대동청년단의 고문을 각각 맡기도 했다.

석우 김경종은 「도지사 한초 김충희의 부임에(次道知事漢樵金忠熙赴任原韻)」라는 시 작품도 남겼다.

“건축물 황량하니 나체처럼 추워 벌벌(建築荒凉裸軆寒)/ 그 누가 이 땅에다 평안함을 회복할까(推獎此土復平安)/ 백성 걱정 급한 임무 용이한 일 아니며(憂民急務非容易)/ 나라 앞길 위한 생각 이 또한 어려운데(報國前程亦因難)/ 옥을 안고 세 조정에 수례흔적 겨를 없고(抱玉三朝忙轍跡)/ 글 품고 열 번 기침 옷과 관은 거꾸러져(懷書十起倒衣冠)/ 공만이 개연히 맑고 맑은 뜻 지녔으니(惟公慨有惟淸志)/ 평범히 벼슬 관직 위함만은 아니로세(不是尋常爲祿官)” -「次道知事漢樵金忠熙赴任原韻」(도지사 한초 김충희의 부임에)

제5대 김충희(1949.11~1951.8 재직) 지사는 처음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 청년연맹 제주도지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7년 9월부터 우파청년단체의 조직 강화가 두드러지면서, 대동청년단과 통합하는 절차를 밟는다. 대청 제주조직은 각 지방으로 확산, ‘4․3’ 발발 과정에는 경찰지서에 단원들이 철야근무를 하는 등 ‘경찰보조당체’로서 기능을 하게 된다.

6. 기타 제주출신 한학자들의 4·3시

김경종 외 4·3작품으로 강희경(姜熙慶)의 「嘆流水火亡」와  정경룡(鄭慶龍)의 「偶吟」, 오성남(吳成南)의 「疏開令」도 잘 알려져 있는 작품들이다. 

강희경(姜熙慶,1874~1959)과 정경룡(鄭慶龍,1883~1964)과 오성남(吳成南,1902~1960 )은 한학자들이다. 강희경은 유수암리 출신의 유림이다. 유수암리 주민들이 1948년 12월 19일 해변 마을로 소개되었는데, 소개되어 내려간 지 5일째 되던 날, 유수암리가 전소되는 광경을 중엄리에서 바라보면서 그 비분함을 달래며 읊은 시이다.
정경룡은 성산읍 고성리 출신으로 약관에 나라를 잃은 서러움을 당하고 비분강개하였으며 평생 서당문을 닫지 않고 글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였다. 해방 이후 4 · 3 발발 직전 좌우의 대립이 극한에 치닫던 정국의 분위기를 반영한 시인 듯하다.
오성남은 성산읍 신풍리 태생으로 광복 후 어려운 시기에 면장직을 맡아 민심을 수습하였고는 제주4․3을 당하여서는 면내의 피해를 줄이는 데 힘써 칭송을 받았다. 성산읍 수산2리에 그의 송덕비가 남아있다. 

‘三百餘年先祖鄕(삼백여년 살아온 선조들의 고향마을) 一朝渾入火中亡(하루아침 불속으로 모두다 타들어가네) 暗宵山賊窺强奪(어두운 밤 산적들은 강탈을 엿보았고) 白日團軍如探囊(한낮엔 서북청년과 군인들이 뒤졌었던) 食糧居屋痕全沒(곡식과 살던 집의 흔적조차 사라짐에) 老少生靈心共傷 (늙은이와 아이들 모두 가슴 아파 하나니) 流水節山依旧在(예와 같이 서 있는 유수암의 절산만은) 回蘇他日更生光(훗날에 살아남아 생생한 빛 발하리라)’-강희경의 시 ‘嘆流水火亡’(유수암이 불타는 것을 한탄함)

‘語南語北俱不合(남이 맞다 북이 맞다 이치엔 다 안 맞는 말) 孰是孰非正難分(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분간하기 어려운데) 若知制禮先王意(예악을 제정하신 선왕의 뜻을 안다면) 卽能終熄說紛紛(곧바로 어지런 말들 끝낼 수 있으련만)’-정경룡의 시 ‘偶吟’(우연히 읊음)

‘疏開令落近山村(소개령이 인근의 산촌마을에 떨어지니) 驚動閭閻相不言(온 동네 깜짝 놀라 서로 말도 못하는데) 怯海畏山何處去(바닷가도 겁이 나고 산으로도 두려워서) 負携佇立日黃昏 (업고 잡고 우두커니 해는 벌써 저무는데)’- 오성남의 시 ‘疏開令’(소개령) 

7. 손자들의 활발한 시작활동
 
김경종의 손자 김학선(金學先)과 김성수(金成洙)는 할아버지를 닮아서 훌륭한 시작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은 할아버지의 얼을 이어받아 역사의 아픔을 시어로 표현하는 제주의 우뚝서는 시인으로 성장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
김학선의 오랜 친구이자 문학동우인 시인 김용길은 “김학선 시인, 그는 너무 순수하고 어질고 내심이 깊은 사람이다. 그는 늘 ‘자괴감으로 점철된 나날을 지내왔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던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45여 년 전 김학선과 김용길은 이팔청춘의 청춘나이에 ‘2인 시화전’이라는 문학의 열전을 치렀다. ‘문학동인’ 결성을 위하여 황금 같은 시간과 열정을 낭비하다시피 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모두 먼 옛날의 일이지만 그것은 문학의 아름다운 과거이며 오늘의 그들을 있게 한 밑거름이기도 하였다.
작가 오성찬도 생전에 “시인 김학선은 말이 없는 사나이다. 그는 외형으로 덩치가 우람하고 등이 다소 굽은 것도 그렇거니와 보통 때는 거의 말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아무도/ 우리가 나눠 가진/ 눈시울 붉은 소식 알지 못한다// 아직도 때가 아닌데도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마른 잎새 곁에/ 쉰줄 넘은 기다림이 부질었다// 날이 가고 달이 지는 사이/ 너의 발자국 소리/ 아예 지워졌는지/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한줌의 빛이/ 눈물처럼 젖는다’ -김학선의 「紗羅峯 詩篇 14 –멀리 있는 빛」 전문    

‘사람들 집으로 가네// 만산홍엽//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네// 거무죽죽한 속진(俗塵) 탈탈 털어버린 듯// 참 맑은// 한 무더기 웃음소리// 만추를 건너가네’ -김학선의 「풍경」 전문

김성수는 1996년 《심상》지 6월호에 「오로 섬 거울나기」외 4편의 시가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시인 한기팔이 지적한 것처럼 그의 시력의 중심은 “그가 그의 아내로부터의 갈등에서 빚어진 상처로 결코 견딜 수 없는 삶의 천척으로부터 해방이요 탈출이었을 것이다.”라는 지적은 옳은 말이다. 그는 자기 진실에 대하여 책임있는 언어로써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진눈깨비’를 통하여 아득한 섬에서 한 목숨 날개를 펼치고 있다.  ‘어둠이 가차없이 포획된다// 내 겹눈에 멀어지는 촉수/ 이흔아홉 번 입김 훅훅 내불어/ 가사 녹여 보지만 아득한 섬/ 꿈을 꾸는 꿈속에서/ 한 목숨 날개를 펼쳤다’ -김성수의 「진눈깨비· 1」 전문 

‘달그락,/ 끝내 피붙이 내려 놓지 못하고 제 귀에 박힌 질기고 질긴 문고리 그 긴 소리 하 애지도록 들창바라기 하고 있을 어머니/ 91살’ -김성수의 「빈 방」 전문  
참고문헌

金景鍾, 『白首餘音』(白圭尙 譯), 北濟州文化院, 2006.
『한겨레신문』, 2007년 4월 3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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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김시종

[제주일보] ‘디아스포라(Diaspora)’는 그리스어에서 온 것으로 ‘씨를 뿌린다’의 의미다.
민족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주민들이 고향을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로 떠나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거주하는 것을 뜻한다. 다아스포라 ‘경계인(境界人, marginal man)’으로 살면서 제주를 품고 머리와 손은 일본어를 사용한 시인 김시종(金時鐘). ‘2017 전국문학인 제주포럼’에 참석하여 ‘시는 현실인식의 혁명’이란 기조강연을 하였다. 대표시집 역시 ‘경계의 시’. 일본공산당에서도 이탈하면서 결국 ‘귀국선’을 타지 못한 채 남한과 북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 “재일조선인 중의 한 사람인 저는 일본의 현대시(現代詩)와 어떤 관련을 맺어왔던 것일까요? 저는 일본에 온 이래로 일본 시(詩)의, 아니 일본시단(詩壇)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일본 시의 권외(圈外)에서 살아왔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태어나 4·3사건에 휘말려 1949년 일본으로 탈출하기 전까지 소년 시절 대부분을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에서 보냈다. 그야말로 황민화 교육이 길러낸 제국의 소년이었다. 한글은 한 글자도 쓸 줄 모르고 ‘식민지 지배’ 같은 말은 들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외골수 ‘황국소년’이었다. 1945년, 열일곱의 그는 자기 나라라는 의식조차 없었던 조선으로 ‘떠밀려오듯’ 해방을 맞이했다. 남로당 제주읍당 세포로 활동하면서 4·3을 3개월 정도 체험했다. 6개월이면 조천까지는 해방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동쪽 근처의 빈 가게가 된 옛 공설시장 안으로 달려 들어가 좌측의 깨진 창틀을 통해 이웃인 지사 관사의 뒷담을 뛰어넘었습니다. 폭이 20㎝ 정도 되는 돌담 위를 따라 가지가 얽힌 벚나무 가로수 수풀로 빠져나가 지사 관사의 뒷마당과 등을 맞대고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바로 아랫집의 좁은 뒷마당에 뛰어내렸습니다. 바깥쪽 길은 바로 왼쪽이 북국민학교 정문입니다.” 그는 ‘우체국 거사’ 실패 이후 도립병원에 잠입했다가 미군 임시 하우스보이를 거쳐 도일(渡日) 직전까지 외숙부의 집에 몸을 숨겼다. 일본으로 탈출하던 당시 그는 ‘북조선’으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김일성 우상화와 조총련의 북한 편향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957년 조총련으로부터 조직적 비난을 받았다. 긴 세월 가슴에만 묻어둔 채 세상에 내놓지 않았던 기억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조선과 일본에 살다’. 그 책은 아사히 신문사가 제정한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바로 제주4·3에 대한 기록이다. 오사라기 지로상은 소설가 김석범(金石範)도 수상한 바가 있다. 그의 시집 ‘잃어버린 계절’이 일본의 대표적 시 문학상인 ‘다카미 준(高見順)상’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고국과 일본/나 사이에 얽힌/거리는 뚝 같다면 좋겠지//사모와 겸딤/사랑이 뚝 같다면/견뎌야만 하는 나라 또한/똑같은 거리의 잇겠지”. 모국어와는 다른 언어의 이중 삼중 무게를 견디며 꼿꼿이 시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이번 기조강연에서 “제가 일본에서 살아온 ‘재일(在日)’의 삶은 유려하며 정교한 일본어에 등을 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감정이 과다한 일본어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은 저를 키운 일본어를 향한 보복이었습니다. 저는 빡빡한 일본어로 70년 가까이 시를 쓰며 살아왔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장편시집 『니이가타(新潟)』는 반일본적 서정성과 리듬을 강조한 독특한 글로 응축된 표현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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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정치

[제주일보] 영국 옥스포드대의 C.M. 바우라(Bowra) 교수는 그의 저서 ‘시와 정치(Poetry and Politics)’에서 심훈(沈熏)이 1930년 3월 1일에 쓴 시 ‘그 날이 오면’을 세계 저항시의 본보기라고 일갈하였다.

“일본의 한국 통치는 가혹하였으나, 그 민족의 시는 죽이지 못했다”고 평하였다.

심훈은 ‘그날이 오면’ 단 한편의 시로 불멸의 시인이 되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양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人定)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고, 시대를 반영한다. 문학은 시대의 산물이며, 삶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자기 삶, 자기 인생, 그리고 타자의 인생을 반영한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묻고 타자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해 한다.

우리 모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을 찾는 과정이 문학이다.

우리 문학이 내면으로 도피하고, 시간으로 도피하고, 공간으로 도피하는 동안 독자들은 문학을 외면한다.

독자들은 작가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절실한 문제를 무시한다고 말한다.

구태여 찾아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국문학의 정치성은 한국 현대사가 정치적 독재, 경제적 독점에 의해 주도된 데 그 원인이 있다.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군사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면서 정치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다음은 민주화를 위해 몸으로 싸운 정희성의 시 ‘봄소식’이다.

‘이제 내 시에 쓰인/ 봄이니 겨울이니 하는 말로/ 시대 상황을 연상치 마라/ 내 이미 세월을 잊은 지 오래/ 세상은 망해 가는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저 산에도 봄이 오려는지/ 아아, 수런대는 소리’

‘시와 정치’, 시는 정치를 품는 것일까, 정치가 시를 품는 것일까. 시는 정치뿐만 아니라 세상 꼭대기를 후려치는 회초리바람이다.

공자(孔子)도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不學詩 無以言)’ 고 했다.

논어(論語)에서 공자는 시를 공부하는 중요성을 ‘시 삼백 편을 외웠더라도 그에게 정치를 맡겼을 때 잘 해 내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가서 외교에 제대로 응대하지 못하면 시만 많이 외웠다고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강조하였다.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며’의 시 속에서 말하는 이는 소시민으로서 불의한 국가와 같은 ‘큰 권력’에는 저항하지 못하고 일상에서 접하는 ‘작은 권력’이나 평범한 사람들에게 분노하는 자신에 대한 성찰과 자의식을 제시한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모래야 나는 얼마나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나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우리 시대의 시인들은 여전히 자본의 논리와 맞서고 있다.

노동자의 비참한 삶에 초점을 맞춘 시인들이 있는가하면, 자본주의 문화의 헛된 욕망을 비판하는 시인들도 있다.

그래서 시인은 근본적으로 자본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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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과 제주

[제주일보] ‘여순’은 여수와 순천을 말한다. ‘여순항쟁(麗順抗爭)’은 과거 ‘여순반란’ 혹은 ‘여순봉기’라고 불렸다. ‘여순항쟁’도 ‘거창양민사건’이나 ‘제주4․3항쟁’, ‘5․18항쟁’처럼 국가폭력이 부른 불행한 역사이다. 수만명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그 사건을 ‘반란’으로 왜곡해 온 과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우리는 조선인민의 아들들이다…… 모든 애국 동포들이여! 조선인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짓을 거부하고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당시 제주출동거부병사위원회의 성명서 내용 중 일부이다.

‘제주4․3항쟁’은 특별법 제정으로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여순항쟁’은 왜곡된 채 방치되고 있다. ‘여순항쟁’은 ‘제주4․3항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갖고 있다. 여순사건유족회는 여순사건도 제주와의 지역차별이 아니라면 민족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단독 특별법을 공약하고 제정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여수 주둔 14연대의 군인 2000여 명이 제주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주목할 것은 출동을 거부하는 일부 군인들만이 일으킨 싸움이 아니었다. 지역 민중들이 함께 깃발을 들었다. 항쟁은 순식간에 순천·광양·구례·보성·고흥·곡성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확산됐다. 민중의 뿌리는 제주에서처럼 고립되지 않았다.

여순사건으로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을 포함해 약 150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고, 진압 군경에 의해 2500여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 이승만 정부 수립 2개월 만에 일어난 여순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철권통치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하였다. ‘여순항쟁’은 제주4․3에서 중요한 이음줄이었다. 제주도의 초강경 진압작전인 ‘초토화 작전’을 더욱 강화하는 데 디딤돌이 되었다. 미군정으로부터 한국정부로 계승된 ‘빨갱이 소탕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제주4·3항쟁을 무차별적인 공세로 진압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로서는 윤리적 비난을 해소하고 자신들의 전략을 지속, 강화할 수 있는 호재로 삼게 됐다는 것은 참으로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우리 겨레의 가슴에 아픈 역사로 남아 있지만, 이처럼 ‘여순항쟁’은 제주4·3과 그 뿌리가 닿아 있다. 고립무원의 섬에 갇힌 제주 민중을 지지하고, 통일조국을 염원하면서 일으킨 의거란 점에서 역사적 상징성이 크다.

‘반란’이 되려면 수도 점령이나 정부 전복, 권력자 축출 등의 계획과 새로운 권력주체가 정해져 있어야 한다. 과거 ‘여순반란’이라는 극단적인 용어를 덧씌우고, 여수와 순천을 ‘빨갱이 동네’로 매도하면서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하였다.

해방 후 찾아온 것은 두 동강 난 분단국가였다. 해방의 감격은 잠시일 뿐, 커다란 절망과 좌절의 불씨를 삼킨 서러운 민족이 되고 말았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대한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이승만 체제는 불안하기만 했고 위기가 심화될수록 민중저항은 거세졌다. 제주4·3과 ‘여순항쟁’은 이런 시대 상황을 반영한 처절한 민중적 몸부림이었는지 모른다.

과거 대통령을 일러 ‘공공의 적’이라 하고 ‘유신헌법’을 두고 잘못됐다 비판하면 곧바로 ‘빨갱이’ 또는 ‘좌빨’ 딱지를 붙였다. 그렇다. 과거 빨갱이 증오정치는 ‘빨강’(赤)이라는 색깔에서 출발한다. 이 색깔은 ‘주의자’(主義者), 더 좁게는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가리키지만, 그것에 한정되지 않고 의미가 완전히 열린 채 부정적 낙인으로 기능한다. ‘빨갱이 사상’은 불온하고 위험한 것이 되었다. 사상을 통제하고 처벌하는 국가보안법 체제가 성립되었다.

헌법상 보장되는 ‘결사’나 ‘집단구성’이라 하더라도 당국이 그 구성원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결사의 목적에 사상의 흔적이 있다고 판단하면 처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상에 대한 우려와 의심, 처벌이야말로 ‘빨갱이’를 양산했다. 그 중심에 제주와 ‘여순’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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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덕문학’의 탄생

[제주일보] “지난 날 회상이/ 기억의 휘엇한 소롯길을 걷는다/ 소달구지 삐걱이며 동산을 오를 때/ 동네 개구진 녀석들/ 달구지 꽁무니를 탐하고/ 마을 한 가운데 자리한 못 안에선/ 개구리 울음소리/ 처연히 들려온다”

‘함덕문학’ 창간호에 발표된 김창호 시인의 ‘나도 하늘을 보았다’의 한 단락이다. 시인이 고향마을에서 추억의 끝자락을 표현한 부분이다.

함덕 출신이거나 함덕에 살고 있는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함덕문학회를 결성하고 ‘함덕문학’ 창간호를 세상에 내놓았다. 문학인들과 리민들이 함께 모여 리민회관에서 출판기념회도 가졌다.

마을에서 문학회라니, 그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 왜 하필 마을문학인가? 마을은 촌락과 같은 의미이며 마을·골(谷)·동리·부락·취락 등의 용어로도 사용된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생활의 단위로서 인간생활의 기본단위인 가족 또는 집들이 모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통합을 이루고 있는 지역집단이다. 이런 마을에서부터 문학 활동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마을은 남과 남, 인류가 모여 사는 최소 단위이다. 소설가 오성찬은 ‘제주의 마을-함덕리’에서 마을은 작지만 그 안에는 사회적 의미의 모든 요소와 행위가 축양(畜養)되어 있다고 했다.

마을에는 어느 성씨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마치 나라 안에서 민족이 흥하고 망하는 것처럼 명멸하고 있다. 오성찬은 그곳을 가까이 실감하니까 가슴이 떨렸다고 고백하였다.

‘함덕문학’은 함덕마을에서 출발하였다. ‘함덕문학’의 탄생은 관광산업으로 파괴되기 시작한 마을공동체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데서 그 의미를 찾는다.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함덕사람의 정체성은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농촌생활의 삶은 부동산 가격의 폭등으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제주4․3으로 크나큰 상처를 입은 마을이기도 하다. 제주4․3으로 극한적인 체험을 하였다. 제2대대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무장대가 마을을 장악하고 있었다. 함덕지서는 번번이 무장대의 피습을 받았다.

주민들은 무장대의 요구에 따라 의복과 식량을 산으로 올려 보내기도 하였다. 서우봉 기슭이나 백사장은 바로 학살터였다.

이러한 아픈 체험은 바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함덕문인들은 모닥불을 피워 올렸다. 지푸라기를 하나 둘 모으고 주민들이 모닥불을 피워 올릴 때 새로운 삶, 새로운 공동체는 복원된다.

오랜 진통 끝에 ‘함덕문학’에 얼굴을 내미는 일은 바로 모닥불을 피워 올리는 데 한몫을 담당하는 일이다.

제주도에는 ‘애월문학’, ‘구좌문학’, ‘한림문학’, ‘서귀포문학’ 등 읍면지역에서 문학지가 활발하게 발간되고 있지만 마을 단위로 문학지가 발간된 전례는 없다.

그만큼 문학적 토양도 풍부하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을 그냥 묻어두고 머뭇거리고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이야기다. 마을에서 문학회가 조직된 것은 제주문학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는 자부심도 내면에서 꿈틀거렸는지 모른다.

‘함덕문학’에 참여한 문인은 김창호·임세훈·김정희·황금여·한문용·김길언·이용규·한복섭·이지민·김수철·이용빈·부진섭·김관후 등이다. 그리고 초대작품으로 문상금·김성수·김학선 김가영·김순신·강순희 작가들의 작품도 실었다.

한문용 시인의 ‘함덕 갈매기’의 한 단락에서 뽑았다.

“함덕 갈매기, 함덕 갈매기!/ ‘부산 갈매기’ 가사 바꾼 뽕짝이/ 콧구멍을 들락거린다/ 폴짝 다름질치는 앙증스런 모습에 눈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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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에 대한 반응

[제주일보] “관광객은 꺼져라(Tourists, Go Away!)”, “당신은 지금 이 곳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You Are Destroying This Area).”
누구나 생애 한 번쯤 다다르기를 꿈꾸는 물의 도시 베니스. ‘사랑의 도시’라는 별명을 지닌 베니스에서 거칠고 낯선 시위의 풍경과 메시지들이 세상을 향해 타전되기 시작했다.
바다에서는 시민들이 올라탄 선상 시위대가 입항하는 크루즈를 막아선 채 저마다 피켓과 깃발을 흔들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인구 5만5000여 명의 베니스를 찾는 하루 평균 관광객은 6만 명. 사육제(謝肉祭) 기간이면 무려 17만 명에 가까운 관광객이 쏟아져 내린다. 베니스의 주민들은 관광객들이 남기고 가는 소음과 쓰레기와 혼잡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 것이다. 베니스의 골목골목 관광을 반대하는 행진이 이어졌다.
우리의 마을을, 도시를, 삶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도시와 국가의 관광정책을 향해 곳곳에서 새로운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관광객들은 집으로 가라(Tourists go back home!).” 남유럽에서도 ‘관광 포비아’가 올 휴가철 유행이다. 포비아(phobia)는 공포증(恐怖症) 또는 공포장애(恐怖障碍)를 말한다.
스페인에서만 한 해 756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이른바 ‘관광객 과밀’ 현상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는 1년에 2000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다녀가지만 주민들은 불과 5만5000여명이다.
거주민보다 300배가 넘는 수위의 외지인이 다녀간 베네치아에는 거대 유람선과 이들이 남긴 오염물질로 인한 환경 훼손이 심각하다.
‘에어비앤비(Airbnb)’는 주거지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온라인 사이트이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주민들은 관광객들이 숙박 공유서비스인 에어비앤비를 통해 집세를 과도하게 높이고 아름다운 도시 미관을 더럽힌다고 주장한다.
숙박요금은 숙박을 제공하는 주인이 정하며, 에어비앤비는 숙박 예약을 중개해 주고 수수료를 받는다. 네트워크를 통하여 한국을 비롯한 190여 개국의 60만여 개의 숙소가 등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제주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지역경제를 살렸던 관광업이 ‘사람들을 마을 바깥으로 내쫓고 환경을 해치는’ 주범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주지역 곳곳이 ‘마을 내쫓김 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저 월정리 해안과 함덕리 해안만 살펴봐도 그렇다. 함덕리 해안은 외지자본이 투입되어 호텔이 마을 중심부까지 자리 잡고 말았다. ‘우리가 점령당하고 있다’는 현실 인식이 원주민 내면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사드 배치 이후 중국 관광객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 관광객이 밀려들던 우리 제주에서는 부동산 가격 폭등 등으로 진작부터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제주관광 포비아 현상은 이제 심각한 수준이다.
진정 관광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일까? 지금 관광이 지탄 대상이 되고 있다. 관광객이 아무리 늘어도 현지 서민들이 느끼는 삶의 질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높은 실업률을 해결하지 못하는 유럽의 정치권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관광 포비아 현상이 제주에도 발생하고 있다.
제주에서도 “관광객들은 집으로 가라!”는 함성이 터질지 모른다. 제주 원주민의 내면에는 일찍이 제주관광 포비아 현상을 체험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주항에 정박한 거대 유람선과 제주공항에 쏟아지는 관광객들로 우리 제주는 오염물질로 인한 환경 훼손이 심각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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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는 정치다

[제주일보] 화이트칼라의 상징인 ‘넥타이 부대’. 1987년 6월 항쟁 당시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투쟁의 무리’.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들의 본거지였던 명동성당. 당시 명동, 을지로, 광교, 남대문 지역은 ‘넥타이 부대’ 인 샐러리맨들이 많은 곳이었다.

제주에서도 “독재 타도! 호헌 철폐!” 민주화에 대한 목소리는 높아져만 갔다. 뜨거운 아스팔트만큼이나 거리로 쏟아져 나온 넥타이 부대의 함성은 열망으로 가득찬 뜨거움이었다. 학생과 지식인, 성직자 중심의 기존 반정부 세력에 소위 중산층이자 엘리트층인 이들이 독재정권 타도 선봉에 서면서 민주화 목소리는 더욱 힘을 얻었다.

6월 항쟁이 가져온 정치와 사회의 민주화. 이에 앞장선 넥타이 부대는 여전히 이 시대에도 사회 변화의 한 무리로 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 국정농단 촛불집회에서도 ‘시민혁명’의 한 축으로 위력을 보여줬다. 시대를 고민하고 행동하는 넥타이 부대. 1987년의 거리에서나 2017년의 거리에서나 그 뜨거운 가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넥타이는 정치다. 한·미 정상도 나란히 ‘파란 넥타이’를 매고 공식석상에 등장해 이목을 끌었다. 두 정상의 패션은 어두운 컬러의 양복에 흰색 셔츠, 그리고 파란 넥타이까지 마치 사전에 맞춰 입고 나온 듯 닮은 드레스 코드였다. 파란 넥타이는 신뢰와 평화를 상징한다. 평소 붉은 넥타이를 즐겨 매던 트럼프는 넥타이 컬러를 통해 예우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은 악수·넥타이와는 딴판이었다. 정상회담 뒤 문재인 대통령과 나란히 서서 읽은 언론발표문에서 공동성명에 있지도 않은 방위비 분담금 문제를 대놓고 거론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공동성명 범위에서 상세히 설명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정도’였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변칙’이고 ‘결례’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넥타이 정치는 일찍이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대선 후보 선거전에서 자주 볼 수 있던 파란 색깔의 ‘스트라이프 넥타이’는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승리의 넥타이’로도 알려졌다. 선거 참모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취임하고 며칠 후 5당 원내대표를 청와대로 불렀다. 이때 문재인 대통령은 노란색 넥타이를 매었다. 화제의 넥타이는 바로 2012년 ‘독도를 말하다’라는 주제로 제작된 작품이다. 독도의 ‘강치’떼를 물결무늬와 혼합한 모양의 디자인으로 노란색을 띄고 있다.

1960년 독일, 피아노 연주를 선보이던 백남준은 돌연 관객석에 앉아 있던 존 케이지에게 다가가 그의 넥타이를 느닷없이 잘라버렸다. 당시 백남준은 “로마 시대부터 넥타이는 힘과 권력을 상징했다. 나는 남자들이 늘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넥타이를 잘라낸 자신의 퍼포먼스 의미를 설명했다.

그만큼 넥타이는 서구문화권에선 힘과 권위, 복식에서 갖추는 예절의 상징으로 통용됐기에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파격의 파격으로 해석됐다.

넥타이는 남성 패션의 완성이자 원점이라는 말이 있다. 멋을 내는 데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아프리카 오지 봉사활동으로 반평생을 보낸 슈바이처 박사는 한 개 넥타이만 썼다. 그런데도 길흉사 의식에는 꼭 맸다고 한다. 상대를 존중한다는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대선 벽보에 나온 넥타이는 승리용 부적이나 국민을 섬기려는 의지의 상징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선거철 표심을 유혹하는 액세서리일 수도 있다. 유권자가 넥타이 의미를 제대로 읽는 식견만 갖춰도 한국 정치는 발전할 것이다. 자신의 의사를 표시 할 수 있는 넥타이는 때로는 말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달해 줄 수 있다. 그렇지만 남성패션의 시작이자 완성이라고 불리는 넥타이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소품임에 틀림없다. 한·미·일 정상 만찬에서는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나란히 빨간색 넥타이를 매 궁합을 맞추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강인한 인상을 보여주고 싶을 때 빨간 넥타이를 매는 경향이 있다고 청와대 관계자는 전했다. 2012년 11월 당시 무소속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TV토론 때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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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의 가능성

[제주일보] “전쟁은 끝났다.”

그는 독일군에게서 다시 찾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가로등이 침침한 길을 그는 급히 걷고 있었다. 어떤 여인이 그의 손을 잡고 술에 취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놀다 가세요? 잘해 드릴게요.” 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가로등이 환한 등불 밑으로 왔다. 순간 여인은 “앗!” 하고 부르짖었다. 남자는 무심결에 여인을 등불 아래로 이끌었다. 다음 순간 남자는 여인의 두 팔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눈은 빛났다. “요안!” 하고 그는 여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허버트 릴리호의 ‘독일군의 선물’이라는 짧은 소설이다. 독일군에 유린된 프랑스군의 가족들이 비참하게 연명하고 있는 생활상이 심각하게 가슴을 친다.

소설이 짧아지고 있다. 단편보다 더 짧은 콩트(conte)가 쏟아지고 있다. 콩트는 ‘장편(掌篇)소설’ 또는 ‘엽편(葉篇)소설’이라고도 한다.

짧디짧은 소설은 ‘손바닥 소설’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가볍고 일상적이라서 국내 순문학계에서 주류를 이루진 못했다.

“사람을 울릴 수 있는 열 단어 내외의 짦은 소설을 지어보라”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는 “팝니다: 유아용 신발, 한 번도 신지 않은(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이라고 지어주었다.

아기신발을 샀는데 아기가 죽어서 판다는 내용이다. 고작 여섯 단어로 애절한 슬픔을 묘사하고 있다. 헤밍웨이는 195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한국소설의 중심은 여전히 단편이다. 그러나 더 짧은 콩트를 쓰는 작가들도 늘어나고 있다. 요즘엔 콩트 대신 ‘짧은 소설’이라고 부른다. 성석제의 소설집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을 비롯한 3권의 짧은 소설이나 이기호의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와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가 요즘 잘 읽히는 소설책으로 꼽힌다.

‘장편소설(掌篇小說)’이란 장르는 일본문단의 ‘손바닥소설(掌の小説)’이라는 장르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문자 그대로 손바닥에 쓸 수 있는 정도의 짧은 소설, 즉 콩트의 의역어(意譯語)다. 콩트가 극히 짧은 소설이라는 의미로 통용될 처지라면,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콩트 대신에 장편소설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오히려 적당할 것이 아닐까.

콩트를 소설의 길이로 분류하자면 단편소설보다 더 짧은 분량이다. 대개 200자 원고지 20매 내외의 분량으로 되어 있다. 대개 인생의 한 단편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그리는데 유머·풍자 기지를 담고 있다.

사실적이기보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바탕으로 하며 재치와 기지가 주된 기법이다. 또한 도덕적이거나 알레고리로 되어 있는 수가 많다.

모파상과 발자크, 알퐁스 도데, 투르게네프, 오 헨리 등이 콩트 작가로 유명하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나 볼테르의 ‘캉디드’도 콩트로 분류하기도 한다.

스마트 소설에서 짧은 길이보다 중요한 요소는 기발한 착상과 압축적인 구성, 촌철살인의 풍자, 해학적인 필치 등이다.

어쩐지 콩트는 죽은 말이 된 듯하다. 소설 유사품이라고 여기는 문단 풍토 때문이다.

콩트는 내용 진전이 클라이막스에 가서 예상외의 전변(轉變)을 보여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콩트의 콩트다운 특색은 실로 이 클라이막스의 급각적(急角的)인 전변에 있다.

소설은 작자가 자기의 눈을 통해 본 현실적 인생을 구성적(構成的)으로 서술한 창조적 이야기이다.

소설의 형식은 단편소설과 중편소설 그리고 장편소설의 3가지를 드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단편소설보다 더 짧은 소설형식이 필요하게 되고 이 필요성에 따라 나타난 것이 장편(掌篇) 또는 콩트라는 아주 짧은 형식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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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이름, 문제 투성이

제주일보] 정당(政黨, political party)에 관한 정의는 영국의 버크(Burke,E.)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정당이란 ‘주의(主義)와 정견(政見)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그 주의와 정견에 의거한 공동의 노력으로써 일반적 이익을 증진하고자 결합한 단체’이다.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어떠한 방법’으로 ‘누구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결합한 단체냐 하는 점이다.

그래서 정당은 파벌(faction)과 구별되며 정치권력의 획득을 목표로 정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공통된 정책에 입각하여 결합한 정치결사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익단체(interest group) 또는 기타 사회단체와도 구별된다. 정당은 공익성을 그 요건으로 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당은 과연 어떠한가? 한국의 정당은 그 이름부터 구린내가 난다. 외국처럼 깔끔한 이름을 쓰지 못하고 여러 이름을 조합해서 쓴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독재정권 때문에 못 쓴다. 공화당은 박정희 통치 때문에 못 쓴다. 공산당은 불법이다. 민주당은 돌아가며 쓴다. 그래서 근본 없는 이름이 난무하고, 민주당 앞에 몇 글자 덧붙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름 하나를 고수해 온 정당을 찾기가 쉽지 않다. 정당 이름에 뿌리도, 철학도 없다. 정당의 수명이 짧은 이유는 정당이 사람을 만드는 외국과 달리 사람이 정당을 만들기 때문이다. 역대 집권자들이 ‘대통령당(黨)’을 만든 것도 그 원인이다. 자신들의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정당을 새로 만들거나 멀쩡한 당을 리모델링해왔다.

정당 이름조차 변변히 못 만들고 있는 이유는 정치인들 자신이 정당이 뭘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럴 것이다. 정치인들 자신이 시대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이념, 정치체제, 나라가 풀어야 할 역사적 과제를 몰라서 그럴 것이다. 듣기는 그럴 듯하나 뭘 하려고 하는지 모르는 애매한 이름을 지을 수밖에 없다. 관심을 끌자니 이벤트식 정치를 할 수밖에 없다. 정당들의 부침이 워낙 심하다 보니 이젠 그럴듯한 당명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제한된 단어를 가지고 조합을 반복하다 보니 정당의 이름에서 뿌리나 철학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미국의 민주당이 1823년 창당되어 역사가 200년에 육박하여 가장 길고, 영국의 보수당은 180여년, 미국의 공화당은 160여 년,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130여 년에 이른다. 가까운 이웃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대만의 국민당은 100여 년, 일본의 자유민주당은 60여 년에 이른다.

한국의 정당들은 그 계층적 기반이 약하여 사회의 특정 계층이나 세력을 대표하지 못하고, 인물중심주의로 인하여 당수(黨首)의 정치적 운명과 함께 정당의 존립이 좌우되었다. 자유한국당은 한나라당의 후예이다. 정치적인 계보는 제3공화국 민주공화당의 맥을 잇고 있다. 민주공화당 이후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이 탄핵 정국을 맞아 당 쇄신의 차원에서 자유한국당으로 개명하였다.

자유한국당의 본질은 정권 재창출 그것만 있었다. 군사쿠데타에 뿌리를 둔, 부정부패로 얼룩진 차떼기 정당만 남아 있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의욕을 보였지만 결국 실패했다. 창당 당시 약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부터 논란거리였다. ‘자유당’으로 할 경우 당연히 이승만 시절의 자유당이 연상된다. ‘한국당’으로 하기에는 과거에 사용했던 신한국당이 발목을 잡는다. 당명에 국호를 넣은 것 자체가 거부감이 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냥 약칭으로 자한당도 ‘잔당’으로 들릴 수 있다.

이름만 듣기 좋은 정당이거나 아무 정당이나 써도 괜찮은 두루뭉술한 이름. 무슨 노선인지 아리송한 이름들은 엄밀히 말해서 판단을 흐리게 하는 잘못된 이름들이다. 그런 점에서 여러 정당의 이름은 이미 시장화되고 상품화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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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고향은 지금

도의회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속개되었다. 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들겼다.
“청문회를 계속하겠습니다. 증인선서가 있겠습니다.”
증인석으로 카메라 앵글이 옮겨졌다. 한 노인이 증인석에서 일어섰다. 그의 얼굴이 모니터에 크게 확대되었다. 여든이 훨씬 지난 노인이다. 문칠봉이다. 나이를 먹었지만, 둥그렇고 부리부리한 방울눈에 두툼하게 살이 오른 목덜미, 축 처진 군턱의 흔적이 역력하였다. 문칠봉이 선서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 위원장이 증인선서에 따른 이후 절차를 설명하고 의원들에게 질문을 요청했다.
한 의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 의원들이 문칠봉 증인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것은, 증인이 사건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증인은 해방공간에서 감찰경찰청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고, 그래서 사건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 증인의 행적에 대해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까?”
문칠봉이 잠시 멈칫거렸다.
“해방 직후 제주감찰경찰청에 근무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감찰경찰청이 후에 경찰국으로 개칭되어 계속 근무했습니다.”
나이에 비해 어투는 또렷하였다. 카메라 앵글은 문칠봉의 얼굴을 클로즈업시키고 있었다.
“경찰국에 얼마나 근무했습니까?”
“감찰경찰청에 여섯 달 동안 근무하고 경찰국으로 바뀌자 계속 근무하였습니다.”
“언제 그만 두었습니까?”
“육 십 년대 초반까지 근무하였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다음은 여성 의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증인이 경찰관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사건은 발생했습니다. 특히 정보주임까지 역임하였기에 그 사건에 대한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당시 해남중학원 교사 김학수를 알고 계시죠?”
“김학수는 저와 동향이고,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해방 직후 마을에 해남중학원이 설립되자 그 곳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마이크가 다시 다른 의원으로 옮겨졌다.
“해남중학원 학생들이 경찰서로 달려가 억류된 사람들을 풀어주라고 구호를 외치며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네, 기억이 납니다.”
“증인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창설하자 거기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경찰관이 되었고, 김학수는 교사로 재직하면서 박헌영이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김학수가 어떻게 살해되었으며 증인은 경찰관으로서 김학수가 살해 당시 역할은 무엇이었습니까? 군용차가 군부대가 상주하고 있는 이웃마을에서 해남리 쪽로 달리다가 신작로에서 습격을 받고, 군인 한 사람이 살해당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김학수가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군인이 살해당한 것은 기억이 납니다”
“재임기간 동안에 수많은 양민이 희생당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육십 년 전에 섬에서 대대적인 양민 학살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도민들이 텔레비전 화면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증인의 과거행적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하십시오.”
“그것은 국가 방침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증인이 상부의 명령을 받아 양민을 체포하거나 잡아 가둔 일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양민을 학살한 것을 직접 목격했거나 참여한 일도 없습니까?”
“없습니다.”
“김학수가 행방불명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행방불명자는 모두 학살되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중인과 김학수는 동네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 사이입니다. 김학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김학수는 좌파입니까? ……….?”
“잘 모르겠습니다.”
도의회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수많은 시청자를 확보하면서 전국적으로 큰 이슈로 등장하였다. 도민들은 텔레비전 앞에서 세상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지는 것이 아니냐는 넋두리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고향 마을은 지극한 상황으로 전개되어 갔다. 파도소리가 울음소리가 되어 갯가로 밀려들었고, 뼈조각이 나뒹굴기 시작했다. 모래밭은 숨을 헐떡거리며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이승만 박사가 나라를 구할 것이라고 법석을 떠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 이승만이다. 원인은 이승만부터 시작이다. 해방이 되자 귀향한 문칠봉은 제일 먼저 우파진영에서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단이 태동할 때 중심인물로 부상하였다. 서북청년회와 접촉하면서 결국 경찰에 투신하였다.
김학수는 문칠봉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3·1기념 준비위원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좌파세력이 주도한 시위에 참가하였고, 군정정찰이 발포하는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하였다, 김학수는 이때부터 미군정과 이승만을 비롯한 우파진영에 대하여 반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해남리 바닷가에 어둠이 깔렸다. 두 사나이가 바닷가 한 모퉁이에 자리 잡은 정자 난간에 걸터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칠봉과 김학수다. 두 사람은 읍내 농업중학교를 함께 졸업하고 문칠봉은 서울로 김학수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해방이 되자 두 사람은 귀향하여 문칠봉은 경찰로 김학수는 교사로 일을 시작하였다.
먼저 문칠봉이 입을 열었다.
“나라가 심상찮게 돌아가는군. 북은 북대로 남은 남대로 제각각 나라를 세우겠다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는 독립운동을 앞장섰던 이승만의 노선에 힘을 보태는 것이 정당하지 않나? 또 미래의 세계정세는 미국이 거머쥐지 않을까?”
김학수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이승만이 결코 조선반도이 지도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상해임시정부 시절에도 이승만이 차일피일 하면서 미국으로 가버렸어. 오히려 해방정국에서 박헌영 선생이 조선의 지도자로서는 마땅하다고 생각하거든. 선생은 일제 차하에서도 치열한 삶을 살았던 분이고.”
대화는 해방된 조국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문칠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주감찰경찰청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해남중학원이 문제로 부상하고 있거든. 교사와 학생들 대부분이 좌익사상 소유자라는 거야. 학생들까지 좌익사상에 물들어 양과자 먹지말자, 통일정부 수립하자라는 구호가 나온다는 것이지. 조심해야해. 학원을 그만 두는 것이 어때?”
김학수는 한참 뜸을 드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생각은 자네 생각과 다르네, 지금처럼 미국과 이승만 노선이 득세하면 우리는 영원히 분단국가로 남을지 몰라. 자네가 경찰 옷을 벗고 학교로 오면 좋지 않을까? 지금 상황은 교육이 가장 절실한 때야.”
밤이 이슥하도록 대화를 나눴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결국 그날 밤의 만남을 비밀로 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상면이 될 줄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문칠봉은 문갑식의 아버지다. 문갑식은 초등학교 시절 해남리 웃동네에 살았다. 김진철과 같은 반이어서 항상 붙어 다녔다. 김진철은 김학수의 아들이다. 고냉이성창에서 함께 볼락을 낚거나 미역을 감았고, 학교에서 구호물자로 나온 우유가루를 받아 문갑식의 집에서 떡을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문갑식이 얼레를 돌리면 가오리연을 들고 한참 앞으로 나가 하늘을 향해 올리기도 하였다. 차롱착에 고구마 밥을 가득 채우고 소풍 길에 나서면 문갑식은 쌀밥에 삶은 계란을 넣어 가지고 왔다.
어느 토요일, 김진철이 문갑식의 집에 들렀을 때 그의 아버지 문칠봉을 처음으로 보았다. 가끔 자기 집에 들르는 문칠봉은 그날따라 경찰 제복을 입고 있었다. 모자에 눈부시게 빛나는 계급장과 노란 테가 주눅이 들게 만들었다. 허리에 권총까지 차고 있었다. 문갑식은 자기 어머니가 산사람들에게 잡혀가 죽창을 맞고 죽었다고도 했다.
문칠봉이 아들 친구 김진철에게 물었다.
“어느 동네 사느냐?”
“알동네입니다.”
“알동네 누구 아들이냐?”
“아버지 존함은 김 자 학 자 수 자입니다. 돌아가셨습니다.”
“김학수? 김학수는 내 소학교 동창인데. 너 정말 학수 아들이냐?”
“네.”
문칠봉은 김진철을 유심히 쳐다보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문칠봉이 집에 오는 토요일이면 문갑식은 용돈을 두툼하게 받는 눈치였다. 그럴 때마다 김진철은 문갑식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문갑식은 구멍가게에서 주로 알사탕을 샀다. 문갑식이 주는 그 큼직한 알사탕은 혓바닥에서 슬슬 잘 녹았다. 그 단맛을 지금 어떻게 다 표현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어머니에게 야단맞을 생각을 하면 늘 걱정이었다.

과거사정리위원장이 다시 의사봉을 두들겼다.
“회의를 속개하겠습니다. 증인 선서가 있겠습니다.”
증인석으로 카메라 앵글이 옮겨지고 중년이 넘은 사나이가 일어서서 선서를 하였다. 바로 김진철이다. 선서를 마치자 위원장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우리 의회가 육십 년 전 사건에 대하여 조사하는 것은 세월이 지났지만 사건의 전체적인 진상을 밝혀 지방역사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나가려는 것입니다. 우리 위원들은 경찰 출신을 증인으로 세워 진상을 밝히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사람의 증언 내용을 바탕으로 사건의 진실을 하나하나 밝혀 나가겠습니다. 오늘은 피해자 가족을 증인으로 채택하였습니다. 증인은 그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김진철이 마이크를 잡았다.
“당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연세가 아흔이지만 살아계십니다. 어머니가 전해준 말에 의하면 1947년 3월 1일 관덕정 광장에서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고 미군정에 항의하는 모임에 가담하면서 결국 남로당에 가입합니다. 물론 교사 신분을 유지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 후 전개된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의 시신도 찾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위 재산 무장대에서 아버지께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위원이 질문을 계속하였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산사람과 관계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선거를 거부하는데 앞장 선 것 아닙니까?”
“아버지께서는 동네 청년들과 함께 성내로 가서 ‘통일정부 이룩하자’, ‘양과자 먹지 말자’를 외치면서 시가행진도 하셨다고 어머니가 전해주었습니다. 그것은 통일정부를 바라는 섬사람들의 바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반쪽 국가가 하나 되는 통일을 바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버지 시신은 찾았습니까?”
“찾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제사는 지냅니까?”
“총살을 당한 날에 맞춰 제사를 모십니다.”
다시 다른 의원이 나섰다.
“연좌제로 어떤 불이익을 당했습니까?”
“항상 감시를 받고 살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공직에는 꿈도 꿀 수가 없었습니다.”
“문칠봉을 알고 있습니까?”
“네. 그 아들이 초등학교 동창입니다. 문칠봉과 저의 아버지도 친구 사이입니다.”
다시 젊은 의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문칠봉을 역사의 죄인으로 몰지는 못합니다. 해방이 되자 문칠봉은 이승만 계열에 합류하였고, 김학수는 소위 좌파에 합류한 것으로 지방 역사학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김학수가 산사람과 내통한 것은 알고 계십니까?”
“…………………………..”
“그 사건의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앞으로 그 원인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흔이 넘은 어머니는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 공청회 중계시간에 맞춰 텔레비전 다이얼을 돌리는 눈치였다. 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육십 년 전 사건의 진상을 도의회에서 밝힌다는데 잠을 잘 수가 있겠는가. 문칠봉이 죄인 취급을 받는 광경을 보면서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아들 김진철의 증언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문갑식과 어울려 다니다가 늦게 집으로 오면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던 기억도 생생하다.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어머니는 회초리부터 들었다.
“이놈 새끼야, 너 문가 놈과 다녔지? 그놈 새끼와 붙어 다니지 말라고 얼마나 이야기를 했느냐? 죽은 아버지가 불쌍하지도 않냐, 이놈 새끼야. 그 놈이 누구 아들이란 걸 아느냐? 너의 아버지와 친구 사이지만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이승만 쪽에 붙어서 사람들을 잡아가둔 문칠봉의 아들이여.”
어머니는 회초리로 종아리를 후려쳤다.
이승만 대통령이 내도한 날이면 김진철은 으레 집에 늦게 들어갔다. 그 때마다 어머니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어머니는 다시 눈을 부릅뜨고 아들 종아리에 회초리를 갖다 대었다. 종아리에 불꽃이 튀었다.
“누구하고 놀다가 왔느냐?”
“대통령 박사님 왔습니다.”
“그 노망든 할아버지가 어째서 박사님이냐?”
“모릅니다.”
“문갑식이 놈과 다녔느냐?”
“예.”
“그 놈이 또 꽃다발을 바쳤느냐?”
“맞습니다. 문갑식이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문갑식의 어머니도 일찍 죽었습니다.”
“그 놈과 왜 같이 다니느냐? 너의 아버지 저승에서 엉엉 울겠구나, 이 망할 놈아.”

사무실에서 신문을 뒤적거리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김진철이 수화기를 들자마자 문갑식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향에 내려왔다. 얼굴이나 보자.”
“그래!, 양코배기!”
전화를 받자마자 문갑식의 옛 별명이 스스럼없이 튀어나왔다. 며칠 전에는 텔레비전에서 그의 아버지 문칠봉을 보았는데, 느닷없이 문갑식이 전화를 주었다. 솔직히 속마음은 달갑지 않았다.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어설픈 답변을 늘어놓았던 자신까지 쑥스럽다고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 해남리 어촌계 횟집에서 만나자. 다른 친구들도 몇 명 모인다고 했어.”
“해남리? 그래…… ”
문갑식은 다짜고짜로 만날 장소까지 결정해 놓고 있었다. 놈이 갑자기 웬일일까. 벌초 때나 집안에 경조사가 있을 때 가끔 서울에서 내려와 전화 연락을 하는 일은 있는데 얼굴을 서로 맞대는 일은 드물었다. 그의 부친 문칠봉이 텔레비전에 나타나 정신을 어지럽히더니, 아들놈까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진철은 고향 해남리로 차를 몰았다. 도로가 쭉쭉 뻗어 시내에서 삼십 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어촌계 횟집은 북적거렸다. 동창들은 문갑식을 중심으로 십 여 명이 들러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여자 동창도 몇 명 눈에 띄었다. 정기 모임에는 얼굴도 비추지 않는 동창들이, 문갑식이 나타나면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역시 서울에서 돈 많이 벌고 출세한 사람은 틀렸다. 음식도 푸짐하게 차려졌다. 술판 분위기도 무르익었다.
“늦었습니다.”
김진철은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문갑식이 김진철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했다.
“…….해남리를 생각하면 먼저 너희들이 떠오른단 말씀이야. 고향에는 순수가 있으며, 감성이 있으며, 자연과 뛰놀던 원초적 삶이 있지. 악동 노릇을 하던 개구쟁이 시절이 떠오르고, 청운의 꿈을 심어준 선생님들이 고맙게만 느껴지지.”
문갑식은 사업가답게 말솜씨도 청산유수다. 자리에 앉은 김진철에게 소주잔을 돌리는 여유도 보였다.
“나와 진철이는 불알친구지. 매일 붙어 다녔으니까. 저 놈 아버지하고 우리 아버지도 일제시대 소학교 동창이야. 그런데 말이야, 저 놈만 보면 생각나는 게 있어. 우리가 다닐 때 교실은 일제시대 때 사용하던 목조건물을 그냥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 알잖아. 그 본관 동서쪽에 우물이 있었지. 나는 진철이와 머리를 처박고 두레박으로 물을 떠올리고 벌컥벌컥 떠 마셨지. 그 물맛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마시는 양주 맛보다 낫지. 그렇지, 진철아?”
김진철은 얼굴을 붉히며 문갑식을 쳐다보았다. 또 문갑식이 건네는 소주 한 잔을 벌컥 목젖으로 넘겼다. 그런데 오늘따라 문갑식이 더욱 소원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텔레비전에 나타난 문칠봉의 때문일까. 아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그렇게 말리던 그와의 만남을 껄끄럽게 여겨서 그럴까. 문가 놈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해라. 살릴 수 있는 너의 아버지를 죽인 거나 다름없지. 하루는 읍내 경찰서까지 문가 놈을 찾아가서 너의 아버지 묻은 곳만 알려주라고 했지. 시신만 찾아 달라고 했지. 문가 놈은 등을 돌려 버렸어. 모르겠다고 하면서 말이야.
“갑식이는 우리들에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을 실제로 보여준 놈이야. 녀석이 삶 자체가 유별났지. 저 놈은 잊어버렸을 거야. 오 학년 때인가? 저 놈을 따라 처음으로 시내 구경을 갔지. 그리고 갑식이 아버지가 사는 경찰관 관사를 찾아갔어. 그런데 말이야, 온돌방에서만 살던 나는 일본식으로 꾸민 집에 들어가 보고 놀라 자빠지고 말았지. 방에는 다다미가 깔려있고 난생 처음 양변기를 구경했어. 그때까지 우리는 화장실이란 말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지. 그때 돋통시이라는 곳에서 대소변을 처리하지 않았나? 우리 집 밥그릇보다도 깨끗한 그 양변기를 보고 그만 가슴이 쿵쿵 뛰기까지 했어. 정말 놀랐지. 별 세상이었어”
김진철이 거들자 동창들은 그래그래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문갑식을 추켜새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어떤 녀석이 불쑥 나섰다.
“텔레비전에 나온 양반이 자네 어르신네 맞아? 진철이도 텔레비전에 나오던데……..”
“그래 내 아버님이야. 너희들도 텔레비전 봤어? 그런데 말이야, 도대체 젊은 시절 빨갱이 잡는데 목숨을 거신 어르신네를 죄인 취급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이야. 진철이도 청문회에서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맞아, 자네 어르신 훌륭한 분이지. 그 어려운 시기에 경찰 간부를 했으니까.”
다른 녀석이 또 나섰다.
분위기가 변하면서 화제는 중계방송으로 옮겨졌다.
“육십 년이 훨씬 지난 사건을, 그리고 빨갱이 세상을 만들겠다는 놈들을 잡아가두는 게 당연하지 않아?”
문갑식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김진철은 멍하니 문갑식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사건에 대한 진실은 밝혀야지. 특히 우리 마을은 좌우로 엉켜서 지금까지 갈등으로 심하게 앓고 있지 않은가?”
어느 입빠른 놈이 불쑥 꺼낸 말이었다.
“맞아.”
누군가가 맞장구를 쳤다.
“갈등이 왜 생기는데? 빨갱이가 주인 노릇 하자는 세상이 정당하다는 것인가?”
문갑식이 다시 술을 벌컥 들이켰다.
“바로 그 시기에 이데올로기 갈등이 일어났는데 어느 쪽이 정당한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 어르신네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이야?”
“맞아, 말년에 불순분자를 얼마나 많이 잡았다고………..훌륭한 분이지.”
또 다른 녀석이 문갑식을 옹호하고 나섰다. 동창들은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분위기였다.
“그만 해. 그냥 술이나 마시자고.”
입을 다물고 있던 김진철이 중재에 나섰다.
분위기가 진정되자, 다시 문갑식이 자리를 주도했다.
“나는 요즘에야 고향 사람들의 진정한 배려를 어슴푸레 느끼고 있어. 서울 한 귀퉁이에 보따리를 풀어놓고 있지만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어. 싱싱한 고향의 언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야. 저 가난한 사람들이 한숨을 짓는 곳이 내 고향이며, 배급받은 우유를 맛있게 먹던 곳이 내 모교지.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고향에 내려와 오름이 바로 보이는 모래밭에 호텔을 지을 생각이야.”
“뭐? 호텔 사장이 된다고? 하여튼 출세했어. 열심히 사는 갑식이가 부럽다. 어떻게 돈을 그렇게 많이 모았어?”
동창들은 문갑식의 직업에 대하여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 문갑식은 그냥 인사치례로 밥은 굶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초등학교 행사에나 총동창회 행사에 누가 연락을 하는지 두툼한 기부금을 보내왔다. 문갑식은 생각보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고향 동무들 사이에 소문이 무성하였다.
“무기 장사를 했어. 미국에서 최신식 무기를 사다가 한국 정부에 팔았지. 분단국가를 지키는데 무기는 필수품이지. 너희들이 양코배기라고 놀려댄 내가 양코배기 덕에 한 몫 하지.”

학교에서는 수업시간보다 사역시간이 더 많았다. 산사람들이 불태워 버린 교사를 복구하기 위하여 늘 아이들을 동원하였다. 교장은 아이들을 운동장에 세워놓고 훈시를 이어갔다. 아이들은 괭이나 삼태기, 혹은 낫과 호미를 들고 서있었다.
“어린이 여러분, 바로 여기 이 자리에 보기 흉측하게 남아있는 건물은 폭도들이 불태운 흔적입니다. 빨갱이들은 여러분의 집과 학교까지 불태웠습니다. 하루 빨리 새 건물을 여러분 손으로 다시 세워 학업에 매진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승만 대통령 사진을 교실 한 복판에 걸어놓고, ‘무찌르자 오랑캐’하며 노래를 불렀다. 대통령 생일에는 그를 찬양하는 동시를 의무적으로 써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들의 아버지예요. 가난한 우리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계셔요. 우리들을 일본놈 손에서 구해주셨고 우리를 공산당 손에서 구해주셨어요. 우리는 공부 열심히 하여 공산도배를 무찌르고 남북통일을 이룩할 거예요. 대통령 할아버지 오래오래 사세요.
대통령이 내도하여 학교 잎 신작로를 자나가기로 예정된 날이다. 아이들은 ‘대한민국 만세’ ‘대통령 만세’를 목이 터지게 연습하였다. 양손에 태극기를 들고 하나 둘 구령에 맞추어 신작로로 나섰다. 대통령 지프가 자나가기를 애태우며 기다렸다. 뜨거운 태양열이 빡빡 깍은 맨 머리통을 뜨겁게 달구었다. 아이들이 한나절 기다렸지만 대통령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후 늦은 시간에 경찰 지프가 세워지고 모자에 노란 테를 두른 경찰 간부 문칠봉이 차에서 내렸다. 문칠봉은 교장에게 가까이 가서 귓속말로 무어라고 소곤거렸다. 시간이 지나자 여러 대의 차가 지나고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이승만이 탑승한 지프가 잠시 세워졌다. 이승만이 미소를 보내며 차에서 내렸다. 문갑식이 어린이 대표로 대통령에게 꽃다발을 바쳤다. 아이들은 손바닥이 미어지도록 박수를 쳤다.

다음 날 문갑식이 다시 전화를 주었다. 내일 아침 서울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저녁에 만날 수 있어? 단둘이 만나자. 할 이야기도 있고….”
문갑식은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진철이 들어서자 한식관으로 그를 안내했다. 식사는 미리 예약이 되어 있었다.
“세상이 많이 변했더군. 동무들까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 같아서 매우 씁쓸했어. 역시 자네뿐이야. 자네와의 옛 우정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거야. 자네 생각나? 5학년 때인가? 학교 본관 뒤뜰 우물 옆에 큰 가마를 걸어놓고 전심시간에 우유를 주었지, 점심으로. 우리들은 빡빡 깍은 민둥머리에 땡볕을 받으며, 양재기를 들고 줄을 서서 우유를 받을 차례를 기다렸지. 나도 줄을 서서 우유를 받고 모두 너에게 주었지. 나는 집에 우유가 많았으니까.”
“그래, 네 덕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 둘이서 일을 저지른 걸 기억하나? 둘이서 알 동네 팽나무 고목에 올랐다가 동네 할아버지에게 들키고 말았지. 할아버지가 야단치는 바람에 급히 내려오다가 내가 나무에서 떨어져 다리에 피가 나고 야단났지. 너는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 했겠니 부랴부랴 나를 업고 너의 집으로 업고 갔지……..그런데 부탁할 말이 뭔데?”
“응, 천천히 이야기하자. 한잔 하고.”
문갑식이 술을 따랐다.
“무슨 중요한 이야긴데 그렇게 뜸을 들여?”
“응, 어젯밤에 이야기했잖아. 해남리 모래밭에 호텔을 짓는 일 말이야. 네가 도와줘야겠어. 미국에 있는 무기 제조회사가 섬에 투자를 결정한 거야. 현지 법인사장으로 일을 하게 됐어. 문제는 토지를 매입하는 일이야. 그 모래밭이 여러 사람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는데, 서너 사람이 말을 듣지 않아. 팔지 않겠다는 거야. 내야 외지에 오래 살아서 고향사람들을 잘 모르지만, 너야 그래도 섬을 지키고 있어 이야기가 될게 아니야. 내 섭섭지 않게 해줄게. 우리 회사 현장사무소를 맡아주게. 상무 직책을 줄게.”
김진철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대형호텔 상무란다. 가슴이 뛰는 일이다. 동창 덕분에 살 길이 열린 것이다. 그렇지만 김진철은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말을 꺼내야 할 때였다. 문갑식에게 전해줄 말이 입 안에서 꿈틀거렸다.
“갑식아.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 그 모래밭은 마을 사람들이 무고하게 저승으로 떠난 사람들의 사건이 묻힌 곳이야. 너 우리 어머니 기억하지? 지금 살아 계서. 너를 만나는 걸 그렇게 싫어했지. 너도 마찬가질 거야. 네가 지나가는 말로 말한 내용이 생각나. 너의 아버지가 너에게 나와 놀지 말라며 나무랐다며. 폭도 새끼와 놀지 말라고 말이야. 네가 부탁하는 일 할 수 없어. 그 모래밭을 일구어 희생된 분들의 유골을 찾는 알부터 시작할 거야. 우리 아버지의 영혼도 지금 눌 자리 없이 구천을 헤매고 있어.”

마을 서쪽에 버티고 있는 오름에서는 쿠 쿠르 쿠 쿠르하면서 멧비둘기가 울었다. 진한 적갈색을 살짝 감추며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고 쿠 쿠르하며 사람들을 불렀다. 울음소리를 따라 그곳을 자세히 살펴보면 완만한 등성이가 크게 두 봉우리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북쪽 봉우리는 송이로 되어 있으며, 남쪽 봉우리에는 용암바위가 우뚝 솟아있다. 북쪽 낭떠러지 기슭에는 누가 파놓았는지 큰 굴 하나가 바다를 행해 입을 벌리고 있다.
두 아이는 학교 뒷길을 따라 늘 오름을 찾았다. 처음은 너무 심심하여 그냥 올랐다가 언제부터인지 자주 찾게 되었다. 소나무 줄기를 타고 올라가 멧비둘기 둥지에서 알을 찾아내어 품에 넣기도 하였다. 바닷가 보이는 굴속에 자리를 잡고 한참 누워 있다가 내려오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쿠 쿠르 쿠 쿠르하고 멧비둘기 소리가 처량하게 들렸다.
북쪽 기슭에 있는 굴은 일제시대 마을 사람들의 공력으로 파 놓은 굴이다. 왜놈들이 마지막 발악을 하면서 굴을 파서 방공호를 만들고 미군이 공습을 대비해 군사사설을 비축하고 있었다. 굴은 사태가 발생하자 일시적으로 마을 사람들의 피신처가 되기도 하였다.
굴을 찾지 않은 날이면 베나물동산에서 숭개미동산까지, 윗동네 숫두뭇에서 외막밭까지 늦도록 쏘다녔다. 두 아이가 붙어 다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문갑식은 아버지가 시내에 살아서 할머니와 단둘이었고 김진철은 역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둘은 집에 일찍 들어가도 심심하였다. 그리고 학교에 가면 홀어머니 아들딸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그곳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싫었다.
김진철이 늦게 들어가는 날이면 늘 어머니 눈치가 무서웠다.
“누구하고 놀다가 왔느냐?”
“………………….?”
자세한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문갑식이 놈과 돌아다녔느냐? 왜 그 놈과 어울려 다니느냐? 그 놈은 원수 놈의 새끼야.” 어머니는 문갑식을 원수 놈의 새끼라고 했다. 그렇다면 문칠봉은 원수 놈이었다.
그렇지만 문갑식을 따라다니는 것이 재미있고 알사탕을 그냥 내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네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느냐? 그 문칠봉이 어떤 놈인 줄 아느냐?”
어머니의 질문은 반복될 것이 뻔하였다.
또 어머니가 했던 말이다.
“네가 한 살 때 일이다. 하루 저녁은 대청대원이 집에 오더니 너의 아버지보고 내일 아침 열 시까지 학교운동장으로 나오라는 거야. 무는 일이냐고 너의 아버지가 물었거든. 경비대에서 나와 불순분자를 가린다는 거야. 완전히 뒤바뀐 삶이 된 것이다. 너의 아버지는 그날 밤 산으로 피신한 것이다.”
어머니가 훌쩍거리며 설명을 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문칠봉이란 놈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어.”
“아버지 무덤은 어디에 있어요?”
겨우 내가 질문을 던졌다.
“오름 아래 모래밭이 모두 아버지 무덤이다, 이 망할 놈아.”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어린 김진철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은 이야기였다.
사태가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오름이 바라다 보이는 모래밭에 사람들을 세워놓고 마을 사람들 총살시키고, 그 시신들을 구덩이에 파묻었다는 이야기였다. 군용차에 사람들을 싣고 가서 일렬로 세우고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해서 사건이 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김학수는 이미 산으로 피했고 현장에는 없었다.
김진철은 문갑식의 뒷구멍을 계속 쫓아다녔다. 그를 따라 다니면 항상 알사탕이 나왔다. 그것을 입안에 집어넣고 빠는 그 맛이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너무나 달콤한 맛이었다.

며칠 후 지방신문 사회면에는 ‘문칠봉씨 자살’이라는 톱기사가 실렸다. 관광객이 모래밭을 거닐다가 노인의 시신을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경찰 조사 결과 그 주인공은 문봉칠이며 농약 병이 시신 주위에 발견되어 자살일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그리고 노인의 포켓에는 마지막 유서도 발견되었다.
“저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유가족 여러분에게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합니다. 저는 사건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 죄를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저는 어두운 과거의 역사를 마감한다는 마음으로, 인간 생명의 가치가 소중하다는 생각으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백합니다. 특히 제 친구 김학수가 오름 아래 모래밭에서 학살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김학수가 경찰트럭에 실려질 때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상관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만 두었습니다. 저승에서 그가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빛을 가슴에 숨기고 고통으로 살았습니다. 저는 김학수가 있는 저승으로 떠납니다. 거기에서 엎드려 용서를 빌겠습니다.”
김진철은 읽던 신문을 내려놓고 어머니의 방문을 급히 열었다.
“어머니! 문칠봉이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도는 영영 눈을 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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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덕문학-책 머리에

■책머리에

모닥불 피우며, ‘문(文)’을 살리자

□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닢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짖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백석의 시「모닥불」.
백석(白石)의 시「모닥불」은 1936년 시집 『사슴』에 발표되었다. 해방 이후 오랫동안 우리는 백석의 시를 접할 수 없었다. 월북한 것도 아니고, 전쟁 기간 중 납북된 것도 아니고 자기 고향인 북쪽에서 월남하지 않고 다만 그냥 머물렀을 뿐이다.『사슴』이 불온서적이 되고,「모닥불」과 같은 시를 읽으면 빨갱이로 몰리는 시절이 있었다.
「모닥불」은 소외된 존재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평등하고 충일한 마을 풍경을 소박한 언어와 담담한 어조로 질박하게 그려낸 시이다. 일제강점기의 고향에 대한 상실감을 향토성 짙은 토속어로 노래하고 있다. 민족의 주체적 자아를 농촌공동체의 생활과 정서에서 찾고자 한 백석의 초기작품으로, 식민지시대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삶이 사실적으로 드러나 있다.
「모닥불」에서 ‘새끼오리’는 새끼줄, ‘갓신창’은 가죽으로 만든 신의 밑창, ‘개니빠디’는 개의 이빨, ‘너울쪽’은 널빤지쪽, ‘짚검불’은 지푸라기, ‘닭의 짖’은 닭의 깃털, ‘개터럭’은 개의 털이다. ‘재당’은 향촌의 최고 어른에 대한 존칭, ‘초시’는 한문을 좀 아는 유식한 양반을 높여 이르는 말, ‘문장’은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제일 위인 사람, ‘갖사둔’은 새사돈이다. ‘불상하니도’는 ‘불쌍하니도’의 고어이며, ‘몽둥발이’는 딸려 붙었던 것이 다 떨어지고 몸뚱이만 남은 것이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불을 쬐고 있는 농촌공동체의 모습은 과거 함덕마을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쓰잘데기 없는 잡동사니들을 모아 태우고 시답지 않은 사람들을 모닥불 주변에 둘러 세워 따뜻하고 황홀한 장면을 연출해 내는 모습은 바로 함덕사람들의 행태이다. 모닥불에서 타고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물들은 모닥불을 쬐고 있는 군상들과 짝을 이룰 만한 보잘 것 없는 처지들이다. 바로 주류에서 밀려난 함덕사람들의 처지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아니고 무엇일까.
모두가 모닥불을 둘러싸고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보잘 것 없던 사물들이 모닥불로 타오르면서 보잘 것 없던 무리들을 온기로 묶는다. 역사를 함께할만한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온기를 나누는 따듯한 정경을 통해 공감과 위안의 정서를 펼쳐 보인다.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함덕문학』의 모습이며, 앞으로 밟아야 할 『함덕문학』의 미래의 모습이다.
시인 백석이 자신의 문학 세계를 통하여 그려 내고자 했던 테마는 오로지 조선과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표상이다.「모닥불」을 통하여 변방지역 농촌마을의 삶과 정경을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그들의 시대적 배경은 식민지라는 핍박의 시간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일도 없는 듯이 보이지만 속에 감추어진 이면에서는 각종 수탈과 민족 정체성의 손상과 망실이 조직적 계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함덕문학』의 탄생은 관광산업으로 파괴되기 시작한 마을공동체의 본질을 찾고자하는데서 출발한다.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함덕사람들의 정체성은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농촌생활의 삶은 부동산 가격의 폭등으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함덕문학』은 과거 함덕사람들이 추구했던 삶의 본질과 현실과의 괴리를 찾는 작업부터 시작할 것이다.
백석의 시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절대 다수는 농민이며 서민이다. 바로 과거의 함덕사람들이며, 현재의 함덕사람들일 수 있다. 거의 대부분 낮고 평범한 민중 신분들이며, 하나같이 외롭고 쓸쓸하며 가난한 서민들이다. 그렇지만 민중은 꿈틀거리고, 역사를 변혁한다.
「모닥불」에 등장하는 ‘몽둥발이 소년’은 부모를 모두 잃은 고아로서 어떤 환난을 당하여 신체적 불구가 되었다. 함덕사람들도 4․3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정신적 불구가 되었다. 하지만 시인은 불구가 된 소년의 구체적 내력을 밝히지 않는다. 다만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력으로 풀어 가도록 이끌고 있다. 함덕사람들도 그 역사적 사건을 극복하고 부활한다.
백석의 시를 읽는 것은 또한 우리의 문학사를 온전하게 읽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백석 시의 특징으로 꼽히는 향토색 짙은 민속어는 단순한 북방 정서를 담은 풍물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뭇사람들과 오리, 망아지, 토끼를 비롯한 동물, 곤충 등 유난히 작고 가냘프고 여린 것, 외롭고 못난 사물과 소외된 가여운 생명들이 한데 어우러져 생명 공동체를 이룬다.
『함덕문학』은 함덕마을이 개발론자들의 경제적 이득에 의해 규범화와 규격화, 구별화의 강압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비록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온갖 개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로 함덕 고유의 정서가 배어 있는 지역공동체의 따스함을 노래할 것이다.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오산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1936년 첫 시집 을 출판하였다. 방언을 즐겨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모닥불」, 「고향」, 「여우난골족」, 「팔원」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토속적, 민족적이면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순이 삼촌」은 1978년『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현기영(玄基榮)의 중편소설이다. 1949년 1월 16일 조천읍 북촌리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을 모델로 삼고 있다. 북촌리는 바로 함덕리의 이웃마을이다. 작가 현기영은 그 학살현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순이 삼촌의 삶이 어떻게 황폐화되어 가는가를 보여줌으로써, 4·3사건의 참혹상과 그 후유증을 고발함과 동시에 30여 년 동안이나 묻혀 있던 사건의 진실을 문학을 통해 공론화시켰다.
4·3사건을 민중적 시각에서 조명해 역사적 사실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최초로 문학의 영역에서 논의함으로써, 문학사적·역사적 의의가 큰 1970년대의 대표적인 문제소설「순이 삼촌」. 제4공화국 시절에 소설을 발표한 작가는 고문과 금서조치를 당하는 등 개인적으로 큰 고초를 겪었지만 「순이 삼촌」작품을 계기로 4·3사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고, 문학을 비롯해 미술·연극계 등 문화계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함덕리에서도 4․3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제3조 제2항 제2호 규정에 따라 신고 된 피해자를 4․3위원회에서 심의하여 ‘제주4․3사건희생자’로 결정된 함덕출신 희생자는 275명이다. 앞으로 추가신고가 이루어지면 그 숫자가 저 늘어날 것이다. 마을 단위로는 엄청난 숫자이다. 어디 4․3희생자가 함덕과 북촌뿐인가. 제주도 전체로 3만이라 하지 않은가. 너무나 큰 역사적 비극이다. 문학이 결코 아픈 역사적 기억을 외면할 수 없다. 역사가 문학이고, 문학이 역사이기에, 우리 함덕문인들은 역사를 바로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쓰기 작업에 매진할 것을 고백한다.
□ 마을은 촌락과 같은 의미이다. 촌락은 마을·골〔谷〕·동리·부락·취락 등의 용어로도 사용된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생활의 단위로서, 인간생활의 기본단위인 가족 또는 집들이 모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통합을 이루고 있는 지역집단이다.
마을은 남과 남, 사람이 모여 사는 최소 단위이다. 작지만 그 안에는 사회적 의미의 모든 요소와 행위가 축약되어 있다. 마을에는 어느 성씨의 흥망성쇠가 마치 나라 안에서 민족이 흥하고 망하는 것처럼 명멸하고 있다. 그 속에서 『함덕문학』은 몸부림칠 것이다.
이제 함덕마을에 모닥불을 피워 올려야 한다. 모닥불 피우며, ‘문(文)’을 살려야 한다. 그 모닥불 주위로 주민들이 모여들고, 주민들이 서로 손잡고, 함께 노래한다면 마을공동체의 낡은 관행은 재가 되고 불태워질 것이리라. 그래서 ‘문(文)’은 되살아 날 것이다.
현재의 함덕마은 촌락민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없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전통사회의 중요한 생활공동체가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농촌공동체의 모습은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가족을 포함한 친족이나 이웃사람 등 지연을 함께 하는 촌락민의 생활공동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흔한 밭두렁에서 보이던 모닥불은 자취를 감추고 행정기관의 통제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함덕사람들은 친족·친구·가족 등의 구별을 초월하여 같은 지연이라는 공동의식을 가지고 공동의 생활을 영위하던 과거에서 탈출하기 시작하였다. 친족관계와 이웃관계를 포함하는 여러가지 사회적·경제적·종교적 관계가 존재하지만, 혼례나 장례와 같은 통과의례, 두레나 품앗이와 같은 노동교환의 조직, 돈이나 쌀을 모으는 계(契)조직이 사라진지 오래다.
지역문화는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이 공유하는 생활양식이다. 말로는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20세기적인 자본의 논리를 관철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함덕문화 역시 문화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문화적 민중’ 들을 위한 문화 향유권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 마땅한데, 그럴 여유조차 없이 도시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과거로 회귀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화기득권자들은 어디든지 존재한다. 문화기득권자들의 문화독점을 막는 것이 주요 과제여야 하는데, 그들 자신이 칼자루를 쥐고 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한 이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만은 없는 현실이다. 제주섬 안에서 고향마을 안에서 문화정의 실현을 위하여 계급이나 빈부차에 따른 문화향유권의 차별을 극복할 수 있도록 삶에 쪼들려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의 문화생활을 배려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역문화 정책도 문화에서부터 소외된 주민들의 삶을 문화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역주민들도 지역문화를 누릴 수 있어야 하며 문화생산의 주체 구실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제주사회와 함덕사회를 지키고 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문화 향수권이 박탈된다면 그것은 문화정의를 왜곡하는 것이자, 종적인 지역모순을 한층 심화시키는 것이다. □ 다시 모닥불을 피워 올려야 한다. 지푸라기를 하나 둘 모아 마을사람들이 모여들어 과거의 모닥불을 피워 올릴 때 새로운 삶, 새로운 공동체는 복원되어야 한다. 오랜 진통 끝에 『함덕문학』이 얼굴을 내미는 일은, 바로 모닥불을 피워 올리는 일에 한몫을 담당한다는 이야기이다. 마을단위로 문학지를 발간하는 것은 제주도에서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주도에도 『애월문학』, 『구좌문학』, 『한림문학』, 『서귀포문학』등이 발간되고 있지만 마을 단위로 문학지가 발간된 전례는 없다. 그만큼 함덕마을은 문학적 토양이 풍부하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을 우리는 그냥 묻혀두고, 머뭇거리고, 기다리기만 하였다. 이제『함덕문학』의 모닥불을 올리면서 거기에 참여하는 문인들은 각오는 사뭇 남다르다,
매주 화요일 저녁이면 함덕리사무소에서 모이는 함덕리지폅집위원회에서 누가 불쑥 함덕에 거주하거나 함덕출신 문인들이 열 명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미 편집위원 중에도 필자를 비롯하여 한문용 시인이 한국문단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터라 귀가 번쩍 뜨였다. 거기에다 김수철 시인이 창조문학으로 등단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함덕문인들은 부랴부랴 조직을 서둘렀고, 김성만 함덕리장의 배려로 함덕문학회의 조직을 완료하고 모닥불을 피워 올리게 되었다. 특히 김성만 리장은 2018년 예산에 『함덕문학』발간을 지원하겠다는 뜻도 밝혀 함덕문인들의 가슴은 더욱 울렁거렸다.
서둘러 함덕문학회가 조직되고, 2017년도에 『함덕문학』창간호를 발간하자는 뜻도 모으고, 몇 분의 함덕출신 인사들에게 그 뜻을 전하자 기꺼이 창간호 후원자가 되겠다고 나섰다. 마을에서 문학회가 조직된 것은 제주문학사에 처음 있는 일이라는 자부심도 내면에서 꿈틀거렸는지 모른다. 이제 첫 문턱을 넘었으니 함덕문인들은 읽고 쓰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일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채찍을 기다린다.(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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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제주일보] 작가는 왜 쓰는가. 작가는 작가로서 어떤 책무가 있어서 밤에 불을 밝히는가. 잠을 설치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거나 원고지 앞에서 끙끙거리는 작가들은 가끔 ‘내가 왜 이런 미친 짓을 하지’라고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나는 왜 쓰는가. 나는 왜 사는가.

‘왜 쓰는가?’라는 질문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일 수 있다. 시인 정호승(鄭浩承)은 ‘시를 쓰지 않고 살았더라면 인간으로 제대로 살 수 있었을까’라고 했다. ‘왜 시를 쓰는가’라는 문제는 ‘왜 사는가’라는 문제와도 같다고 했다. “그래도 나라는 존재를 사랑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게 아닐까 싶어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으로써 시를 써 온 것은 아닐까….”

다음은 작가 한창훈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하는 말이다. “친구도 없고 장난감도 변변찮은 시골 아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자신의 상처를 가지고 논다. 무릎이 까지면 자꾸 만져보고 딱지가 앉으면 그 딱지를 뜯어내며 혼자 논다. 시(詩)라는 게 바로 그것이다.”

작가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또한 작가의 글쓰기의 원동력은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고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글쓰기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중심만, 권력만, 웃는 것만, 달콤한 것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데에서 작가의 글쓰기는 출발한다. 왜 쓰는가. 이에 답하지 못한다면 작가가 아니다. 기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작가 겸 기자였던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고백을 들어 보자.

‘1984’와 ‘동물농장’을 쓴 치열한 작가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순전한 이기심’이다.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얘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나를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그런 따위의 욕구다.

조지 오웰은 글을 쓰게 하는 힘을 네 가지 욕구로 꼽는다. ‘순전한 이기심’에 뒤이은 제2, 제3의 동기는 미학적 열정과 역사적 충동이다. ‘미학적 열정’은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다.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주는 묘미, 훌륭한 이야기의 리듬에서 찾는 기쁨이다. ‘역사적 충동’은 기록 욕망이다. 사물을 있는 대로 보고 진실을 후세에 보존하려는 욕구다.

마지막 네 번째 욕구는 ‘정치적 목적’이다.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다. 정치와 예술의 분리 담론을 옹호하는 이들에게 오웰은 말한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문학작품의 가치를 판별하는 기준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느냐 말고는 없다. 생존이야말로 그 자체로 다수 의견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지표인 것이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은 내가 운명할 때까지 나를 따라다닐 질문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의 글이 역사의 장벽을 무너뜨리기에는 힘이 벅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과연 나는 나의 펜을 내려놓고 절망만 할 것인가.

다음은 고은(高銀)의 시 한 구절이다.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 온몸으로 가자 / 허공 뚫고 / 온몸으로 가자 /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 박혀서 /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1970년대에 ‘민중시인’으로 변신한 고은은 통일 지향의 문학이 자신이 추구해야 할 절대 가치라는 확신에 도달한다.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에 찬 어조로 이념의 절대성을 결정하고 있는 시가 바로 ‘화살’이다.

나는 도대체 어떤 절대적 가치로 한국문단의 모퉁이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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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안 되는 선거, 투표권을 줄게’

[제주일보] 미국의 한 트위터 이용자는 ‘16세에 투표권을 주지 않으면서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는 100살 노인들에게도 투표권을 줘서 멋대로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게 한다’는 내용을 게재해 수많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사실 ‘노인들이 젊은이들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말은 트럼프 대선 때 나온 말이다.

한국에서도 투표권이 없는 5만여 명의 청소년들이 참정권 실현을 촉구하며 제19대 대통령선거에 맞춰 모의투표를 실시했다. 청소년의 참정권 실현을 위한 사회적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직접 뽑는 모의투표였다. ‘나만 안 되는 선거, 투표권을 줄게’라는 구호도 내걸었다.

청소년들의 참정권 실현은 더 깊은 민주주의, 더 넓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시대적 요청이다. 한국YMCA전국연맹은 대통령선거일인 지난 5월 9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전국에서 ‘모의 대선’을 치렀다. ‘청소년이 직접 뽑는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 운동본부’는 서울 등 전국 30곳에서 투표를 진행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온라인으로도 투표를 진행했다. 누리집 등을 통해 투표권이 없는 청소년 선거인단 6만75명이 모였고 그 중 86.08%인 5만1715명이 참여했다.

청소년들은 모의투표를 통해 대통령으로 문재인을 뽑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5만1715표 가운데 2만245표를 얻어 39.14%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실제 대선과는 달리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36.02%를 얻어 근소한 차로 2위에 올랐다.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10.87%),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9.35%),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2.91%) 순으로 이어졌다.

YMCA전국연맹은 “인류는 신분, 성별, 인종의 벽을 무너뜨리면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확장해왔고 남은 것은 나이의 장벽뿐”이라며 “만 18살 청소년이 참정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란다”고 요청했다. 이것이 바로 찌들지 않고 포기하지 않은 우리 청소년들의 생각이며 거기에서 희망을 본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러한 미래가 올 수 있게 해달라고 바라본다. 청소년에게 투표권을 주는 일은 사회 참여에 대한 교육기회로 삼는 일이다. 학생을 ‘교복 입은 시민’, ‘교복 입은 유권자’로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참교육이라 할 수 있다. 광화문 촛불 집회와 탄핵 과정에서 청소년이 보여준 높은 민주 시민 의식과 올바른 정치적 판단력, 성숙한 질서 의식은 시민의 자격이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제정된 헌법에 따라 21세 이상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했으나 1950년에 20세, 2005년에 19세로 한 살씩 선거권 연령을 변경했다. 이처럼 참정권 확대의 역사는 우리나라에도 전례가 있으며 훗날 더더욱 확대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 언젠가는 또다시 시간이 흘러 사회 각 구성원들의 긍정적 합의에 따라 투표연령이 18세로 또 한 단계 낮아질지도 모른다. 다만 이러한 과정은 건전한 정치사회 안에서 사회 구성원 다수가 젊은층에게 자연스럽게 참정권을 보다 넓게 나누어 주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사회진보의 장으로써 이루어지는 상황이기를 기대해 본다.

청소년을 미래가 아닌 현재의 시민이라고 인식할 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더불어 성장한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신분, 성별, 인종의 벽을 하나씩 무너뜨리면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확장해 왔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이의 장벽뿐이다.

어른들 못지않게 청소년들도 정치를 안다. 청소년들도 공부하고 뉴스를 보는 시민으로서 투표권을 가져야 나라도 바뀔 수 있다. 입시지옥과 청년실업 문제를 풀어줄 사람에게 한 표를 줄 수 있다. 인구의 고령화 속도와 청소년의 정치적 각성 수준을 고려하면 선거 연령을 낮춰야 한다. 현재의 18세는 학창시절에 정치·사회적으로 굵직한 사건·사고를 경험해 정치적 학구열이 누구보다 높다. 이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고 판단력이 미숙해 투표권을 줄 수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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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짓지 못한 역사’

[제주일보] 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새기지 못한 비석.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제주4․3평화기념관의 ‘프롤로그’ 공간에는 3m 크기의 하얀 비석 ‘백비’가 누워 있다. 그리고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는 문구도 보인다.

제주4․3이 국가추념일로 지정된 후에도 ‘잠들지 않는 남도’는 식전행사에서조차 불려지지 않는다. 언제쯤이면 백비에 글자를 새겨 넣고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부를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제주4․3이 제대로 평가를 받는 것은 통일이 된 이후에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시작이 분단에서 비롯됐고 그 과정에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항거했기 때문이다.

일흔 성상을 바라보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역사이기에 제주4·3은 ‘잠들 수 없는 역사’, ‘완성되지 않은 역사’가 되고 말았다. 백비가 그냥 누워 있음은 정명(正名)되지 못한 역사, 반쪽 짜리 역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주4․3의 달력은 진전되지 않고 있다. 기득권 세력들은 촛불을 종북(從北)이라고 왜곡했듯이 제주4․3 역시 ‘빨갱이 짓’이라는 취급을 받아왔다. 제주4․3에 대한 정명을 찾고 철저한 진상규명과 함께 국가와 미국의 책임을 당당히 물어야 한다.

온전치 못한 민족의 해방은 1948년 제주4․3의 불씨가 됐다. ‘흔들리는 섬’ 제주는 ‘해방-자치-미군정-3·1절 발포사건-탄압-학살’의 역사적 상황으로 급박히 전개됐다. 해방은 남북분단으로 이어졌고 결국 예견된 전쟁을 불러 왔다. 지난 70년간 38선이 더욱 단단해지고 있는 것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이승만 정권에 이어 군부정권이 ‘공산무장폭동·반란’으로 억압했던 제주4·3의 이름은 1960년 4·19혁명을 거치면서 ‘사건(incident)’으로 환원됐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좌절됐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본격화된 진상규명운동으로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됐지만 제주4·3은 여전히 ‘사건’에 머무르고 있다.

‘봉기’도 ‘항쟁’도 ‘폭동’도 ‘사태’도 ‘사건’도 아닌 채로 그냥 ‘제주4․3’이라 불린 그 비극. 그렇게 그 어떤 이름도 가지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 원인규명 부족이나 모호함 때문이 결코 아니다. 이날, 이 시간까지 그 가해자와 그 후계자들이 국가와 사회의 주도권을 쥔 채 또 다른 관점에 제주4․3을 재생산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4․3의 완전한 해결은 진상규명-책임자 처벌-배·보상-명예회복의 단계를 거쳐야 하지만, 첫 단추인 진상규명부터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 올바른 진상규명은 제주4․3의 성격규정과 정명을 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5․18민주화 운동’, ‘4․19혁명’이라고 하지만 제주4․3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제주4․3’ 또는 ‘제주4․3사건’이라고 부를 뿐이다. 제일 먼저 당시 가해자와 미국의 책임을 밝히는 일이다. 2003년 故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국가권력’은 ‘미군정’이다. 제주4․3 당시 미군정의 역할은 무엇이었고, 책임은 무엇인지 철저히 밝히는 일 또한 중요하다.

‘역사에 정의를! 4·3에 정명을!’ 제주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큰 물줄기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이제 새로운 정부도 들어선다. 제주4․3은 도민만의 비극이 아니라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이고, 반드시 계승하고, 앞으로 되풀이되지 않도록 모든 국민들이 생각하고 마음속에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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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와 민주주의

[제주일보] “만세를 도모하지 않는 자는 한 시기를 도모하지 못하며, 전체를 도모하지 않는 자는 어느 한 부분을 도모하지 못한다. (不謀萬世者, 不足謀一時, 不謀全局者 不足謀一城)” 청나라 진담연(陳澹然)의 ‘침언이천도건번의(寢言二遷都建藩議)’에 나오는 말이다.

민주주의의 한계를 알아야 민주주의를 소생시킬 수 있다. 중국학자들이 지혜로운 정부와 어리석은 정부를 구별하는 기준이다. 지도자 한 사람의 힘만으로 민주주의가 소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훌륭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소생시키기 위한 중요한 출발이다.

‘정당’에 대한 서구와 중국의 인식 차이도 존재한다. 중국에는 서구와 같은 ‘파티(party)’ 개념이 없다. ‘당(黨)’이란 ‘어둠’(黑)을 ‘숭상’(尙)한다는 의미이다. ‘당’을 주로 사적인 이익을 위해 편당 짓는 것 즉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 즉 편(偏)의 의미로 해석한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무리를 이루어도 편당을 짓지 않는다(君子群而不黨).”

그렇다면 당을 선택하는 선거는 항상 민주주의적인 것일까? 북한에도 선거제도는 존재한다. 북한의 선거는 지방의 인민위원을 뽑는 지방선거와 최고인민의원을 뽑는 총선거가 있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17세 이상의 인민에게 있다. 선거 후보자의 경우 해당기관에서 기획을 하고 중앙당에 따라 결정되는데 일반 국민은 이를 알 수 없다.

프랑스에서 공화국이 자리를 잡나 하는 시점에 나타난 이가 나폴레옹 3세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로 시골 노인네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황제 자리에 올랐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다. 나폴레옹 3세의 추태를 끝으로 프랑스에는 더 이상 군주를 세우자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아돌프 히틀러는 지금은 부당한 권력의 상징처럼 거론된다. 유대인을 학살했고 장애인들을 학대했다.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히틀러는 결코 무력으로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니다. 히틀러는 선거를 통해 독일의 권력자가 됐다. 가장 뛰어난 제도라고 알고 있는 민주주의 선거제도는 어떻게 히틀러 같은 독재자를 낳게 된 것일까?

투표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1972년에 제정되어 유신체제의 근간이 된 유신헌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1조 2항에 나온 주권자에 대한 규정이다. 한국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유신헌법이 국민투표에서 91.5%의 찬성률로 통과될 때는 마을이장들이 뿌린 막걸리와 고무신이 맹활약을 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대통령 긴급조치를 통해 헌법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하는 것 자체가 범죄로 규정되었다. 국민은 직접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없고 오직 투표나 청탁을 통해서만 정치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구를 지지하느냐, 어느 줄에 서느냐가 ‘정치’가 된 셈이다.

민주주의의 꽃이 선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선거는 투표하는 순간만 우리가 주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민주체제란 그토록 열망해서 피를 흘리고 얻은 것이기에 소중하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체제의 단점에 대해서는 많이들 토론하지 않는다.

왜 우리가 뽑은 지도자는 우리를 배반하고, 왜 대다수 국민이 아니라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만 보고 나라를 운영하는지 등등 민주주의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해 성찰이 필요하다. 중국지식인 사회에서 제기하고 있는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우리의 민주주의를 소생시키기 위한 지적·실천적 노력에 타산지석의 역할을 할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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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强奪의/ 무서운 손톱은/ 함부로 祖國의 자취를 할퀴고”

– 시인 최길두(崔吉斗)의 역사체험과 글쓰기

-시인 최길두의 생애
“내 故鄕은/ 섬의 나라라/ 파-란 물결 춤을 춰 좋아라// 情든 땅/ 꿈의 나라라/ 하-얀 燈臺 깜박여서 좋아라// 밤이면, 離別의 뱃고동에/ 섬 색시에 젖는 옷고름// 떠나는 눈물 수건에 그 안타까움/ 어찌 안 좋아// 오/ 내 고향/ 동백꽃 피는 나의 고향/ 상처도 가지가지매/ 어쩌라고 안 그려요 글쎄/ 내 故鄕은/ 섬의 나라라/ 물새들 날아 좋아라/ 情든 땅/ 꿈의 나라라/ 人魚떼 울어 좋아라// 날이 새면-갯변가에/ 靑春의 피리 불던/ 사랑의/ 曲調曲調에/ 그 옛이라 안 좋은가.// 아하/ 내 故鄕/ 구름 피는 나의 故鄕/ 옛 자취도/ 갖이, 갖이매/ 어쩌라고 안 그러 글쎄”-최길두 시 「故鄕의 노래」(1938)

시인 최길두(崔吉斗)는 1917년에 제주시에서 태어나 시·소설·시나리오·무용가극 등을 두루두루 써 온 작가로 활동하다 지난 2002년 85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당시 제주도의 명문 제주공립보통학교와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 구례군농회기수(農會技手)와 제주도농회기수를 지냈다.
광복 후 제주상고와 제주중 등 여러 중학교 및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7년 교편생활을 접고 작품 활동에 전념하면서, 1964년 1월 23일 시내 청춘다방에서 결성된 제주문인협회의 전신 제주문학자협회 결성에도 참가, 희곡분과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당시 선출된 임원은 대표간사 문덕수(文德守)․총무간사 양중해(梁重海)․출판간사 고영일(高瀛一)․사업간사 강군황(姜君璜)․소설분과 김영돈(金榮敦)․시분과 이치근(李致根)․평론분과 강통원(姜通源)․ 희곡분과 최길두․ 수필분과 현용준(玄容駿) 등이다.
이후에도 제주여자중고교 예술제 악극 원작·연출(1962) 등의 경력과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78)에서 「鼎沼岩 花煎놀이」 연출을 맡았다. 특히 1965년 연합신문 주최 희곡 공모에서 입선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시를 썼으며, 시집을 발간한 것은 광복 이후이다. 해방 후 최초의 문학 동인지인『 新生』의 주역으로 제주문학의 디딤돌 역할을 놓기도 했다.
그가 남긴 작품집으로는 시집 無明土』(1989)․『異端의 妖花』·『老期의 流浪』·『異國의 하늘아래서』, 소설집 『海山脈』(1993)을 비롯하여, 『虛無한 사랑이여 이대로 安寧』·『悲戀의 江』, 회고록 『黃昏의 길목에서』(1994), 시나리오 작품집『雪花』· 『비련(悲戀)의 강(江)』·『 素心草』 등이 있고 무용 가극으로 『봄의 頌歌』·『봄을 기다리는 順伊의 집』 등이 있다. 특히 『海山脈』은 이재수난과 제주4․3을 연결 짓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해방 전후, 제주사의 한복판에 서서 생생한 삶을 체험하며, 그 혼란의 역사를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나갔던 제주문학의 증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비밀독서회(秘密讀書會)와 청진단파사건(淸津短波事件)을 경험했고, 해방 후에는 ‘4·3’으로 거센 폭풍에 휘말리기도 했다. 1947년의 3·1절기념 시위사건에 연루(連累)되어 포고령 위반죄로 5,000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제주4·3사건이 발발한 후인 1948년 11월 제주공립농업학교에 감금되었다가 제주도청 상공과장 이인구(李仁九)의 도움으로 풀려나 죽음을 면하였다.
특히 시인 최길두는 제주보통공립학교 동기동창들을 품속에 간직하고 살았다. 노령의 동창회에 참석하여, 한국사회와 제주사회를 흔들던 박충훈· 강재량 ·고범준․ 문종후 ·박진후· 백창운· 김방훈 등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의 장남인 가수 최진은 아남레코드 전속가수와 배호 가요제본부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칠성로를 소재로 옛 추억을 표현한 서정성 짙은 음악「칠성로이야기」로 데뷔했으며, 그가 부른 「해송」 역시 제주바다의 모진 바람을 이겨내는 강한 소나무를 인생의 등불에 비유한 노래다.

-비밀독서회와 청진단파사건

“-너는/ 妖邪스런 魔女에 사랑받는 慘酷의 獸柵/ -醜惡을 좋아하는 구대기의 凱歌/ -冷血動物의 個性있는 世界/ -人爲的인 地獄을 자랑하는 文明의 허울 좋은 鐵面皮의 化粧師/ -世紀의 冒險的인 자랑/ -無錢家의 住家/ 故鄕 잃은 猛虎떼의 우리./ 그리고 無慙한 屠殺場// 오 너희들의 反省없는/ 人面獸心의 얼굴이여/ 또 만나리라/ 나의 巨强한 思想의 鐵馬는// 너희들의 腐敗한/ 鄕愁가 그립단다/ (제주도 淸津事件에서 獨房)”-최길두의 시 「無題 5-監獄」(1943)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으로 어용(御用)은 가중되고, 젊은 학도들은 징병(徵兵)이란 이름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전쟁의 암운은 거칠기만 하였고, 전방은 농무(濃霧)로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콩나물이 시루 속에서 자라듯이 제주도에서 항일청년들의 모임인 비밀독서회가 결성이 되고, 바로 그 중심에 시인 최길두가 있었다.
40년대 초부터 제주지역에서 뜻있는 지식인청년들이 최길두를 중심으로 비밀독서회(秘密讀書會)를 조직, 일어로 번역된 세계사상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조선이 나아갈 길에 대해 토론했다. 회원들이 모였고, 시인 최길두는 회장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당시 제주도는 전략(戰略)의 요새(要塞)로 산과 해안 절벽이 벌집이 되고 있었으며, 불온한 사상이 보이면 가차 없는 투옥이 있을 때였다.
비밀독서회는 일주일에 두 번 모였다. 최길두의 집과 광인청년(狂人靑年)으로 통하는 이상희(李相熙)의 집이었다. 이상희는 머리는 깎지 않고 고슴도치 모양이며, 신발은 짚신에다 너덜한 한복차림이었다. 일경의 눈을 피해 광인으로 분장하고 징용(徵用)을 피하였다.
회원들은 비밀리에 우리 역사책과 세계사상전집, 세계문학전집을 비밀리에 돌려서 읽었다. 모이는 날에는 우애를 도모하고, 전시(戰時)를 논하고, 독립을 기원하며, 읽은 책을 토론했다. 이러면서 지식을 넓히고 사상을 굳혀나갔다.
비밀독서회는 눈치를 살피면서 처음 7명이 결속된 모임이었다. 최길두를 비롯, 이상희․ 김운제(金雲濟)· 김귀석(金貴錫)· 정기준 ․조수인․ 윤한구(尹漢九)등. 한 달에 한 번은 산천단에서 회합을 열었다. 니이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도취하기도 하였다. 최길두와 이상희는 특히 문학으로 우정이 두터웠다. 이상희는 한국전쟁 당시 바다로 끌려가 아깝게도 운명하였다.
“지금의 전황(戰況)은 어떤가? 정말 조선민족이 독립될 수 있을까? 피 끓는 청년으로써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그들의 공통된 과제가 되었다. 당시 일본군대본영(大本營)은 그들의 허위선전을 통하여, 그들의 패배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황군(皇軍)의 대승리를 조선민중에게 선전하고 있었다.
이들 독서회원들은 조선민족의 독립을 갈구하며 이를 위한 국제성세의 상황인식을 위해 비밀리에 단파수신라디오를 구해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李承晩)의 「2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했다.
독서회의 멤버가운데 김운제와 김귀석은 일경(日警)의 감시가 심해지자 모의소령(謀議蘇領)이 가까운 청진으로 가서 불라디보스토크로의 탈출을 시도하다가 함경북도 변경마을에 서 일본군국경수비대에 체포된다. 당시 청진일보와 경기일보는 「不逆朝鮮人一抹打盡」이라는 기사로 자세하게 보도한다. 이것이 바로 청진단파사건이다. 두 사람은 12월 추운 겨울 청진감옥에 수감이 되었다. 모진 고문이 이어지고 이들은 제주도 친구들을 불기 시작했다.
청진경찰서 특별수사반은 급기야 명단을 가지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가장 주목했던 것은 누구의 지도와 사상적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가 바로 시인 최길두였다. 최길두는 형사대의 습격을 받고 제주경찰서에 수감이 되었다. 최길두가 징용을 피하고자 제주보통공립학교 위촉강사로 몸담고 있을 때였다.
청진단파사건은 제주도에 몰아닥친 태풍이었다. 감방은 초만원이었다. 1945년 1월 3일 관련자 12명이 검거된다. 최길두를 비롯 이상희 고영수(高榮洙)․ 김용수(金瑢洙)․ 윤한구(尹漢求)․ 오기윤(吳基允)․고창위(高昌位)․ 추성환 ․이기형․ 이호택 ․고영일․ 박창재(朴昌宰) 등이다. 최길두는 사상범으로 취조가 시작되었다. “너는 조선문학을 한다면서…..”. “너의 지도를 톡톡히 받았어!”, “너의 사상적 지도와 존경하는 선배라 그랬어!”, “소련으로 넘어가려는 계획과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등의 끔직한 취조였다. 물론 고문도 이어졌다.
감방의 하늘은 절망의 하늘이며, 얼굴을 비춰줄 별 하나가 없었다. 목이 타도 목을 추겨줄 물 한 방울이 없었다. 주위는 철책이며 감시하는 호랑이나 사자뿐이다.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가족들이다. 형사는 한쪽에 두 주전자를 들고 와서 책상 위로 두면서 “어서 먹어라”고 윽박질렀다. 감방의 식사는 콩을 넣은 꽁보리밥이며, 찬은 해초에 소금을 뿌린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문학! 그래도 사상? 떠벌이지 마! 졸장부 사나이…….” 최길두는 결국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연행된 윤한구는 청진감옥에서 옥사했으며, 김귀석은 행방은 아직까지 알 바가 없다.
시인 최길두는 「故苑」이란 제목의 시에서 「불러 부질없는 무궁(無窮)의 국토(國土)는/ 悍惡한 倭族人의 鐵槍에 못박혀/ 어두움의 獄處로 못박혀 맡아/ 반만년(半萬年)의 겁이 깃들은 故苑은/ 그 따사로운 모습이 서노니!」라고 그 아픔을 노래했다. 물론 故苑은 사적123호인 창경궁(昌慶宮)을 의미한다. 민족을 사랑하고 항일정신에 눈을 뜬 시인의 독서와 시작업은 오직 민족해방을 염원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나는 解放이 되면서 聽診 외에 별 罪없이 숱한 獄苦를 치렀다. 解放은 다시없는 기쁨이 아니고 한겨레가 다투는 괴로움이었다. 8․15의 解放은 民族의 自由와 기쁨을 안겨주었지만…….단합(團合)을 잃고 右往左往거리는 방황이었다.” -최길두의 자서전 『황혼의 길목에서』81쪽

– 『新生』 탄생과 최길두의 활약

“나/ 벗님의 무덤가에/ 찾아 울어보것만/ 피어 香기는 것 말없는 들꽃/ 限없이 그려 불러 痛哭해도/ 그대 잠자코 먼 곳으로 잠들어라// 彌勒과도 같이/ 碑銘의 차돌 밑에/ 그대 무어라 말이 없어도/ 생각건대 人間도 슬기러워/ 그 이름도 아름다운 < 詩人!>이었던 것을…….// 이제/ 웃음도 가고/ 노래도 가고/ 피고 진 薔薇처럼 그대는 덧없어도// 그대 남긴 寶玉의 노래/ 永遠한 샘인 양/ 끊임이 없을 것을…….// 자거라/ 平安히 黃泉의 꽃그늘에/ 다시 못 올 碑銘이여/ 고-히 자거라(詩人 金以玉을 추도하며)-최길두의 시 「詩人의 碑銘」(1994)

‘제주현대문학 前史’는 김문준(金文準)·김명식(金明植)·김지원(金志遠)·신동식(申東植)·강관순·김이옥(金二玉)·김병헌(金秉憲)·최길두·이영복(李永福)·오본독언(吳本(篤彦)·이시형(李蓍珩) 등 작가중심이다. 1940년대에는 시인 김이옥이 『흐르는 情緖』라는 미간행 시집을 남겼다. 일본어로 쓰인 김이옥의 시는 당대 제주인들의 정서가 잘 반영되어 있다.
시인 최길두는 일제강점기인 1944년 11월 일본에 거주하던 김이옥(金二玉)이 고향을 방문했을 때, 그의 시 47편을 옮겨 적어 유실(遺失)을 막았고 해방 후에는 그를 추도하는 글을 썼다. 김이옥의 작품은 「이여도」·「海女·1」·「海女·2」·「슬픈 海女여」·「나의 노스탈쟈여」·「먼 他鄕에서」·「訪故哀賦」·「옛城에 過去를 묻지 말아라」·「나는 詩人」·「사랑스런 나의 집」 등이 있다.
특히 일제말기 최길두는 일제징용(日帝徵用)을 피하여 전남 장흥군 대덕면 신월리 매형산판(妹兄山坂)에서 숨어살면서 쓴 한편의 사랑시 「山사람들」과, 그 후 매형과 서울로 올라가 돈화문(敦化門)과 창경원(昌慶苑)을 구경하고, 두 편의 민족시(民族詩)를 썼다. 「敦化門」과 「古苑」이 바로 그 작품이다.

“……(전략)……어두운/ 이 터로/ 잠들은 넋이여!/ 그들은 大韓의 老翁이 아니냐/ 부엉이의 울음 속에 꿈꾸는 애들이여/ 너희들은 檀君의 아들이 아니냐/ -싸늘한 문벼개에 來日을 꿈꾸는/ 暗黑한 밤거리로/ 大韓의 魂아// 아무리 歷史는 强者의 손아귀에/ 그 形體를 바뀐다 할지라도/ 여기에 소름 치는 비꼬움의 現實이/ 어찌 詩人의/ 가슴을 잠재우랴!…..(후략)….” -최길두의 시 「敦化門」중에서 .(1942)

“……(전략)…..너의 憂鬱은 이곳에 깊노라/ 나의 괴로움은 여기에 미치노라!/ 오!/ 故苑이여!/ 눈물의 昌慶圓아!/ 멍이 든 너의 悲憤을 말하려마….// 이제/ 强奪의/ 무서운 손톱은/ 함부로 祖國의 자취를 할퀴고/ 一國의 애달픈 運命의 사슬을/ 暗鬱한 살 窓으로 말하는가 보나니/ 터저라고 불러보는/ 白衣民의 國土는/ -다만 鐵柵 안에 짐승만이 우는가….(후략)”- 최길두의 시 「古苑」중에서.(1942)

해방이 되자 국내외 각처에서 활동하다가 귀향한 뜻있는 지식인들이 모여 시사 문제와 문학을 위주로 하는 제주도 최초의 잡지『新生』을 간행했다. 1946년 1월 제주에서 간행된 시사·문예 등을 다룬 종합 교양지이다. 그 중심에 시인 최길두가 있었다. 발행인은 高日昊(필명 高石志)이고, 최길두와 함께 이영구(李永福의 옛이름)․이시형(李蓍珩)․김병헌(金秉憲) 등이 동인으로 참여했다.
『新生』편집 후기에 “우리 고향에서 나온 시인 金二玉 군의 시집 『흐르는 情緖』의 文獻을 이 新生誌面을 통하여 소개된 것이 퍽이나 질겁다.” 하고 있다. 본문에는 “三十을 終幕으로 不幸히도 夭折해 버린” 그에 대한 시평과 추도의 글도 실려 있다. 최길두가 보관하고 있던 시인 김이옥의 시작노트와 제목과 일부 시를 번역해서 실었다.
『新生』은 제주에서 처음으로 발간된 종합 교양지이지만, 잡지 간행 주체에 문학인들이 다수 포함됐고, 잡지 구성에서도 문학 작품의 비중이 절반을 넘었다. 신국판 형태로 발간되었다. 내용은 크게 시사적인 것(논설, 논단 등)과 문학적인 것(시, 소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석지의 「情神革命」과 이일선(李一鮮)의「宗敎社會思潮」, 김종륜(金琮崙)의 「道義의 擁護」등은 완전 독립 쟁취에 대한 기대와 과제 등이 주를 이룬다.
특히 최길두는 이영복과 함께 동인지를 발간하면서 제주문학의 기반을 닦았다. 문학 작품으로는 김이옥·최길두·이영복의 작품들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최길두는 최일(崔一)이란 필명(筆名)으로 시 「廢墟」·「哀貧의 農者」를, KT라는 필명으로「詩人鄕」 등 3편을 발표하고, ‘鄕土詩人 金二玉을 追悼하여’라는 글도 썼다.

“…..(전략)……貧困과 虛弱-飢餓의 埋葬으로 주책없는 눈물을 뿌리치며간 다우 비우시려오! 그래도 여브오/ -주녀의 악몽에서 눈을 뜨구려/ -중책의 의자를 바라보구려/ 떠리진 갈옷과 메마른 골상 북데기의 잠자리 악취의 냄새/ 머리에서 발까지 경멸의 농부들의 주럭난 자태를 그려보구려. 엇떠한 고옥으로 술푼의형제 게우…..(후략)”-최길두의 시「哀貧의 農者」중에서

동인 이영복의 작품으로는 「追憶」·「悔淚」·「憂鬱」 등의 시와 「夜路」라는 소설이 있다. 특히 「夜路」는 해방 직후 제주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그 외에 김병헌(金秉憲)의 「바다의 思索」·김필규(金必圭)의 「田園에서」· 김덕양(金德孃)의 「輓歌」를 소개하고 있다. 김이옥의 유고시 「노스타루쟈」·「生活」·「墓標」등 일본어 작품을 최길두가 부분번역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영복은 1940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제1외국어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년 3개월 만에 중퇴하고 노동자가 되었다. 일본청년문학자협회 회원이 되면서 『靑年作家』 1942년 7월호에 일본어 소설 「畑堂任」을 발표하였다.
이영복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다가 1943년 8월 오사카에서 체포되어 강제 귀국 당하였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濟州民報』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제주4·3 후에 문학 활동을 중단하였다. 제주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작품을 썼으며, 제주 방언을 소설에 처음으로 구사한 소설가였다.
그리고 비밀독서회원 이시형은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소설가이다. 1944년 『國民文學』 8월호에 「이여도」가, 1945년 『國民文學』 2월호에 「新任敎師」가 추천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광복 후 제주농업중학교 교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新生』은 해방 직후 제주 지역의 문화적 역량을 자율적으로 결집한 최초의 성과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다만 『新生』의 주역들이 4·3사건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고 지속적인 활동을 하지 못해 전쟁기에 형성되는 문단 등에서 제외되었다.

“조급히 흐르는 물살에 바위를 두드리면/ 어두운 램프에 떠올라 보인다/ 검은 안색에/ 눈시울 적시고 있는 슬픈 해녀여/ 생명 짧은 처녀이기에/ 멋 부리는 심정에서 사온 치마를/ 벽에 그을린 채 바다에서 지새노라면/ 나오누나 가느다라이 휘파람 한숨”-김이옥의 시「슬픈 海女여」

“해녀야/ 깨어 있느냐// 春三月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바다에/ 비바리 裸身을 내던져// 영차 영차 가는 곳은 어드메냐// 바다 속/ 전복 소라의 나라에/ 주인이사 기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검은 몸뚱이의 풍만함이 애처롭구나”-김이옥의 시 「海女 1」
-제주4․3에 연루되다

“평화의 섬 이 땅에/ 怪毒스런 벌레떼가 侵食한 이래/ 이들의 생활은 어둠으로 방황했다/ 무서리가 까린 虛荒한 들판에서/ < 삶>의 싹이 꺾인 그들에게는/ 다시 캄캄한 虛空 저 멀리/ 彗星처럼 손짓하는 세계가 있다”-최길두의 시 「無明土」에서(1947)

해방이후 잠시 평온했던 제주문단은 1948년 제주4․3사건으로 또 한 차례 거센 폭풍에 휘말리게 된다. 확실한 기준도 없이 말 한마디 잘못하면 소리 없이 죽어가던 시절, 제주문인들이라고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시인 최길두는 계엄사령부에 의해 자신의 시집 『無明土』가 몰수당하고 연행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해방 이후 일제치하의 암울했던 시절을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그린 시집 『無明土』는 그 제목 때문에 대한민국이 ‘어두운 땅’으로 표현했다는 오해를 받았다. 『新生』에 참여한 최길두․ 이시형․ 이일선 등 제주출신 문인들은 제주4․3에도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8‧15 직후 제주에서 최초로 결성된 정당조직은 조선공산당(이하 ‘조공’으로 약칭) 전남도당 제주도(島)위원회였다. 박헌영‧여운형‧백남운(白南雲)이 주도하던 조공‧인민당‧신민당 등 좌파정당은 전통과 이념, 혁명 추진세력의 설정 등에서 각기 독자성을 띠고 그 차이점이 있었다. 1946년 2월에는 통일전선체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을 결성, 제1차 미‧소 공위에 공동으로 대처하기도 하였다.
제주민전 결성식은 1947년 2월 23일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일구락부에서 있었다. 제주민전 의장단으로 남로당 제주도위원장 안세훈, 승려인 이일선(李一鮮), 제주중 교장 현경호(玄景昊) 등 3명이 추대되었다.
『新生』 창간호에 「宗敎社會思潮」를 기고한 이일선이 바로 의장단에 보였다. 이날 제주민전 결성식에서 명예의장으로 스탈린‧박헌영‧김일성(金日成)‧허헌‧김원봉(金元鳳)‧유영준(劉英俊)이 추대되었다.
1947년에 3·1절기념 시위사건이 발발하자 대책위원회가 구성되고, 위위원장에 김용관(金龍寬), 부위원장에 이시형을 선출하였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투쟁 방침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한국전쟁 때 예비 검속되어 수장(水葬)된 것으로 알려졌다.

“< 詩>는 나의 연인! < 生>의 동반자! 광상(狂想)과 명상(暝想)으로 환상시(幻想詩)의 동굴을 찾아 헤매면서……험준한 늪(沼)을 건너면서 오늘을 걸어왔던 인생의 나날…..노기(老氣)에 이르러 1989년 장편시집 『無名土』를 폈으며 젊은 날의 꿈을 거닐었던 『異端의 妖花』도 펴냈던 것이다.”- 최길두의 회고록 『黃昏의 길목에서』 51쪽

시인 최길두는 그의 회고록에서 ‘幻想詩’의 동굴을 찾아 헤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광상(狂想)과 명상(暝想)으로 덧칠한 시인의 환상시는 과연 어떤 시인가? 광상은 미치는 것이며, 명상은 어두운 것이다.
그리고 환상(幻想, fantasy))은 정신분석학 용어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 따르면 과거의 트라우마(trauma)적인 사건을 무의식적 욕망에 따라 현재에 소환하여 재구성할 때 시각적으로 무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자크 라캉(Jacgues Lacan)은 환상이 무의식의 욕망을 시각적으로 무대화하는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정식화를 받아들이고, 동시에 환상의 보호 기능을 강조하였다.
왜 최길두에게 트라우마적인 사건이 소환(召喚)됐을까? 그것은 바로 강압적인 일제 말 비밀독서회 사건으로 빚어진 그 어두운 밑바닥 체험이며, 현대의 최대 비극인 제주4·3사건 당시 소위 유지사건으로 감금된 상태에서 인간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체험 때문이다.
시인 최길두가 그의 회고록 『黃昏의 길목에서』에서 “나는 3個餘月의 죽음의 獨房에서 목숨을 支撑하고 풀려나왔다.”고 고백했듯이, 조국의 해방공간도 시인에게는 풀어나갈 수 없는 막힌 공간이며 또한 한 많은 세월이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해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미군정(美軍政)은 4월 5일 아침 전남 경찰 약 100명을 응원대로 편성해 급파하는 동시에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시령부를 설치하였다. 5월 3일 딘(William F. Dean) 군정장관은 무장대를 총공격해 사건을 단시일 내에 해결하라고 경비대총사령부에 명령했다.
조병옥(趙炳玉) 경무부장(警務部長)은 응원경찰 450명과 수도경찰 최난수(崔蘭洙) 경감이 지휘하는 형사대를 제주도로 보냈다. 이때를 전후해 대거 들어온 응원경찰로 인해 1948년 7월경 경찰병력은 양 2,00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기존 제주경찰 500명, 응원경찰 1,500명). 응원경찰은 ‘제주는 빨갱이 섬’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1948년 11월 중순께, 대규모의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됐다.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미군은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은 계엄령 시행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벌어진 강경진압작전 때에는 서너 살 난 어린이부터 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총살당했기 때문이다.
1948년 가을경 제9연대 본부가 주둔하고 있는 제주농업학교에는 ‘농업학교 수용소에 갇히지 않으면 유명인사가 아니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제주도의 법조‧행정‧교육‧언론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감금돼 있었다. 여기에 시인 최길두도 감금돼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 천막을 쳐서 마련한 수용소는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대기소와 같았다. 제주지방법원의 법원장과 제주지검의 검사가 끌려와 고문을 받는 상황이니 일반 민중들이 끌려와 겪는 고초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제주읍내 주민들의 희생에 큰 역할을 한 사람으로는 송요찬 9연대장 외에 9연대 정보참모 탁성록(卓聖錄) 대위, 제주비상경비사령부 직속 특별수사대 최난수(崔蘭洙) 경감, 제주도 서북청년회 김재능(金在能) 단장 등이 손꼽힌다.
시인 최길두는 수용소 안에서 그들의 만행(蠻行)을 예언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라고 몰아 죽였다’거나 ‘여러 여성을 겁탈했다’는 내용도 시인에게는 너무나 처절하게 들렸다.
그는 “탁성록(卓星祿)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예쁜 여자들만 여러 번 바꿔가며 살았는데 나중에 제주를 떠나게 되자 동거하던 여인을 사라봉에서 죽이고 갔다. 그는 사형권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증언했다.

“허물어진 저 城가 비추는 달은/ 그 옛날에 그 모습 세로웁고나/ 老松그늘 욱어진 芳草 언덕에/ 홀로앉아 옛 노래 불러 보나니// 아름다운 그 時節 그대 목소리/ 아스라이 속삭여 들려오것만/ 따사로운 그 님의 모습은 가고/ 나 홀-로 님의 노래 불러 봄이여// 對答 없이 지새는 달 그림자는/ 아련히도 옛 懷抱 잠겨있는데/ 그 어디에 님의 모습 더듬어 봐도/ 속절없이 달빛만 흘러가누나(1949년)”-최길두의 시「荒城의 追憶」

-어째서 『異端의 沃花』일까

“저만치 落陽이 보인다. 나이 七十七世. .櫓저어 온 航海를 돌아보면 < 삶>이 바다위에 떠오르는 懷古가 아련하다. 一草花꽃 피는 봄이 있었고….草綠 무르익는 여름 있는가 하면…… 紅葉이 물드는 가을도 있었다. 어느 사이 해 저무는 아득한 水平線에 낙양이 보인다.// 오 땀으로 노저어온 人生의 滄浪위에 수없이 떠 흐르는 過去의 殘骸! 嬰兒의 따사로운 亂房이 있었고, 靑春이 불붙는 사람도 있었으며-友情과 貪慾과 情熱을 쫓아 이로 하여금 全紙로 나가 사운 悔恨의 孱骨들………..이제 젊은 날에 썼던 이삭의 < 詩>를 모아 < 落穗幽室>의 시집을 펴낸다. 그 이름도 多情한 『異端의 沃化』, 『怒氣의 流)』. 50年도 지나간 오늘 落照를 기념하는 열매인가 보다. 東京으로 떠나면서……..(제주시 都坪洞) 自宅에서)” –< 落穗有實>의 머리말.

‘< 落穗有實>의 머리말’ 글은 1994년 국학자료원에서 발간한 시인 최길두의 시집 『異端의 妖花)』의 서문(序文)이다. 『異端의 妖花』를 살펴보면 시인은 1937년부터 작품을 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37년에 「絶望」을 비롯하여 「鄕土의 꿈이」·「無心」·「懷鄕」·「懺悔」 등을 1938년에 「思想)」·「故鄕의 노래」·「暮景)」등을, 1939년에 「平生」· 哀戀」·「四行詩」 등을 내놓고 있다.
시인 최길두는 정통 가톨릭 신자이다. 그런데 어째서 시집 제목이 『異端의 妖花』일까? 이단(異端, hersy)은 가톨릭에서 정통학파나 종파에서 벗어나 다른 학설을 주장하는 일이나 교파를 말한다. 어째서 미치고 어두운 환상시의 동굴을 헤맸을까? 또 거기에 어째서 아리따운 꽃일까? 그것은 시인의 본성일 수밖에 없다.
헬라어 원어 ‘하이레시스(hairesis)’의 기본 의미는 ‘선택’(choice), ‘의견’(opinion)으로서 단순히 ‘분파’, ‘파’ 등을 일컫는 경우(행 22:22)와 ‘교회 내에서의 편당’(고전 11:19)을 뜻하는 경우, 그리고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이단’(벧후 2:1) 등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유다인들은 바올로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 있다가 “이런 놈은 아예 없애 버려라. 죽일 놈이다”하고 소리 질렀다.”-신약성서 사도행전 11:22.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진실한 사람들이 사람들이 드러나려면 분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신약성서 고린토전서 11:19.

“전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거친 예언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도 거짓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몰래 끌어 들일 뿐만 아니라 피를 흘리셔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주인을 부인하며 자기 자신들의 멸망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신약성서 베드로후서 2:1.
오늘날 ‘이단’이란 표현은 거의 대부분 복음에서 떠나 다른 복음을 좇거나 교회 내에서 당파심을 불러 일으켜 교회의 분란을 조성하는 경우에 국한해서 사용된다. 참고로, 초대교회 시대 기독교는 당시의 정통 종교라 할 수 있는 유대교에 대해 ‘이단’으로 불려졌다.
세속의 조직에서도 정통적 신조에 대해 이설(異說)을 내세워 파당을 짓는 자를 가리켜 이단이라고 부르며, 한 동아리가 아니라고 보는 것을 ‘이단시(異端視)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시인 최길두는 어째서 굳이 ‘異端’이란 말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하필 ‘ 沃花’일까?

“눈물이여/ 외로움이여// 이브. 아담과 같은 괴로움이여// 사탄의 慾望으로/ 聖架의 眞理를 저버린 헛된 바람// 熱望은 深淵斷崖에서 墮落하고/ 曙光은 거문 獄門을 닫았다// 暗黑한 곳이다/ 울어도 부르짖어도/ 갈 바 없는 獄處다// 이 門을 두들기고/ 저 門을 두들기고/ 오는 것/ 불덩이, 배암, 악귀// 오/ 한줄기 太陽은 어디 있는지/ 地獄으로 헤매는/ 나의 絶望을…..”-최길두의 시「絶望」(1937)

“水精보다도 맑은 純潔의 젖줄/ 사탄 뒤끓으는 地獄으로 하여금/ 人間像의 不幸한 사랑의 나그네.// 가시밭길 흙탕길 죽음길 걸었나니/ 그 이름도 아름다운/ 人類의 십자가여 ”-최길두의 시 「十字架」(1939)

참고문헌

崔吉斗 詩集(1989), 『無明土』, 圖書出版 金烏.
崔吉斗 回顧錄(1994), 『黃昏의 길목에서』, 山有社.
崔吉斗 詩集(1994), 『異端 妖花』, 國學資料院.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2003),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문학전집간행위원회(1996), 『濟州文學全集 1』, 제주문인협회.
두피다아두산백과(2010), 『두산세계백과대사전』, (주)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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